“약한 사람을 도[우라]”
“적자 생존”—강자는 약자의 희생으로 산다. 냉정하고 잔인한가? “아니, 실제로 나무랄 데 없고 유익하다.” 하고 진화론 지지자들은 말한다. 왜냐 하면, 그들은 이것이 진보를 가져온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들 중 많은 사람들도 ‘나찌’ 제 3 공화국이 동료 인간들을 연약하고 불필요한 사람들로 간주하고 이 “법”을 적용하려는 기도(期圖)를 알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약한 사람들이 친절하게 고려되어야 하고, 압제받거나 멸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이와 같은 소름끼치는 사건이 필요한가? 성서에 대하여 진정한 존경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약한 사람에 대하여 단지 수동적이거나 관대하게 대하는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 대하여 예리한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성서는 약한 사람들을 도와 주고 지원해 줄 것을 가르친다. (사도 20:35; 데살로니가 전 5:14) 그러나 다른 권위자들과 기관들도 약한 사람들에 대하여 동정하는 것을 옹호하지 않는가? 그렇다. 그러나 성서는 약한 사람들의 필요에 계속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있게 하는 점에 있어서 독특하다.
약한 사람들을 돕도록 사람들을 자극하는 성서의 힘은 참된 사랑과 겸손과 믿음을 생기게 하는 그 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계속해서 약한 사람들을 돕는 데 이 성품들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강한 사람들과는 달리 약한 사람들은 종종 도움에 대하여 다른 보상이나, 보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14:12-14) 또한 성서는 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은총을 받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킨다. 우리의 불완전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히브리 4:15, 16) 우리가 약점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면, 우리의 약함에 대하여 그분들의 도움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마태 6:14, 15 비교.
약한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견해는 그들을 위한 도움을 방해한다
약한 사람을 돕는 데 생기는 하나의 커다란 장벽은 강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약점에 대하여 보다도 다른 사람의 약점에 대하여 더욱 의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약점으로 생각이 꽉 찰 수 있으며 그 결과 그 사람을 소극적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약한 사람은 도움을 받지 못하고, 강한 사람은 도움을 베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 생활의 탐탁치 못한 많은 환경이 종종 약점 때문일 수 있으므로 비난보다는 오히려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도와 준다.
한 가지 예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성서의 관심이다. 일반적으로 좋은 판단력을 행사하는 데 잘못하여 그런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그대로 거두었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데 대해서 누구나 다소 객관적인 견해를 취할 수 있다. 좋은 판단력의 부족이나 어떤 약점으로 인하여 생길 수 있었던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인정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그의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은 그 점에 대하여 독특하다.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라] ···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또는 ‘가나안’ 땅으로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라].”—레위 25:35-38; 신명 15:7.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결코 탈출할 수 없었으며, ‘가나안’의 소유물을 결코 취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약하였으며 여호와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므로 얼마의 물질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제적으로 약한 형제를 돕지 않아 자기 하나님을 본받지 않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그가 약한 사람에 대하여 취한 행동에 대한 여호와의 보응을 안다면 현명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이다. 만일 움켜 쥐는 행로를 따른다면, 그것은 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비로운 눈을 가졌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행위와 일을 축복하실 것이다.—신명 15:8-11.
초기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물질적 가난 외의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었었다. ‘데살로니가’ 회중에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단지 장로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형제들에게 여러 가지 필요에 실제로 응하도록 책임을 지웠다.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데살로니가 전 5:14) 다른 서한들에서 ‘바울’은 양심에 대하여 약한 자들의 경우를 광범위하게 논하였다. 이들도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로마 14장; 고린도 전 8장) 그렇다, 초기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약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경우를 이해하고 도움을 베풀어야 했었다.
강한 사람이 멸시 받거나, 혹 소외당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이러한 일을 당한 사람이 약한 사람일 때는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겠는가! 대체적으로 약한 사람으로서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다윗’은 그의 생애의 어려운 시기에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다.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 바됨[이니이다.] ···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이다.]” (시 31:9-15) 그의 형제들이 그를 도우러 오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를 피하는 것을 보았다. ‘다윗’은 오로지 하나님 만이 도움을 베풀고 계심을 느꼈다.
무엇이 이러한 식으로 약한 사람을 대하게 만들었는가? 한 가지 원인은 약한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끼치도록 우리가 허용한 다른 사람의 어떤 부정적인 견해일 수 있다. 약점을 악과 혼돈시키는 것은 또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 두가지 면에서 잘못을 범한 것 같다. 그들이 단순한 약한 사람들이 아니라, 죄인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과 시간을 보내는 예수에 대하여 불평했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 9:12, 13; 마가 2:17.
심지어 제명 처분을 고려해야 할 때에도 이 사람이 참으로 악한가, 혹은 단순히 약한가? 하는 질문을 고려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약함 때문이라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꾸준히 나타낼 때 그 사람은 좋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잘못한 사람에게 어느 정도까지 도움을 베풀어 왔는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그의 행로를 바꾸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그 사람의 마음에 도달하도록 베풀어질 수 있었는가?
개인의 관심사가 중요하지만, 회중에 미치는 그의 행동과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입장 역시 중요하다. 만일 장로들이 회중에서 악을 제거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고린도 전 5:6-13) 한편 조급하거나, 사랑이 없이 혹은 분별력 없이 문제가 다루어 질 수도 있다. 만일 그 결과로, 해가 그의 악함 때문이 아니라, 약함 때문에 죄지은 개인에게 미친다면, 이것은 또한 회중에도 해를 입히고,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입장에도 불리하게 영향을 미친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걸어 가게 하기 위해서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인이 이 점에서 노력함에 따라 진정한 약점을 식별할 뿐만 아니라, 그 때에 가장 필요로 한 도움과 충고와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도 그의 지각력이 증가한다. (히브리 5:14) 만일 그 문제에 대한 그의 노력에서 잘못했다면, 그것이 친절과 자비를 나타내는 데 실수한 때문이어서는 안된다.—시 25:6, 7; 51:1; 야고보 2:13; 유다 22, 23.
그러므로 젊은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 우리의 반응은 어떠할 것인가? 우리가 그들을 즉시 비난하는 대신에 그들을 도와 주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어떤 사람이 회중내에서 심각한 실수를 저지를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하여 바치는 우리의 노력을 배가하는가? 이것은 형제들 사이에서 그 사람의 실수를 화제거리로 삼는 것보다 훌륭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대화가 다른 사람의 약점에 돌려질 때에 토론의 방향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그것은 얼마나 사려 깊은 일인가! 아마 그 문제에 있어서 베풀어질 수 있는 도움을 고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하고 영감받은 잠언은 말한다.—잠언 17:9; 11:13.
어떻게 약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가?
돕고자 하는 정신을 갖는 것, 경멸하는 식으로 약한 사람을 보지 않는 것이 그들을 돕는 데 으뜸가는 필수 조건들이다. 다음에 우리는 기본적인 문제들을 확인하고자 해야 한다. 고독한가? 이해 부족인가? 가정에 사랑이 전혀 없는가? 경제적 긴장이나 개인적 실망인가? 쇠약해지는 건강이나 나이 많아 쓸모 없다는 느낌인가? 이 질문들은 약한 자들에게서 힘을 앗아가는 원인이 될 수 있는 몇 가지의 가능성있는 점들에 불과하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성서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갖는 것이 또한 필요하다. 개인의 생활 환경을 주의깊이 고려하고 온정과 진심에서 우러나온 방문은 기본적인 어려움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약한 사람을 돕는 데 진실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본을 그들의 지침으로 삼는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냐]?” (고린도 후 11:29) ‘바울’은 모든 사람을 동정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느낌을 반영하였고, 그들의 고통을 심려하였다. 어느 정도로? 사도행전 20:35의 그의 충고로 판단해 볼 때, 그의 연민은 확실히 친절한 말을 능가하였다.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우라.]” 그는 사도 ‘요한’의 후기 훈계의 정신으로 약한 사람에 대하여 좋은 반응을 보였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 1서 3:18.
약한 사람을 돕도록 강력히 권고하지만 성서는 개개인이 어떻게 도움을 베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러한 교훈이 얼마나 광범위하든지 간에 결코 모든 환경을 다 고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가 약한 사람들에 대하여 참되고, 인정있는 동정심을 발전시킬 것을 확실히 알려 준다. 우리는 그들의 필요에 응하여 행동해야 한다. 이 교훈은 단순하고 보편적이지만, 올바른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독특한 결과를 가져온다.
회중과 연합하고 있는 각자가 소중하다
회중에 있는 모두는 회중의 각 성원들의 소중함을 인정하고 약한 사람을 돕는 책임을 이행하도록 격려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어떤 성원이 약하여 도움을 받아야만 할텐데, 그가 무슨 실제적인 가치가 있는가? 그는 회중에 대하여 오히려 부담이 되지 않는가? ‘바울’은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자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느니라.]” (고린도 전 12:22-25) 모든 성원들을 귀중하게 여기고, 그들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수행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활동을 소중히 여기는 회중은 따뜻하고 행복한 회중이며, 생기가 충만하다.
약한 사람을 돕는 데 바치는 노력이 어떤 성과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하여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전도 11:6) 특히, 우리가 영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에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할 수 있다. 오늘날 여호와의 훌륭한 종들 가운데 그들이 약했을 때에 지속적인 영적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약한 사람이 갑자기 강해질 수는 없다. 마치 신체적으로 약한 사람의 회복이 느릴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이가 영적으로 강하게 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약한 사람들에 대하여 인내하는가? 우리는 그들이 강하였을 때와 다름 없이 그들을 정말 사랑하는가? 이와 같은 사랑이 표현될 때, 모두에게 훌륭한 축복이 이르게 된다! 약한 형제들은 그의 어려움에 대한 보살핌과 후원으로 축복을 받는다. 강한 형제들은 오로지 주는 데서 더 큰 축복이 온다는 것을 인정한다. 전체적으로 회중은 각 성원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심을 나타냄으로 끊임없이 자라가는 온정을 경험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지상의 종들 사이에서 그분들의 비길 데 없는 도움이 약한 사람들에게 반영될 때 그분들에게 영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