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기록되었는가?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1. 격려를 필요로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까? 흔히 어디서 격려를 받을 수 있읍니까?
당신은 자신이 흔히 격려를 필요로 한 때에 하나님의 보고(寶庫)인 성서의 진리가 개인적인 시련이나 문제들을 직면하도록 힘을 준 것을 체험해보지 않았읍니까?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모두가 이러한 일을 체험한 것 같습니다.
2.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러 해에 걸쳐서 어떤 실망적인 일을 당해왔읍니까? 그러한 일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설 수 있었읍니까?
2 예를 들면, 오늘날도 반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멸시하는 말을 하고,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진리를 고수한다고 하여 폭력을 행사할 때에 실망을 느끼는 일이 많습니다. 50 혹은 60년 전부터 참 그리스도교와 연합해온 사람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에, 이웃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불친절한 언사나 행동을 한 일을 잘 기억할 것입니다. 경멸적인 말로, ‘럿셀파’ 또는 ‘천년기 새벽파’라고 불리운 때가 많았읍니다. 구타하고, ‘타르’를 바른 위에 깃털을 붙이고, 투옥하고, 욕설을 하고, 매질을 하고, 침을 뱉고 하는 일도 있었읍니다. 이 모든 일을 당하면서도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일을 계속하였읍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읍니까? 어느 정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이 악한 날에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에 의해 인쇄된 간행물을 통하여 이해와 격려와 힘을 받았기 때문이었읍니다.
3. 성서를 읽을 때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3 여호와의 종들을 격려하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서의 여러 책들을 읽을 때에 우리는 그 책과 필자에 관한 배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왜 그렇게 기록되었는가?’ 하고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4. 성서의 어느 책에 특히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킬 것입니까?
4 성서에 들어 있는 책 한권을 예로 들어서 왜 그 책이 그러한 체제로 쓰였으며, 그러한 논증이 사용되었는가를 알아보겠읍니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보겠읍니다. 그 책은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히브리서」라고 불리웁니다. (히브리 13:22) ‘바울’이 그 편지를 쓰던 당시 천 구백년 전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백성을 강화하고 위로하기 위해 왜 그렇게 기록하였는가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제1세기 사람들의 견해
5. 기원 61년경 ‘예루살렘’의 종교 상태는 어떠하였읍니까?
5 기원 61년경, ‘예루살렘’ 도시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봅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 밖에서 형주에 달려 돌아가신지 28년쯤 지났읍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도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루살렘’은 멸시받던 ‘나사렛’ 예수의 시대를 견디어난 것 같았읍니다. 주장인즉, ‘유대’인들의 종교가 자기네 조상 ‘아브라함’까지 소급하는 역사 깊은 종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영적 지도자 ‘랍비’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읍니다. 그들은 영예와 권위를 받고 있읍니다. 그들은 스스로 ‘모세’의 자리를 찾이하고, 식탁에서 상좌에 앉고, 회당에서 앞자리를 찾이하며, 시장에서 인사를 받으며, 사람들로부터 “랍비”라는 칭호를 받고 있읍니다. 그들은 과연 그 당시의 종교적 권력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읍니다.—마태 23:6, 7.
6. (ㄱ) 그 도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유대’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보았읍니까? (ㄴ) 여러 해 전 사도 ‘바울’은 그 도시에 있었을 때에 어떤 일을 당하였읍니까? (ㄷ) ‘예루살렘’에 사는 소수의 그리스도인 집단은 무엇을 크게 필요로 하였읍니까?
6 또한 ‘예루살렘’ 도시에는 그리스도교 또는 “도(道)”라고 불리우는 미움받는 종교에 속한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있읍니다. (사도 9:2; 19:9; 22:4) 그들은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있읍니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며, 욕을 당하고 있읍니다. 더더군다나 그들은 주로 ‘유대’인 출신이기 때문에 ‘유대’교를 버리고 “소위”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의 추종자가 되었다 하여 배나 미움을 받고 있읍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어찌나 강한지 사도 ‘바울’이 수년 전에 그 도시에 있었을 때에 그가 성전에 나타나기만 하였어도 폭동이 일어나 종교성이 강한 ‘유대’인들은 목청을 다하여,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고 외쳤읍니다. (사도 22:22) 40여명의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바울’을 없이하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기로 결의하였읍니다. (사도 23:12-15) 이와 같은 종교적 광란과 그리스도인들의 대한 증오의 분위기 속에서 회중은 살아나가고 전도하고 믿음을 고수해야 하였읍니다. 그들이 다시 ‘유대’교로 빠져들어가서 ‘모세’의 율법을 따르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격려와 그리스도의 대한 건전한 지식과 이해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율법을 이루신 사실에 대한 이해 등을 심히 필요로 하였읍니다. ‘바울’은 분명히 그들에게 필요한 점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는 그들이 당하고 있는 역경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읍니다.
7.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항하여 제시하였을 듯한 주장 몇가지를 말하십시오.
7 그들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였던 주장과 반대를 잠간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 보기에는 미움받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하여 ‘유대’인들과 상대하시지 않았읍니까? ‘모세’의 책은 이렇게 알려주고 있읍니다.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모세’]에게 나타나시니라.” 후에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사자[천사]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라.]” (출애굽 3:2; 23:20) ‘유대’인들은 ‘모세’가 하나님과 직접 이야기도 하였다고 뽑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소와 지성소를 갖추고 있는 웅장한 성전이 있었읍니다. 뛰어난 그 아름다움, 그 위력, 그 공고한 기초를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또 다른 것으로, ‘유대’인들의 제사 직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레위’ 지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직계입니다. 대제사장은 이 특별 혈통의 후손이었읍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주신 율법 언약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행되는 보좌의 도시였읍니다.
8, 9. (ㄱ)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와 그의 추종자들을 어떻게 멸시하였을 것입니까? (ㄴ) 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검소한 집회 장소를 무엇과 비교하였을 것입니까?
8 이제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있읍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의 보기엔 그리스도인들은 비교컨데 아무 것도 없었읍니다. 그들의 지도자 예수는 죽었고 그것도 일반 죄인들 처럼 죽었읍니다. 또 그는 어떤 사람이었읍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에 관한한 예수는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읍니다. 그는 비천한 목수의 아들이었으며, 그것도 ‘나사렛’ 출신이었읍니다. 교육면에 있어서도 예수는 ‘랍비’의 고급 학교에서 공식 교육을 전연 받지 않았읍니다. ‘유대’인들의 견지에서는, 그들의 스승들과 교육자들이 알고 가르친 점들에 비할 때에 예수는 지식과 그 교육이 부족하였읍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 중에도 유식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읍니다.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어부들, 세리들, 심지어 이방인들까지 있었읍니다. 그 이방인들은 분명코 ‘유대’ 지도자들 보기에는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이 아니었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조금인들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관계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겠읍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다락방이나 기타 허술한 곳에 모였으나 ‘유대’인들은 집회 장소로 아름다운 성전이 있었읍니다.
9 틀림없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할 때 이러한 주장과 기타 많은 주장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격려를 심히 필요로 하였고 상태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읍니다.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알고 위안과 도움을 주어야 하였읍니다!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우월하다는 논박
10.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그러한 문제들을 누가 알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그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쓰도록 누가 영감을 받았읍니까?
10 물론,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처지를 알고 계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영감을 주시어 그들의 환경에 관심을 갖게 하셨읍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를 하였읍니다. 「히브리서」에는 원수들이 틀림없이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하였던 비난에 대한 대답의 말이 들어 있읍니다.
11, 12. (ㄱ) ‘바울’은 이제 어떤 논증을 하였으며, 그것은 왜 적절하였읍니까? (ㄴ) ‘바울’은 예수께서, 천사들에 비해서, (ㄷ) 그리고 ‘모세’에 비해서 더 우월함을 어떻게 설명하였읍니까?
11 ‘바울’은 바로 ‘유대’인들의 주장 그 자체를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인 제도와 그리스도인 제사직이 ‘유대’교에 비해서 우월함을 설명하고 있읍니다. 이러한 설명은 중요하였읍니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읍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유대’교 지도자들의 주장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반대 주장, 곧 사실에 대한 진상을 설명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의 공격 비난이 거짓임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 전달된 것은 사실이었읍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주 예수와 비할 때에 어떻습니까? ‘바울’은 히브리 1:4-6에서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그[예수]는 천사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이름을 물려 받으셨읍니다. 그는 그만큼 천사들보다 훌륭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일이 있읍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일이 있읍니까? 그러나 그의 맏아들을 세상에 들여보내실 때에는 ‘하나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를 경배하라’ 하고 말씀하셨읍니다.” (새번역) 그러니, ‘바울’은 천사들은 종들이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12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더불어 직접 이야기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어떠합니까? 그것이 중대한 일이었음에는 의심이 없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바울’은 이렇게 썼읍니다. “집보다 집을 지은 사람이 더 큰 영광을 차지하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으로 인정되셨읍니다. ··· [모세]는 섬기는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집 전체를 위한 일에 신실했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드님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신실하게 다스리셨읍니다.” 여기서 ‘바울’은 결과적으로 ‘형제들이여, 집안에서 ‘모세’와 같은 섬기는 일군이 더 큽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집 주인의 아들이 더 큽니까?’ 하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문제를 이렇게 이해하였을 때에 얼마나 힘을 얻었겠읍니까!—히브리 3:3-6, 새번역.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우월성
13. (ㄱ) ‘예루살렘’의 물질적 성전보다 무엇이 더 낫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는 어디에 계셨읍니까? (ㄴ) ‘바울’은 ‘아론’의 제사직과 비교할 때에 그리스도의 제사직의 우월성을 어떻게 설명하였읍니까?
13 이제 ‘바울’은 다른 논증 곧 ‘예루살렘’에 있는 아름다운 물질적 성전에 대한 논증을 계속하였읍니다. 그 성전은 과연 아름답고 값진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비할 때 그 물질적 성전이 무슨 가치가 있겠읍니까? 기원전 11세기에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 첫 번째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한 사람은 ‘솔로몬’ 왕이었읍니다. 그 성전 봉헌식 때에 그는 여호와께서 사람이 만든 건물에 실제 거처하시지 않는다고 말하였읍니다. 그가 성전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용납지 못한다고 말하였읍니다. (열왕 상 8:27) 그러므로 하늘, 여호와의 계신 곳에 간다는 것은 지상의 어떤 성전에서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웅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록하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어 그의 아버지 여호와의 계신 곳에 가셨다고 하였읍니다. (히브리 4:14, 새번역) 그리고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던 ‘아론’ 계통의 제사직에 관해서도,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제사직과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제사직은 ‘멜기세덱’의 모양을 따른 것이기 때문에 훨씬 우월하다고 설명하였읍니다. ‘바울’은 히브리 5:5, 6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읍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제사장이 되신 영광을 스스로 얻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지위를 잇는 영원한 제사장이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새번역) 그렇습니다. 그 영원한 제사장, 그것은 죄있는 육체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에 의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말은 히브리 7:19-22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했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읍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제사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맹세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 그러나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그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분의 맹세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후계자가 필요없이 계속하시는 점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에 이렇게 말하고 있읍니다. “또한 [‘유대’ 율법 하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그 직무를 계속할 수 없어서 그 수가 많아졌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원히 계신 분이므로 그의 제사장직은 갈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읍니다. 그것은 그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보자의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 7:23-25, 새번역.
14.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의 우월성에 관한 설명이 그 편지를 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만한 격려를 주었을 것인가를 설명하십시오.
14 확실히 이러한 말들은 사랑하는 사도 ‘바울’이 그들의 그리스도인 신분을 강화하고 믿음에 굳게 머물도록 돕기 위해서 준 강력한 논증이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읍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여호와의 하늘의 성전에 일하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의 우월성을 설명하였읍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가적인 논증을 제시하면서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였읍니다. 그는 주 예수의 희생 제물을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이 바치는 희생 제물과 비교하였읍니다. 제7장 26절부터 2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에 합당합니다. 그것은 그가 거룩하고 악과 흠이 없고 죄인들과 구별되시며 하늘보다 높이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고, 다음으로 백성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는 없읍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바치심으로 단번에 이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불완전한 인간을 대제사장으로 세웠지만 율법 이후에 온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신 아드님을 대제사장으로 세웠읍니다.” (새번역) 이러한 말이 ‘예루살렘’에 있는 신실한 사람들에게 얼마만한 격려를 주었겠는가 생각해보십시요. 그렇습니다. 인류를 위해 자신의 완전한 생명을 바치신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맹세에 의하여 지금 후계자가 없는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읍니다.
새 언약이 낡은 언약을 폐하다
15. 히브리 8:7-13에 있는 더 나은 언약에 관한 ‘바울’의 주장은 무엇이며, 낡은 언약에 관한 논리적인 결론은 무엇입니까?
15 ‘바울’은 이제 계속하여 다른 논증을 전개합니다. 그것 역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으로서 ‘모세’가 중보 역할을 한 율법 언약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지상에 있는 신실한 자들 사이에 중보 역할을 하신 더 나은 언약을 비교 설명하였읍니다. 히브리 8:7-13에 있는 ‘바울’의 논증을 살펴보십시오. (새번역) “그 첫 번째 계약이 흠이 없는 것이었더라면 둘째 번 것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첫째 언약이 흠없는 것이었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의 집으로 더불어 새 계약을 맺을 것이다. ··· 그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붙들고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던 날에 그 조상들과 맺었던 계약과 같은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그날 이후에 ‘이스라엘’ 집과 맺을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내 율법을 그들의 생각에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바울’은 또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새 계약’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첫 번째 계약은 낡은 것으로 만드셨읍니다. 낡아지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예레미야 31:31-33 비교.
16. 이제 누가 의기양양해야 할 이유가 있었읍니까? 누가 실망할 이유가 있었읍니까? 왜 그렇습니까?
16 “낡아지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라고 한 이 말이 얼마나 격려를 주었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슬픔과 침울함을 그치고 기뻐할 자가 누구였겠읍니까?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읍니다. 그들은 낡은 언약 곧 율법 언약을 대치한 언약에 고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슬퍼하고 침울해야 할 자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항해서 싸우면서 뽑내는 종교인들이었읍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관계하시는 방법이 아니었읍니다. 하늘의 영광으로 부활되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고 더욱 영속적인 약속에 기초한 새롭고 더 나은 언약을 중개하셨으며, 더욱 귀중한 희생 제물 곧 자기 자신의 흘리신 피를 통하여 그것을 유효하게 만들었읍니다.
하늘의 ‘시온’ 산에 왕국이 설립되다
17. (ㄱ) ‘모세’가 율법 언약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나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나갔읍니까? (ㄴ) 하늘의 ‘예루살렘’은 지상의 ‘예루살렘’에 비할 때에 어떻습니까?
17 왕국 권리가 ‘유대’인들에게 속해 있으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시되는 하나님의 도시라고 하는 주장에 대하여는 어떠합니까?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이 주장을 어떻게 다루었읍니까? 매우 흥미롭게도 그는 12장 18-27절(새번역)에서 그의 주장을 이렇게 시작하였읍니다. “여러분이 향해 나간 곳은 만질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어두움과 침침함과 폭풍에 싸[인] ··· ‘시내’ 산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 언약을 받은 고대 ‘시내’ 산에 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질 수 있는 곳, 불길이 타오르는 곳에 나간 것이 아니었읍니다. 22절부터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향하여 나간 곳은 ‘시온’ 산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 곧 그들의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 하나님과 ··· 새 계약의 중보자 예수 ···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들은 권력과 정부의 참다운 터전, 지상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 하나님과 수많은 천사들과 장자들의 회중과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앞에 나간 것입니다. 이런 것과 비교하면 지상의 ‘예루살렘’, ‘시내’ 산 그리고 성전과 ‘유대’인들의 제사직은 아무 것도 아니었읍니다.
18. (ㄱ) 하늘의 ‘예루살렘’은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입니까? (ㄴ) 지상의 ‘예루살렘’은 이미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또 두번째로 당할 것이었읍니까?
18 그리고 그 ‘시온’ 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은 기초가 얼마나 견고하고 튼튼하며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입니까? 우리를 의심 가운데 버려 두지 않고 ‘바울’은 이렇게 부언하였읍니다. “이렇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깁시다.” (히브리 12:28, 새번역) 지상의 ‘예루살렘’은 기원전 607년부터 537년까지 70년 동안 심하게 흔들렸고 또 멀지 않은 장래에 ‘티투스’ 지휘하의 ‘로마’ 군인들에 의해 또 흔들릴 것이지만, 그 하늘의 왕국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19, 20. 이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였으며, ‘바울’은 자기의 논증을 누구에 맞게 기술하였읍니까?
19 ‘바울’의 말은 그 초기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었겠읍니까! 19세기가 지난 현 20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 말씀은 살아 있고 의미심장합니다.
20 그러므로, 반대하던 ‘유대’교인들이 오랜 역사, 물질적 재산, 권력, 웅장한 의식, 행사 및 이 세상적 지혜에 의지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보증된 기대, 보이지는 않으나 실체에 대한 명백한 증거, 곧 믿음에 있어서 성장해야 하였읍니다. 그 편지가 기원 61년경에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과연, 영원한 축복을 누릴 생명에 이르는 “도”가 그들 앞에 분명하게 나타났읍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의 편지를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논리와 이론에 부합되게 그리고 그들을 믿음에 세움을 입도록 썼읍니다.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말은 마찬가지로 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위안이 됩니다.
21. 이상 설명된 바와 같이 우리는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을 기를 수 있읍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21 성경에서 온전한 유익을 받기 위해 우리는 왜 그런 식으로 기록되었는가를 인식할 필요가 있읍니다.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유익하다’」 및 기타 간행물의 도움으로, 우리에게는 성서의 각 책이 어떻게 하여 그리고 왜 그렇게 기록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지식의 보고가 있읍니다. 그러한 광범한 견해를 가진다면 우리는 정녕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선한 일을 수행할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 「히브리서」를 가지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다른 65권에 있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장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이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실로 적절합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 가운데서 행하여 ··· 여러분이 그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온갖 선한 것으로 여러분을 완전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히브리 13:20, 21,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