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가?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디모데 후 1:12.
1. 고대 ‘이스라엘’의 어떠한 상태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지 자문해 보게 합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물론이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읍니까?’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외면상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2,700년 전에 ‘호세아’라는 예언자는 우리로 하여금 잠간 멈추어 ‘나는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가?’ 하고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읍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 관계에 있을 때에 그 나라에 살고 있었읍니다. 틀림없이 ‘이스라엘’ 자손 대부분은 하나님의 이름이 문자적으로 “그는 되게하다”라는 뜻을 가진 여호와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확실히 그들은 그들의 국가 발전에 하나님께서 이바지하신 역할을 알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들이 이렇게 그들의 창조주를 친숙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호세아’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음이라].”—호세아 4:1; 또한 요한 7:28 비교.
2, 3. (ㄱ) 누군가를 참으로 아는데는 무엇이 내포되어 있읍니까? (ㄴ)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것은 왜 중요합니까?
2 그러니 이들 ‘이스라엘’ 자손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알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의 이름이나 알고 그 사람의 이력이나 그의 기호를 얼만큼 아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3 당신은 하나님에 관하여 얼마나 참으로 알고 있읍니까? 당신이 아는 바에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걸겠읍니까?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식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배척받았으며, 오늘날 하나님에 관한 참다운 지식을 배척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느끼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형벌을 주”실 때는 가까왔읍니다.—데살로니가 후 1:8; 요한 17:3
4. 하나님에 관한 무지가 어떻게 명백해집니까?
4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세아’ 시대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배척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호세아’는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 자손의 무지에 대하여 한탄한 후에 그들의 명백한 무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읍니다.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호세아 4:2)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으로써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알 수 있읍니다. 한 그리스도인 필자는 이 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읍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요한 1서 1:5에서 언급한 하나님]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 1서 2:3, 4)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나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당신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5. 지식은 어떤 면으로 우리의 창조주에 대한 확신을 길러 줍니까?
5 하나님에 관한 정확한 지식은 하나님을 완전히 확신하고 의지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시편」 필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10) 하나님의 “이름” 곧 그분의 성격과 평판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거짓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이나 하신 말씀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즉석에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렇께 하시는 데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을 압니다. 당신에게 그분이 좀 느린 것 같이 보일지라도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읍니다. 기원 제 1세기에도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썼읍니다. “주[여호와]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 후 3:9) 하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참을성이 있으시며,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성급합니다.
장로들이여,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가?
6. 장로들은 불완전에 관한 하나님의 견해를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읍니까?
6 그리스도인 회중의 장로들 곧 감독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를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다루므로 나타낼 수 있읍니다. 한 예로써 장로들이 그들의 형제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고려해 봅시다. 그들의 태도는 여호와의 견해를 반영합니까? 다음과 같은 「시편」의 기록을 유의하십시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허물, 신세]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 130:3) 그러므로 창조주께서는 흠을 찾아 다니시는 분이 아니며 혹평하는 분이 아닙니다. 인류에 대한 여호와의 견해의 일반적 경향이 「시편」에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읍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흠을 찾아 내려고, 신세]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허물, 신세]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8-14) 형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러한 사실들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반영합니까?
7, 8. 양떼에 대한 장로의 지식은 어떻게 회중을 유익하게 합니까?
7 그렇다면 장로들은 양떼의 형편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가 없읍니다. 그들은 마땅히 영적 목자로서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는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잠언 27:23) 그러면 장로들은 양떼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호와께서 하시는 바와 같이 그들은 사람들의 장점을 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행한 좋은 점들을 인정하고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격려적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본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통하여 주신 충고에 일치한 것이 아닙니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 4:29, 32; 갈라디아 5:22, 23; 히브리 10:24, 25; 데살로니가 전 5:14, 15.
8 또한 그들은 회중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읍니다. 아마 연로한 분들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지장을 주는 어려움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아마 실망 상태에 있으며 그러므로 격려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집회에 빠지거나 다른 면으로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게을러지는 사람들이 있읍니까? 집회에 참석하거나 야외 봉사에 나가는데 혼자서 위험한 곳을 지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읍니까? 청소년들을 사용해서 다른 청소년들을 야외 봉사에서 돕고 신권 전도 학교를 위하여 연설을 준비하는 데 돕게 할 수 있읍니까? 그들에게 왕국회관과 관련된 여러 가지 책임을 줄 수 있읍니까? 장로들은 형제들의 영적 생활에 영향을 미칠 만한 자세한 모든 일에 깨어 있으며 최선을 다하여 도우려고 합니다. 그들이 함께 모이면 이러한 점들을 토의합니다.
9. ‘이스라엘’ 자손들은 인간 왕을 요구하는 데 대한 여호와의 충고를 받아들였읍니까? 그들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읍니까?
9 그러나 어떤 회중 성원이 영적 난관을 자초할 것 같은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장로들이 느끼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한 경우를 모른 체 하는 것이 친절의 표현입니까? ‘이스라엘’이 인간 왕을 요구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다루신 방법은 그러한 입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인간 왕을 가질 경우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인가를 명백히 경고하셨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막지 않으셨읍니다. 그들의 요구는 사실상 여호와를 배척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충고를 무시하고 고집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시지 않고 그들이 멸망된 때까지 계속 그 민족에게 호소하셨읍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이러하심을 앎으로 충고를 무시하는 사람들이라도 이와 비슷한 참을성을 가지고 다룹니다.—사무엘 상 8:4-22.
10. 충고를 거절하는 사람에 대한 감독자들의 올바른 견해를 설명하십시오.
10 회중 성원 중 어떤 미혼자가 믿지 않는 이성과 친밀한 교제를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장로들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을 실제 여호와의 법을 범하는 것임을 보여 줌으로써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를 설명하는 적절한 성경적 충고를 할 것입니다. 충고가 무시된다 할지라도 장로들은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인 회중에 속해 있는 한, 사랑으로써 그러한 사람을 돕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장로들은 그들의 훈계가 무시된다 할지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며, 동시에 결국에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는 것이 사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디도 1:9; 갈라디아 6:5.
11. 효과적인 충고를 하기 위하여는 어떠한 특성이 매우 중요합니까? 예를 드십시오.
11 충고하는 점에 있어서 여호와의 본으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읍니다. 즉 친절해야 하고, 슬기로워야 하되, 명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고를 받는 사람이 틀림없이 요점을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 부부에게 충고해야 할 경우가 일어난다고 합시다. 아마 부부가 불화해서 한 장로의 도움을 요청할 경우일 수 있읍니다. 그 장로가 첫째로 해야 할 일은 부부가 합석한 가운데 양편 이야기를 듣는 것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도움을 구하였을 때에는 언제나 그들의 말을 들으셨읍니다. 장로는 흔히 그의 관심을 이끈 것은 단순히 문제의 증세 뿐이고 문제의 근원은 좀더 기본적인 것, 성에 대한 그들의 견해같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마 아내는 성은 단순히 필요악이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받는 성적 관심을 싫어하는 경우일 수 있읍니다. 혹은 남편이 아내의 감정적 경향을 고려함이 없이 지나치게 성적 요구를 하는 경우일 수 있읍니다.
12. 결혼 부부에게 더 균형잡힌 관계를 갖도록 돕기 위하여 요점잡힌 성경적 충고를 어떻게 할 수 있읍니까?
12 이제 만일 장로가 이 부부에게 여호와께 기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절망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것이며, 이제 여호와께서는 그의 말씀으로부터의 충고와 사랑에 찬 장로의 도움을 통하여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려고 하실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장로는 일단 문제가 완전히 밝혀지면, 이제 성경적 충고를 할 것입니다. 그는 요점을 회피하지 않고 그 문제를 명백히 다루는 성경으로 갈 것입니다. 그는 아마 첫째로 남편이 성적 욕망을 가진다고 해서 불순하게 느껴서는 안되며, 결혼한 부부 사이의 그러한 관계는 건전한 것임을 설명해 줄 것입니다. 물론 균형잡힌 성 생활을 위하여는 남편에게 자제와 고려가 필수적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요점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혹은 더 자세한 점들이 지적될 것입니다.—창세 1:28; 잠언 5:15-19; 고린도 전 7:3-5; 13:4, 5; 갈라디아 5:22, 23; 베드로 전 3:7.
13. 성경으로부터 베푼 충고가 실천되지 않을 때, 장로는 실망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이제 부부가 그들의 성 생활에 있어서 혹은 문제가 된 다른 점에 있어서 그러한 성경적 훈계를 따르기를 원하는지의 여부는 그들에게 달려 있읍니다. 하지만 장로는 여호와의 도움으로써 자기가 올바른 지도를 할 수 있었고,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었음을 기뻐할 수 있읍니다. 물론 장로들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를 할 때에는 관련된 성경적 원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솔직해야 합니다.
14. ‘아합’ 왕과 관련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 것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가치를 알려 줍니까?
14 장로들이 하나님에 관한 참다운 지식을 가졌음을 나타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읍니다. 그것은 그들이 회중 성원들의 견해를 들어보는 방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이든지 다루는 방법을 아시고 계시고 언제나 잘 처리된 일들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충실한 ‘아합’ 왕을 다루실 때 여호와께서는 ‘아합’을 다루시는 데 관하여 천사들에게 그들의 견해를 말하게 하셨읍니다. 우주의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조언을 필요로 하시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들으셨읍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들으신 일도 있읍니다. 장로가 회중의 의향을 알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무엇이겠읍니까? 이것은 잘 듣는 장로로 얼마나 더 효과적인 스승이 되게 하겠읍니까!—열왕 상 22:19-22; 창세 18:22-33; 잠언 21:13.
회중 성원 모두는 하나님을 알 필요가 있다
15. 그리스도인들은 왜 의심하는 일을 피해야 하며, 어떻게 그것을 피할 수 있읍니까?
15 우리가 이 제도의 결말이 가까와 옴을 봄에 따라 인내하고자 하는 모두는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을 잘 알지 않는다면 우리는 쉽게 의심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읍니다. 헌신하고 침례받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읍니다. 보통 (1) 여호와의 주권, (2) 왕국 혹은 (3) 대속과 같은 기본적 성서 진리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사소한 일에 염려를 하게 되고 자존심 때문에 우리의 개인적 견해를 하나님의 말씀과 여호와의 조직보다 더 중요시할 수가 있읍니다. 예수의 이부 동생은 우리에게 의심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하였읍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 1:6-8) 하나님께서 과거에나 현재에 그의 백성을 다루신 방법에 대한 지식은 의심을 없애도록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16, 17.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그의 조직을 인도하기 위하여 불완전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읍니까? 예를 들어 보십시오.
16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의 백성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거운 책임의 지위에 사용하셨었는지를 잘 기억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있읍니다. 그의 불완전성은 그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권리를 잃게 하였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계속 사용하셨읍니다. ‘가나안’ 땅 변경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법을 복습하며 설명할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충고하는 당신 ‘모세’는 누구인가? 당신은 약속의 땅에도 들어갈 자격이 없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지도하시는 충고로부터 유익을 얻기보다도 사람을 비평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민수 20:2-12.
17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인간을 사용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인 회중이 설립된 후에도 계속되었읍니다. 사도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죽으시던 날 ‘베드로’는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하였읍니다.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 잘못이었읍니다. 그러나 단지 52일 후에 ‘베드로’가 새로 형성된 그리스도인 회중의 기름부음을 받은 통치체의 한 성원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입니다. 그는 오순절날 매우 고무적인 연설을 하는 데 사도들의 대변자로서 아주 탁월하게 사용되었읍니다. ‘베드로’는 불완전한 사람이었지만 그날에 그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으며 「‘히브리’어 성경」을 참조한 것으로 보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친숙히 알고 있었음을 나타냈읍니다.—누가 22:54-62; 사도 2:1-47.
18. 회중에 있는 감독자들도 불완전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훈계를 듣는 것을 회피할 수 있읍니까?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18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회중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인도하는 일에 사용됩니다. 아마 당신의 회중에 있는 한 장로가 당신의 태도에 대하여 충고할지 모릅니다. 당신은 그가 주는 성경의 좋은 교훈을 차버리면서 이러한 견해를 가질 것입니까?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도 꼭 완전하지는 않지 않은가?’ 이러한 견해를 갖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있는 그의 백성을 충고하고 조직하고 인도하는 데 불완전한 인간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당신이 인정하고 당신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나타낼 것입니까? 만일 여호와께서 불완전한 인간들과 일하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우리가 누구이기에 그 마련을 비평할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는 성경적 충고로부터 유익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 그리스도인 회중에 있는 형제에 대한 험담을 듣고 나타내는 올바른 반응은 무엇입니까?
19 또한 당신은 아마 회중에 있는 한 형제에 대하여 좋지 않은 어떤 소문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당신은 흥미를 가지고 그런 말을 듣고 즉시 그러한 말들을 믿습니까? 그 형제가 회중에 있는 장로일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그 형제를 의심할 뿐 아니라 전체 장로의 회에 대하여도 심각한 의아심을 품기 시작할지 모릅니다. 여호와를 아는 사람은 즉각 그러한 의심을 배제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문할 것입니다. ‘나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소문을 들었을 뿐인가? 나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할 때 형제를 심판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된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느니라.]”’—로마 14:4.
20.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형제 자매들과 항상 평화롭게 지내도록 도움이 될 것입니까?
20 왕국회관을 새로 단장하거나 짓는 데 있어서 당신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마 당신이라면 다른 설계를 선택하고 다른 모양의 양탄자를 깔고 다른 색깔의 ‘커어튼’을 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설계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양탄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고, ‘커어튼’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지 않습니까? 내부 장식이 어떠하든지 그것이 여호와와의 우리의 관계에 영향이 있을 것입니까? 다음과 같은 ‘바울’의 훈계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간할 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날에 순결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되[시오].” (빌립보 1:10, 새번역) 우리는 여호와께 우리가 순결한 숭배를 위하여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를 갖도록 인도하고 돌볼 사람들을 마련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21. 하나님에 관한 참다운 지식을 가진 사람은 왜 성경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를 조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갖지 않습니까?
21 아마 ‘왙취 타워’ 출판물에서 읽은 어떤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느끼거나 이전에 이해하던 것과 조화시키기가 어렵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당신은 이런 경우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신은 의심이 싹트게 하겠읍니까? 확신이 회의로 변하게 하겠읍니까? 자문해 보십시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은 어디에서 얻었는가? ‘왙취타워’ 출판물을 통하여 마련된 영적 양식이 나의 생활을 변경하도록 도왔고 만족을 느끼게 하지 않았는가? 내가 갈 곳이 어디인가?’ 제자들이 예수에 대하여 가졌던 여호와의 마련에 대한 느낌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읍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한 6:68.
22.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에 관한 정확한 지식은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유익합니까?
22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다음 성귀와 같이 행동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부정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추악하고 완고하여 전혀 선한 일을 할 능력이 없읍니다.” (디도 1:16, 새번역) 불안정, 의심, 염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대의 증상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과 같이 느낍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 후 1:12) 이 중대한 시기에 있어서 확신과 안정 및 두려움이 없는 생활이란 바로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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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교회는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참으로 도움을 베풀어 왔는가? 당신은 성서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요구 사항에 당신의 생활을 참으로 순응시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