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숭배한다’
“아버지도 오묘하신 분, 아들도 오묘하신 분, 성신도 오묘하신 분이다. 아버지도 영원하신 분, 아들도 영원하신 분 그리고 성신도 영원하신 분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분의 영원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의 영원하신 분이다. 또한 세분의 창조되지 않은 분이나 세분의 오묘하신 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되지 않은 분 하나의 오묘하신 분이 있다.” ‘아타나시어스’ 신경이 정의하는 이와 같은 하나 혹은 셋인 그리스도교국의 신은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알 수 없는 신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숭배합니다”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요한 4:22, 신세) 그분은 ‘모세’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말한 백성의 일원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렇다. 충실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는 한분의 하나님을 숭배하였다. ‘유대’인의 율법 언약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되었다.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여호와, 신세]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참으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있다.—신명 6:4; 히브리 8:11.
“한 하나님 곧 아버지”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해 그들이 “일종의 ‘아리우스’설”을 실행한다는 말이 있어 왔다.a 그러나 그들이 삼위일체론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그들을 ‘아리우스’파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아직 남아 있는 몇 권의 ‘아리우스’의 저작 중 하나에서, 그는 하나님은 불가해한 분이며 심지어 아들에게도 불가해한 분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일치하게, 역사가 ‘H. M. 과트킨’은 그의 저서 「아리우스파의 논쟁」(The Arian Controversy)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아리우스’의 하나님은 그 존재가 영원한 신비 속에 숨겨진 알 수 없는 신이다. 그분을 밝힐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으며, 그분은 자신을 밝힐 수도 없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삼위일체론자들의 “오묘한” 신도 ‘아리우스’의 “알 수 없는 신”도 숭배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과 함께,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느니라.]”—고린도 전 8:6.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면서, 예수께서는 자기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 17:3) 예수의 그러한 말씀을 기록한 동일한 사도는 또한 이렇게 편지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음과 참되신 분[여호와]에 관한 지식을 얻도록 우리에게 지적 능력을 주셨음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참되신 분과 연합해 있읍니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요한 1서 5:20, 신세.
일부 번역가들은 요한 1서 5:20에 삼위일체론적 견해를 교묘하게 집어 넣는다. 「리빙 바이블」은 그 귀절의 끝을 이렇게 번역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 물론,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성서들은 모두 요한 복음 17:3에서 예수와 “유일하신 참 하나님” 사이의 차이를 인정한다. 그리고 저명한 ‘가톨릭’ 학자 ‘카알 라흐너’는 그의 저서 「신학상의 조사」(Theological Investigations)에서 “성 ‘요한’의 첫 번째 서한에서 ‘호 데오스’[“하나님”]는 너무나 자주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말은 그 서한 전체에 걸쳐 아버지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기술한다. 또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계 「신약」(Nouveau Testament)은 각주에서 그 희랍어가 비 삼위일체론적 번역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아마도 기원 4세기에 지나치게 삼위일체론에 열심인 한 ‘라틴’계 서기관이 요한 1서 5:7에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 이 셋은 하나이니라”는 말을 부가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문적인 술어로 말하여 “사도 ‘요한’의 ‘코머’”로 알려진 이러한 부가된 말은, 일부 ‘가톨릭’ 학자들까지도 6세기에 이미 그 확실성에 의문을 제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1927년까지 ‘바티칸’의 보호를 받았다. 이러한 부정직한 삽입 귀절은 삼위일체론자들이 그들의 교리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지를 알려 준다.
하나님의 이름과 삼위일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하나님을 매우 실제적이 되게 해주는 것은 그들이 그분의 고유한 이름인 여호와를 알고 정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시 83:18) 그리스도교국의 교회 성원이 그가 가지고 있는 성서에서 이름이 없는 표현인 “주의 이름”을 읽을 때, 그것은 그에게 거의 혹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와 비슷하게,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는 아마 자기가 어느 이름에 관해 기도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그분의 이름을 알며, 시편 필자와 예수 자신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사랑한다.—시 5:11, 12; 요한 12:28; 17:6, 26.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 원어 성서에 글자 그대로 수천번이나 나오는데, 그리스도교국의 많은 성서 번역판에서 그 이름이 삭제된 이유는 무엇이며 수억의 ‘가톨릭’, 희랍 정교회 및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들”이 그 이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삼위일체 교리가 이러한 매우 이상한 종교적 엄청난 사실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흥미롭게도, ‘가톨릭’계의 「예루살렘 성서」는 신명기 6:4을 이렇게 번역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훼는 오직 하나인 야훼이시다.” 그리고 나서 각주는 또 다른 가능한 번역을 제시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마 여기서 유일신 신앙을 선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분은 예수께서 ‘유대’인으로서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숭배합니다”라고 말씀하신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시다. (요한 4:22, 신세) 그리고 이 ‘가톨릭’계 성서는 그 오직 하나인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 혹은 여호와임을 인정한다.b 이제 삼위일체론 신학에 의하면, 야훼 혹은 여호와는 ‘히브리’ 족장들과 ‘유대’인들의 하나님 곧 예수께서 “아버지” 혹은 “아버지 하나님”으로 밝히신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 혹은 여호와를 “하나님”의 가정상의 “세 위” 가운데 단지 하나만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 위”에게는 이름(예수)이 있지만, “세째 위”는 이름이 없는 “성령”이다.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은 “하나님”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논리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원들은 이름이 없는 신비의 삼위일체 신을 숭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많은 ‘가톨릭’교인들은 그들이 알 수 있고 또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누군가를 숭배할 필요성을 느낀다. 확실히, 이 점은 많은 ‘가톨릭’교인들이 예수나 심지어 ‘마리아’를 숭배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을 숭배하고 싶어 하는 그 동일한 본능은 심지어 종교 건축물에도 나타난다. ‘프랑스’와 다른 나라들에 있는 수많은 ‘가톨릭’ 성당, 교회 및 대성당들에는, 높은 제단 위나 다른 곳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금하여 빛을 발하는 원광이 있다. 그 중심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삼각형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 삼각형 안에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4개의 ‘히브리’어 자음인 ‘테트라그람마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가톨릭’교인들이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임을 깨닫고 있는가?
“한 주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 후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덧붙였다.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린도 전 8:6)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나중 진술을 인정한다. 여호와 곧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예수 곧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는 아버지께서 자기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는 수단이다.—요한 1:2, 3, 14; 골로새 1:15, 16.
4세기의 이교(離教) 신학자 ‘아리우스’가 “아들은 출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라는 성서 진리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렇게 기술한다. “‘여호와의 증인’의 그리스도론 역시 일종의 ‘아리우스’설이다.” 우선,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행한 일에 대한 신학상의 해석”으로 정의되는 특정한 “그리스도론”이 없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기원 325년에 ‘니케아’에 모인 입씨름하는 신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퉁명스럽게 말한 것으로 기록된 그리스도인 평신도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논법이나 기교 혹은 무익한 난해한 것들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믿음과 선행들로 유지되는 순진함을 가르치셨읍니다.’ 분명히 이 남자는 오늘날의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다. 그 사람처럼, 그들은 신학적인 철학에 전혀 믿음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순진하게 성서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및 성령에 관해 말하는 내용을 받아들이며, 순진한 그들의 믿음 때문에 기꺼이 고통을 당하며 선행으로 그 믿음을 증명한다.
둘째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리우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아리우스’설을 믿는다는 비난을 받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아리우스’는 아들이 아버지를 실제로 알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성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온전히 알’며 아들은 “하나님을 알려 주셨다”고 가르친다. (마태 11:27, 신세; 요한 1:14, 18, 공동번역) ‘아리우스’는 ‘말씀’은 그의 덕이나 도덕적 성실로 인해 “입양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성서는 그가 여호와에 의해 그분의 “독생자”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요한 1:14; 3:16; 히브리 1:2; 계시 3:14)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될 것을 바랄 수 있다고 가르친 반면에, 성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말한다. (빌립보 2:9-11) ‘여호와의 증인’들은 현대의 ‘아리우스’파들이기는커녕, 성서가 말하는 내용을 믿는다.
“독생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의 신성 즉 신격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삼위일체론자들의 철학적인 이해에 동조하지 않는다. 삼위일체론자들이 “예수의 신격”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그분이 “한 신”(a god) 혹은 “신과 같은”(godlike)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히 공존하는 세 위 가운데 하나인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것이 그리스도교국의 많은 성서들이 요한 복음 1:18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아버지의 품안에 있는 외아들(the only Son)이신 그가 그분을 알게 하였다.” (「개역 표준역」) 대부분의 가장 오래된 희랍어 사본들은 “외아들”(the only Son)이 아니라 “독생하신 신”(the only-begotten god)임을 알려 준다. 「해설자의 희랍어 신약」(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은 다음과 같이 시인한다. “사본 권위자는 ‘데오스’[신]를 포함시키는 것을 더 좋아하지만 역본들과 교부들은 오히려 그 반대쪽을 지지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호칭[‘독생하신 신’]이 다행히 그분[아들]을 아버지와 구별시켜 준다”는 반삼위일체론자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c
예수를 “한 신”(a god) 혹은 “능한 자”(mighty one)라고 한 성경적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도 ‘도마’가 예수에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God)이시니이다!”라고 외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요한 복음 20:28로 인해 동요되지 않는다. 우선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도마’는 노년의 ‘마노아’처럼 “하나님”(God)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일 수 있었다. (사사 13:20-22) 그러나 설사 경우가 다르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바로 얼마 전에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갈을 보내셨기 때문에 결코 혼란이 있을 수 없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my God)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요한 20:17; 비교 고린도 후 1:3) 그리고 ‘요한’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도마’의 외침을 포함한) 이러한 세부점들을 기록하였다고 말한다.—요한 20:31.
‘여호와의 증인’들은, 인성과 신성의 “두 가지 본성”에 관한 철학상의 신자 성육(神子 成肉) 이론에 따라 예수가 “화신한 하나님” 즉 “신인”(神人)이었다고 믿지 않는다. 성서와 일치하게, 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믿는다. (요한 1:14)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이전의 영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비”우고 “천사들보다 조금 못”한 사람이 되셨으며, 그것은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상응하는 대속물”로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빌립보 2:7, 8; 히브리 2:9, 난외주; 디모데 전 2:6, 신세)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인간의 구속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이면서 완전한 인간일 때에만 보증된다”는 삼위일체론의 개념은 비성경적인 철학이다. ‘아담’이 인류에 대하여 상실한 것을 되사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더도 덜도 아닌 완전한 인간 생명을 희생할 필요가 있었다. (출애굽 21:23; 고린도 전 15:22, 45, 47; 로마 5:18, 19, 개역 표준역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판들; 마태 20:28)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신자 성육과 삼위일체 교리들이 거짓임을 증명한다.
“한 신”이긴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여호와]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빌립보 2:6)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그분이 여호와께 복종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고린도 전 15:27, 28) 그분은 기꺼이 아버지의 우월함을 인정하셨다. (요한 14:28; 비교 고린도 전 11:3) 부활시에, 그분은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고 “영광과 존귀로 관 쓰”셨으며 “높여”지셨는데, 그것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 ··· 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베드로 전 3:18; 히브리 2:9; 빌립보 2:9, 10) 사실이 그러하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히브리서 1:6에서 천사들이 “그분께 경의를 표하라”[신세], “그분께 예를 다하라”[신 영어 성서] 혹은 “그분을 숭배하라”[예루살렘 성서]는 권유를 받는 것을 읽고 놀라지 않는다. (비교 계시 5:11, 12) 이것은 결코 예수께서—「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숭배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마태 복음 4:10과 모순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히브리서 1:6에서 “그분을 숭배하라”고 한 ‘가톨릭’의 「예루살렘 성서」는 난외 참조문들에서 신명기 32:43(희랍어 칠십인역)과 시편 97:7을 언급하며, 그 귀절들에서는 그 동일한 말을 각각 “그분께 예를 다하라”와 “머리를 숙이라”로 번역한다. 이 ‘가톨릭’계 성서가 일관성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삼위일체론 때문임이 분명하다.
“약속하신 성령”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사도 2:32, 33) 이 약속된 “성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삼위일체의 세째 위”인가? 참조 문헌들은 무엇을 밝혀 주는가?
「가톨릭 백과사전」: “우리는 구약 어디에서도 세째 위에 대한 분명한 암시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가톨릭 사전」: “전체적으로 보아서, 구약에서처럼 신약은 신성한 ‘에너지’ 곧 힘으로서의 영에 관해 말한다.”—‘고딕’체로는 본지에서.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초기 교회 신학에서의 삼위일체론적 사변의 출현은 성령에 관한 조목에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왜냐하면 성령이 신약에서 신성한 힘임이 분명한데, 위로서의 존재로는 ··· 분명히 이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성령은 인격체인 인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힘으로 간주되었다.” (‘고딕’체로는 본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373년에 죽은) ‘아타나시우스’로 인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성령의 완전한 ‘호모오우시아’(본질)에 대한 개념이 이룩되었다.”
「가톨릭 사전」: “세째 위의 참다운 신격이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 그리고 마침내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의해 단언되었다.”
이것은 기원 33년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지고 3세기 반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아리우스’는 성령이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로 이루어졌다는 ‘아타나시우스’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영을 한 위 혹은 인격체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리우스’파가 아니라는 증거를 한층더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성서에 근거한 견해, 다시 말해 성령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는 그분의 활동력이라는 견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5:32) 성서에 성령이 의인화된 귀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가톨릭 사전」조차 이렇게 시인한다. “대부분의 이러한 곳들은 인격에 대한 어떤 설득력있는 증거도 제공하지 못한다. ··· 우리는 신약이 단지 사랑(고린도 전 13:4), 죄(로마 7:11)와 같은 속성들과 오히려, 심지어는 율법(로마 3:19), 물과 피(요한 1서 5:8)와 같은 추상적이고 생명이 없는 것들까지 의인화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편, 성서는 성령이 “부어”지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으로 그리고 ‘성령의 침례’를 받는 것으로 말하며, 그 중 어느 것도 성령이 한 위 곧 한 인격체라면 뜻이 통하지 않는다.d—사도 2:4, 17, 38; 4:31; 요한 1:33.
우리가 아는 하나님을 선포하도록 하자!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들’을 숭배한 ‘아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선포, 신영어] 하리라.” (사도 17:23) 우리는 오묘한 “신비”의 삼위일체에서 해방되어 예수처럼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숭배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참으로 감사해야 한다! (요한 4:22, 신세) 우리는 여호와를,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인도 아래 그리고 그분의 성령의 도움으로 숭배한다. 계속해서 열심히 우리의 놀라운 하나님을 알리도록 하자. 그것은 ‘여호와는 광대하시고 극진히 찬송’받을 분이며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시 48:1, 14.
[각주]
a 「파수대」 1984년 11월 1일호 12면에 나오는 “그리스도교국이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게 된 경위” 기사의 “‘아리우스’파의 논쟁” 소제목 참조.
b 예수가 ‘히브리’어 ‘예슈아’ 혹은 희랍어 ‘이에수스’의 관례적인 형태인 것처럼,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의 관례적인 한국어 형태이다. 예수회 교수 ‘쥬옹’은 ‘로마’에 있는 교황 성서 연구소가 발행한 600면에 달하는 그의 저서 「성서 히브리어 문법」(Grammaire de l’hébreu biblique)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의 번역판들에서, 우리는 ‘야웨’(Yahweh)라는 (가설상의) 형태 대신에 ‘프랑스’어에서 사용된 관례적인 문어 형태인 ‘제오바’(Jéhovah)라는 형태를 사용해 왔다.”
c 일부 그리스도교국의 번역가들은 디도서 2:13과 베드로 후서 1:1에 그와 비슷하게 삼위일체론적 견해를 교묘하게 집어넣었다.—「개역 표준역」(‘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판들)과 ‘가톨릭’의 「예루살렘 성서」 각주 참조.
d 성령에 관한 더 자세한 지식을 얻기 위해,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성령—다가오는 새 질서 배후의 힘」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8면 삽화]
‘오를레앙’ 대성당 (‘프랑스’)
설교단 위의 ‘테트라그람마톤’ (‘오를레앙’ 대성당)
[11면 삽화]
‘베르사이유’ 궁전, 성당의 높은 제단 위에 있는 ‘테트라그람마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