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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후의 생명—어떻게, 어디에서,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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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후의 생명—어떻게, 어디에서, 언제?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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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6
파96 10/15 4-7면

사후의 생명—어떻게, 어디에서, 언제?

사람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수여자께서는, 인간의 죽음이 반드시 생명을 영원히 끝나게 하는 것은 아님을 친히 보증하십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는 또 한 번의 제한된 수명을 다시 사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다시는 결코 죽음을 겪지 않을 전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가능함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간명하면서도 확신 있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그[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보증을 주셨[습니다].”—사도 17:31.

물론, 그렇다 해도 대답되지 않은 이러한 세 가지 기본적인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그러한 일이 언제 있을 것인가? 그러한 새로운 생명은 어디에서 존재하게 되는가?’ 세계 전역에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다양한 답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주요 관건은, 죽을 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불멸성이 그 대답인가?

널리 퍼져 있는 한 가지 신앙은, 모든 인간의 한 부분은 불멸이며 몸만 죽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당신도 분명히 이러한 주장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불멸이라고 주장하는 이 부분은 “영혼”이나 “영”과 같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언급됩니다. 이 부분은 몸이 죽을 때 살아 남아 다른 곳에서 계속 산다고 합니다. 사실, 이러한 신앙은 성서에서 유래한 것이 아닙니다. 고대 히브리어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이 실제로 사후의 생명을 고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랐던 사후의 생명은 자신이 지닌 어떤 불멸하는 부분이 살아 남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기적을 통해 장래에 땅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기를 확신을 가지고 고대하였습니다.

족장 아브라함은 장래에 있을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 가운데 탁월한 예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기꺼이 희생물로 바치려 한 일에 대해 설명하면서, 히브리 11:17-19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을 때에 이삭을 바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를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컨대 그 가운데서 그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삭을 희생으로 바칠 것을 요구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죽은 사람들이 (영계에서 즉시 생명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초기 신앙을 한층 더 확증해 줍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시올”, 인류의 일반 무덤]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라].”—호세아 13:14, 「신세」 참조.

그렇다면 인간에게 불멸성이 내재해 있다는 개념이 유대인의 생각과 신앙 속으로 들어온 때는 언제입니까? 「유대 백과 사전」(Encyclopaedia Judaica)에서는 “영혼불멸 교리가 유대교로 들어온 것은 필시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시인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당시까지도 독실한 유대인들은 장래에 있을 부활을 여전히 믿고 있었고 고대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 마르다와 나누신 다음과 같은 대화 가운데서 그 점을 분명히 엿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 말하였다. ‘주여, 만일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 예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오라비는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살아나리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라고 말하였다.”—요한 11:21-24.

죽은 자의 상태

이 문제에 있어서도,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간명한 성서 진리는 죽은 자가 “잠들어” 있고, 의식이 없으며, 감정이나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그러한 진리를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이러한 성구들을 고려해 보십시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시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전도 9:5, 10, 「신세」 참조)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영”]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생각”]가 소멸하리로다.”—시 146:3, 4, 「신세」 참조.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가리켜 잠이라고 하신 이유를 이해할 만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이 나눈 대화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분은 ·⁠·⁠· 그들에게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로 가서 그를 잠에서 깨우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여, 그가 쉬고 있다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잠들어 쉬고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기탄없이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습니다.’”—요한 11:11-14.

사람 전체가 죽는다

인간의 죽음의 과정에는 몸의 죽음뿐 아니라 사람 전체가 관련됩니다. 성서의 명확한 설명에 따르면, 틀림없이 우리는 몸이 죽을 때 살아 남을 수 있는 불멸의 영혼을 사람이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영혼이 죽을 수 있음을 명확히 지적합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4) 인간에게 본래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불멸” 혹은 “불멸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곳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신 가톨릭 백과 사전」은 성서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와 그리스어 단어에 관해 이러한 흥미 있는 배경 지식을 제공해 줍니다. “구약에서는 영혼이 네페시이고, 신약에서는 [프시케]이다. ·⁠·⁠· 네페시는 필시 호흡하다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 호흡이 죽은 자와 산 자를 구별시켜 주는 것이므로 네페시는 생명이나 자신 혹은 단지 개개의 생명을 의미하게 되었다. ·⁠·⁠· 구약에서는 몸과 영혼을 이분하지[두 부분으로 나누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물을 유형적으로, 전체적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그들은 사람을 복합체가 아니라 개체로 여겼다. 네페시라는 단어가 현재 쓰이는 언어로 영혼이라고 번역되기는 하였지만, 이 단어는 결코 몸이나 각 개체와 별도로 존재하는 영혼을 의미하지 않는다. ·⁠·⁠· [프시케]라는 단어는 네페시에 해당하는 신약의 단어이다. 이 단어는 생명의 본질, 생명 그 자체 혹은 살아 있는 존재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을 때 그 전에 살아 있던 사람 즉 산 영혼이 존재하지 않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은 “흙”으로 즉 땅의 요소로 돌아가게 되는데, 매장되어 그 후 부패됨으로 점진적으로 돌아가게 되거나 화장됨으로 신속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 3:19) 그러면 어떻게 사후의 생명이 가능합니까? 하느님께서 친히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경이로운 힘과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따라서 그분이 자신의 기억 속에 개인의 생활 방식에 대한 기록을 간직하실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다시 살게 될 모든 전망은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영”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인데, 영은 그 주신 참 하느님께로 돌아간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영감받은 전도서의 필자는, 그 결말에 대해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참”] 하나님께로 돌아가[느니라].”—전도 12:7, 「신세」 참조.

하느님만이 어떤 사람을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에덴에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을 때, 여호와께서는 아담의 폐를 공기로 채우셨을 뿐 아니라 생명력이 그의 몸에 있는 모든 세포에 활력을 불어넣게 하셨습니다. (창세 2:7, 「신세」 참조) 이 생명력이 임신과 출산 과정을 통해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물론 인간의 생명은 부모를 통해 받는 것이긴 하지만, 적절하게도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행복한 때

부활을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윤회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윤회란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나며 그 과정이 반복된다는 신앙입니다. 필시 전생에 어떤 기록을 쌓았느냐에 따라 이전의 생명에 비해 더 고등하거나 더 하등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 신앙에 의하면, 사람은 사람이나 동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서에서 가르치는 것과 매우 다릅니다.

“부활”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아나스타시스를 번역한 것인데, 문자적으로 “다시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어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는 사람들은 아나스타시스를 “죽은 자의 소생”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테히야트 함메팀으로 번역해 왔다.) 부활에는 개인의 생활 방식이 재개되는 것이 포함되며, 그 개인의 생활 방식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억 속에 간직해 오신 것입니다. 개인에 대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람은 인간의 몸으로나 영의 몸으로 회복되지만, 자신의 개성을 그대로 간직하며, 죽을 때 가졌던 동일한 성품과 기억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서는 두 가지 부활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는 영의 몸으로 하늘로 부활되는 것인데, 이 부활은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부활을 받으셨습니다. (베드로 첫째 3:18) 그리고 그분은 충실한 사도들을 위시하여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는 추종자들 가운데 선택된 사람들이 그러한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장소를 준비하러 [갑니다]. ·⁠·⁠· 다시 와서 여러분을 내게로 맞이하여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게 하겠습니다.” (요한 14:2, 3) 성서는 이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말하며, 이 부활은 시기상으로나 순위에서나 첫째가 됩니다. 성경에서는 이처럼 하늘 생명으로 부활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제사장이 되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왕으로 통치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계시 20:6) 이 “첫째 부활”은 제한된 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데, 성경 자체가 충실한 남녀들 가운데서 단지 14만 4000명만이 택함을 받을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여호와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께 충절을 증명한 사람들일 것이며, 자기들의 믿음에 관해 다른 사람들에게 활동적으로 증거해 온 사람들일 것입니다.—계시 14:1, 3, 4.

의심의 여지 없이, 죽은 자들의 부활은 하늘의 생명으로 부활되는 자들에게는 무한히 행복한 때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한, 바로 이 곳 지상에서 생명으로 부활되는 일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될 사람들은 현 악한 제도의 끝을 살아 남을, 제한되지 않은 수의 무리와 합류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 부활을 받을 자격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환상을 본 후에, ‘아무도 셀 수 없는, 모든 나라와 부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큰 무리’에 관한 환상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아마도 수십억의 사람들이 이 곳 지상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때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때일 것입니다!—계시 7:9, 16, 17.

부활은 언제 있을 것인가?

죽은 자들이 오늘날의 상황과 같은 분쟁과 피흘리는 일과 오염과 폭력으로 가득 찬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어떤 기쁨과 행복도 한순간일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새 땅”을 이룩하는 일이 있고 나서야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준 것에 더하여, 지금까지도 땅을 파멸시키고 원래의 아름다움을 망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제도들이 제거된 지구를 상상해 보십시오.—베드로 둘째 3:13; 계시 11:18.

인류의 일반 부활의 시기가 아직도 앞으로 있을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현 악한 사물의 제도의 끝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많은 증거들은 흔히 아마겟돈이라고 불리는 “전능자이신 하느님의 큰 날의 전쟁”으로 절정을 이룰 “큰 환난”이 갑자기 닥칠 때가 가깝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마태 24:3-14, 21; 계시 16:14, 16) 그 환난은 즐거움을 주는 행성인 이 지구에서 모든 악을 제거할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그리스도 예수의 천 년 통치가 도래할 것이며, 그 기간에 땅은 점진적으로 낙원 상태로 변모될 것입니다.

성서는 이 천 년 통치 중에 죽은 인류의 부활이 있을 것임을 밝힙니다. 그 때 예수께서 땅에 계실 때 하셨던 이러한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기념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올 시간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 부활에 이를 것입니다.”—요한 5:28, 29.

부활의 희망이 미치는 영향

부활 즉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때에 대한 이러한 전망은, 장래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가 노령, 병, 예기치 않은 재난과 슬픔, 날마다 겪는 압력과 생활상의 문제들로 인한 고통들에 직면할 때 참으로 격려가 됩니다! 이 희망은 죽음의 독침을 없애 주는데, 슬픔을 완전히 제거해 주지는 않지만 우리가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들과 구별되게 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위안을 주는 부활의 희망이 미치는 영향을 이러한 말로 인정하였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이 죽어 잠자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모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희망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통하여 죽어 잠들어 있는 사람들도 그분과 함께 데려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 첫째 4:13, 14.

우리는 동양 사람인 욥의 다음과 같은 말이 참됨을 이미 경험했을지 모릅니다. “나는[“사람은”]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느니라].” (욥 13:28-14:2, 「신국제역」 참조) 우리는 또한 생명의 불확실성을 그리고 “시기와 우연[“예기치 않은 일”]”이 우리 중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도 9:11, 「신세」 참조) 분명히, 죽어 가는 과정에 직면해 있다는 생각을 달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에 대한 확실한 희망은 죽음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제거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십시오! 닥칠 수 있는 죽음의 잠 너머로, 부활의 기적을 통해 다시 살아나게 될 때를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장래에 누릴 끝없는 생명에 대한 전망을 확신 있게 고대하고, 이에 더하여 그러한 축복된 때가 가까운 장래에 있음을 앎으로 오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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