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94 9/15 21-23면
  • 어떻게 아버지의 사망을 극복할 수 있나?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어떻게 아버지의 사망을 극복할 수 있나?
  • 깨어라!—1994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울 때”
  • 슬픔을 헤쳐 나감
  • 누군가에게 말하라
  • 부모를 지원함
  •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깨어라!—2009
  • 이렇게 슬퍼하는 것이 정상일까?
    청소년은 묻는다—질문과 효과있는 대답, 제1권
  • 아버지는 왜 사망하셔야 했나?
    깨어라!—1994
  • 이런 슬픔을 안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했을 때
더 보기
깨어라!—1994
깨94 9/15 21-23면

청소년은 묻는다 ·⁠·⁠·

어떻게 아버지의 사망을 극복할 수 있나?

“아빠는 소파에서 돌아가셨어요. 제가 거기서 아빠를 발견했지요. 심장 마비를 일으키셨던거예요. 아빠와 무척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 엄마는 지금도 밤에 우시지요. 아빠가 없으니까 무슨 일을 해도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아요.”—에밀리.

“부모나 가까운 가족의 죽음은 사춘기 청소년이 겪는 주요 충격 중 하나이다.” 저술가 캐슬린 매코이의 말이다. “그 소년이나 소녀는 슬픔, 죄책감, 공포 및 분노에 일시적으로 압도될 수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와 사별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를 잘 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누군가가 사망했을 때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느낌이 드는 것은 극히 정상이다. 성서는 족장 야곱이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슬픔이 북받쳐 “옷을 찢”었다고 알려 준다. 그리고 “그의 아들 딸들이 모두 일어나 위로했지만 그는 위로를 받지 않[았다].” (창세 37:34, 35, 「공동번역」) 이와 비슷하게 당신도 고통이 너무 심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느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고통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해결책은 고통에 맞서는 것이지 고통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존이라는 소년은 겉으로는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서 걸핏하면 싸우기 시작하였다. 존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저는 마음속에 크고 고통스러운 응어리를 품은 채 지내고 있어요. 싸움으로 풀어 보려고 했지만 효과가 없더군요.”

다른 청소년들은 격렬한 활동에 몰두함으로써 고통을 억누르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일부러 명랑한 체하면서 그런 질문을 받아넘긴다. 그렇게 해서 고통스러운 감정을 잠시 묻어 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잠언 14:13은 이렇게 말한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느니라].”

흥미롭게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의 한 기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한 연구에서는 친척이 사망한 후에 슬픔이나 분노나 죄책감 같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하였던 십대들이 ·⁠·⁠· 마약이나 알코올 남용, (고속으로 자동차 몰기 따위의) 무모한 모험 및 비행과 같은 파멸적인 행위에 말려드는 빈도가 더 높음을 보여 주었다.” 다행히도 슬픔을 극복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울 때”

전도서 7:2은 이렇게 말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죽음은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 사람은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하면, “잔치집”에 가거나 즐기고 노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죽음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회피하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솔로몬은 죽음과 정면으로 맞서며 “초상집”에 가라고 격려한다. 솔로몬은 이렇게 덧붙인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전도 7:3.

이 충고는 주로 유족의 친구나 친족에게 적용되기는 하지만, 또한 상실의 고통에 맞서야 하는 유족에게도 유익하다. “울 때”가 있는 것이다. (전도 3:4) 따라서 성서 시대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남녀들은 슬픈 감정을 억제하는 대신에 표현하였다.—비교 창세 23:2; 사무엘 하 1:11, 12.

슬플 때 슬퍼하는 것에는 많은 유익이 있다. 「위로의 기술」(The Art of Condolence)이라는 책은 이렇게 말한다. “유족은 그들이 겪는 고통과 괴로움을 그대로 느낄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과정에 저항하면 치유에 방해가 된다.” 그러나 진짜 사나이는 울지 않는다는 잘못된 통념에 사로잡힌 일부 소년은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특히 어려워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자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공개적으로 “눈물을 흘리”셨다. (요한 11:35) 그리고 확실히 아버지나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적절하다. 그러므로 거리낌없이,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라. (비교 야고보 4:9) 「가족 내의 죽음과 슬픔」(Death and Grief in the Family)이라는 책은 이렇게 말한다. “울음은 슬픔을 해소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다.”

슬픔을 헤쳐 나감

성서 시대에 다윗 왕은 가장 친한 벗 요나단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였는데,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글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였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다윗은 이 구절이 들어 있는 아름다운 애가를 짓고는 “활 노래”라고 불렀다.—사무엘 하 1:18, 26.

이와 같이 글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말로 슬픔을 표현함」(Giving Sorrow Words)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느낌을 글로 써 보는 것은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 화가 나거나 슬픔을 느낄 때 글을 써 보라.” 섀넌이라는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일기를 쓰지요. 제 느낌을 모두 적어요. 종이 위에 제 감정을 모두 털어놓지요. 제가 느낀 모든 것을 종이에 담으니까 꽤 도움이 되더군요. ·⁠·⁠· 모든 걸 적는 게 말입니다.”

운동 역시 도움이 된다. “육체의 훈련은 ·⁠·⁠· 유익이 있”다고 성서는 말한다. (디모데 첫째 4:8) 그리고 슬픔에 관한 한 책은 이렇게 알려 준다. “운동은 힘을 발산하는 좋은 방법이다.” 활기 찬 달리기나 활발한 걷기 혹은 상쾌한 기분이 들게 하는 자전거 타기는, 슬픔과 비탄에 잠길 때 생길 수 있는 긴장을 해소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말하라

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완전히 고립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잠언 18:1) 잠언 12:25은 이렇게 말한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고통받는 사람이 그러한 격려적인 “선한 말”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 말하고 “근심”을 표현하면 된다. 직접 그렇게 해 보지 않겠는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라.

보통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부모에게 가서 말을 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들 자신의 고통에 휩싸인 나머지 많은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어떠한가? 그런 경우라면 그리스도인 회중의 장성한 성원들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잠언 17:17은 이렇게 말한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모르피드라는 소녀는 어머니를 여읜 뒤에 여호와의 증인의 지방 회중을 많이 의지하였다. 소녀는 이렇게 회상한다. “장로들 모두가 잘 지원해 주셨지만, 특히 한 분이 언제나 제 말을 기꺼이 들어 주셨어요.”

그러한 도움과 지원을 얻으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음을 누군가에게 알려야 한다. 어쩌면 화가 나거나 무섭거나 죄책감이 들지 모른다. 혹은 그저 외롭거나 부모가 그리울지 모른다. 동정심 있게 들어 주는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털어놓는 것은 참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부모를 지원함

그러나 일부 청소년은 아직 감당할 수 없는 짐까지 떠맡아서 자기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현재의 집안 사정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일 수 있다. 이해할 만하게도 살아 계신 아버지나 어머니는 신경이 곤두서 있거나 과민하거나 혹은 슬픔에 잠겨 있을지 모른다. 부모의 고통을 보고 돕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슬픔 문제의 한 전문가는 “청소년들이 ·⁠·⁠· 부모를 도우려는 잘못된 시도로 슬픔을 억제하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청소년들은 “‘성인’인 것처럼 조숙하게 행동하면서 어쩌면 부가적인 책임을 떠맡기까지 할” 수 있다.

물론 부모 중 한 분의 죽음 때문에 가외의 책임을 일부 떠맡는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집안의 주인이나 여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나 어머니가 여전히 책임을 맡고 있으며 당신은 책임을 떠맡음으로써가 아니라 협조하고 순종함으로써 그분을 더 잘 지원할 수 있다. (에베소 6:1) “겸손한[“겸허한”, 「신세」] 자에게는 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잠언 11:2) 겸허에는 자기의 한계를 아는 것이 포함된다.

살아 계신 아버지나 어머니가 당신에게 조언을 구하기 시작하거나 성인이 해야 할 일을 맡기기 시작할 경우 그 점을 기억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당신은 친절과 지원을 나타내기 원하겠지만, 겸허하다면 자신의 인생 경험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비교 히브리 5:14) 그러므로 중압감이 다소 들기 시작한다면, 솔직하지만 존경심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문제를 부모와 상의해야 한다. (잠언 15:22)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회중에 있는 성인들의 지원을 구해 보도록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모의 죽음을 극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슬픈 감정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라. (비교 창세 24:67)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슬픈 추억들이 여전히 때때로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추억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염려하시고, 당신의 슬픔을 이해하심을 잊지 말라. 고독하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다음과 같은 시편 필자의 말을 생각하라.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또한 성서에 근거한 부활 희망과 지상 낙원에서 다시 부모를 만나게 될 전망에 대해 계속 숙고하기 바란다. (누가 23:43; 사도 24:15) 아버지를 여읜 킴이라는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매일 아빠 생각이 나지요. 그렇지만 아빠는 우리가 포기하거나 여호와께 드리는 봉사를 중단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걸 전 알고 있지요. 아빠가 부활되어 돌아오실 때 그 곳에서 환영하고 싶어요.”—요한 5:28, 29.

[23면 삽화]

울고 싶을 때 우는 것은 치유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