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속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 그리고 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내십시오.”—골로새 3:15, 신세.
1. 감사할 줄 모르는 현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
고난 많은 현 20세기는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는 방법을 잊어버릴 지경에 이르렀읍니다. “미안합니다” 혹은 “감사합니다”와 같이 감사를 표하는 말들을 듣기가 해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태도는 “공기” 곧 현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는 이기적인 영의 일부가 되었읍니다. (에베소 2:1, 2, 신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 사물의 제도가 존재하는 동안은 세상 가운데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한 17:11, 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현 세상의 감사할 줄 모르는 영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들의 감사하는 마음이 줄어들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 (ㄱ) 여호와의 종들이 그분에게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ㄴ) 말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이 요구됩니까?
2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인식은 종종 동료 신자들과의 대화 가운데 표현될 수 있읍니다. 아마 대다수의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하여, 개인적인 기도를 통해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 감사할 것입니다. 또한 회중적인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인 집회에서 왕국 노래를 부를 때에도 감사함을 표현하게 됩니다. 물론, 말로 감사함을 표현하기는 비교적 쉽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형제들에게, 말로만 감사하지 말고,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감사함을 나타내라고 곧 증명하라고 격려하였읍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읍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속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그것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내십시오.”—골로새 3:15, 신세.
감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
3. 우리 모두는 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까?
3 살아 있는 누구에게나 감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읍니다. 생명을 즐긴다는 것 자체가 가장 주된 이유입니다. 만약 우리의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우리가 소유하거나 계획하였을지 모르는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무가치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필자 다윗은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원천이 주[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라고 촉구하였읍니다. (시 36:9)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하면서, 아덴 사람들에게 바로 그 영원한 진리를 상기시켰읍니다. (사도 17:28) 그렇습니다.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또한 생명과 주위에 있는 창조물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들—미각, 촉각, 후각, 시각 및 청각—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인식은 깊어질 것입니다.
4. 무엇이 생명의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줄 것입니까?
4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좋은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능력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건강이 좋을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축복들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틈엔가 그와 비슷한 인식 부족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계속 주의할 필요가 있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편 필자가 다음과 같은 말로 나타낸 것과 동일하게, 감사하는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힘써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5. 여호와로부터 받은 부가적인 축복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무슨 부끄러운 행로를 추구하였읍니까?
5 시편 106편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능한 행적들을 시적으로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계하신 것은, 그분이 일반 인류에게 베푸신 선하심 및 정상적인 생명의 축복들에 부가된 것이었읍니다. 하지만, 그러한 유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누리는 독특한 축복들에 대해서 지속적인 인식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시편 필자는 지적합니다. 13절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저희가 미구에[곧, 현대인의 성경]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진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줄어서, 수십년이 지나자,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곧—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홍해에서 탁월한 기적들을 행하시고 나서 불과 몇 주일 만에—잊어버렸읍니다. (출애굽 16:1-3) 안타깝게도, 그후에 있은 사건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습관적인 생활 방식이 되었음을 보여주었읍니다.
감사함을 나타내는 방법
6. 왜 십일조의 요구 조건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읍니까?
6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선하심에 대해서 진정한 인식을 나타내게 되어 있는 세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셨읍니다. 한 가지는 모든 생산물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께 바침으로써 십일조의 요구 조건을 지키는 것이었읍니다. (레위 27:30-32)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읍니다. 하나님께서 해, 비옥한 토양, 비, 성장의 기적 등을 가져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거룩한 곳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여호와께 감사함을 실제로 표현하는 방법이었읍니다.
7. (ㄱ) 십일조를 바치는 것과 여호와께 헌납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읍니까? (ㄴ) 이러한 마련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에 관해 무엇을 드러내게 해주었읍니까?
7 또 한 가지 요구 조건은 이스라엘 백성 각자가 마음 태도에 따라 결정한 양만큼 하나님께 헌납하는 것이었읍니다. 양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헌물은 맏물 곧 곡식과 포도주와 양털의 처음 것이어야 하였읍니다. (민수 15:17-21; 신명 18:4) 더우기,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미루지 말고 바쳐야” 하며, “맏물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바쳐야 한다고 규정하셨읍니다. (출애굽 22:29; 23:19, 공동번역) 이러한 마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께 대한 감사를 가시적인 방법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읍니다. 그들은 헌물의 양을 통해서 감사의 깊이를 드러낼 수 있었읍니다. 단지 포도 한 송이를 헌납할 것입니까? 아니면 관대한 마음으로 감동되어 한 바구니 가득 담아 바칠 것입니까? 살펴본 바와 같이, 각 개인이나 가족은 강요당하는 일 없이 감사함을 나타낼 수 있었읍니다.
8. (ㄱ) 이삭줍기 마련은 무슨 두 가지 유익을 제공하였읍니까? (ㄴ) 이삭줍기 마련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관대함과 감사함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었읍니까?
8 감사함을 나타낼 수 있는 세번째 구체적인 방법은, 이삭줍기에 대한 하나님의 마련과 관련이 있었읍니다. 수확을 할 때에는,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부를 거두지 않고 남겨 놓게 되어 있었읍니다. 이러한 마련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과 사려 깊음을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는, 동냥에 의지하는 생활을 하면서 기가 죽어 지내는 일이 없게 하였읍니다. (레위 19:9, 10)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서 얼마나 남겨 놓아야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농부들이 밭 둘레의 가장자리를 넉넉하게 남겨 놓음으로써 관대한 영을 나타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호의를 나타내었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잠언 14:31) 거두지 않고 남겨 놓는 면적을 좁게 할 것인지, 넓게 할 것인지는 당사자들이 결정하게 되어 있었읍니다. 그러나 밭에 잊어버린 곡식 단과 과일나무나 포도 가지에 남은 열매들을 모두 이삭 줍는 사람들의 것으로 버려 두라고 교훈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관대함을 나타낼 것을 강력하게 지시하셨읍니다. (신명 24:19-22) 한편, 이삭 줍는 사람들은 자기가 주워 모은 것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숭배 장소에 헌납함으로써, 이러한 마련에 대해 그분께 감사함을 나타낼 수 있었읍니다.
관대한 마음
9. 이기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사실상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9 이스라엘 백성이 아낌없이 헌납하였다면, 백성의 집들에 여호와의 축복이 임하였을 것입니다. (비교 에스겔 44:30; 말라기 3:10.) 하지만, 풍부한 수확물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대개 헌납하지 않았읍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다시 일깨워 주기 위해 왕이나 예언자들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사용하셨읍니다. 사실상, 이기적인 이스라엘 백성은 좋은 것을 놓치고 있었읍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숭배와 관련된 헌물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헌물을 미루는 사람들을 축복하실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0. (ㄱ) 감사하는 마음에 대한 히스기야 왕의 생각나게 하는 마련은 무슨 행복한 결과를 가져왔읍니까? (ㄴ) 그러한 상태는 지속되었읍니까?
10 한번은, 히스기야 왕의 생각나게 하는 마련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14일 동안의 즐거운 기념 행사가 열리게 되었읍니다. 백성은 영적으로 소생되었읍니다. 우선, 백성은 우상 숭배의 온갖 부속물들을 파괴하였으며, 십일조를 “쌓아 더미를 이루었는데 ···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와서 더미를 보고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복”하였읍니다. (역대 하 30:1, 21-23; 31:1, 6-8)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와 같이 소생시키는 행사들이 주기적으로 있고 나서도, 백성은 감사할 줄 모르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읍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참으심이 한계에 달하였으며, 그분은 자신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도록 허락하셨읍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도시와 아름다운 성전은 파괴되고 말았읍니다. (역대 하 36:17-21) 나중에, 포로 상태에서 회복된 다음에도, 상황이 또다시 너무 심각해져서, 여호와께서 유대인의 인색한 행동을 그분으로부터 도둑질 혹은 강도질하는 것에 비할 정도가 되었읍니다!—말라기 3:8.
11. 이스라엘의 역사로부터 배우는 무슨 원칙이 현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읍니까?
11 이스라엘 백성의 변덕스러운 역사로부터 무슨 원칙을 배울 수 있읍니까? 이러한 원칙입니다. 즉 백성의 마음속에 감사함이 강하게 남아 있는 동안에는, 백성이 “쌓아 더미를 이루”도록 여호와께 바침으로써 즐거이 그것을 증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이 잊혀지거나 썰물처럼 빠져 나갔을 때는, 즐거이 물질을 바치는 일이 사실상 중단되었읍니다. 오늘날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나쁜 태도를 나타낼 수 있읍니까? 나타낼 수 있읍니다. 우리는 아직도 인간의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신 일을 기록으로 남기심으로써, 현 사물의 제도의 끝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러한 일들로부터 배우고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마련하신 것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로마 15:4; 고린도 전 10:11.
12. (ㄱ) 오늘날 여호와의 백성이 처한 입장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이 처했던 입장과 비슷합니까? (ㄴ) 우리는 무엇을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읍니까?
12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여호와의 백성에게는 감사해야 할 이유들이 많이 있읍니다. 우리 역시 동료 인간들이 누리는 것보다 더 많은 축복들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여호와의 목적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아들을 기꺼이 희생하셨는지를 배웠으며,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사람들이 받게 될 축복들에 대해서 알고 있읍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영적 낙원에 머무는 특권을 누리고 있읍니다. 1919년 이래로,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웅대한 영적 토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감사해야 할 부가적인 이유들이 많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읍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은 얼마나 깊은가? 또한 현 20세기에 우리는 감사하고 있음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현대의 평행점들
13, 14. 그리스도인들이 모세에 의한 율법 아래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십일조 율법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어떤 평행점을 이끌어 낼 수 있읍니까?
13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감사함을 나타내는 방법을 요약한 마련인 모세에 의한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3:24, 25) 우리가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의 “희생”은 “그분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히브리 13:15, 신세) 그러므로, 이것은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함을 나타낼 수 있는 주된 방법입니다. 그러나 십일조와 헌물 및 이삭줍기에 관한 율법으로부터 흥미있는 평행점들을 이끌어 낼 수 있읍니다.
14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라는 구체적으로 명시된 양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였읍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읍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여호와의 종들 모두에게는 역시 선택의 여지 없이 부과되는 구체적인 명령들이 있읍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함께 모이고, 여호와의 왕국에 대한 좋은 소식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돕지 않으면 안 됩니다.—히브리 10:24, 25; 마태 24:14; 28:19, 20.
15. 마음의 관대한 정도를 나타내는 현대의 무슨 지표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헌물과 이삭줍기의 마련에서 드러난 것들과 평행합니까?
15 헌물과 이삭줍기의 마련도 기억하십시오. 구체적인 양이 규정되어 있지 않았읍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여호와의 증인 각자가 거룩한 봉사에 바쳐야 하는 시간의 양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에 바치는 시간의 양은 관대하고 비이기적인 마음의 동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물질적 기부를 하는 정도도 각 사람의 마음이 지시하는 바에 달려 있읍니다. 감사의 깊이는 오늘날 하나님의 종이 “쌓아 더미를 이루”도록 바칠 것인지, 아니면 그럭저럭 적당히 바치고 말 것인지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역대 하 31:6)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와 같이, 감사함을 더 크게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들도 그만큼 더 풍성할 것입니다.
감사함을 나타내는 방법들
16-18.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구체적인 방법들로 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낼 수 있읍니까?
16 여호와께 감사함을 나타내는 가장 직접적인 한 가지 방법은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마음이 그러한 봉사를 갈망할 정도로 크게 감사하고 있읍니까? 성공적인 파이오니아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로 봉사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다음으로는 적당한 환경이라는 것을 우리는 많이 관찰해 왔읍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강하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인식 깊은 마음속에서 보다 많이 솟아납니다. 당신도 그와 같이 느낍니까? 현재 환경상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파이오니아 영을 억누를 필요는 없읍니다. 파이오니아들에게 온 마음을 다한 지원과 격려를 베풀 수 있읍니다.
17 현재 파이오니아를 할 수는 없지만, 때때로 보조 파이오니아를 할 수 있읍니까?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해마다 전파하는 일에 보통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격려하는 특별한 시기들이 있읍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름철이 이상적인 시기이며, 10월에는 잡지 예약 운동과 관련하여 부가적인 활동이 있읍니다. 거룩한 봉사에 바치는 시간을 증가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관대하게 바친다는 원칙은 여전히 참됩니다.
18 감사함을 나타내는 또 한 가지 구체적인 방법은 지구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권적 건축 계획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새로운 왕국회관이 건축되고 있으며, 기존의 회관들이 너무 붐비기 때문에 확장되고 있읍니다. 새로운 대회 회관이 건축되고 있으며, 벧엘 숙소와 공장들이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고 있읍니다. 우리가 이러한 건축 계획을 위해서 노동을 제공하거나 필요한 재정적 기부를 하는 것은 여호와께 감사함을 나타낼 수 있는 매우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궁핍한 과부의 훌륭한 본
19. 성전에 있던 궁핍한 과부와 관련하여 가장 인상적인 점은 무엇입니까?
19 관대하게 물질을 바침으로써 감사함을 나타낸 것으로 잘 알려진, 성서에 나오는 본은 예수께서 묘사하신 과부의 본입니다. (누가 21:1-4) 그 과부는 그와 같이 적은 액수의 동전 두닢이 성전과 그곳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물질적인 복지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과부는 성전과 그곳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을 보면서,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잘 살고, 누추한 내 집보다 더 좋은 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사실, 성전은 상당히 호화스럽고 아름다왔읍니다. 그것은 “미석과 헌물로 꾸민” 건물이었읍니다. (누가 21:5) 그러나 그 과부는 기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읍니다. 그 과부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여호와께 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내기를 원하였읍니다.
20. 우리는 가난한 과부가 나타낸 태도와 동일한 훌륭한 태도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읍니까?
20 오늘날 여호와의 백성은 이러한 본으로부터 교훈을 얻습니다. 궁핍한 과부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백성은 자신들의 기부가, 많든 적든간에, 하나님께 바치는 것임을 알고 있읍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지상 조직은 어느 누구도 결코 재정적인 이득을 취할 수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호와의 백성은 확신을 갖게 됩니다. 협회의 시설은 부지런한 일꾼들이 성서와 성서 보조 서적의 질 높은 생산과 왕국 권익을 위한 봉사에서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건축되고 운영됩니다. 최근에 일부 텔레비전 복음 전파자들과 관련하여 보도된 바와 같은 기부금 오용의 추문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룹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생각나게 하는 것들은 유익하다
21, 22. 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내도록 생각나게 하는 친절한 마련들은 인식 깊은 마음에 무슨 영향을 불러일으켜야 합니까?
21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의무, 특히 감사하는 영을 증명해야 할 필요성을 계속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필요하였읍니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문제들에 이스라엘 백성의 주의를 이끌게 되면,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다시 불타 올랐으며, 말로 하는 것 이상으로 감사의 인식을 표현하는 결과를 낳았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숭배의 집에서 사용되도록 생산물을 ‘쌓아 더미를 이룰’ 정도로 여호와께 자진적으로 바쳤읍니다.
22 그러므로 현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과 그들의 반려자들인 “큰 무리”도 언제나 동일한 느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 6:16; 계시 7:9)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동되어 “쌓아 더미를 이루”도록 여호와께 찬양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진정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관대하고 인자하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읍니다.”
기억하십니까?
◻ 그리스도인들이 감사하는 마음의 정도를 끊임없이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왜 여호와의 백성에게는 감사해야 할 부가적인 이유가 항상 있었읍니까?
◻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 대한 감사함을 무슨 구체적인 방법들로 나타낼 수 있었읍니까?
◻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감사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무슨 구체적인 일들을 할 수 있읍니까?
◻ 우리는 성전에서의 궁핍한 과부의 태도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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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와 맏물을 바치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마련함으로써 감사함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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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필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그분의 백성을 향한 생각들에 대해서 그분에게 감사하였다
[10면 삽화]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은 야외 봉사와 신권적 건축 계획 및 물질적 기부를 하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감사함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