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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통찰, 제2권
통-2 “카이사레아”

카이사레아

(Caesarea) [카이사르의]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헤롯 대왕이 지중해 연안에 세운 중요한 항구 도시. 원래의 지역은 이전에 ‘스트라톤의 탑’ 혹은 ‘스트라토의 탑’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한 시돈인 통치자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명명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의 옛 이름은 카이사리예(오늘날 히브리어로 호르바트케사리로 불림)라는 아랍어 이름에 아직도 남아 있다. 이곳은 갈멜 산에서 남쪽으로 4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고 예루살렘에서 북북서쪽으로 87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980면 삽화]

카이사레아. 헤롯 대왕이 인공 항구를 조성하기 위해 만든 방파제(지금은 물에 잠겨 있음)가 보인다

이 도시의 건설과 초기 역사에 관한 정보는 주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를 통해 얻게 된다. 헤롯 대왕은 이곳을 사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성읍과 함께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그는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세바스테라고 명명한 후 해안 지역으로 주의를 돌려 ‘스트라토의 탑’에 거대한 항구와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이 공사는 10년에서 12년이 걸렸으며 봉헌식은 기원전 10년경에 가졌다. 이처럼 건설된 항구와 도시에 헤롯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름을 붙여서, 도시는 카이사레아로, 그리고 항구는 세바스토스(아우구스투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 불리게 되었다. 이 도시는 건축재와 건축 양식 모두 매우 아름다웠으며, 신전과 극장, 그리고 대규모 군중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원형 극장을 갖추고 있었다. 카이사레아에는 수도교를 통해 신선한 물이 공급되었으며 도시 밑으로 만들어진 배수 시설을 통해 물과 하수가 바다로 배출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업적은 이 도시에 인공 항구를 건설한 것이다.

헤롯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해임된 후, 카이사레아는 유대 지역을 통치하는 로마 장관(프로쿠라토르)의 공식 거주지가 되었다. 사도행전의 성서 기록에서 이 도시는 항구로서 또한 정부 소재지로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사마리아에서 성공적으로 선교 봉사를 했던 빌립은 뒤이어 아스돗 도시에서부터 북쪽으로 9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카이사레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시를 두루 다니며 해안 지역에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하였다. (행 8:5-8, 40)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 바울이 개종하였으며, 그가 예루살렘에서 전파 활동을 시작하자 그를 해치려는 음모가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은 이 새로운 형제를 카이사레아 항구로 데리고 가서 그의 고향인 타르수스로 보냈다.—행 9:28-30.

카이사레아는 로마 군대의 주요 본영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백인대 대장 고넬료의 집이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도시에는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기원 36년에 베드로는 하느님의 인도를 받아 적절한 곳으로 간 것이었다. 그는 거기서 할례받지 않은 고넬료와 그의 친족들과 그의 친밀한 친구들에게 증거하고 그들이 침례를 받아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는 최초로 그리스도인 회중으로 받아들여지게 하였다.—행 10:1-48.

헤롯 아그리파 1세가 베드로를 투옥시키는 데 실패한 후 물러간 곳도 역시 카이사레아이다. 이곳에서 그는 티레와 시돈에서 온 대표단을 맞으며,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죽음을 맞았는데(기원 44년), 그의 죽음은 하느님의 불리한 심판으로 인한 것이었다. (행 12:18-23) 바울은 자신의 이 차와 삼 차 선교 여행이 거의 끝났을 때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길에 카이사레아를 지나갔다. (행 18:21, 22; 21:7, 8) 바울이 두 번째로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그와 그의 동료들은 복음 전파자 빌립의 집에서 묵었는데, 아마도 빌립은 초기 전파 여행이 끝난 후 카이사레아에 정착한 것 같다. 바울이 카이사레아에 있는 동안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고가 예언자 아가보를 통해 주어졌지만, 그곳에 있던 몇몇 제자들은 이제 그 항구에서 예루살렘까지 그 사도와 함께 갔다.—행 21:10-16.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한 바울은 그에 대한 암살 음모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엄중한 경호 속에 카이사레아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펠릭스 총독에게 넘겨졌다. (행 23:23, 24) 감정에 치우친 종교적 편견으로 인해 쉽게 폭동까지 일어나는 예루살렘의 상태와 비교적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는 카이사레아의 상태 사이에 존재한 현격한 차이는, 카이사레아에서 로마 사람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다는 사실과 로마 군대의 주요 수비대의 주둔지로서 이 도시가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보여 주는 증거로 생각된다. 펠릭스의 뒤를 이은 페스투스 총독은 예루살렘에 있는 바울의 유대인 반대자들을 카이사레아로 내려오게 하여 그에 대해 고발하게 하였으며, 바울은 이때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기보다는 카이사르에게 상소하였다. (행 25:1-12) 로마로 이송될 때를 기다리며 아직 카이사레아에 있는 동안, 바울은 페스투스와 그를 내방한 왕족들인 왕 아그리파 2세와 그의 누이인 베르니케 앞에서 그리스도교에 관해 강력한 증거를 할 수 있었다. (행 25:13, 22-27; 26:1-32) 죄수 신분으로 바울이 결국 로마에 이르게 되는 항해를 시작한 곳 역시 카이사레아였다.—행 27:1, 2.

네로의 통치 중에 카이사레아의 유대인과 시리아인 주민들 사이에서 격렬한 세력 다툼이 벌어졌으며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반란의 불을 붙여 결국에는 기원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초래한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1961년에 카이사레아의 극장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들어 있는 라틴어 비문이 새겨진 석비(石碑)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그러한 비문으로서는 최초로 발견된 것이었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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