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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러분의 이지력으로 드리는 신성한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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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러분의 이지력으로 드리는 신성한 봉사’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5
  • 소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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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5
파95 6/15 18-23면

‘여러분의 이지력으로 드리는 신성한 봉사’

“여러분의 몸을 살아 있고 거룩하고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희생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이지력으로 드리는 신성한 봉사입니다.”—로마 12:1.

1, 2. 성서 원칙들을 적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어떻게 새로운 언어를 터득하는 것과 유사합니까?

새로운 언어를 배우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그것이 힘든 일이라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아무튼, 단지 새로운 단어들을 배우는 것 이상의 많은 것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려면 또한 그 언어의 문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당신은 단어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며 그리고 그 단어들이 완전한 사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의 지식을 섭취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단지 개개의 성구들을 배우는 것 이상의 많은 점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말하자면 성서의 문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구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며 그리고 그 성구들이 어떻게 매일의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원칙 역할을 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온전히 유능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완전히 갖추게” 될 수 있습니다.—디모데 둘째 3:17.

3. 하느님께 드리는 봉사와 관련하여, 기원 33년에 무슨 변화가 있었습니까?

3 모세의 법전 마련 아래서는, 잘 규정된 규칙들에 엄격히 고착함으로써 충실성의 증거를 상당히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원 33년에, 여호와께서는 율법을 없애 버리시어, 사실상 자기 아들이 죽임을 당한 ‘고통의 기둥에 그것을 못박’으셨습니다. (골로새 2:13, 14) 그 후에는, 바쳐야 할 희생과 따라야 할 규칙들의 광범위한 목록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이러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살아 있고 거룩하고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희생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이지력으로 드리는 신성한 봉사입니다.” (로마 12:1)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하였습니다. (마가 12:30; 비교 시 110:3) 그러면 ‘이지력으로 신성한 봉사’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4, 5. 우리의 이지력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는 무엇이 관련됩니까?

4 “이지력”이라는 표현은 “합리적인” 혹은 “지성 있는”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로기코스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들은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을 사용하도록 요청받습니다. 미리 정해진 수많은 규칙을 결정의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원칙들을 주의 깊이 고려해야 합니다. 그들은 성서의 “문법”을 혹은 다양한 성서 원칙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이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이지력으로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5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법이 없다는 의미입니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은 우상 숭배, 성적 부도덕, 살인, 거짓말, 영매술, 피의 오용,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죄를 명확히 금합니다. (사도 15:28, 29; 고린도 첫째 6:9, 10; 계시 21:8) 그렇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는 이지력을 사용하여 성서 원칙들을 배우고 적용해야 합니다. 새로운 언어를 이해하는 일과 매우 흡사하게, 이것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입니다. 우리의 이지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이지력을 키우는 일

6. 성서를 연구하는 일에는 무엇이 관련됩니까?

6 우선, 우리는 열렬한 성서 연구생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감받은 말씀은 “가르치고 책망하고 사물을 바로잡고 의로 징계하는 데 유익”합니다. (디모데 둘째 3:16)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이 언제나 하나의 성구에 나와 있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특정한 상황이나 문제에 빛을 비추는 여러 성구들을 놓고 추리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하느님의 생각을 부지런히 찾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잠언 2:3-5) 우리는 또한 이해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숙련된 지침을 얻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5, 「신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어떤 문제의 각 요소들을 분리한 다음 그 요소들의 상호 관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조각그림 맞추기에서 하는 것처럼, 그 사람은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조각들을 맞춥니다.

7. 부모들은 징계에 관한 성서 원칙들을 놓고 어떻게 추리할 수 있습니까?

7 예를 들어, 부모의 역할을 생각해 봅시다. 잠언 13:24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근실히 징계”한다고 말합니다. 이 성구만 생각한다면, 이 성구를 가혹하고 엄한 벌을 정당화하는 데 잘못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골로새 3:21은 이러한 균형 잡힌 훈계를 베풉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를 분내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낙담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지력을 사용하고 이러한 원칙들을 조화시키는 부모들은 “학대”라고 할 수 있는 징계에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부모들은 따뜻하고 이해심 있게 그리고 품위 있게 자녀들을 대할 것입니다. (에베소 6:4) 이와 같이 부모의 역할이나 그 밖에 성서 원칙들이 관련된 어떤 문제와 관련해서도, 우리는 관련된 모든 요인들을 비교 검토함으로 우리의 이지력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서 원칙들의 “문법”, 즉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분의 의도대로 할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8. 우리는 오락과 관련하여 어떻게 완고하고 독단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까?

8 우리의 이지력을 키우는 두 번째 방법은, 완고하고 독단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융통성이 없는 견해는 우리의 이지력이 자라는 데 방해가 됩니다. 오락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성서는 “온 세상은 악한 자의 권세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 첫째 5:19) 이것은 세상에서 만드는 모든 서적이나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가 부패한 것이고 사탄적이라는 의미입니까? 그러한 견해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텔레비전이나 영화나 세속 출판물은 모두 가까이하지 않는 쪽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권리이며, 그 점에 대해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과 비슷한 엄격한 태도를 취하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협회는 우리가 기분 전환이나 오락에서 지혜롭게 선택적이 되게 해주는 성서 원칙들을 설명하는 기사들을 발행해 왔습니다. 이러한 지침들의 경계를 넘어서서, 이 세상의 많은 오락에 나오는 부도덕한 생각이나 심한 폭력 혹은 영매술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은 매우 지혜롭지 못합니다. 참으로, 오락과 관련하여 현명한 선택을 하려면, 우리는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떳떳한 양심을 갖기 위하여 이지력을 사용하여 성서 원칙들을 적용해야 합니다.—고린도 첫째 10:31-33.

9. “충분한 분별력”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9 현대 오락의 많은 부분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적합합니다.a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미워”하도록 마음을 훈련시켜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모든 도덕 감각을 상실”한 1세기의 일부 사람들과 같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 97:10; 에베소 4:17-19)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추리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정확한 지식과 충분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빌립보 1:9) “분별력”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민감한 도덕 지각”을 의미합니다. 그 단어는 시력과 같은, 말 그대로 인간의 감각을 가리킵니다. 오락이나 그 밖에 개인적으로 결정해야 할 어떤 문제와 관련해서도, 우리의 도덕 감각에 초점을 맞춤으로 우리는 분명히 명시된 흑백 문제만 아니라 회색 지대에 속한 문제들도 지각할 수 있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성서 원칙들을 다소 비합리적일만큼 극단적으로 적용하는 일을 피해야 하며, 우리의 형제들도 모두 똑같이 해야 한다고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빌립보 4:5.

10. 우리는 시편 15편에 나타나 있는 여호와의 성품을 어떻게 이해하게 될 수 있습니까?

10 우리의 이지력을 키우는 세 번째 방법은, 여호와의 생각을 잘 알고 그것을 우리의 마음속 깊이 새기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말씀 가운데서 자기의 성품과 표준들을 밝히십니다. 예를 들어, 시편 15편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어떤 유의 사람을 자기 장막의 손님으로 초대하시는지에 대해 읽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의를 실천하고 마음의 진실을 말하며, 자기가 한 약속을 꼭 지키고 다른 사람을 이기적으로 이용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을 읽으면서,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이 특성들은 나를 묘사하는 것인가? 여호와께서는 나를 그분의 장막의 손님으로 초대하실 것인가?’ 우리의 지각력은 우리가 여호와의 길과 생각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잠언 3:5, 6; 히브리 5:14.

11.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공의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무시”하였습니까?

11 바로 이 부면에서 바리새인들은 비참할 정도로 실패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전문적인 체계는 알고 있었지만 율법의 “문법”은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수많은 세부적인 점들은 암송하였지만, 그 배후에 계신 분의 성품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박하와 루타와 다른 모든 채소의 십분의 일은 드리지만, 공의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무시[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11:42)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완고한 정신과 무정한 마음 때문에 이지력을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곡식을 따서 그 낟알을 먹는 것에 대해 비난하면서도 같은 날 나중에 예수를 살해할 모의를 꾸미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때, 자기들의 추리가 모순됨을 분명히 나타냈습니다.—마태 12:1, 2, 14.

12. 우리는 어떻게 한 인격체로서의 여호와와 더욱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12 우리는 바리새인들과는 다르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한 인격체로서의 여호와와 더욱 조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여호와와 더욱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일부 사람들은 성서나 성서에 근거한 서적의 일부를 읽은 다음 이러한 질문들을 숙고함으로 도움을 받아 왔습니다. ‘이 내용은 여호와와 그분의 특성들에 관하여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일에서 어떻게 여호와의 특성들을 분명히 나타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이지력을 발전시키며 우리가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게 해줍니다.—에베소 5:1.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종이다

13.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도덕 독재자같이 행동하였습니까?

13 장로들은 자기들이 돌보는 사람들이 이지력을 사용하게 해야 합니다. 회중 성원들은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아직도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갈라디아 1:10; 골로새 3:23, 24) 그와는 대조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승인보다 사람의 승인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마태 23:2-7; 요한 12:42, 43)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규칙을 만든 다음 사람들이 그 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에 따라 사람들을 판단하는, 도덕 독재자가 되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따른 사람들은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을 사용하는 일에서 약해졌으며, 사실상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14, 15. (ㄱ) 장로들은 자신들이 양 무리와 함께 하는 동료 일꾼들임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ㄴ) 장로들은 양심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14 오늘날 그리스도인 장로들은 양 무리가 주로 자기들 앞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자기 자신의 짐을 져야 합니다. (로마 14:4; 고린도 둘째 1:24; 갈라디아 6:5)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실제로, 만일 양 무리의 성원들이 사람의 종이 되어 단지 감시받기 때문에 순종한다면, 그들은 그러한 감시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 대해 기뻐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항상 순종해 온 것과 같이, 내가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기꺼이 순종하십시오. 그리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 나가십시오.” 그들은 진실로 그리스도의 종이었지 바울의 종이 아니었습니다.—빌립보 2:12.

15 그러므로 양심 문제에서, 장로들은 자기들이 돌보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결정하지 않습니다. 장로들은 어떤 문제와 관련된 성서 원칙들을 설명한 다음 관련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이지력을 사용하여 결정을 하게 합니다. 본인이 이지력을 사용하여 결정을 하는 것은 심각한 책임이며, 한편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이기도 합니다.

16. 이스라엘에는 문제를 다루는 무슨 제도가 있었습니까?

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던 기간을 생각해 봅시다. 성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사사 21:25)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이 지침을 얻을 수 있는 수단들을 제공하셨습니다. 각 도시에는 질문과 문제들에 대해 장성된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연로자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백성을 하느님의 법으로 교육시킴으로 선을 행하게 하는 힘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 대제사장은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느님께 물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 통찰」(Insight on the Scriptures)에서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이러한 마련을 이용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얻고 적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양심의 든든한 안내자가 있었다. 그러한 경우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백성이 자원하는 혹은 자원하지 않는 태도와 행로를 나타낼 수 있게 하셨다.”—제2권, 162-3면.b

17. 장로들은 그들 자신의 표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표준에 따라 교훈하는 것임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17 이스라엘의 사사들과 제사장들처럼, 회중의 장로들은 문제들에 대한 장성된 도움을 주며 가치 있는 교훈을 베풉니다. 때때로 그들은 “오래 참음과 가르치는 기술을 다하여 책망하고 질책하고 권고”하기까지 합니다. (디모데 둘째 4:2) 장로들은 그들 자신의 표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표준에 따라 그렇게 합니다. 장로들이 모범을 세우고 마음을 감동시키려고 애쓸 때 그것은 참으로 효과적입니다!

18. 장로들이 마음에 호소하는 것이 특히 효과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18 마음은 우리의 그리스도인 활동의 “엔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고 말합니다. (잠언 4:23) 마음을 감동시키는 장로들은, 그렇게 할 때 회중 성원들이 하느님의 봉사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동기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회중 성원들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자극을 받을 필요가 없는,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강요된 순종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에서 우러나온 순종을 기대하십니다. 장로들은 양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이지력을 발전시키도록 도움으로써 그러한 마음이 움직여서 하는 봉사를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배양함

19, 20. 그리스도의 생각을 배양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 살펴본 바와 같이, 단지 하느님의 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하고 시편 필자는 간청하였습니다. (시 119:34)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말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생각”을 밝히셨습니다. (고린도 첫째 2:16) 이지력으로 여호와를 섬긴 사람으로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한 모본을 남기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법과 원칙들을 이해하셨으며, 그것들을 흠잡을 데 없이 적용하셨습니다. 그분의 모범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정신적으로 철저히 파악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철저히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 3:17-19)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예수에 관해 배우는 것은 머리 속의 학구적인 지식 이상의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여호와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명료한 상을 갖게 해줍니다.—요한 14:9, 10.

20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함에 따라, 우리는 문제들에 대한 여호와의 생각을 분별하고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노력이 들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의 열렬한 연구생이 되어, 여호와의 성품과 표준에 민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새로운 문법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이러한 훈계를 따를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살아 있고 거룩하고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희생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이지력으로 드리는 신성한 봉사입니다.”—로마 12:1.

[각주]

a 여기에서의 오락은 악귀적이거나 외설적인 혹은 변태 성욕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 오락과 그리스도인이 승인할 수 없는 난잡하거나 방임적인 생각을 장려하는 소위 가족 오락을 제외한 오락이다.

b 뉴욕 법인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무엇을 배웠습니까?

◻ 하느님께 드리는 봉사와 관련하여, 기원 33년에 무슨 변화가 있었습니까?

◻ 우리는 어떻게 이지력을 키울 수 있습니까?

◻ 장로들은 양 무리에 속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종이 되도록 도울 수 있습니까?

◻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생각”을 배양해야 합니까?

[23면 삽화]

장로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지력을 사용하도록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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