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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99 12/15 14-19면
  •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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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합시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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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9
파99 12/15 14-19면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합시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닙니다].”—히브리 10:39.

1. 어떤 상황으로 인해 사도 베드로는 두려움에 굴복하게 되었습니까?

사도들은 사랑하는 주인이신 예수께서 그들 모두가 흩어질 것이고 그분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틀림없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것도 그분이 가장 어려울 때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걸려 넘어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하였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용감하고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배반당하여 체포되시자 사도들은 흩어졌으며, 그 가운데는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시는 동안, 베드로는 걱정이 되어 그 집 뜰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추운 밤이 점점 깊어지면서, 아마 베드로는 예수는 물론 그분의 동료들은 누구라도 처형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옆에 있던 몇몇 사람이 그가 예수의 친밀한 동료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자, 베드로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부인하였습니다!—마가 14:27-31, 66-72.

2. (ㄱ) 예수께서 체포되시던 밤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행동했다고 해서 베드로가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우리는 어떤 결심을 해야 합니까?

2 그 일은 베드로의 생애에서 최악의 순간이었으며, 틀림없이 베드로는 그 후로 평생 동안 그 순간을 후회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 밤에 했던 행동 때문에 베드로를 겁쟁이였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일 때문에 베드로를 사도 바울이 후에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썼을 때 묘사한 사람들과 같은 부류였다고 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 10:39) 아마 우리 대부분은 바울의 말이 베드로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두려움은 일시적인 것으로, 탁월한 용기와 믿음이 특징을 이루었던 생애 중에 있었던 순간적인 실수였기 때문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우리 대부분에게는 돌이켜 보면 어느 정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과거의 순간들이, 어쩌면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원하던 만큼 진리를 담대하게 옹호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교 로마 7:21-23) 우리는 그러한 순간적인 실수들을 저질렀다고 해서 우리가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러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뒤로 물러나서 멸망한다는 말의 의미

3. 예언자 엘리야와 요나는 어떻게 두려움에 굴복하였습니까?

3 바울은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에 관하여 썼을 때, 순간적인 실수로 용기 있게 행동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베드로의 경험이나 그와 비슷한 다른 경우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담대하고 기탄없이 말하는 예언자였던 엘리야도 두려움에 굴복하여 목숨을 부지하려고 도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악한 왕비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위협하였기 때문입니다. (열왕 첫째 19:1-4) 예언자 요나는 두려움 때문에 더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요나에게 폭력으로 유명한 악한 도시 니네베로 가라고 임명하셨습니다. 요나는 즉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는데, 다시스는 반대 방향으로 35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요나 1:1-3) 하지만 이 충실한 예언자들과 사도 베드로를 뒤로 물러난 사람들로 묘사하는 것은 부당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5. (ㄱ) 히브리 10:39에서 바울이 무슨 의미로 “멸망”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지를 이해하는 데 문맥을 살펴보는 것이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ㄴ)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 바울의 말은 무슨 의미였습니까?

4 바울이 사용한 표현 전체에 유의해 보십시오. 바울은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무슨 의미로 “멸망”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까?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단어는 때때로 영원한 멸망을 가리킵니다. 영원한 멸망이라는 정의가 이 문맥에서는 꼭 맞습니다. 바울은 조금 앞에서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정확한 지식을 받은 후에 고의로 거듭 죄를 짓는다면, 더 이상 죄를 위한 희생이 남아 있지 않고, 도리어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찬 예상과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불타는 질투가 있을 뿐입니다.”—히브리 10:26, 27.

5 따라서 바울이 동료 신자들에게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 말은, 바울과 그의 글을 읽는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로부터 결코 돌아서지 않고 그분을 섬기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음을 의미하였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게 된다면, 결국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가리옷 유다는 뒤로 물러나 그러한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고의로 여호와의 영을 거슬러 행하였던 진리의 적들처럼 되었습니다. (요한 17:12; 데살로니가 둘째 2:3) 그러한 사람들은 상징적인 불못에서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겁쟁이들” 가운데 포함됩니다. (계시 21:8) 우리는 결코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6. 사탄 마귀는 우리가 어떤 행로를 취하게 되기를 바랍니까?

6 사탄 마귀는 우리가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기를 바랍니다. “간교한 행위”의 명수인 그는 그러한 파멸적인 행로가 흔히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에베소 6:11, 신세계역 참조주 성서 각주 참조) 사탄은 직접적인 박해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 좀더 교활한 수단을 사용하여 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침식시키려고 합니다. 사탄은 담대하고 열심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잠잠히 있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바울이 편지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탄이 어떤 술책을 사용하였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뒤로 물러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방법

7. (ㄱ) 예루살렘 회중의 역사는 어떠하였습니까? (ㄴ) 바울의 글을 읽은 일부 사람들은 영적으로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7 증거에 의하면, 바울은 기원 61년경에 히브리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예루살렘 회중의 역사는 파란만장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폭력적인 박해의 물결이 밀어닥쳐서, 그 도시에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로운 기간이 뒤따랐으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도 8:4; 9:31) 여러 해가 지나면서, 때때로 박해와 난관을 겪었습니다. 바울이 히브리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을 무렵에는 회중이 다시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을 누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압력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 지 거의 30년이 지났습니다. 끝이 너무 오래 지체되고 있으며 자신들의 생애 중에는 끝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일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특히 비교적 최근에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 가운데는, 아직 심각한 박해와 같은 시험을 겪은 적이 없고 시련 아래서 인내할 필요성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 12:4) 분명히 사탄은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사탄은 어떤 “간교한 행위”를 사용하였습니까?

8. 많은 유대인들은 갓 형성된 그리스도인 회중에 대해 어떤 태도를 나타냈습니까?

8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의 유대인 사회는 갓 형성된 그리스도인 회중을 멸시하였습니다. 바울의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오만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퍼부었던 조롱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이런 취지로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세기 동안 예루살렘에 서 있는 거대한 성전이 있다! 우리에게는 그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고귀한 대제사장과 보조 제사장들이 있다. 매일 희생이 바쳐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천사들을 통해 모세에게 전해지고 시나이 산에서 큰 표징으로 확정된 율법이 있다. 이제 막 시작된 분파인 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에서 배교한 자들이며, 그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하나도 없다!’ 그러한 조롱은 바라던 효과를 거두었습니까? 일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비난 때문에 혼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했던 이유

9. (ㄱ)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무슨 주제가 역력히 나타나 있습니까? (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나은 성전에서 섬기고 있었습니까?

9 바울이 유대 지방에 있던 형제 자매들에게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한 두 가지 점을 검토해 봅시다.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교 숭배 체계의 우월함인데, 그 점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역력히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 전체에 걸쳐서 이 주제를 전개해 나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훨씬 더 큰 실체 즉 “손으로 만들지 않은” 건물인 여호와의 영적 성전의 모형에 불과하였습니다. (히브리 9:11) 그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한 숭배를 위한 그러한 영적 마련 안에서 섬기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계약 아래서, 오래 전에 약속된 새 계약 아래서 섬겼으며, 그 계약의 중개자는 모세보다 더 탁월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예레미야 31:31-34.

10, 11. (ㄱ) 예수께서 그분의 계보 때문에 영적 성전에서 대제사장으로 섬길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예수는 어떤 면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섬기는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한 대제사장이셨습니까?

10 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한 훨씬 더 나은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셨습니다. 사실 그분은 아론의 후손이 아니셨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분은 “멜기세덱의 방식을 따”른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시 110:4) 계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멜기세덱은 고대 살렘의 왕이자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를 전영하는 적절한 예언적 모형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사직은 불완전한 인간 조상에게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우월한 것 즉 여호와 하느님께서 친히 맹세하신 서약에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는 멜기세덱처럼 대제사장으로만이 아니라 왕으로도 봉사하시며, 결코 죽지 않으실 분입니다.—히브리 7:11-21.

11 더욱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대제사장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해마다 희생을 바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분이 희생하신 것은 그분 자신의 완전한 생명이었으며,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단 한 번에 바치셨습니다. (히브리 7:27) 성전에서 드렸던 모든 희생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서, 예수께서 바치신 희생을 전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완전한 희생은 믿음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의 죄를 실제로 용서하기 위한 마련이었습니다. 또한 이 대제사장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알고 있던 바로 그분 즉 변함이 없으신 예수라는 바울의 설명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그분은 겸손하시고 친절하시며 “우리의 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히브리 4:15; 13:8) 그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보조 제사장들로 섬길 전망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뒤로 물러나서 부패한 유대교의 “약하고 천한” 것들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갈라디아 4:9.

12, 13. (ㄱ) 바울은 결코 뒤로 물러나지 말아야 할 무슨 두 번째 이유를 제시하였습니까? (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결코 없게 하는 데 과거의 그들 자신의 인내의 기록이 격려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2 바울은 마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라도 한 듯이,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를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인내의 기록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을 당하면서 큰 싸움을 인내한 이전의 날들을 계속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그들이 “극장에서처럼” 치욕과 환난에 “노출”되었던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투옥을 당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며,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나타내어 그들을 지원해 주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범이 되는 믿음과 꾸준함을 나타냈습니다. (히브리 10:32-34) 하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그러한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계속 기억”하라고 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한다면 용기를 잃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13 그와는 반대로, 히브리 사람들이 ‘이전의 날들을 기억’한다면 그들은 여호와께서 어떻게 시련 아래서 그들을 붙들어 주셨는지를 상기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그들은 이미 사탄이 가한 많은 공격에 대항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의하지 않으시므로, ·⁠·⁠·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일과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히브리 6:10)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행한 충실한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계셨으며, 그러한 일들을 자신의 무한한 기억 속에 간직해 두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고 권고하신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어떤 도둑도 그러한 보물을 훔쳐 갈 수 없으며, 또 옷좀나방이나 녹이 그러한 보물을 먹어치울 수도 없습니다. (마태 6:19-21) 사실 그러한 보물은 그리스도인이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경우에만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을 모두 탕진해 버리는 셈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행로를 결코 추구하지 말아야 할 참으로 강력한 이유를 제시하였습니다! 충실한 봉사에 바친 그 모든 세월이 허사가 되게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계속 인내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훨씬 더 나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하는 이유

14. 우리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했던 것과 비슷한 어떤 도전들에 직면합니까?

14 오늘날 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뒤로 물러나지 말아야 할 그와 똑같은 강력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순결한 숭배 방식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큰 축복을 누리고 있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1세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좀더 대중적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를 비웃고 조롱하면서 자기들의 웅장한 종교 건물들과 오래 된 전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우리의 숭배 방식을 승인하고 계심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누리지 못했던 축복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성전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을 때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기원 29년에 침례를 받으시어 그 성전의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분이 죽은 후에도 기적들이 더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예언된 대로, 그러한 선물들은 마침내 그쳤습니다.—고린도 첫째 13:8.

15. 오늘날 참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때에 살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15 하지만 우리는 에스겔 40-48장에 나오는 광범위한 성전 예언이 의미심장하게 성취되고 있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a 따라서 우리는 순결한 숭배를 위한 하느님의 마련이 회복되는 것을 목격해 온 것입니다. 이 영적 성전은 온갖 형태의 종교적 오염과 우상 숭배로부터 깨끗해졌습니다. (에스겔 43:9; 말라기 3:1-5) 이러한 깨끗하게 하는 일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유익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16.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실망스러운 추세에 직면하였습니까?

16 1세기에, 그리스도인 회중 조직의 장래는 암울해 보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 회중이 마치 새로 씨를 뿌린 밀밭에 잡초가 덧뿌려져서 밀과 잡초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상태처럼 될 것이라고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마태 13:24-30)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연로한 사도 요한이 부패를 막는 마지막 억제력으로 작용하고 있었을 때인 1세기 말에, 이미 배교가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둘째 2:6; 요한 첫째 2:18) 사도들이 사망한 지 오래지 않아, 교직자 계급이 새로 출현하여 양 떼를 압제하고 구별되는 복장을 입었습니다. 배교는 괴저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순결한 숭배를 위해 새로 설립된 마련이 부패한 제도에 의해 파묻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태 진전은 예수께서 회중의 기초를 놓으신 지 한 세기가 채 안 되어 일어났습니다.

17. 현대의 그리스도인 회중은 어떤 의미에서 1세기의 그리스도인 회중보다 더 오래 존속해 왔습니까?

17 이제 그와는 상반되는 일을 고려해 보십시오. 오늘날 순결한 숭배는 사도들이 사망하였을 때까지의 기간보다 이미 더 오랜 기간 존속해 왔습니다! 과거 1879년에 본지의 첫 호가 발행된 때부터, 여호와께서는 숭배가 점점 더 순결해지게 하심으로 우리를 축복해 오셨습니다. 여호와와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영적 성전을 깨끗이 할 목적으로 1918년에 그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말라기 3:1-5) 1919년 이후로 여호와 하느님께 숭배를 드리기 위한 마련은 점진적으로 정련되어 왔습니다. 성서 예언과 원칙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 명확해져 왔습니다. (잠언 4:18) 이러한 일에 대한 영예는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한낱 불완전한 인간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께서만이 회중의 머리인 그분의 아들과 함께 이 부패한 시대에 자신의 백성이 부패하지 않도록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순결한 숭배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신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을 결코 잊지 말도록 합시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결코 없게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도록 합시다!

18. 우리에게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할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18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에게도 비겁하게 물러서는 행로를 거부해야 할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인내의 기록입니다. 우리가 최근에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든지 아니면 수십 년 동안 충실하게 그분을 섬겨 왔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인 활동의 기록을 쌓아 왔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투옥이나 금지령이나 잔학 행위나 재산을 잃는 것과 같은 박해를 겪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경우는, 가족의 반대와 멸시와 조롱과 무관심을 겪어 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내하면서, 생활상의 도전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충실한 봉사를 계속 드려 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여호와께서 잊지 않으실 꾸준한 인내의 기록을 하늘의 보물 창고에 쌓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지금은 뒤로 물러나 우리가 이미 버리고 떠났던 부패하고 낡은 제도로 되돌아갈 때가 아닙니다! 우리의 수고가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되게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특히 “조금만” 있으면 끝이 닥치게 될 때인 오늘날은 더더욱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때입니다.—히브리 10:37.

19.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무엇을 검토할 것입니까?

19 그렇습니다.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도록 합시다! 그와는 반대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도록 합시다. (히브리 10:39) 그러면 우리 자신이 그러한 묘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그 점을 고려할 것입니다.

[각주]

a 「파수대」 1999년 3월 1일호 8-23면 참조.

기억하십니까?

□ 뒤로 물러나서 멸망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바울이 편지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압력들을 받고 있었습니까?

□ 바울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없어야 할 무슨 이유들을 제시하였습니까?

□ 우리에게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는 일이 결코 없게 하겠다고 결심해야 할 무슨 이유들이 있습니까?

[15면 삽화]

두려움에 굴복하여 저지른 순간적인 실수 때문에 베드로가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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