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파95 7/1 26-29면
  • 외로웠지만 결코 버림받지 않았다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외로웠지만 결코 버림받지 않았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5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성서 진리와의 첫 접촉
  • 이제 정말 외로웠다
  • 조직과의 접촉
  • 대회, 그리고 마침내 침례
  • 갬비어 산으로 다시 돌아옴
  • 새로운 임명
  •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다
  • 1988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1988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 결심은 성공에 도움이 되었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7
  • 1986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1986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 “마칠 때까지 그 일에 고착하라”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0
더 보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5
파95 7/1 26-29면

외로웠지만 결코 버림받지 않았다

에이다 루이스의 체험담

나는 늘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또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매우 단호한데—다른 사람들은 이따금 그것을 고집이라고 부른다. 나는 또한 얼마나 쉽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이 특성 때문에 나는 그 동안 내내 문제를 겪어 왔다.

하지만 나는 여호와 하느님께서 성격상의 약점을 이유로 나를 버리지 않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연구함으로 내 성격을 고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약 60년 동안 그분의 왕국 권익을 위하여 일해 왔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말(동물)을 무척 좋아하였는데, 하느님께서 나의 다소 고집스러운 면을 제어하도록 도와 주실 때면, 고삐를 사용하여 어떻게 말을 제어할 수 있는지 종종 생각이 났다.

나는 1908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남부 갬비어 산의 아름답고 푸른 호수 근처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낙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나는 여덟 자녀 중 장녀였다. 아버지는 우리 모두가 꽤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그 때문에 나는 농장을 돌볼 책임을 많이 떠맡게 되었다. 두 오빠가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 오느라고 집을 떠나 외지에서 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 생활은 할 일도 많았고 무척 고되었다.

성서 진리와의 첫 접촉

우리 가족은 장로 교회에 다녔으며,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열성적인 성원이었다. 나는 주일 학교 선생이 되었으며,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책임을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1931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의 유품 가운데 당시 워치 타워 협회 회장 J. F. 러더퍼드가 쓴 책이 몇 권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거문고」와 「창조」(Creation)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읽어 내려갈수록 내가 아이들에게 믿고 가르쳐 온 많은 것이 성서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점점 더 놀라게 되었다.

인간 영혼은 불멸이 아니며, 대부분의 사람은 죽어서 하늘에 가지 못할 것이고, 악한 사람들은 지옥불에서 영원한 고초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았다. 또한 매주 일요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당황하였다. 그러므로 중대한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국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고착할 것이냐, 아니면 성서의 진리를 가르치기 시작할 것이냐 하는 결정이었다. 내가 장로 교회와의 모든 교류를 끊기로 결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정말 외로웠다

교회를 그만 다니고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도 더는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나의 가족, 친구, 교회에서 이전에 사귄 사람들이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소위 러더퍼드 판사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열띤 험담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실제로 쫓겨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가족과 이전 친구들 대부분이 나를 냉대하였다.

나는 읽고 있는 책들에 열거된 성구들을 연구하고 조사하면 할수록 더욱더 공개적으로 전파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들의 공개 봉사의 직무의 일부로서 호별 방문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지역에는 증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나를 격려하거나 나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방법을 알려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태 24:14) 무척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라는 성서의 명령이 계속 내 귓전에 울려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전파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기도를 많이 한 후, 나는 이웃집들부터 방문하기 시작해서 단지 내가 연구를 통해 배운 점들을 말해 주고 이러한 점들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서로 보여 주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내가 첫 번째로 방문한 집은 나의 이전 주일 학교 교장의 집이었다. 그의 차가운 반응과 내가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말은 분명히 격려적인 시작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집을 떠날 때 뜨겁게 달아오르며 나도 모르게 내적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껴 계속해서 다른 집들을 방문하였다.

사실상 노골적인 반대는 없었지만, 이전 교회 동료들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이 보인 전반적인 무관심에 나는 놀랐다. 특히 놀랍고도 실망스러운 일은, 큰오빠에게서 가장 완강한 반대를 경험한 것이었는데, 그 경험은 예수의 이러한 말씀이 생각나게 해주었다. “여러분은 부모와 형제와 친족과 친구들에 의하여 넘겨질 것이며, ·⁠·⁠· 여러분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누가 21:16, 17.

나는 어릴 때부터 말을 타는 일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집에 가장 빨리 이르는 방법은 말을 타고 가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게 한 덕분에 나는 근처의 시골 지역까지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오후, 내 말이 미끄러운 길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두개골에 심한 금이 가게 되었다. 한동안 나는 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렇게 넘어지는 일이 있은 이후로, 나는 길이 젖어 있거나 미끄러울 경우 말을 타는 대신 1인승 마차를 타고 다녔다.a

조직과의 접촉

사고가 있은 지 얼마 후, 지금은 파이오니아라고 부르는 일단의 전 시간 전파자들이 갬비어 산 지역을 방문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처음으로 동료인 믿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나에게 워치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로 편지를 써서 내가 좀더 조직적으로 공개 전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문의해 보라고 격려하였다.

협회로 편지를 쓴 후에, 나는 서적과 소책자 그리고 문전에서 나를 소개하는 데 사용하는 인쇄된 증거 카드를 받았다. 나는 지부 사무실과 우편으로 접촉하게 되어 영적 형제 자매들에 대해 좀더 친밀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파이오니아 집단이 이웃 도시로 떠나가 버렸을 때 이전보다 더 외로움을 느꼈다.

정기적으로 돌며—주로 1인승 마차를 타고—날마다 증거한 결과, 나는 이 지역에서 잘 알려지게 되었다. 동시에 나는 농장에서 가축을 돌볼 수 있었다. 이 때쯤에는 나의 가족도 이러한 일과에 대해 체념하게 되어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4년 동안 이런 식으로 혼자서 좋은 소식의 침례받지 않은 전파자로 일하였다.

대회, 그리고 마침내 침례

1938년 4월, 러더퍼드 형제가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였다. 교직자들의 강력한 반대로 시드니 시 공회당을 빌리려고 계약한 것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최종 순간에 스포츠 그라운드 사용 허가를 받았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한 것이 사실은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스포츠 그라운드가 더 커서 수천 명을 더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만 2000명쯤 참석했는데, 교직자들이 우리 모임을 반대하도록 부추긴 것이 틀림없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러더퍼드 형제의 방문을 맞아 또한 시드니 근교에서 며칠간 대회가 열렸다. 내가 마침내 여호와 하느님께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은 것은 바로 그 대회에서였다. 광대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전역에서 온 수백 명의 형제 자매들과 드디어 함께 모이게 되었을 때 내가 느낀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갬비어 산으로 다시 돌아옴

집에 돌아오자 몹시 외로움을 느꼈지만, 나는 왕국 활동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굳게 결심하였다. 나는 곧 애그뉴 가족—휴와 그의 아내, 네 명의 자녀들—과 친해졌다. 그들은 갬비어 산에서 정확히 5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밀리센트 시에 살고 있어서, 나는 그들과 정기적으로 성서 연구를 하기 위해 1인승 마차를 타고 편도 50킬로미터를 여행하곤 하였다.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자 나의 외로움은 줄어들었다.

우리는 이내 한 집단을 이루어 조직적으로 증거하였다. 그러던 중에 행복하게도, 나의 어머니가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이 새로 형성된 집단과 연구하기 위한 왕복 100킬로미터의 여행에 나와 함께하였다. 그 당시는 어머니가 침례받기 몇 해 전이었지만, 그 때 이후로 어머니는 나에게 언제나 격려와 도움을 주었다. 이제 더는 외롭지 않았다!

우리 작은 집단에서 네 명의 파이오니아가 나왔는데, 나를 포함하여 애그뉴 가족의 세 딸인 크리스털, 에스텔, 베티였다. 후에 세 자매 모두 1950년대 초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들어갔다. 그들은 선교인으로서 인도와 스리랑카에 임명되었으며, 아직도 그 곳에서 충실히 섬기고 있다.

1941년 1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재빨리 조처를 취하였다. 우리가 봉사의 직무에서 사용하던 모든 것—출판물, 휴대용 축음기, 녹음된 성서 강연 등—을 커다란 양철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트렁크를 헛간에 갖다 놓고 건초를 마차로 실어다가 그 위에 덮어 버렸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호별 방문 전파를 계속하였는데, 집주인에게 이야기할 때는 신중하게 성서만 사용하였다. 나는 잡지와 소책자를 말 안장 밑에 숨기고 다니다가 왕국 소식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발견할 때에만 그것들을 꺼내곤 하였다. 마침내 1943년 6월, 금지령이 해제되어 우리는 또다시 출판물을 공개적으로 제공할 수 있었다.

새로운 임명

1943년에, 나는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또 다른 임명을 받고 갬비어 산을 떠났다. 처음에는 잠시 동안 스트래스필드에 있는 협회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도록 초대되었다. 그 다음에는 차례로, 뉴사우스웨일스 주 남부와 빅토리아 주 서부의 작은 도시들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가장 큰 보람을 가져다 준 임명 가운데 하나는 멜버른 시에 있는 큰 회중에서 일한 것이다.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인 나는 거기서 일하면서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빅토리아 주의 저지대 깁스랜드로 임명받아 일할 때 파이오니아 짝인 헬렌 크로포드와 나는 성서 연구를 많이 사회하였고, 얼마 안 있어 회중이 형성되는 것을 보았다. 이 지역에는 큰 시골 구역이 있었고, 우리는 운송 수단으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낡은 자동차를 한 대 가지고 있었다. 차를 몰고 다닐 때도 있었지만, 밀고 다닐 때도 많았다. 말이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따금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말을 가질 수만 있다면 (왕국만 빼놓고) 무엇이든 내놓겠다!” 오늘날 이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에는 튼튼한 회중과 훌륭한 왕국회관들이 있다.

1969년,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 캔버라로 임명되었다. 이 곳은 증거하는 데 도전이 되고 다양성을 지닌 지역이었다. 많은 외국 대사관에서 일하는 공관원을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이 곳에서 일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 도시의 공장 지대에서 증거하는 데 주력해 왔다.

1973년, 나는 미국에서 열린 큰 대회들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다. 나의 생애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1979년에 대회 대표자가 되어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여행한 것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실제 장소를 찾아가서 그 곳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회고해 보는 것은 정말로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사해에서 염분의 농도가 짙은 물 위를 떠다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경험할 수 있었고, 요르단의 페트라를 방문하는 동안에는 다시 한 번 말을 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 일은, 말 덕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골 지역에 왕국 소식을 가지고 갈 수 있었던 초창기 시절을 다시 생각나게 해주었다.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다

나이가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고자 하는 나의 열망은, 여행하는 감독자로부터 받는 지속적인 격려에 더하여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이나 순회 대회 때 갖는 파이오니아 모임과 같은 특별한 마련으로 인해 계속 살아 있다. 나는 진심으로, 여호와께서 친절하시게도 나의 외롭던 시절을 지난 일이 되게 해 오셨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87세이다. 그리고 약 60년간 여호와를 섬기고 나서, 나처럼 함부로 말하는 기질이 있으며 독립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격려의 말 한마디는, 여호와의 인도에 언제나 복종하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함부로 말하는 기질을 제어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주시기 바라며, 또한 우리가 자주 외로움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분이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분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생각나게 해주시길 바란다.

[각주]

a 말 한 필이 끄는 1인승 이륜 마차.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