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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을 위한 경주에서 어떻게 달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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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을 위한 경주에서 어떻게 달리고 있는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2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생명을 위한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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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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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2
파92 8/1 13-18면

생명을 위한 경주에서 어떻게 달리고 있는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린도 전 9:24.

1. 성서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행로를 무엇에 비유합니까?

성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것을 달음질 즉 경주에 비유합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이 끝나갈 무렵에 자신에 관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일을 하도록 다음과 같이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디모데 후 4:7; 히브리 12:1.

2. 우리는 생명을 위한 경주에서 무슨 고무적인 출발을 하는 것을 봅니까?

2 경주는 출발점과 정해진 코스 그리고 결승선 즉 목표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러한 비교는 적절한 것입니다. 생명을 향한 우리의 영적 진보 과정도 그와 같습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위한 경주에서 좋은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5년간 133만 6429명이 헌신하고 물침례를 받음으로, 경주를 공식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힘찬 출발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승선에 이를 때까지 계속 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생명을 위한 경주

3, 4. (ㄱ) 바울은 경주 속도를 유지하는 중요성을 어떻게 지적하였습니까? (ㄴ) 일부 사람들은 어떻게 바울의 충고를 청종하지 않았습니까?

3 계속 경주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이렇게 훈계하였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린도 전 9:24.

4 고대 경기에서 한 사람만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위한 경주에서는 모든 사람이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단지 필요한 것은 끝까지 뛰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한 바와 같이, 생명이 끝날 때까지 충실하게 달렸습니다. 그리고 수백만 명이 계속 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역주하거나 결승선을 향해 전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것들이 방해하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경주에서 낙오되거나 어떤 면으로 자격을 잃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5:7) 이러한 일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생명을 위한 경주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검토할 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려 줍니다.

5. 바울은 생명을 위한 경주를 경쟁적인 시합에 비하였습니까? 설명하십시오.

5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라고 말하였을 때 바울이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바울의 말은 생명을 위한 경주를 시작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오직 한 명만 영원한 생명의 상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그런 뜻일 수 없습니다. 거듭거듭 바울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로마 5:18; 디모데 전 2:3, 4; 4:10; 디도 2:11) 그렇습니다. 바울은 생명을 위한 경주는 각 참가자가 다른 모든 사람을 이기려고 애쓰는 경쟁적인 시합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당시 올림픽 경기보다 훨씬 더 명성 있는 경기였다고 하는 이스트미아 경기에서 경기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경쟁적인 영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6. 문맥은 주자와 경주에 대해 바울이 논한 것에 관해 무엇을 알려 줍니까?

6 주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바울은 구원에 대한 자신의 전망을 주로 논하고 있었습니다. 앞 구절들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였으며 여러 면으로 힘써 노력하였는지를 묘사하였습니다. (고린도 전 9:19-22) 그런 다음 23절(「신세」 참조)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좋은 소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좋은 소식”]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그는 자신의 구원이 단지 사도로 선택되었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데 여러 해를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보장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소식의 축복에 참여하려면, 그는 좋은 소식을 위해 자신의 능력 내에서 모든 것을 계속 행해야 하였습니다. 그는 승리하겠다는 일념으로 달리면서,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이스트미아 경기에서 경주하듯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고린도 전 9:24ㄱ.

7. ‘얻도록 달음질’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7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경주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승리하기를 원하지만, 승리하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한 사람들만 승리할 전망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경주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이한 생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알맹이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로 알고 있는 일들, 즉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고 야외 봉사에 참여하는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고 있다면 칭찬할 만한 일이며, 우리는 그러한 매우 훌륭한 습관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로부터 더 많은 유익을 얻는 것이 가능합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집회에 무엇인가 기여하기 위해 항상 준비합니까? 우리는 배운 것을 개인 생활에 적용하려고 애씁니까? 우리는 야외에서 직면하는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증거를 할 수 있도록 우리의 기술을 향상시키는 데 주의를 기울입니까? 우리는 관심자를 다시 방문하여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도전적인 일을 기꺼이 받아들입니까?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바울은 강력히 권하였습니다.—고린도 전 9:24ㄴ.

모든 일에 자제를 행사하라

8. 바울은 무엇에 자극을 받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일에 절제”할 것을 강력히 권하였을 것입니까?

8 바울은 생애중에 많은 사람이 생명을 위한 경주에서 침체되거나 흘러 떠내려가거나 포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디모데 전 1:19, 20; 히브리 2:1)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매우 힘들면서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임을 반복해서 상기시켰습니다. (에베소 6:12; 디모데 전 6:12) 그는 주자의 예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고린도 전 9:25ㄱ) 이 말을 하면서,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있는 것, 즉 이스트미아 경기에서 경기자들이 따른 혹독한 훈련을 언급한 것이었습니다.

9, 10. (ㄱ) 한 자료는 이스트미아 경기의 경기자들에 대해 어떻게 묘사합니까? (ㄴ) 그 묘사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무엇입니까?

9 훈련에 참가한 경기자에 대해 이러한 생생한 묘사가 있습니다.

“만족해 하면서 불평없이 그는 10개월 훈련의 규칙과 제한에 온전히 따른다. 그러한 훈련을 받지 않고는 경쟁하지 않는 편이 낫다. ·⁠·⁠· 그는 자신이 겪은 작은 난관과 노고 그리고 규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성공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일지 모르는 어떤 일이든 세심하게 절제한 것을 자랑거리로 여긴다. 그는 자기가 격심한 운동으로 인해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먹고 싶은 욕망에 굴복하고, 휴식을 취하며, 사치스러운 목욕을 즐기고 쾌락적인 생활을 즐기는 것을 본다. 하지만 그는 한순간도 부러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상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며, 혹독한 훈련은 필수적이다. 그는 잠시라도 단련의 엄격함을 누그러뜨릴 경우 승리할 가능성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해설자의 성서」(The Expositor’s Bible), 제5권 674면.

10 특히 흥미 있는 점은, 훈련받는 사람은 그토록 엄한 극기 과정을 따르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도 “한순간도 부러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이 있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11. 우리는 생명을 위한 경주를 하면서 무슨 부당한 견해를 경계해야 합니까?

11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마태 7:13, 14) 당신은 ‘협착한 길’을 걸으려고 애쓰면서, 넓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즐기는 것같아 보이는 자유와 편한 생활을 부러워합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그 자체로는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을 수 있는 것들 중 일부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경주를 하는 이유를 항상 기억하지 않는다면 쉽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한다고 바울은 말하였습니다.—고린도 전 9:25ㄴ.

12. 사람들이 구해 온 영광과 명성이 이스트미아 경기에서 수여하는 썩을 면류관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2 이스트미아 경기에서 승자는 이스트미아 소나무나 그 밖의 다른 소나무 화환을 받았는데, 그것은 며칠이나 몇 주 내에 시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운동 선수가 싸운 것은 없어져버릴 화환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광과 영예 그리고 그에 따르는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우승자가 고향에 돌아오면 그는 개선한 영웅으로 환영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개선 행렬이 통과할 수 있도록 흔히 성벽을 헐었으며, 그에게 영예를 돌리는 상(像)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광은 여전히 썩었습니다. 오늘날 그러한 개선한 영웅들이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관심도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권력과 명성과 부를 얻기 위해 시간과 힘과 건강 그리고 심지어 가족의 행복을 희생하였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처럼 물질적 “면류관”도 사라지고 말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마태 6:19, 20; 누가 12:16-21.

13. 생명을 위한 경주를 하는 사람의 생활 행로는 운동 선수의 생활 행로와 어떻게 다릅니까?

13 운동 시합에서 경기자들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은 훈련의 엄한 요구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제한된 기간만 그렇게 합니다. 일단 시합이 끝나면, 그들은 정상적인 생활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기량을 유지하기 위해 때때로 여전히 훈련할지 모르지만, 더는 극심한 극기의 동일한 과정을 따르지 않습니다. 적어도 다음 경기 일자가 정해질 때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위한 경주를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훈련과 극기가 곧 생활의 길이어야 합니다.—디모데 전 6:6-8.

14, 15. 생명을 위한 경주의 경기자는 왜 계속 자제를 행사해야 합니까?

1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그 외 사람들로 이루어진 무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혹은 “그는 자신에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며”, 「찰스 B. 윌리엄스역」] 자기 [“형주”]를 지고 [“계속”] 나를 좇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 8:34, 「신세」 참조) 이러한 초대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계속” 예수를 좇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극기의 어떤 특별한 이점 때문이 아니라 한 순간의 부주의, 한 번 좋은 판단을 하지 못한 일 때문에 이제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심지어 우리의 영원한 복지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진보는 대개 다소 느린 속도로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항상 경계하지 않을 경우 그 동안 이루어 놓은 영적 진보가 아주 빠른 속도로 헛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15 더욱이 바울은 우리가 “모든 일에” 자제를 행사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서 생활의 모든 부면에서 한결같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이치적입니다. 그 이유는, 만일 훈련받는 사람이 탐닉에 빠지거나 방탕한 생활을 한다면 그가 인내하는 모든 신체적 고통과 노고가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생명을 위한 경주에서도, 우리는 모든 일에 자제를 행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술 취함 및 음행과 같은 일들에서 자신을 제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거만하고 다투기를 좋아한다면 그 좋은 점의 가치가 감소될 것입니다. 혹은 그가 다른 사람에 대해 오래 참고 친절하지만 사생활의 어떤 은밀한 죄를 숨기고 있다면 어떠할 것입니까? 자제가 온전히 유익한 것이 되려면, “모든 일에” 자제를 행사해야 합니다.—비교 야고보 2:10, 11.

“불확실하지 않”게 달리라

16. “불확실하지 않”게 달린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6 생명을 위한 경주에서 성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요구됨을 인식한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내가 달리고 있는 방식은 불확실하지 않으며”, 「신세」]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린도 전 9:26) ‘불확실하게’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분명하지 않게”(「왕국 행간역」), “알아볼 수 없는, 눈에 띄지 않는”(「랑게 주해」[Lange’s Commentary])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불확실하지 않”게 달린다는 것은 주자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가 모든 관찰자에게 매우 분명히 나타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앵커 바이블」은 이 부분을 “지그재그형의 코스가 아니게”로 번역합니다. 만일 해변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이따금 원을 그리며 돌기도 하였고, 때로는 뒤로 가기도 한 일련의 발자국을 보게 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이 어디론가 갈 생각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거니와 그가 달리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고 똑바르게 뻗은 일련의 발자국, 발자국이 연이어 있고 모두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발자국을 보게 된다면, 당신은 그 발자국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의 것이라고 결론내릴 것입니다.

17. (ㄱ) 바울은 “불확실하지 않”게 달리고 있음을 어떻게 보여 주었습니까? (ㄴ) 우리는 이 면에서 어떻게 바울을 본받을 수 있습니까?

17 바울의 생애는 그가 “불확실하지 않”게 달렸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인 봉사자이자 사도임을 증명하는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가지 목표만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해 전 생애에 걸쳐 힘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명성이나 권력이나 부나 안락 때문에 곁길로 빠지는 일이 결코 없었는데, 그러한 것들 중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하였습니다. (사도 20:24; 고린도 전 9:2; 고린도 후 3:2, 3; 빌립보 3:8, 13, 14) 당신은 자신의 인생 행로를 돌아볼 때, 어떤 종류의 자국을 보게 됩니까? 분명한 방향이 있는 똑바른 선입니까, 아니면 목표 없이 방황하는 선입니까? 당신이 생명을 위한 경주에서 다투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단지 시늉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승선에 도달하기 위해 이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18. (ㄱ) 무엇이 우리가 “허공을 치는” 것에 비할 만할 것입니까? (ㄴ) 그런 행로가 위험한 것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18 또 다른 운동 경기와의 유사점을 이끌어내면서, 바울은 이렇게 더 말하였습니다. “[내가]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린도 전 9:26ㄴ) 생명을 위한 싸움에서, 우리에게는 사단과 세상과 우리 자신의 불완전성을 포함하여 많은 적이 있습니다. 고대의 권투 선수처럼, 우리는 정확히 겨냥한 강타로 적들을 때려 눕힐 수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싸움에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말씀 가운데서,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 집회에서 교훈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서와 출판물을 읽고 집회에 가지만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은 “허공을 치는” 헛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허공을 치는 것은 우리를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합니다. 우리는 싸움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거짓된 안전감을 갖지만, 우리의 적들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 야고보는 이렇게 훈계하였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허공을 치는” 것이 우리의 적들을 무기력하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듣기만” 하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보장하지 못합니다.—야고보 1:22; 사무엘 상 15:22; 마태 7:24, 25.

19. 우리는 어떻게 버림받는 일이 없게 할 수 있습니까?

19 끝으로, 바울은 성공의 비결을 이렇게 알려 줍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 전 9:27) 바울처럼, 우리도 불완전한 육체가 우리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육체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육적인 경향과 갈망과 욕망을 뿌리뽑을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8:5-8; 야고보 1:14, 15) 그렇게 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치다’로 번역된 단어가 문자적으로 ‘눈 아래를 치다’(「왕국 행간역」)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타락한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여 죽느니보다는, 말하자면 눈언저리에 검은 멍이 들고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비교 마태 5:28, 29; 18:9; 요한 1서 2:15-17.

20. 우리가 생명을 위한 경주를 잘하고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 특히 지금 긴급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0 오늘날 우리는 경주의 결승선에 거의 다가가고 있습니다. 상을 받을 때가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입니다. (빌립보 3:14) 큰 무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낙원이 된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처럼 많은 것이 달려 있으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버림받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는 권고를 명심하기 바랍니다.—고린도 전 9:24, 27.

기억하십니까?

◻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경주에 비유하는 것이 적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생명을 위한 경주는 문자적인 경주와 어떻게 다릅니까?

◻ 우리는 왜 계속 그리고 “모든 일에” 자제를 행사해야 합니까?

◻ 어떻게 “불확실하지 않”게 달릴 수 있습니까?

◻ 단지 “허공을 치는” 것은 왜 위험합니까?

[16면 삽화]

우승자의 화환 그리고 영광과 영예는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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