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파93 4/15 10-13면
  • 희망—암담한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보호책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희망—암담한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보호책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3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투구와 같음
  • 진정한 희망의 기초
  • 희망을 세워 나가는 방법
  • 사람들에 대해 희망적 견해를 가짐
  • 그리스도인 희망을 강하게 유지하십시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연구용)—2022
  • 어디에서 진정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깨어라!—2004
  • 여호와께 희망을 두고 용기를 내십시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2006
  • 희망
    성경 통찰, 제2권
더 보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3
파93 4/15 10-13면

희망—암담한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보호책

한국의 한 어린 소년은 어머니가 어느 여대생에게 앞날의 희망을 갖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거들고 싶었다. 이 소년은 그리스도인 집회에서 들은 예를 기억하고서 여대생에게 한 가지 수수께끼를 맞춰 보겠느냐고 물었다. 여대생은 그러겠다고 대답하였다. 소년은 이렇게 말하였다. “두 가족이 살았는데, 두 가족 모두 매우 가난했어요. 어느 날 비가 몹시 오자 두 집 다 지붕에서 빗물이 마구 새고 있었습니다. 한 가족은 매우 속이 상해 빗물이 새는 것에 대해 몹시 짜증을 냈지요. 그런데 다른 가족은 유쾌하게 지붕을 손질하면서 행복해 하였습니다. 이 두 가족이 그토록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궁금하게 여긴 여대생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말하였다. “두 번째 가족은 얼마 전에 정부로부터 새 집을 주겠다는 통지를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희망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다른 이유였지요!”

이 소년의 수수께끼는 간단한 진리를 예시해 준다. 즉 희망은 종종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삶에 대해 느끼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이다. 소년이 설명한 두 가족처럼, 우리 대부분은 살아가면서 폭풍우 같은 시련, 이를테면, 건강 문제, 살림 걱정, 가정 불화, 범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련과 학대를 견뎌야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뇌우를 몰아낼 수 없듯이, 흔히 그런 문제를 쫓아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좌절하고 외로워하며, 한마디로 말해서 무력해질 수 있다. 더욱 괴롭게도 죄인들 대부분의 앞날이 참담하며, 영원히 벌을 받기도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들어왔을지 모른다.

우울해지는 사람들은 무력감을 갖는 것만 아니라 절망감에 빠진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를 없앨 수 있는데, 누구도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희망 그 자체가 나머지 요소인 무력감을 물리치는 최상의 무기일 수 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비참한 상태에서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의연하고 만족스러운 태도로 인생의 폭풍우를 인내할 것이다. 그렇다. 희망은 매우 중요한 보호책이다.

이 말을 미심쩍게 여기는가? 희망은 과연 그토록 큰 차이를 가져올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 그리고 우리 각자는 믿음직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투구와 같음

의학계는 희망에 놀라운 힘이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나치 대학살에서 생존한, 스트레스 전문가 슐로모 브레즈니츠 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인생 문제 대부분의 경우에 “스트레스는 환자들의 문제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우리의 해석 방법에서 온다. 희망은 그들의 압박감을 덜어 준다.” 「미국 의학 협회지」(The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한 기사는 희망이 “강력한 약”이라고 단언하였다. 「아메리칸 헬스」지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무엇인가로 인해 희망을 잃었을 때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거나, 기대할 만한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병세가 갑자기 좋아지는 환자들이 많은데, 특히 암 환자들의 경우에 그러하다.”—비교 잠언 17:22.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희망이 중요함을 알았다. 데살로니가 전서 5:8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강력히 권하였다. “구원에 대한 희망의 투구를 쓰고 정신을 차립시다.”(「새번역」; 사체로는 본지에서) “구원에 대한 희망”이 어떻게 투구와 같은가?

투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자. 성서 시대에 군인들은 펠트나 양모 혹은 가죽 모자에 구리나 철을 씌운 투구를 썼다. 이 투구는 전시에 날아오는 화살이나 휘두르는 철퇴, 후려치는 칼에서 머리를 보호해 주었다. 그러므로 투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쓰기를 주저하는 군인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투구를 썼다고 해서 무적 군인이 되거나 머리를 맞아도 끄떡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투구는 대부분의 강타가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고 스치고 지나가게 해준다는 것이다.

투구가 머리를 보호하듯이 희망은 정신을 보호한다. 희망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혹은 퇴보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양 덤덤히 나아갈 수 있게 해주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희망은 그런 타격을 완화시켜 주고 그런 타격 때문에 우리가 정신적, 감정적, 영적 건강에 치명상을 입지 않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충실한 사람 아브라함은 그런 상징적 투구를 썼음이 분명하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희생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창세 22:1, 2)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쉽사리 유도할 만한 감정인 절망에 사로잡히기가 아주 쉬웠을 것이다. 무엇이 그의 정신을 보호해 주어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였는가? 희망이 주된 역할을 하였다. 히브리서 11:19에 따르면,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욥도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에 반감을 품지 않도록 보호를 받았다. 욥이 그런 반감을 품었다면 하나님을 저주하였을 수 있다. (욥 2:9, 10; 14:13-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직면하셨지만 앞에 놓인 즐거운 희망에서 힘과 위안을 얻으셨다. (히브리 12:2) 하나님께서 잘못하시는 일이 결코 없으며, 한번 하신 말을 이행하시지 않는 일이 결코 없다는 확신은 참 희망의 토대다.—히브리 11:1.

진정한 희망의 기초

믿음의 경우처럼, 진정한 희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사실, 실체, 진리다. 이 말에 놀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한 저술가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망이 사실을 부인하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참 희망은 그림의 떡에 불과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것이라든가 온갖 소소한 일들도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우둔한 믿음이 아니다. 인생에는 그렇게 달아오른 망상의 열기가 냉엄한 현실의 물벼락을 맞는 일이 있다.—전도 9:11.

진정한 희망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진정한 희망은 소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서 온다. 서두에 언급한 수수께끼에 나오는 두 번째 가족을 생각해 보자. 정부가 자주 약속을 어겼다면 그 가족이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와는 달리, 약속에 더하여 그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그 가족에게 희망의 확고한 근거를 가질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은 한 정부 곧 하나님의 왕국과 밀접히 관련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 왕국이야말로 성서 소식의 핵심을 이룬다. 수천년 간 그 왕국은 아브라함 같은 인간 남녀의 희망의 근원이었다. (히브리 11:10) 하나님께서는 자기 왕국을 통하여 이 부패한 낡은 세계 제도를 끝내시고 새 제도를 가져다 주실 것임을 약속하셨다. (로마 8:20-22; 베드로 후 3:13) 이 왕국 희망은 백일몽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이 희망의 근원—우주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 하나님—은 그야말로 조금도 흠잡힐 데 없는 분이다. 우리가 자연계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물만 살펴보아도 그분이 존재하시며 자기 약속을 모두 이행하실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이해할 수 있다. (로마 1:20) 그분이 인류를 대하신 기록을 검토해 보기만 해도 그분의 말씀이 성취되지 않는 일은 결코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이사야 55:11.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 희망을 잃었다. 최근에 발행된, 신학자 파울 틸리히의 설교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끝이 오기를 기다리는 법을 배워 알았다. 그러나 차츰 그들은 기다리는 일을 단념하였다.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주의 기도를 할 때마다 지상에 새로운 사물의 상태가 이루어지기를 기도로 구하면서도 그런 상태에 대한 기대가 약해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희망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수백만 아니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도무지 희망이 없다. 하지만 바로 그들 자신의 성서에서 그런 희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암담한 결과를 살펴보라! 정신을 보호해 주는 건전한 희망이 없을진대, 그토록 많은 사람이 자포 자기한 “승인받지 못한 정신 상태” 때문에 파렴치한 부도덕과 폭력으로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는가? (로마 1:28, 「신세」) 결코 그런 함정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희망의 투구를 벗을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희망의 투구를 단단히 쓰고 있어야 한다.

희망을 세워 나가는 방법

희망을 세워 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희망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유의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인 성서를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로마서 15:4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희망”, 「새번역」]을 가지게 함이니라.”

더 나아가, 우리는 앞날에 대한 희망이 단지 모호한 추상 개념에 그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희망이 정신에서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해야 한다. 당신은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가? 당신은 사망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상에서 부활될 때 그들을 만나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바로 그런 일이 있을 때 당신 자신이 그 곳에 있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이사야 65:21, 22은 각 사람이 자기 집을 짓고 거기 거할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새집 지붕을 얹으며 마지막 널에 못을 박는 모습을 눈감고 상상해 볼 수 있는가? 당신이 계획하고 수고한 모든 일의 결과를 둘러볼 때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 보라. 집을 지을 때 들리던 떠들썩한 소리들이 차분히 가라앉고, 온누리에 석양이 드리우는 풍경을 바라본다. 산들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부드럽게 흔들리고, 일하면서 달아오른 열기를 시원하게 식혀 준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더불어 자녀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집안에서 가족이 나누는 정겨운 이야기 소리가 지붕 아래서 들려온다.

그런 행복한 순간을 머리 속에 그려 보는 것은 헛된 공상이 아니다. 오히려 확실히 성취될 예언을 묵상하는 것이다. (고린도 후 4:18) 그 전망이 더 실제적일수록 그 곳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그만큼 더 강해질 것이다. 그처럼 확고하고 감지할 수 있는 희망은 우리가 ‘좋은 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할 임무를 회피하려고 할지 모른다. (로마 1:16, 「신세」)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는 희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 있게 전해 주면서, 사도 바울처럼 ‘희망에 대해 자랑’해야 할 것이다.—히브리 3:6, 「새번역」.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영원한 미래만이 아니다. 현재에도 희망을 주는 요소들이 있다. 어떻게 그러한가? 기원 5세기의 로마 정치가 카시오도루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미 받은 은혜를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은 앞날의 은혜에 대한 희망을 받는다.” 실로 지혜로운 말이다! 우리가 현재의 축복을 인식할 줄 모른다면 앞날의 축복에 대한 약속에서 무슨 위안을 찾을 수 있겠는가?

기도 역시 바로 지금 희망을 세워 준다. 먼 앞날에 대해 기도로 구해야 하지만 현재 필요한 것도 기도로 구해야 한다. 우리는 가족 성원이나 동료 그리스도인과의 더 나은 관계, 다음 번 영적 식사, 심지어 물질적으로 당장 필요한 것을 희망하며 기도로 구할 수 있다. (시 25:4; 마태 6:11) 그런 희망을 여호와의 손에 두는 것은 우리가 날마다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 55:22) 우리가 인내할 때 인내 자체가 희망의 투구를 튼튼하게 해주기도 한다.—로마 5:3-5.

사람들에 대해 희망적 견해를 가짐

부정적인 생각은 희망의 투구에 녹과 같다. 그런 생각은 희망의 투구를 녹슬게 하여 차츰 못쓰게 만든다. 당신은 부정적인 생각을 간파해 내고 그런 생각과 싸우는 방법을 터득하였는가? 회의적이고 비평적이며 염세적인 태도가 지성적인 태도라는 잘못된 개념에 속지 않아야 한다. 사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데는 지성이 거의 필요 없다.

동료 인간들에 대해 절망적인 태도를 갖기가 너무 쉽다. 일부 사람들은 지난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사람들로부터 도움이나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한 번 물린 사람 두 번 조심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그런 사람들은 문제가 있을 때 그리스도인 장로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는 것마저 주저할지 모른다.

성서는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 좀더 균형 잡힌 견해를 갖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우리의 온갖 희망을 사람에게 두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시 146:3, 4) 그러나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주신 “사람들로 된 선물” 역할을 한다. (에베소 4:8, 「신세」, 11) 장로들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은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성실하고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이다.—이사야 32:2.

그리스도인 회중의 다른 여러 성원들 역시 희망의 근원이 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바로 지금 그들 중 참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친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자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라. 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형제보다 친밀”한 벗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라.—잠언 18:24; 마가 10:30.

당신이 여호와께 기도로 도움을 구했다면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분이 벌써 당신에게 응답하셨을지 모른다. 즉 당신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리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당신을 도울 태세가 되어 있는 장로나 다른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있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균형 잡힌 희망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멀리하여 고립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해 준다. 그렇게 고립되는 일은 이기적이고 쓸데없는 행실로 인도할 수 있다.—잠언 18:1.

더욱이 동료 그리스도인과 문제가 있는 사람은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자세로 그 문제에 접근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아무튼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 (고린도 전 13:4-7)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를 여호와께서 보시듯,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려고 해야 한다. 그들의 좋은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되도록이면 그들의 동기를 선의로 해석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런 희망은 아무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다툼이나 논쟁을 벌이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죽어 가는 이 낡은 세상의 절망적인 태도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희망이 있다. 우리의 영원한 앞날에 대한 희망이 있고, 당면한 여러 문제의 해결책이 있다는 희망도 있다. 당신은 희망을 붙잡을 것인가? 구원의 희망을 보호용 투구처럼 쓰고 있는 여호와의 종이라면 누구나 상황이 아무리 비참하다할지라도 실로 무력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아무 것도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희망을 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비교 로마 8:38, 39.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