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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론—과학적인가?
    깨어라!—1983 | 6월 15일
    • 창조론—과학적인가?

      인간에 대한 진화론적 기원을 설명하는 사람들과 창조에 의한 성서적 기원에 고착하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은 지금까지 100년 이상 그칠줄 모르고 끓어 오르고 있다. 그 문제는 지난 해에 ‘아칸사스’ 주, ‘리틀 록’에 있는 연방 재판소에서 다시 비등하였다. 논쟁점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과 함께 “창조 과학”을 가르칠 것을 요구하는 주(洲) 법률이었다. 그 법은 합헌성이 없다는 판결을 받았으며, 그 판결은 진화론의 승리로써 크게 칭송되었다.

      과학자들, 여러 종파에 속한 신학자들, 교사들 그리고 미국 시민 자유 연맹이 그 법을 폐지하는 데 합세하였다. 다른 과학자들, 신학자들, 교사들 및 주(洲) 법무 장관이 그 법을 옹호하였다. 그 재판과 잇따른 판결은 언론 기관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증인들의 주장과 반대 주장은 확증된 사실에서부터 터무니없는 견해까지 다양하였다. 일반 사람들이 그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 판사의 결정은 이제 진화론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인류는 수백만년 동안 존재해 왔는가? 성서가 틀린 것인가? 우리는 더 이상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쳐서는 안 되는가?

      그러한 결론들을 이끌어 내기 전에, 관련된 문제들을 조사해 보자. 재판에 붙여졌던 이 “창조 과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과학적 기초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종파적 종교 신조의 간판에 불과한가?

      창조 과학이란 무엇인가?

      창조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칸사스’ 법에 들어 있으며 법적 견해에 삽입되어 있었던 하나의 정의를 내렸다. 그 정의에는, 원래 창조된 생물체의 종류내에서 변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돌연변이나 자연 도태는 한 종류를 다른 종류로 바꾸기에 불충분하다는 과학적 증거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 정의에서는 또한, 지구와 그 위에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은 현세(現世) 창조 행위의 결과이며, 화석이 들어 있는 모든 지질학적 지층은 한 차례의 세계적인 홍수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법률의 입안자는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것을 반대하는 헌법상의 장애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이나 성서에 대한 언급을 조심스럽게 제외시켰다. 그러나 ‘리틀 록’에서 제출한 그들의 문서와 증언에서는 언급된 창조와 홍수가 성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임을 밝혔다. 더우기, 비록 법률상으로는 창조 시기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현세”가 아마 6,000년을 의미하며, 어느 경우에도 10,000년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진화론의 오류가 보호되다

      창조론자들에게는 불행히도, 재판에서 진화의 약점을 폭로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좌절되었다. 그러한 결점은 솔직한 학생들이 오랫동안 분명히 알고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 그것들을 간단히 언급하도록 한다.

      재판에서는 실험에서 추출한 돌연변이에 대한 증거가 강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구의 결과는 압도적으로, 돌연변이가 유전자 조직의 퇴화만을 초래할 뿐이며 기형종을 생기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새로운 기관이나 새로운 기능을 창조해 내지 못한다. 돌연변이는 새로운 종으로 유도되지 못한다. 사실들은 진화론과 반대되며, 「창세기」에 기술되어 있는 창조의 당연한 원칙을 지지한다. 「창세기」에서는 모든 종류의 식물과 동물은 단지 자기와 같은 종류만을 산출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논증은 무시되었다.

      더우기, 지질학적 기록에는 ‘다아윈’의 이론이 요구하는, 화석이 계속해서 한 종류에서 다른 종류로 단계적으로 변화하는 현상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도리어 퇴적층에서 이전 형태와 전혀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종류가 갑자기 출현하는 것을 보여 준다. 심지어 진화론자들은 최근에 휴지(休止) 평형 상태라고 불리는 새로운 이론에 관해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 이론은 빠져있는 중간 단계를 찾아내려는 오랜 연구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자인하고 있다.

      새로운 종류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야말로 실제로 창조를 지지하는 동시에 진화론을 반박하는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재판에서 다루어진 요지는 그것이 아니었다. 창조론자들은 왜 그것을 유리하게 사용하지 못하였는가?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 지질학적 지층과 여러 창조 기(期)를 연관지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동시에 형성되었으며, 그 때는 ‘노아’ 홍수의 물이 빠졌을 때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비성서적 신조에 사로잡혀서 창조론자들은 화석의 증거를 단지 진화론을 논파하는 데만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재판에 붙여진 것이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론임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창조론의 오류가 드러나다

      재판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보도에서 관심이 집중된 것은 창조론자들의 이론 중에서 그들의 현세 창조 이론과 연관된 부면이었다. 지구와 심지어 우주까지도 만들어진지 10,000년이 안 된다는 그들의 가르침은 현대 과학이 발견한 모든 것들과 모순된다. 그들은 너무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과학자들로부터 조롱을 자초하였다.

      지질학자들은 그러한 좁은 시간 간격을 훨씬 초과하는 그들의 지질학적 과정 측정법을 지적할 수 있다. 대양 침전물은 10,000년을 훨씬 넘는 오랜기간 쌓여왔다. 산이 생겨서 침식되는 시간은 수백만년으로 추정된다. 대륙들이 분리되서 대양을 형성하는 데는 수억년이 소요된다. 이 모든 일이 불과 10,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하는 것은 지질학자들 보기에는 한갖 억지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천문학자들도 똑같이 격분하였다. 그들은, 행성의 주기가 여러 날 또는 여러 해 걸린다는 개념에 익숙해 있을 뿐만 아니라 별이나 은하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무궁한 시간을 요한다는 생각에 익숙해 있다. 그들은 그들의 망원경에 도달하려면 매초 300,000‘킬로미터’를 움직이는 빛의 속도로도 수십억년이나 걸리는 광대한 거리를 다룬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은하인 남쪽 하늘에 위치한 ‘마젤란’ 성운까지의 거리를 100,000광년 이상으로 추정한다.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이것이 불과 10,000년 전에 창조되었다면, 그곳에서부터 최초로 반짝인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려면 우리는 아직도 90,000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북반구에서는, 어두운 밤에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안드로메다’ 성운을 찾아낼 수 있다. 그 성운의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 1,500,000년이 걸린다. 분명히 그 성운은 그보다 오래 전에 그곳에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미국 천문학 협회가 1월에 ‘아칸사스’ 판결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발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리학자들도 단지 10,000년이라는 기간 내로 그들의 연구를 압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우라늄’과 ‘토륨’ 같은 방사성 원소가 수십억년으로 측정되는 수명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방사성 붕괴의 최종 생성물인 독특한 납의 동위 원소의 누적물은 지각에 있는 가장 오래된 암석들 중에 일부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로 30 내지 40억년 정도 존재하여 왔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들은 보이지 않는 외계에 있는, 멀리 떨어진 은하에서 오는 적색 편이(偏移) 광선을 설명하면서 그 광선이 100억년에서 200억년 전에 비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과학인가?

      창조론자들은 불과 수천년 전에 모든 것들이 시작되었다는 그들의 신조와 그러한 증거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라늄’을 함유한 암석을 만드셨을 때에, 그분은 또한 적당양의 특별한 납 동위 원소를 혼합하여 그 암석이 십억년이나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셨을 것인가? 그분이 ‘안드로메다’ 은하를 만드셨을 때에, 또한 지구에 이르는 1,000경(京)(10,000,000,000,000,000,000) ‘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체 공간을 빛의 파장으로 채우심으로 우리가 하늘에 있는 그것을 보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게 하셨을 것인가? 진리의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를 속이기 위해 자신의 창조물 가운데 그러한 환각을 의도적으로 첨입하심으로써 우리를 기만하실 것인가?

      그러한 추론은 ‘유타’ 주의 국립 공룡 기념관을 자세히 구경한 정통파 기독교 신자인 키작은 노부인이 한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그 거대한 파충류가 한때 그 곳에 살았으며 그 동물의 화석이 된 뼈를 그가 보고 있다는 공원 관리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다른 설명을 제시하였다. “주께서 여러분을 놀리기 위해 그 곳에 그 뼈들을 둔 것입니다.”

      공룡에 대해 말할 때 그것들은 어떤 점에서 사물에 대한 창조론자들의 시도와 조화를 이루는가? 그들의 견해로는, 멸종했든지 존재하든지 간에, 인간과 공룡과 다른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홍수 전에 같은 시대에 지상에서 살았으며, 그것들은 모두 홍수에 휩쓸려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낮은 지층에서 단순한 생명의 형태로부터 시작해서 더 높은 지층에서 점차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생명체로 계속되는, 퇴적암에서의 화석의 질서 있는 연결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들은 그 모든 종류의 식물과 동물들이 어떻게 그 뒤섞인 시체들 가운데서 구분되어 분리된 지층에 놓여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렵고 모순된 이론들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처럼 약하고 무리한 가설을 가지고 그들의 독단적인 “창조 과학”의 체계를 옹호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리틀 록’에서의 과학자들의 증언에 의해 완전히 반박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과학적이라는 어떤 확실한 주장도 하지 못한 채 끝내 버리고 만 것이다.

      창조론이 망신을 당하다

      창조론자들을 위해 증언한 가장 유명한 과학자는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웨일즈’로부터 온 ‘찬드라 위크라매싱히’였다. 그와 영국 천문학자 ‘프래드 호일’은 지상에서 생명이 진화되었다는 이론을 반박하는, 정설을 벗어난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생명이 외계에서 시작되어 혜성이나 운석을 타고 지상에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유전자 조직의 복잡성으로 볼 때 그것들이 우연히 형성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증언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지성있는 창조주에 의해 설계되었음이 분명하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가, 이성있는 과학자라면 아무도 지구의 나이가 백만 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의 증언은 오히려 창조론자들을 공격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 법의 반대자와 옹호자 모두가 행한 증언에 기초해서, 판사는 창조론이 비과학적이라고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창조론 지지자들이, 모든 증거들을 수합한 후 그것들을 가설에 일치시키는 과학적 방법을 사용해서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님이 명백히 드러났다. 대신에 그들은 「창세기」에 대한 고정된 종파적 해석에서 비롯하여 그것을 지지하는 증거를 찾고자 했다. 그들은 상반된 증거들을 무시하려고 하거나, 그렇게 할 수 없었을 때에는 확립된 사실과 분명히 상충되는 터무니 없는 설명을 날조하였다. ‘아칸사스’ 주의 법은 창조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공립학교 교과 과정에 넣으려는 무분별한 노력이었다.

      그러면 창조론의 실패는 창조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서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편협하고 오도된 성서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다음 호 「깰 때이다」에 나오는 “진화, 창조, 창조론—어느 쪽을 믿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창조와 창조론과의 차이를 토론하게 될 것이다.

      [14면 삽화]

      이 모든 일들이 24시간으로 된 6일간에 일어 났는가?

  •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가?
    깨어라!—1983 | 6월 15일
    • 청소년들은 묻는다 ·⁠·⁠·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가?

      “여러분 중 누군가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다고 느끼는 분이 있읍니까?” 인간 관계의 분야를 다루는 작가이며 연구원인 ‘로버트 콘크린’ 씨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괴로움 세 가지’를 열거하라는 그의 요청을 받고 1,000명 중 998명은 ‘생활상의 가장 큰 고민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긴다’고 지적했다.

      ‘콘크린’ 씨는 그런 사람들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해. 네가 내가 좋아하지 않는 행동을 하기 전까지는 말야. 그런 일이 생기면, 너와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내 마음 속에선 중단되어 버려. 난 조바심이 나고, 화가 치밀고, 좌절감을 느끼게 돼.”

      당신도 당신이 아는 사람들에 대해 때때로 이와 같이 느끼는가? 그러한 느낌은—외부로 표현을 하든 마음 속에만 품고 있든지 간에—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막아 버릴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있고 알찬 생활은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당신의 능력에 크게 달려 있다.

      그렇다면, 어떤 적극적인 단계를 밟음으로써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좀더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가?

      의사 소통을 하라

      기꺼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도록 하라! 훌륭한 의사 소통은 두터운 관계를 세워 준다.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생각을 나눌 뿐만 아니라 듣기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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