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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 행복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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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 행복의 근원이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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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0
파90 9/1 10-14면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 행복의 근원이다

잭 핼리데이 네이선의 체험담

“은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른다. 바로, 내가 태어난 1897년의 경우에 그 말은 거의 문자 그대로 사실이었다.

그때는 빅토리아 여왕 통치 60년째 되는 해로서, 이른바 다이아몬드 축제의 해였다. 그 해에 영국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은숟가락을 하나씩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당시 전성기의 대영제국은 본국의 산업 혁명 그리고 확장하는 해외 식민지를 통한 번성하는 무역으로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히브리어 성경에 정통한 히브리어 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성공회 주교의 딸이었으므로, 아버지는 할머니의 영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였다. 부모가 모두 찰스 테이즈 러셀의 저술물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나 지옥불 교리를 전혀 믿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영국 내의 주요 교통 수단이 여전히 말이었고, 말이 끌지 않는 수레 즉 자동차는 드물었다. 1913년에, 나는 말을 좋아했기 때문에 국방 의용군(민병대) 기마 수송대에 입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정규군으로 전속되어 그리스 전선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말라리아에 걸렸다. 그 후에는, 서부 전선 프랑스에 기관총 사수로 파견되었다가 마침내 1917년에 독일군의 포로로 잡혔다.

인도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함

1918년에 전쟁이 끝난 뒤, 영국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다시 군에 입대하여 평화시 수비대로 인도에 파견되었다. 1920년 5월에 또다시 말라리아에 걸려 회복을 위해 고원 휴양지로 후송되었다. 그곳에서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책을 읽었는데, 그중에는 성서도 들어 있었다. 성경을 읽다 보니 주의 재림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몇 달 후 칸푸르로 내려와서, 주의 재림에 관해 좀더 알아보려는 마음으로 성경 연구 그룹에 참여했다. 바로 거기서, 영국 군인 출신으로 그 당시 열성적인 성경 연구생이던 프레드릭 제임스를 만났다. 그는 예수께서 1914년 이래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임재해 계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내가 들었던 것들 중 가장 가슴 설레는 소식이었다. 제일 먼저 느낀 충동은 군에서 나와야겠다는 것이었다. 유럽 전쟁에서의 유혈 및 살육에는 진저리가 나 있었다. 나는 평화로운 선교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싶었다.

그러나 군에서는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파키스탄인 인도 서부로 보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찰스 테이즈 러셀이 쓴 「성경 연구」를 읽고, 전파하라는 부름에 응해야겠다는 확신이 어느 때보다도 강해졌다. 나는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다. 자포자기가 되어 제임스 형제에게 편지를 썼더니, 그는 칸푸르의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내가 도착한 날은 주의 죽음의 기념식 날이었다. 그 날은 내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독신으로 지낼 것과 전 시간 봉사를 인생의 목표로 삼을 것 두 가지를 결심했다.

다시 영국에서

1921년 말에 다시 영국으로 전속되었다가, 1922년 봄에 군에서 제대하였다. 그 해 여름, 워치 타워 협회 제2대 회장인 J. F. 러더퍼드가 영국에 왔고 나는 부모와 함께 그의 연설을 들으러 런던 로열 앨버트 홀로 갔다. 그 후, 벧엘이라고 불리는 워치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나, 우선은 콜포처 활동(전 시간 전파 활동)을 얼마간 하라는 친절한 격려를 받았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영국 남부 구역 임명을 받아들였다. 아무 경험도 없이, 주머니에 50센트(약 350원)짜리 동전 한 닢만 가지고, 여호와를 신뢰하면서, 전 시간 봉사자로서의 천직을 시작하였다. 1924년 3월경에 벧엘로 초대받았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벧엘을 떠나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에게는 책임이 없는 일로 인해 징계를 받는다고 느낀 나는 마음이 참담하였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벧엘은 내 생활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기도로 여호와께 맡기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신뢰함으로써, 내가 받은 파이오니아 임명을 즐겁게 수행할 수 있었다. 1926년 5월, 다시 벧엘로 초대받아 그 후 11년을 그곳에 머물렀다.

러더퍼드 형제는 1936년에 다시 영국을 방문하여, 캐나다에 가서 왕국 활동에 참여하라고 나를 초대했다. 그런데, 나는 그만 어떤 오해로 말미암아 일부 내밀 사항을 누설함으로써 러더퍼드 형제로부터 꾸지람을 듣게 되었다. 아직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기억난다. “잭, 당신을 신뢰할 수 없군요. 차표를 찢어버리시오!” 참으로 낙심 천만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절실히 필요했던 징계였으며, 그 후로는 다른 형제와 함께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어 여덟 달 동안 일했다. 나는 그 봉사의 특권으로 인해 실망에서 벗어났으며, 그 징계를 통하여 배웠다.

캐나다에서의 확장된 봉사

약 일 년 후, 러더퍼드 형제는 영국을 다시 방문하는 동안, 캐나다 문제를 또다시 거론했다. 나는 그 기회를 갈망했으므로 선뜻 그곳에서의 임명을 받아들였다. 캐나다 벧엘에서 몇 달 봉사한 다음, 온타리오 주 남서부에서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로 일하도록 임명받았다. 그곳의 회중은 대부분 작았고 많은 격려가 필요했다. 하지만, 악천후와 불확실한 교통 수단으로 인한 신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초창기 시절은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나는 브랜트퍼드 근처의 작은 인디언 원주민 회중이 보여준 온정과 영적 인식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때는 겨울이었고, 눈이 높이 쌓여서 나의 T형 포드 자동차로 가기가 힘들었다. 아무도 내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형제들이 땔나무를 마련하러 숲에 가고 없었다. 그래서 나는 허리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그들을 찾아 나섰다. 마침내 그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나를 보고 놀라는 한편 기뻐했다. 그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그날 저녁에 집회를 마련했다.

인접한 빔스빌에서, 충실한 형제들과 함께, 선거로 뽑힌 장로들과 배교자들을 상대로 여러 달 동안 씨름을 했다. 여호와의 영이 어떻게 작용하여 그 상황을 해결하는지를 보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의 조직에 충성한 결과로 그 초창기 회중에는 많은 축복이 있었다. 그 회중들에 있던 많은 어린이가 자라서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하고, 벧엘에 들어가고, 선교 임명을 즐기는가 하면 여행하는 감독자가 되었다. 그렇게 훌륭한 젊은이들을 길러낸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 가족들과 함께 머물렀던 즐거움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그 가족들은 내 가족이 되었고, 그 자녀들은 내 자녀가 되었다.

금지령 시절

1940년의 전쟁의 흥분 상태중에,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관영 라디오 방송에서는 우리의 출판물과 회중 기록 및 왕국회관 열쇠를 경찰에 넘길 것을 명령하는 발표가 있었다. 사태의 긴급성을 깨달은 나는 회중들을 다니면서 출판물과 기록을 숨기라고 촉구했다. 형제들은 가정 집에서 매주 집을 바꿔가며 모이도록 격려받았다. 이윽고 회중들은 단지 성서만을 사용하여 호별 방문 봉사를 재개하였다. 그 일은 축복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성서를 더 잘 사용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 해 말에 미국으로부터 「나치즘의 종말」이라는 소책자를 다량 공급받았다. 이 금지된 출판물을 캐나다로 들여오는 데는 대단한 기지가 필요했다. 어떤 형제들은 군인들을 무료 편승시켰는데, 그 군인들은 판지 상자를 깔고 앉음으로써 무심결에 금지된 소책자를 가려주는 일을 하였다. 그 후 11월의 어느 날 새벽, 세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전국이 증인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증인들이 캐나다의 거의 모든 집 문간에 이 소책자를 한 부씩 남겨놓았던 것이다.

그 금지령 기간 동안, 나는 캐나다 서부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했다. 금지령이 내리기 전에, 형제들은 밴쿠버에서 알래스카에 이르기까지 오지 해협 곳곳에 위치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방문할 때 배를 사용했었다. 금지령이 발효되었을 때에 상당한 양의 출판물이 배에 실려 있었으므로, 증인들은 배가 압류당하게 될 항구로 가는 도중에 우호적인 사람들에게 출판물을 떨어뜨려 놓았다. 그 후, 나는 어선 한 척을 타고 다니면서 그 출판물의 소재를 파악하고 나서, 연어잡이 철이 되었을 때, 형제들로 하여금 그 관심자들에게서 출판물을 찾아오도록 마련하였다. 때가 되자 그 출판물은 어선들의 선창 속에 위장된 채, 보다 널리 배부되기 위해 밴쿠버에 도착했다.

1943년 말에,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렇지만 워치 타워 협회에 대한 금지령은 해제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종전대로 호별 방문 봉사에서 성서만을 사용하여 일했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우리 자신의 신분을 여호와의 증인으로 떳떳이 밝힐 수 있었다. 금지령이 시작되었을 때 약 6700명의 증인이 있었는데, 해제되었을 때는 총 1만 1000명이었다!

여행하는 감독자 생활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로서, 그 후 수년 동안 회중들과 함께 일하고 회중들을 격려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먼 거리를 다녔다. 겨울철이면, 형제들과 함께 커부스라고 하는 특이한 운송 수단을 타고 다녔다. 그것은 말이 끄는 덮개가 있는 썰매였는데, 밀폐된 장작 난로와 굴뚝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종종 우리는 여섯 명씩이나 타고 동트기 전에 출발하여, 길을 따라 농장들을 방문하면서 높이 쌓인 눈길을 헤치고 35킬로미터 남짓을 여행했다. 자칫하다가는 눈더미로 인해 커부스가 옆으로 쓰러져,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과 장작 난로의 뜨거운 숯불이 함께 내동댕이쳐질 수 있기 때문에 마부는 주의해야 하였다.

1947년, 나는 그 나라의 첫 지역구를 감독하도록 임명되었는데, 그 지역구는 전국을 망라하였다. 거의 매주 순회 대회를 열었다. 대회는 스케이트장, 축구장, 경마장, 조합 회관, 마을 회관에서 열렸다. 프로그램이 시작될 수 있기까지 이러한 모임을 마련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1950년, 프랭크 프랜스키가 캐나다의 두 번째 지역 감독자로 임명되었고, 그 후에 이러한 여행하는 감독자는 다섯 명이 더 늘었다.

여러 해에 걸쳐, 경비행기로, 어선으로, 궤도가 있고 스키가 달린 폭격수라고 불리는 커다란 설상차(雪上車)로, 눈비행기(뒤에 프로펠러가 있고 앞쪽에는 조종을 위해 스키가 달린 차)로, 그리고 좀더 평범한 수단인 기차와 버스와 자동차로 여행을 했다. 때로는 비행기를 타고 장엄한 록키 산맥의 봉우리를 스치듯 지나 깊이 숨은 계곡으로 고꾸라지듯 내려가서, 오지 형제들의 집단을 찾아가기도 했다.

나는 여러 번 캐나다를 종횡으로 오갔다. 너무 추워서 아침이면 입김이 하얗게 서리는 통나무집에서, 그리고 현대식 편의 시설이 전혀 없는 농가에서 유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내가 여호와의 일을 하고 있고 여호와의 백성을 격려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큰 만족을 느꼈다.

부가적인 봉사의 특권

지난 33년 동안, 캐나다 벧엘 가족의 성원이 되는 특권에 더하여 영국, 유럽,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및 극동에서 대회 연사로 섬기는 특권을 누려왔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과거 인도에서 나에게 그토록 격려가 되었던 제임스 형제의 딸을 만났다. 제임스 형제는 선교인은 아니었지만, 가족에게 훌륭한 영적 유산을 물려주었다.

현재 나는 캐나다 벧엘에서 수많은 젊은 남녀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들이 젊음의 활력을 여호와의 봉사에 사용하는 방법은 격려적이고 기운을 돋우어 준다. 눈은 침침하지만, 그 젊은이들이 나에게 글을 읽어 준다. 다리는 힘이 없지만, 그들이 야외 봉사에 나를 데리고 간다. 나이가 들면서 따르는 건강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한 가지 비결을 말한다면, 나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신과 마음이 영적인 것에 고정된다.

참으로, 헌신한 이래의 69년 생애를 통해, 67년을 전 시간 봉사에 바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여호와와 함께 행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특권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인자하시고 동정심이 많으시며 인간의 약점을 용서하시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능력과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항상 느껴왔다. 내 희망은 때가 되면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 및 수많은 충실한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늘 영광 가운데 연합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신뢰하는 가운데, 끝까지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대한 충절과 충성을 유지하는 것이다.—시 84:12.

[10면 잭 핼리데이 네이선의 사진]

[12면 삽화]

시속 80킬로미터까지 속력을 내면서 전국을 누볐던 눈비행기

[13면 삽화]

겨울철에는 말이 끄는 커부스가 캐나다 대평원에서 증거 활동에 사용되었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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