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조직과 함께 전진함
‘그랜트 수우터’의 체험담
내가 열네 살 때인 1922년에, 나의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데리고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캘리포오니아’ 주로 이사를 하였다. 가는 길에 우리는 ‘아이다호’에 사는 옛 친구들을 방문하였다. 그 친구들은, ‘캘리포오니아’ 주에는 성서에 의하면 당시에 살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캘리포오니아’ 주에 도착한 직후에, 우리는 한 신문에서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란 광고문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산호세’에서 있을 공개 강연의 제목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나의 아버지는 ‘성경 연구생’들(당시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렇게 알려졌다)의 소재를 알게 되었고, 우리를 그들이 갖는 공개 집회로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가 교회의 주일 학교에 관계하기를 원하였다. 모든 종파의 설교자들에 대해선 비평적이었던 아버지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좋겠다고 하여 그 점에 동의하였다. 그래서 나는 감리교의 주일 학교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그 학교의 회계 담당이 되었고, 그 학교의 농구 ‘티임’에서 운동도 하였다. 동시에, 우리 가족은 ‘산타클라라’의 우리 집에서 몇 ‘킬로미터’ 거리밖에 안 되는 ‘산호세’에서 ‘성경 연구생’들이 개최하는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세상 상태가 개선되기를 희망하였고, 또 그런 목적으로 여러 정치 후보자들을 위해 선거 운동을 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그러한 후보자 한 사람의 이름을 우리의 ‘모델 T 포오드’ 자동차 바람막이 유리창에 써 부치기도 하였다. 집회에서 ‘성경 연구생’들은, 인간을 위한 참된 희망은 정치적인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에 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곤 하였다. 아버지는 다소 찬동하기는 하였으나, 그런 것은 장래를 위해선 좋지만 그런 때가 올 때까지는 정치적 수단으로 상태를 가능한 한 개선시키고 싶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얼마 안 가서 나의 전 가족—어머니, 아버지, 누이 동생 그리고 나—은 성서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 조건들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영적 성장
결국 나는 양심상 감리교 주일 학교에 계속 다닐 수가 없어, 탈퇴하였다. 1923년경 우리 가족은 몇 ‘킬로미터’ 떨어진 ‘오오클랜드’로 이사를 하였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조그만 청과상을 운영하였으며, 나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성경 연구생’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상점에서 담배를 파는 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아버지를 설득코자 애썼다. 아버지는 나와는 생각이 달랐지만, 그 문제를 ‘성경 연구생’인 ‘로버어트 크레이그’와 상의하였다.
상의한 후에 나의 아버지는 사업 전체를 처분하여, ‘오오클랜드’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아버지를 주류 밀매업에 끌어들이려는 한 집단의 노력도 그 결정을 더욱 촉진시켰지만, 아버지는 그 일이 자기가 ‘성경 연구생’들의 ‘오오클랜드’ ‘에클레시아’(회중)를 통해 배우고 있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는 부모의 하락을 받아, 학교에서의 부도덕한 영향 때문에, 고등학교를 단지 1년 반 동안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우리는 ‘산호세’ ‘에클레시아’의 집회에 참석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으로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마운틴 뷰우’로 이사하였다. 아버지는 또 상점을 운영하였고, 나는 무보수로 전 시간을 그 상점에서 일하여 아버지를 도왔다. 아버지는 「파수대」와 「황금시대」(지금의 「깨어라!」)를 예약하였다. 나는 특히 「황금 시대」를 참으로 즐겨 읽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계속 다녀서 얻었을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그 잡지로부터 얻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에클레시아’의 집회들에 점점 더 흥미를 갖게 되었다. 「파수대」지 1925년 3월 1일호에 실린 “나라의 출생”이란 기사는 특히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기사에 담긴 지식은 ‘성경 연구생’들이 그리스도에 의한 여호와의 왕국, 즉 1914년에 하늘에 건설된 여호와의 왕국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장족의 진전을 하게 해주었다. 이 기간에 우리 가족은 ‘마운틴뷰우’의 ‘성경 연구생’들과 친근한 사이가 되고 있었고, 상당한 시간을 그들의 가정에서 보냈다.
결국 우리는, 기도는 ‘에클레시아’의 집회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그 친구들은 또한 자기 개인 집에서도 식사 시간에 감사하는 것을 포함하여 기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훌륭하게도, 아버지는 기도를 합당한 견지로 보기를 원하였다. 아버지는 일반적으로 기도를 위선적인 것이라고 간주했었다. 아버지가 자기 상점을 방문한, ‘성경 연구생’ 한 사람과 기도에 관해 토론하고 있을 때 나도 같이 있었던 일이 기억난다. 그 방문자는, 우리가 받은 축복들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 지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가 당하는 온갖 어려움에 대해선 결코 여호와께 책임을 돌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축복들에 대해서만 그분께 감사를 해야 하는지 그에게 질문을 하였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한 가족으로서 기도를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고, 또 이 사랑의 마련을 온전히 이용하게 되었다.
‘에클레시아’의 마련 중에서 내가 크게 유익을 받은 것으로 ‘예언자들의 학교’가 있었다. 그 집회의 목적은 장로들과 다른 남자들을 공개 연설을 위해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학생은 임명받은 주제로 준비한 연설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유익한 충고를 주곤 하였다. 하지만, 내가 이 학교에서 받은 건설적인 비평은, 나의 아버지가 나의 연설을 듣기 위해 한 집회를 참석한 후에 개인적으로 나에게 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 가족과 나는 ‘워치 타워 협회’의 특별한 대표자들인 순례자들한테서 크게 도움을 받았다. ‘에클레시아’들은 연례적으로 그들의 방문을 협회에 요청하였다. 특히 ‘J. A. 보넷’은 인상적이었고, 나에게 특별한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받지만, 다른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 반대의 영향을 주는 특성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호와를 사랑하였고, 분명히 겸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겸손의 성품은 그의 무뚝뚝한 외모 속에 다소 가려져 있었다.
침례와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
나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마운틴뷰우’의 한 ‘성경 연구생’의 집에서 행해진 ‘보넷’ 형제의 연설이었다. 여호와를 섬기는 특권과 또 그렇게 해야 할 책임에 관해 그가 연설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여호와께 헌신을 하였고,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우리 집의 다른 식구들도 그렇게 하였다. 우리 모두는 1926년 10월 10일에 ‘캘리포오니아’ 주 ‘산호세’에서 물침례로써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그 당시의 침례는 오늘날과는 좀 색다르게 행해졌다. 침례를 베푸는 장로는 나에게 “‘그랜트’ 형제, 나는 이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대를 그리스도 안에 침례를 줍니다”하고 말했다. 침례를 받는 우리 각자는 목에서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반소매의 긴 옷을 입었다. 긴 옷이 반드시 아래로 내려져 있어 지망자를 정숙하게 가리워 주도록, 옷 밑단에는 납덩어리들을 달아 아래쪽이 무겁게 한 옷이었다.
침례를 받고 옷을 입은 후에, 아버지는 침례를 감독하는 장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서적을 가지고 나가지요? 우리도 이제 그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야외 전도 봉사를 나가기 시작하였다.
내가 야외 봉사에 처음으로 나간 것은 장로인 ‘H. O. 로렌스’가 봉사에 데리고 나갈 마련을 해주었을 때였다. 그는 나에게 소책자를 몇권 준비시키고는 자동차에 태워 ‘산호세’의 구역으로 갔다. 그가 호별에서 나와 같이 봉사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였는데, 그는 나에게 자동차에서 내리라고 한 다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 이 구획의 이쪽을 봉사해 내려가시오.” 그리고는 차를 몰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구획의 그쪽을 봉사해 갔고, 25‘센트’의 헌금을 받고서 소책자 세부를 전했다. 나는 무척 기뻤다. 이렇게 그리스도인 전도 봉사에 참여한 결과, 나는 참으로 하나님의 조직에 속해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럽 우리는 봉사에 대한 지시가 담긴 월간지 「게시판」(지금의 「우리의 왕국 봉사」)를 통해, 집주인에게 마귀의 조직에 관해 말해 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를 물리칠 때는, 나는 다소 집요하게 마귀의 조직이 있다는 것과 그것에 닥칠 멸망에 대해 그들에게 말해 주곤 하였다. 이것은 낙원이 된 땅에서 죽을 필요가 없이 영원히 살 전망에 관해 알려 주는 우리의 통상적인 제공과는 아주 색다른 것이었다.
‘산호세’ ‘에클레시아’는 왕국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먼 거리까지 여행을 하곤 하였다. 소위 유세단을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산타 클라라밸리’와 그 주변 일대의 구릉지를 다녔다. 대지 위에 꽃이 만발한 과수가 시야가 미치는 곳까지 덮고 있는 것을 본 일이 기억난다. 우리는 점심을 지참하고서 때때로 증거할 구역에 도착하기 위해 121‘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하기도 하면서, 온종일을 봉사하곤 하였다.
‘오오클랜드’의 ‘KFWM 라디오’ 방송국이 왕국 소식을 방송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사용되었으며, 인근의 여러 ‘에클레시아’들이 주말 방송 ‘프로그램’을 교대로 마련하였다. 나는 1927년 7월 24일에 행해진 것과 같은 성서 강연을 ‘KFWM’ 방송에서 낭독하는 특권을 가졌다. 이 방송국의 호출 문자는 ‘인류 세계를 위한 왕국’(Kingdom For World of Mankind)이란 말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었다.
나의 봉사의 확장
우리가 집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나를 처음으로 야외 봉사에 데리고 갔던 ‘로렌스’ 형제는 나에게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에서 봉사하기 위한 신청서를 주었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우리가 침례를 받은 직후, 언젠가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자기가 나의 입장이라면 여호와의 봉사를 자기의 평생의 사업으로 삼겠노라고 말하는 것을 엿들은 적이 있었다. 나 자신도 바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였고, ‘벧엘’ 봉사를 신청함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파수대」지 1928년 5월 15일호에서는 7월 30일부터 8월 6일까지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성경 연구생’들의 국제 대회가 있을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나는 무척이나 참석하고 싶었고, 나의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대회 중에 협회장 ‘J. F. 러더포오드’의 비서였던 ‘돈알드 하슬렛’은 연단에서 형제들이 ‘벧엘’ 봉사를 위해 필요하다는 발표를 하였다. 신청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러더포오드’ 형제와 면담을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응하여 또 하나의 ‘벧엘’ 봉사 신청서를 작성하였고, ‘러더포오드’ 형제는 1928년 8월 13일에 ‘벧엘’에 보고하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 ‘디트로이트’ 대회가 있은 지 꼭 1주일 후인 8월 13일에 ‘벧엘’ 봉사를 위해 보고한 사람은 모두 13명이었다. 당시에 새로 건축한 ‘아담스’ 가 117번지에 소재한 공장에서 성서 출판물을 생산하고 발송하는 일에 종사하는 가족 성원은 95명이었고, 그보다 다소 적은 수의 사람들이 ‘벧엘’ 집과 ‘협회’의 여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벧엘’에서 내가 맡은 처음 일은 겉표지가 소책자에 중철이 된 다음에 소책자들을 접는 데 사용되는 기계로부터 그것들을 옮기는 것이었다. 내가 인쇄 공장에서 일한 지 2주일도 채 못되어, 나는 ‘봉사부’로 옮기게 되었다. 이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나는 참으로 하나님의 조직과 함께 전진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1929년에는 나의 첫 휴가를 보낼 곳이 없어, 나는 ‘벧엘’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래서 나는, ‘러더포오드’ 형제가 ‘브루클린’의 ‘매소닉템플’에서 여호와께서 악을 허락하심과 그분의 이름을 입증하심에 대한 강연을 할 때 참석하였다. 그 이전에 우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러더포오드’ 형제의 연설은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논제에 대한 감동적인 해설이었다.
1930년대의 전진
1931년의 실로 절정을 이룬 것은 ‘여호와의 증인’이란 명칭을 채택하여,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통합시켜 주는 명칭을 갖게 된 일이었다. 그 이듬해에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을 식별하는 말은 ‘에클레시아’에서 “부회”(Company)란 말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시편 68:11(흠정역)에 기초하여 바뀐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세계적으로 우리는 “반”이나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들의 “부회”들을 갖게 되었다.
1932년에 아버지는 자기 사업을 처분하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 동생은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손수 이동식 주택을 만들었고, 그것은 그후 20년 동안 부모님을 위한 ‘파이오니아’의 집으로 사용되었다. 나의 누이 동생은 1939년에 ‘브루클린 벧엘’ 가족으로 초대를 받을 때까지, 그분들과 함께 봉사했었다. 그는 이곳에서 계속 봉사하고 있으며, 1959년부터는 ‘사이먼 크래커’의 아내로서 그렇게 하고 있다.
공장 감독자였던 ‘로버어트 J. 마아틴’이 1932년 9월 23일에 사망하였고, ‘러더포오드’ 형제는 ‘나단 H. 노워’를 그 직책에 임명하였다. ‘노워’ 형제는 이전에 기획부에서 일했었다.
그 이듬해부터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실로 고난이 시작되었다.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포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었고, 1933년 6월 28일에 ‘마그데부르크’에 소재한 ‘워치 타워 협회’ 독일 지부는 압류되고 폐쇄되었다. 교황 ‘파이어스 11세’는 1933년을 “성년”(Holy year)으로 선포하였고, ‘러더포오드’ 형제는 곧 55개 ‘라디오’ 방송국을 통하여, “성년이 평화와 번영에 미치는 영향”이란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특권을 가졌다.
1930년대 초에 우리의 일에 대한 상당한 반대가 일었고, 박해가 널리 확산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문제 지역에서 집중적인 증거를 할 목적으로 “분단”들로 조직되었다. 독일에서의 박해는 대단히 심화되어, 1934년 10월 7일에 여러 나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의 부회들은 ‘히틀러’에게 박해를 중지하라는 경고 전문을 보냈다.
이 무렵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는 계시록 7:9의 “큰 무리”에 관한 토론이 많았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그들을 이차적인, 덜 충실한 하늘 반열이라고 믿고 있었다. 한번은 ‘T. J. 설리반’ 형제가 사회하는 ‘벧엘’ 연구에서 나는 이러한 질문을 하였다. “큰 무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므로, 그 무리를 형성하는 사람들도 성실을 지킵니까?” 여러 가지 해설이 있기는 하였지만, 확정적인 해명은 없었다. 해설하라는 요청을 받고서, 나는 단지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는 대답을 얻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1935년 5월 31일 ‘워싱턴 D. C. 대회’에서 ‘러더포오드’ 형제는 다름아닌 그 논제에 대해 연설하였다. 나는 군중이 내려다 보이는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그의 연설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이 큰 무리란 ‘아마겟돈’을 생존하여 지상에서 영원히 살 전망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 성경적으로 명확히 밝혀졌다. 그렇다, 그 연설에는 ‘결코 죽지 않을,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이 담겨 있었다.
1937년 7월 12일에 ‘러더포오드’ 형제는 나를 ‘벧엘’의 종으로 임명하였다. ‘러더포오드’ 형제의 마지막 4년 반 동안 나는 그와 밀접히 일하는 특권을 가졌다. 1937년 후기에 들어, 「황금 시대」의 명칭이 「위안」으로 변경되었다. 그와 관련하여 내가 ‘러더포오드’ 형제를 자동차에 태워 그 잡지의 편집인 ‘C. J. 우드워어드’의 고향 부근의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을 통과하고 있을 때, 그는 재미있는 농담을 한마디 하였다. 그 당시에는 자동차를 타고 ‘스크랜턴’을 지나가기가 어려웠는데, ‘러더포오드’ 형제는 ‘우드워어드’ 형제를 ‘우디’라고 칭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디’가 이런 곳에 살고 있으니, 위안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겠군.”
시련의 시기인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10월에 우리의 ‘파리’ 지부 사무실이 폐쇄되었고, ‘프랑스’에서 우리의 일은 금지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캐나다’가 우리의 일을 금지하였다. 1940년 여름에는 ‘러더포오드’ 형제가 병을 앓게 되었고, 그가 ‘미시간’의 ‘디트로이트’에서 준비된 대회에 참석할 수 있을 것인지조차 우리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참석하였지만, 그의 공개 연설 도중에 그는 ‘벧엘’로 즉시 돌아갈 것이므로, 그렇게 할 채비를 하라고 나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 다음 해 여름에는 ‘미주리’ 주 ‘세인트 루이스’에서, 그때까지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졌던 가장 큰 대회가 열렸다. 나는 식당에 필요한 공급품을 접수하는 임명을 받았으며, 단지 마지막 날 「어린이」 책이 발표되는 회기에만 주 강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대회 중에 「여호와의 종들은 변호한다」란 소책자도 발표되었는데, 그 소책자에는 우리의 호별 전도 봉사를 대항하는, 종교의 사주를 받은 정치적인 행동과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이 되는 지식이 담겨 있었다.
그 출판물은 시기에 아주 적절하였다. 그해 후기에는, 나의 아버지가 체포되어 전도 봉사를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그리고 또 이동식 집에 홀로 남게 된 어머니는 폭도들의 공격을 받았다. 어머니가 신체적인 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폭도들은 그 이동식 집을 뜯어 해체해 버렸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는 그 지역의 ‘증인’들과 함께 기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41년 10월 1일에, 나는 ‘러더포오드’ 형제의 부재 중에 ‘펜실베이니아’ 주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연례 총회를 사회하는 특권을 가졌다. 내가 협회의 ‘펜실베이니아’ 법인체의 이사로 선출된 것은 바로 그 총회에서였다.
두달 후인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N. H. 노워’와 ‘G. E. 한난’과 나는 가까운 ‘롱아일랜드’ 지역에서 야외 봉사를 마치고, 자동차로 귀가하고 있었다. 자동차의 ‘라디오’를 듣던 중 우리는,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들었다. 그와 관련된 문제들은 여호와의 백성에게 매우 중대한 것이었다.—미국이 전쟁을 치르고 있고, 협회장은 중태이고, 사방에서는 원수들이 우리의 전파 활동을 중지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만 한달 하루가 지난 후에 사망하였지만, 왕국 사업은 계속 발전하였다. ‘노워’ 형제가 협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43년 2월 1일에, 그는 선교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의 개교를 발표하였다.
1945년 5월 8일, ‘해리 S.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독일의 항복을 발표하였다. 8월에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 폭탄을 투하하였다. 우리에게 전후의 시대가 온 것이다.
전후의 사태 발전
‘뉴우요오크’ 시는 산책로와 간선 도로의 건설을 위해 ‘퍼어먼’ 가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컬럼비아 하이츠 벧엘’ 집의 뒷 부분을 사용할 것이라는 통지를 보냈다. 하지만, ‘협회’는 ‘벧엘’ 집을 증축하기 위해 ‘컬럼비아 하이츠’의 부동산을 매입할 수 있었고, 1946년 10월 11일에 정부로부터 건축 허가를 받았다. 1947년 1월 27일에, ‘퍼어먼’ 가에 있는 우리의 건물 뒷 부분을 허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새로운 ‘벧엘’ 증축 건물이 건축되었다. 이 훌륭한 신축 건물은 1950년에 봉헌되었다. 거의 동시에, ‘아담스’ 가 117번지에 소재한 공장의 커다란 9층짜리 증축 건물도 완공되었다.
‘협회’의 총무 겸 재무인 ‘W. E. 밴 앰버어’가 노령과 병 때문에, 그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 사임하였다. 1947년 2월 6일에, 내가 그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밴 앰버어’ 형제는 그 다음 날에 사망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1947년 봄에, 나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황폐된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도록 협회에 의해 파견되었다. ‘나찌’ 집단 수용소에서 여러 해를 보낸 후 최근에 석방된 충성스러운 여호와의 종들과 교제하는 것은 실로 특권이었다. 그때 개최된 대회들에서 주요 연사로서 그들에게 영적인 격려를 주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1928년에 ‘벧엘’에 들어온 이래, 나는 ‘캘리포오니아’ 주에는 가보지 못했었다. 나의 부모는 대부분 동부에서 ‘파이오니아’를 했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특히 큰 대회에서 그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1947년 여름에는 ‘캘리포오니아’ 주를 다시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로스앤젤레스’에서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대회가 계획되었고, 협회는 ‘벧엘’ 가족으로 15년 이상 봉사한 사람들에게 교통 수단을 마련해 주었다. 참으로 유쾌한 여행과 대회를 즐겼다!
봉사의 특권들
지난 여러 해 동안 나는 또한 하나님의 보이는 조직이 확장하는 것과 관련하여 독특한 특권들을 즐겼다. ‘워치 타워 협회’가 여러 차례 부동산을 취득하도록 내가 교섭을 도왔던 가장 최근의 것은 ‘퍼얼’ 가 175번지와 ‘브루클린’의 ‘퍼어먼’ 가 360번지에 소재한 부동산을 금년 초에 새로 매입한 것이다. 이 커다란 새로운 시설들이 장차 왕국 선포를 전세계적으로 놀랍게 증진시키는 데 사용되기를 나는 충심으로 소망하고 있다.
나는 미국 전역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로 수십만 ‘킬로미터’를 여행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많은 청중에게 그리스도인 전도 봉사를 격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예를 들어, 1963년에 있은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의 세계 일주 여행 중에, 나는 협회의 공식 대표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봉사했다. 그것은 내가 여호와께 감사드리는 여러 특권 중에 한 가지에 불과하다. 참석자가 25만 명을 넘는 1958년의 ‘양키 스타디움’ 대회와 같은 여호와의 백성의 역사적인 대회에서 연사로서 봉사한 것 역시, 내가 즐긴 특권이었다.
전진하는 조직
우리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 세월은 변화를 가져와, 때로는 아버지가 1954년 12월 31일에 마지막 ‘파이오니아’ 임지인 ‘일리노이’ 주에서 사망한 것과 같은, 불행한 희생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 이듬해에 나의 누이 동생 ‘그레이스’와 나는 어머니의 거처를 ‘일리노이’ 주 ‘뉴우요오크’로 옮겨 드렸고, 어머니는 1962년 5월 6일에 사망할 때까지 거기서 생활하였다. 하지만 열정적인 ‘파이오니아’인 ‘에디스 레토스’가 1956년 5월 12일에 나의 아내가 된 것은 참으로 행복한 변화였다. 그는 그 이래 이곳 ‘벧엘’의 내 곁에서 충실하게 봉사해 왔다.
이곳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의 본부에서 봉사의 햇수가 증가함에 따라, 특히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사명으로 주신 일, 즉 끝이 오기 전에 온 땅에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그분이 계속 축복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보는 것이다. (마태 24:14) 나는 1971년과 1974년에 통치체가 확대되는 것을 보았고, 그 이래 지부들과 전세계적인 전파 사업에 영향을 끼쳐온 책임있는 여러 가지 결정을 내리는 데도 참여해 왔다. 나는 또한 1928년에 ‘벧엘’에 들어올 때에 전세계의 왕국 선포자들의 수가 44,080명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그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2,500,000명으로 증가하는 것도 보았다. 진실로 하나님의 조직은 전진해 왔으며, 나는 대규모의 최종 증거 사업과 관련하여, 수행하도록 주어진 여러 가지 봉사의 특권에 대해 감사한다.
하나님의 의로운 정부에 대한 성서의 약속과 그것이 땅에 가져올 축복들에 대한 나의 믿음은 어느 때보다도 한층 더 강력하다. 설사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 할지라도, 내가 선택할 다른 길은 없을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족과 함께 지난 55년 동안 이곳 ‘벧엘’에서 봉사한 일을 실로 큰 즐거움과 특권이 아닐 수 없다!
본 기사의 출판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동안, ‘수우터’ 형제는 ‘브루클린 벧엘’의 자기 방에서 심하게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 결과 그는 척추를 심하게 다쳤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는 ‘워치 타워 협회’의 ‘벧엘’ 의무실에서 가능한 모든 사랑에 찬 간호를 받고 있었다. 그의 상태가 중태이긴 하나 안정을 찾기는 하였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이 충성스러운 형제를 병 중에 돌봐 주시고, 그와 그의 가족 성원들을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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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A. 보넷’은 나의 생애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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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동생 및 부모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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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이 이동식 주택에 살면서 20년 동안 ‘파이오니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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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에 ‘워치 타워 협회’의 총무겸 재무직을 내게 물려준 선임자 ‘W. E. 밴 앰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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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8년에 이곳 ‘양키 스타디움’에서와 같은 큰 대회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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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스’는 1956년 이래 나의 충실한 반려자로 봉사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