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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여호와께서 마련해 주시는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있는가?파수대—1970 |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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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여호와께서 마련해 주시는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누구를 막론하고 마땅히 감사해야 할 마련을 받고 있다. 우리가 음식을 취하건 공기를 호흡하건, 태양 광선을 쪼이고 있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필수적인 것 외에도 우리는 매일 많은 것을 받고 있다. 가정 관리나, 기술 훈련, 반가운 소식을 알리는 편지, 애정의 표시, 우의적인 인사, 집으로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 등일 수 있다. 이러한 것과 기타 많은 것들은 필요를 충족시켜 주거나 생활에 즐거움을 증가시켜 준다. 당신은 이런 것들에 대해 감사치 않을 때가 있는가?
우리가 받는 것은 단지 제공된 물질적인 것이나 사람을 우리 있는 데로 혹은 집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를 열어서 사상이 흘러들어오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성서에 근거한 영적인 마련, 충고 혹은 격려를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건, 무슨 생각을 하건 그 근원을 찾아올라가 보면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다른 어딘가에서 받은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질문하였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고린도 전 4:7) 우리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 자신을 자랑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리는 감사해야 하고, 유익한 마련의 참 근원을 인정하고 의도된 목적대로 그것을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영적인 것의 우월성
우리가 받는 모든 것 중에서 우리에게 최대의 행복과 영속적인 선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평가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영적인 선물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특히 잘 받아들여야 한다. 성서는 그 분을 각양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것의 수여자로 알려 주기 때문이다. (야고보 1:17) 이에 비추어 볼 때에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는 것이 논리적이다.—디모데 전 6:17.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비할데 없는 수여자이신데 대다수의 인류가 그의 영적 마련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들이 계속 거절한다면 그들은 마침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는 운명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계속적인 행복을 보장하고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을 굳게 잡기 위하여 우리 각자가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마련을 감사히 받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디모데 전 6:19.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선물들
그러면 우리가 마땅히 감사해야 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들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모든 선물 중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사랑받는 아들을 능가하는 선물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인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느니라.]” (요한 3:1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수석 대행자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그러한 분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예수의 동족이었던 ‘유대’ 민족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늘날 인류의 대다수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떠한가?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주신 것 뿐 아니라 인류에게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마련해 주셨다. (디모데 후 2:15; 3:16) 이 성경은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인간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을 기록하는 데 인간들이 사용되었지만 사도 ‘베드로’는 성령이 이 사람들을 움직여 기록하게 하였음을 말한다. 당신도 성서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하는가?—베드로 후 1:20, 21.
하나님의 선물인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말씀인 성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성령이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돕는 자 혹은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의 성취를 ‘예루살렘’ 성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열흘 뒤에 120명의 제자들에게 이 성령의 선물이 부어졌다. (사도 1:4, 8; 2:1-4) 그 오순절 날 성령의 작용은 의미심장한 축복이 되었으며 그것을 감사히 받은 사람들에게 점진적 계몽을 초래하였다. 같은 성령이 오늘날도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의 네째 선물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마련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 회중을 형성하는 헌신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 사도 ‘바울’은 성서 「시편」과 관련시켜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가 높은 곳에 오르셨을 때에 그는 포로들을 끌고 가셨고, 그는 사람들로 된 선물을 주셨다.” “그[예수 그리스도]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에베소 4:8, 신세, 11, 12; 시 68:18.
이러한 네 가지 선물에 부가하여 여호와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포함하여 다른 많은 선물들을 주셨다. (로마 6:23) 그러나 이 생명의 보상에 합당하게 되려면 앞서 말한 선물을 감사히 받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마련을 감사히 받고 있는가? 예를 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의 선물을 받아들임
제1세기에 예수께서 지상에서 왕국의 소식을 전파하셨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였는지 배척하였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를 받아들인 소수의 사람들은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예수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마련을 받아들였으며 그와 함께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에 가담하였다.—누가 8:1.
물론 제1세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어떤 자들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기원 33년에 사망하신 후에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 들였는지 배척하였는지를 어떻게 나타냈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원칙이 적용되었다. “너희[나의 대표자들]를 영접하는 자들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태 10:40) 이 원칙은 하늘의 음성이 ‘바리새’인 ‘사울’에게 한 질문에도 예시되어 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자, ‘사울’은 즉시 “주여 뉘시오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때 하늘의 음성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사도 9:4, 5.
물론 ‘사울’은 직접 예수를 핍박함으로써 그를 배척하고 있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사울’이 접근할 수 없는 하늘에 계셨다. 하지만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핍박하였으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예수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 25:40.
그러므로 이렇게 자문해 보라. 나는 왕국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솔선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지적 대표자들에게 친절과 후대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이러한 사람들의 충고와 지시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그들과 함께 예수께서 임명하신 공개적 전파사업에 가담하고 있는가?—고린도 후 5:20; 히브리 13:17; 사도 1:8.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의 마련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제1세기에 어떤 ‘유대’인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사도 13:46) 하나님의 말씀의 선물을 배척하는 것은 생명 그 자체를 배척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러한 태도를 갖지 않도록 하자. 오히려 초기의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자.—데살로니가 전 2:13.
당신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왕국과 지상 낙원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웅대한 진리를 들었을 때 아마 당신은 가슴이 설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합당한 도덕에 관한 성서의 원칙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있는가?
예를 들면 최근의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에서 여러 가지 ‘프로’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도덕적 행실을 다루었다. 당신은 이 모든 충고를 당신의 생활에서 실천에 옮기고 있는가? 당신의 일거일동은 하나님의 높은 도덕 표준에 일치하는가? 당신은 교리적 진리와 마찬가지로 서슴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그러한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옛 성품을 벗어버리고 있으며 당신은 참다운 의와 충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창조되는 새로운 성품으로 옷입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이 있게 할 것이다.—에베소 4:22-24; 로마 12:2.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들임
예수께서는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누가 11:13) 성령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성실하게 구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성실히 구하는 것은 아니다. 제자 ‘스데반’은 제1세기의 어떤 ‘유대’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리느니라.]” (사도 7:51)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대표자들을 통하여 선포하고 계셨던 소식에 귀를 닫아버림으로 성령을 거스렸다.
당신은 성령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또 다시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들을 책망하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 3:2) 그렇다. “듣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듣고 믿으며 그 교훈에 일치하게 생활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신은 그렇게 하는가?
또한 당신은 실제로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하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의 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다른 것에 관하여는 구한다. 마찬가지로 그분께 성령을 계속 구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된 선물”을 받아들임
성서에서 “사람들로 된 선물”이라고 한 사람들 가운데는 ‘사도와 목자와 교사’가 들어 있다. (에베소 4:11, 신세)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그러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요한’ 자신은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한다고 편지하였다. (요한 3서 9) ‘디오드레베’는 확실히 여호와의 마련을 감사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당신은 여호와께서 당신을 영적으로 보강하기 위하여 마련하신 “사람들로 된 선물”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여행을 하는 대표자들이 영적으로 세워주기 위하여 당신의 회중을 방문할 때 그들의 방문 기간에 그 마련을 지지함으로써 그들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러한 방문은 제1세기에 장성한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방문과 같이 고무적이고 도움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로 된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확실히 축복을 놓치고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한다. 반면에 그러한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큰 축복을 받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마련을 받아들임으로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보상을 받을 대열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인식을 계속 유지하라
여호와의 후한 손으로부터 이러한 마련을 받아들임으로 당신은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자문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이 모든 영적인 선물들을 인식하는가? 나는 여호와께서 마련하시는 것을 감사히 받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이 사물의 제도에서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이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으리라] ···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태 19:27-29.
하나님의 마련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가치있다! 이 제도에서 무엇을 버리든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백배나 받고 영생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포기하셨다. 그는 하늘에서의 영광스러운 영의 존재를 포기하셨다. 그는 심지어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에 충성스럽게 순종하여 생명 그 자체를 희생하시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그가 받으신 보상을 보라. 그는 아버지의 승인을 받으셨고 그가 이 땅으로 오시기 전에 가졌던 지위보다도 더욱 높임을 받으셨다!—빌립보 2:5-11.
우리가 여호와의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선물의 진정한 영적 가치를 평가해 볼 때에 우리의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정력과 노력을 바치도록 움직이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여호와께서만이 마련하시는 그 선물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합당함을 증명하게 된다.—로마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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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부터의 질문파수대—1970 |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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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부터의 질문
● 성서는 ‘모세’가 120세까지 살았다고 알려 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시편 90:10에서 사람의 연수가 칠팔십밖에 안된다고 기록할 수 있었읍니까?—영국의 독자로부터.
시편 90편의 머릿말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유대’의 「탈무드」 저술가들과 많은 학자들은 ‘모세’가 이 시를 썼다는데 의견이 일치합니다. 예로서,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저명한 교수 ‘프랜즈 델리취’ 씨는 이렇게 기록하였읍니다. “이 시와 같이 그 기원에 대하여 전통적인 증거를 그토록 시원스럽게 제시할 수 있는 고대의 문학 작품이 없다. 그 내용에 있어서나 문체에 있어서나 이 시는 ‘모세’가 썼다고 보는 것이 전적으로 타당하다.”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이렇게 기록하였읍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 가나이다.” (시 90:10) 많은 사람들은 ‘모세’가 어떻게 자기는 그 나이보다 더 오래 살고도 이렇게 기록하였는가 의아하게 생각해 왔읍니다. 신명기 34:7에 의하면 이러합니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것은 실제로 아무런 심각한 문제도 아닙니다. 이 시를 지었을 때의 ‘모세’의 나이를 알 수는 없으나 ‘모세’는 그간 관찰한 바에 의하여 분명히 70세라면 만년이며 80세는 평균 이상이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특히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나온 ‘이스라엘’ 성인 세대의 대다수는 오래 살지 못했음이 명백합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이었던 사람은 40년의 방랑이 끝날 때까지 다 죽었읍니다.
‘모세’(120세), ‘아론’(123세), ‘여호수아’(110세), ‘갈렙’(85세 넘음)과 같은 예외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외가 있다고 하여 시편 90:10의 일반적인 나이를 변경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당대의 사람들보다 오래 살아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직접 언명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갈렙’이 85세였을 때 그는 자신의 나이와 정력이 아주 이례적이라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켰읍니다.—민수 14:30; 33:39; 여호수아 14:10, 11; 24:29.
종종 우리는 신문에서 백세 혹은 그보다 오래 사는 사람을 봅니다. 심지어 ‘소비에트’ 연방의 ‘코카서스’ 산맥에서 사는 사람들과 같은 어떤 집단의 사람들은 그들의 유전적 요소와 생활 방식 때문인지 장수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러한 예를 보도한다는 것은 그런 일이 예외라는 사실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여러 나라의 평균 수명은 시편 90:10의 숫자와 근사하게 60세 내지 70세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읍니다.
장수에 관하여 고려할 때, 많은 사람들은 현대 과학이 인간의 수명을 크게 연장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유아 시절과 소년 시절의 사망률을 감소시킴으로 평균 수명은 증가되었읍니다. 영국의 경우 1850년경에 남자의 평균 수명은 40세 미만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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