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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68 9/1 403-407면
  • 자기 방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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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 방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견해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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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슷한 자료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위험을 피함
  • 직접 공격을 받을 때
  • 강간의 위험을 당했을 때
  • 무기를 사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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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어라!—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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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어라!—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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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어라!—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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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8
파68 9/1 403-407면

자기 방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견해

범죄와 폭력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생명과 재산의 보호는 점점 많은 사람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읍니다.

이 문제는 당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관련된 문제입니다. 만약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라면 이 부면에 있어서 문제를 하나 더 직면할 것입니다. 즉 당신이 여호와 하나님께 충실을 지킨 결과로 오는 반대입니다.

여호와의 뜻을 행하기로 헌신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방위에 관련된 문제를 결정하기 위하여, 최고의 지혜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을 참조합니다. 성서 연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그의 지침이 될 법과 원칙을 이해하게 됩니다.—디모데 후 3:16, 17.

그러면 성서에 들어있다고 하여서,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에 언급된 대로 그리스도인이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리게 한 것은 때림으로 보복하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출애굽 21:24, 25) 아닙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그 율법의 마련에는 종지부를 찍었읍니다. 그것은 더 나은 마련인 그리스도인의 사물의 제도로 대치되었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 . . 첫것은 낡아지게 하”셨다고 알려 줍니다. (히브리 8:6, 13) 동시에 바울은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하였읍니다. (로마 6:14) 물론, 그리스도인의 요구 조건과 율법의 요구 조건이 그 근원되는 원칙에 있어서 동일할 경우에는, 그 당시 그 특정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를 고찰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22:39) 자기 이웃을 사랑하려면, 자신도 사랑하여야 합니다. 즉 자기의 정신과 신체를 보살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불필요하게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내맡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영광도 돌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쳤기 때문에, 창조주를 섬길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로마 12:1.

예수께서는 불필요하게 자신의 생명을 방기하지 않으셨읍니다. 한 때 그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 . .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피하려고 하셨읍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피하셨읍니다!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읍니다. 소란을 피우는 가운데서, 예수는 안전하게 빠져 나가실 수 있었읍니다.—누가 4:28-30.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였고 보호하였읍니다. 그는 여러번 위험한 상태로부터 도망하였읍니다. (사도 9:23-25; 14:5, 6) 그가 관헌들의 손에 구금당하였을 때에도, 가이사에게 상소함으로 자신의 석방을 도모하였읍니다.—사도 25:11.

이러한 본에 관련된 원칙은 예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에 들어있읍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마태 10:23) 따라서, 가능하다면, 위험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로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을 어떻게 방위하느냐 하는 문제는 생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위험을 피함

신앙으로 인한 박해가 아닐 때에도 동일한 일반 원칙이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폭동이나 기타 소동이 일어난 도시에 산다고 합시다.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위험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 장소를 벗어나는 것이 항상 가능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집안의 안전 장소에 피신하여, 위험이 지날 때까지 머무를 수 있읍니다. 잠언 26:17의 말씀과 같습니다.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이 충고를 청종하는 사람은 현 악한 사물의 제도의 소란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호기심으로 가까이 가는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가능할 때마다 피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비슷한 이치로, 당신이 자기 방위를 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 혹은 공공 교통 시설을 이용할 때, 혹은 직장에서라도 호전적인 사람을 만났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러한 호전적인 사람을 만났을 때 취할 원칙은 이러합니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집니다. (잠언 26:20)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합니다. (잠언 15:1) 친절하고 온순한 어조로 말한다면, 격분한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 앉히고, 문제를 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순한 대답이 상대방의 적의를 없애지 못하였을 때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잠언 17:14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박해에서 도망하는 경우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길은 가능할 때마다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비합리적인 사람을 피하는 것입니다.

위험을 피한다는 것은 여행할 때에 불필요한 위험을 자초하지 않는 것도 의미합니다. 위험한 구역을 조심하고, 특별히 밤에 그런 곳을 다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직장의 위치 때문에 퇴근할 때는 밤늦게 위험 지구를 거쳐 다녀야 하므로 당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면, 직장을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원칙을 적용할 때, 당신은 위험을 피할 수 있읍니다.

직접 공격을 받을 때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위험을 피할 수 없는 때가 있읍니다. 예를 들어, 백주에 강도가 흉기를 들고 위협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만약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라면,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는 등, 그 강도를 이치적으로 설복할 수 있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안전을 얻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하여, 그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뺏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자문해 보십시오. 나의 돈과 나의 생명,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내가 지갑에 가지고 있는 돈이 없이도 여호와를 계속 섬길 수 있는가? 내 생명 없이도 여호와를 계속 섬길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자명합니다. 생명이 훨씬 더 가치있읍니다. 따라서, 단순히 돈 때문에 생명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많은 강도들은 상대방이 저항을 하면, 서슴치 않고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순순히 돈을 내 주는 것은 실용적 지혜의 길입니다.

도적이 당신 집에 들어왔을 때도 동일합니다. 그가 무기를 가졌다면, 경찰에 도움을 구할 기회가 없을지 모릅니다. 도적은 돈이나 혹은 다른 물건만을 요구할지 모릅니다. 저항을 하게 되면 식구들이 부상을 입거나 살해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방위하기 위하여 소위 “영웅심”을 발휘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당신 자신과 당신이 아끼는 사람들의 안전이 첫째입니다.

그러나 불량배를 만나서 폭행을 당할 때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 때는 이치적으로 설득시키고 평화적으로 물건을 내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정당하게 보호할 수 있읍니다. 빠져나갈 수 없거나 혹은 자기 집에 있다면 그는 가해자를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상대방의 주먹을 막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읍니다. 물론, 가해자가 다수라면, 이렇게 방위한다고 해도 별 효과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자기 방위를 하다가 치는 것이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 결과 가해자가 죽었다면, 그것은 고의적인 살해여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우발적으로 가해자를 죽이게 된 그리스도인은 그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그가 그 사건에서 비록 고의적은 아니었으나, 피흘린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겸손하게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가족이나 혹은 영적 형제 자매가 신체적 폭행을 당할 때는 어떻게 할 수 있읍니까? 그 자리에서 다른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가능한 대로 저항을 할 수 있읍니다. 그 결과 당신의 생명이 위험하게 될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읍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 (요한 15:13) 환경에 따라서는 사태를 혼자서 처리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도움을 구하러 가는 것이 실용적일 경우가 있읍니다. 만약 자기 가족이나 그리스도인 형제가 집단 구타를 당한다면, 가능하다면 경찰의 도움을 구하러 가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때마다 취할 행동은 환경에 따라 다릅니다. 심지어 동일한 사태라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처리할 것입니다. 각자는 그 순간의 사태 파악에 따라서 최선의 길이 무엇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강간의 위험을 당했을 때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인 여자라면, 당신이 사전 주의를 철저히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강간당할 위험에 처하였을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치적으로 상대방을 설복시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 당신은 저항할 의무가 있읍니다. 이 저항은 가해자를 무섭게 만들고 도움을 이끌기 위하여 소리를 지르고 가능한 대로 최대의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만약 가해자가 계속 공격을 가하고, 당신이 빠져 나갈 수 없다면 필요에 따라 가해자에게 손상을 입혀도 정당화될 것입니다. 저항해야 함은 절대적입니다. 왜냐 하면 강간범은 돈이 아니라 당신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법에 대한 성실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읍니다. 그러므로 순순히 강간을 당하는 것은 음행을 허락하는 것이므로 결코 있어서는 안됩니다.—데살로니가 전 4:3.

그 원칙은 신명기 22장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라].” 왜 그 율법 언약하에서 그 처녀는 죽임을 당하여야 하였읍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계속합니다.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지르지 아니하였음이[라].” 만약 그 처녀가 소리지르지 않았다면, 음행을 허락한 것으로 간주되었읍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소리를 지르고 저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힘에 눌렸다면, 그는 공범이 아닙니다. “그 처녀가 소리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음이니라.”—신명 22:23-27.

상대방 남자가 흉기를 가지고 위협하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할 때는, 사정이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인들이 “음행을 멀리”할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선언합니다. (고린도 전 6:18) 그러한 경우에 살해될 가능성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순순히 응하였다고 하여, 강간범이 당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죽일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강간범의 목표가 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주의를 하는 것이 현명한 길입니다. 현 세대의 도덕관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음을 알고, 모든 예방 조처를 다 취하도록 하십시오. 위험 지구에 밤 늦게 혼자 다니는 일을 피하십시오. 전도서 4:12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동시에 당신의 복장도 고려할 것입니다. 현대에 유행하는 선정적이고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하였다면, 그 여자는 자기가 부도덕한 여자임을 광고하는 것이며, 따라서 재난을 자초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예방 조치를 취하고 저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 여자는 한 명 혹은 다수의 공격을 받고 강간당합니다. 이러한 일은 최근 말라위에서 발생하였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사악하고 맹수같은 남자들 특히 청년들로 된 폭도들에 의하여 강간당하였읍니다. 이것은 박해로 인하여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성실성을 타협케 하려는 정치 활동에 가담하기를 굳건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공격을 받았읍니다. 그들이 방위하였고, 그들의 남편들과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방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중과부적으로 강간당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도 저항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인 남녀는 그들의 입장을 천명합니다.

그러한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균형을 유지하고, 그러한 공격 후에 신체적으로 보복을 가하는 것이 자기 방위와 같다고 생각하여 보복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읍니다. 모든 법적 수단을 사용하여 정의를 구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그러나 공격이 지난 다음에 개인적으로 복수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습니다. “보수(報讐)는 내 것이라”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셨읍니다. (신명 32:35)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종들이 받은 상해를 온전히 알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위대하신 정의의 하나님께서 그의 정하신 때에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여호와께서 곧, 회개치 않는 악한 자들을 일소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그의 새로운 사물의 제도에서 성실을 지키는 종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보답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정신적 신체적 건강은 완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법에 대한 성실을 유지하다가 받은 상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받는 상해에 대하여 보상을 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로마의 투기장에서, 독일의 강제 수용소에서 당한 끔찍한 살해, 혹은 말라위에서와 같이 맹수같은 자들의 손에 당한 치욕은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65:17)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항상 유익합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누가 12:6, 7.

무기를 사용할 것인가?

여호와의 종들이 그러한 박해당함을 보고 어떤 이들은 자신과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권총이나 장총으로 무장하여야 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사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때때로 육체적 무기를 사용하였읍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언약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우월한 그리스도인의 사물의 제도 아래, 특히 사랑의 법 아래 있읍니다. (요한 13:34, 35)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었읍니다. (이사야 2:4) 그렇다면, 이러한 과정을 거꾸로 돌려서, 무장을 하고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읍니까?

만약 그리스도인이 보호책으로 무장을 한다면, 무죄한 사람을 죽일 가능성도 있으며, 여호와 앞에 피흘린 죄를 범하게 될 것이 아니겠읍니까? 더욱이, 어떤 경우에, 강도들은 무기를 보면, 먼저 자기의 총을 쏘아서 상대방을 죽입니다. 피해자가 총을 빼들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고 그저 강탈만 당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집에 총기를 놔두면, 가족에게 보호가 되기보다는, 어린 아이들의 경우와 같이 오발로 인한 죽음을 가져옵니다.

예수께서는 공격에 대비하여 무장하셨읍니까? 그의 추종자들은 무장하였읍니까? 고린도 후 11:23-27을 보면, 사도 바울이 흔히 위험한 지방을 여행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이나, 혹은 그와 동행한 젊은 디모데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기를 소지할 의무를 느꼈읍니까? 사도들이나 예수가 일면으로는 우월한 사랑의 법을 전파하면서, 타면으로는 칼이나 창으로 무장하고 행동하였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읍니까?

예수의 추종자들이 무기를 가진 것으로 보고된 단 한번의 경우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 전이었읍니다. 장소는 감람산이었읍니다. 왜 그들은 이곳에 무기를 가지고 왔읍니까? 예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22:36-38) 왜?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기 방위를 위하여 무기를 사용할 의도만 있었다면 그렇게 하실 수도 있음을 강력히 보일 수 있으셨읍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읍니다. 오히려 그는 무기를 사용하는 자를 책망하셨읍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태 26:51, 52)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러한 치사 무기를 사용하여 보호를 구하지 않으실 것을 보이셨읍니다. 그 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고린도 후 10:4.

자기 방위를 위하여 무기를 들지 않는다는 원칙은 실제에 있어서 많은 경우에 보호책이 됩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무기를 사용한다면,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큰 해를 가져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종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면서, 박해받을 때 가해자에게 발포한다면, 경찰이나 혹은 심지어 정부군으로부터 탄압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기를 가지지 않을 때보다도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라위에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무장을 하였었다면, 모잠비크 같은 나라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평화로운 피난민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까?

그러나 권투, 태권도, 유도와 같은 호신술을 연마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은 맨 주먹으로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훈련을 받은 사람의 손은 치사 무기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공격을 받으셨을 때, 그는 적의를 가지고 태권도식으로 내리치거나, 반대자를 유도의 등치기식으로 내리 메꾸치려고 하지 않으셨읍니다.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육체적 전투를 위한 훈련을 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읍니다. 따라서,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참으[라].” (디모데 후 2:24) 그리고, 호신술을 연마한 사람은 가능한한 폭력을 피하려고 하는 대신, 유사시에 폭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준비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한 로마 12:18의 정신에 위배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계속 바라봄

그리스도인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원칙에 일치되게, 자신과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방어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현재 생명이 여호와의 법을 타협해가면서까지 구할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인식하고 있읍니다. 여호와께 대한 순종과 그분의 새로운 사물의 제도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날에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는 무슨 일을 해서라도 현재의 생명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성실을 지키는 문제입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법을 타협하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그리고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부가하셨읍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여호와께 성실을 지킨다면,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될 것입니다.—마태 16:24-26.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여호와와 영원한 생명을 항상 바라고 있다면, 당신은 성실을 지킬 것입니다. 반대나 박해로 당신의 목숨이 위험한 때에도,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추구할 것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베드로 전 2:19, 20.

그러므로 견고히 서십시오. 믿음 안에서 강하게 자라가십시오. 당하는 어떠한 반대나 박해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여호와께서 주실 것을 신뢰하십시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따라서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공격이나 박해를 항상 두려워하며 살 필요가 없읍니다. 어려운 때가 일어나면 여호와께서 당신을 붙들어 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당신의 그리스도인 행로를 추구함에 있어서, 확신있게 장래를 직면할 수 있읍니다.

동시에, 머지 않아 여호와께서, 이 악한 사물의 제도를 적대하시어, 폐해를 가져 온 모든 사람을 일소하실 것을 알 때,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은 성실을 유지하는 종들을 정녕히 보상하실 것입니다.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궤휼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잠언 2:21, 22.

[405면 삽화]

저항하는 데는 소리지르는 것과 가능한 대로 최대의 소란을 피우는 것이 포함된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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