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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바른 전도인이 되도록 기초를 놓음
    파수대—1969 | 6월 15일
    • 상태가 쇠퇴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교육 사업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파괴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의 수는 대폭적으로 감소되었고 수백만인이 간직하고 있던 희망과 전망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읍니다. 왜 그랬읍니까? 왜냐 하면 그들이 반석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는 반석에다 희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 소수의 남은 자들은 올바른 때 곧 예수께서 지시하신 때에 도망하므로써 파멸을 면하였읍니다. (누가 21:20-22)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겟돈’의 파괴력은 훨씬 더 규모가 큰 모래와 같은 기초 위에 건축을 하고, 자기 혹은 불완전한 다른 사람들의 욕망이나 논리에 인도를 받는 사람들에게 재난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았기 때문에 자기 목전에서 희망과 전망이 깨어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 1:7-10) 그러나 사람들의 한 “큰 무리”는 그 폭풍우를 고스란히 통과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충실히 섬기는 자들인 만큼 하나님께서 만드실 새로운 질서에 살아 남아서 생명을 즐길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자기들의 희망이 실현되고 영원한 만족과 기쁨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감격할 것입니다.—잠언 1:24-33; 계시 7:9, 10, 14.

      16 지금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다른 사람들의 귀와 정신과 마음에 울리게 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가르치는 방법을 깊이 고려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진리가 배우는 자의 정신과 마음에 ‘울리게 함’
    파수대—1969 | 6월 15일
    • 진리가 배우는 자의 정신과 마음에 ‘울리게 함’

      1. 그리스도인 전도인은 때때로 어떠한 슬픈 경험을 합니까?

      어린애가 출생하여 몇 개월 혹은 일년이 지나 이제 막 삶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갑자기 병이 들어 죽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읍니까? 한 그리스도인이 여러 달 혹은 여러 햇 동안 어떤 사람을 도와 성서 지식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젖’을 먹여 진리로 양육한 결과 그가 의를 위하여 굳게 서고, 나아가서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까지 하다가 갑자기 영적으로 약해져 죽음과 같은 무활동 상태에 빠지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리스도인 전도인의 심정은 어린애를 잃은 그 부모의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4:19; 고린도 전 3:2; 데살로니가 전 2:7, 8) 불행하게도 그러한 일이 때때로 일어납니다. 활동적 전도 봉사를 시작하였다가 중지하는 사람이 두 사람 중 한 사람 꼴이 되는 경우도 있읍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러한 상태를 호전시킬 방법이 없읍니까?

      2. 생명의 길을 포기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어떠한 약점을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어떠한 질문을 일으킵니까?

      2 개개의 경우를 살펴 보면, 생명의 길에 들어섰다가 곁길로 가버린 사람들은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이해가 부족하였음을 알 수 있읍니다. 1968년도에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들은 무료 가정 성서 연구를 평균 977,503건 사회하였읍니다. 그 결과 82,842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의 침례를 받음으로써 그들이 순종이라는 반석 위에 건축하는 것을 표시하였읍니다. 이 사람들이 꾸준히 계속할 것입니까? 혹은 과거의 어떤 사람들과 같이 그 중 얼마는 떨어져나갈 것입니까? 지금도 수십만의 다른 사람들이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 탐구자들에게 그처럼 성서 교육을 베푸는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심각하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읍니다. 즉, 앞으로 새로운 왕국 선포자가 될 이 사람들은, 성서의 원칙들이 자기 일상 생활에 미치는 영향과 성서의 소식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의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됩니다. 우리는 왜 이 사람들과 연구를 하는가? 우리는 그들의 이익을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가? (고린도 후 12:15; 빌립보 2:17; 데살로니가 전 2:8) 우리는 진리가 그들의 정신과 마음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울리게 하’고 있는가?

      3. 관심가진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할 때에 우리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3 우리는 마땅히 새로 관심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이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나타낸 바와 동일한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 3:17-19) 물론 ‘바울’은 단순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가정 성서 연구를 보고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읍니다. 그는 또한 자기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피상적으로만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그들이 진리를 입체적으로 즉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이해하기를 원하였읍니다. 그는 그들이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정신에만 아니라 마음에까지 사랑으로 거하게 되도록 돕기를 원하였읍니다. 분명히 우리도 오늘날 양과 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동일하게 해 주고자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견해를 넓히고, 이해를 깊게 하고, 미래에 대하여 긴 전망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을 울려 하나님의 마련에 대한 감사를 높임으로써 하나님의 표준에 대하여 올바로 생각하도록 도와 주고자 합니다. 물론 이 일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읍니까?

      4.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데 고정된 법칙을 고집하는 것이 왜 좋지 않습니까?

      4 우리는 결코 각 사람이 개성을 가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개성에 맞는 관심과, 그 사람 특유의 필요와 입장에 따라 도움이 필요합니다. (로마 14:1-8; 고린도 전 9:20-23 비교)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들 간에는 관심자들과 가정 성서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고정된 법칙이 없읍니다. 그들의 “문답식 교육법”은 틀에 박힌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 나온 여호와의 증인들의 출판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니이다」(94면)에서는 “연구가 어떻게 사회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어떠한 독단적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연구생이 토론한 요점을 확실히 이해하였는가를 확인하라”고 설명하였읍니다. 동기가 올바른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돕는데 구구한 법칙이 필요없읍니다.

      5. (ㄱ) 하나님의 조직을 통해 주어진 제안들이 실용적 가치가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ㄴ)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지침이 되는 가장 훌륭한 근원은 무엇입니까?

      5 동시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또는 월간 인쇄물인 「천국 전도」를 통해서 교육 방법과 성서 교육에 대한 훌륭한 실용적 제안들을 받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제안을 적용시켜 큰 효과를 보았읍니다. 즉 그들은 지난 10년 동안 650,000명 이상이 그들의 하나님께 헌신하고 물의 침례로 그 헌신을 나타내도록 도와 주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유익하고 실용적인 제안 외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성서에 들어있는 실례들과 교훈의 인도를 받고 있읍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얼마나 신중히 고려해 보았읍니까? 생사 문제가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는 그러한 제안을 최대한으로 적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깊이 생각합니까?—디모데 전 4:16.

      최상의 스승

      6. 예수의 가르침은 어떠한 점이 주목할 만합니까?

      6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양같은 사람들의 완전한 스승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본보다 더 좋은 본을 어디서 볼 수 있겠읍니까? 예수의 가르치신 방법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그렇게 기록된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읍니다. 당신은 그의 전도 봉사에 관한 기록을 읽을 때 어떤 점에서 감명을 받습니까? 아마 가르침의 간결성일 것입니다. 그의 방법은 복잡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 그들에게 아버지의 목적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는 사랑에 찬 욕망을 가지고 계셨읍니다. (마태 9:35, 36; 마가 6:34) 바로 이것이 첫째 가는 필수불가결한 점입니다. 그 정신이 없다면 다른 것은 아무 가치도 없읍니다. (고린도 전 13:1, 8) 이 사랑에 찬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교육 사업에 신뢰성이 있었읍니다. 그가 ‘삭개오’에게 ‘그 나무에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서 유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삭개오’는 예수께서 틀림없이 오실 것을 확신하였읍니다.—누가 19:1-6.

      7. 예수께서는 가르치실 때 그 외에 어떤 점에 주력하셨읍니까?

      7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개별적으로 나타내신 점 또한 뛰어납니다. 그는 많은 군중들에게도 자주 가르치셨지만, 각 사람에게는 자기 특유의 문제와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아셨읍니다. 각 사람은 또한 하나님 앞에 자기 개인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로마 14:12)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나 우물 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 ‘마리아’, ‘마르다’, 혹은 사도 중의 한 사람, 누가 되었든지 간에 그들에게 개별적으로 깊은 고려를 나타내셨읍니다. (요한 3:1-21; 4:7-26; 누가 10:38-42; 22:31-34; 요한 20:24-29) 그의 가르치신 방법은 무미건조한 것도, 틀에 박힌 방법도 아니었읍니다. 그는 그들의 정신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도 관심을 가지셨읍니다. 우리도 역시 우리와 함께 연구하는 그 특정한 개인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도울 수 있는지 심중히 고려해야 합니다.

      분별성을 가지고 진리로 ‘울리게 함’

      8. 말하는 데는 보통 어떠한 두 가지 구분이 있으며 가르칠 때에, 흔히 이 중 어느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읍니까?

      8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보통,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두 가지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신 일이 있읍니까? 그 한 가지는 지식을 줄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질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의 종류도 가지가지이고, 질문의 형태도 여러 가지이지만 말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들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읍니다. 그런데 가정 성서 연구에서 사용할 참으로 중요한 지식은 성서와 우리가 사용하는 성서 연구 보조 서적에 들어 있읍니다. 그러나 성서 지식이 연구생의 정신과 마음 깊숙이 들어가도록 돕는 일의 성공 여부는 질문을 사용하는 점에 크게 달려 있읍니다. 질문의 가치는 매우 큽니다. 아마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9, 10. (ㄱ) 가르침을 받는 데 있어서 어른들은 어떤 면이 어린애들과 다릅니까? (ㄴ) 이것은 가르치는 데 있어서 무엇이 필요함을 강조합니까?

      9 어린애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왜 그래요?” 하고 묻습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다 그것을 압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잘 나타내지만, 많은 사람들은 마음 속에 있는 질문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서 연구 보조 서적에 고려되어 있는 점들이나, 우리가 설명해 주는 점들, 심지어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성서에서 읽은 점들도 겉으로는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들은 “예, 이해하겠읍니다” 하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을지 모릅니다. (요한 11:11-14) 그와 같은 이해의 부족은 훨씬 후에야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좀 더 어려운 점들을 고려할 때에 그 사람이 얼른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의 기본적인 것들을 연구할 때에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였음이 명백해집니다.—고린도 전 3:1, 2.

      10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연구생으로 하여금 자기의 생각을 나타내도록 격려하는 것의 중요성, 교재에 있는 질문 외에 부가적인 질문을 하여 그들의 심중을 끌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회자가 단순히 대답을 설명해 주는 것보다는 적절한 질문을 해서 그의 정신을 성서적 대답으로 유도하는 것이 연구생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됩니다. (갈라디아 3:1-6에 나오는 ‘바울’의 방법을 참조) 또한 교재 가운데서 대답이 나오는 곳을 지적해 주고 그것을 그의 대답인양 그대로 읽도록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설사 그가 읽을지라도 그가 그 내용을 이해합니까? 그리고 그 내용을 그가 믿습니까? 마태 24:15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읍니까?—사도 8:30-35 참조.

      11, 12. (ㄱ) 그리스도교국의 거짓된 “문답식” 교육은 교인들에게 어떤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었읍니까? (ㄴ) 질문을 지혜롭게 생각하면 이 점을 극복하는데 어떤 면으로 도움이 됩니까?

      11 사도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연구생들의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고자 합니다. (베드로 후 3:1)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성서를 거의 혹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수없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네 종교의 기본 교리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문답식”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올바른 교육이 아니었으며, 기계적인 것 뿐이었읍니다. 거짓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가르치지 않았으며 올바른 원칙에 대하여 추리하도록 가르치지 않았읍니다. (마태 15:7-9; 누가 11:52) 참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 자기의 정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명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지식과 근신함을 주”도록 해야 합니다.—잠언 1:2-5; 2:10, 11.

      12 유익한 질문은 사람의 생각을 자극하고 훈련시킵니다. 그것은 사람의 정신을 한 가지 점에서 다른 점으로 질서있게 인도하여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마태 16:5-12에 있는 예수의 질문들과 고린도 전 9:1-14에 있는 ‘바울’의 열일곱 가지 질문들을 비교해 보라.) 그러한 질문들은 성서 진리의 씨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또한 연구가 끝난 다음 주요 성서 진리를 복습하기 위하여 질문을 하는 것은 마치 강철 건조물(建造物)이 완성된 다음에 그것이 견고한가를 보기 위하여 망치로 ‘리베트’를 가볍게 두들겨 보는 것과 같습니다.

      13, 14. (ㄱ) 예수께서 질문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고 계셨다는 예들을 드십시오. (ㄴ) 이러한 예를 보고 우리는 어떠한 격려를 받습니까?

      13 예수께서는 훌륭한 방법으로 질문들을 사용하셨읍니다. 질문을 자주 사용한 점만이 아니라, 질문으로 가르치신 점에 있어서도 훌륭하셨읍니다. 사람들에게 간단히 요점을 설명해 주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시간적으로 절약될 것 같이 보이는 때에도 질문을 사용하셨읍니다. 예를 들어, 세리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그의 선생이 성전세를 내는가 물어 보았을 때를 보십시오. (마태 17:24-27) 가끔 급한 성미를 나타낸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하였읍니다. 그리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읍니다. 아마 그 문제를 예수께 묻거나, 낼 돈을 얻으러 간 모양입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입장을 생각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해 주셨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질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읍니까? 확실히 그러한 질문은 ‘베드로’로 하여금 생각하고 추리하고 기억하도록 도움을 주었읍니다.

      14 예수께서 붙잡히시던 밤의 사건을 생각해 봅시다. 그 혼란한 중에 ‘베드로’는 성급하게 칼을 휘둘렀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가지 질문을 하셨읍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너는 내가 내 아버지에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요한 18:11; 마태 26:52-54) 잠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폭도들에 싸여 극도의 긴장 상태 하에 계셨으며, 즉각 체포될 것과 그 날 형주에서 처형되실 것을 알고 계셨읍니다. 그러나 질문으로써 이러한 진리들을 ‘베드로’의 마음에 새겨 주시기 위하여 시간을 내셨읍니다. (마가 14:33; 누가 22:44) 우리가 너무 바빠서 가정 성서 연구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거나, 연구 내용을 적절히 빨리 해 치워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일이 있기 때문에 연구는 뒤로 미루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을 때에, 이러한 훌륭한 본은 우리로 잠간 멈추어 생각을 달리하게 하지 않겠읍니까?

      15. 연구에서 질문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며, 종종 무슨 문제에 봉착합니까?

      15 물론, 가르침이란 질문을 위한 질문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그 내용을 잘 알아야 하며, 목적 의식을 가지고 질문을 사용하고, 연구생의 정신만이 아니라 마음에까지 이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양같은 사람들을 도와 성서 진리의 기초에 뿌리를 박고 그리스도의 본과 가르침에 대한 순종의 반석에 뿌리를 박도록 해 주려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공통적으로 어떤 문제에 봉착합니다. 연구생들은 이미 선입관념을 가지고 있읍니다. 이전의 교회에서 배운 거짓 교리가 그것입니다.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하여는 그러한 내용을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터놓고 나타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재치있는 질문으로 알아 볼 수 있읍니다.

      16, 17. 누가 24:17-27의 내용에서 예수의 질문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읍니까?

      16 누가 24:17-27을 고려해 보십시오. 아시는 바와 같이,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읍니다. 그 때 예수께서 접근하셨읍니다. 먼저 어떻게 하셨읍니까? 질문을 하셨읍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글로바’가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하고 반문하였읍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무슨 일이뇨?” 하고 물으셨읍니다.

      17 예수께서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셨읍니까? 물론 그렇지 않았읍니다. 그는 제자들이 이야기하는 바로 장본인이었읍니다. 그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셨읍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제자들의 마음 상태와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피력하도록 하였읍니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상, 그리고 그들 곧 제자들이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다는 사실, 및 어떤 여인으로부터 들은 예수께서 부활되셨다는 보고 등을 말하였읍니다. 그러한 대답은 그들의 정신 상태가 어떠한가 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으로 자기들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나타냈읍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약간 의심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야기하며 문의”할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18, 19. (ㄱ) 그러한 질문을 사용하면 어떻게 배우는 자를 더 잘 도울 수 있읍니까? (ㄴ) 실제적인 예를 드십시오.

      18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들이 정신적으로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음을 나타냈읍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묻지 않고도 사람들의 마음을 판독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못합니다. (요한 1:47-50; 2:25) 그러므로 이와 비슷한 질문을 사용하면, 어떤 성서 내용에 대하여 연구생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를 알아낼 수 있읍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의 필요에 따라 더 나은 도움을 베풀 수 있읍니다.

      19 물론 이 일을 하는 방법은 사람과 연구 내용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예를 들어, 관심자의 집에서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사실」 제12장 “하나님은 한 위—혹은 한 하나님 안에 세 위, 어느 쪽인가?”를 사용하여 “삼위일체” 제목을 다룬다고 가정합시다. 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해 오셨읍니까?” 하고 물어 볼 수 있읍니다. 연구생이 자기 견해를 말한 다음에 “그것이 이치적인 것 같습니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읍니까?” 하고 부가적인 질문을 할 수 있읍니다.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하든지 이해할 수 없다고 대답하든지, 당신은 “그렇다면, 이에 대하여 성서는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 봅시다” 하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읍니다. 당신이 이미 처음에 목적한 바 곧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와 태도를 알았으므로 그를 도와 완전히 이해시키기에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읍니다.

      20, 21. (ㄱ) 성서 교육에서 생기는 다른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마태 16:13-16에 있는 예수의 방법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설명하십시오. (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비슷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읍니까?

      20 또 한 가지 문제는 연구하는 사람들로 성서 진리와 종교적 거짓과의 차이, 곧 강한 대조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한 이해나 옳은 것에 대한 판단이 느린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큰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외침이 그들에게는 무의미하고 그들의 생명은 계속 위험 가운데 있읍니다. (계시 18:4) 퉁명스럽고 거친 질문이 아니라, 재치있는 질문은 그들이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그들의 이해의 정도도 시험할 수 있읍니다. 마태 16:13-16의 유명한 기록을 열어 봅시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셨읍니다.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아마 한 사람씩 돌아가며 물으셨을 것입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하고 그들은 대답하였읍니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일반 대중의 견해를 말하도록 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읍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라” 하고 대답하였읍니다. 자, 예수의 질문은 무슨 역할을 하였읍니까? 먼저 일반 대중의 생각을 물어서, 그릇된 견해와 올바른 견해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도록 하셨읍니다. 그는 또한 제자들의 이해력의 발전도 시험하셨고 그들의 참 믿음의 발전도 알아 보셨읍니다.

      21 비슷한 예로, 앞서 말한 책에서 “당신의 영혼은 바로 당신이다”라는 장을 마쳤다고 가정합시다. 연구 끝에 연구생에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믿습니까?” 하고 물을 수 있읍니다. 그가 대답한 다음, “그러면 이제 우리가 성서에서 읽어 본 바에 의하면 댁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읍니까?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읍니다. 이러한 질문은 두드러진 대조를 하도록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특정한 성서 제목을 진정으로 믿는지에 대하여 그의 마음을 확정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그의 대답이, 그가 연구한 내용을 올바로 터득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낼 수도 있읍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러한 점들을 복습한다든가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공부하여, 그가 견고한 확신을 갖고 다음의 진리로 전진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2. 성서 연구에서 연구생이 잘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왜 충분치 않습니까?

      22 그러나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행동이 요구됩니다. (로마 10:10) 연구생은 예수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하여는 바위 기초 위에 집을 짓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배운 진리를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요한 13:17) 어떤 사람들은 배운 내용을 신속하게 이해합니다. 그들의 대답은 훌륭하고 정확합니다. 그러나 배운 진리에 준하여 행동하는 점에 있어서는 아무런 결정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야고보 1:6-8) 질문과 실례를 들어 설명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23-25. (ㄱ)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비유는, 우리가 관심자들을 순종의 반석 위에 집을 짓도록 격려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어떻게 보여 줍니까? (ㄴ) 오늘날 우리가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예를 하나 들고 이 방법이 왜 유익한지를 설명하십시오.

      23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비유는 유명합니다. (누가 10:29-37) 자신을 의롭게 보일 양으로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하고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하는 가운데 그 비유를 말씀하셨읍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 곧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강도에게 구타당한 사람을 도울 기회가 각 사람에게 다 있었는데 ‘사마리아’인만 실제 도움을 베풀었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끝으로 질문한 사람에게 질문을 제기하셨읍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 사람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하고 대답하였읍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24 예수의 질문에 대한 답은 뻔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어떤 결론에 이르도록 유도하셨으며, 그 자신의 동기를 살피도록 하셨읍니다. 그리하여 장래 행동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도록 그를 도왔던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로 돌아와서,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 가운데서의 영원한 생명」 211, 212면을 연구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거기서는 사도들이 당국의 전도 활동 중지 명령 때문에 반대와 학대를 받은 사실을 논하고 있읍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 24:14을 열어 연구생에게 읽힌 다음 이것은 우리 시대에 수행되어야 할 일을 지적한 것임을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아마 다음과 같은 예를 사용할 수 있읍니다. 하나님의 왕국 전파가 공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나라에 세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전도 활동을 즉시 중지하였고, 다음 사람은 감금당한 다음 얼마 후에 모든 전도 활동을 중지하기로 동의하였고 세째 사람은 체포당하였으나 나중에 석방되었을 때에 온갖 수단을 다 하여 전도 활동을 계속하였읍니다. 이제 연구생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읍니다. “그렇다면, 그들 중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 사도들과 같은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당신은 말하시겠읍니까?” 물론 대답은 마지막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이 나온 다음에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하고 우리는 질문할 수 있읍니다.

      25 이 예에서 질문의 답은 뻔한 것이지만, 그 질문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조사하도록 하고, 비슷한 환경 하에서 자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실제 생활상의 문제를 제시하는 것은 대단히 유익합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자기 생활에서 성서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자기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도록 도와 줍니다. (시 119:33-37) 또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신하여 발표한 결론보다는 자신이 발표한 결론을 더 잘 받아들입니다.

      26. 배우는 사람의 양심에 어떠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까?

      26 이와 비슷한 예로 우리와 함께 공부하는 사람이 자기 양심을 훈련시키도록 돕는 문제, 곧 옳고 그른 문제를 신중히 생각해 보도록 돕는 문제가 있읍니다. 우리는 그들이 옳은 것을 사랑하고 나쁜 것을 미워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히브리 1:9; 시 119:101-104) 예수께서는 마음에 깊이 파고 드는 질문들을 많이 하셨읍니다. 그러한 질문들은 옳은가 그른가 하는 문제를 신중히 생각해 보도록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람들이 반응이 좋지 않아서 그들의 “(정신이 아니라)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 혹은 분개하기도 하셨읍니다.—마태 12:10-12; 마가 3:1-5.

      27. (ㄱ)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니이다」 108, 109면에 있는 질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ㄴ)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여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읍니까?

      27 최근 출판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니이다」(108, 109면)에는 연구생을 전도 봉사에 초대하기 전에 성서 연구 사회자가 고려해 보아야 할 열 개의 질문이 열기되어 있읍니다. 그 질문 가운데는, 그는 성서가 영감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가? (디모데 후 3:16) 그는 정직성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그의 생활에 적용시키는가? (에베소 4:25, 28) 그는 음행과 간음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알고 있으며, 그 가르침과 일치하게 생활하고 있는가? (히브리 13:4; 마태 19:9) 등이 있읍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질문에 직접 대답할 사람은 연구생이 아니고, 연구를 사회하고 그 연구생에게 전도 봉사에 참여하라고 초대하는 사람이 연구생에 대한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사회자가 담대히 직접적인 질문으로 연구생의 사생활을 파고들라는 의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자가 어떻게 만족스런 대답을 할 수 있읍니까? 단순히 연구생으로 그 성귀들을 읽도록 하고 그 귀절의 의미에 대하여 이해하는 바를 설명하도록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요구된 사항들을 그가 이해하는지의 가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실례를 들어 이야기한 다음, 그 예에 근거한 질문을 하면,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제시하여 당황하게 하는 일이 없이 연구생에게 요점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28. 이러한 교수법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분별력을 사용할 수 있읍니까?

      28 마태 13:51에 있는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제시하신 질문은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구생에게 연속적인 질문만 쏟아놓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도움이 되고 그들의 정신과 마음에 성서 진리의 요점을 진정으로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곳을 가려서 사용하고자 합니다. 어떤 질문에 대한 반응이 소극적이거나 비유가 그 사람에게 납득이 잘 가지 않는 것 같이 보일 때에는 그것을 억지로 확신시키려고 하는 것보다는 간단히 “그렇지요, 잠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이군요.” 하고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인내심을 발휘하셨읍니다.—요한 16:12.

      29. 결론적으로 말해서, 상징적인 반석 위에 건축하는 일은 누가 해야 하며, 그러나 우리의 성서 연구에서 진리로 ‘울리게 할’때 우리는 항상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까?

      29 우리는 우리와 연구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과 예수의 본을 듣고 이해하도록 도와 주는 것 뿐입니다. 연구생 자신이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됨으로서 기초를 놓고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질문을 사용하든, 기타 다른 방법을 사용하든, 촛점은 항상 그 사람의 마음에 향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그의 정신은 그에게 필요성, 지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에 대한 순종이라는 반석 위에 건축하는 일의 긴급성을 보여 주지만, 그렇게 하도록 그를 움직이는 것은 그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양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도와서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명철에 두”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십시오. (잠언 2:1, 2; 3:1-4) “자신의 일과 가르치는 일을 잘 살펴서 꾸준히 이 일에 힘을 다하시오. 그리하면 그대 자신도 구원하고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구원할 것입니다.”—디모데 전 4:16, 새번역.

      [276면 삽화]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생각을 자극하고 훈련시키기 위하여 질문들을 사용하셨다

      [279면 삽화]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 끝에 질문을 하시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결론에 이르게 하셨읍니다

      [280면 삽입 성구]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디모데 후 2: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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