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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이행함파수대—1970 |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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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이행함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예레미야 7:23.
1. (ㄱ) 순종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오늘날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 20세기 세계에서 순종을 찾아보기란 진귀한 보석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정부들은 백성들에게 이 바람직한 성품을 가져다 주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읍니다. 법 시행관들은 공포나 강제가 순종하는 시민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종교 조직도 그들의 신도들 가운데 만연하고 있는 불순종을 경험하고 있읍니다. 지리적, 재정적, 사회적 차이를 막론하고, 가정은 긴장이 압도하여 파탄 지경에까지 미친 곳, 젊은이들은 연로자들을 멸시하는 곳, 사랑은 점점 사라지는 곳이 되고 있읍니다. 이러한 위험한 지경에서 순종이라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남편에 대한 복종이라는 문제는 여자들을 불안하게 해 주었읍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아내들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는 문제는 인간 이론에 밀려 나가 버렸읍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게 할 정도로 매우 심각합니다.
2, 3. 시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순종하는 인간들에게 무슨 결과가 왔으며, 현재 상태는 어떠합니까?
2 불순종이라는 것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시초와 거의 동시에 이 땅에 존재해 왔읍니다. 우리는 로마 5:19에서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명백한 기록을 볼 수 있읍니다. ‘아담’이 불순종한 때부터 세월의 흐름을 따라 인류 사이에서 불순종이 어찌나 성장해 왔던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들로서 나타나게 되었읍니다. 성서는 히브리 11장에서 이러한 사람들 중 얼마를 언급하고 있읍니다. 그중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으며 8절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였다고 말합니다. 순종적인 사람으로 탁월하였던 예수께서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때가 올 것을 예언하셨읍니다. (마태 24:12) 우리가 바로 그러한 때에 깊숙히 들어와 있음이 분명합니다.
3 근 6천년간 불순종이 증가해왔고 그것은 땅의 물과 공기가 오염된 것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왔읍니다. 조심성 없는 인간들은 계속 불순물들을 물과 공기에 퍼부으면서 그들은 또한 생명 유지를 위한 필수품들이 더러워지는 것을 불평하고 있읍니다. 일찌기 인간이 반항한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깨끗한 숭배를 소홀히 해 왔고 유전된 죄의 경향과 자기의 독립적인 길로 가려는 고의적 욕망으로 말미암아 불순종을 조장해 왔읍니다.
4. (ㄱ) 순종의 정의를 말씀하십시오. (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에 두려움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읍니까?
4 순종이라는 말을 사전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따르는 행위 혹은 사실, 혹은 따르고 있는 상태”, 따르다라는 말은 “다스림을 받다 혹은 지배받다, 지도, 운영 등을 따르다. 예를 들면 이성에 따르다; 중력의 법칙에 따르다.” 성서는 그 말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혹은, 두려워]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 12:13)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서 하나님을 순종한다는 생각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력의 법칙에 순종하며, 우리의 짧은 생애에 있어서 매일같이 이 힘에 대한 두려운 존경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아무에게서도 이 법칙에 대하여 불평하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법칙은 매우 강직하고 강제적입니다.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바로 시편 112:1에 기록된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즉 두려워)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사사 ‘사무엘’은 순종을 어떻게 강조하였읍니까?
5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는 사사 ‘사무엘’로 불순종한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하게 하셨읍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무엘 상 15:22, 23)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도 순종이 요구되었읍니다. (신명 10:12, 13) 예수에게도 그것이 요구되었읍니다. (히브리 5:8) 사도들도 순종하였읍니다. (사도 5:29) 하나님의 수만명의 충성스러운 종들은 온갖 환경 아래서 하나님께 순종하였읍니다.
6. 순종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들이 생깁니까?
6 순종은 어디로부터 솟아납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윗 사람이 명령하기 때문에 그대로 하는 어린이의 경우와 같습니까? 순종이란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태도입니까? 모든 사람들은 죄 가운데 출생하였는데도 현 “불법”의 세대에서 실제로 순종할 수 있읍니까? (마태 24:12) 하나님의 말씀은 담대함을 갖게 하는 여러 가지 충고와 함께 우리에게 대답해 줍니다.
7. (ㄱ) ‘바울’이 로마 2:8-11에서 논한 문제를 설명하십시오. (ㄴ) 로마 6:17은 경건한 순종이 어디서 온다고 우리에게 말해 줍니까?
7 로마서 5장 6절을 열어 보십시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순종이라는 문제를 제기하였읍니다. 순종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어져서 오랫 동안 많은 사람들이 지켰던 율법에 대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인류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돕는 마련 즉 여호와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제정하신 대속 희생의 마련을 통하여 있게 된 하나님의 과분하신 친절에 대한 것입니까? 오늘날 각자는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현 사물의 제도의 불법의 무리들과 함께 불순종의 길을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옛 율법 언약과 그의 새 언약 중의 하나를 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는 문제입니다. 로마 2:8-11에 있는 이 명백한 기록을 살펴 보십시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은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면 여호와께 순종하는 동기, 그것도 기꺼이 그렇게 하게 하는 동기를 사람에게 갖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로마 6:17은 우리를 이해의 방향으로 인도해 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였느니라].”
마음으로부터의 순종
8.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왜 공포에 떠는 순종이 아닙니까?
8 그러므로 순종은 마음으로부터 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순종은 법칙이나 규칙을 지키는 강제성을 띈 것이 아닙니다. 시편 112:1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시편 119:33, 34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와 도를 네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 있는 지혜로 마음을 채우고 그것을 양식과 같이 계속 취한다면 반드시 성장이 옵니다. 그러한 지식은 올바른 마음에 인식을 채워주고 결과적으로 기꺼이 순종하게 합니다.
9. (ㄱ) 우리가 지켜야 할 물리적 법칙에 대하여 설명하십시오. (ㄴ) 그러한 법칙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9 화학계에서 어떠한 법칙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균형잡히고도 불변한 방법으로 작용하며, 인류는 그 법칙을 인식합니다. 산소는 쇠에 녹이 슬게 하며 부러진 나무를 썩게 합니다. 산소는 또한 호흡하는데 중요합니다. 식물은 산소를 내뿜고 사람과 동물은 그것을 호흡합니다. 그들은 산소를 공기 중에서 얻고, 물고기들은 물이 공기 중에서 흡수한 산소나 물에서 자란 푸른 식물이 내뿜은 산소를 취합니다. 호흡을 통하여 인체에 들어온 산소는 피의 ‘헤모글로빈’에 의해서 전신으로 운반됩니다. 조직은 서서히 산화(酸化)시켜 열이 발생하게 하고 몸을 더웁게 해 줍니다. 이러한 과정은 여호와께서 제정하신 이래 그대로 계속되어 왔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알아내고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잘 알아서 이 법칙에 협조하기 위하여 먼저 조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법칙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이러한 법칙은 사람에게 알맞도록 변경되지 않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너무 게으르거나 완고하기 때문에 순응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물의 고정된 운영법칙에 순응하기 위하여 변화합니다. 이러한 운영 법칙에 순종하는 것은 사실상 주는 자나 받는 자에게 똑같이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불리한 것이 아니라 그 운영 목적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리한 것입니다.
10.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무엇이 선행하는 것이 이치적이며, 어디에서 필요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읍니까?
10 이제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그분은 자기를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해 주는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창조물들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곧 그 사실이 입증됩니다. 여러 가지 성품과 특출한 지성을 가진 분만이 지상의 지식의 선반에 전시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읍니다. 미리 기록된 역사인 성서 예언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줍니다. 창조물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는 너무나 많습니다.—이사야 45:18; 로마 1:20; 시 19:1-4; 이사야 40:26.
11. 각자는 성서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을 가지고 있읍니까?
11 성서는 여호와의 말씀임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정확한 통신임을 확인할 책임은 각자에게 있읍니다. 성서가 모순된다는 근거없는 헛소리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계속 일치 조화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고 있읍니다. 우리의 성서를 발견된 성서 사본들과 성서에 나오는 지역의 특징들, 고고학적 발견 및 고기물(古器物)들이 증명하는 것들과 비교해 보면 비교해 볼수록 그 모든 것은 성서 기록의 진실성을 더욱 증명해 줍니다. (「모든 성경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유익하다」[영문] 331면 참조)
12, 13. ‘에스라’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어떻게 지적합니까? 그 결과를 설명하십시오.
12 성서에는 여호와의 원하시는 것에 순종한 본들이 있읍니다. 「에스라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읍을 수리하기 위하여 포로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북귀한 일에 대한 기록 가운데서 여러 번 순종을 강조하였읍니다. 에스라 7장 10절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그는 인간의 지혜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에 충실히 순종하고 그의 보호를 바란 사람이었읍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긴 여행을 출발할 때에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에스라 8:22.
13 여호와께서는 과연 ‘에스라’와 ‘예루살렘’으로 보물을 운반하는 그의 적은 무리를 보호하셨읍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에스라 8:31)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에스라’는 금, 은과 성전 기물들을 제사장들에게 주고 왕의 법들을 그의 방백들에게 주었읍니다.
14, 15.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문제를 처리한 것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14 그러자 ‘에스라’는 이전에 돌아온 인도자들을 포함해서 이제 ‘예루살렘’에서 산지 69년이나 된 포로들이 여호와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결혼 관계를 맺지 말라고 명령하신 일곱 나라들 중 다섯 나라 사람들과 결혼을 하였던 것입니다. (신명 7:1-4; 에스라 9:1, 2) ‘에스라’는 죄를 깊이 뉘우치는 정신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에스라 9:6.
15 이 겸손한 사람은 이제 일이 잘 되어 감으로 여호와로부터 축복을 받을 것을 바랐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간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로 종노릇하는 중에서 조금 소성하게 하셨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에스라 9:8, 10) ‘에스라’는 신속히 행동하여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이 이행될 때까지 그의 생애에서 그 일을 첫째로 두고 그 문제를 깨끗이 하였읍니다.
16. (ㄱ) 순종에 관한 예수의 견해를 설명해보십시오. (ㄴ) 사도들은 이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어떻게 순응하였읍니까?
16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었읍니다. (마태 11:29) 그는 끊임없이 순종적이 되도록 격려하셨읍니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그렇게 하셨읍니다. 사실 성경은 히브리 5:8, 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니라].” 몇해 후에 ‘바울’은 사도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순종을 가르쳤는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은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린도 후 10:5, 6.
17.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짐과 같이 느껴야 합니까?
17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읍니까?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느껴집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많은 법칙과 규정으로 보아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하여 법칙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으며, 기록으로 분석하는 현대적 방법의 증가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은 명백하고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마음으로부터 순종하는 일을 떠났읍니다. (시 119:11, 12; 로마 6:17) 요한 1서 5:2-4은 그 길을 지적해 주며, 그러나 문제를 인정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18, 19. 우리 생애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어떤 나쁜 견해를 가질 수 있읍니까?
18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데 있어서 우리 생활에서 큰 일은 이 사랑에 근거한 전념이며, 믿음을 영원히 세우고 유지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낡은 제도의 때가 매우 짧다거나 다른 불완전한 피조물이 우리를 살피고 있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디도 3:3-6)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순종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함께 일하는데서 기쁨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즐기게 될 것입니다.
19 잠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이 갑자기 시계를 쳐다보고 때가 얼마남지 않았기 때문에 조급하게 섬긴다면 이 낡은 제도가 지나가고 천년이 앞에 놓여 있을 때에 무엇을 할 것입니까?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이 항상 집회에 나가라고 하고, 연구하라고 하고, 말씀을 전파하라고 계속 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면 그 사람이 권하는 것을 중지하거나 마음으로부터 행동해야 할 때가 온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왕국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열심히 시간을 바치고 계속 시간을 내는 것을 염려한다면 당신이 보고를 하지 않게 될 때에는 당신은 어떠할 것입니까? 많은 형제들은 보고가 아니라 믿음을 유지하는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이고 지하에서 일하면서도 여러 해의 박해를 견디어 냈읍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그들을 축복하셨읍니다. 당신의 숭배가 사랑에 근거한 전념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를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밀히 검사해 보도록 하십시오.
20. (ㄱ)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를 균형잡힌 방법으로 인도하는 본과 충고를 발견할 수 있읍니까? (ㄴ)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복잡합니까?
20 초기 그리스도인 시대, 사도 시대로 주의를 돌려봅시다. 이들 충실한 형제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훈련을 받았읍니다. 그 당시에도 시간은 귀중하였읍니다. 그들의 사업이 긴급하였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고 그들은 매우 긴급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서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지 않았읍니다. 그들의 숭배방법은 현대적인 교통, 통신 방법에 의한 매우 복잡한 것이 아니라 매우 단순한 방법이었읍니다. 오늘날의 광포한 제도로부터의 압력이 변경을 가져오게 할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우리는 같은 성서를 사용하며, 같은 하나님을 숭배하고, 같은 인도자 그리스도 예수를 따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빠르고 능률적인 기계가 일반화되었고 가지 각색의 명세서에 의하여 지원되고 수백만으로부터 순종이 강요된다고 하여 우리가 사업적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완전한 본이시며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신 길을 세워 놓으셨읍니다.—마태 11:30.
21. 그러면 우리가 주로 염려해야 할 일은 무엇이어야 하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배양할 수 있읍니까?
21 이제 우리의 염려가 사랑에 근거한 전념으로써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라면 우리는 영적 양식을 정규적으로 먹음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튼튼히 유지하고자 열망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우리는 모든 생각을 다해서 이들 새로운 사람들에게 성경적 증거를 알려 줄 것입니다. 발전하며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강해짐에 따라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 4:11, 12) 사람이 사랑에 근거한 전념의 동기를 가져야할 필요성을 ‘바울’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유의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로마 2:6-11) 기계가 인간에게 도움이 되려면 인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기계를 종으로 볼 것이며, 기계에 필요한 것과 그것에 관련된 규칙들을 이행하기 위하여 잠을 못자면서 돌보아야 할 것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의 동기
22, 23. 순종을 위한 올바른 동기는 무엇입니까?
22 이렇게 예를 들어 봅시다. 마차는 교통 수단입니다. 그러나 마차가 자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마차로 어디를 가려면 반드시 말이나 소 기타 마차를 끌거나 밀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이는 마차는 아무런 가치없는 나무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여호와께 대한 사랑에 근거한 전념에 의하여 움직여야 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으로써 즉시 인정됩니다. 우리가 순종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에는 사랑으로써 우리를 끌어 주거나 밀어주는 도움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 집회 때마다 혹은 그리스도인 전도 봉사 분야에 항상 어떤 그리스도인 전도인이 끌어주거나 밀어주어야 한다는 것은 이치적인 것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욕망에 의하여 움직여져야 합니다. 우리의 원하는 바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이 요구될 때 초조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도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천적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게 할 것입니다.
23 시편 112:1을 기억하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러한 사람은 무활동이나 무관심하게 되지 않고 어떤 환경 하에서나 영원히 여호와를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동기는 사람이 어떠한 압력이나 어떠한 권유를 제공하여도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을 통하고 그의 영의 도움으로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24, 25.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인간의 법칙으로부터 자유함으로써 어떠한 유익이 있읍니까?
24 이렇게 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읍니다. 그러한 길은 동료의 근시안적 호불호에 따라 성경적으로 훈련받은 그들의 참다운 성품을 찌그러뜨리는 일이 없이 줏대를 가진 사람이 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회중을 자연스러운 성품 그대로를 가진 사람들로 다채로움을 갖게 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들과 그들의 성품을 좋아하셨읍니다. 마태 19:13, 14의 기록을 보면 이러합니다.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니라].”
25 오늘날 지구 전역에 걸쳐 살고 있는 각양 각색의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서로 다릅니다. 그들은 습관과 풍속에 있어서 다양하며 그들은 여러 가지 다른 방법과 다른 속도로 일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진리를 배우고 그를 섬길 수 있게 하셨읍니다. 인간이 만든 법칙으로 당신의 형제의 다양한 성품을 막을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인간에게 추종하는 또 다른 증거는 세계를 휩쓰는 일시적 유행을 따르는 일입니다. 이러한 유행은 서로 다른 개성을 없애버립니다. 이 제도의 상업 요소들은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행동하게 하여 개성을 죽이게 할 수 있는 그들의 재능을 의지함으로써 재산을 모으고 있읍니다.
26, 27. (ㄱ)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숭배 방법에 있어서 일관성이 있읍니까? 그리고 순종은 하나님의 회중에서 다채로움과 다양성을 용인합니까? (ㄴ) 이 제목에 대하여 더 고려해야 할 어떠한 점들이 있읍니까?
26 하나님께 순종하면 이러한 위험성이 없읍니다. 이들 전도인들이 사업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비슷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표현, 전념의 깊이, 장성으로 향하여 발전하는 속도, 각자의 재능, 그의 다채로운 배경 및 그가 일하는 배후에 있는 목적은 매우 다양함과 즐거운 교제를 만들어 줍니다.
27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되어 있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읍니다. 그것은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각자는 개성에 있어서나 생활에 있어서 다른 점이 많습니다. 성서를 기록하는 데 사용된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충성과 순종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러한 사람들이 자기를 섬기는 것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그들을 초대하신다면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을 ‘로보트’로 만들려고 할 이유가 어디있읍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베드로 전 2:16) 이제 이러한 진리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배우는 전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생활에 어떻게 작용합니까? 그 진리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가르치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칩니까? 회중은 어떠한 입장에 있읍니까? 그것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관계에 무슨 관계가 있읍니까? 이 사물의 제도의 여러 가지 정부 아래에서 일하는데 차이가 있읍니까? 우리가 다음 기사인 “순종—바람직한 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질문들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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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사무엘’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이행하지 않은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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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봉사에 활동적이 되도록 끊임없이 권고를 받을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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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바람직한 길파수대—1970 |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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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바람직한 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 11:29, 30.
1. 순종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바다의 파도와 같을 수 있읍니까?
당신은 바닷가를 사정없이 때리는 강한 바다 파도를 본 일이 있읍니까? 당신은 거기에서 자비를 볼 수 있읍니까? 파도에게서 바위나 모래에 대한 온유함이나 따뜻함을 볼 수 있읍니까? 이러한 파도는 모래를 닳게 하고, 바위들의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하였읍니다. 파도는 단단한 바위를 뚫어서 동굴과 구멍을 마들었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다도 하나님의 여러 가지 법에 순종하여 왔읍니다. 그중의 하나가 욥기 38:8-11에 언급되어 있읍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이 넘쳐 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계한을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찌니라.” 그러나 우리가 순종적이 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할 때에 우리는 냉냉하고 딱딱하고, 강요적이고, 무정하고 마침내 지쳐버리게 하는 바다와 같아야 합니까?
2. 흠에 대하여 충고하는 데 대한 균형잡힌 견해를 설명하십시오.
2 어떤 경우 우리는 장성하지 않은 사람들이 누가 결점이나 잘못을 지적하면 그 사람을 불평주의자 혹은 흠잡는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흠잡는 행동을 인용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말할 필요가 있고, 당신의 형제들이 지적해 줄 만한 잘못이 있읍니다. 잠언 21:13은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올바른 장소에서 잘못을 알게 하면서도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윗’ 앞에서의 ‘나단’과 같지 않고 우리는 아마 퉁명스럽고 독단적이며 전혀 지혜롭지 않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작든지 크든지 잘못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이 적어도 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무엘 하 12:1-14) 남편들이나, 아버지들이나, 감독자들은 잘못이 사소한 것이든지 매우 큰 것이든지 격렬하게 될 필요가 없읍니다. 바다와 같이 됨으로써 때로는 연마하는 힘 때문에 가장 헌신적인 하나님의 종이라 할지라도 그날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전혀 관심이 없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태도를 가진 낙심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읍니다. 그는 아마 시편 34:15의 확약을 명심하면서 지낼지 모릅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20절 참조)
3. 각자의 배경은 어떻게 순종에 대한 그의 태도에 영향을 줍니까?
3 여러 가지 일들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의 순종적인 태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사람은 끊임 없이 마찰하는 불법적인 집안에서 자라났을지 모릅니다. (마태 24:12) 또 다른 사람은 아버지의 말이 엄격한 법이며, 그는 냉냉하고 깊고 강력한 바다와 같이 가까이 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을지 모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일거 일동을 “그렇게 하지 말아라!” “즉시 그만 두라!”고 하는 분위기 즉 순종해야 할 이유에 대하여는 전혀 설명해 주지 않고 그칠줄 모르는 탄막과 같은 불행한 환경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 복지를 염려하고 아버지는 사랑으로 도움을 베푼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와 문제를 이야기하기가 매우 쉬운 가정에서 자랄 만큼 행복하였을지 모릅니다.
4, 5. (ㄱ) 어떠한 일반적인 태도가 자녀들과 그리고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읍니까? (ㄴ) 이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읍니까?
4 현 세대에 있어서 부모들은 흔히 자녀들이 완전하기를 바라며 솔직히 말해서 시편 51:5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말과 같이 지금까지 지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나쁜 곳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때로는 젊은이들을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합니다. 특히 그들의 자녀가 한 일을 자랑함으로써 부모의 높은 기대를 걸 때에 그러합니다.
5 그러나 자녀들이 당신의 이해성 있는 도움과 약한 육체임을 인정함이 없이 매일 매일 당신의 기대를 만족케 할 수 있겠읍니까? 이해성의 부족은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장벽이 될 수 있읍니다. 그것은 자녀들로 그들의 문제를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를 속에 품은채 욕구불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쾌하고 안심케 하는 일입니까? 불과 수분간이 문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밝혀주고 순종의 길을 취하도록 이해시켜줄 수 있읍니다. 이러한 종류의 격려가 일찌기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고”한 ‘바울’과 ‘바나바’의 경우와 같이 믿음에 있도록 하는데 필요합니다.—사도 14:22.
6. 무엇이 순종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읍니까?
6 여호와를 섬기는데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교제는 순종을 더욱 어렵게 할 것입니다. 참 숭배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보통 제한을 받지 않는 생활을 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하나님의 어떠한 법이나 원칙이든지 순종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읍니다. (베드로 전 4:3, 4) 믿음을 튼튼히 유지하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데는 물론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연구해야 할 시간에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과 끊임없이 사귀면서 문제를 피할 수 있겠읍니까? ‘바울’은 매우 솔직하게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고 말하였읍니다. (고린도 전 15:33) 한편 만일 우리가 우리 믿음을 유지하는데 부지런하고 여호와를 섬기고자 하는 강한 욕망 즉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균형잡힌 전념으로써 증명된 욕망을 발전시켰다면 우리는 이 낡은 제도에 있는 사람들에 끼어 일할 수 있읍니다. 우리는 전도 봉사에서 그들에게 전도할 수 있고, 믿지 않는 친척들에게 진리를 배우도록 도와 줄 수 있읍니다. 이러한 교제를 하는 동안에 우리는 순종의 바람직한 길로부터 흔들리는 일을 피할 수 있읍니다.
7. (ㄱ)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피하도록 경고합니까? (ㄴ)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떻게 문제에 말려들어가게 되었읍니까?
7 우리를 위하여 성경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요한 15:19)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요한 1서 2:15-17) “너희가 저희와 함께 ··· 달음질하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 전 4:4, 5)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라.”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 (에베소 5:7-11)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에 관하여는 이러한 기록이 있읍니다.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며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시 106:35, 36) 이것이 어떻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순종하는 일로부터 떠나게 하였는가에 유의하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사사 3:5, 6, 8) 우리가 이 사물의 제도의 사람들에게 왕국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활 방식을 따르거나 그들을 사랑하거나 그들의 우상을 섬겨야 할 이유가 없읍니다.
8.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지나친 기대를 갖는 것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읍니까?
8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너무나 지나친 기대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순종의 즐거움을 빼앗아 갈 수 있읍니다. 이러한 예로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지나친 것을 기대하는 수가 있고, 자녀들은 부모들이 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남편들은 아내들이 남자의 강한 결단력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잊으며, 아내들은 남자란 사소한 일들을 그리 개념치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감독자들은 능률성과 조직성만을 생각하므로 매우 강요적이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나친 목표를 세우므로 만족한 봉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잃는 경우가 있읍니다.
9. 예수께서는 어떻게 ‘도마’에게 마태 11:28-30의 성품을 나타내 보이셨는지 설명하십시오.
9 요한복음 20장을 잠간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사도 ‘도마’는 매우 중요한 집회에 빠졌고 그 결과로 제자들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는 말을 얼른 믿지 않았읍니다. (요한 20:25) 일주일 후에 집회에서 그는 예수를 보고 그의 음성을 들으므로 “나의 주”라고 그를 인정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다른 제자들과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다고 그를 엄하게 질책하셨읍니까? 예수께서는 그에게 다시 설명해 주시기를 거절하셨읍니까? 그는 ‘도마’가 못 자국을 만져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한 것에 응하는 것을 거절하셨읍니까? 그는 ‘도마’에게 지난 주에 어디 갔었느냐고 물으셨읍니까? 예수께서는 올바른 교제의 중요성과 다른 제자들과 집회에 참석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하여 그에게 긴 연설을 하셨읍니까? 오히려 그는 기꺼이 그의 믿음을 세워주고 그를 도와 주시기를 원하셨읍니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는 바로 그 예수였읍니다. (마태 11:28-30) 그것은 ‘도마’에게 참으로 격려적인 일이었고, 그는 후에 충실한 봉사를 계속하였읍니다.—사도 1:13.
순종적인 아내들
10. 남편들은 아내들에 관하여 무엇을 인정해야 합니까?
10 남편이 확고하지만 사랑의 본을 보일 때 순종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아내란 하나도 없읍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약점이 있읍니다. 그들은 남자와 다릅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나 달라진 환경을 조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들은 감상적 느낌이 더 강합니다. 그들에게는 가족적 유대가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적 감정이 표면으로 나타납니다. 감정이입을 잘 나타냅니다. 일반적으로 민감하게 창조된 이 피조물은 남자들에게는 귀찮고 단조로운 일같이 보이는 것도 아무런 불평없이 한결같이 이행합니다.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먼저 단조로움에 대하여 불평할 것입니다. 당신의 아내에게는 당신이 느낄 수 있는 더 많은 성품들이 있겠지만 이러한 몇 가지만도 여자가 남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11. 남편은 어떻게 아내로 가정에서의 역할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읍니까?
11 그리스도인 아내의 가치를 평가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아내는 끝없는 방법으로 가족의 필요를 돌볼 것이며, 산같이 쌓인 문제들을 둘도 없이 용감하게 처리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반려자를 장성하도록 도와 주고 머리 모양을 하는 외모나 금장식을 하는 것보다도 조용하고 온유한 정신이 더욱 가치 있음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은 얼마나 축복이겠읍니까? (베드로 전 3:3, 4) 그리스도인 남편이 자기 아내가 잠언 31장에 묘사된 성품을 배양하도록 돕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잠언 31장에 언급되어 있는 아내는 가정에 매우 밀착해 있음에 유의하였을 것입니다. 아내들은 보통 가정주부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분야입니다. 그리스도인 남편은 자금과 시간에 매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아내를 즐겁게 하는 가정을 마련하고 바쁘고 활동적인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하는 큰 일을 돌보는 기구를 마련해 준다면 더욱 기꺼이 순종하게 할 수 있읍니다. 성서 「잠언」은 아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재능을 인정합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아내는 비천한 가정을 활기가 넘치고 그리스도인 가정의 명랑함을 갖게 할 수 있읍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고 싶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은 그들이 그러한 것들을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활동이나 가족과의 활동에 있어서 어떤 것을 아내에게 관리하도록 하는 것은 성서의 순종의 원칙을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12, 13. (ㄱ) 가정 생활이 왜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ㄴ) 남편은 어떻게 행복한 가정 생활을 위하여 공헌할 수 있읍니까?
12 그러므로 부부 사이의 온전하고 계속적인 이해는 만족과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고 이 중요한 순종의 범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즐거움을 갖게 합니다. 가정은 남자의 생활에 있어서 이와 같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읍니다. 남자는 매일 가정이 필요합니다. 가정은 그의 활동의 근거가 됩니다. 가정은 모이는 장소 즉 가장 중요한 가족의 모이는 장소입니다. 가정은 거처이며 보호의 장소입니다. 가정은 그의 조그만 세계입니다. 가정은 그가 사는 곳입니다. 이 필수적인 장소를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남자에게 그의 돕는 자로서 “그 집안 일을 보살피”는 가정 주부를 만들어 주셨읍니다. (잠언 31:27) 남편이 그에게 보수를 주지 않고 그가 한 모든 일에 대하여 일일이 감사하다고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룻’이 다음과 같은 말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 같이 풍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13 모든 남편이 다 중요한 기념일을 기억하거나 선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각자는 어떤 방법으로서나 감사함을 표시할 수 있고 열심히 일하는 아내에게 필요한 격려를 할 수 있읍니다. 순종하는 아내의 길은 반드시 행복할 것입니다. 한가지 이유는 그는 주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날마다 계속적으로 주고 있읍니다. 사도 행전 20:35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만일 남편들이 가족을 영적으로 강하게 유지한다면 그들은 이사야 65:14의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라]”고 한바와 같이 행복할 또 다른 이유가 있읍니다. 「잠언」에 의하면 전 가족은 행복한 아내의 가치를 즉각적으로 인정합니다.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잠언 31:28, 29) 이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바람직한 길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순종하는 길이며 남편이 사랑으로써 순종을 더욱 쉽게 해 준다면 얼마나 더욱 더 행복하겠읍니까!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라].”—에베소 5:28.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14, 15. (ㄱ) 남자는 여자와 비교할 때 어떻게 다릅니까? (ㄴ) 다른 가족 성원들 특히 아내는 남편이 바라는 길인 하나님을 순종하는 일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읍니까?
14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니라].” (요한 2서 6)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한 남편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걸어 가고자 합니다. 아내들은 그리스도인 남편의 생활 가운데서 행복을 발견하게 하는데 크나큰 역할을 합니다. 모든 남편들도 불완전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결점이 없는 남편을 발견할 수 없읍니다. (로마 3:12) 그들에게는 많은 결점이 있읍니다. 그들은 여자들과 달리 대부분 더 어려운 문제를 염려합니다. 그들은 환경을 조절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들은 그리 감정적도 아니오 감상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무관심한 것 같이 보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보면 다칠가 두려워서 올라가지 못하게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언젠가는 올라갈 것을 알고 그가 다쳐도 그것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을 것임을 인정합니다. 남자에게는 감정이입보다 타산이 먼저 옵니다. 남자는 보통 아내가 친척들과 가까이 할 것을 의존합니다.
15 당신은 매일 같이 당신의 남편이 하는 일에서 여러 가지 더 많은 성품들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면에서 아내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합니다. 남자들은 그들의 직장에서 보수를 받지만 가족의 머리로서의 가치를 결정하기란 어렵습니다. 즉 그는 최종적 결정을 내려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정면으로 맞서야 하며, 가족이 직면한 문제들과 난관들을 해결해야 하며, 가족 성원들이 다 각각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의 다른 성원들도 가족의 머리가 여호와께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그로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많은 공헌을 할 수 있읍니다. 그가 매일같이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가정에는 온유함과 조용함과 사랑이 감돌고 아내는 자기의 여러 가지 약점을 눈감아 주고 그것을 일일이 들추어 내지 않고, 조금도 발전하지 않고 항상 같은 일을 반복한다고 끊임 없이 일러 주지 않을 때 얼마나 만족을 느낄 것입니까! 아내가 가정 주부로서의 책임을 완수할 때 즉 집안을 깨끗이 정돈하고 건실한 음식을 마련하고 자기의 손으로 일을 하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집안 일을 보살핀’다면 크게 행복하게 하는 데 공헌합니다. (잠언 31:27) 아내는 떨어진 단추 하나를 달아 주는 것같은 조그만 일을 하는 것이라도 남편에게는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16, 17. (ㄱ) 아내는 남편에게 어떠한 고려를 나타낼 수 있읍니까? (ㄴ) 지름길로 가는 일이 있을 때에는 사랑을 나타내지 않을 때입니까? 영적 양식을 취하는 문제는 어떠합니까?
16 남편에게 나타내야 할 매우 격려적인 태도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남편의 생각의 좋은 점을 첫째로 보도록 하십시오. 남편에게 불필요한 경제적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주의함으로써 남편으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직장에서 더 오랜 시간 일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비싸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 부러워하지 않는 것, 만족한 남편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남편을 성공의 경제적 사다리 위에 올려 놓으려는 욕망을 없애게 할 것입니다. ‘꼭대기에도 자리는 있다’고 하지만 거기에 행복이 있읍니까? 남자, 심지어 그리스도인 남자도 경쟁속에 포위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높은 위신을 위하여, 더 높은 봉급을 위하여, 더 편한 직업을 위하여 경쟁합니다. 이러한 대부분의 장소에서 남편은 그의 믿음을 보호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17 단지 직장에서 하루 종일 깨어 있는데만도 매우 피곤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이 이러한 긴장으로부터 푹 쉴 수 있는 분위기와 태도를 나타냄으로 가정에서 즐거움을 더하게 할 수 있읍니다. 그가 아무리 많은 문제를 부닥치거나 적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성경은 사랑의 사용을 권고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 전 16:13, 14) 회중 활동에 있어서도 형제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을 사용한다면 행복을 유지할 수 있읍니다. 대회가 가까와 올 때 준비할 시간은 짧아지고 장성하지 못한 사람이 지름길로 간다고 해서 사랑을 비켜놓을 때가 아닙니다. 믿음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울 만큼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다면 우리의 생활을 검토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첫째로 와야 하며, 거기서 행복을 발견하기 위하여 남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계속 취해야 합니다. 영적 양식을 취하는 일을 임시로 밀어두고 급한 일을 먼저 하고 후에 다시 연구하겠다고 할 수 없읍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셨읍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 4:4.
순종적인 자녀들
18. 어린이들에게 있는 다른 점들이 왜 즐거운 일들입니까?
18 가족을 양육하는데는 많은 축복이 있읍니다. 그리고 이 가족 생활에는 순종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오게 됩니다. 자녀들은 처음 호흡을 시작할 때부터 인자한 지도를 필요로 합니다. 자녀들은 어른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일들을 어른에게 의뢰합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쉽게 성격을 형성합니다. 그들은 어른들보다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은 호기심이 많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온 세상이 그들 앞에 펼쳐 있으며, 모두 조사해 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보통 그들 가까이에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어린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쉽게 함께 뭉칩니다. 어른들에게 설복당하지 않는 한 그들은 다른 인종과 사회적 신분 혹은 가족에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다른 배경을 잘 조절합니다. 같은 가족의 어린이들이라도 기질이 다르며 둘이 비슷한 경우를 거의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는 그들을 각각 다르게 다루어야 하며 각각 다르게 징계 하여야 합니다. 자녀들은 확고하고도 인자한 부모를 원합니다. 그들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생활을 즐깁니다. 그들은 곧잘 ‘왜?’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들은 공평한 대우에 잘 반응합니다. 그들은 사랑에 이끌립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당신은 자녀들에게서 어른과 다른 여러 가지 점을 발견할 수 있읍니다.
19, 20. (ㄱ)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양육하는 방법을 예로 들어 보십시오. (ㄴ) 현대의 사실은 가정 교육의 필요성을 어떻게 증명해 줍니까?
19 자녀를 양육하는 분야의 제목보다 ‘힌트’로부터 어렵고 딱딱한 규칙으로 배회하는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제목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있읍니다. 아마 유명한 순환을 이렇게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는 소년들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주일에 7일간씩 농장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가정에서 자라났읍니다. 그 때에는 놀 시간이나 그들 주위에 있는 물정을 조사해 볼 만한 여유가 없었읍니다. 일과 책임은 매일 같이 계속되었읍니다. 농장에서 할 일을 다하기 위하여 학교 교육을 받는 일은 흔히 연장되었읍니다. 그는 자기가 성장하여 가족을 갖게 되면 자기 자녀들은 밭 가는 일이나 납세의 책임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생을 온전히 즐길 기회를 줄 것을 맹세하였읍니다. 세월은 흘렀고 그는 가족을 이루었읍니다. 아버지로서 그는 자녀들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하여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하였읍니다. 자녀들은 학교에 갔다가 점심 때면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점심을 먹기 위하여 집에 돌아왔읍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숙제나 하고 ‘텔레비’를 보거나 공을 차거나 기타 놀이를 하였읍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할 일도 책임도 없읍니다. 그러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고 지루함을 느끼게 되었읍니다. 아무 할 일 없는 손과 두뇌는 문제를 일으키게 하였읍니다. 지나친 놀음은 그들의 지각의 예민성을 상실하게 하였읍니다. 이 가족의 젊은이들도 맹세를 하였읍니다. 자기도 자라서 가족을 갖게 되면 자기의 자녀들은 일을 하게 하고 잘 교육시켜서 책임을 지게 해야겠다고 하였읍니다. 이렇게 하여 순환은 거듭하였읍니다. 가족은 부모들의 과거의 쓰라린 경험에 의해서 양육되었읍니다.
20 조그만 내로 시작해서 마침내 큰 만을 이룬 또 다른 잘못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선생들이나, 학교, 탁아소, 하기 강습회, 어린이 교육 기관 및 친척들에게 자녀들의 사고 능력과 개성을 발전시키는 일을 전적으로 의뢰하였읍니다. 공립 학교를 다니는 동안 자녀들이 너무나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떠나 있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가정 교사를 두었읍니다. 어떤 종교 기관에서는 그들 자신의 학교를 운영하므로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과의 교제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생각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의 성장을 살펴볼 때 행복을 가져 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읍니다. 오히려 가족에게 많은 문제들과 비극을 가져 왔읍니다.
21. (ㄱ)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 선하게 되었읍니까? (ㄴ) 여호와의 충실한 아들이 한 일과 태도를 논의하십시오.
21 모든 자녀들이 다 같은 사람이 되거나 다 선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의 천적 가족에서도 성서에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현저하게 다른 두 아들들이 있었읍니다. 즉 한 아들은 악하게 되어 ‘사단’ 마귀가 되었읍니다. (욥 1:6; 고린도 후 11:3, 14; 요한 8:44; 요한 1서 3:8; 계시 12:9) 다른 아들인 예수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로서 충실을 지켰으며, 그의 길은 인류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축복을 가져왔읍니다. 그의 천적 아버지에 대한 그의 길이 골로새 1:15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읍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 빌립보 2:5-8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형체이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형주]에 죽으심이라.” (난외주) 요한 5:19은 이러합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에베소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요한 1서 4:9, 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계시록 7:9, 10, 14-17: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두 아들들은 모두 무궁히 그들의 아버지와 그의 집에 영예를 가져옴으로써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길 기회를 가졌었읍니다.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의 훈련과 순종의 결과를 유의하십시오. 골로새 1:16, 17과 요한 1:1-3, 10에 의하면 여호와께서는 창조 사업을 하시는데 그를 사용하셨읍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의 신]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느니라].” (신세 참조) 그는 인기가 없을 때에도 굳건히 진리를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23:13, 16, 23; 15:1-9) 그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고 또 기적을 행하셨지마 결코 거만해지시지 않았읍니다. (누가 5:17-25; 요한 5:19; 마태 11:28, 29; 21:5) 그는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들에게 이야기하셨읍니다. (마태 19:14; 9:35-38) 그 당시 사람들에게 참다운 유익이 되었던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축복이 됩니다.
22. (ㄱ) 우리는 이 본을 가정 생활에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읍니까? (ㄴ) 아버지들은 어떠한 질문을 유익하게 고려할 수 있읍니까?
22 이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순종적인 아들의 매우 강력한 본이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 왔읍니다. 이 본은 현재 아버지들을 격려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가족을 양육하는 유일한 안전한 방법 즉 여호와의 말씀을 가족 운영의 기초로 삼는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저장된 선을 인식하도록 도와 줄 수 있읍니다. 잠언 1:33은 이 점을 이렇게 명백히 알려 줍니다.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아들이 선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가치있는 일입니까? 부모로서 얼마만한 시간을 기꺼이 투자하겠읍니까? 교육과 징계를 위하여 얼마만한 시간을 낼 수 있읍니까? 당신은 어린이들에게 가치있는 목표를 갖도록 도와 줄 수 있읍니까? 당신은 순종의 길을 행복한 것이 되게 할 줄 압니까? 당신의 자녀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바람직한 길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들은 그 길을 영원히 가기를 원합니까?
자녀를 양육하는 가치
23-25. (ㄱ) 부모는 어떻게 자녀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양육할 수 있읍니까? (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반항적인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였으며, 그러나 그런 일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읍니까? (ㄷ) 마태 11:29, 30은 우리에게 어떠한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까?
23 가족을 양육하고 물질적 양식과 영적 양식을 마련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시간은 마치 돈을 은행에 예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일찍부터 할당액을 얻게 되는 투자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가르치는 일은 돈을 은행에 예금하는 것처럼 기계적인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은 각각 다르며 여러 가지 징계 방법에 따라 반응합니다. 한때 사람들은 부모가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지나치게 엄하였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읍니다. 그리하여 제한이 가벼워지게 되었읍니다. 젊은이들에게 더 큰 자유가 허락되었고 교육자들은 그들의 개성대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읍니다. 그 결과에 관하여 이야기하거나 사실이나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읍니까? 이 세상 어디를 보든지 지금 거두어들이고 있는 결과는 잠언 29:15이 참됨을 증명합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자기의 불순종한 자녀를 도시의 연로자에게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당시에 한 바와 같이 돌로 쳐죽임을 당하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읍니까? 신명기 21:18-21에 의하면 이러합니다.
24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25 부모들이 이렇게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는 징계로써 그러한 일을 피할 수 있었읍니다. 어머니가 자기 자녀에게 이렇게 위협하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네가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너를 이 성의 연로자에게 넘겨 주겠다.’ 우리는 현명한 잠언 필자가 잠언 19:18에서 부모가 어떻게 이러한 비극을 피할 수 있는지를 훈계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이 훈계는 오늘날 우리가 자녀를 교육하는데 있어서도 같습니다.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라].”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지혜를 보이셨으며 이것은 분명히 가족성원들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지혜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대인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 11:29, 30) 예수께서는 온 인류의 순종을 받고자 하셨읍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만일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에게 순종하도록 인도하였다면 이 방법은 가족을 사랑하는 머리에게로 가족 성원을 더욱 친밀하게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26, 27. (ㄱ) 상당히 나이를 먹게 된 젊은이들을 지금까지 키우는데 얼마만한 노력이 들어 갔읍니까? (ㄴ)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에 대하여 무엇을 나타내야 합니까?
26 판단력을 가지기 시작한 젊은이들과 아직도 아버지의 지도 아래 있는 어린이들 여러분, 이제 모든 사실을 검토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얼마만한 가치가 있읍니까?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의 가치를 결정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지금까지 기르기 위하여 사용한 시간과 돈을 일일이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막대한 투자였읍니다. 이 점을 생각할 때에 여러분은 부모에게나 가족의 다른 성원들에게 어떠한 유익을 가져 오고 있읍니까? 현명한 투자는 할당액을 얻게 합니다. 여러분은 현명한 투자입니까?
27 백여년이나 된 한 성서 가운데서 하나의 조그만 신문 발췌문이 발견되었읍니다. 이 발췌문에는 필자나 이 지식의 근원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다음과 같이 매우 뜻있는 욧점이 기록되어 있었읍니다. “소년이 열살이 되면 자기 아버지가 굉장히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열 다섯 살이 되면 자기도 아버지만큼 안다고 생각하고, 스무살이 되면 아버지보다 배나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서른살이 되면 그는 기꺼이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려고 하고 마흔 살이 되면 그는 역시 아버지가 잘 알았다고 생각하고, 쉬흔 살이 되면 그는 아버지의 교훈을 구하기 시작하고 예순살이 되면 즉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그는 자기의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현명한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살게 하는데 그렇게 공이 큰 분을 인식하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여러분의 부모는 여러분이 태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키우고 입히고 가르치게 할 수 있었읍니다. 어떤 자녀들은 그들을 돌보아 주는 기관에 있읍니다. 그러나 그 기관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받게 하지는 못합니다.
28. 젊은이들이 어떻게 그의 부모의 지도와 돌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증가시킬 수 있읍니까?
28 여러분 젊은이들이 때로는 여러분의 가정 생활에 불만을 느낄 때가 있고 집 안에서 있는 일에 많은 결함이 있음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더 나은 생각이 있읍니까? 문제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생각만 합니까? 만일 여러분이 집안 일을 지도한다 해도 같은 결함이 그대로 있기가 매우 쉽습니다. 왜냐 하면 여러분은 바로 여러분의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더 나은 교육 방법이 여러분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였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잠간! 이 세상의 현명한 사람들도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읍니다. 고등교육과 복잡한 ‘컴퓨터’가 인간 가족을 평화와 만족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어 오지 못하였읍니다. 만일 여러분이 부모의 가치에 의심을 품는다면 친구에게 한 아기를 갓나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기르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교육시키고, 징계하고, 즐겁게 해 주고, 도와 주는 책임을 지는데 얼마나 받겠는가를 물어 보십시오. 그러한 일을 돈으로 따진다면 막대할 것이며, 또한 명심할 것은 거기에는 여러분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이라는 성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29. 잠언 23:22은 모든 자녀들에게 어떠한 올바른 태도를 가질 것을 권고합니까?
29 여러분 젊은이들은 성서가 왜 잠언 23:22에서 이렇게 말하였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찌니라.”
30. 생은 단순히 노름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0 어떤 사람들은 생이란 경기이며, 생을 단조롭지 않게 하기 위하여는 생을 재미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생이란 심각한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즐길 수 있는 세월이란 매우 짧습니다. 한 장성한 사람은 한 때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심각한 것들, 신세] ···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 4:8) “여자들도 이와 같이 심각하[라].” (디모데 전 3:11, 신세) “늙은 남자로는 ··· 근신[심각, 신세]하며.” (디도 2: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장성한 아버지가 여러분 자녀들을 “근엄하게” 교육할 것을 기대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디모데 전 3:4, 신세) 생은 결코 전부 노름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정신과 몸에는 여러 가지 훌륭한 기질이 숨어 있으며 그들에게 발전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 결과로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많은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닙니다. 징계와 교육, 일, 사랑은 이러한 성품으로 활동하게 하고 여러분의 선과 즐거움을 위하여 이바지합니다.
31, 32. 우리는 왜 여러 가지 기술을 습득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31 일을 수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당신은 교육과 감독을 받은 다음에 가족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가구를 만드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읍니다. 어머니의 교육을 받아서 당신은 아마 방에다 ‘커튼’을 만들어 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읍니다. 당신은 아마 요리 솜씨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며, 경제적인 장보기, ‘페인트’ 칠하기, 음악, 기계공, 건축 기술, 정원사나 조원사의 기술, 양재사의 기술 등을 익힐 수 있을 것이며, 이 외에도 즐거울 뿐 아니라 유용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는 것은 매우 즐거울 뿐 아니라 또한 가족에게 매우 유용합니다. 사실상 이러한 일을 함으로써 당신은 부모에게 그들이 당신에게 투자한 할당액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32 물론 당신은 이것이 부모들을 얼마나 기쁘게 해주는지를 인식할 수 있읍니다. 여덟살, 아홉살, 열살 된 세 딸들이 가족과 손님들 전부를 위해서 음식을 마련하는 일을 하였을 때에 그것은 그들을 얼마나 만족하게 하여 주었겠읍니까! 부모들은 그들의 손으로 한 일을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읍니다. 한 십대는 참으로 훌륭하게 집안을 ‘페인트’칠하였읍니다. 두 어린 소년은 뒤의 정원에다 집안 식구가 온 여름 먹을 수 있는 채소를 길렀읍니다. 그들은 씨를 뿌린 때부터 먹을 수 있게 자랄 때까지 보살폈읍니다. 만일 당신이 일을 올바로 좋은 결과를 얻도록 잘하려고 노력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직장을 가질 수 있읍니다. 최근에 와서는 어디에서나 ‘무사안일주의’가 만연하고 있으며, 당신이나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관심사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잠언 13:20에서 알려준 원칙이 우리 생활에 있어서 모든 면에 적용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순종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33. 징계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33 고려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읍니다. 당신은 순종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은 부모에게 징계를 받을 때 노여워합니까?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습니다. (히브리 12:11) 우리에게는 누군가 인도해 주고 교훈해 주고 본을 세워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그대로 버려두었다면 당신은 아직도 우유병을 빨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부모가 동생이나 누나를 다르게 장계하는 것을 알고서 속이 상합니까? 그러나 당신은 아마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이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다르게 다루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당신의 부모는 각자의 재능에 따라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때야말로 당신에게 바람직한 길인 순종을 나타낼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다른 가족 성원들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4. 어떻게 솔선력과 믿음직함을 보일 수 있읍니까?
34 예로서 당신이 집안에서 자잘구레한 일들을 하도록 임명되었다고 합시다. 매번 누가 그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 일을 잘 하면 그 일은 훨씬 더 즐거운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일을 더 익숙하게 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솔선력이라는 성품을 발전시키게 될 것입니다. 매일같이 당신은 가족 성원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그 일을 잘합니다. 그것을 책임감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자라고 있다는 강한 증거입니다. 당신이 만일 무엇을 깨뜨리거나 잘못하였다면 그 사실을 자인하고 우선 직접 부모에게 가서 그 일을 보고하십시오. 이것은 정직하고 믿음직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이 배양하고 있는 다른 많은 성품들이 있으며 그러한 성품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읍니다. 당신은 성서 갈라디아 5장 22절과 23절에 기록되어 있는 이러한 성품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반면에, 영의 열매는 사랑, 즐거움,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착함, 믿음, 온유, 자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반대하는 법은 없읍니다.”
35. 젊은이의 호기심을 어떠한 방법으로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읍니까?
35 발전을 위한 충고를 잘 듣는 것은 생을 더욱 쉽게 해 줍니다. 부모로 하여금 항상 당신의 정신에 징계를 반복해서 하게 하고 엄한 형벌을 때때로 하게 하는 대신 미리부터 잘 생각해서 그런 일이 없이 잘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어린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부모가 나에게 하라고 강요하는 일을 내가 하지 않는다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나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한 가지 예를 살펴 보도록 합시다. 어느 분야에 있어서든지 반드시 두 가지 계층 즉 참여자와 참관자들이 있읍니다. 참관하는 것보다 참여하는데 더 즐거움이 있고, 더 많은 지식을 얻고, 더 활동하게 됩니다. 가정에 있어서 당신은 참관자입니까? 혹은 참여자입니까? 우리가 생을 통하여 참관자 노릇만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매우 쉬운 일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과연 생을 즐기는지 의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성서는 사는 것과 활동 즉 움직이는 것을 동일시하였읍니다. 사도행전 17:24, 25, 28의 묘사를 보면 이러합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 친히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또 하나님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새번역.
36, 37. 우리는 어떻게 창조물을 연구하고 그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읍니까?
36 연구한다는 것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매우 힘든 일같이 들립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상과 수행감, 지식 및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연구란 조사하는 분야를 의미합니다. 조사해 봄으로써 만족을 얻게 됩니다. 이 점에 관하여 잠언 18:15은 이렇게 말합니다.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37 사람이 공학과 과학의 지식을 발전시켰고, 전화나 ‘텔레비’, ‘라디오’, ‘컴퓨터’, 망원경 기타 지식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여러 가지 발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창조물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연구하고 있읍니다. 현대 공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연구하였고 박식한 사람들이 되었읍니다. 당신도 배울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다만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조사해 봄으로써 인식을 더욱 깊게 할 수 있읍니다. 동물이나, 곤충, 새 혹은 물고기를 택해서 그것의 작용, 그것의 특성, 그것의 생명과 다른 것과의 관계 등을 조사해 보십시오. 당신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류는 일반적으로 땅을 덮고 있는 광대한 지혜를 관찰만 하고, 참여해서 조사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 1:2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당신이 아무리 오래 조사해도 재료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전도 3:11은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38.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 어떠한 유익이 옵니까?
38 당신이 성서를 연구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관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서가 좋은 책이고, ‘베스트 셀러’이고, 좋은 본이 있는 책이고, 문학적인 책이고, 하나님에 관하여 알려 주는 책임을 인정합니다. 참여자는 그것을 파들어가서 풍부한 지혜를 발견해 냅니다. 잠언 2:4-6의 말씀과 같습니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라].” 이해하기를 원하는 호기심으로 가득찬 젊은이로서 당신 앞에는 하나의 도전이 있지 않습니까? 만일 당신이 생이 단조롭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당신은 매일같이 끝없이 다양한 분야를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39. 가정에는 바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어떠한 분위기가 있어야 합니까?
39 그러므로 순종은 바람직한, 가야할 만한 길입니다. 그것은 항상 행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읍니다. 부모들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따르고 현명하게 되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 11:29, 30) 징계하는 일을 늦추지 마십시오. 사랑으로써 징계하십시오. 현 세계에는 공학적 경이와 우리가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할 많은 기구들이 있읍니다. 집을 현대 기계로 가득 채우고 부모들이 너무나 피곤하고 지쳐서 집안에 사랑이 감돌게 할 시간이 없게 할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바위를 향하여 밀려 오는 파도를 보고 파도가 점점 커져서 급속도로 바닷가를 치는 것을 볼 때 당신은 그렇게 급한 바다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 같이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엔가는 같은 바다가 고요하고 매우 조용하게 바닷가로 밀려옵니다. 당신에게는 온화함을 느끼게 합니다. 당신은 머물러 있고 싶을 것입니다. 그 고요한 물결은 계속적으로 만족한 분위기를 당신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사랑에 근거해서 바람직한 길이 되어 있는 당신의 가정도 그러할 것입니다.
[471면 삽화]
‘도마’가 집회에 빠졌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를 꾸짖으시므로 그의 순종의 즐거움을 빼앗지 않으셨다. 그는 ‘도마’가 필요한 믿음을 얻도록 도와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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