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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에게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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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에게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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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71 2/1 69-72면

당신에게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당신은 기도합니까? 만일 한다면, 당신은 기도를 중요시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그것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기도가 어느 정도로 중요합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이 기도를 인도하는 집단 기도에만 참여합니까? 혹은 혼자 조용한 곳에 가서 당신의 창조주에게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일도 있읍니까? 혹은 당신은 너무 바빠서 개인적 기도를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읍니까? 당신은 기도가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되게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외운 단어들을 단지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기도만 하기 때문에 기도의 중요성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기도에 어떻게 진심이 들어 있을 수 있겠읍니까? 그러한 기도가 어떻게 그들에게 진실한 뜻이 있겠읍니까? 많은 경우에 있어서, 기도는 잠자리에 눕기 전에 갖는 틀에 박힌 저녁 일과가 되었고, 그것은 마치도 이를 닦는 일이나 창문을 여는 일과 같이 아주 작은 일이 되었읍니다.

만일 기도하는 사람이 매번 동일한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직접 말할 수 있다면 그 저녁 기도야말로 더 뜻깊은 것이 되지 않겠읍니까? 만일 기도하는 사람이, 하는 말에 집중한다면 기도를 더욱 중요시하게 되지 않겠읍니까? 기도란 우리가 창조주께 이야기하는 것일진대, 기도를 기계적인 행동으로 비하시킬 수 있겠읍니까? 우리가 친구나 육적 아버지에게 감동이 없는 상태나 기계적인 방법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왜 그러한 태도로 말할 것입니까?

기도란 조용히 듣기만 하시는 분과의 일방적 대화이기 때문에 아마 당신은 기도에 집중하기가 좀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기도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못합니다.

숭배의 한 가지 방법

기도는 실제로 우리의 창조주를 숭배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기도로써 당신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그에게 영예를 돌릴 수 있읍니다. 당신은 최고 주권자로서의 그분의 지위를 인정할 수 있으며 당신이 그의 뜻에 복종함을 알릴 수 있읍니다. 당신은 영육간의 필수품의 공급에 대하여 그분에게 감사함으로 그분을 그러한 것들의 공급자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읍니다. 기도로써 당신은 그분의 위대하신 창조사업에 관하여 그를 찬양할 수 있읍니다. 기도는 당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할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에 기도가 당신의 생활에서 중대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다윗’ 왕은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나타냈읍니다. ‘다윗’은 그의 창조주를 숭배하는데 기도를 사용하는 훌륭한 본을 우리에게 보였읍니다. 기도 중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최고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였읍니다. 그리고 그는 감사와 찬양을 표현하였읍니다. 한때 그가 기도한 것이 역대 상 29:10-13에 이렇게 기록되었읍니다.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만일 당신이 ‘다윗’이 한 바와 같이 숭배심에 가득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데 기도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기도가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매일 같이 마음에 가득한 헌신의 표현을 할 의무 아래 있읍니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

우리가 기도로써 하나님께 이야기 할 때, 할 수 있는 말은 너무나 많습니다. 창조물에 나타난 그의 지혜의 경이, 당신이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즐거움, 슬픔 및 문제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관심과 땅에 대한 그의 왕국의 권익을 돌보는 일들, 이 모든 것이 기도의 제목이 될 수 있읍니다.

한때 ‘여호사밧’ 왕이 매우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그는 기도로써 여호와 하나님께 그 문제를 제시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위하여 해 오신 일들을 되새겨 본 다음에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읍니다.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 하시므로 이에 치우쳐 저희를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이제 저희가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저희가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역대 하 20:10-12.

‘여호사밧’이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도록 의무를 지우지 않은 것에 주의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든 않든 그 문제는 하나님께 맡겼읍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하는 바를 행하지 않기로 결정하신다해도 우리는 불평할 수 없읍니다. 그분은 우리의 종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종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에 기꺼이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렇게 하셨읍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의 기념식을 제정하시던 날 밤, 그는 사도들과 함께 감람산에 올라가셨읍니다. 그곳에서 그는 혼자 기도하시려고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셨읍니다. 기도하실 때에 그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횡포한 죽음으로부터 자기를 구원해 주실 의무를 하나님께 부과하려고 하지 않으셨음에 유의하십시오. 그는 이렇게 기도하셨읍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 22:42)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잔”을 옮기지 않기로 결정하셨다고 해서 예수께서는 믿음을 상실하거나 하나님을 버리지 않으셨읍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그 뜻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셨읍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태도와 표현이 되어야 하지 않겠읍니까?

기도로 감사를 표현하는 일을 언제나 할 수 있읍니다. 사실상 우리는 식사 때마다 그 음식과 그 식사를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교제에 대하여 간단한 감사의 기도를 마땅히 해야 합니다. 누가 음식을 샀거나 만들었든지간에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그 음식의 실제적 공급자이십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음식의 근원들 즉 식물, 과일, 물고기 및 동물들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한 경우에 기도하셨읍니다. 심지어 음식이라고는 단 몇 조각의 ‘빵’과 약간의 물고기 밖에 없었을 때에도 그렇게 하셨읍니다. (마태 14:17-19) 또한 매일 또 다른 하루를 살았음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써 하루을 끝마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염려를 우리의 기도에서 말할 수 있읍니다. 즉 병이나 하나님께 성실을 지키기 위하여 박해를 받는 어려운 환경하에 있는 자들에게 힘 주실 것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간구할 수 있읍니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공정하게 다루도록 통치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합당합니다.—디모데 전 2:1, 2.

여호와의 목적에 관한 것들, 즉 그의 이름의 입증, 악의 멸망 그의 왕국에 의한 땅에 대한 반대 없는 통치 및 그의 왕국의 기쁜 소식의 공개적 선포 등이 모두 기도에 합당한 제목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기도하는 장소

어디에서나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읍니다. 심지어 바쁜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이나 정부 관리 앞에서 있을 때에도 할 수 있읍니다. 술로 왕을 섬기는 일을 하는 ‘느헤미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 앞에 섰을 때에 기도하였읍니다. (느헤미야 2:1-4) 웅대한 경치를 구경할 때, 아마 당신은 여호와의 창조능력의 경이에 대하여 무언의 경건한 기도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처소나 자세가 기도할 수 있는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종교 건물에 갈 필요는 없읍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개인 가정이나 시골의 들판에서 기도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의 보조물로서 형상들을 사용하지 않았읍니다. 왜냐 하면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께 가증하며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게 한 것들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레위 26:30; 열왕 하 17:16-18; 고린도 후 4:18; 5:7; 요한 1서 5:21.

개인적 기도를 위하여 혼자 있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대중 앞에서 기도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이끌기를 좋아한 위선자들과 대조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태 6:6) 혼자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는 것은 더 잘 집중하게 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더 친밀감을 갖게 합니다.

한때, 예수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한적한 장소를 찾아내어 혼자 조용히 개인적 기도를 하실 수 있게 하셨읍니다. (마가 1:35) 사도 ‘베드로’가 ‘다비다’의 부활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 그는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읍니다. (사도 9:40) 성서에는 개인 기도를 할 때 조용히 혼자 있고자 한 사람들의 예들이 많이 있읍니다.—사도 10:9.

기도에 대한 응답

무심한 사람은 오늘날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서 시대의 경우와 같이 극적으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도움을 구하는 ‘여호사밧’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여호와께서 적들의 마음을 조정하여 서로 대항하여 서로 죽이게 하신 행동이었읍니다. (역대 하 20:23) ‘엘리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불이 내려와 희생물을 태운 것이었읍니다. (열왕 상 18:36-38) 예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죽은지 나흘이나 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요한 11:38-44) 이들은 기도의 응답에 관하여 성서에 기록된 몇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오늘날에도 기도에 대한 응답은 비록 언제나 웅대하게 성취되는 것같이 보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그와 동일하게 실제적입니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기도한 고통스러운 환경이 호전되기 시작하는 것일 수 있읍니다. 혹은 해결할 수 없는 장애와 같이 보이던 것들이 차츰 극복되기 시작하는 것일 수 있읍니다. 혹은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도움이 베풀어지는 일일 수 있읍니다. 이러한 결과는 분명히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성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들이 그들의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 일은 많이 있읍니다. 한 예로서 미국 ‘일리노이’ 주에 사는 한 여인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며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돕는 자를 보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읍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그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그 여인은 “아니, 여호와의 증인이 오다니, 하나님께서 그를 나에게 보내셨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였읍니다. 후에 그 여인은 증인에게 이렇게 고백하였읍니다. “나는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고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들을 생각하였지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들어오라고 하였으며, 이제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진리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읍니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 미국 ‘버어지니아’ 주에 사는 한 부인의 경험이 있읍니다. “나는 자녀들을 도와 줄 수 있도록 성서 진리를 배우고 싶었읍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올바른 종교를 찾도록 도와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였읍니다. 올바른 종교라면 침례교이든, 감리교이든 ‘가톨릭’이든 어느 종교이든 상관치 않았읍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아침에 여러분 여호와의 증인들이 찾아왔읍니다. 나는 내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믿습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에 사는 한 사람은 자기가 교회에서 배우는 것들이 마땅치 않아서 어느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자 하나님의 도움을 진정으로 기도하였읍니다. 그날 밤에 그가 집에 돌아오자 그는 자기 아내가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읍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하여 나쁘게 말하는 것을 많이 들은 터이므로 그의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추리하였읍니다.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고 이제 그 구한 바를 얻었다. 그런데 이제 그 구해서 얻은 것을 거절할 것인가?” 그도 얼마 안가서 여호와의 웅대하신 목적을 다른 사람들이 배우도록 도우러 나가게 되었읍니다.

기도가 응답된 이러한 경험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읍니다. 당신은 어떠하십니까? 당신도 기도의 특권으로부터 온전히 유익을 얻고 있읍니까?

참으로 아무도 기도를 경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도리어 사도 ‘바울’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다음과 같은 충고를 마음에 간직하도록 하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 4:6, 7.

[70면 삽화]

예수께서는 식사 전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셨다. 당신도 그렇게 하는가?

당신은 하나님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는가?

[71면 삽화]

하나님의 솜씨가 당신으로 기도로써 그를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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