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유인 평화를 유지함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리라].”—이사야 32:18
1. 『평화의 하나님』께서 때때로 『용사』가 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일은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 . .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흔히 『평강의 하나님』 혹은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리울 뿐 아니라, 『용사』 혹은 『만군(萬軍)의 여호와』로 불리 웁니다. 『자신의 주권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평화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전쟁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시는 분으로 친히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나 현재의 악한 사물의 제도에서만 전쟁할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읍니다. 장차 올 새 질서에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는 단지 평화할 때만 있을 것입니다.—전도 3:1, 8; 빌립보 4:9; 로마 15:33; 출애굽 15:3; 야고보 5:4; 이사야 45:7.
2. 때때로 성경은 여호와의 증인의 평화스러운 활동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2 헌신한 그리스도인의 평화스러운 활동도 그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전도 봉사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라].』고 한 바와 같이 흔히 전쟁 용어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육체적 혹은 물질적 무기를 사용하지 않읍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읍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 . .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그리스도인 전도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사용합니다. 그 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합니다. 그것으로 그는 거짓되고, 하나님께 치욕을 돌리는 교리를 칩니다. 그는 교만이나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과 진리와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과 겸손함으로 그렇게 합니다.—디모데 후 2:3; 고린도 후 10:4; 에베소 6:12, 17; 히브리 4:12.
3. 평화를 지킬 우리의 의무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그 이유는?
3 그러므로 평화를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성경에서 보여 주는 바와 같이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서로 화목[평화롭게]하라.』 『형제들아. . . .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평화롭게]할찌어다.』 『너희끼리 화목[평화롭게]하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끼리 불화가 있을 경우에는, 그 불화를 원할하게 만들 의무가 있읍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불쾌하게 만든 사람에게 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받은 불쾌감을 마음에서 씻어 버릴 수 없는지 여부를 보기 위해서 불쾌감을 준 사람에게 갈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평화를 지킬 그들의 의무는 상대적 혹은 조건적입니다. 『할 수 있거든』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너희로서는』외인들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마가 9:50; 고린도 후 13:11; 데살로니가 전 5:13; 로마 12:18; 마태 5:23, 24; 18:15-17.
평화를 애호하는 마음을 가짐
4. (ㄱ) 어떠한 요인들이 평화를 상실하기 쉽게 만듭니까? (ㄴ) 그러므로 성경에는 어떠한 충고가 있읍니까?
4 유전받은 불완전성, 약점, 이기심 때문에, 우리는 싸우기 쉽고, 말이나 주먹으로 다투기 쉬운 경향이 있읍니다. 불완전한 상태, 재난 등등도 분쟁을 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시종 일관 평화를 충고한 것은 적절합니다. 족장 「야곱」의 아들인 「요셉」은 「애굽」의 국무 총리로서 그의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부친에게 보내며 『당신들은 노중에서 다투지 말라』고 현명하게 충고 했읍니다. 논쟁에 휩쓸리기가 매우 쉬우므로 「솔로몬」은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고 했읍니다.—창세 45:24; 잠언 20:3.
5, 6. 평화를 애호하는 마음은 어떠한 유익을 가져 다 줍니까?
5 그러므로 하나님의 평화를 그들의 소유물로 얻은 사람들은 평화를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귀중한 소유물을 유지하기 원한다면 그들은 평화를 계속 추구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평화를 의식하고 평화를 애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평화는 확실히 한 사람의 건강과 복지에 공헌합니다. 이미 지적된 사실이지만 분쟁과 당파와 억압은 모든 정신적, 신체적, 정서적 병의 근본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복지를 위해서도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회중이나 가족 사회가 항상 분쟁의 장소가 된다면, 그곳에 행복이 있을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누구나 평화 유지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6 그러나 그뿐이겠읍니까? 평화는 능률과 번영에 도움이 됩니다. 전쟁으로 시달린 농촌은 농작물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몸의 지체가 싸우고 있을 때에는 그 몸 자체가 제 구실을 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돌보아 줄 수 있는 기관에 자기의 몸을 맡기지 않으면 안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조직에 있어서도 이와 같읍니다. 한 가족이든, 한 회중이든 한 사업 단체이든, 능률적으로 운영되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충고를 받았읍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야고보 3:18; 베드로 전 3:10, 11.
7. 화평케 하는 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7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 평화에 대해 그렇게 많이 기록해 두신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고 충고하셨읍니다. 그러한 이유로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여기 화평케 하는 자란 평화스러운 사람 혹은 평화를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성품을 가진 사람,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 평화를 조성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승인을 얻기 위해 우리는 평화롭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스가랴 8:19; 마태 5:9.
8. 우리가 평화롭게 하는 사람 중에 들어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의무를 부과합니까?
8 만일 우리가 평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중에 참으로 속해 있다면, 우리는 평화를 우리의 기도의 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 필자 「다윗」이 오래 전에 충고한 바와 같읍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기도]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 [염려로부터 해방되리라.]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찌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찌어다.』 사도 「바울」 역시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 . .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시 122:6-8; 빌립보 4:6, 7.
평화를 방해하는 것들을 경계함
9, 10. (ㄱ) 자존심은 평화 방해물 가운데서 어떠한 계층에 속하며, 그 이유는? (ㄴ) 자존심은 하나님과의 우리의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칩니까? (ㄷ) 우리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는 어떠합니까?
9 만일 우리가 평화를 위한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할 일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한 것을 행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우선 평화를 방하해는 것들을 경계함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것중에 으뜸가는 것은 자존심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냐 하면 「사단」 마귀가 평화 파괴자의 괴수로서의 생애를 시작하게 된 첫째 원인이 자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모든 반역의 동기는 자존심이며, 반역은 평화의 반대인 전쟁 상태입니다. 자존심은 순종하지 못하게 싸웁니다. 우리가 우리 위에 있는 분들에게 순종하지 않고서는 평화가 있을 수 없읍니다.—에스겔 28:17; 베드로 전 5:5.
10 자존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로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전쟁 상태에 있으면서 어떻게 평화를 가질 수 있읍니까?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일곱 가지 중에는 『교만한 눈』 즉 자존심이 있읍니다. 그리고 의인화된 하나님의 지혜는 『나는 교만과 거만[자존심]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므로, 우리가 자존심으로 가득차 있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있을 수 없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을 낮춰야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자를 아시나이다.』—잠언 6:16, 17; 8:13; 야고보 4:6; 시 138:6.
11.
11 자존심은 동료 인간과의 평화도 상실하게 합니다. 사실상 사도 「바울」은 자존심과 분쟁—평화가 없는 것—을 인과(因果) 관계로 여러번 말하였읍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 그러므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 나느니라.』 자존심이 평화 방해물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읍니다.—갈라디아 5:26; 빌립보 2:3; 디모데 전 6:3-5.
12, 13. 물질주의는 왜 평화 방해물이 됩니까?
12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또 하나의 평화 방해물은 물질주의입니다. 물질과 이기적 이득에 대한 탐욕은 우리로 불만을 느끼게 만들며,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무슨 평화가 있겠읍니까? 다음의 기록과 같읍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만일 우리가 물질주의에 휩쓸린다면 하나님과의 평화도, 마음의 평화도 가질 수 없읍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한 말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만족은 마음의 평화를 갖게 합니다.—디모데 전 6:10, 7, 8.
13 탐욕은 이웃과의 경쟁심을 넣어 주기 때문에, 그 사람의 평화를 빼앗아 갑니다. 왜냐 하면 자존심이 명예를 위해 경쟁하는 것처럼, 탐욕은 물질을 위해 경쟁하도록 하기 때문에 질투, 시기, 상실 공포증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위해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는 교훈을 따라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그들의 이익도 구해야 할 것입니다.—빌립보 2:4; 고린도 전 10:23, 24.
14. 모든 『육체의 일』들이 평화 방해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4 사실상 모든 형태의 이기성, 모든 『육체의 일』들은 평화 방해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것들이 크면 클수록, 평화를 방해하는 힘은 더 커집니다. 분명히 거짓말, 도적질, 속이는 것, 모든 형태의 성적 부도덕은 그 사람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므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방해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게끔 하기 때문에 이웃과의 평화를 빼앗아 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명백히 말한 것같읍니다. 『하나님의 뜻은 . . .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 심이니라.』 그러한 육체의 일들 중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자기들 자신에 대한 평화를 방해하는지 유의하십시오.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소유인 평화를 계속 유지하려면 모든 종류의 육체의 일들을 경계하고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읍니다.—데살로니가 전 4:3-6, 갈라디아 5:19, 20.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배양함
15, 16. (ㄱ) 우리의 소유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 사랑은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ㄴ) 즐거움은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15 만일 『육체의 일』들이 평화 방해물들이라면, 다른 성령의 열매들 (평화는 성령의 열매중의 하나임을 잊지 맙시다)은 평화에 도움을 주는 것들임은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배양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갈라디아 5:22, 23, 신세) 그 중의 첫째이며 으뜸이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지 않는 것과 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소유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한편으로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는데, 그 모든 것들은 『무례히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탐욕적이 되며 타인의 평화를 방해하는 대신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합니다. 사랑은 원한을 품거나 성냄으로 자신의 평화를 방해하지도 않읍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합니다. 다른 한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참으로 사랑을 배양하는 것은 우리의 소유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고린도 전 13:4-7.
16 즐거움 역시 평화에 도움이 됩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즐거움은 적극적이며 외향적인 성질의 것이며, 평화에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평화가 즐거움에 도움이 되는 것과 같읍니다. 즐거움은 힘을 주며, 보통의 경우에 우리를 자극하고, 그로 인해 평화를 빼앗아가는 사소한 일이나 조그만 모욕을 묵과하도록 해 줍니다. 즐거움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유모어」입니다. 흔히 「유모어」는 난처한 경우라든가 혹은 어색하고 어려운 사태로부터 모면해 줍니다. 따라서 평화가 보장됩니다.—느헤미야 8:10.
17, 18. (ㄱ) 오래 참음은 어떻게 평화에 도움이 됩니까? (ㄴ) 친절은?
17 오래 참음은 어떠합니까? 그것도 우리의 소유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 보조물이 됨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읍니다. 단순히 사람들이 오래 참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분쟁이 국제간에, 국가간에, 인종간에, 그리고 개인간에 일어납니까! 오래 참음은 평화에 기여합니다. 그 이유는 어디서나 가능한 한, 문제거리로 삼거나 분쟁을 일으키는 대신 참기 때문입니다. 오래 참음은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신경질적이 되거나, 쉽게 화내는 것을 막아 줍니다. 따라서 평화가 옵니다. 그렇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도록 노력한다면,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여야 합니다.—에베소 4:2, 3.
18 갈라디아 5:22(신세)에 나온 성령의 열매 중 다음 것은 친절입니다. 친절 역시 평화 보조물로서 우리가 배양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말이 있듯이, 친절은 힘을 가지고 있읍니다. 왜냐 하면 친절은 오해를 없애게 하고 용서의 길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친절은 비난자, 편견자, 의심하는 자를 무장 해제시킵니다. 그리하여 평화가 오게 됩니다. 친절은 우정적이 되게 하는데, 이것은 평화에 기여합니다. 친절이 평화에 주는 도움에 관해 사도 「바울」은 에베소 4:31, 32에서 말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친절과 그 반대의 것들을 대조시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친절, 신세]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19-21. (ㄱ) 착함은 평화에 어떠한 가치가 있읍니까? (ㄴ) 믿음은? (ㄷ) 온유는?
19 평화 보조물로 또한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착함입니다. 이것은 덕, 도덕적으로 훌륭함을 말합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착함의 전형이시며 정수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그를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분명히 평화는 악인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평화는 착하게 행하고,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 가 깝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되어 있읍니다. 오늘날에는 『선한 것을 좋아』하는 자가 드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평화가 거의 없읍니다. 착함은 선한 양심을 가져다 주며, 이것은 평화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충고를 받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에베소 5:9; 디모데 후 3:3; 베드로 전 3:16.
20 우리가 평화를 계속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성령의 열매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 즉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읍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예수께서도 동일한 충고를 하셨읍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음 때문에,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이 「이 땅에 장차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 떨고」 있는 와중에서도 「우리의 구원이 가까운 줄 알므로 곧게 서서 머리를 들」 수 있읍니다. 우리 자신의 약점과 결점이 우리를 괴롭히고 낙망시킬 때, 우리는 여호와의 사랑과 자비를 믿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믿음으로 평화를 가질 수 있읍니다.—이사야 26:3; 요한 14:1; 누가 21:28, 25, 26; 시 103:8-14; 요한 1서 1:7.
21 사도 「바울」이 다음으로 말한 성령의 열매는 온유인데, 이것이 평화에 도움이 됨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온유함은 부드럽고 달래는 것, 성급하거나 난폭하거나 화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온유하셨으며, 온유한 자를 복되다고 말씀하셨읍니다. 분노만큼 평화를 방해하는 것은 없읍니다. 그러나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합니다. 특히 상대방이 온유함을 결하고 있을 때, 상대방이 성급할 때, 또는 관리들이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대한 이유를 말하라」고 할 때 우리는 『온유와 두려움 [깊은 존경심, 신세]으로』 대답할 필요가 있읍니다.—잠언 15:1; 베드로 전 3:15; 마태 5:5; 11:29.
22. 자제가 평화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2 마지막으로 자제(自制)라는 열매가 있는데, 우리의 소유인 평화를 유지시켜 주는 보조물로는 사랑 다음 갑니다. 어떤 이가 우리의 뺨을 때리면서 모욕할 때, 자제는 다른 쪽 뺨을 돌림으로 평화를 유지하게 합니다. 자제는 다른 사람이 흥분해 있을 때 마주 대고 소리지르지 않게 합니다. 그리하여 평화가 회복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즉 자제를 행사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즉 평화를 회복시킵니다.—잠언 15:18; 마태 5:39.
23. 혀의 조절은 평화를 위해 어떤역할을 합니까?
23 특히 혀를 통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질이 무해한 것일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칭찬이 아니라면 적의를 조성할 수 있으며, 친구 사이를 갈라 놓을 수 있읍니다. 다음의 기록과 같읍니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거만한 자 [비방하는 자, 신세]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억울한 사정 이야기를 할 때, 혀를 자제하는 것이 또한 필요합니다. 그러한 경우에 감정에 휩쓸려서 하소연하는 사람의 편을 들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됩니다. 자제를 사용하고 균형을 지키고 그 문제를 이성적으로 생각합시다. 평화를 위해서 사태를 개선시키려고 하여야 합니다. 「정말 그렇게 나쁠까요? 아마 당신이 그를 오해하고 있거나 그가 당신을 오해하고 있는게죠. 아마 그가 그 때 기분이 좀 언잖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 사람이 악의로 했다고는 보지 않읍니다!」 등의 말을 할 수 있읍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당신은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읍니다.—잠언 26:20; 22:10.
24, 25. 평화를 위하여 남편, 감독자, 아내는 어떠한 책임을 가지고 있읍니까?
24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처해 있든지 간에, 우리는 평화를 위해서 자제를 행사하여야 합니다. 아마 남편이 그의 아내나 자녀의 언행으로 화가 났을지 모릅니다. 만일 그가 자제한다면 사태는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급한 언행으로 대꾸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평화는 멀리 날라가 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회중에서도 동일합니다. 불쾌하게 하는 것의 성질이 여하한 것이든지 간에, 감독자가 노해서 혹은 성이 나서 사려가 깊지 못한 대답을 한다면, 평화는 날라가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전에 평화가 회복되지 않으면 안됩니다.—디모데 후 2:23, 24.
25 다른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아무 책임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옛말에도 바가지 긁는 아내는 평화 방해자로서 아주 불필요하고 몰지각하고 성가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여인의 자제력의 결함은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자제력에 부담을 줍니다.—잠언 21:9.
26, 27. 요약해서, 우리가 평화를 얻고, 우리의 소유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 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26 참으로 평화 그 자체가 열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성령의 나머지 열매들이 이 열매를 배양하고 그것을 우리의 소유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평화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와 평화의 왕이신 그의 아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평화를 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환경에 기초하지 않고 원칙에 기초한 독특한 평화입니다. 믿음을 실천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스러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읍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소유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과 평화하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든 이웃과 평화하기를 원합니다.
27 이것은 평화를 애호하는 마음을 가지고,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고, 여러 가지 평화 방해물을 경계하고, 특히 평화 파괴자의 괴수인 「사단」을 경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평화에 도움이 되는 성령의 다른 모든 열매를 배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인 평화를 유지하기를 정말로 원합니다. 왜냐 하면 평화는 정신과 신체의 복지에 도움이 되며, 효과적인 활동에 도움이 되며, 행복을 가져 오기 때문입니다.
28. 평화와 행복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읍니까?
28 여호와 하나님은 행복한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행복한 군주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행복하십니다. 만일 우리도 행복하게 되려면, 그 분들의 평화를 가져야만 합니다. 『화평을 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예수께서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읍니까?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인식하고 있읍니까? 환언하면 평화롭게 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알리는 특징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랑과 그들의 소식과 같이 하나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유인 하나님의 평화를 항상 보호합시다.—잠언 12:20; 마태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