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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다!파수대—1971 |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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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주”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많은 성서 번역들은 본래 성서가 기록된 언어로 그 이름이 나올 때면,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철자하여 참 하나님의 이름을 복귀시켰다.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그렇다, 성서가 참으로 가르치고 있는 바와 그것에 관하여 흔히 배워 온 것과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신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당신은 성서가 참으로 가르치고 있는 바와 인류의 장래를 위하여 제시하고 있는 웅대한 소망에 대하여 알고 싶지 않은가?
혹시 당신에게 이 잡지를 전해 주었을 여호와의 증인 중 한 사람에게 무료 가정 성서 연구를 부탁하라. 이것은 6개월 동안, 일주일에 1시간씩, 무료로 당신의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성서의 기본 교리를 배우는 길이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궁금한 성서 질문들에 대하여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왜 늙고 죽는가?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 그리스도교국은 참으로 성서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가? 현재 고난으로 가득찬 세상 상태는 참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는 어떠한 장래를 기대할 수 있는가?
이미 백만 이상에 달하는 가족들이 이 무료 주간 연구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다. 그들은 성서가 참으로 가르치고 있는 바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배운 바에 대하여 매우 열정적이 되고 있으며, 그들 중 수만명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웃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만일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들 중 아무도 모른다면, 이 잡지의 발행인에게 편지하라. 당신의 이웃에 살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 한 사람이 찾아 가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가운데 들어 있는 흥미있는 사실들을 당신 역시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당신이 지금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않든지 간에 고대에 영감받은 책 가운데서 참으로 찾아볼 수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당신 스스로 그렇게 해 볼 만한 일이다. 당신은 이 놀라운 지식이 당신을 이미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오래 전에 보였던 바와 같은 열심과 활동 그리고 개인적 서약을 하도록 움직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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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고 말고요, ‘가요꼬’. 나도 하였으니까요!”파수대—1971 |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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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고 말고요, ‘가요꼬’. 나도 하였으니까요!”
‘글레디스 그레고리’ 기
우리의 화제는 내 마음 속에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 즉 ‘파이오니아’ 봉사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지도 아래 전 시간 전도 봉사를 하는 것이다. ‘가요꼬’는 일본인 소녀로서 그 봉사에 매우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매님은 정말 제가 ‘파이오니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하고 그는 물었다.
“할 수 있고 말고요, ‘가요꼬’. 나도 당신 나이만 하였을 때에 ‘파이오니아’를 하였으니까요!”
“자매님의 전 시간을 하나님의 왕국 봉사에 바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이군요! 그런데 저는 자신이 없어요.”
“돌이켜 보면, 나 역시 매우 자신이 없었지요. 그러나 내가 만일 내 생활에서 여호와와 그분을 섬기는 일을 첫째로 둔다면, 여호와께서는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나를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었지요. 그런데 실제로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해 주셨어요. 나는 지금껏 그 중요한 단계 즉 ‘파이오니아’ 전도인이 된 것에 대하여 후회한 일이 없어요.”
“‘그레고리’ 자매님, 자매님은 참으로 오랜 기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오셨지요, 그렇지요?”
“제가 알고 있는 아주 충실한 분들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저의 기록은 그렇게 긴 것도 아니지요. 어떤 분들은 ‘파이오니아’ 봉사자로서 50년간이나 일해 오셨으며, 아직도 열심히 계속하고 계시니까요. 내가 처음으로 성서 진리의 소식을 배운 것은 ‘버지니아’ 주 ‘로오노크’에서 나의 아주머니인 ‘에드워드 포울키스’ 씨로부터였는데, 그때는 1940년이었지오. 내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한 것은 1944년이었읍니다. 나의 어머니는 ‘크라이스트아델피안’교인이었는데, 어머니는 진정으로 성서를 사랑하셨지요. 그래서 내가 여호와의 증인들과 연합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머니와 나의 여동생 ‘그레이스’도 연합하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그레이스’와 나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우리의 목표로 삼았어요. 하지만 우리 어머니에 대한 부양 문제가 우선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어요.
“그때쯤 해서 가족의 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조지아’에 있는 집을 떠나 자유롭게 온전히 여호와께 봉사하려고 ‘로오노크’로 온 열성있는 젊은 두 증인이 있었어요. 그들은 ‘프레드 러스크’와 그의 누이 동생인 ‘메어리’였지요. 그리하여 ‘파이오니아’ 봉사 목표를 위하여 일하는 우리는 모두 넷이 되었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목표를 달성하였지요! 나의 오빠 ‘그레이’는 아직 증인이 아니었지만, 매우 친절하였고 협조적이어서, 군에서 제대하고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를 돌보기로 하였어요.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지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신 거에요! ‘프레드 러스크’와 ‘메어리 러스크’ 남매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프레드 러스크’는 마침내 협회 ‘부루클린’ 본부로 초대되어 지금도 거기서 봉사하고 있지요.”
“참으로 재미있는데요! 우리 회중에 있는 젊은이들도 다 그렇게 느낄거에요, 그렇지 않아요? 젊은이들 대부분은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거나 그 목표를 향해서 계획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 ‘파이오니아’ 정신이 일본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에 충만하여 있다. 일년 전에 우리와 함께 성서 연구를 시작할 때의 ‘가요꼬’만해도 조용하고 수줍은 소녀였으나 이제 밝고, 생기있고, 열심있는 왕국 전도인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에 찬 목적에 관하여 알게 된 기쁨으로 충만하여 있다. 이제 새로 헌신한 이 소녀도 ‘파이오니아’ 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초기 ‘파이오니아’ 시절
‘가요꼬’와 함께 나눈 대화는 나로 하여금 ‘파이오니아’의 초기 시절을 회상하게 하였다. 1946년 봄, ‘메어리 러스크’, ‘그레이스’, 그리고 나는 ‘버지니아’ 주의 ‘루우다운 카운티’로 임명되었다. 우리는 1936년형 낡은 차에 ‘트레일러’ 하나를 끌고 다니며 2년 동안 전 시간 봉사에 종사하였는데, 그것은 얼마의 시련과, 여러 가지 훌륭하고 즐거운 경험으로 가득찬 축복된 기간이었다. 그 구역은 얼마 동안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혀 방문하지 않은 곳이었으며, 주유소 곁에 주차해 둔 ‘트레일러’에 본거지를 둔 세 자매들은 여러 사람의 눈길을 끌었고 동시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단지 성서를 꺼내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으로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우리는 관심자들을 많이 찾아내고, 얼마의 좋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그해 여름 ‘켈리’ 부인의 목장에서 일련의 옥외 공개 강연을 마련하였으며, 연사는 근처 회중에서 왔다. 많은 흥미를 가진 청중들이 참석하였다. 그해 가을, 우리는 처음으로 ‘해리스’ 부부 ‘봅’과 ‘제인’을 만났다. 우리에 관한 소식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우리가 어느 더운 날 그들의 집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을 때, ‘봅’은 밀추수를 하다 말고, 그의 어느 일군의 말대로 “지옥이 없다는 이 여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보려고 들어왔다. 그는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그 책들을 받으시오. 만일 그 책들이 성서에 관한 것이라면, 좋은 것임에 틀림 없겠지” 하고 부인 ‘제인’에게 말하였다. 그들은 성서 연구를 할 것에 즉시 동의하였으며, 다음해 봄, 회중이 조직되었을 때, 그의 집에서 집회를 갖게 되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그 작은 회중에 30명의 활동적인 전도인 기록을 달하게 되었으며, 그들 모두는 그 시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우리는 선교인으로 훈련받도록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해리스’의 여덟살난 딸 ‘코니’는 “어머니, 그분들이 떠난다고 해서 우리 집회나 우리 왕국 전파 사업까지 중지할 수는 없지 않아요!” 하고 말하였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그 구역에는 각각 왕국회관을 가지고 있는 두 개의 회중이 있다.
우리의 전 시간 봉사의 첫 장은 그렇게 끝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때 뿌려진 씨가 이제와서 열매를 맺는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있다. 우리가 주차하고 있던 주유소의 주인은 ‘칼빈’과 ‘루실 어데이’ 부부였다. 그들은 친절하긴 했지만 우리가 전하는 소식에는 별로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16년이 지난 후 일본에 있는 나는 ‘루실’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부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당신의 그리스도인 자매가 되었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발전하였다는 소식은 나를 매우 기쁘게 해 주었다.
‘길르앗’ 학교 시절과 그 후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한 것은 희귀하고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그 학교에서 그렇게도 풍부한 성서 지식을 얻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길르앗’은 ‘뉴욕’ 주 ‘핑거 레이크스’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은 푸른 초원과 잔잔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으며, 일본인으로서는 첫 ‘길르앗’ 졸업생 중 하나였던 ‘아사노 아사야마’는 “조그만 낙원과 같다!”고 경탄하였다.
원래 일본으로 임명된 25명의 졸업생 중에 들어 있던 우리 여덟명은 후에 한국으로 임명되었다. 일이 매우 신속하게 일어났다. 우리가 ‘뉴욕’에서 한국으로 가는 데 2개월이 걸렸는데 여정을 따라서 많은 흥미있는 광경들과 돌발적인 사건들을 겪었다. 우리가 한국에 도착한 지 3개월 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났으며, 우리는 군인들에 의하여 할 수 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는 처음에 ‘고베’에 3개월간 있었으며, 그 후 1950년 10월에 ‘나고야’에 정착하게 되었다. 일년 동안에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중 아무도 한국에 잠시 머물렀던 일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한국의 증인들의 열심을 능가하는 열심을 본 일이 없다. 물질적으로는 빈곤하고 그들 중 대부분은 북한 공산주의를 피하여 남하한 피난민들이었지만, 그들의 보잘것 없는 나머지 재산 보따리 속에는 흔히 낡은 성서가 들어 있었다. 공개 강연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으며, 집회가 끝나면 그들은 으례 참석한 선교인마다 둘러싸고 여러 가지 성서 질문을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성서로부터 대답을 읽어 주면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우리가 한국을 철수할 때 한국인 동료 증인들과 헤어지는 것은 실제로 육체적 위험을 걱정하는 이별이었음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들이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 잘가라고 하던 그 때의 기억은 우리에게 영영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그 일은 우리가 일본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안정하는 데 얼마 동안 어려움을 갖게 하였다. 우리 ‘그룹’ 중 ‘돈 스틸’ 부부만 얼마 있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당시 우리는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제안을 받았다. 한국에는 입국이 허락되는대로 다른 선교인들이 보내지게 되어 있었다.
“‘그레고리’ 자매님, 자매님의 ‘파이오니아’ 봉사는 세계 일주를 하게 하였군요.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러한 특권을 갖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죠?”
“‘파이오니아’ 특권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어떤 분들은 고향을 결코 떠나지 않지요. 바로 지금 일본에는 필요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제 생각에는 아무도 이 풍요한 밭을 떠나려 하지 않을 거에요.”
일본—대조를 살펴봄
내가 일본에서 봉사하는 20년 동안 많은 변화를 목격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폐허화된 땅으로부터 일본은 세계에서 선진국 중 하나로 변모하였다. 일본인들은 참으로 근면하며, 교육열이 높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는 데 열성적이다.
처음, 왕국 전파 사업은 별 진전을 보지 못했다. 우리의 일본어에 대한 보잘것 없는 지식과 적절한 책자들의 빈약한 공급을 생각하면 이것은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얼마의 사람들이 우리와 동조했고 그들이 성서 지식에 장성하여 감에 따라 우리는 일본어에 더욱 익숙하게 되었다. 초기 연구생들 중 얼마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충실히 봉사하고 있다.
우리는 언어상의 실수를 자주 범하곤 했다. 예를 들면, 어느 선교인은 알고 보니 한 단어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 전차입니다” 하고 말한 일이 있다. 한 번은 나도 어떤 분에게 매우 엄숙하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여호와의 이름과 주소를 선포하기 위하여 지상이 오셨읍니다” 하고 말한 일이 있음이 생각난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새로운 습관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무릎을 꿇고 앉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새로운 관심자들과 함께 성서 연구를 할 때 나는 그렇게 앉는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의 꾸준한 인내 덕분에 모든 일이 쉽게 이루어졌다.
일본인들의 생활상에는 대단히 많은 현대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구습이 남아 있다. 도회지의 거리에서는 ‘기모노’와 ‘미니스커트’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일본은 ‘컴퓨터’ 사용 수에 있어서 세계 2위에 올라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난방 장치가 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낮은 탁자 위에 담요를 씌우고 그 밑에 화로를 넣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과 발을 덥히는 동안 등은 얼어 들어온다. 일본인들은 교육에 대단한 비중을 두어, 거의 100‘퍼센트’가 글을 읽는다. 그런데도 나는 어느 부인이 자기 친구와 “우리 딸은 ‘토끼’야. 너의 딸은 무엇이니?” 하는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친구의 딸은 “말”이라고 하니까 이 불운에 대하여 심심한 동정을 표시하였다. 열 두해를 한 주기로 하여, 해마다 어떤 동물로 표시하는 미신이 있다. “말 해”에 태어난 여자는 팔자가 사나운 아내가 된다고 해서 요즈음까지도 그러한 여자는 남편감을 만나기가 어렵다.
한편 일본의 젊은이들은 반항하고, 학원 폭동은 다반사이지만 아직도, 일본에서 결혼의 70‘퍼센트’는 가족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실로 일본은 여러 가지 대조를 배울 수 있는 연구 대상이다.
괄목할 발전
만일 일본에서 그리스도인 사업에 대한 관심의 성장도가 처음에 느렸다고 하면, 이제는 잃어버린 시간을 메꾸게 되었다. 처음 왕국 전도인 천명을 생산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후 10년이 경과한 지금에 와서 호별 방문 전도 봉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9,000명이 넘게 되었으며, 그들 중 1,000명 이상이 ‘파이오니아’ 봉사자들이다. 어떻게 그러한 성공담이 있게 되었는가? 이곳에 온 처음 15명의 선교인단이 아직도 이곳에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 모든 확장을 이루는 데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기쁨이며, 특권이겠는가! 물론 문제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곳에서 경제적 발전을 가져오는 데 기여한 똑같은 바탕이 왕국 활동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근면이 현저히 칭찬받을 만한 요인이기는 하지만, 현 상태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된 이곳의 어떤 사람들은 직장과 야망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오랜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인 성장을 방해하게 하였다.
비록 사람들이 교육을 중요시하고 서적을 잘 받기는 하지만 깊이 뿌리박은 불교의 영향력은 아직도 어떤 형태의 조상 숭배를 지속시키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초를 제공하는 배경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현대 과학 교육을 받은 60세 전후의 연령층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자신들은 무신론자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겸손하고 가르칠 만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 중 얼마는 놀라운 진전을 보였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올바른 마음의 상태이다. 우리가 사랑하게 되고, 가장 잘 알게 되는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들이다.
내 선교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이오니아’ 봉사는 확실히 그리스도 예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나에게 매우 크게, 사랑하는 가족을 갖게 하였다. (마가 10:29, 30) 최근 동경 ‘벧엘’(‘왙취 타워’ 협회의 지부 본부)에 새로운 성원이 된 한 젊은 증인이 “저를 기억하시겠읍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의 얼굴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나고야’에서 그의 모친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을 때 그는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내가 함께 연구한 또 다른 가족에는 세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다.
학교를 다니던 한 청년에게 나는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었는데, 그는 그날 12세된 자기 딸이 하나님께 헌신을 표시하는 침례를 받았다고 소개하였다. 나의 영적 자녀들 중 어떤 사람은 ‘왙취 타워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로서 또는 ‘벧엘’에서 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누구나 전 시간 봉사에 종사해 보지 않는 한 여호와의 보호와 인도를 결코 그렇게 강렬하게 느끼지 못함을 나는 말 할 수 있다. 그분은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부유하게 살 줄도 [알고] ···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능히 알게 하는 즐거움을 더해 주신다. (빌립보 4:12, 새번역) 내가 일본에 온 지 20년 동안 미국에 세번 다녀왔다. 그때마다 항상 전세계에 있는 관대한 증인들로부터 협회를 통하여 베풀어진 도움을 받았다. 지난번 나는 ‘아틀란타’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에 참석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그리하여 11년만에 나의 형제들과 자매들 그리고 많은 친구들을 방문하였다. 참으로 즐거운 재회였다!
여하간 현재에 와서 일본은 나의 고향이다! 나는 여기서 ‘아마겟돈’을 통과하여 그리고 그 후까지 계속 어떻게든지 여호와께 대한 숭배와 봉사로 바쁘게 보내기를 바란다. ‘가요꼬’는 현재 이미 3년 동안 특별 ‘파이오니아’ 전도인으로 일해 왔다. 어느날 그에게서 받은 편지에는 10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함께 연구를 한 한 분은 이미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자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가요꼬’도 틀림없이 그에게 내가 자기에게 말한 대로 “물론 당신도 ‘파이오니아’가 될 수 있구말고요. 나도 하였으니까요!” 하고 말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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