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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파수대—1971 |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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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디모데 전 4:12.
1. (ㄱ) 오늘날 젊은이들은 어른들과 당국자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나타내는 일이 많습니까? (ㄴ) 젊은이들을 달래기 위하여 어떻게 하였으며,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현 세계에서 중요한 화제의 대상의 하나는 젊은이들입니다. 옛말에 아이들이 보이기는 해도 들려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읍니다. 이 말은 아이들이 어른들 앞에 있기는 해도 문제에 대해 자기네 의견을 말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현재 이 말은 의미를 상실해버렸으며, 젊은 세대는 이 말을 구 세대가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사상 표현을 봉쇄하려고 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표현과 행동의 자유를 허용받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의 진행에 대하여 의사 표시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당국자들이 만일 거기에 동의하지 않게 되면 젊은이들이 일을 주관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달래고 젊은이들이 구 세대에 대하여 말성을 일으키지 않도록 막기 위하여 수행된 많은 일들을 다 설명하려면 종이를 짐으로 지고 와도 부족할 것입니다. 젊은 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표준이 늦추어졌고, 법률이 변경되었읍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올바른 지각력이 상실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젊은이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대신 그들에게 강력히 하여 어른에게 깊은 존경을 나타내도록 요구해야 마땅하다고 할 수 있읍니까? 상호 모순되는 여러 가지 인간의 견해를 들을 게 아니라, 인류를 창조하신 분의 말씀으로 가서 올바른 견해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2. (ㄱ) 부모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셨읍니까? (ㄴ) 부모에게는 자녀 교육면에 있어서 어떠한 책임이 있었읍니까?
2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선택을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민족에게 법과 계명을 주셨읍니다. 열 가지 법 곧 십계명 가운데는 출애굽기 20:12에 나오는 이러한 것도 있었읍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호와께서는 계속하여 출애굽기 21:15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렇게 또 말씀하셨읍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부모들은 자녀들을 적절히 교육하여 자녀들도 장차 가족 내에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읍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는 영감을 받아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라].”—신명 6:6, 7, 17.
3. (ㄱ) 고대 ‘이스라엘’에서 악하고 반역적인 자녀들은 어떤 결과를 당하였읍니까? (ㄴ) 왜 이것은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처사가 아니었읍니까?
3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이가 반역적이고, 시정이 불가능하며, 그릇된 행동만 한다면 시정을 받기 위하여 그 아이를 도시의 연로자들에게 데리고 가야 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었읍니다. 그러한 아이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읍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신명 21:18-2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먼저 부모에게 자녀를 적절하게 교육해야 한다고 엄격히 요구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명기 6:17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라고 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거칠게, 경건치 못하게, 잔인하게, 무자비하게 취급할 자유를 갖지 않았었읍니다. 부모들은 경건한 성품을 보이는 데 있어서, 사랑과 배려를 나타내고 그들을 돌보는 데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하였읍니다. 아버지는 정직하고 곧고 성실하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녀들이 확신을 둘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였읍니다. 어머니는 남편을 깊이 존경하고, 자녀들에게 의지와 도움이 되어야 하였읍니다. 자녀들이 자기 멋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게 되어 있지 않았읍니다. 그들을 귀한 자산으로 알고 모든 면으로 돌보아야 하였읍니다. 따라서 만일 어떤 아이가 나쁘게 된다면 그것은 그 아이가 반역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며, 얼마가 지나도 그것이 시정되지 않으면 그 성읍의 연로자들에게 불려가 심판을 받게 되어 있었읍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들을 어떻게 보며, 자녀 교육을 잘한 부모들은 어떤 보람을 맛보게 됩니까?
4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들을 갖고 또 그 자녀들을 여호와의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라고 지적하고 있읍니다. 시편 필자는 영감을 받아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시 127:3-5)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교육을 잘 받은 자녀들은 신뢰할 수 있고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그러한 자녀는 아무도 우스개감으로 업신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잠언」의 말은 실로 참됩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언 23:24, 25.
올바른 행실을 나타낸 성서적 본들
5. 자녀들은 어떠한 여러 가지 점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까?
5 성서 기록을 보면 젊은이들의 올바른 행실에 대한 좋은 본들이 많이 있읍니다. 현 20세기의 어린 세대도 그러한 본으로부터 자극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한 젊은이들은 사도 ‘바울’이 청년 ‘디모데’에게 편지로 한 충고의 말을 행실로 나타냈었읍니다.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곧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디모데 전 4:12.
6. 청년 ‘엘리후’는 ‘욥’과 관련하여 어떻게 연로자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냈읍니까?
6 성서 「욥기」는 말과 행실에 있어서 청년 ‘엘리후’가 나타낸 좋은 본을 알려 줍니다. 이 ‘엘리후’는 ‘아브라함’의 먼 친척이었읍니다. ‘엘리후’는 ‘욥’이 고통을 받는 동안 그의 곁에 앉아서, 연로한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욥’을 충고하고 비평하는 말을 귀기울여 들었읍니다. 그는 또한 ‘욥’ 자신의 변명을 들었고, ‘욥’이 자기의 질병과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자기 중심적인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보았읍니다. 그런 다음 ‘엘리후’는 다음과 같이 충고의 말을 시작하였읍니다.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도다].” (욥 32:6, 7) 이렇게 시작하여 ‘엘리후’는 논쟁점에 대하여 말을 계속하였읍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의 행실은 책망할 여지가 없었읍니다. 연로한 사람들은 인정을 받아야 함과 말할 때에 방해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인식하고 있었읍니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냈읍니다. 동시에 그는 또한 하고싶은 말이 있었으며, 적절한 때가 오자 말을 꺼내 ‘욥’이 당한 문제에 대하여 영감받은 연설을 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공평하고 의롭게 행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었읍니다.
7. 이것은 우리 시대에 젊은이나 노인들에게 어떻게 본이 되며, ‘베드로’는 동일한 취지로 무슨 격려의 말을 하였읍니까?
7 ‘엘리후’의 이러한 행동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훌륭한 본이 됩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변호하게 될 때에 우리의 행실은 모름지기 적절한 존경심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옳고 합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과, 옳은 것을 말할 때에 온당한 행실을 나타내는 것은 크게 다릅니다. 적절한 존경심을 보이고 올바로 행실하는 사람은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가이사’의 법에 대항하는 반역을 충동하거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율법에 반항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정의와 법이 너무나 느리고 구식이어서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핑계로 자기 멋대로 처리하려고 대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사람은 ‘엘리후’와도 같이 올바른 것을 변호하고, 그러면서도 온당한 행실을 보여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깊이 인식한다는 것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한 처신은 사도 ‘베드로’의 충고의 말과 일치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보이게 하려 함이라.”—베드로 전 2:12.
8. ‘요시야’는 ‘유다’ 왕으로서 어떠한 행동을 나타냈읍니까?
8 청년 때에 충성을 나타낸 또 하나의 본으로서는 기원전 659년과 기원전 629년 사이에 ‘유다’의 왕을 지낸 ‘요시야’가 있읍니다. 「열왕기 하」에 보면 ‘요시야’가 ‘유다’ 왕으로 임명되던 당시에 여덟살밖에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통치 제18년 곧 그의 나이 25세 가량 되었을 때에 ‘요시야’는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라고 명령하였읍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힐기야’는 여호와의 집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읍니다. 이러한 발견 사실이 ‘요시야’에게 보고되었으며, 열왕기 하 22:11-13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알려 줍니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왕이 ···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9, 10. ‘요시야’는 ‘유다’에서 올바른 숭배를 회복하는 일을 어떻게 착수하였읍니까?
9 ‘요시야’는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백성들이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를 알기 위하여 이처럼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함으로써 여호와께 대한 커다란 사랑과 여호와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냈읍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여호와의 지시를 묻고자 하였읍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하여 여호와의 여예언자 ‘훌다’에게 종들을 보내어 문의하였읍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린 ‘유대’ 백성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단죄의 말씀을 하셨지만, ‘요시야’는 충실하게 이행하여 율법의 말씀을 그 땅 거민들의 귀에 들려 주었읍니다. 성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0 “왕이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 노소하고 다 왕과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왕이 대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열왕 하 23:1-3.
11. ‘요시야’가 ‘유다’ 백성을 위하여 행한 청결 작업에 대하여 약술하십시오. 그리고 그의 용감한 행동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읍니까?
11 스물 다섯살 난 이 젊은 왕은 여호와께 대한 관심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가 선한 행실을 보이고 의를 사랑하고 경건한 지혜의 말을 하였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의 축복을 받았읍니다. 「열왕기 하」를 계속 보면 그가 율법책의 말씀에 따라 행한 몇가지 일을 볼 수 있읍니다. 그는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에 있었던 ‘도벳’을 숭배에 적합지 못하게 만들어 아이들을 ‘몰렉’에게 제사 지내기 위하여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일을 다시는 못하게 만들었읍니다. 그는 ‘예루살렘’ 앞에 있던 이교 숭배의 산당(山堂)을 헐어버렸고, 영매술자, 직업적 점쟁이, ‘데라빔’과 더러운 우상 및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온갖 가증한 것들을 없애버렸읍니다. 따라서 그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되어 있읍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열왕 하 23:4-25) 사실 아무도 이 젊은 왕의 연소함을 업신여길 수 없었읍니다.
12. 어린 ‘예레미야’는 여호와와 어떠한 경험을 하였읍니까?
12 ‘유다’ 왕국 말년에 여호와의 유명한 예언자들 가운데 ‘예레미야’라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그는 성인 시절에 여호와의 믿음직스럽고 충실한 종으로 활약하였읍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에도 이 나이 어린 여호와의 종은 연로한 사람들이 업신여기거나 비평할 수 없는 인물이었읍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가 직접 체험한 경험을 이러한 말로 기술하였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1:4-8.
13. ‘예레미야’는 여호와 앞에서 가진 충실한 행로 때문에 어떠한 시련을 겪었으며, 그는 여호와의 심판에 대하여 몇 년 동안이나 충실하게 예언하였읍니까?
13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여호와를 위한 담대한 대변자가 되었읍니다. 그는 하나님 여호와를 굳게 믿었읍니다. 그의 담대한 전도 봉사는 그의 동료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반대를 받지 않고 수행된 것이 아닙니다. 성서 기록을 보면, 그가 정죄를 받았으며, 착고(著錮)에 채움을 당하였으며,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가 있었으며, 그가 깊은 우물 속에 던지워 거기 갇혀 있기도 하였읍니다. 성서 「예레미야」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이 사람의 예언이 수록되어 있읍니다. 그는 40년 동안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는 여호와의 예언자로서 활약하였읍니다. (예레미야 1:10) 그렇습니다, 아무도 이 하나님의 사람을 어렸을 적부터 업신여길 수 없었읍니다.
14. (ㄱ) 젊은 ‘다니엘’과 그의 세 동료들은 행실이 정직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지위를 갖게 되었읍니까? (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입증하였읍니까?
14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예언자로서 ‘다니엘’이라는 청년이 있었읍니다. 이 어린 여호와의 종은 어렸을 때 ‘바벨론’으로 잡혀갔읍니다. ‘다니엘’은 그의 가까운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함께 ‘바벨론’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성서 역사를 형성하였읍니다. 그들은 이국에 끌려간 젊은이들로서 그들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수행하였읍니다. ‘다니엘’은 행실이 정직하였기 때문에 전 ‘바벨론’에 대한 통치권을 받았으며, 모든 ‘바벨론’ 현자(賢者)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읍니다. ‘다니엘’의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역시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후에 풀무 불의 사건이 있었을 때에 여호와께 헌신한 종임을 나타냈읍니다.—다니엘 2:48, 49; 3:8-30.
15. 어떻게 하여 주 예수께서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훌륭한 본이 되십니까?
15 여호와의 나이 어린 종들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그 중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특별한 의의가 있읍니다. 예수의 지상의 생애는 기원전 2년경에 시작되었읍니다. 그 때에 처녀 ‘마리아’가 조그마한 성읍인 ‘베들레헴’에서 그를 낳아 구유에 누였읍니다. 성서에서 주 예수의 소년 시절에 관하여 자세히 알려 주지는 않지만, 기록된 것만으로도 우리는 불완전한 인류를 대속하기 위하여 지상으로 보냄을 받은 이 완전한 소년에 관하여 대강 알 수 있읍니다. 그는 어렸을 적에 부모를 따라 유월절 축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여행한 적이 있었읍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그는 여호와의 성전에 있던 선생들과 접촉하게 되었읍니다. 그의 부모들은 ‘예루살렘’의 유월절에 참석한 군중들 가운데서 그를 잃어버렸다가 바로 그 성전에서 그를 발견하였읍니다. 성서 기록은 그 때의 일에 대하여 알려 주고 있읍니다. 성전에서 그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었읍니다. 그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그 때 열두살 정도였다—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였었고 접촉하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는 계속하여 부모에게 복종하였으며,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읍니다.—누가 2:41-52.
16. 고린도 전서 4:17과 빌립보 2:19, 20에 나타난 ‘바울’의 말로 보아 ‘디모데’는 어떠한 젊은이였읍니까?
16 그러므로,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들 모든 본들을 보았고 그리고 예수의 행실과 생활 방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또 하나의 젊은 사람인 ‘디모데’에게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충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 전 4:12) 그리고 이 젊은이가 훌륭한 본이 되었었다는 사실은 고린도 전서 4:17에 기록되어 있는 그 사람에 대한 ‘바울’의 말에 잘 나타나 있읍니다. ‘고린도’ 회중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진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또 이 젊은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 회중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빌립보 2:19, 20.
17. 이제 젊은이에 관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기며, 그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은 무엇입니까?
17 각 민족의 모든 사람들이 심한 소란과 긴장에 싸여 있는 이 시대, 20세기에도, 옛날의 훌륭한 분들이 현 세상의 젊은이들을 지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읍니까? 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읍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애와 앞에 언급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생애는 젊은이들에게 ‘누구든지 그들의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실상, 세계 각처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연소함을 업신여기게 행동하지 않고,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주는 본이 되는 젊은이들이 있읍니다. 다음 기사를 읽어 보면 이러한 젊은이들이 웅대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이 되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그들의 부모와 기성 세대는 그러한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419면 삽화]
‘예레미야’는 전도 봉사 때문에 반대를 받고 착고에 채움을 당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어려서부터 정당하게 업신여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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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때에 창조주을 기억함파수대—1971 |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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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때에 창조주을 기억함
“너는 청년의 때 ··· 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 12:1.
1. (ㄱ) 어린 사람들을 교육할 필요성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을 알려 줍니까? (ㄴ)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무슨 적절한 충고의 말을 하였읍니까?
하나님의 말씀에는 어린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참으로 많습니다. 앞 기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의 열매는 상급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어린 사람들의 기질에 대하여서도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고, 어린 사람들은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 책임을 질 수 있기 위해서는 성장하는 동안에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도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다고 말합니다. (잠언 22:15)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만드신 인간의 체질을 잘 알고 계십니다. 어린 시절은 인격 형성 기간이며, 어린이들이 인도와 지도를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그러한 인도와 지도를 받아들였는가는 그들의 행실에서 그리고 후년에 그들이 책임을 받아들이는 면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도 다음과 같은 말로 어린 시절과 성인 시절의 차이를 묘사하였읍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 전 13:11) 그러므로 ‘바울’이 전도 봉사에서 그의 동료로 일한 젊은 ‘디모데’에게,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편지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디모데 후 2:22.
2. 경건한 어린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훌륭한 성품이 있읍니까?
2 이것은 이생의 어린 시절이 저주거리라는 뜻이거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린이를 멸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왕국에서 누가 가장 큰 자가 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대답하신 일이 있읍니다. (마태 18:3) 예수께서는 아이들에게는 겸손함이 있다고 설명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신을 너무 높이 생각지 말고 경건한 아이들과 같은 겸손한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아이들에게 유리한 말을 하였읍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린도 전 14:20.
3. (ㄱ) 아이들은 어떤 점에 대하여 교육이 필요합니까? (ㄴ) 이러한 교육을 시킬 책임이 누구에게 있으며, 그러한 교육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뤄버려서 안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그러므로 요지는 어린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것들 곧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에 대하여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도 자기가 젊었을 때 가졌던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상실해버려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적절한 교육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가 가장 잘 줄 수 있읍니다. 거기에는 자녀의 복지와 양육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교육과 훈련은 현 사물의 제도 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뤄서는 안됩니다. 그 결과 많은 어린이들은 자기 부모와 거리감을 갖게 되었고, 부모가 자기를 원치 않는 자녀, 심지어 성가신 존재로 생각한다고 느끼게 되었읍니다. 이러한 현상은 또한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소위 세대 격차라는 결과를 내게 하였읍니다. 이러한 경향을 이겨 나가기 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과의 사이에 관계를 공고히 하고 또 그러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게 하여 부모를 깊이 신뢰하게 하여 자녀들이 문제가 있을 경우 문제를 부모와 상의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친구들이나 외인들과 상의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보인 좋은 본들
4. 오늘날에도 그처럼 훌륭한 교육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어떠한 것을 볼 수 있읍니까?
4 이러한 식의 의사 소통과 교육은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청년의 때에 자기의 창조주를 기억하고,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업신여기도록 행동을 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읍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경험을 고려해 본다면 건설적이고 다른 사람들도 생명의 길을 가는 데 격려가 됩니다.
5. (ㄱ) ‘프랑스’에 사는 두 소년의 경험을 이야기하십시오. (ㄴ) 부모들은 어떠한 칭찬을 받았읍니까?
5 한 가지 경험은 ‘프랑스’에 사는 두 명의 소년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믿음과 소망에 대하여 증거하였는데, 그들의 전도를 들은 집주인은 그 두 소년의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하였읍니다. “저는 지금도 오늘 오전에 댁의 두 자녀들과 나누었던 장시간의 대화를 잊지 못하고 있읍니다. 저는 아름다운 것과 정직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의 부모인 귀하에게 당돌하게도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을 칭찬하기 위한 것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아이들이 자기네 신앙을 그처럼 흥미롭게 그처럼 확신과 지성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을 일찌기 본 적이 없읍니다. 그 중 큰 아드님은 더욱 그러하였읍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그 일을 계속한다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가치가 탈락되어가는 현 세상에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성장과 결실을 가져오리라고 생각되는 가치 있는 것을 만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저는 귀하를 알지 못하지만, 두 아이들로 미루어 보건데 귀하는 분명 칭찬받을 만한 부모님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들 어린 소년들이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읍니다. 그들은 그렇게 한다고 하여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칭찬을 받으며, 그러한 아이들의 부모들도 칭찬을 받습니다.
6. ‘버어마’에 사는 두명의 젊은이들은 그들이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고 있음을 어떻게 나타냈으며,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왔읍니까?
6 여호와의 이름에 찬양을 돌린 젊은이들의 예가 또 있읍니다. 이번에는 ‘버어마’라는 나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린 전도인의 도움으로 진리를 받은 유식한 노인으로부터 편지가 왔는 데, 거기를 보면, 세상의 어른들은 여호와의 증인 어린이들만큼도 성경을 모른다는 것을 볼 수 있읍니다. “어느 비오는 날 어린 사람 두 명이 우리 집에 들어왔읍니다. 비를 피하려는 줄로만 생각하고 나는 그들을 안으로 초대하였읍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도인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다음 전도를 시작하였읍니다. 전도를 듣고 나서 나는 이들 젊은이들이 지구의 미래에 대하여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음을 알고 놀랐읍니다. 나는 지금 74세로서 14세 때부터 침례교인이며, 장로로서 존경을 받고 있고, 우리 부락의 여성 단체의 위원인데도, 성경 지식은 이 젊은이들의 것과 비교할 때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읍니다. 그들이 얼마의 잡지들과 전도지를 남겨 놓았기에 그것을 열심히 읽었읍니다. 읽은 내용은 나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을 다시 만나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었읍니다. 그들이 나를 다시 찾아왔을 때에 나는 놀랍고도 기뻤읍니다. 그 중 한 젊은이와 나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읍니다. 그 날 이후 나는 참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되어 대단한 행복감을 맛보고 있읍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읍니다. 오직 한가지 섭섭한 것은 진리를 좀 더 일찍 받지 못한 점입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도 창조주를 위하여 일을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나는 아직 남은 짧은 여생이나마 그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여기서도 그러한 젊은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좋은 소식을 말해 주는 일에 참여한다고 하여 그러한 사람들의 행동을 아무도 업신여길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7. 서인도 제도의 ‘자마이카’에 사는 어느 12세 소년이 어떻게 창조주를 잘 기억하였는지 설명하십시오.
7 서인도 제도의 ‘자마이카’에 사는 12살 난 어느 소년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성서 토론을 듣고 성경에서 “증거”와 “증인들”에 대하여 말하는 바에 감명을 받았읍니다. 그는 왕국회관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의 어머니가 싫어하였읍니다. 그 어머니는 그 집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였읍니다. 그는 순종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얼마 동안은 증인과의 접촉이란 단지 그의 숙부가 증인들에게서 받은 잡지를 가끔 보는 것 뿐이었읍니다. 어느 주말에 그는 자기 할머니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여호와의 증인이 그 집을 방문하였읍니다. 그는 그 증인의 연설을 듣고 소책자 한부를 받았읍니다. 그 책자를 읽고 또 읽고 하여 거의 암기하다시피 하였읍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와 할머니와 숙모에게 전도를 시작하였읍니다. 어머니의 반대는 누그러졌읍니다. 그의 숙모가 영국으로 이사한 다음에도 그는 편지로, 증인들과 접촉하여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배울 것을 격려하였읍니다. 숙모는 그렇게 해서 이미 하나님께 헌신하였읍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책자를 또 받게 되었고 공부를 하고 다시 집회를 참석하고 야외 봉사에서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였읍니다. 그는 지금 여호와의 임명된 전도인으로서 왕국의 권익을 위하여 정규적으로 봉사하고 있읍니다. 이 젊은이는 분명히 이해력을 가지고 귀기울여 들었으며, 자기의 친척들도 여호와의 종이 되도록 도움을 주었읍니다.
8. (ㄱ) 잠언 22:6의 충고는 무엇입니까? (ㄴ) ‘왙취 타워’ 협회 본부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어렸을 때의 교육이 유익함을 어떻게 나타냈읍니까?
8 모든 부모들은 관심을 가지고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배우도록 도와야 합니다. 자녀들은 실로 부모들에게 큰 축복이 되고 여호와의 이름에 웅대한 찬양이 될 수 있읍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전도 봉사를 하고자 갈망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자 갈망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굳게 기초를 둔다면 그들은 성인이 되더라도 그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지혜롭게 충고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6) ‘왙취 타워’ 협회 본부와 세계 각처에 있는 지부에는 거기에서 봉사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은 지금도 주의 사업에 봉사하는 특권을 계속 향유하고 있읍니다. 미국 ‘브루클린’에 소재하는 ‘왙취 타워’ 협회 ‘벧엘’에서 연령이 가장 많은 분 25명 중 20명은 그들이 18세에서 30세 사이에서 거기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들은 현재 연령이 65세에서 84세 사이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자기들의 직무와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청년의 때부터 창조주를 기억하였읍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편 필자의 다음과 같은 말과 같이 느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읍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 37:25)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계속 돌보셨으며,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즐거움을 누렸읍니다.
어린 세대를 도움
9. (ㄱ) 이제 부모들과 다른 성인들에게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ㄴ) 특히 현재에 와서는 반항과 부도덕을 피하는 일이 왜 더 어렵습니까?
9 그러므로 이제 오늘날의 부모들과 성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즉 우리의 자녀들과 일반 젊은이들을, 창조주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 그들의 연소함을 아무도 업신여길 수 없이 행동하도록 돕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현 세계를 한번 살펴 보면, 현 세계는 반역과 부도덕의 씨를 심는 제도임을 볼 수 있읍니다. 사실상,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악행으로 유혹하려는 고의적인 활동이 진행되고 있읍니다. 이것은 최근에 발생한 특수한 일이 아닙니다. 인류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 말려 들어간 이래 도덕적인 면에서 이 세상은 타락을 향해 줄달음질쳐 왔읍니다. 30년 대에 ‘히틀러’가 권좌에 오른 때쯤 해서는 이 타락의 추세가 현저하게 나타났읍니다. ‘나치’ 사상의 도움을 받아 이 타락 현상은 더욱 가속되었읍니다. ‘나치’ 친위대 요원들 중 핵심 당원들은 전통적인 모든 도덕관념을 탈피하기 위한 훈련 과정의 일환으로서 비정상적인 성 행위를 배웠다는 증거가 많이 있읍니다. ‘시. 에스. 루이스’의 소설 「그 무서운 힘」에 보면, 지성인이라도 일단 부자연스럽고 야수적인 행위를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하게 되면 상사로부터 어떠한 명령이나 지시를 받더라도 거절하지 않게 된다는 이유로 어느 젊은 지성인이 악의 기관으로부터 잔악한 행위를 소개받는 것을 볼 수 있읍니다.
10. 자녀들을 효과적으로 교육하려면 부모들은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10 폭력이 만연되고, 존경심이 결핍되고, 악행의 욕망이 가득한 이 세상에 대처할 수 있게 자녀들을 돕기 위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요구하는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부모들은 그들에게 정직하고 솔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위선적으로 행동하면서, “내 말은 본받아도 내 행동은 본받지 말라”는 식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가식적인 행위를 꿰뚫어 봅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로마 2:21, 22) 어린 사람들을 여호와의 훈계와 정신적 단속으로 잘 성장하도록 하고 창조주를 기억하도록 하려면 부모들과 다른 성인들이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본을 보여야 합니다.
11.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육할 때에 무엇을 경계해야 합니까?
11 부모들 가운데 자녀들을 대할 때에 빈정대는 말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읍니다. 아이들 자신이나 아이들의 지성을 멸시하여 창피를 느끼게 하는 경우도 있읍니다. 이것은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서적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말하였읍니다. (골로새 3:21) 그를 낳은 부모가 그를 항상 가혹하게 꾸짖어서 격노케 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한다면 아이들은 청년의 때에 여호와를 찬양하는 그러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온갖 응석과 소원을 다 들어 주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잠언에서 말하듯이 마땅이 가야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12. (ㄱ) 어린 사람들이 자기 부모에 대하여 토로하는 공통적인 불평은 흔히 무엇이며, 반대로 부모들의 불평은 무엇입니까? (ㄴ) 결국 어떤 결과에 이릅니까?
12 오늘날 젊은이들의 가장 많은 불평은 “우리 부모는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가족이 그러한 입장이거나,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입장이라면 너무 늦기 전에 지금 문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때가 늦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상호 이해해야 할 때입니다. 악한 사물의 제도는 거의 멸망에 가까왔읍니다. 당신 자신과 자녀가 살아남기 위하여 지금 상호 이해해야 합니다. 부모들 가운데는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하였는지 아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것같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너무 오랫 동안 기다렸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이 아주 넓어져버린 일이 흔히 있읍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떠한 친구를 사귀며,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읍니다. 아이들은 자기들 나름의 규범, 자기들 나름의 옷 모양, 자기들 나름의 생활 방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부모들은, 말하자면, 자기들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렇게 되어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13. 맹인을 인도하는 개를 훈련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사항은 무엇입니까? 자녀 교육과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13 부모 노릇을 잘 한다는 것은 전 시간을 바쳐야 할 일임에 틀림없읍니다. 자녀 교육에는 지름길이 없읍니다. 맹인을 인도하는 개를 훈련할 때에 조련사(調練師)는 무한한 참을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한 가지 한 가지를 전부 애정으로 가르쳐야지 절대로 잔인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개가 잘 배우는 때에는 언제나 그것을 승인하는 뜻으로 쓰다듬어 주거나, 친절한 말을 하거나 그가 특별히 좋아하는 먹이를 약간 주어서 보상을 한다고 합니다. 실수를 하면 절대로 그대로 두지 않고 즉시 시정을 한답니다. 그런데 성인들 가운데 자기 자녀를 교육하는 데보다도 짐승을 훈련시키는 데 더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하는 경우도 있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기 자녀를 교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수 없읍니다. 짐승을 훈련시키는 데 무한한 참을성이 요구된다면 자녀를 훈련시키는 데는 그만한 것을 기대할 수 없겠읍니까? 만일 동물도 잔인성이 아니라 애정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면 자기가 낳은 자녀에 대하여는 어떠한 결론을 내려야 마땅하겠읍니까? 만일 짐승도 승인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고 좋은 반응을 보인다면 자녀를 교육할 때에는 무엇을 기대해야 하겠읍니까? 그리고 짐승의 잘못도 반드시 시정을 요한다면 자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읍니까?
14. 부모들이 자녀들을 될대로 되라고 내버려 두어도 만사가 잘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왜 합리적이 아닙니까?
14 오늘의 어린이는 내일의 성인입니다. 만일 어린 사람이 자기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한다면, 그는 성인 시절에 인생의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찬양을 가져오고 부모들에게 영예를 돌리게 될 것입니다. 부모가 될대로 되라고 해도 만사가 잘 되어가리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험한 결과가 오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본이 되기 위하여는 부모들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인 회중 내의 다른 성인들로부터 본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연로한 사람들로부터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15. 어린 세대에게 도움이 되려면 성인 세대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5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어린 사람들이 인류의 창조주이며 위대한 보호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부름에 응해야 할 중요한 시기입니다. 전세계적으로 그 많은 어린 사람들이 반항정신을 나타내는 것을 볼 때에 지금이야말로, 진정으로 창조주를 기억하고자 하는 자들, 창조주를 더 잘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할 때입니다. 성인 세대는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하여 올바른 해답을 찾고 있는 어린 사람들을 돕는 일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성인 세대 자체가 창조주를 기억하고, 올바른 행실과 믿음과 정절로 행하여 그러한 의로운 발걸음을 따라오도록 어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고, 올바른 원칙을 저버린 자들과 같이 된다면 좋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장성한 사람들이 올바른 본을 보여야만 합니다. 속과 겉이 다르게 보이도록 하려는 위선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형성한 새로운 성품을 입어야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성품이 젊은 사람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성서의 올바른 원칙에 이끌리고 창조주를 기억하고자 하는 뜻을 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골로새 3:5-10.
16.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기억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6 ‘엘리후’, ‘요시야’, ‘예레미야’, ‘다니엘’ 및 ‘다니엘’의 세 친구를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청년의 때에 나타낸 올바른 행실을 머리 속에 그려 보십시오. 어린 예수와 그의 생활 방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의롭고 부모에게 복종하는 생활이었읍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 ‘프랑스’, ‘버어마’, ‘자마이카’ 등지에 사는 현 시대의 젊은이들이 나타낸 본들과 기타 세계 다른 지역에 사는 어린 사람들의 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고 있읍니다. 아마도 그들의 연소함을 업신여길 수 없을 정도로 행동하는 어린이들을 물론 당신도 많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당신은 성인의 도움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떤 어린이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17. 어린 사람들을 올바로 교육하고 교훈하고 좋은 본을 보인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올 것입니까?
17 그러면 이제, 나는 어린 사람들에게 더욱 도움이 되기 위하여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자문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이 부모라면, 당신은 자녀들이 틀림없이 여호와의 찬양자로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하여 염려와 주의를 더 한층 기울일 수 있읍니까? 만일 당신이 회중에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과 연합하는 사람이라면, 열성과 전심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본을 보임으로써 어린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를 자문해 보십시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발전할 여지는 있는 법입니다. 어린 사람들과 올바로 의사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그것을 계속한다면, 그리고 어린 사람들이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거기에 잘 순응한다면, 인류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커다란 찬양이 올라갈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노소가 함께 시편 필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찌어다 ···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시 148:1, 7,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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