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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목자 같은 통치자를 배척하는 결과
    신권 통치에 의하여 인류에게 회복될 낙원
    • 제18장

      하나님의 목자 같은 통치자를 배척하는 결과

      1. 여호와께서 자신보다 낮은 통치자들을 목자에 비기는 것이 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가장 위대하신 통치자께서는 자신을 자주 목자에 비기셨읍니다. 예를 들면 그 분은 이러한 아름다운 비유를 사용하여 자기의 포로된 백성을 친절하게 고토로 다시 인도하여 오시겠다고 예언하셨읍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사야 40:10, 11) 그러므로 그 분이 자신보다 낮은 지상의 통치자들을 목자에 비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2. 여호와께서는 탁월한 세속적 통치자들을 무엇에 비기셨으며, 비슷하게 ‘바벨론’에서 해방된 남은 자들을 무엇에 비기셨읍니까?

      2 그 분은 또한 탁월한 통치자들을 키 큰 나무에 비유하셨읍니다. 일례로 고대 ‘애굽’의 왕 ‘바로’는 위엄 있는 나무에 비유되어 있읍니다. (에스겔 31:1-18) 여호와께서 그의 메시야 즉 기름부음 받은 자를 사용하여 해방시키고 상징적 ‘바벨론’에서 인도하여 내어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고토로 돌아오게 하시는 포로된 남은 자들도 그 분은 나무에 비기십니다. 그 분이 그의 메시야에게 주시는 일을 임명하실 때 다음과 같이 그러한 비유를 사용하셨읍니다.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사야 61:1-3.

      3, 4. (ㄱ) ‘스가랴’는 “의의 나무”와 세상의 “나무”를 어떻게 대조합니까? (ㄴ) 스가랴 11:1-3에 의하면 왜 곡하는 일과 부르짖는 일이 있을 것입니까?

      3 그 상징적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은신” 것은 ‘스가랴’의 예언의 전술한 10장 3-12절에 언급되어 있읍니다. 그들과, 압제적인 세상의 높임 받는 상징적 나무들과는 참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읍니다! ‘스가랴’ 시대에는 웅장한 ‘레바논’ 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바논’의 백향목”과 다른 향기있는 상록수 숲이 덮여 있었읍니다.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숲이 진화할 수 없는 대화재로 소실되면 얼마나 슬프겠읍니까? 눈물도 나올 것입니다. 세상이 그처럼 곡하는 일이 앞으로 있을 것입니다. ‘스가랴’ 예언의 10장의 연속인 것처럼 그 예언서 11장은 곡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인용하면 이러합니다.

      4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찌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찌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려졌도다.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되었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스가랴 11:1-3.

      5. 상징적 나무의 그러한 조림지는 언제 소실될 것이며, 그 결과 누가 곡할 것입니까?

      5 ‘레바논’에는 방화 문이 없읍니다. 여호와께서 소멸하는 불로 장엄한 땅을 휩쓸 정하신 때가 오면 상징적 ‘레바논’의 문들은 불을 이끌어들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레바논’의 거대한 백향목들도 하나님께서 타오르게 하는 불길에 의하여 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함께 있는 잣나무도 곡할 필요가 있읍니다. 상수리 나무가 아무리 크고 육중해도 불에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요단’ 강과 ‘갈릴리’ 바다 동쪽에 있는 ‘바산’ 산간 지역의 무성한 삼림이 곡할 것입니다. 이 삼림도 인류에게 다가오는 최대의 환난인 “큰 환난” 중 세계적인 대화재에서 소실될 것입니다. 그 때에 목자 같은 통치자들은 곡할 것입니다.

      6. 왜 목자 같은 통치자들은 상징적 “나무들”이 불타는 것을 보고 곡할 것이며, ‘요단’의 매복처의 사자들 같이 부르짖을 것입니까?

      6 만일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성서 예언의 명백한 소식을 듣는다면 그러한 세상의 목자 같은 통치자들의 곡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읍니다. 그들은 ‘아마겟돈’ 전장에서의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에서 외관과 지위의 위엄을 빼앗길 것입니다. (계시 16:14-16) 그들은 ‘레바논’의 그 위엄 있는 나무와 ‘바산’의 육중한 나무로 상징되었읍니다. 그들은 또한 상징적으로 말하여 “갈기 있는 젊은 사자들”입니다. 갈기 있는 젊은 사자가 ‘요단’ 강변에 있는 자랑스런 수풀, 곧 이 사자들이 매복하던 곳이 불타는 것을 보고 부르짖듯이, 사자 같은 목자들 즉 통치자들은 그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방심하고 있는 대상물인 일반 대중에게 덤벼들던 매복처를 잃는 것을 보고 놀라서 부르짖을 것입니다.

      7. 말라기 4:1은 동일한 불같은 날을 어떻게 언급하며, 그 결과 목자 같은 통치자들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7 이 세상의 목자들로부터 당당한 위엄과 위신과 강력한 지위를 박탈할 불같은 소멸의 때는 예언자 ‘말라기’에 의하여서도 예언되었읍니다. 그는 ‘스가랴’보다 수십년 후의 예언자였읍니다. ‘말라기’(4:1)는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초목에 비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이들 정치적 목자들은 민주적 선거를 통하여 “백성으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았기 때문에, 혹은 어떤 왕가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혹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로부터 “왕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통치한다고 주장해 왔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신권적 목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위대하신 신권 통치자에 의해 그의 메시야를 통하여 임명된 통치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을 집행하실 불같은 날이 오면 그들의 모든 거짓 주장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들의 뿌리도 가지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목자

      8. 목자 같은 통치자는 어떻게 “양들”이 죽임을 당하도록 혹은 살해되도록 팔았으며, 비이기적인 목자를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8 정부 통치자들을 목자들에 비유하였으므로 신민, 즉 백성은 양 무리에 비유되어 있읍니다. 목자 같은 통치자들은 양 무리가 자기들에게 속한듯이 양들을 다루었으며 양같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오용할 수 있는 그 이기적인 사람들의 손에 서슴치 않고 그들을 팔아 넘겼읍니다. 그들은 사실상,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혹은 이용하기 위하여 값을 치루는 야심적인 사람들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도록 혹은 살해되도록 그들을 내놓았읍니다. 그 뿐 아니라 정치적 목자들은, 마침내 ‘아마겟돈’이라고 불리우는 세계 상태에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였읍니다. (계시 16:14-16; 19:11-21)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참으로 마음에 간직하고 양들을 착취하기 보다는 자신들을 기꺼이 희생시키는 진정한 “목자”는 없읍니까? 누가 그러한 목자를 일으켜서 양들 각자가 자신을 그의 보호와 인도 아래 두고 횡포한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읍니까? 그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9. 예언적 ‘드라마’를 연출할 때 예언자 ‘스가랴’는 어떠한 양떼를 먹이라는 말을 들었읍니까?

      9 이러한 사실을 묘사하기 위하여 비유 혹은 예언적 ‘드라마’를 연출하는 데 예언자 ‘스가랴’가 사용되었읍니다. 예언자 ‘스가랴’ 자신은 이러한 말로 설명합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 떼를 먹이라.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스가랴 11:4, 5.

      10. 상징적 “양 떼”는 누구이며, 그 양 떼의 소유자는 누구이며, 왜 ‘스가랴’는 “잡힐 양 떼”를 치도록 임명되었읍니까?

      10 “잡힐 양떼”의 상태는 참으로 가련하였읍니다! 당시 이 “양떼”는 ‘이스라엘’ 나라였읍니다. 「시편」 필자는 이 양 떼의 진정한 소유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시편」 필자는 그 분의 소유권을 인정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시 80:1; 95:7) 그분이 양 떼의 소유자이시므로 그분은 그들을 칠 충실한 목자를 임명할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분은 예언자 ‘스가랴’를 임명하심으로 이 일을 하셨읍니다. 이 새로운 지적 목자는 민주적으로 “백성으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은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는 신성 통치자 여호와에 의하여 신권적으로 임명을 받았읍니다. 이 천적 소유자는 이 “잡힐 양 떼” 가운데서 일부 개인들을 구원하실 것을 염두에 두셨읍니다. 그는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스가랴 9:16) 그 목적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위대하신 신권 통치자께서는 ‘스가랴’를 임명히여 양 떼를 치게 하셨읍니다.

      11. 그들을 파는 “목자들”은 어떠한 면으로 양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며, 그들은 어떻게 그들을 살육하는 데 공범으로 가담하였읍니까?

      11 ‘스가랴’는 개인적인 이득을 위하여 여호와의 양을 팔 권리가 있다고 느낀 목자 같은 통치자들과 달랐읍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재산을 축적하고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부유하게 한다고 생각하였읍니다. 이 불충한 목자 같은 통치자들은 무정하게도 양 떼를 판 후에 위선적으로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고 말하였읍니다. 양 같은 사람들이 의지하는 목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였읍니다. 그 목자들은 그들로부터 “양 떼”를 산 사람들이 야심적이고 이기적인 계획을 추구하여 그들을 살해할 것을 알았읍니다. 설상 가상으로 그러한 살해를 하고도 “죄가 없다”고 간주될 것입니다. 적어도 양 떼를 판 목자들은 산 자들을 죄 있다고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 살육에 공범으로 가담합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양들은 단지 “잡힐 양 떼”에 불과합니다.

      12. 그리스도교국의 사람들은 누구의 양들이라고 자처하며, 그들의 종교적 목자들은 신권적으로 임명됩니까?

      12 이 모든 것은 현 이십 세기의 그리스도교국 내에 존재하는 비슷한 상태를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양 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시편 95:7(위에 인용됨)을 자기들에게 적용시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시편 23:1의 말을 교회에서 제창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인들은 또한 지적 “목자들”을 의뢰합니다. 특히 종교적인 의미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자기들이 이들 양들의 목자이며 수백 교파의 목자들 각자에게 양 떼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 목자들은 ‘스가랴’와 같이 신권적으로 임명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각기 자기 교파 혹은 종파의 지배 계급으로부터, 혹은 주교나 기타 교회 고위 성직자 혹은 회중으로부터 임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교직자들은 ‘스가랴’ 시대의 목자들을 본받습니까?

      13. 그러한 교직자들은 살육을 당하도록 “양들”을 파는데 있어서 ‘스가랴’ 시대의 목자들을 어떻게 본받았읍니까?

      13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영적 지배를 받고 있는 교인들이 수억에 달하므로 교직자들이 할려고만 했다면 기원 1914년에 세계 대전을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용감하게 지적되어 왔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막지 않았읍니다.a 아무 항의도 하지 않고 그들은 그 때까지 인류 사상 가장 야수적인 4년이 넘는 전쟁에 양떼를 넘겨주었읍니다. 사실 그들은 엄격한 그리스도교를 고집하다가 박해를 받을까봐서, 그리고 군사적 정치적 목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양 떼를 판 것입니다. 이것은 제 2차 세계 대전 시에도 마찬가지였읍니다. 제 2차 대전은 제 1차 대전과 같이 그리스도교국 한 가운데서 시작되었읍니다. 이 두번째 세계 대전에서의 살육은 제 1차 대전시보다 더욱 심하였읍니다. 더구나 교직자들은 상업적 부당 이득자들과 정치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읍니다. 그들은 정치에 가담하였고 백성들을 착취하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엽관 운동자들에게 양 떼를 팔았읍니다.

      14. “목자들”은 누가 자기들을 부요케 하였다고 주장하며, 왜 양들을 산 자들은 양들을 착취하거나 살육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까?

      14 이러한 방법으로 재산을 획득함으로써 물질적 재산과, 이 세상의 지배층에게 얻고 있는 인기에 관해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축복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건하게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고 말합니다. (스가랴 11:5) 가련한 양들을 “산 자”들이 종교 교직자의 축복을 받고 있으므로 그들은 양들을 착취하거나 양들을 횡포하게 대량 학살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로부터 “죄가 없다”는 말을 들으며 좋은 신분을 가진 온전한 교인 대접을 계속 받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목자들”과 정치적 “목자들”은 그리스도교국의 “양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15. 불충한 목자들에게 착취를 당하여도 백성들이 그것을 좋아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압니까?

      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5:31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되었읍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좋게 여”겼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예언자 ‘스가랴’에 의하여 상징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목자, 충실한 목자의 인도를 따르지 않았음을 관찰함으로써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양들” 가운데의 장사치들, 매매자들로 그들을 인도하여 “살육”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에 대한 결과가 그들에게 임할 때 그들은 동정심을 받을 자격이 있읍니까?

      16. 동정심에 관한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스가랴 11:6에 어떻게 나와 있읍니까?

      16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스가랴’ 곧 신권적 목자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읍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스가랴 11:6.

      17. 여호와께서는 “잡힐 양 떼”를 어떠한 이기적이고 사랑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하실 것이며, 왜 그들이 부르짖어도 소용 없을 것입니까?

      17 그러므로 현대 그리스도교국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잡힐 양떼”에게 동정심을 더 이상 나타내지 않을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분은 사랑이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이 서로 약탈하고, (종교적 정치적) 목자들이 양들을, 임금 즉 왕 같은 목자들이 양들을, 그리고 양들이 서로를 약탈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결과는 단 한가지 즉 조직된 인간 사회의 전면 붕괴 상태가 될 것입니다. 사물의 제도가 더는 계속 단결해 나가지 못할 것이며 만사가 세상적 지혜에 따라 체계적으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말하여, 상호간의 무정부주의적이고 혼란한 가해자들은 어쩔 수없이 “땅을 칠” 것입니다. 즉 조직된 지적 상태를 분쇄할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이 아무리 큰 소리로, 아무리 오래 동안 부를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그 분이 임명하신 목자를 따르기를 거듭 거듭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품삯—은 삼십

      18. ‘스가랴’는 ‘이스라엘’ “양 떼”를 치도록 어떠한 임명을 받았으며, 그의 봉사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18 단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보낸 영적 “목자”를 어느 정도로 인식하고 있읍니까? 이것이 예언자 ‘스가랴’의 경험으로 우리를 위하여 예언되었읍니다. 대중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권적 임명에 의해서 그는 ‘이스라엘’ 양 떼를 ‘치도록’ 보냄을 받았읍니다. 백성들은 그를 얼마나 인식하였읍니까? 그의 봉사는 얼마나 높이 평가되었읍니까? 그는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알려 줍니다.

      19. ‘스가랴’는 몇개의 막대기를 취하였으며, 그는 한 달에 몇 목자를 끊었으며, 그는 자기가 백성들과의 언약을 폐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냈읍니까?

      19 “내가 이 잡힐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하며 하나는 연락[결합; 문자적으로는, 묶는 띠]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쌔 한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리라 하고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줄 안지라.”—스가랴 11:7-11.

      20. 막대기들의 용도는 무엇이었으며, ‘스가랴’는 막대기의 이름을 각각 어떻게 지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20 목자였던 ‘스가랴’는 자기 비품으로 두개의 막대기 즉 양들을 인도하는 막대기와 양들을 보호하는 막대기를 취하였읍니다. 목동 출신인 ‘다윗’은 시편 23:1-4에서 이것을 언급하였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한 막대기, 분명히 양들을 인도하는 막대기를 ‘스가랴’는 은총이라고 불렀읍니다. 이 말은 양들에게 나타낸 은총을 지적합니다. 다른 막대기, 분명히 양들을 공격하는 자를 격퇴시키는 막대기를 결합(문자적으로, 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묶는 띠)이라고 불렀읍니다. 여호와께서 ‘스가랴’를 임명하여 양들의 목자로 역할하게 한 것은 양들에 대한 ‘스가랴’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의 은총이었읍니다. 그러므로 막대기 하나는 은총이라고 명명되었읍니다.

      21. ‘스가랴’는 어떠한 양들을 치는 목자였으며, 이 양들은 어떠한 국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스가랴’는 목자로서 누구를 대표하였읍니까?

      21 그러나 여호와의 예언자가 양들을 치는 실제 목자가 되지는 않았읍니다. 그들은 당시 ‘유다’ 왕국의 남은 자들과 ‘에브라임’ 지파를 주축으로 하는 북쪽의 ‘이스라엘’ 열지파 왕국의 남은 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족속 즉 상징적 양들이었읍니다. 따라서 ‘스가랴’는 통치자 혹은 총독과 같이 ‘이스라엘’ 족속 전체를 영적으로 감독하도록 신권적 임명을 받았읍니다. 이 직책으로 그는 실제로 천적 목자이신 여호와를 대표하였읍니다.

      22. ‘스가랴’는 보수 없이 목자의 일을 해야 하였읍니까? 왜 그의 목자로서의 임무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계약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무엇이 증명합니까?

      22 예언자 ‘스가랴’는 아무 대가없이 양들을 치게 되어 있지 않았읍니다. 그는 자기의 봉사의 대가로 품삯을 받을 권리가 있었읍니다. 그는 자기의 봉사를 마치고 정당하게 보수를 요구할 수 있었읍니다. 그는 위대하신 신권 통치자 여호와에 의하여 임명된 목자였으므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그의 목자로서의 봉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봉사를 높이 평가함으로 인식을 나타내야 하였읍니다. 그러한 목자를 두도록 하는 특별한 계약 혹은 언약이 ‘이스라엘’ 족속과 맺어졌읍니까? 그러한 계약 혹은 언약이 있었다는 것을 ‘스가랴’의 말에서 엿볼 수 있읍니다. 그는 자신이 일을 그만둔다는 것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에 은총이라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스가랴 11:10) 여기 “모든 백성”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입니다.

      23. 여기서 말한 언약은 ‘이스라엘’과 맺은 누구의 언약이었으며, 왜 그렇습니까?

      23 그러면 그것은 누구의 “언약” 즉 엄숙한 계약이었읍니까? 그것은 ‘스가랴’의 개인적인 언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잡힐 양 떼를 먹이라”고 말씀하신 분은 여호와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스가랴 11:4)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대리 목자들이, 실제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양 떼를 살육 혹은 죽임을 당하도록 팔고 있었기 때문이었읍니다. 이것은 바로 여호와의 언약이 이 경우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 즉 그 분이 ‘이스라엘’ 나라의 목자로 예언자를 임명한 것이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의미하였읍니다. 이러한 기본적 사실과 일치하게 서독 ‘스투트가르트’의 ‘루돌프 키텔’에 의한 ‘비블리아 헤브라이카’(‘히브리’어 성서) 각주를 보면 “[내가] 세운 언약”이라고 하는 대신에 “여호와께서 맺으신 여호와의 언약”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읍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나의”와 “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의 대명사적 어미가, 실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약자이기 때문입니다.—「신세계역 성경」 1971년판 각주 참조.

      24. (ㄱ) ‘스가랴’는 얼마 동안 양떼를 쳤으며, 어떻게 압니까? (ㄴ) 그는 누구를 위하여 양떼를 쳤읍니까?

      24 그 당시에 다른 목자들도 있었읍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예언자가 그들의 활동 영역으로 침입하는 것을 분개하였던 것 같습니다. ‘스가랴’는 적어도 한 달 동안 목자로서 일하였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한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스가랴 11:8) 이 세 목자가 누구였는지는 설명이 없읍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그 지존하신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그들 가운데서 세 목자를 파면시킬 수 있었읍니다. 이 세 목자를 해직시킨 후에 그가 얼마 동안 더 목자의 일을 하였는지는 모릅니다. 그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양 떼를 조금이라도 돌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읍니다.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스가랴 11:7) ‘스가랴’가 이렇게 양들을 위하여 양 떼를 친 것은, “양 떼의 상인을 위하여 잡힐 양 떼를 치”는 것 보다 ‘스가랴’ 편에서 더 인정있는 일이었읍니다. (신세 난외주; 예루살렘; 개표; 미역; 로더함) 이러한 양들은 사실상 상인들에게 버려졌었읍니다. (모팻) 참으로 무정하였읍니다!

      25. (ㄱ) ‘스가랴’와 세 목자 사이에는 어떠한 감정이 발전되었읍니까? (ㄴ) 양떼와의 “언약”은 누구의 경우에 파기되었으며, 어떻게 압니까?

      25 ‘스가랴’는 가련한 양떼에 대하여 참을성 없지 않았읍니다. 그의 “영혼”, 존재자로서 그의 전부는, 태만한 세 목자에 대하여 참지 못하였읍니다. 그는 충실하고 인정있게 양떼를 쳤기 때문에 그 목자들은 ‘스가랴’를 싫어하였읍니다. 그는 그들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았읍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때에 ‘스가랴’가 자기의 일을 포기한 것은 그가 그들을 목자로서 해직시킨 후였읍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은 파기되었읍니다. 이렇게 된 것은 자기의 기분에 따른 것이 아니고 위대하신 목자의 인도와 결정에 의한 것이었음을 ‘스가랴’는 지적하였읍니다. 언약을 파기하는 것에 대한 상징적 행동으로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자른 후에 이렇게 그는 계속 말하였읍니다.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줄 안지라.”—스가랴 11:10, 11.

      26. 언약을 파하는 것은 ‘이스라엘’ 양떼의 복지와 연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읍니까?

      26 언약의 이러한 파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 떼에게 무엇을 의미하였읍니까? ‘스가랴’가 자기의 양치는 일을 계속하지 않은 데 대하여 말한 바와 같습니다.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리라.” (스가랴 11:9) 여호와께서 임명하신 목자가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았는 데 누가 양떼를 돌볼 것입니까? 양 떼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한 자들은 죽어가는 자들을 죽게 버려 둘 것이며 망하는 자들을 혹은 사라지는 자들을 버려진 상태에서 구출하고 돌보아 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사랑을 나타내기는 커녕 서로 싸우며 서로를 이기적으로 이용하기만 할 것입니다.

      27. 누가 동정심을 더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언약이 파기되었으며, 동정심을 보이기를 중단하는 결정이 효력을 발생할 때 어떠한 결과가 있을 것입니까?

      27 그러면 언약을 파한 것은 ‘스가랴’가 자비가 없었기 때문이었읍니까? 아닙니다. 언약이 파기된 이유는 동정심을 나타내는 여호와의 때가 한계에 이르러 끝났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이전에 이러한 말을 들었읍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찌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스가랴 11:6) 하나님의 임명하신 목자, 그 분이 동정심에서 그들에게 보낸 목자의 말을 청종하지 않은 백성들 때문에 참으로 끔찍한 무정부 상태가 초래되게 되어 있었읍니다! 이기주의의 격렬한 충돌이 빚어질 것이었읍니다! 견디기 어려운 압제가 있을 것입니다! 불안정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불법적이고 무질서한 자들의 파괴적인 활동으로 사물의 제도가 파멸에 이를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이 실시될 때 여호와의 양이라고 공언하는 양떼는 참으로 무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목자에게 정해진 품삯과 가치

      28. ‘스가랴’는 이 때에 누구를 상징하였으며, 그는 어떠한 임명을 받았으며, 그에 대한 어떠한 증거가 주어졌읍니까?

      28 ‘스가랴’는 예언적 상징 혹은 비유를 연출하고 있었읍니다. 그는 예언의 성취에 있어서 더 큰 목자를 상징하였읍니다. 이 분은 여호와의 메시야 즉 ‘다윗’ 왕의 후손이며 영원한 후사인 예수이십니다. (마태 1:1-6) 이 분이 나이 삼십세되기까지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로 일한 후에 ‘이스라엘’ 나라의 목자로 보냄을 받았읍니다. 그 땅의 정치적 종교적 통치자들은 그에게 목자의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읍니다. 목자로 그가 받은 임명은 ‘백성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 아니라 신권적 임명이었읍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임명을 받은 “목자들”보다 신분이 높았읍니다. 바로 그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그는 자기가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메시야가 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의 양 떼를 치는 목자의 역할을 하도록 임명받았다는 것을 지적하셨읍니다. 예언자였던 침례자 ‘요한’은 이 예수께서 보이는 표현에 의하여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것을 보았읍니다. 이 일은 ‘요한’이 여호와의 뜻에 따라 ‘요단’ 강에서 예수에게 침례를 베푼 직후에 있었읍니다.—요한 1:19-36.

      29. 예수께서는 비유 가운데서 상징적 “문지기”에 의하여 양들이 자기에게 인도되었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하셨읍니까?

      29 메시야 예수의 선구자인 침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양 우리의 “문지기” 노릇을 하였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유 가운데서 이것을 언급하셨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 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요한 10:1-11.

      30. (ㄱ) 예수께서는 목자로서의 자기의 임무를 누구에게 제한시키셨으며, 그는 어떻게 이 점을 지적하셨읍니까? (ㄴ) 어떻게 언제 ‘모세’는 이 예언자에 대하여 예언하였읍니까?

      30 그는 ‘이스라엘’의 양떼에게만 자기의 노력을 제한시키셨기 때문에 열 두 사도들을 내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라.]” (마태 10:5-7) 예수께서는 몹시 악귀들린 딸을 고쳐 달라는 ‘베니기아’ 여인의 부탁을 들어주시기 전에 그 여자에게 이렇게 상기시키셨읍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마태 15:22-24)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원전 1513년에 ‘시내’ 산에서 중보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집과 맺으신 하나님의 율법 언약과 일치하였읍니다. ‘모세’는 모든 종류의 악귀 숭배를 버리고 그 언약에 순종하라고 ‘이스라엘’인들에게 충고할 때 임종 직전에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신명 18:15) ‘모세’보다 더 큰 그 약속된 예언자가 바로 메시야 예수였읍니다.—신명 18:16-19; 사도 3:22, 23.

      31. 예수께서 양들에게 동정심을 보였다는 것이 기록으로 볼 때 어떻게 분명하며, 다른 목자들은 어떠하였읍니까?

      31 예수께서 참 메시야 목자로서 ‘이스라엘’ 양 떼에게 진정한 동정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태 9:35, 36) 우리는 목자였어야 하는 다른 자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저버리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읍니다.

      32. ‘스가랴’가 파면시킨 “세 목자”는 예수 시대의 누구를 상징하였읍니까?

      32 그러면 예언적 그림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된 지위에서 해직시키고 끊고 파면시킬 “세 목자”는 누구였읍니까? 예수의 생애의 기록을 보면 세 개인이 예언의 본을 성취시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예언자 ‘스가랴’가 해고시킨 세 목자는 예수 당시의 세 반열의 사람들을 상징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에서 정치적 및 종교적 세력을 가진 세 반열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1) ‘바리새’인들과 (2) ‘사두개’인들이었는데, ‘예루살렘’의 ‘유대’인의 ‘산헤드린’은 이 두 반열을 대표하였읍니다. 그 사법 기관은 종교적 기능은 물론, ‘로마’ 총독 하에서 어느 정도 정치적 기능도 수행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산헤드린’의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유대’인의 관원”이었읍니다. (요한 3:1, 2; 7:50-52)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도 ‘산헤드린’의 한 성원이었읍니다. (마태 27:57-60; 누가 23:50-53) ‘산헤드린’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완전히 분열되어 있었읍니다. (사도 23:1-9) 그러한 ‘유대’ 종파 외에도 (3) ‘헤롯’당 즉 ‘헤롯’의 추종자들이 있었읍니다.—마가 12:13.

      33. ‘스가랴’의 경우에서 상징된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들 “세 목자”들을 “싫어하”셨읍니까?

      33 목자 ‘스가랴’에 대한 “세 목자”의 감정과 비슷하게 이 세 집단은 메시야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즉시 “미워하였”읍니다. 그 세 집단은 ‘이스라엘’ 양떼가 그를 불신하도록 함께 모의하거나 협조하였읍니다. (마태 22:15-22; 마가 3:6) 예수께서는 실제로 “한달 동안에” 이들 세 적대 집단을 해직 즉 끊거나 파면시키지 않으셨읍니다. ‘스가랴’의 경우의 그 “달”은 예수의 경우에 짧은 기간을 상징할 것입니다. (스가랴 11:8) 예수께서는 그의 봉사 시초부터 이기적인 통치 집단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으셨읍니다. 즉 그들과 결코 협력하지 않으셨읍니다. 마침내 그의 봉사의 끝에 그의 마음은 그들을 “싫어하였”읍니다. 공개적으로 그 분은 정치와 교리에 관하여 이 세 집단 모두가 입을 다물게 하셨읍니다. (마태 22:15-45) 그 결과 마태 22:46의 기록과 같이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기원 33년 ‘니산’월 11일 화요일]부터는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었읍니다.

      34. (ㄱ)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을 비난할 때 어떠한 말로 절정에 이르셨읍니까? (ㄴ)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자르듯이 그는 ‘예루살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3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21:23-43; 마가 12:1-12; 누가 20:9-44) 그 분은 그러한 선언을 하신 직후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압제적인 목자들이며 종교적 위선자들이라고 공개적으로 규탄하셨읍니다. 그는 이러한 말씀으로 비난의 절정에 이르셨읍니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가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인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의 악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게헨나’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마태 23:1-33, 새번역; 마가 12:38-40; 누가 20:45-47) 그리고 그는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자르듯이 이렇게 부언하셨읍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태 23:37, 38.

      35. 그러한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율법 언약에 대하여 그들에게 무엇을 선언하고 계셨으며, 그 때에 예수를 바라보던 “가련한 양들”은 무엇을 알았읍니까?

      35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을 버리신 것은 그분이 중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나라와 맺으신 율법 언약을 파하고 계셨음을 의미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스가랴’에 의하여 전영된 목자 예수께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이 잠시 후에 폐해진다고 선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를 보면서 그의 말씀을 듣던 ‘이스라엘’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줄” 알았읍니다.—스가랴 11:11.

      36.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무엇을 의미하였으며, 여호와의 목자 같은 통치자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온 무서운 결과는 무엇이었읍니까?

      36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불순종하는 선민에게 더 이상 은총을 보이지 않으실 것을 의미하였읍니다. 그는 “‘유다’ 땅”의 거민들에게 “다시는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실 것이었읍니다. ‘유다’ 땅은 침공을 당하고 기원 70-73년의 시련기에 ‘예루살렘’과 성전을 포함하여 그 땅의 도시들과 요새가 멸망을 당하는 등 무서운 참화를 입게 되어 있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원 33년 ‘니산’월 11일 같은 날에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대하여 예언하시면서 이 비극을 예언하셨읍니다. (마태 24:1-22, 신세; 마가 13:1-20; 누가 21:5-24) 이 국가적인 재난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모세’의 율법 언약이 폐하여 졌다는 고통스러운 증거였읍니다. 하나님의 목자 같은 통치자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온 무서운 결과였읍니다!

      37. ‘스가랴’의 목자로서의 일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나타났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때 그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는 무엇을 잘랐읍니까?

      37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임명하신 목자를 얼마나 높이 평가해야 하였읍니까? 예언자 ‘스가랴’는 자신의 경험으로 그것을 설명하고 그리하여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을 전영하였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가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내가 또 연락[결합, 신세]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스가랴 11:12-14.

      38. ‘스가랴’는 그 값으로 어떠한 평가를 받은 것이었으며,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그 보수를 언급하셨읍니까?

      38 “은 삼십” 즉 은 삼십 ‘세겔’은 ‘모세’의 율법 언약에 의하면 노예의 몸값이었읍니다. (출애굽 21:32) 예언자 ‘스가랴’ 혹은 그의 목자로서의 봉사의 가치는 노예 하나의 가치에 불과하였읍니까? ‘스가랴’는 천적 목자 여호와의 임명을 받았으므로 그의 임명받은 대표자 ‘스가랴’에 대한 평가는 목자이신 여호와에 대한 평가와 같았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읍니다. (만일 ‘스가랴’가 여기서 삽입구로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있었다면!) 여호와께서 그것을 노예의 몸값으로 말씀하지 않고 “준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 표현은 분명히 만족의 뜻으로 사용되지 않고 풍자적으로 혹은 비꼬는 말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인식이 부족하였다는 뜻이었읍니다.

      39. ‘스가랴’가 결합(혹은 묶는 띠)이라는 막대기를 자른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나라에 대하여 무엇을 의미하였읍니까?

      39 여호와를 대표한 목자의 가치를 그처럼 떨어뜨렸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양 떼에 연합의 기초가 없어졌읍니다. 한 목자, 한 양 떼의 경우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 공격이 있을 때에 막아주는 연합에 의한 보호력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가 결합(혹은 묶는 띠)이라는 막대기를 이 때에 자른 것은 시기에 잘 맞았읍니다. 이것은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열 지파 왕국 간의 “형제간의 의”의 기초가 제거될 것을 설명하기 위한 행동이었읍니다. 열 두 지파의 나라가 ‘솔로몬’ 왕의 사후 기원전 997년에 두 왕국 즉 ‘유다’와 ‘이스라엘’로 갈라진 것은 ‘다윗’ 왕계에서 나온 하나의 메시야 왕을 갖는 문제 때문이었읍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 언약을 폐하는 것은 한 때 그의 선민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의 은총의 끝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나라를 일치 단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가 끝났음을 의미하였읍니다. 형제간의 의를 조성해 주는 영적 띠가 제거되었으며 혈연의 띠만으로는 그들을 형제로 함께 단합시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40. (ㄱ) 여호와의 목자를 이처럼 과소 평가하는 것이 ‘스가랴’에 의하여 전영된 분의 경우에는 왜 더욱 심각하였읍니까? (ㄴ) 목자같은 통치자는 신민으로부터 어떠한 보수를 받아야 합니까?

      40 하나님의 마련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그것을 배척하면 항상 슬픈 결과만 있읍니다. 예언자 ‘스가랴’의 경우에 위대하신 목자 여호와를 과소 평가하는 일이 있었지만 ‘스가랴’에 의하여 전영된 메시야 목자의 경우에는 훨씬 더 하였읍니다. 그 목자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그 분을 보내어 모든 양 같은 인간들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버리도록 즉 자기의 완전한 인간 생명을 버리도록 하셨읍니다. (요한 10:14-18) 메시야 예수께서는 그의 천적 아버지를 위하여 목자 역할을 하고 계셨으므로 그는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보수를 요구하실 권리를 행사하실 수도 있었읍니다. 정치적 목자가 신민에게 요구하는 삯 혹은 보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신민이 물질로나 충성스러운 봉사로 자기와 자기의 정부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목자 아래 있는 임명된 관리들은 목자가 그의 모든 신민으로부터 그러한 삯 혹은 보수를 받도록 감독해야 할 것입니다. 신권적으로 임명된 왕 ‘솔로몬’이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잠언 24:21.

      41. (ㄱ) ‘스가랴’는 자기가 목자로 일한 데 대한 품삯을 사람들에게 강요하였읍니까? (ㄴ) ‘유대’인 대표자들은 목자 예수에게 언제 품삯을 지불할 수 있었으며, 그러나 그들은 언제 그를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까?

      41 예수께서는 거의 삼년 반 동안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 대한 영적 목자로 충실하게 봉사하셨읍니다. 그의 목자로서의 일이 끝나갈 무렵, 지상에서 인간 육체를 가진 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그는 예언자 ‘스가랴’와 같이 임금 혹은 보수를 요구하기 위하여 목자 같은 대표자에게 직접 가시지는 않으셨읍니다. ‘스가랴’는 당시 사람들에게 그들이 품삯을 주기를 원하지 않으면 주지 않아도 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스가랴 11:12) 예수의 경우에 그가 말하자면 ‘예루살렘’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개선하실 때에 ‘이스라엘’의 목자 같은 대표자들은 그를 여호와께서 보내시고 임명하신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품삯을 지불할 수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읍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사흘 뒤(기원 33년 ‘니산’월 12일)에 영적 목자인 그를 돈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어떻게? 읽어 봅시다.

      42. 예수에 대한 얼마의 가치가 ‘가룟 유다’에게 약정되었으며, 그 일이 언제 있었읍니까?

      42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때[‘니산’월 12일]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무교절의 첫 날[‘니산’월 14일]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마태 26:14-17.

      43. 예수께서는 자신이 미리 안 배반자의 배반 행위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나타내셨으며, 언제 팔리셨읍니까?

      43 그 종교적 목자들은 ‘가룟 유다’에게 은 삼십 ‘세겔’을 주었읍니다. (마가 14:10, 11; 누가 22:3-6) 예수께서는 자신이 배반당하고 또 배반자가 ‘가룟 유다’인 것을 미리 아셨읍니다. (마태 17:22, 23; 20:17-19; 26:1, 2, 24, 25) 예수께서는 배반 당하여 팔리는 일을 전혀 막지 않으셨읍니다. (마태 26:45-57) 사실 그는 배반자를 재촉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배반당하게 하셨읍니다. 그는 유월절 식사시에 ‘가룟 유다’를 지적하여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내보내셨읍니다. 배반자는 즉시 나가서 종교적 목자들과의 약속을 이행하였읍니다. (요한 13:21-30) 그 유월절날 밤 몇시간 후에 예수께서는 배반당하셨고 ‘가룟 유다’는 돈을 받았읍니다. (요한 18:1-14) 메시야 목자이신 예수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읍니다. 그 값은 은 삼십 ‘세겔’, ‘모세’의 율법 언약으로 말하면 노예의 몸값이었읍니다! 참으로 준가였읍니다!

      44, 45. (ㄱ) ‘스가랴’는 품삯으로 받은 돈을 어떻게 하였읍니까? (ㄴ)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 돈을 가지고 어떻게 하였읍니까?

      44 ‘가룟 유다’는 이 값을 받았읍니다. 그는 열두 사도의 경리였읍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그들의 돈 궤에 넣지 않았읍니다. 자기가 보관하였읍니다! 얼마 동안 그렇게 하였읍니다! (요한 12:4-6) 고대 예언자 ‘스가랴’의 경우를 보면 그는 품삯으로 자기에게 지불된 은 삼십 ‘세겔’을 갖지 않았읍니다. 그 돈은 사실 그의 주인이신 여호와께 속한 것이었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스가랴’는 그렇게 하였읍니다. (스가랴 11:12, 13) 그의 행동은 어떤 것의 예고였읍니다. ‘스가랴’가 ‘가룟 유다’를 전영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스가랴’와 꼭 같이 ‘유다’는 은 삼십 ‘세겔’을 갖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가 그 돈을 가지고 행한 일, 좀더 정확하게 말하여, 예수를 판 돈을 그가 처리한 결과가 다음과 같이 보고 되어 있읍니다.

      45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 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마태 27:1-10.

      46. (ㄱ) 사도 ‘베드로’는 후에 ‘가룟 유다’와 은 삼십 ‘세겔’의 처리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였읍니까? (ㄴ) 제사장들은 그 은 삼십 ‘세겔’이 대표한 피에 대하여 어떠한 모순을 드러냈읍니까?

      46 제사장들이 토기장이의 밭을 산 돈이 ‘가룟 유다’에게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유다’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던 ‘유대’인들의 혹은 개종자들의 매장지를 ‘가룟 유다’가 샀다고 말하였읍니다. ‘베드로’는 ‘유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 회중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높은 곳에서 목을 매었는데]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사도 1:18, 19) 제사장들은 ‘유다’를 대신하여 ‘유다’가 은 삼십 ‘세겔’을 던진 성소에서 돈을 가져다가 토기장이의 밭을 파는 사람에게 전달하였을 뿐입니다. 제사장들은 “피값”을 성전 금고에 넣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들은 그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그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생각하였읍니다.

      47. (ㄱ) 사도 ‘마태’는 어떻게 ‘예레미야’라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스가랴’를 염두에 둘 수 있었읍니까? (ㄴ) ‘아람’어판은 어떻게 난해한 점을 없이 하였읍니까?

      47 마태복음 27:9, 10을 보면 사도 ‘마태’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이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예언자라고 알려진 성경의 한 부분을 ‘마태’가 언급하고 있었고 ‘마태’ 시대에 그 부분이 ‘예레미야’의 예언으로 시작되었다면 ‘예레미야’라는 이름b은 ‘스가랴’서를 포함한 기타 모든 예언서를 포함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예레미야’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사실은 ‘스가랴’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대 동방 사본으로 비추어 본 성서」(페시타)에는 이름이 생략되고 이러한 말로 되어 있읍니다. “그리하여 예언자가 기록한 말 즉 ‘이스라엘’ 자손들과 약정된 고가 곧 은 삼십을 내가 가지고 주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치렀다는 말이 성취되었다.” (‘조지 엠. 람사’, 1957년판) ‘제임스 머독’이 ‘페시토’역에서 영어로 번역한 ‘시리아’어 신약(1893년 초판)도 예언자의 이름을 생략하고 이와 비슷하게 번역하였읍니다.c

      48. (ㄱ) ‘스가랴’의 예언을 ‘마태’가 의역한 바에 의하면 삼십 ‘세겔’은 어떻게 처리되었읍니까? (ㄴ) ‘스가랴’의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은 그가 이 경우에 누구를 상징하였음을 확증합니까?

      48 마태 27:9, 10이 스가랴 11:13과 일치하고 ‘예레미야’의 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므로 ‘마태’의 인용문은 스가랴 11:13의 의역임이 분명합니다. ‘마태’가 스가랴 11:13을 그와 같이 의역한 의도는 분명히 스가랴 11:13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다시 말하면, ‘저희’ 즉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인 제사장들이 성전 마루에서 은 삼십 ‘세겔’을 가져다가 개인인 ‘가룟 유다’를 대리하는 제사장들이 “토기 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다는 점을 증명하는데 있었읍니다. 스가랴 11:13은 ‘스가랴’가 여호와의 성전 금고에 던진 은 삼십 ‘세겔’이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언 그대로 돈이 처리되었음을 분명히 밝히어 예언이 변경된 환경에 적중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었읍니다.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은 목자 ‘스가랴’가, 배반당하고 매우 싼 값에 팔린 메시야 목자 예수를 상징하였음을 확증하여 줍니다.

      49. ‘스가랴’가 “결합”이라는 막대기를 자른 일은 언제 성취되었으며,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었읍니까?

      49 그 후에 ‘스가랴’가 “결합” 혹은 “묶는 띠”라고 불리우는 둘째 막대기를 자른 것과 마찬가지로 은 삼십 ‘세겔’에 예수를 판 일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모세’의 율법 언약을 말소하신 직접 원인이 되었읍니다. 부활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어전에 나타나 그에게 자신의 완전한 인간 희생의 가치를 바치셨을 때 ‘모세’의 율법 언약은 도말되었고 약속된 새 언약이 영적 ‘이스라엘’과 정식으로 맺어졌읍니다. (에베소 2:13-16; 골로새 2:14-17; 히브리 9:24-28) 이리하여 중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새 언약을 거부한 할례받은 육적 ‘유대’인들은 거짓 ‘유대’인 그리스도들에게 넘겨졌읍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신권적 연합의 띠가 없었으며 그들은 많은 종파로 분열되었고 기원 70년에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멸망시킬 때 재난을 당하였읍니다.

      50. 그리스도교국은 메시야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값싸게 생각하였으며, 그리스도교국은 어떻게 언약을 폐한 죄가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얻지 못하고 그 결과로 어떻게 될 것입니까?

      50 고대 ‘이스라엘’과 같이, 수백가지 교파가 있는 그리스도교국은 메시야 목자이신 하늘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자답게 돌보아 주는 것을 배척하였읍니다. 어떻게 배척하였읍니까? 물론 그들은 경건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행위로 배척하였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은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들을 배반함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하였읍니다. 그들은 그의 제자들을 박해하였고 심지어는 많은 경우에 죽이기까지 하였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은 천적 메시야 목자가 그리스도교국에게 보낸 영적 목자들의 봉사를 거절하였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이 그들에게 한 행위는 그분에게 한 것과 다름 없읍니다. (마태 25:40, 45; 마가 9:37; 요한 15:20, 21)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국은 그의 목자로서의 봉사를 값싸게 생각하고 배척하였읍니다. 이로 보건대 그리스도교국은 새 언약이 자기들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새 언약과 일치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국은 자신의 말로 그 새 언약을 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즐기지 못하며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교국이 연합을 유지하도록 보호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국도 모든 거짓 그리스도들에게 넘겨졌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은 기원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상징된 다가오는 “큰 환난”까지 계속 분열 상태를 유지할 것입니다.—마태 24:21, 22.

      “우매한 목자”

      51. (ㄱ) 그리스도교국이 메시야 목자를 버리자 백성은 누구의 인도를 받게 되었읍니까? (ㄴ) 여호와께서 마련하신 메시야 목자를 받아들이는 대신에 그리스도교국은 무슨 기구를 택하였읍니까?

      51 여호와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참 제사장보들을, 성서의 하나님을 숭배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배척할 때 그 배척자들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목자들의 인도를 받지 않을 수 없읍니다. (베드로 전 5:1-4) 여호와께서는 이기적인 정치적 목자들을 비난하고 양같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말로 안심시켜 주셨읍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겔 34:23, 24) 고대 ‘다윗’ 왕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약속된 목자이십니다. 기원 1919년에 그리스도교국은 그의 목자로서의 보호의 가치를 무시하고 그와 그의 왕국을 배척하였읍니다. 그 대신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해 인간이 만든 국제 기구인 국제 연맹을 택하였읍니다. 국제 연맹의 후신인 국제 연합은 1972년 현재 132개 회원국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은 이에 대한 결과를 거두었읍니다.

      52. 그리스도교국은 메시야 목자를 배척하고 그의 인도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결과를 거두었읍니까?

      52 어떠한 결과를 거두었읍니까? 이기적이고 자기를 높이는 정치적 목자들과 그들의 종교적 동료들을 열매로 거두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스가랴’를 통하여 그러한 결과를 예시하셨읍니다. 즉 “우매한 목자”로 전영된 세상적 목자들, 어리석고 무능하고 무익한 지도자 반열로 예시하셨읍니다. 기원 1919년 이래의 그러한 지도자들을 수십년 동안 경험하였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언적으로 묘사하신 바로 그러한 목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그의 예언을 ‘스가랴’는 이렇게 기록하였읍니다.

      53. ‘스가랴’는 누구의 도구들을 취하라는 말을 들었으며, 일으켜진 목자는 어떻게 어리석게 행동할 것이며, 그는 무슨 일을 당할 것입니까?

      5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찌니라.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화 있을 찐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스가랴 11:15-17.

      54. 오늘날 나라들의 상태는 사람들이 어떠한 종류의 “목자”들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며, 왜 그러한 인도자들이 일어나는 것이 허락되었읍니까?

      54 오늘날 사람들은, 이교국의 사람들은 물론, 그리스도교국의 사람들도, 없어진 양들, 다치고 치료받지 못한 양들, 굶주리고 세계 기근의 위협을 받는 양들 같지 않습니까? 부패하고 부정 이득을 취하는 기생충 같은 무가치한 목자들, 양들의 “굽”까지 삼키는 혹은 양들의 “굽”이 찢어지도록 험한 길로 인도하는 목자들이 먹이는 양들 같지 않습니까? 소위 그리스도교국과 이교국에 속한 나라들의 상태는 그 질문에 웅변적인 대답을 하여 줍니다. “양들”은 얼마나 더 연명할 수 있읍니까?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의 메시야 목자를 거절한 결과입니다. 그들이 그 길을 택하였으므로 그 분은 무가치하고 해롭고 무익한 목자 반열이 그리스도교국 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것을 묵인하셨읍니다.

      55. ‘스가랴’는 무익한 목자의 도구를 취하였지만 왜 그는 여호와께서 그러한 무가치한 목자에 대하여 선언하신 화를 당하지 않았읍니까?

      55 예언자 ‘스가랴’는 우리 시대의 그러한 “우매한 목자” 반열과 기원 제1세기의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시대의 그러한 반열이 일어날 것을 예로써 설명하라는 말을 들었읍니다. ‘스가랴’ 자신이 그러한 무익하고 어리석은 목자가 되지는 않았읍니다. 단지 그는 목자의 도구를 취하고 그러한 목자의 존재와 그릇된 행위를 상징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따라서 ‘스가랴’는 여호와께서 그러한 타락하고 태만하고 무가치하고 무정한 목자에게 선언하신 화를 당하지 않았읍니다.

      56. 어떻게 “칼”이 그러한 “못된 목자” 반열의 “팔”과 “우편 눈”에 임하였읍니까?

      56 온 인류 세계는 인간이 선택하고 임명한 그러한 정치적 목자로부터 아무런 구제 혹은 구출을 기대할 수 없읍니다. 여호와의 권위를 집행하는 칼이 그러한 목자 같은 통치자들을 향하고 있읍니다. 그러한 목자들 자신이 오랫 동안 집행권의 “칼”을 지녀 왔읍니다. (로마 13:4; 사도 12:1, 2)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권능과 능력의 “팔”은 이미 처지고 있읍니다. 그들의 “우편 눈”, 구제책을 분별하고 정치적 감독을 하는데 필요한 그들의 가장 좋은 눈은 계속 흐려지고 있읍니다. 그러나 세계에 다가오는 “큰 환난”에서 여호와께서는 그 “우매한 목자” 반열을 눈과 팔을 포함해서 모두 멸하실 것입니다.

      [각주]

      a 「월간 성서 연구생」 6권 7호 참조. 동지는 “‘랍비’ ‘와이스’가 전쟁에 대한 책임을 교회에 돌리다”라는 제목하에 다음 내용을 게재하였다. “‘교회와 유대교 회당이 신도들에 대한 통솔력을 유지하지 못한 것이 현재의 전쟁의 원인이었다’고 ‘카네기 홀’의 무료 회당에서 ‘랍비’ ‘스테펜 에스. 와이스’가 어제 말하였다. ‘랍비’ ‘와이스’는 오늘날 교회의 태도가 ‘유약하고 머뭇거리고 망서리고 소심하다’고 묘사하였다. 그는 국가가 교회를 정복하였고 교회는 여론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추종해 왔다고 부언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전쟁의 악신을 보좌에 앉혔다. 교회는 자신들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 조직에 부속되고 옳든지 그르든지 자기네 나라와 통치자들을 방위하는 데 만족한다. 교회는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고 억압에 눌려 순종한다. 교회는 마치, 더 이상 물지도 못하는, 늙고 이 빠진 벙어리 개와 같다.

      “‘우리 대부분은 사회주의 세력이 이와 같은 전쟁을 피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몹시 실망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와 회교 사원과 유대교 회당이 전쟁을 막아줄 것으로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 중 아무도 그들에게서 그러한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만일 영국이 현 전쟁에 가담하는 것을 영국 국교회의 한 지도자가 반대하고 나선다면 그가 어떤 일을 당할 것인지를 안다.

      “‘프랜즈 조셉’은 매 부활절에 열 두명의 발을 씻는 무의미한 의식을 행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의 행동으로 만족한다. ‘러시아’ 황제가 일요일에는 교회의 머리였으며 주간의 다른 날에는 군대의 머리였다.

      “‘그리고 국가들이 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 국가들은 교회와 한번도 상의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이 야전 위생대와 병참부에 의지하듯이 교회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교회에 의지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먼저 가정에서 그리스도교를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 ‘랍비’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라임’과 기타 장소에 있는 대성당이 파괴되었다는 보도를 읽고 우리의 마음이 상하였지만 이 성당들은 오래 전에 파괴되었고 이제 무너진 것은 바깥 벽 뿐이다.

      “‘전쟁의 신들, 돈의 신들 및 권력의 신들이 여러 세기를 두고 이러한 대건축물들을 파괴시켜 왔다’”—「뉴욕 아메리칸」지 1914년 10월 12일자 4면.

      b ‘시리아’ 번역판(‘필록세니안 하르클레이안’, 칠세기 개역판)은 ‘예레미야’라는 이름 대신 ‘스가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c 마태 복음 27:9, 10에서 기원 4세기의 「시내 산 사본」은 “그들”이라는 말 대신에 “나”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시리아’어판 ‘필록세니안 하르클레이안’과 ‘페시타’와 ‘시내’ 책자본도 이와 같다. 이것은 스가랴 11:13의 “내가 ···”라는 말과 일치한다.

  • 왕국이 국제적 공격을 이겨내다
    신권 통치에 의하여 인류에게 회복될 낙원
    • 제19장

      왕국이 국제적 공격을 이겨내다

      1. 과학자들도 통제할 수 없는 어떠한 힘에 의하여 우주 공간 밖에서 온 선언이 우리에게 전달되었으며, 어떠한 수단에 의하여 우리 대부분이 읽을 수 있게 되었읍니까?

      해저 전신, 전보,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 국제적 통신 수단을 이용하여 목자 같은 통치자들의 선언은 땅 끝까지 전달되었읍니다. 그들의 선언이 중요한 것같기 때문에 그와 같이 널리 보도되었읍니다. 그러나 현 이십세기의 과학자들이 이용할 수 없는 힘에 의하여 가장 중요한 선언이 우주 공간보다 더 먼 곳에서 이 땅에 전달되었읍니다. 이 선언을 그와 같이 높이 평가하는 것도 부족합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의 선언이며 그것은 그의 보이지 않는 활동력 즉 성령을 통하여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선언은 수백가지 언어로 인쇄된 수억부의 성서를 통하여 지상 인구의 대다수가 읽을 수 있게 되었읍니다. 창조주의 이름이 들어 있는 이 선언 혹은 경고를 읽으면서 그것이 국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 판단하여 봅시다.

      2. 그 선언 혹은 경고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모든 국민에게 무엇과 같게 하실 것이며, 그는 그의 백성을, 공격하는 나라들에게 무엇과 같게 하실 것입니까?

      2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 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찌라.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

      3, 4. 할례받은 선천적 ‘유대’인들은 자기네 나라의 역사에 적용되는 스가랴 12:1-6을 왜 설명할 수 없었읍니까?

      3 스가랴 12:1-6의 그 말은 오늘날 할례받은 선천적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그들은 그 예언의 성취를, 기원전 6세기(기원전 518년경) 이 “경고”의 때와 기원 70년 ‘로마’ 군단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 사이의 고대 역사에서 찾으려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을 만하게 예언을 실증하지 못하였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왜냐 하면 “경고”의 성취는 선천적인 육적 ‘이스라엘’과 지적 ‘예루살렘’보다 높은 체제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서 그 절정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적 ‘예루살렘’과 성전이 기원 70년에 멸망되었을 때에 아직도 남은 성전이 있었읍니다. 물론 그것은 지적 성전이 아니었읍니다. 그것은 히브리 12:22-24의 필자가 말하는 성전이었읍니다. 그는 지적 ‘예루살렘’이 기원 70년에 파괴되기 약 9년전 즉 기원 61년경에 기록하였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히브리’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회중]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5. 그리스도인이 된 ‘히브리’인들이 기원 61년경까지 이른 ‘장자들의 회중’은 무엇이었으며, 이 ‘회중’은 무슨 도시를 가지고 있었읍니까?

      5 그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른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회중’은 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까지 속해 있던 선천적이고 육적인 ‘이스라엘’ 회중이 아니었읍니다. 그 회중은 영적 ‘이스라엘’ 회중이었으며, 중보 예수께서 여호와의 첫 순교자 ‘아벨’의 피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말하는 “뿌린 피”로 유효하게 하신 “새 언약”에 들어온 회중입니다. 이러한 사실과 완전히 조화되게 이 영적 ‘이스라엘’은 더 높은 ‘예루살렘’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을 가졌읍니다.

      6. 여호와의 왕도로서의 지적 ‘예루살렘’은 무엇을 상징하였으며, 그것이 상징한 것은 무엇으로 옮겨졌읍니까?

      6 지적 ‘예루살렘’은 ‘다윗’ 왕가의 역대 왕들의 보좌가 있던 곳이었읍니다. 그 보좌를 차지한 왕은 ‘이스라엘’의 보이지 않는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대표하였으므로 그 보좌를 “여호와의 보좌”라고 불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 왕과 그의 영원한 후사가 보좌에 앉을 영원한 왕국을 위한 언약을 맺으셨으므로 왕도로서의 ‘예루살렘’은 ‘다윗’ 왕의 후손의 손에 있는 왕국에 대한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를 대표하였읍니다. (역대 상 29:23, 신세; 사무엘 하 7:14-16)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원한 후사이셨읍니다. 따라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어전에 나타나 그의 우편에 앉으셨을 때 그의 통치권과, 왕국에 대한 그의 상실되지 않는 권리는 그에게 있었읍니다. 따라서 왕국의 권리는 지적 ‘예루살렘’에서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기원 33년에 옮겨졌읍니다.—사도 2:29-36; 시 110:1, 2; 히브리 10:12, 13.

      7. 기원전 607년에 지적 ‘예루살렘’에 있던 ‘다윗’ 왕국이 전복된 것을 고려할 때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스가랴 12:2)이 되게 하신 것은 언제였읍니까?

      7 기원전 607년에 ‘바벨론’인들은 지적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왕국을 전복하였으며 그 왕국은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를 때까지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다가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왕국을 그에게 주실 것이었읍니다. (에스겔 21:25-27) “마땅히 얻을 자”가 언제 임하여 위대하신 신권 통치자 여호와로부터 왕국을 받았읍니까? 그 때는 이방인의 때가 끝난 1914년 10월 4/5일(‘티쉬리’월 15일)경이었읍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의 ‘예루살렘’”에 즉위시키셨읍니다. 또한 그때에 시편 110:1, 2에 있는 대로 여호와께서는 하늘의 ‘시온’ 산에서 그리스도의 권능의 홀을 보내시면서 “가서 네 원수들 가운데서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신세) 그러한 행동으로 그때에 하늘과 땅의 위대하신 창조주께서는 자기의 경고를 이행하시고 ‘예루살렘’ 즉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하셨읍니다.—스가랴 12:1, 2; 계시 11:15.

      8. (ㄱ)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왕도로 삼았을 때, ‘블레셋’인들은 무엇을 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결과는 어떠하였읍니까? (ㄴ) 언제 어떻게 이방인의 때 끝에 그리스도께서 즉위하신 사실에 대한 통고가 전해지기 시작하였읍니까?

      8 그보다 이천 구백 팔십 삼년 전에 ‘다윗’ 왕은 지적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도시를 수도로 삼았읍니다. 그 말을 듣고 그의 원한을 품은 적들인 ‘블레셋’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와서 ‘다윗’을 권좌에서 몰아내려고 시도하였읍니다. 두번에 걸쳐 기적으로 패배한 공격자들은 비틀거리며 ‘블레셋’으로 돌아갔읍니다. (사무엘 하 5:17-25; 시 2:1-6) 그러면 “하늘의 ‘예루살렘’”과 새로 즉위한 왕 예수 그리스도 즉 ‘다윗’의 영원한 후사의 경우에는 어떠합니까? 일찌기 기원 1876년 이후로 기원 1914년까지 수십년 동안 세상 나라와 백성들은 이방인의 때가 그 해에 끝날 것이라는 통고를 받아왔읍니다a. 헌신하고 침례받은 그리스도인들, 이를 테면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회장이 된 ‘찰스 테이즈 럿셀’은 특히 그리스도교국의 나라들에게 이러한 통고를 하는데 사용되었읍니다. 이들 자칭 그리스도교 나라들은 통고를 일축하고 1914년 7월 28일에 제1차 세계 대전을 시작하였읍니다.

      9.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전쟁에 참가한 나라들은 어떻게 마시는 “잔” 주위에 모여들듯이 “하늘의 ‘예루살렘’” 주위에 모여 즐거움을 얻었읍니까?

      9 이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참전국들은 계엄령과 전시의 흥분과 국가주의적 열정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통고 활동을 하고 여호와의 건설된 메시야 왕국 편에 선 헌신하고 침례받고 영으로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열국은 마시는 잔 주위에 모여들듯이 그들 주위에 모여 하나님의 왕국의 대표자들을 반대함으로 유쾌하고 흥겹게 마시려고 하였읍니다. 이들 헌신하고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회중’의 일부였으므로 그러한 나라들은 사실상 마시는 “잔”에 모이듯이 “하늘의 ‘예루살렘’” 주위로 모였읍니다. 한 동안 그러한 나라들은 계시록 11:7-10에 예언된 큰 상쾌함을 경험하였읍니다.

      10, 11. 제 1차 세계 대전 후에 “하늘의 ‘예루살렘’”은 어떻게 열국의 포위 공격을 받았으며, 열국은 어떻게 “‘유다’에 까지” 공격을 하였읍니까?

      10 1918년 11월 11일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세상 나라들은 “하늘의 ‘예루살렘’”에 건설된 하나님의 설립된 메시야 왕국에 대한 적의를 버리지 않았읍니다. 그 후 몇년 동안에 그들은 하나님의 천적 왕국 대신 국제 연맹을 채택하였읍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상징적으로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였읍니다. 이 공격은, “하늘의 ‘예루살렘’”의 메시야 왕국을 선포하는 ‘장자들의 회중’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에 대한 열국의 반대와 박해의 형태로 나타났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제자들은 그 분을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로 지지하였으므로 그들은 영적 ‘유대’인들 즉 영적으로 ‘유다’ 지파의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러므로 천적 ‘예루살렘’과 함께 이들 영적 ‘유대’인들은 왕국을 반대하는 나라들의 포위 공격을 받았읍니다. 스가랴 12:2의 예언과 같았읍니다.

      11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비틀거리게 하는 큰 술잔, 신세]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 까지 미치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취하게 하는 큰 술잔이 되게 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유다’의 도시들은 ‘예루살렘’과 함께 포위 공격을 받을 것이다.” (미역)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무서운 장소가 되게 할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과 아울러 ‘유다’에 대한 포위 공격이 있을 것이다.” (람사)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틀거리게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이 포위 공격을 당할 때에 ‘유다’도 또한 공격을 받을 것이다.”—영.

      12. 영적 ‘유대’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나타냈던 정신과 어떻게 다른 정신을 나타냈으며, 그렇게 하여 어떠한 사도적 입장을 취하였읍니까?

      12 기원 1919년에 세상 나라들은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한 세계 기구로 국제 연맹을 채택하였지만 영적 ‘유다’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은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공전의 규모로 선포하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 때부터 세상 나라들은 지상에 있는 이 영적 ‘유다’에 대한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읍니다. 즉 이들 영적 ‘유대’인들의 저항과 결의를 압도하려고 장기적이고 꾸준한 노력을 하였읍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그들의 일반적인 행위와 판이하게 이들 영적 ‘유대’인들은 열국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읍니다.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임명을 이전보다 더욱 분명히 분별하고 사도들과 같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는 태도를 취하였읍니다. (사도 5:29)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이러한 행동을 고수하였읍니다. 그들은 국제적인 투쟁에 대하여 절대적인 그리스도인 중립을 고수하였읍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1939년 11월 1일에 공개적으로 선언하였읍니다. 열국은 여호와의 이들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엄격한 중립적 태도를 보고 매우 놀랐읍니다.—1939년 11월 1일호 「파수대 여호와의 천국 선포」(영문) 323-333면 참조.

      13. 열국은 어떠한 행동으로 인하여 “심하게 상”하였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중립을 위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비타협적인 입장, 그들의 인권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법원에 대한 용감한 의뢰, 여호와의 메시야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활동의 꾸준한 확장, 이 모든 일들은 나라들을 비틀거리게 하였읍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대표된 왕국의 권리는 모든 나라에게 “무거운 돌”이 되었읍니다. 간섭 행위를 하는 나라들은 세계 지배를 위한 자기들의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계획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왕국 전파자들을 방해함으로써 그 “돌”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다가 “크게 상”하였읍니다. 그들에게는 만족이 없으며 그들은 굴욕적인 실패로 말미암아 심한 통증을 경험하고 있읍니다. 그들의 명성은 손상되었읍니다. 그들은 전파되어야 할 왕국의 권리를 제거하거나 무효화할 수 없으며, 그것을 전세계적으로 전파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는 남은 자들을 잠잠하게 할 수도 없읍니다.

      14. 여호와께서는 적진의 말들과 말탄자들에 대한 경고를 이미 어떻게 성취시켜 오셨으며, 그는 누구를 눈여겨 보시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4 이미 상징적인 방법으로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경고에 따라 행동하여 오셨읍니다. 그 분은 영적 ‘유대’인들 즉 왕국 대사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들을 당황케 하셨읍니다. 전쟁용 차량을 탄 자들은, 독재자들이 좌절감에 사로잡혀 격분하는 것같이 미친 행동을 하게 되었읍니다. 그들의 전략가들은 시력을 잃은 것과 같이 더 이상 그들의 행동의 향방을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영적 “‘유다’ 족속”의 전략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눈여겨 보시고 계속 살피십니다.

      15. 영적 ‘유대’ 두목들은 어떻게 좌로나 우로나 “나무 가운데 화로 같”으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습니까?

      15 영적인 “‘유다’의 두목들” 즉 “‘유다’ 족속”의 통치체와 영적 ‘유대’인들의 회중의 감독자들에 대하여 말한다면, 여호와께서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왕국의 지상의 권익을 위하여 불같은 열심으로 이들을 채우십니다. 그들은 “나무가운데 화로 같”이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이 사물을 영적으로 불붙게 합니다. 즉 중대한 종교적 토론과 논란의 불을 질러 많은 목자 같은 통치자들의 영향력을 소멸함으로써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자들’로 폭로되고 그들의 “양들” 가운데서 다수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전향하게 합니다. 좌우로 이러한 일이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이들 “‘유다’의 두목들”의 불같은 활동과 적극성의 결과로 영적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토지에 계속 남아 있으며 그 토지의 거민들이 계속 늘어갑니다. 그들은 “하늘의 ‘예루살렘’”의 대의를 버리지 않습니다.

      16. “‘유다’의 두목들”은 포위 공격을 받으면서 이 일을 수행할 힘이 어떠한 근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 근원은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사용합니까?

      16 이들 “‘유다’의 두목들”과 그들의 동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통치하는 왕국의 명분을 적대하여 포위 공격하는 자들 가운데서 영적으로 이러한 황폐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것은 자기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인식을 나타내어, 전세계의 포위 공격 가운데서 이러한 일을 하는 힘이 초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근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시인합니다. 그것은 “하늘의 ‘예루살렘’”으로부터 옵니다. 즉위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곳에서 통치하시며 그의 원수들 가운데서 정복해 오셨읍니다. 그는 거룩한 천사들과 교제해 오셨읍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히브리 1:13, 14; 마태 25:31)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른,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 즉 지상에서의 생애를 마치고 죽었다가 부활되어 하늘에서의 생명과 불멸성을 얻은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용감하고 담대하고 정력적인 “‘유다’의 두목들”과 지상의 동료 ‘유대’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힘을 부여할 수 있읍니다. (계시 2:26-29) 하늘의 ‘예루살렘’으로부터 오는 이 모든 도움의 배후에 계신 분이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공격하는 나라들을 위하여 멸망이 예비됨

      17, 18. (ㄱ) 왜 열국은 그들의 장기적인 공격을 승리로 이끌 수 없을 것입니까? (ㄴ) 여호와의 경고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나라들에게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17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그리고 온 땅에 있는 왕국 대사들에 대한 그들의 장기적이고 꾸준한 공격을 승리로 이끌 수가 없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들 영적 ‘유대’인들에게 왕국을 대항하는 공격을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인내력을 주시지만 그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공격자들을 약하게 하고 마침내 멸절시키실 것입니다. 이것이 스가랴 12:7-9에 있는 하나님의 “경고”의 다음 말에 있는 의미입니다.

      18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혹은, ‘하나님 같은 자들’]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19. (ㄱ) “유다 장막”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암시합니까? (ㄴ)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영광”은 왜 “‘유다’보다 더 하지” 못할 것입니까?

      19 “‘유다’ 장막”이라는 표현은 영적 ‘유대’인들이 도시들의 보호 성벽 뒤에 물러나 있지 않고 성벽 없는 일선에 나가, 보좌가 있는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대표된 메시야 왕국의 권익을 두려움없이 수호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공격자들이 도시를 직접 치러 오기 전에 도시 주위에 둘러 방어하는 모든 “‘유다’ 장막”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이치적입니다. 그 때문에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 하면 이들은 공격의 첫 목표이자 직접적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로 그들은 왕국의 소재지인 “하늘의 ‘예루살렘’”의 거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한 여호와의 구원을 자랑할 것입니다. 이 “‘유다’ 장막”은 ‘다윗’의 왕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대표된 “‘다윗’의 집”과 같이 그리고 “‘예루살렘’ 거민” 즉 메시야 왕국의 부활 받은 공동 후사들, 그리스도의 이미 부활된 영광스럽게 된 제자들과 같이 여호와의 구원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로마 8:15-17; 디모데 후 2:11, 12.

      20. (ㄱ)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예루살렘’ 거민”을 ‘다윗’과 같게 하셨으며, ‘다윗’의 집을 여호와의 사자 같게 하셨읍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여 오셨읍니까?

      20 ‘예루살렘’의 거민의 경우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투사 ‘다윗’ 왕처럼 그들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하여 주신다면 그는 일선에 있는 그들의 “장막”에 머물고 있는 영적 ‘유대’인에게도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영적 ‘유대’인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이 지금까지 만든 역사적 기록은 그분이 이렇게 해오셨음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하시어 약속을 온전히 이행하실 것입니다. 또한 관련된 더 큰 책임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집”을 위하여 더욱 많은 일을 해오셨읍니다. 그 “집”은 ‘다윗’의 영원한 후사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게 만드셨읍니다. 여호와 자신과 같게 하신 것이 아니라, 기원전 1513년에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낸 여호와의 “사자” 같게 하셨읍니다. (출애굽 14:19; 23:20, 23)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그의 통치하는 왕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세상 신”인 ‘사단’ 마귀를 하늘에서 추방하고 더 이상 하늘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권능을 주심으로 “하늘의 ‘예루살렘’”의 거민들을 이미 보호하여 오셨읍니다.—계시 12:7-13; 고린도 후 4:4.

      21. (ㄱ) 여호와의 사자와 같이 행동하는 ‘다윗’의 집과 일치하게 그 “집”의 대표자의 한가지 적절한 칭호는 무엇입니까? (ㄴ) 적들은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공격을 얼마나 계속할 것이며, 왜 그 때까지 공격할 것입니까?

      21 ‘다윗’의 하나님 같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그들의 “장막”에 있는 영적 ‘유대’인들을 위하여 여호와의 사자같이 행동하십니다. 적절하게도 그 분의 칭호 중 하나는 ‘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사야 9:6, 7, 신세 참조) 그러면 이 ‘사단’ 마귀의 지지를 받는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어떻게 그에 대항하여 그리고 “‘유다’ 장막”—그 앞에서 그는 여호와의 사자로 봉사함—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겠읍니까? 환경에 억눌려 메시야 왕국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세계 지배를 열망하는 나머지 그들은 공격을 개시하고는 패배나 실패를 인정하거나 퇴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공격을 계속할 것입니다!

      22. (ㄱ) 여호와께서는 열국을 멸하려 하실 때에 왜 멀리 살필 필요가 없을 것입니까? (ㄴ) 그는 언제 그들을 멸하실 것입니까?

      22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을 치러오는 열국을 ··· 멸”하실 그 날에 멀리까지 살필 필요가 있을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메시야 왕국을 꾸준히 반대하고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한 인간이 만든 국제 기구를 지지하며 또한 영적 ‘유대’인들을 괴롭게 하고 박해하기 때문에 열국은 자신들에 대한 유죄의 기록을 늘려가고 있읍니다. 최고의 심판자께서는 그들에게 철저히 문책할 문제를 잘 아십니다. 그들이 “‘유다’ 장막”을 최종적으로 공격하여 상징적으로 ‘아마겟돈’이라는 세계적 상태에 이를 때까지 그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기록을 온전히 채울 것입니다.

      23. 여호와께서는 열국을 어떻게 하실 것이며,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실 것이며, 그 결과 누구에게 “영광”이 있을 것입니까?

      23 그 기록을 조사하고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치러오는 나라들을 멸하시는 것이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통치하는 왕 즉 “하나님 같”고 “여호와의 사자” 같은 분을 통하여 그 분은 그 나라들을 아주 없애실 것입니다. (계시 16:13-16)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장막”은 그 일로 인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왕이 된 ‘찔린’ 자

      24, 25. (ㄱ) 멸절된 나라들에 대하여 애통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누구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이 현저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까?

      24 만군의 여호와께서 ‘아마겟돈’에서의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에서 멸하시는 그 주제넘은 나라들에 대하여는 애통하고 통곡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그 영광스러운 날에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의 거민의 영광”으로 인도한 한 슬픈 사건에 대해서는 애통하고 통곡하는 일이 있었읍니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 여호와의 “경고”를 더 살펴 보면 그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25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간구의 영, 신세]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하[리라.]”—스가랴 12:10-12.

      26. 그들이 찌른 자가 누구인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어느 사도의 기록을 조사할 수 있으며, 그는 어떻게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여 줍니까?

      26 “그들이 그 찌른 바 그”b, 그들이 바라볼 그는 누구입니까? 인간들의 구구한 추측에 말려 들지 말고 이 예언적 “경고”를 말씀하신 분이 제공하시는 영감받은 대답을 직접 알아 봅시다. 기원 33년 ‘니산’월 14일 금요일에 형주에 달린 두 명의 행악자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시는 것을 목격한 ‘갈릴리’ 사람 ‘요한’이 쓴 기록에서 이러한 영감받은 말씀을 읽을 수 있읍니다.

      이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형주]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한 19:31-37.

      27. ‘요한’은 그의 기록에서 어떠한 다른 방법으로 그 ‘찔린’ 자와 예수를 관련시켰읍니까?

      27 이 사도 ‘요한’은 또 다른 기록을 통하여 ‘찌르는 일’과 이 예수 그리스도를 관련시켰읍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인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시 1:5-7.

      28. 의사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이 아니라 후에 ‘찔리셨음’을 어떻게 압니까?

      28 그리하여 예수께서 옆구리를 찔린 일은 그가 숨을 거두기 전이 아니라 거두신지 얼마 후에 있었읍니다. 그에 관하여 의사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였읍니다.

      때가 제 육시[12시 정오]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구시[오후 3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서 이 일을 보니라.—누가 23:44-49; 또한 마가 15:33-41.

      29. ‘도마’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그 찔린 옆구리는 그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되었다는 증거에 어떻게 포함되었읍니까?

      29 예수 그리스도의 찔린 옆구리는 또한 예수께서 죽은 자로부터 후에 부활되었다는 증거에 포함된 중요한 요소였읍니다. 예수께서 부활되신 날(기원 33년 ‘니산’월 16일 일요일)에 그를 보지 못한 사도 ‘도마’는 육체로 물질화한 예수를 그 날 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 하겠노라.” 일주일 후에 예수께서는 형주에 달리실 때와 같은 몸, 같은 육체로 다시 물질화하여 나타나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 20:24-27.

      30. (ㄱ) 예수의 제자들이 애통한 것은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보다 어떻게 더 심각하였읍니까? (ㄴ) “은총과 간구의 영”이 그들에게 부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슬퍼하며 애통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이 필요하였읍니까?

      30 스가랴 12:10-14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은 지적 ‘예루살렘’에서 애통하고 통곡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독생자”,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분의 사망에 대하여 애도하였읍니다. (요한 3:16; 골로새 1:15; 계시 3:14, 신세) 그러므로 그분에 대하여 애도하는 것은 이전의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보다 더 심각하였읍니다. (스가랴 12:11; 또한 열왕 하 23:28-30; 역대 하 35:20-25 비교) 여호와께서는 그 충실한 제자들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 주셨읍니다. 그 제자들은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읍니다. (누가 24:21)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는 그러한 애통과 통곡에 단순한 슬픔 이상을 나타내야 하였읍니다. 찔린자에 대한 믿음과 그의 희생의 죽음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 혹은 믿음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은총은 슬퍼하는 자에게 미칠 수 있으며 믿음으로 인한 그의 간구는 응답될 것입니다.

      31, 32. (ㄱ) “‘다윗’의 집”에 속한 사람도 “은총과 간구의 영”을 받기 위하여는 찔린 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ㄴ) “‘예루살렘’ 거민”일지라도 “은총과 간구의 영”을 받으려면 애통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것입니까?

      31 그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의 영”을 받기에 합당함을 증명하기 위하여는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속하여 있다고 해도 그가 단지 육적인 혈통에 의하여 그 왕가에 속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메시야의 공동 후사가 되어 천적 왕국에서 메시야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보증이 결코 되지 못합니다.

      32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예루살렘’ 거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다윗’ 왕의 지적 수도에 있다는 것이 그가 “하늘의 ‘예루살렘’”에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결코 보증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메시야 예수의 사망과 찔림에 대한 공동책임이 자기에게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슬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애통하고 통곡하는 데는 메시야께서 우리 죄에 대하여 돌아가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이 포함되어야 하며, 그러한 죄에 대한 회개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메시야의 죽음은 애통하는 자에게 유익할 것이며 그는 “은총과 간구의 영”을 받을 것입니다.

      33. (ㄱ) 이 법칙은 “‘레위’의 족속”이나 “‘시므이’의 족속”에 속한 사람에게도 적용되었읍니까? (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나단’의 족속”에 속하였어도 그러하였읍니까?

      33 이것은 혈육으로 “‘레위’의 족속”에 속한 사람에게도 적용될 것입니다. 그가 ‘레위’인으로 동물 희생의 제단이 있는 ‘예루살렘’의 지적 성전에서 봉사하였을지라도 역시 찔린 자의 완전한 인간 희생을 필요로 하였읍니다. “‘레위’의 족속”은 또한 “‘시므이’의 족속”을 포함하였읍니다. (출애굽 6:16, 17; 민수 3:17-21) 그러므로 이들도 죄있는 인간들을 대속할 수 있는 희생을 필요로 하였읍니다. “‘나단’의 족속”은 ‘다윗’ 왕가에 속하였읍니다. (사무엘 하 5:13, 14) 예수 그리스도의 지적 어머니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 ‘나단’의 계통에서 태어났읍니다. (누가 3:23-31) 이 가문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이 혈육으로 왕족이라는 관련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해야 하였고 그가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시키고 천적 왕국에 합당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찔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였읍니다.

      34. (ㄱ) 가문이나 성에 관계없이 누구의 어떠한 관점으로 볼 때, 각자는 찔린 자에 대하여 애통하고 통곡해야 합니까? (ㄴ) 오늘날 우리는 “은총과 간구의 영”을 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34 가문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메시야께서 죄를 위하여 대속 희생으로 돌아가시지 않으면 안되는 필요성에 대하여 회개의 슬픔을 가지고 애통하고 통곡할 필요가 있었읍니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그렇게 해야 하였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언은 반복적으로 “그 아내들이 따로” 애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가랴 12:12-14)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각자는 회개와 믿음을 가지고 메시야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메시야 왕국의 적들이 그를 ‘찌르도록’ 허락하셨읍니다. 우리가 그를 바라 본다면 우리는 “은총과 간구의 영”을 받을 것입니다.

      35. 메시야의 ‘찔림’에 대한 애통과 통곡의 눈물은 언제 거두어집니까?

      35 우리가 또한 메시야 예수께서 여호와의 우주 주권을 입증하기 위하여 ‘찔렸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의 애통과 통곡의 눈물은 거두어집니다. 그 분이 마침내 ‘찔리신’ 것은 그 분이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께 대한 완전한 성실을 죽기까지 유지하였음을 증명하였읍니다. 그는 하늘에서 메시야 왕으로 즉위하는 영예로운 상을 받았읍니다.

      [각주]

      a “일곱 때는 주후 1914년에 끝날 것이다.” 이 말은 “이방인의 때: 언제 끝나는가?”라는 ‘찰스 티. 럿셀’이 쓴 특별 기사에 있는 말이다. 이 기사는 “성서 검토자”라는 월간 잡지 21권 1호-통호 313호 27면에 게재되었다. 발행 일자는 1876년 10월이었고 우편 주소는 ‘뉴욕 브루클린 힉스 스트리트’ 72번지였으며 편집 겸 발행인은 ‘조지 스토어스’였다. 중환으로 인하여 그의 잡지 “성서 검토자”가 폐간된다는 것이 1880년 1월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이라는 잡지 1880년 1월호에 “조지 스토어스 형제”라는 제목하에 발표되었고 이 잡지의 일부 지면을 그가 사용하도록 제공되었다. 그가 쓴 기사인 “선거의 교리”가 그가 죽은지 얼마 후에 1884년 6월호 「시온의 파수대」에 게재되었다.

      b 1971년판 「신세계역 성경」은 [찌른] “바 그”라는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았다: ‘E. 카우취’와 ‘A. E. 카울리’ 공편 ‘제세니우스’의 「헤브라이어 문법」(1949년 재판)은 이 어귀에 대하여 446면 138절 (2) e에 속한 각주 1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스가랴 12:10에서도 우리는 아마 난해한 ‘엘라이 에드 아셔’ 대신에 ‘엘-아셔’라고 읽어야 할 것이며, 그 어귀를 이러한 부류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두개의 ‘히브리’어 사본에 기록된 원문은 ‘엘라이 에드 아셔’(“바 나에게”)이지만 난외주에는 ‘엘라이우 에드 아셔’(“바 그에게 [혹은 자에게]”)로 되어 있다. 「칠십인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의 이유로 나에게”; ‘벌게이트’역, “바 나에게”; ‘시리아’역, “바 그를 위한 나에게”; ‘데오도션’역, “바 그에게.” ‘에밀 F. 카우취’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 참조: “바 그 자에게”; 또한 요한 19:37 참조.

  • 깨끗해진 땅에 보존된 “삼분지 일”
    신권 통치에 의하여 인류에게 회복될 낙원
    • 제20장

      깨끗해진 땅에 보존된 “삼분지 일”

      1. 그리스도교국은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바라는 땅을 산출하는 데 실패하였읍니까? 오늘날 우리는 훌륭한 낙원을 가져오실 누구의 약속을 의뢰해야 합니까?

      오늘날 정중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의로운 사람들은 거민들이 깨끗한 생활을 하는 땅, 종교적 위선이나 사기나 속임수가 없는 땅을 원합니다. 그리스도교국은 수백가지의 상이한 소위 그리스도교들을 시험하여 보았지만 그러한 땅을 산출하지 못하였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이 앞으로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가망도 전혀 없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은 자신이 악과 종교적 더러움을 깨끗이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견본이 될만한 땅을 한 평도 내 보일 수가 없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은 수억의 교인들에게 영적 낙원을 어디에서도 조성하여 주지 못하였읍니다. 만일 하늘과 땅의 창조주께서 그리스도교국에 의존하여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종교가 있는 깨끗해진 땅을 가져오셔야 한다면 그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신권 조직을 통하여 그러한 땅을 마련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겠다는 그의 약속은 여전히 확실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올바른 정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읍니다.

      2. “찔린 자”에 대한 애통에 관하여 말한 후에 여호와께서는 죄와 더러움을 씻기 위하여 무엇이 열린다고 말씀하셨읍니까?

      2 하나님께서 이러한 놀라운 일을 하실 자신의 목적을 설명하신 바를 검토하여 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읍니다. 그 분은 자신의 “경고” 가운데서 자기의 땅의 거민들의 희망이 걸려 있었던 메시야의 찔림에 대하여 그 땅에서 있을 애통과 통곡에 관한 말씀을 마치셨읍니다. (스가랴 12:1, 10-14) 그 직후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스가랴 13:1.

      3. 그리스도교국이 죄와 더러움을 씻도록 열린 그 “샘”을 이용하였는지의 여부를 무엇이 증명합니까?

      3 오늘날 “죄와 더러움”이 그리스도교국까지 포함하여 온 땅에 만연되어 있읍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교국은 “그 날에” 열리게 되어 있는 그 “샘”을 이용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날에” 살고 있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서 “날”이라는 단어는 이십사 시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은총받은 “날”에 살고 있는지의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관련된 모든 환경을 고려함으로써 알 수 있읍니다.

      4. (ㄱ) 누가 그 “샘”을 여시며, 그 샘은 어떠한 목적을 가진 물을 냅니까? (ㄴ)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전에 속하지 못하는 더러운 것 몇가지는 무엇입니까?

      4 그 “날”은 “샘”으로 뚜렷이 특징지어집니다. 이 샘은 여호와께서 여셨읍니다. 왜냐 하면 그 분 자신이 그의 인자한 마련을 통하여 그 샘을 파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샘이 맑은 물로 가득차도록 하십니다. 이 물의 언명된 목적은 무엇입니까? 갈증을 풀기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이 씻는 것이 목적입니다. 물이 있는 “샘”은 “죄와 더러움”을 씻도록 열려졌읍니다. 하나님께 더러운 것 가운데 하나가 레위기 20:21에 묘사되어 있읍니다. “누구든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무자하리라.” 더러운 혹은 불결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있을 수 없읍니다. (역대 하 29:3-5) 더러운 것이라면, 그것에 은과 금이 있을지라도 버려야 합니다. (에스겔 7:19) 하나님 앞에서 난폭하게 행동하면 “불결한 자”가 됩니다. (애가 1:8) 시체를 만져서 자신을 더럽힌 ‘이스라엘’인은 부정하다고 간주되었으며 그러한 사람이 물로 깨끗이 씻기 전에는 아무도 그 부정한 사람을 만지지 말아야 하였읍니다. 희생된 붉은 암소의 재를 섞은 물로 씻기 전에 그 부정한 사람을 만지지 말아야 하였읍니다.—민수 19:2-22.

      5. 그 땅의 거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소유하기 전에 그 땅을 어떻게 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왜 그 곳에 회복된 남은 자들을 위하여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을 여셨읍니까?

      5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기 전에 그 땅은 더럽고 불결하고 불순하였읍니다.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기 때문이었읍니다. (에스라 9:1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 동안 그 땅을 차지한 후 그들도 그 땅을 더럽고 불결하고 불순하게 만들어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읍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렵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에스겔 36:16, 17; 레위 15:19-3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의 회복된 남은 자들의 땅이 다시 더러운 땅이 되는 것이나 계속 더러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죄 혹은 더러운 것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샘”을 열어 주셨읍니다.

      6. (ㄱ) 이 일이 ‘바벨론’에서의 회복 이후에 있었으므로 왜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깨끗이 씻기 위한 그러한 “샘”이 필요하였읍니까? (ㄴ) 실제로 “샘”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어떻게 그것을 이용할 수 있었읍니까?

      6 그러므로 “샘”은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렸읍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벨론’에서 해방되었고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의 남은 자들이었음을 망각하지 맙시다. 따라서 그들 중에 “‘다윗’의 족속”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의 왕좌에 앉을 ‘다윗’ 왕 계통의 왕이 없었읍니다. ‘바벨론’에서 온 ‘스룹바벨’은 “‘다윗’의 족속”에 속한 사람이었으나 ‘바사’의 ‘고레스’ 왕의 임명에 의하여 ‘유다’의 총독이 되었을 뿐입니다. (스가랴 4:6-10; 마태 1:6-13) 그들이 “‘다윗’의 족속”의 왕을 가지려면 앞으로 메시야가 와야 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당연하였읍니다. 그들에게 그 “샘”이 열리는 것이 필요하였읍니다. 사실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은 국민 전체를 대표하였읍니다. 깨끗이 씻는 물이 있는 그 “샘”이 온 국민에게 필요하였으며 그들은 연례 축제일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이 하나님의 마련을 이용할 수 있었읍니다.

      7. 그 “샘”은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언제 열렸으며, 시초에 어떠한 결과가 있었읍니까?

      7 그 “샘”은 언제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과 이들이 대표한 온 국민에게 열렸읍니까? 그 때는 그들이 기원 33년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형주 위에 달고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한 분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된 후였읍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하늘에 올라가 여호와 하나님의 어전에 들어가 자신의 흘린 피의 속죄의 가치를 바칠 수 있었읍니다. 그후 기원 33년 ‘시완’월 6일 오순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하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용하여 먼저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충실한 제자들 약 120명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읍니다. 같은 날 몇시간 후 약 삼천명의 ‘유대’인들이 메시야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한 죄를 시인하고 물에서 침례를 받아 제자들이 되었으며 그들도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읍니다.—사도 1:2-5, 15; 2:1-36.

      8, 9. (ㄱ) 오순절날 양심의 가책을 받는 수천명의 ‘유대’인들에게 ‘베드로’가 “샘”과 관련하여 충고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였읍니까? (ㄴ) ‘베드로’는 후에 성전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보증하였읍니까?

      8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가 양심의 가책을 받는 그들 수천명의 ‘유대’인들에게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말하였을 때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였읍니까? (사도 2:37, 38) 그 말은 그 날이 스가랴 13:1에 예언된 “그 날”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샘” 곧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렸음을 의미하였읍니다. 메시야 예수의 횡사를 선동하고 죽이는 데 가담한 것 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있었읍니까? 아마 그 수천명의 ‘유대’인들 중 다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 경비병의 창에 ‘찔렸을’ 때 형주에 달린 그의 시체를 보았을 것입니다. (요한 19:37) 그러나 그 열린 “샘”물은 그러한 “더러움”까지도 씻을 수 있었읍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후에 이러한 말로 그 사실을 보증하였읍니다.

      9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스가랴 12:10을 포함하여]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여호와]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라.]”—사도 3:17-20.

      10. ‘바울’의 말에 의하면 많은 선천적 ‘유대’인들은 그 “샘”을 어떻게 이용하였으며, “‘다윗’의 집”을 가지고 있는 ‘예루살렘’은 얼마 동안 그 “샘”의 문자적 소재지였던 것 같습니까?

      10 그 일은 기원 33년에 있었지만 그후 기원 56년에도 사도 ‘바울’은 영감을 받아, 할례받은 선천적인 ‘유대’인들의 남은 자들만이 ‘찔린’ 메시야 예수를 믿음으로 바라 보았고 정결케 하는 “샘”을 이용하였음을 지적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로마 11:5; 9:27, 28) 기원 70년에 ‘유대’ ‘예루살렘’은 ‘로마’ 군단에 의하여 멸망되었고 더는 ‘예루살렘’이 스가랴 13:1을 문자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다윗’의 집”은 족보에 의한 신분 증명을 하지 못하게 되었읍니다. 족보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11. 이와 유사하게, 영적 ‘이스라엘’인의 남은 자들은 언제 나타났으며, 그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관련하여 무엇을 인식하였읍니까 (이사야 12:1, 2)?

      11 그러나 스가랴 13:1은 영적 ‘이스라엘’인의 남은 자들에게 유사하게 성취되고 있읍니다. 영적 ‘이스라엘’인은 “하늘의 ‘예루살렘’”,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과 관계가 있읍니다. 기원 1914-1918년의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영적 ‘이스라엘’인의 남은 자들은 큰 ‘바벨론’에 속박되었으며 영적 결함과 불결의 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읍니다. 1919년에 그들은 큰 ‘바벨론’ 조직과 그의 정치적 군사적 애인으로부터 해방되었읍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사야 12:1, 2에 있는 이러한 말의 적용을 인식하고 식별하기 시작하였읍니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a 그러므로 이제 ‘스가랴’ 시대와 마찬가지로, 큰 ‘바벨론’에서 해방되고 영적 성전에서의 여호와의 순결한 숭배를 세우는 데 헌신한 회복된 남은 자들이 있읍니다.

      12. (ㄱ) 정결케 하는 물이 나오는 “샘”은 그들에게 언제 열렸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ㄴ) 그리하여 에스겔 36:24, 25은 어떻게 성취되었읍니까?

      12 이 회복된 영적 ‘이스라엘’인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은 큰 ‘바벨론’과 그의 세상적 애인에게 속박되어 있을 때에 그들에게 묻은 ‘더러운 것’과 모든 죄를 씻을 필요가 있었읍니다. 기원 1919년 그 해방의 해에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당시 그들의 영적 필요에 알맞는 것 즉 더러움을 제거하는 “샘”을 그들에게 열어주셨읍니다. 즉시 그들은 그 “샘”의 정결케 하는 물을 이용하기 시작하였읍니다. 그 때에 영적인 면으로 에스겔 36:24, 25에 있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읍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라.]” 남은 자들은 큰 ‘바벨론’에 영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동안 전쟁에 광분하는 세상의 죽은 것들을 만졌읍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도살한 붉은 암소의 재를 탄 “정결케 하는 물”로 회개한 남은 자들에게 뿌리는 것과 같았읍니다.—민수 19:1-13.

      13. 회복된 영적 ‘이스라엘’ 중에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과 일치하게 그들 가운데서 누가 깨끗해질 필요가 있었으며, 왜 그렇습니까?

      13 이것은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회개하고 회복된 모든 성원들에게 필요하였읍니다. “‘다윗’의 집”과 같이 중요성과 책임에 있어서 너무 높은 자들도 없었고 “‘예루살렘’ 거민”과 같이 너무 평범하고 흔하고 많은 자도 없었읍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마련의 “샘”에서 나오는 물로 이처럼 씻을 필요 없는 자들이 없었읍니다.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전체적인 통치체와 이들 영적 ‘이스라엘’인의 지방 회중의 감독자들인 공적 장로들도, 회중의 헌신하고 침례받은 성원들과 똑같이 깨끗해질 필요가 있었읍니다. (사도 20:17-28; 14:23; 빌립보 1:1; 디모데 전 3:1-7; 4:14; 디도 1:5-9) 그들에게는 집단적 불결함이 있었읍니다. 그들은 전파하고 가르치고 매일 생활을 해가는 데 있어서 그들의 회복된 영적 토지에서 깨끗하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그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더럽혀지지 않도록 자신들을 지키는 것과 일치하게 많은 시체를 낸 열국의 폭력적 투쟁에 대한 엄정한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읍니다.—야고보 1:27; 요한 15:18, 19; 17:14.

      하나님께 대한 충성은 혈연을 초월한다

      14, 15. (ㄱ) “그 날”은 또한 여호와께 대한 어떠한 성품을 시험하는 때이기도 할 것입니까? (ㄴ) 스가랴 13:2, 3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에 대한 어떠한 지침이 되는 비유를 말씀하셨읍니까?

      14 “죄와 더러움을 씻”도록 “샘”이 열린 “그 날”은 또한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충성의 정도를 시험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기원전 537년에 ‘바벨론’에서 회복된 남은 자들은 이것에 대한 경고를 미리 받았읍니다. 주권자이신 주 하나님께서는 그의 숭배자들의 그 분께 대한 충성이 어느 정도라야 하며 어느 정도가 될 것인지를 설명하여 예언자 ‘스가랴’에게 이렇게 계속 말씀하셨읍니다.

      15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이라.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스가랴 13:2, 3.

      16. 여호와께서 “우상의 이름”을 없애시는 “땅”은 무엇이며, 그 결과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16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여기서 기원 1919년 이후 우리 시대와 관련하여 영적 ‘이스라엘’인의 회복된 남은 자들의 영적 토지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셨읍니다. 자신에 대한 전적 헌신을 요구하시는 이 하나님께서 “우상의 이름”을 그들과 그와의 관계의 “땅”에서 없애셨으므로 그들은 이제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그 짐승의 “우상”을 숭배하기를 거절합니다. 정치 기구에 대한 성서의 상징을 사용하지 않고 평범한 말로 한다면, 영적 ‘이스라엘’인들은 전세계적으로 전체로서 정치 국가와 국제 연맹과 그의 후신인 국제 연합을 숭배하기를 거절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짐승의 표”를 받는 데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피합니다. (계시 13:1-18; 14:9, 10) 그들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읍니다. (히브리 12:22, 23; 빌립보 3:20) 그러므로 그들은 지적인 국가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국가주의적인 우상에 숭배의 행동이나 태도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충성스러운 영적 ‘이스라엘’인들은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에게 진심에서 나오는 온전한 충절을 바칩니다.

      17.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요한’의 무슨 경고에 비추어 볼 때 여호와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땅”에서 없애는 것이 시기에 적절하였읍니까?

      17 여호와께서는 또한 회복된 남은 자들의 영적 토지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더러운 사귀를” 없애셨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현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미리 경고하셨읍니다. (마태 24:3, 4, 24, 25) 사도 ‘요한’은 이렇게 경고하였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한 1서 4:1) 따라서 영적 ‘이스라엘’인의 회복된 남은 자들은 지상에 있는 그들의 영적 토지를 침입하는 혹은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거짓 선지자를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8, 19. (ㄱ) 여호와께서 거짓 예언자를 땅에서 떠나게 하셨기 때문에 영적 ‘이스라엘’의 복귀한 남은 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였읍니까? (ㄴ) 그들은 예언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어떠한 충고를 청종하였읍니까?

      18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땅” 혹은 그들의 영적 토지를 숭배 면에서 순결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하리라”는 약속을 어떻게 성취시키셨읍니까? (스가랴 13:2) 남은 자들이 기원 1919년에 그들의 “땅”에 회복되기 전에 가졌던 성서 예언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시정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셨읍니다. 이방인의 때의 끝인 1914년에 시작된 “마지막 때” 즉 “사물의 제도의 결말”은 많은 예언들이 성취될 하나님의 지정된 때였읍니다. 이러한 예언들은 그 예언들이 성취되기 직전 혹은 성취된 후에야 이해될 수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회복된 남은 자들은 1914년 이후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예언이 성취될 “마지막 때”를 위하여 보존하신 예언들을 새로이 조사하였읍니다. (다니엘 12:4; 계시 10:6, 7) 이 가운데는 「에스겔」과 「계시록」에 대한 재연구가 포함되었읍니다. 이 책들에 대한 해설이 시도되었고 1917년 7월에 「종말을 고한 비밀」이라는 책으로 발행되었읍니다. 그리하여 회복된 남은 자들은 이러한 말을 청종하였읍니다.

      19 “따라서 우리에게 더욱 확실해진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비추는 등불에게 하듯이 여러분의 마음으로 그것에 유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이 사실 즉 성경의 어떤 예언도 아무런 사사로운 해석으로 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다. 왜냐 하면 예언은 언제나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는대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 후 1:19-21, 신세.

      20. 상징적으로 말하여, 친 부모는 거짓 예언을 하는 아들을 어떻게 찔렀읍니까?

      20 예언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그것이 역사적 사건들과 성서에 대한 더 나은 이해의 빛에 비추어 볼 때 부정확할 때에는, 누구의 해석이었든지 간에 시정되었읍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그의 영감받은 말씀에 대한 충성이 이 경우에 중요한 문제였읍니다. 그러므로 요구된 충성의 예로서, 친 아들이 거짓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예언을 잘못 해석하고 고집할지라도 그 때에는 친 부모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에서 종교적인 면으로는 아들과 관련을 갖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모세’의 율법하에서처럼 할 수는 없읍니다. 즉 아들을 죽일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육체적으로는 부모일지라도 영적으로는 아들이 죽었다고 선언할 수 있읍니다. 이처럼, 상징적으로 말하여, 그들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스가랴 13:3; 또한 신명 13:1-5 비교) 부모의 온전한 동의하에 그러한 거짓 예언자는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추방되고 제명당할 것입니다. 복귀한 남은 자들의 모든 성원들은 그러한 성실을 나타냄으로써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로 하여금 그들의 “땅”에서 떠나게 할 것입니다.

      21. 어떻게 “더러운 영”도 그들의 영적 “땅”에서 떠나게 되었읍니까?

      21 물론 “더러운 사귀”도 그들의 영적 “땅”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사귀 혹은 영이 자칭 예언자의 더러운 영감받은 표현이라면, 혹은 더러움으로 이끄는 경향 혹은 추세라면 충성스러운 자들은 그것을 배척하고 저항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종교적 가르침이나 도덕적 행실에 있어서의 더러움은 하나님의 성령의 축출력에 의하여 떠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토지는 깨끗하고 성경적인 생활이 영위되는 “땅”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불결한 사람은 그 “땅”에서 제명되어야 합니다.—고린도 후 6:14에서 7:1; 또한 신명 13:6-18 비교.

      종교적 위선이 폭로됨

      22, 23. (ㄱ)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거짓 예언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수치감의 이유를 감추려 할 것을 어떻게 묘사하셨읍니까?

      22 참 예언자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자칭 예언자들의 거짓 예언을 성취시키지 않으심으로 혹은 그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에 반대되게 자신의 예언을 성취시킴으로 모든 거짓 예언자들을 수치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참 신분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수치감에 대한 이유를 감추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숭배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 즉 영적으로 죽었다고 선언받는 것을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 분은 이점을 예언하시기 위하여 그의 참 예언자 ‘스가랴’를 통하여 이렇게 계속 말씀하셨읍니다.

      23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 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스가랴 13:4-6; 또한 아모스 7:14-17 비교.

      24. 사기적인 예언자는 자기 몸에 있는 상처 자국이 누구 때문에 생겼다고 말하였으며, 이것은 친척과 친구에 대한 애착심과 비교할 때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과 관련하여 무엇을 의미할 것입니까?

      24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그들의 회복의 “땅”에서 그의 말씀으로 훌륭히 교훈받을 것과 그와 그의 참 예언에 매우 충성스러워, 어떠한 거짓 예언자와도 벗하거나 애착을 두기를 거절할 것을 예언하셨읍니다. 그들이 그 예언자를 죽이지 않으면 그를 징계하고 격렬한 노를 발하여 몹시 때릴 것이므로 보이는 상처와 자국이 날 것입니다. 그의 몸에 있는, 아니, 일부 드러난 그의 가슴에 있는 그러한 흔적 때문에,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진실한 예언자로 가장하기 위하여 입었던 예복을 벗어 던졌지만 그의 정체가 탄로날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그러한 상처가 났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친구의 집에서 즉 가까운 친구나 친부모의 집에서 받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참 예언의 하나님 여호와께 대한 강렬한 충성심은 사기적인 예언자에 대한 그때까지의 뜨거운 사랑보다 강할 것입니다. 그들은 친척이나 친구들과의 친밀한 우정보다 하나님과 그의 영감받은 말씀에 대한 사랑을 중요시 할 것입니다. 그러한 행로를 취하기 때문에 “선지자들과 더러운 사귀”는 여호와의 송환된 백성들의 “땅”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5. 여호와께 대한 이 최고의 충성의 행로를 누가 언제부터 취하여 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영적 “땅”은 어떠한 영향을 받았읍니까?

      25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께 대한 최고의 충성의 이 행로는 기원 1919년 이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이 취한 행로였읍니다. 이 결과 종교적 배교자들 혹은 반역자들은 하늘의 신권통치자 여호와께서 그의 순종하는 남은 자들 사이에 설립하신 신권 조직으로부터 제명 혹은 추방되었읍니다.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로 살아 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참 예언자가 되게하는 것은 단순한 “털옷”이나 직업적 제복이나 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특이한 복장을 한 사제들과 목사들과 수도승과 수녀가 있는 그리스도교국을 포함한 큰 ‘바벨론’에서 나왔읍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참 예언자로 만드는 요소는 참 그리스도인 성품 즉 여호와의 말씀과 예언에 대한 충성스러운 고착과 신분 증명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도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평범한 외출복이나 일반 사람들의 정복을 입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읍니다. 그러므로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은 가까운 친구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기꺼이 무시하고 배교자들을 거절하고 배척하여 이들에게 영적 “상처”를 입힙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신권적 “땅”은 깨끗하고 경건한 생활의 영역을 유지하였읍니다.

      목자를 치면 흩어진다

      26. (ㄱ) 예언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슨 이유로 맞고 상처를 받았읍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스가랴’를 통하여 이것을 어떻게 예언하셨읍니까?

      26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는 맞고 상처를 입어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지만 이로 말미암아 그는 끝까지 지존하신 하나님의 참 예언자로 입증되었읍니다. (신명 18:15-22; 사도 3:13-23) 그 분이 횡사당하자 그에게 충성스러웠던 제자들은 일시적으로 흩어졌읍니다. 참 예언자 ‘스가랴’가 이것을 예언하였읍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스가랴 13:7.

      27, 28. 일부 성서 번역자들이 범한 잘못을 피하기 위하여 스가랴 13:7을 적용한 누구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르며, 그에 대한 누구의 어떠한 기록을 볼 때 그러합니까?

      27 일부 현대 성서 번역자들은 그 말을 “우매한 목자” “못된 목자”에게 적용하여 스가랴 13:7-9에 있는 말을 옮겨다가 스가랴 11:17에 첨부하였읍니다. (모팻, 미역, 신영성 참조) 그러나 우리가 지상에서 여호와의 가장 위대하신 예언자였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스가랴 13:7을 적용시킨다면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는 기원 33년 ‘니산’월 14일 ‘유대’인의 유월절 날 밤이었읍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식사를 막 마치고 주의 만찬(즉 저녁 식사)을 제정하셨고 열한 명의 충실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도중이었읍니다. 이 때에 관한 기록은 이러합니다.

      28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태 26:31, 32; 마가 14:27, 28.

      29. (ㄱ)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깨는 데 있어서 칼은 어떻게 “나의 짝된 자”인 여호와의 목자에 대항하여 깨었읍니까? (ㄴ) 여호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칠 칼을 깨라고 부르실 때 예수를 신뢰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9 위대하신 예언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가랴 13:7의 말을 올바로 적용하셨읍니까? 같은 유월절날 밤 조금 후에 전쟁의 “칼”이 여호와의 참 목자, 여호와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가까운 친구이며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에 대하여 깨었읍니다. 이 분은 그의 독생자이며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이며 “하나님에 의한 창조의 시작”이십니다. (요한 3:16; 골로새 1:15; 계시 3:14, 신세) 그는 인간으로 출생하기 전에 하늘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영적 생명을 누렸으며 여호와께서 다른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천적 아버지를 보좌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창조 사업을 하실 때 그의 대행자로 그의 독생자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요한 1:1-3; 골로새 1:16-1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아들이 지상에서 완전한 인간이 되었을 때에도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셨읍니다. 그는 아들이 원수의 공격전 하에서도 성실을 유지할 것을 확신하셨읍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그는 그의 아들을 ‘깨울’ 원수들의 전쟁의 “칼”을 부르셨읍니다.

      30. 왜 예수께서는 치는 일을 여호와께서 하시는 것처럼 스가랴 13:7을 인용하셨으며, 왜 예수께서는 맞지 않으려고 저항하지 않으셨읍니까?

      30 “목자를 치라”고 예언적으로 명령하신 분이 여호와이시므로 그 분이 친히 목자를 친다고 말할 수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스가랴 13장 7절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의 천적 아버지께서 “내가 목자를 치리”라고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었읍니다. (‘찰스 톰슨’이 번역한 희랍어 「칠십인역 성서」 참조) 배반자 ‘가룟 유다’의 안내를 받아 그 유월절날 밤에 온 무리는 실제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왔었읍니다. 예수께서는 예언의 성취를 피하려고 하지 않으셨읍니다. 그의 천적 아버지가 이제 예수를 때리라고 명령하신다면 그는 맞을 각오였읍니다.

      31. 예수께서는 방어하려고 뽑았던 칼을 집에 꽂으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후에 어떠한 질문을 하셨으며, 스가랴 13:7의 어느 부분이 또 성취되었읍니까?

      31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칼로 예수를 경호하려고 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시고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당장에 열 두 군단 이상의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이제 내가 당하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고 부언하셨읍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평화로운 공개 전파자인 자신에게 “강도에게 하듯이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왔느냐고 그 무리에게 질문하신 후에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된 것은 예언자들의 글을 이루려 하신 것이다” 하고 덧붙이셨읍니다. 이 때에 ‘스가랴’의 그 귀절이 모두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기록이 알려주듯이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을 때에 다음 부분이 성취되었읍니다. 그리하여 “양이” 흩어졌읍니다.—마태 26:51-56, 새번역; 마가 14:47-50; 요한 18:1-9.

      32. “작은 자들”은 누구였으며, 스가랴 13:7에 의하면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그들에게 그의 손을 드리우셨읍니까?

      32 예수께서는 예언을 정확하게 적용시키셨읍니다. 선한 목자이신 그 분이 “칼”에 맞은 그 날 밤 그의 양은 실제로 흩어졌고 그리하여 그들은 그와 관련하여 걸려 넘어졌읍니다. 그러나 스가랴 13:7의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는 부분은 어떻게 성취되었읍니까? 여호와의 손은, 이사야 1:25, 26의 경우처럼 자비와 은총으로 드리워졌읍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사용되는 힘인 “손”으로 흩어진 양들을 보호하셨읍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 사도들은 그들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에 비하여 “작”았읍니다. 또한 그 당시 ‘유대’인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예수를 체포한 그 날 밤에 “작”았으며, 감금해야 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생각으로는 “작”지 않았으며 그는 그들에게 동정심을 보이셨고 그들을 보호하셨고 보존하셨읍니다. 그로부터 세째 날인 ‘니산’월 16일에 그분은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부활되신 예수로 그들에게 나타나게 하시어 그들을 치는 목자의 일을 다시 하게 하셨읍니다.—누가 24:33-43; 요한 20:1-29.

      33. 적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그들의 “칼”로 여호와의 목자를 어떻게 쳤으며, 그들의 의도는 무엇이었으며,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작은” 자들 위에 그의 손을 드리우셨읍니까?

      33 여호와께서 “가서 네 원수들 중에 정복하”도록 하늘에 즉위시키신 통치하는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 기원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흩어지는 비슷한 일이 있었읍니다. (시 110:1, 2, 신세) 그 지상의 원수들은 여호와께서 인류 세상을 치도록 임명하신 천적 목자에 대항하여 실제로 선전 포고를 하였읍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통치하는 목자에게 직접 전쟁의 “칼”을 휘두를 수가 없으므로, 지상에 있는 “양”을 쳤읍니다. 즉 그들의 군사력과 정책과 체제를 통하여 이 “양들”에게 대항하였으며 그들을 영구적으로 분리시키고 재조직을 못하게 하려는 생각으로 흩어지게 하였읍니다. 그러나 1세기와 마찬가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인 이들 “작은 자들” 위에 그의 손을 드리우셨읍니다. 놀랍게도 그 분은 그들을 보호하고 보존하셨읍니다. 종전 후 첫 해인 기원 1919년에 그는 그들을 조직의 형태로 다시 모으셨읍니다. 이처럼 그들을 재생시키고 그의 봉사에서 그들을 높이자 성공한 것으로 생각했던 그들의 적들은 놀라서 두려워 하였읍니다.—계시 11:7-13.

      “삼분지 이”는 끊어지다

      34.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무엇으로부터 끊어지고 있으며, 왜 그렇습니까?

      34 여호와의 목자이자 짝된 자를 친 결과로 오늘날까지 온 인류가 영향을 받아왔읍니다. 현 이십 세기의 그와 유사한 사건은 현 “마지막 때”,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사는 현 세대에게 영향을 미쳤읍니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하나님께 주신 영적 토지 즉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의 “땅”에서 한 몫을 얻지 못하고 ‘끊어지고’ 있읍니다. 그들은 현 사물의 제도의 물질적 정치적 사회적인 것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성취되고 있는 스가랴 13:8, 9의 광범위한 예언에 대해서는 냉담하거나 무식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35. 스가랴 13:8, 9에 의하면 얼마나 “끊겨 없어질” 것입니까?

      35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끊겨 없어질 것이며]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라.]” (신세 참조)

      36.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기원 1919년에 해방되어 그들의 “땅”에 복귀된 사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연단하고 검사하는 일을 끝내셨음을 의미하였읍니까? 어떠한 상징적 묘사가 그 여부를 알려 줍니까?

      36 이 말은 예언자 ‘스가랴’를 통하여 ‘유다’ 땅에서 ‘이스라엘’의 송환된 남은 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고대 ‘이스라엘’ 남은 자들은 기원 1914년 이방인의 때가 끝났을 때에 시작된 현 “마지막 때”, 현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영적 ‘이스라엘’인의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을 예표 혹은 예언적으로 표상할 것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중에 혹독한 시련과 속박을 경험한 영적 ‘이스라엘’인의 생존한 남은 자들은 1919년, 그 의미심장한 해의 봄에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영적 토지로 복귀되었읍니다. 이 생존한 남은 자들이 그 첫 세계 대전의 박해와 고난을 통과한 사실은 그들이 그들을 연단하시는 하늘의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시험과 검사를 받는 일을 끝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읍니다. 기원전 537년에 무너진 ‘바벨론’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인 남은 자들(‘스가랴’를 포함한)의 경우도 그렇지 않았읍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두번째 성전을 처음에 기원전 515년까지 완공시키는 데는 시간이 상당히 걸렸읍니다.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도 1919년 이래 이와 같았읍니다.

      37. ‘말라기’는 약 육십년 후에 여호와의 연단하는 일과 성전에서의 순결한 숭배를 회복하는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예언하였읍니까?

      37 ‘스가랴’ 시대보다 약 60년후에 ‘유다’ 땅에서 예언자 ‘말라기’는 여호와께서 “언약의 사자”와 함께 자신의 성전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읍니다. 그 곳에서 그 분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을 것이며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참 하나님의 순결한 숭배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말라기’가 예언한 바와 같이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말라기 3:1-4; 기원전 443년경에 기록됨.

      38. 땅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는 ‘레위’ 자손을 정결케하는 외에 무엇이 있을 것입니까?

      38 그의 회복된 백성의 “땅”을 깨끗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성전 관리인으로서의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는 일 이상이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이스라엘]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라기 3:5-7.

      39. 제1세기에 ‘말라기’의 예언의 성취가 있었읍니까? 기원 1914년 이후로 ‘말라기’의 예언이 더 성취되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무엇이 알려줍니까?

      39 메시야 예수께서 제1세기에 ‘이스라엘’ 민족 중에 육체를 가지고 계셨을 때에 ‘말라기’의 예언의 성취가 있었읍니다. (마태 11:7-10; 마가 1:1, 2; 누가 7:24-27)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원 1914년에 하늘에 즉위하시어 왕국에 임재하신 후에도 ‘말라기’의 예언은 더욱 성취되어야 합니다. 그후 정한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사자”를 대동하고 영적 성전에 임하시어 그 분을 숭배한다고 공언하기만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성전에 있는 모든 숭배자들을 심판하시어야 합니다. 분명히 여호와께서는 1919년까지 최고 심판장으로 영적 성전에 임하셨읍니다. 그 해에 그 분은 영적 ‘이스라엘’인들을 큰 ‘바벨론’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지상의 영적 토지에 그들을 회복시키셨읍니다.

      40.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보석을 연단하는 자같이 행동하실 것이며, 기원 1919년 이후로 누가 ‘끊어지게’ 되어 있읍니까?

      40 예언적 묘사와 일치하게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을 연단하실 것입니다. 그는 찌끼같은 사람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그는 정화된 은과 금 같이 순수한 보석같은 사람들을 중히 여기고 보존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원 1919년 이래 일부 사람은 그의 회복된 백성들이 살게 되어 있는 “땅”에서 끊어질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여 그러한 ‘끊어지는’ 자들은 여호와와의 중대한 관계에 있어서 “멸절”될 것입니다.

      41.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일부 사람들이 끊어질 것임을 어떻게 말씀하셨읍니까?

      41 그러면 “멸절”되는 “삼분지 이”는 누구입니까? (스가랴 13:8) 이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분은 “언약의 사자”이신 통치하는 왕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은 1914년에 시작된 “사물의 제도의 결말”, “마지막 때”와 관련이 있읍니다. (다니엘 12:4; 마태 24:3-14; 28:20) 예수께서는 이 위험한 기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그는 다음과 같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셨읍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사물의 제도의 결말]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사물의 제도의 결말]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태 13:37-43.

      42. 특히 누가 상징적 “가라지”이며,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끊어지며, 누구에 의하여 그렇게 됩니까?

      42 그 비유의 설명은 기원 1914년 이후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상당한 부분이 끊어질 것을 예언하였읍니다. 이 때에 끊어지는 부분은 상징적 가라지, 즉 그러한 가라지를 뿌린 “원수” ‘사단’ 마귀인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상징적 밀로, “천국의 아들들”로, 다시 말하면 천국에 불리움을 받은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로 오해되었었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하였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천국의 후사들인 기름부음받은 참 그리스도인과 혼동되었읍니다. 그러나 현 “추수 때”에 그들의 참 신분이 드러나 그들은 “가라지”, 그들을 뿌린 마귀같이 천국의 원수들인 가짜 그리스도인들임이 판명되었읍니다. 그들이 “밀” 반열과의 교제에서 끊어지는 것은 지당합니다. “추숫군들”인 천사들은 베는 일을 합니다. 이들은 “가라지”를 “불”에 던지며 그러한 가라지들은 그 “불”에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거짓 신분은 멸망되며 마침내 그들도 멸망될 것입니다.

      43. 예수께서는 사물의 제도의 결말의 “징조”에 관한 예언에서 택하신 자들의 추수를 어떻게 묘사하셨으며, 그 후로 그는 누가 끊어질 것을 예언하셨읍니까?

      43 그러나 현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또 다른 부분 혹은 반열이 끊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열을 그의 임재와 사물의 제도의 결말의 징조에 관하여 놀라운 예언을 하시면서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24:3) 이 예언에서 그는 “추수”에 관하여 말씀하셨는데, 역사에 의하면 그 일은 기원 1919년에 시작되었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태 24:31) 그리고 이 예언의 중간에 다가가며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24:44-51; 이것과, 비슷한 비유가 나오는 누가 복음 12:42-46 비교.

      44. 그러면 그 “악한 종” 반열은 누구를 상징하며, 그 반열은 왜 끊어지며, 무엇으로부터 끊어집니까?

      44 여기서 “끊”어지는 자들은 “악한 종”이며 그는 매우 엄한 처벌을 받은 후에 주인의 동료 종들이 아니라 위선자들, 불충실한 자들의 받는 율에 처하게 됩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집 사람들”로서 실제로 그의 집에 있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 반열을 상징하듯이 그 “악한 종”도 한 반열을 상징합니다. “가라지”와 달리 이 그리스도인 반열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주인의 집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는 그 안에서 동료 종이 되었읍니다. 그러나 이 반열은 태도가 변하여 불충실하게 되고 이기적이 되고 식욕에 대한 자제력을 잃으며 힘과 권위를 남용하여 동료 종들을 학대하고 주인이 오실 때에 주인과 회계할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 냉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 “사물의 제도의 결말”, 보이지 않는 두번째 “임재”의 이 때에 왕으로서 그는 이 “악한 종” 반열을 끊어 내십니다. 그는 그들을 제명시켜 종교적 위선자들과 불충실한 자들에게 넘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멸절합니다.

      45. 그리하여 얼만큼이 끊어졌으며, 누가 “불”을 통과하였으며, 그들은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읍니까?

      45 그리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땅” 즉 여호와의 회복된 남은 자들의 영적 토지, 하나님께서 주신 토지에서 끊어집니다. 그러나 주권자이신 주 하나님께서는 “삼분지 일” 즉 하나님의 천국의 후사들이라고 공언하는 소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과 성품과 사업에 대한 시험과 검사의 “불”을 통과하게 하셨읍니다. 이들은 위대하신 연단자께서 연단하는 일을 행하실 때에 그것이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겸손하게 순응하였읍니다. 그들은 상징적 열기를 인내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그는 그들의 마음의 성실성에 따라 그들에게 응답하셨읍니다.

      46. 여호와께서 이 “삼분지 일”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어떻게 그렇게 하셨으며, 이 “삼분지 일”은 어떻게 대답하여 왔읍니까?

      46 스가랴 13:9의 예언의 성취로 이 “땅”의 천적 감독자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회복된 남은 자들의 영적 토지에서 이 “삼분지 일”을 끊지 않으셨읍니다. 그는 그들에 대한 분명한 은총으로 그리고 그의 증인들인 그들과 놀라운 방법으로 관계하심으로, “이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한편, 기름부음받은 충실한 남은 자들은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대답해 왔읍니다. 특히 그들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명칭을 채택한 1931년 7월 26일 이후로 그렇게 하였읍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영적 “땅”에 남아 활동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읍니다.

      47. 열국 중에서 누가 “삼분지 일”과 연합하여 함께 여호와의 성전에서 숭배를 드립니까?

      47 이 영적 “땅”에 남아 있는 바로 이 “삼분지 일”을 보고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따릅니다. 그들은 이들 충실한 영적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인들의 옷자락을 잡습니다. “열명”으로 상징된 국제적인 “큰 무리”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고 말합니다. (스가랴 8:20-23) 매년 수만명씩 증가하는 이들은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과 그들의 “땅”에서 연합하여 여호와의 성전에서 그 분을 숭배합니다.—계시 7:9-15.

      [각주]

      a 1928년 6월 1일호 「파수대」(영문)와 주요 기사 “그의 이름이 높여짐” 참조. 그 기사의 주제 성귀는 이사야 12:4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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