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파69 9/15 418-428면
  • 당신은 ‘예레미야’의 인내를 본받을 수 있는가?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당신은 ‘예레미야’의 인내를 본받을 수 있는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담대함
  • 변명
  • 사명에 대한 태도
  • 문제
  • 격려
  • 결혼
  • 교제
  • 신체적 고통
  • 보호
  • “내가 잠자코 있을 수 없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
  • 어떤 사람을 벗으로 삼을 것인가?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
  • “내가 그 피곤한 영혼을 흠뻑 적셔 주겠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
  • 성서 제24권—예레미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유익하다’
더 보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파69 9/15 418-428면

당신은 ‘예레미야’의 인내를 본받을 수 있는가?

“형제들이여, 고난과 인내에 있어서는 주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본받으시오.”—야고보 5:10, 새번역.

1, 2. 자기의 생활이 잘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공식이 있읍니까? 설명하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생활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분명히 행복하게 되기를 희망할 것입니다. 당신의 행동은 칭찬받을 만하며 보람있고 남에게 진정한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파란 곡절이 많은 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의 생활이 어김없이 바른 것이 될 수 있을까요? 확실히 안심하고 따를 수 있는 공식이 있읍니까?

2 이름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사도 ‘바울’이라고 이해되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필자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읍니다.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브리 13:7.

3. 누구의 행실을 응시하는 것이 유익합니까?

3 그처럼 간단한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것은 주로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던 사도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여 온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는 오늘날의 충성스런 사람들, 특히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의 통치체를 관찰할 수 있읍니다. (마태 24:45-47) ‘바울’은 히브리서 11장에서 ‘히브리’ 시대와 그 이전의 하나님의 종들의 믿음을 본으로서 묘사하였읍니다. 부가하여, 우리에게는 우리의 행실을 인도하여 줄 고대 충신자들이 세워 놓은 모범에 대한 완전한 기록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실이 잘되지 않는다면 확실히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잘되기를 원한다면 잘되게 할 수 있읍니다.

4. 우리는 어떻게 ‘예레미야’의 인내를 본받을 수 있읍니까?

4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직접 말로가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들 중에 예언자 ‘예레미야’가 있읍니다. (로마 15:4) 우리는 ‘예레미야’의 탁월한 인내의 생활과 행실에 대한 아주 완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행로를 ‘예레미야’가 당면했던 여러 가지 환경에서의 그의 행로에 견주어 나간다면 우리는 그의 믿음을 본받을 수 있으며 ‘예레미야’의 인내를 얻을 수 있읍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참으로 필요합니다.

5. ‘예레미야’의 인내의 본을 따르는 것은 인간을 따르는 것입니까? 설명하십시오.

5 사실을 고려해 보면 우리는 인내할 수 있는 역량과 힘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이심을 명백히 알 수 있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혜나 힘에 의지해서는 인내할 수 없읍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였읍니다. (예레미야 17:9; 잠언 3:5, 6)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충실한 인내의 모범을 따르는 것은 인간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여호와께서 관여하신 결과로 조성된 ‘예레미야’의 생활의 충성스런 모범을 본받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내하기 위하여는 여호와께서 제공하시는 본과 그분이 마련하시는 도움의 원천을 따라야 합니다.

담대함

6, 7. 인내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갖기 위하여 ‘예레미야’는 먼저 무엇을 하였읍니까?

6 당신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기쁜 소식을 전파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지고 있읍니까? ‘예레미야’가 할 일도 아주 흡사하였읍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그 일을 하였읍니다. 어떻게요?

7 애당초부터 그는 그의 임무를 명백히 이해하였읍니다. 그는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야 되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초에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고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이 일을 다하라고요! 어떻게요? ‘예레미야’가 철학자나 심리학자 혹은 사회 개혁자가 됨으로 자신의 이론이나 언변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또한 그는 예언자들이나 제사장들로부터 허락도 받지 않았읍니다. 아니,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그리고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예레미야 1:7, 9, 10.

8. 예언자로 불리움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의 첫 반응은 어떠하였읍니까? 그러나 무엇이, 그로 용진할 담대함을 가지게 하였읍니까?

8 당신은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하는 소식을 좋아해. 하지만 내가 전파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건 절대 못해!” 하고 말할지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그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알려 주셨을 때 그는 처음에 이의를 표시하였읍니다. (예레미야 1:5, 6) 열방 만국을 상대해야 하는 임명이었읍니다! 얼마나 중대한 임무였읍니까! ‘예레미야’는 그때 젊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아이로 생각하였읍니다. 그는 절대적으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읍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어느 누구에게 보내든지 말하여야 한다고 하셨으며, 여호와의 말씀으로 볼 때 분명히 그 가운데는 왕들도 포함되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며 거민들이 메뚜기같은 만국 위에 매우 높이 앉아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예레미야’의 말을 참된 것으로 입증하실 수 있었읍니다. (이사야 40:22) ‘예레미야’는 그가 말한 모든 것을 절대 확신할 수 있었읍니다. 인내를 위한 얼마나 좋은 자극제입니까!

변명

9. 왜 우리는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부르신 예언자이니까 다르다고 말함으로써 전파 사업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읍니까?

9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와 나하고는 다르지.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신 예언자였으니까” 하고 말할지 모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임무는 그만큼 명확치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천사를 통하여 임무를 주셨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천사들보다 훨씬 크신 분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그들에게 뚜렷한 임무를 주셨읍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만유의 후사로 세우신” “아들”을 통하여 주셨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들은 일들에 대하여 보통 이상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읍니다.” (히브리 1:2; 2:1, 신세) 만국을 “질그릇 같이 부[술]” 권력의 홀을 받아 가지고 계신 분이 바로 다른 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모든 나라의 백성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이 지키도록 가르치십시오. 보십시오! 내가 이 사물의 제도의 결말까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겠읍니다.” 그리고 “이 천국의 기쁜 소식이 . . . 전파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식입니다.—시 2:9; 마태 28:19, 20; 24:14, 신세.

10. ‘예레미야’처럼 여호와의 증인들이 영감받는다면 인내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까?

10 또한 어떤 사람은 “그러나 ‘예레미야’는 영감을 받았다”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감의 영이 항상 ‘예레미야’에게 임한 것은 아니었읍니다. 여호와께서 특별히 전하라고 소식을 주실 때만 영감을 받았읍니다. (예레미야 36:1, 2; 42:7) 그러나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가야 하는 전시간 예언자였읍니다. (예레미야 37:4; 18:11; 7:2; 2:2; 11:2, 6) 예언자이면서 ‘예레미야’는 다른 직책이 있었읍니다. 그는 제사장이었읍니다. (예레미야 1:1) 우리도 그렇지만 ‘예레미야’도 항상 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며,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계속하여 하나님을 한결같이 섬겨야 하였읍니다. 그는 그의 임무로부터 이탈하여 안이한 생활이나 물질에 마음이 끌리어 낙오자가 될 수 있었읍니다. ‘예레미야’는 선행을 하다가 지치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그는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야 되었고 그의 예언하는 일의 의무로 부지런해야 하였읍니다. 성전에서, 그를 싫어하기 쉬웠을 감독자 밑에서 당번이 되면 그는 제사장으로서의 봉사를 수행해야 되었읍니다. 그는 동료 제사장들의 부패상, 뇌물을 먹으며 심판을 의곡하는 행위, 그들의 부도덕, 그들의 비행을 비난하는 ‘예레미야’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참아야 하였읍니다.—예레미야 6:13.

11. ‘예레미야’는 얼마나 오랫 동안 예언하였읍니까? 그리고 그는 무슨 다른 가치있는 공헌을 하였읍니까?

11 ‘예레미야’는 평생을 두고 인내하였읍니다. 우리는 그가 기원전 659년에 통치를 시작한 ‘요시야’ 왕 제13년에 젊은이로서 예언하는 일을 시작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원전 647년부터 기원전 607년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까지 그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읍니다. (예레미야 25:3; 39:1) 우리 중에 전도 봉사에서 40년 이상 보낸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또한 그는 저술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바쳤읍니다. 「예레미야」와 「애가」 외에도 「열왕기 상 하」를 ‘예레미야’가 쓴 것으로 믿어집니다. 이것은 근면한 연구를 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가치가 있읍니까?

12. 무엇이 ‘예레미야’로 그의 사업을 온 마음을 다하여 할 수 있게 하였으며, 무엇이 그로 반대자들을 두려움 없이 대면토록 힘주었읍니까?

12 어떻게 ‘예레미야’는 매일의 일과를 훌륭히 그리고 지치지 않고 수행할 수 있는 강한 마음을 유지하였읍니까? 여호와의 말씀과 그의 영은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약속대로 그를 뒷받침해 주었읍니다.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그의] 허리를 동이고” 바쁠 수 있었읍니다. ‘예레미야’는 그가 생사의 투쟁을 직면할 것을 알았읍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권능자의 후원을 받을 것을 알았읍니다. 여호와께서는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 . .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고 격려하셨읍니다.—예레미야 1:8, 17-19.

사명에 대한 태도

13. (ㄱ) 순수한 결심이 ‘예레미야’로 계속 인내하게 하였읍니까? 아니면 무엇이었읍니까? (ㄴ) 왜 ‘예레미야’는 백성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졌읍니까?

13 ‘예레미야’가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담대함이나, 말하자면 “이를 악물고” 순수하게 결심한 때문이 아니었읍니다. 그는 그의 임무를 철저히 이해함으로 그의 사업이 전적으로 만국에 재난을 선포하는 파괴적인 일만이 아니었음을 알았읍니다. 그것은 또한 심고 건설하는 일이었읍니다. 그일은 그에게 기쁨과 즐거움이었읍니다. 결심 자체로는 그를 지속시키지 못할 것이었읍니다. 그는 그의 사업을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수행하였읍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거짓 목자 아래 있는 양들 같음을 알았읍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지도, 언급도 하지 않은 예언자들이 그분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였고 거만하게도 사람들을 억눌러 권위를 행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길과 명령을 오해케 하였읍니다. 이런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엄중한 책임이 있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예레미야 23:22) 이 사람들은 실제로 백성들 가운데서 말썽의 원인이었읍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길에서의 인내 대신 “영속적인 불충실”의 정신을 넣어 주었읍니다. 그것이 “일반 행로”가 되었읍니다. (예레미야 8:5, 6, 신세) 당신도 오늘날 그와 같은 점을 보고 있읍니까?

14. 성실한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 것은 ‘예레미야’의 전파사업의 무엇이었읍니까? 그리고 ‘예레미야’의 인내의 핵심은 무엇이었읍니까?

14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기를 바랐지,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 때 죽는 것을 원치 않았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오로지 그의 구원만을 위해서 월등한 이해력을 주신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것은 성실한 다른 사람들을 그가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읍니다. ‘예레미야’의 태도는 그의 전파 사업에 반영되었읍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람들은 우리의 태도가 그저 전파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사랑과 돕고자하는 욕망에서 우러 나와 하는 것인지 가려냅니다. “양”이 따라오게 하는 것은 그리고 우리의 인내의 진정한 핵심이 되는 것은 성실하고 사랑에서 우러나는 태도입니다. 왜냐 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 전 13:7, 8; 마태 9:36; 요한 10:2-5.

15. 그가 전파한 사람들에 대한 ‘예레미야’의 염려는 어느 정도였는지 묘사하십시오.

15 당신의 사랑은 ‘예레미야’의 사랑만큼 강합니까? 사람들에 대한 그의 염려는 참으로 지극해서 그들에게 임하게 되어있는 재난을 생각하고 실제로 눈물을 흘렸읍니다. (예레미야 8:21-9:1; 누가 19:41-44) 그는 반대를 받았지만 격분하지 않았읍니다. 심지어 부패하고 겁이 많은 ‘시드기야’ 왕에게도 그는 존경심과 친절을 보였읍니다. 사실, ‘시드기야’가 진실치 못하게 그를 죽이려는 방백들에게 넘긴 후에도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의 복지를 진정으로 염려하여 그에게 생명을 견지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음성에 청종할 것을 호소하였읍니다.—예레미야 38:4, 5, 19-23.

문제

16, 17. (ㄱ) 사람들의 냉담으로 우리가 약해진다면 무엇을 고려함으로 격려를 받을 수 있읍니까? (ㄴ) 무엇이 ‘예레미야’에게 그가 거의 틀림없이 그를 말할 수 없이 반대할 것이라고 예상한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인도자들에게 거리낌 없이 말할 담력을 주었읍니까?

16 당신은 때때로 호별 방문에서 찾아가는 집마다 사람들이 듣기를 원치 않으면 인내력이 좀 약해집니까? 그렇다면 잠깐 ‘예레미야’가 아마 감람산에 서서 ‘기드론’ 골짜기 건너 ‘예루살렘’으로 얼굴을 돌려 높은 성벽과 웅장한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더 높은 지대를 응시하면서 보잘것 없는 인간인 자기가 골짜기를 건너 그 도시로 들어갈 것을 생각하며 서 있던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힌놈’의 골짜기에 이르러 제사장들과 그 도시의 유력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오지그릇을 깨뜨리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런 식으로 여호와께서 아름답고 인상적인 성전을 포함하여 ‘예루살렘’을 파할 것이라고 말해 주어야 하였읍니다! 뿐만 아니라 만일 여호와께서 격노한 그들의 손에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신다면 그는 성전 뜰로 가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백성들에게 닥쳐올 재난을 선포해야 하였읍니다.—예레미야 19:1, 2, 10, 11, 14, 15.

17 일반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사장들과 인도자들은 어떨까요? 틀림없이 그들은 그의 사업을 맹렬히 반대할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이들 거만한 자들에게 담대히 말할 수 있게 하였읍니까? ‘예레미야’는 문제를 알았읍니다. 그는 그 자신의 신변의 안전보다도, 심지어 백성들의 생명과 ‘예루살렘’ 성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그 나라에 대한 심판은 비통한 것이었읍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짓 숭배에 빠져 타락한 것을 슬퍼하였읍니다. ‘예루살렘’은 위대하신 왕 여호와 하나님의 도시였으며 ‘다윗’ 계통의 역대 왕들이 거기에 있는 “여호와의 보좌”에 앉았읍니다. (마태 5:35; 역대 상 29:23, 신세 참조) 백성들은 참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가서 그들은 새긴 우상을 세우고 그들의 자녀들을 희생으로 불태움으로 여호와를 욕되게 하였읍니다.—예레미야 7:31.

18.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도시를 내려다 보았을 때 그는 어떤 한심한 광경을 보았읍니까? 그리고 그는 이 때문에 우월한 혹은 독선적인 태도를 취했읍니까?

18 ‘예레미야’가 그 도시 지붕 위를 내려다 보았을 때 그는 희생의 연기가 모락 모락 올라가는 것과 사람들이 특히 여자들이 “하늘 황후”에게 희생의 과자와 전제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었읍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매일 보셔야 했던 가증한 광경이었읍니다. 그의 이름을 대표한 도시가 이토록 극도로 그를 모욕하다니!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오래 참으심에 놀랐읍니다. 그는 “이 무리는 비천”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예레미야 5:4; 19:13; 44:15-19, 난외주; 18:13)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나라에 대한 여호와의 불쾌심이 자기에게도 예외가 아님을 인정하였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을 욕되게 마옵소서.” (예레미야 14:20, 21) 그는 “그대들보다 거룩하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며, 여호와께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자기를 사용하시는 과분하신 친절에 감사하였읍니다.

19, 20. 오늘날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히 하는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중요하며, ‘예레미야’의 어떠한 말이 우리에게 격려가 됩니까?

19 교직자들이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진화론과 국가주의와 과학과 철학의 우상신에게 돌리는 오늘날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한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인내심을 앙양하여 줍니다.

20 “여호와여 주와 같은 자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인하여 크시니이다 열방의 왕이며 주를 경외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열방의 지혜로운 자들과 왕족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음이니이다.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 . .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이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을 펴셨[느니라.]”—예레미야 10:6-8, 10-13.

격려

21, 22. (ㄱ) ‘예레미야’는 조롱과 핍박을 받아도 까딱없는 “초인”이었읍니까? (ㄴ) 그가 제사장과 장로들 앞에서 질그릇을 깨뜨리는 사명을 수행한 뒤에 무슨 일을 당하였읍니까? (ㄷ) 이일 후 ‘예레미야’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그러나 그 다음에 그는 어떻게 하였읍니까? 그리고 그는 왜 전파 사업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까?

21 당신은 때때로 자주 거절을 당하여 실망합니까? 위안과 격려가 되는 ‘예레미야’의 본을 따르십시오. 예수의 이부 동생 ‘야고보’의 “‘엘리야’[‘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한 말을 명심하십시오. (야고보 5:17)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와 똑같이 ‘예레미야’는 대부분이 진리를 반대하는 불완전한 사람들 틈에서 산 불완전한 인간이었읍니다. 그릇을 깬 사건 직후에 ‘예레미야’는 일대 봉변을 당하였읍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한 그의 소식이 무시되었음은 물론, 최대의 모욕의 상징으로 성전 유사장(有司長)에게 맞았읍니다! 성전 유사장의 명령에 따라 막대기로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고위 관리가 솔선하는데야 사람들은 틀림없이 마음놓고 희롱과 조롱과 야유를 실컷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에게 충동되어 그를 때리고 침뱉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대표자인 그를 범인처럼 착고(着錮)에 채웠읍니다. (예레미야 20:1-3) 착고는 아마 성문에 있는 방이나 감방에 있었을 것입니다.—역대 하 16:10; 사도 16:24을 비교하라.

22 착고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비틀림, 뒤틀림”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강제로 사람을 사정없이 구부린 부자연스런 자세로 만들었읍니다. 그런 자세로 밤을 샌 ‘예레미야’는 멍이 들고 온 몸이 저리며 기진맥진하였을 것이며, 사기가 저조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을 저버리지 않았읍니다. 여호와께 대한 기도 가운데 그는 여호와의 이름과 말씀 때문에 모욕과 조롱거리가 되었음을 안다는 것과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자기를 비방하고 그가 잘못을 저지르기를 기다려 그들이 자기를 없애려고 한다는 것을 말하였읍니다. 사실상 그는 쉽게 바로 그날 그들의 손에서 죽음을 당할 뻔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서 의로운 재판장과 구원자로서 어떻게 그와 함께 하셨는가를 알았읍니다. 그리고 그는 안심하고 자기의 문제를 여호와의 손에 맡겼읍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 속에만 간직할 때의 압박감을 인내하는 것보다 모욕과 고통을 인내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그 압박감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현대의 그의 백성들도 이와 같이 구원하여 그의 말씀과 영으로 열심을 고취시키지 않으셨읍니까? 우리 개인의 경험과 여호와의 증인들의 역사는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레미야 20:9-12) 여호와의 말씀으로 교육받은 양심의 고통을 받는 것보다 모욕을 견디는 것이 더욱 행복하지 않습니까?

23. (ㄱ) ‘예레미야’가 왜 악인들이 번영하는가를 질문하였을 때 그는 어떤 대답을 얻었읍니까? (ㄴ)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하며,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무슨 진리를 명심해야 합니까?

23 한 때 ‘예레미야’는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 . . 그들이 . . .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신장(신세), 감정 혹은 느낌의 중심부]은 머니이다” 하고 질문한 일이 있읍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로부터 대답을 얻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가 그런 자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과 마침내 그들을 이 땅에서 근절할 것임을 밝히셨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내는 여호와께서도 인내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것과 그는 악한 행로를 계속 걷는 자들을 감찰하시고 심판을 집행하실 것을 인식하는 데 기초하여 있읍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악한 생활을 하면서도 번영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가면적인 주장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 뿐 아니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내하십시오. 그러면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예레미야 12:1, 2, 12-14; 시 37:7-9; 히브리 11:6; 갈라디아 6:9.

24. (ㄱ) ‘예레미야’가 일시적으로 실망해서 한 말을 읽을 때 우리는 무엇을 고려해야 합니까? (ㄴ) 우리가 역경에 처하면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24 우리는 ‘예레미야’가 봉사한 기간이 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가 말년에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하는 식의 말을 하였는지 이해가 됩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체포되어 구타당하고, 착고에 채워지고, 거듭 거듭 체포되며, 누차 감옥에서 형기를 보내고, 끊임없이 조롱과 위협을 당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여러 해가 흘러가는 동안 어떤 상당히 괴로운 불평을 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자기가 미미한 존재이며 자기의 여호와를 향한 일편단심을 그분이 이해하시며 자기에 대하여 감정이입을 가지고 계심을 알았읍니다. (예레미야 20:14-18; 12:3) 참으로 실망적인 환경이 우리를 제압할 것같을 때 우리는 이런 본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를 사용하고 그를 후원하며 그에게 활력을 준 분은 ‘예레미야’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이셨읍니다. 그 사실은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역경에 빠지게 내버려 두실 때는 목적이 있으며, 우리가 얼마의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인내하여 그 후의 더 큰 행복을 획득하는데 필요한 부가적인 힘을 책임지고 주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25. ‘예레미야’의 본은 우리가 하찮아 보이는 일에 있어서 순종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어떻게 도와 줍니까?

25 때때로 우리는 자발적이고 민첩한 순종의 시험을 받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비교적 사소해 보이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자진적으로 시간과 정력을 사용합니까? 아마 그 일이 지난번 호별방문 때 집에 없었던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혹은 그저 잡지만 받은 사람을 재방문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 일이 성서 연구를 정기적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일이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방문하는 일일 수도 있읍니다. ‘예레미야’는 베띠를 가지고 4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유브라데’ 강가로 가서 바위 틈에 그것을 숨기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길이 멀고 하찮은 일이라고 불평할 수도 있었읍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다시 가서 그것을 취하라는 지시를 받았읍니다. 그 때 그것은 물론 못쓰게 되었읍니다. ‘그까짓 띠를 가지고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고 질문할 수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순종하였고 그 띠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여호와의 오래 참으심에 대한 강력한 증거와 생생한 그림이 되었읍니다.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찬양과 영광을 위하여 그의 허리에 띠처럼 둘렀던 그의 나라를 완고와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마침내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그의 결심에 대하여 감명을 받게 하였읍니다.—예레미야 13:1-11.

결혼

26, 27. (ㄱ) 어떤 사람들은 인내심이 약함을 어떻게 보입니까? (ㄴ) 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예레미야’는 우리에게 어떻게 본을 보였으며,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26 여호와의 헌신한 증인들 가운데는 간혹 헌신하지 않은 사람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나아가서는 불신자와 결혼까지 하는 경우가 있읍니다. 그 문제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는 대개 변명하기를 ‘회중 내에 나와 비슷한 나이로 마음에 맞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한 행로가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그런 식의 논리가 인내심을 약화시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읍니다. ‘예레미야’의 본은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결혼하는 동기가 어떤 면으로는 우리 시대보다 더욱 강했읍니다. 지금처럼 선천적인 욕망이 있었는데다 토지 상속과 가문을 아주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상속인을 낳지 못하는 것은 불행으로 간주되었읍니다. (신명 25:5, 6; 사무엘 상 1:5-11)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주셨읍니다.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찌니라.”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 것은 물론 ‘아예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었읍니다!—예레미야 16:1, 2.

27 이러한 여호와의 명령에는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설명하셨읍니다. ‘예루살렘’ 역사상 그러한 위험한 시기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불행만 당할 것입니다. 불원간 ‘예루살렘’은 멸망되고 그들의 자녀들은 죽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결혼 문제보다도 여호와께 대한 봉사와 그의 말씀을 더 중요시하여 그대로 순종하였읍니다. 그는 여호와를 믿었읍니다. 한편 여호와께서는 그가 인내하여 행복한 결과를 얻도록 그에게 힘을 주셨읍니다. (예레미야 16:3, 4) ‘예레미야’ 시대보다 훨씬 더 긴급한 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결혼한다면 “주 안에서” 결혼함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내를 보여야 하지 않겠읍니까? 그를 불쾌하게 하느니보다, 필요하다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인내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그분이 생각하시는 것을 마련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사무엘 하 12:7-9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살펴 보십시오.

교제

28. (ㄱ) ‘예레미야’는 어떠한 교제를 존중히 여겼고, 가졌읍니까? (ㄴ) 어떤 교제가 가장 즐거웠으며,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훌륭한 사람들 가운데 ‘예레미야’를 포함시키십니까?

28 교제면에 있어서 ‘예레미야’는 자신을 감시하였읍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존중하였읍니다. 그것은 그의 기쁨과 즐거움이었고 그것은 여호와와 밀접한 교제를 계속하게 해 주었읍니다. (예레미야 15:16) 그는 하나님과 그런 밀접한 교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여호와를 숭배하는데 관심이 추호도 없고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피하였읍니다. (예레미야 15:17) 여호와의 혐오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예레미야’는 선한 인간 동료들을 발견하였읍니다. 그에게는 충실한 보조자 ‘바룩’이 있었읍니다. ‘예레미야’를 진흙 구덩이에서 구해 준 ‘에디오피아’ 사람 ‘에벳멜렉’을 포함하여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이 몇몇 있었읍니다. 이 때문에 ‘예레미야’는 ‘에벳멜렉’에게 ‘예루살렘’ 멸망시에 그의 생명이 안전하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을 전해 주는 행복한 특권을 가졌읍니다.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이 시험 아래에서 충성을 지켜 ‘예루살렘’ 거민을 부끄럽게 하는 것을 보았읍니다. (예레미야 35:1-19)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달갑게 여기는 것을 향유하지는 못하였지만 실제로는 최대의 기쁨이 되는 가장 가치 있고 즐거운 것 즉 여호와의 통찰력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예레미야 9:23, 24; 고린도 전 1:31) 그가 충성스러웠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를 저 거대한 “구름 같이 둘러싼 . . . 증인들” 가운데 포함시키시며, 그분은 그들을 위하여 한 “성” 즉 그의 왕국 정부를 마련하셨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우리가 믿음을 본받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우십니다.—예레미야 36:4-8; 38:7-13; 39:15-18; 히브리 12:1; 11:16.

신체적 고통

29. ‘예레미야’는 어떠한 일을 경험하여 “고난[의] . . . 본”이 되었읍니까?

29 여호와의 증인들 전부가 진리 때문에 신체적인 고통을 당한 것은 아니나, 상당 수가 고통을 겪었고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당하기까지 하였읍니다. ‘야고보’는 ‘예레미야’도 지적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고난과 인내에 있어서는 주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본받으시오.” (야고보 5:10, 새번역) ‘예레미야’는 그의 고향 ‘아나돗’에서 사람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았는가하면(예레미야 11:21), 성전 유사장 ‘바스훌’에게 매맞고 밤새도록 착고에 채움을 당하였고(예레미야 20:2, 3),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거짓 예언자들과 백성들로 이루어진 폭도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할뻔 하였읍니다. (예레미야 26:8-11) 그는 시위대 뜰에 갇혔었으며(예레미야 32:2; 33:1), ‘베냐민’ 땅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려고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러 간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때 방백들은 그를 때리고 여러 날 동안 옥에 가두었으며 그는 왕에게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때에도 그는 시위대 뜰에 감금되어 있었읍니다. (예레미야 37:11-16, 20, 21) 그 후에 그는 ‘시드기야’ 왕에 의하여 방백들에게 넘겨졌고 그들은 ‘예레미야’를 진흙 구덩이에 던져 넣어 죽이려고 하였읍니다.—예레미야 38:4-13.

30.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의 시위 대장이 ‘예루살렘’에서 포로들을 끌어내 올 때 어떻게 생각했읍니까?

30 이 외에도 ‘예레미야’는 선악의 구별 없이 다른 ‘예루살렘’ 거민들과 같이 ‘바벨론’인들의 공격으로 곤란을 받았읍니다. 결국 그는 석방되었고, 새로 도시를 점령한 ‘바벨론’ 관리들의 명령으로 ‘느부갓네살’의 시위 대장은 수갑을 벗겨주었읍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그토록 쓰라린 학대를 받는 동족을 사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에 돌려지는 모욕에 대하여 심히 부끄러워하였읍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과 하나님의 보좌와 그의 이름을 지닌 백성들이 하나님의 옛 원수 ‘바벨론’과 악귀신인 ‘므로닥’의 숭배자들의 더러운 발에 손상되고 유린되다니! 그는 모욕과 치욕이 너무나 커서 자기도 사로 잡혀가서 전 민족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예레미야 40:1-5.

31. (ㄱ) 여호와께서는 심지어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가게 할 때에도 어떻게 사랑을 보이셨읍니까? (ㄴ) ‘예레미야’는 이 때에 어떠한 행복한 희망을 가졌읍니까?

31 ‘예레미야’는 어디에서 그러한 사랑을 배웠읍니까?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사실 여호와께서는 과분하신 친절로 충만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 않으시고 ‘예레미야’에게 그의 언약을 잊지 않았음과 그의 충성스런 종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다윗’에 대한 사랑이 감소되지 않았음을 알리셨읍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이렇게 암담했던 시대에도 ‘예레미야’는 행복한 희망을 가졌읍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70년 후에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은총으로 회복될 것을 예언하도록 영감을 주셨고, 그 자신도 알지 못하였을 먼 장래에 하나님께서 영적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을 것을 예언하도록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31:31-34.

보호

32. ‘예루살렘’이 종말될 때가 가까와 옴에 따라 왜 ‘예레미야’는 더욱 더 보호가 필요하였읍니까?

32 이제 ‘예레미야’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놀랍게 조종하신 일을 고려해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희망이 거의 없었읍니다. 특히 ‘예루살렘’이 점점 기울어져 가고 마침내 그 도시가 ‘느부갓네살’의 포위 공세에 절망적이 되었을 때 그러하였읍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의 불공대천의 원수들이었읍니다. 국가주의적인 정신을 가진 방백들은 대개 그를 미워하고 그를 비애국적이고 선동적이라고 간주하였읍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한 가장 위험한 일 중 한 가지는 그가 부유하고 세력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그들의 ‘히브리’ 종들을 돌려보내라고 말하여 그들의 재산에 영향을 끼친 일이었읍니다. 그들은 처음에 여호와의 전에서 언약까지 맺으면서, 순종하였읍니다. 그것은 물론 위선적이었읍니다. 그들은 그 도시에 위험이 지나간 것처럼 보였고 그들이 여호와께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언약을 파하고 ‘히브리’ 형제들을 다시금 노예로 삼았읍니다. 이 때문에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그들이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여지겠다고 말하였읍니다.—예레미야 34:8-22.

33. 왜 ‘예레미야’는 결코 외로와하지 않았으며,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모든 면으로 ‘예레미야’에게 가까왔음을 보이셨읍니까?

33 ‘예레미야’가 구출받은 모든 경우를 하나 하나 고려해 보면서, 여호와께서는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오늘날 그의 백성들을 보살피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예레미야’가 시련을 당할 때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참으로 가까이 계셔서 그가 충성을 지킬 때 여호와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읍니다. 결코 그분은 ‘예레미야’가 자기 힘으로 시련과 유혹을 당하게 하여 참지 못하게 하지 않으셨읍니다. (고린도 전 10:13) 결코 ‘예레미야’는 외로와하지 않았읍니다. ‘예레미야’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원수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넣어 주셨고 아직도 하나님의 율법을 존경하는 그들의 양심이 가책을 받게 하셨읍니다. 혹은 직접 천사를 시켜 보호하게 하는 외에도 ‘예루살렘’의 멸망시처럼 어떤 의로운 마음을 가진 개인들을 등장시키기도 하셨읍니다. 자, 다음에 열거하는 예에서 ‘예레미야’의 인내를 맹렬히 시험하여 사태가 아슬아슬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보호가 있었다는 것에 유의하십시오.

34. ‘예레미야’의 원수들은 무엇 때문에 주춤하고 있었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떻게 비슷하게 보호를 받아왔읍니까?

34 (1) ‘예레미야’의 원수들인 제사장들의 간절한 욕망은 그를 죽여 없애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말함을 알았기 때문에(그 자체가 커다란 보호였다) 그들은 그에게 친절한 인사를 하지만 그가 아무쪼록 조그만 실수라도 범하여 그들이 그에게 복수를 해도 합법적인 것처럼 보이게 될 수 있는 기회를 노렸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두려운 용사” 같이 그를 조심성있게 그리고 기술적으로 인도하셨읍니다. (예레미야 20:10, 11)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여호와께서 우리 시대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을 통하여 그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항상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원수들은 우두커니 서서 그들이 그들의 사회를 결속시켜 나가는 법률을 범하지 않고 사업을 중단시킬 방도를 구하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읍니다.

35.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가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할 때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슨 수단을 사용하셨읍니까?

35 (2) ‘여호야김’ 통치 초에 ‘예레미야’가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이들의 추종자들에게 죽임을 당할 찰나에 여호와께서는 그 험악한 사태를 ‘예레미야’가 전파 사업을 변호하고 합법화할 수 있는 기회로 바꾸어 주셨읍니다. 이 경우에 여호와께서 그가 변호하도록 주선하셨다는 것이 ‘유다’의 어떤 장로들의 장성된 이론이었읍니다. 그들은 과거의 여호와의 처사를 인용하였고 그 결과 유력한 방백 ‘아히감’이 나서서 ‘예레미야’를 보호하게 되었읍니다.—예레미야 26:7-24.

36.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그가 옥에서 죽음을 면하게 하셨읍니까?

36 (3) ‘예레미야’는 여러 날 옥에 갇혀 있었으며 거기서 얼마 안 있으면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시드기야’ 왕에게 호소하게 되었읍니다. 왕은 염치 없고 겁이 많은 성격과는 달리 시위대 뜰에 ‘예레미야’를 두도록 명하였고, 그는 거기에서 매일 떡을 먹을 수 있게 되었읍니다. 왜 ‘시드기야’가 이렇게 했읍니까?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돌보셨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읍니다.—예레미야 37:18-21.

37. ‘여호야김’ 왕이 그를 죽이려고 했을 때 누가 그를 보호하였읍니까?

37 (4) ‘여호야김’ 왕이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불태운 후에 왕이 ‘예레미야’와 그의 보조자 ‘바룩’을 죽이려 할 때에 ‘여호야김’의 신하들이 그들을 찾았으나 허사였읍니다. 방백들은 두루마리를 왕의 귀에 읽히기 전에 그들에게 숨으라고 경고해 주었읍니다. 그러나 친절을 베푼 방백들이 계속 그들을 숨어 있도록 도와 주었건 않았건 그것은 확실히 여호와의 보호였읍니다. 왜냐 하면 기록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계속] 숨기셨”다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36:19-26, 신세 참조.

38.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죽을 뻔 하게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셨읍니까?

38 (5) 의로운 마음의 소유자인 ‘에디오피아’ 사람 ‘에벳멜렉’을 여호와께서는 자극하여 ‘예레미야’를 진흙 구덩이에서 구출해 내어 죽음을 모면하게 하셨읍니다.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돕는 것이 위험하였기 때문에 30명의 부하를 데리고 갔읍니다.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조할 때, 그의 적들이 방해하는 것을 막는데 부하들이 필요했읍니다. 그리고 이것을 허락한 것이 바로 ‘시드기야’였읍니다. 이것 역시 ‘시드기야’가 ‘예레미야’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읍니까? 우리는 확신있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예레미야 38:7-13.

39. ‘느부갓네살’의 시위 대장이 ‘예레미야’를 석방시킬 때 여호와의 손이 어떻게 분명히 보였읍니까?

39 (6) ‘예루살렘’의 숙적 ‘바벨론’의 왕이며, ‘므로닥’ 신의 숭배자이고 세계적인 통치자였던 ‘느부갓네살’은 충동을 받아 시위 대장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를 해하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였읍니다! 왜 그렇게 하였읍니까? 왜냐 하면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데 충실하였고 여호와 즉 왕들을 마음 대로 휘두를 수 있으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 . . 자기 뜻대로 행하게” 하시는 여호와께서 그의 편에 계셨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39:11-14; 40:1-5; 다니엘 4:35.

40. (ㄱ) ‘예레미야’는 어떻게 ‘예루살렘’의 포위, 무너짐, 그리고 멸망을 통하여 생명을 보존하였읍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그 후에 그의 언약을 잊지 않으셨음을 어떻게 보이셨읍니까?

40 (7)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멸망될 때, 그 도시에 양식이 떨어져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를 먹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내 성벽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거민들은 학살 당하였으며,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목전에서 죽였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포로들을 사슬로 결박하여 끌어가는 판국에도 ‘예레미야’는 생존하였읍니다. (예레미야 19:9; 39:6-9; 52:10, 11) 여호와의 천사들이 그를 보호하였읍니다. ‘바벨론’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불타오르는 성 밖에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여호와께서 하시는 것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었읍니다. 그는 살아 남았으며, ‘바룩’도 무사하였으며, ‘에벳멜렉’도 생존하였읍니다. 정직한 마음을 가진 ‘레갑’ 족속도 포로로서 생존하였읍니다. (예레미야 39:16-18; 35:17-19; 45:2, 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어 ‘여호와김’의 아들 ‘여고니야’(십년전에 ‘바벨론’에 잡혀 감)가 살아 남아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의 조상이 되게 하셨읍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다윗’의 위의 법적 계승자가 되었읍니다. 또 여호와께서는 ‘엘르아살’과 ‘비느하스’의 대제사장 계통의 ‘여호사닥’을 생존시키셨읍니다.—예레미야 52:31-34; 마태 1:11, 16; 역대 상 6:1-15.

41. ‘예루살렘’이 무너진 후에도 ‘예레미야’에게는 왜 계속 인내가 필요하였읍니까?

41 이 모든 일이 있은 후에도 ‘느부갓네살’의 허락으로 그 땅에 남아 있었던 소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예레미야’의 예언을 청종하지 않았읍니다. ‘예레미야’는 강제로 애굽으로 끌려갔읍니다. 거기서 그는 예언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인내하였읍니다. 그 일은 아직도 담대함이 요구되었읍니다. 왜냐 하면 사람들에게 여호와 대신에 애굽 왕에게 의지하면 재앙을 만날 것을 선언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43:8-10; 44:1, 28, 29.

42. ‘예레미야’가 인내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일 한 가지는 무엇이었읍니까?

42 ‘예레미야’의 인내의 두드러진 한 가지 면은 그가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지적 조직에 불쾌감을 쏟는 것을 경험한 점입니다. 그 조직은 사로잡혀 갔고 조직의 성원들은 노예가 되었읍니다. 이제는 여호와를 대표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지적 조직이 없게 되었읍니다. 그의 이름에 찬양이 되었던 도시와 왕국은 이제 사라졌읍니다. ‘다윗’ 계통의 왕들은 폐위되었읍니다. (에스겔 21:25-27) 더는 ‘시온’ 산이 “온 세계[의] 즐거워함”과 여호와의 이름에 찬양이 아니라 이제는 실제로 모욕이 되었읍니다. (시 48:2; 애가 1:1, 8) ‘예레미야’는 70년이 지나야 회복이 있을 것과 그 때는 이미 자기가 죽은지 오랜 뒤가 될 것을 알았읍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예레미야’의 인내심이 약해지지 않았읍니다.—예레미야 25:11, 12.

43.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조직이 해체되는 일을 당할 것입니까? 설명하십시오.

43 우리는 오늘날 그러한 가슴 아픈 일을 인내할 필요는 없읍니다. 여호와의 백성들로 된 그의 조직은 일치 연합되어 있고 여호와의 은총과 그의 승인의 표현을 즐기고 있으며, 결코 좌절되거나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여 버림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54:7-15) 우리가 조직의 성원들과 정기적으로 교제할 수 있으며 본부와 직접 접촉을 갖건, 지리적으로 혹은 박해로 인해서, 아니 독방에 감금되어서 완전히 격리되어 있건, 우리는 하나님의 조직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고 그의 이름에 찬양을 돌리고 있음을 알고 있읍니다. 이 때문에 인내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44. 현대 여호와의 증인들이 겪은 비슷한 포로생활의 기간이 있었읍니까? 그 이유는? 앞으로는 어떻겠읍니까?

44 지금도 살아 있는 얼마의 형제들은 실제로 여호와께서 그의 조직을 불쾌하게 여기시고 1914-1918년에 큰 ‘바벨론’에 갇히는 것을 허락하신 때를 경험하였읍니다. 그 때는 확실히 억압에 짓눌리면서 인내해야 하였읍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매우 작아졌읍니다. 각 개인의 충성이 맹렬한 시험을 받았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충성스런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셨읍니다. 그는 그들에게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셨고 그들은 전보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되어 나왔읍니다. 그분은 그들을 그의 사랑 가운데로 회복시키고 그후로는 아무것도, 심지어 2차 세계 대전, 혁명, 독재, 당국의 금지령, 폭행, 투옥과 조직의 성원들 얼마를 죽이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조직의 성장을 양과 질에 있어서 저해하지 못했읍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의 인내에 후원을 얻어야 합니다.

45. (ㄱ)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인내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까? (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인내를 상실할 때의 결과는 무엇임을 알아야 합니까?

45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가 인내하기를 원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며 그는 매우 관심을 두고 계시므로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 1:2) 여호와의 보좌는 영원 무궁토록 의로우신 왕의 손에 있으며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사를 공평하게 적극적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한 바와 같이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만 수행하고 나머지는 왕께 맡기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안이한 생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각자는 자기의 충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헌신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낙오자에게는 행복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46. 우리가 인내한다면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읍니까?

46 당신이 만일 인내한다면, 당신은 그렇게 하는 동안 행복할 것이며 그리고 아! 당신은 당신의 최종 목표에 도달하게 될 때 얼마나 기쁘겠읍니까! 유혹과 시련이 닥칠 때에 여호와께 기도하고 구출받기를 구하십시오. 언제나 당신이 기대하는 방법으로 응답되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예레미야’에게와 같이 꼭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문제에 봉착했을 때나 당신이 실망을 느낄 때면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잠시 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베드로 전 5:10, 새번역.

[422면 삽화]

‘예레미야’는 죄인처럼 밤새도록 착고에 채움을 당하는 등 최대의 치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모욕을 인내하였다

[427면 삽화]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구출하셨다. ‘예루살렘’이 무너졌을 때 ‘바벨론’의 관헌의 명령에 따라 석방되어 수갑이 풀리었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