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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함’
    파수대—1975 | 8월 15일
    •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난관에도 불구하고 왕국 활동에 열성을 보이고 여호와 하나님께 깊은 정성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도움과 관대함을 받을 가치가 있다. 우리는 ‘고넬료’라는 사람의 관대함을 본받으려고 해야 한다. 그는 침례를 받기 전에도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환상 가운데 천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기도와 자선을 받아들이시고 당신을 기억하고 계십니다.”—사도 10:2-4, 공동번역.

      사도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도 전세계 그리스도인 회중에 여행하는 대표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여호와를 섬기는 웅대한 특권에 대한 형제들의 인식을 높여 주고 그러한 봉사와 관련하여 유익한 제안과 경험을 나누어 준다. 이러한 여행하는 형제들은 우리의 정성스럽고 관대한 지원을 받을 만하다.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권고한 바와 같다. (3:13, 14) “‘아폴로’와 법률가 ‘제나’를 내게 속히 올 수 있도록 주선해 주고 그들에게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게 해 주시오. 우리 교우들도 선행에 전념해서 남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들을 채워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생활이 보람있게 될 것입니다.”—공동번역.

      물론, 우리가 동료 숭배자들의 물질적 및 영적 필요를 항상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먼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한 경우라도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사람들을 직접 접촉할 수 없지만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용하는 법적 기관인 ‘사단법인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를 통하여 그러한 궁핍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그 협회에 보낸 헌금은 전세계에서 영적 관심사를 증진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또한 큰 무리의 형제들이 관대함과 솔선적인 정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협회는 천재지변이나 심한 박해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신속히 구제할 수 있는 자금을 갖게 된다.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와 장래에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관대한 정신을 권고할 때에 지적한 점이다. 그는 ‘디모데’에게 동료 신자들을 격려할 점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디모데 전 6:18, 19) “선한 일”에 참여하고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에게 물질적, 영적인 것들을 관대히 주시는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훌륭한 일이다!—마태 5:45; 야고보 1:5.

  • 사업에서 성서 원칙을 적용시키는 일—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파수대—1975 | 8월 15일
    • 사업에서 성서 원칙을 적용시키는 일—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지금은 사업을 경영한다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되었다. 미국 ‘시카아고우’의 사업 경영 분야 전문가 한 사람에 따르면 현재 사업을 시작하면 사업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기껏해야 50-50이라고 한다.

      사업가의 입장을 어렵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은 광범한 사업상의 부정직이다. 경쟁자들이, 뇌물, 사기, 소비자 속이기 및 탈세를 할 때에 정직한 사업가가 무게나 길이를 정확하게 해 주고, 품질도 좋게 해 주고 그렇게 하고도 이익을 남기기란 어려운 일이다.

      소매 상품에 있어서 부정직이 어느 정도인가는 최근 미국 3개 주에 걸친 조사에서 잘 드러났다. 정제 ‘비타민’, 못, 종이 ‘클립’, 전기 부분품, 화장지, 식품 등의 포장에 중량 혹은 수량이 표시되어 있는 여러 가지 상품을 검사하였다. 수량 미달 포장품의 비율은 놀라울 정도였다. 예로서, 식품에 있어서는 40‘퍼센트’나 되었다. “여덟 마리”들이 냉동 가재 포장 속에 여섯 마리 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100개”들이 ‘비타민’ 병에 85개가 들어 있었다. 검사한 모든 상품이 평균 10 내지 30‘퍼센트’가 부족하였다.

      나아가서 고용인들과 경영진의 도둑질은 매우 심하여 상점도둑과 강도로 인한 손실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 점은 모든 사업가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이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정직하게 하고서도 이기적인 사업계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업에서 성서의 충고를 적용하는 것이 실제 이익이 있는가?

      성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충고한다. (마태 7:12) 그리고 사업 거래에 대하여 “너희는 ···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를] ··· 사용하라”고 하였다. (레위 19:35, 36)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파는 데 쓰는 추와 사는 데 쓰는 추가 다른 것]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잠언 20:23.

      하나님을 존경하는 사업가는 이러한 원칙들을 따를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보고 어리석게 보기까지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불편과 어려움을 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선한 양심을 유지하면—그러한 양심은 하나님 보시기에 큰 가치가 있다—그것은 돈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정직하게 하고도 사업이 번성한다.

      이것은 정직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보다 더욱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정직은 그것을 사용하는 자에게 “양날 선 칼”처럼 작용하여 그들을 파멸시킬 수 있다. 만일 사업가가 부정직함이 들어나면 고객들은 흔히 그를 등질 것이다. 그러나 정직한 사업가는 고객, 상품 공급자 및 신용 거래자들로부터 신망을 얻을 것이다. 또한 고용인도 그를 존경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하려는 의향을 가질 것이다.

      사업가로서 신속하고 능률적인 봉사를 해 주고 품질이 양호한 생산품으로 고객에게 돈의 가치만큼 되돌려 주고 거기에 고객과 거래하는 데 있어서 우정적이고 정직하게 하는 것을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사업은 정직한 사업에 비해서 완전히 파산할 위험성이 더 높다. 이 사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경험한 몇 가지 사례로 보아서도 분명하다.

      미국 남부 지방에 세개의 식품 상점을 소유하고 있는 한 사람의 경험을 보자. 의학적 증거에 의해 담배의 해독이 밝혀지자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하였다. 고객들에게 그들의 건강에 해로운 물품을 팔고 싶지 않아 (그는, 양심적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생각해서 그러한 상품을 광고, 전시 또는 판매할 수 없다고 느꼈다) 점포 지배인들과 상의를 하여 자기의 모든 점포에서 담배 제품을 제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것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단지 담배가 이윤이 높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식품을 살 때에 동시에 담배도 살 수 있는 곳과 거래를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3개월 동안에는 세 점포의 매상고가 심히 격감하였다. 그러다가 매상고가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결국 정상 수준을 회복하였다. 이유는? 고객들은 이들 세 점포의 정직하고 우정적이고 사려 깊은 봉사를 인식하고 담배는 다른 곳에서 사면서도 식품은 거기 와서 사갔던 것이다.

      고용인들을 다루는 일

      사업주는 고용인들과의 관계에서 성서 원칙들을 적용함으로써 사업에 이득을 볼 수 있다. 성서는 이렇게 충고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 (에베소 4:31) 위협, 함성, 주위 사람들을 휘두르는 것 등은 그들을 섭섭하게 만들며 그러므로 사업에 해를 미친다. 성서는 그 이유를 대답한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 15:1.

      고용주는 자기에게 고용되어 있는 사람들이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노예 소유자와 노예들에 대한 성서의 충고는 오늘날에도 고용인과 고용주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여호와]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여호와]께 받을 줄 앎이니[라]. ···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찌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찌어다.”—골로새 3:23-4:1.

      고용인으로서의 정직성

      고용인들은 간혹 부정직을 하도록 강한 압력을 받는다. 사업주들은 고용인들에게 더러 상품의 품질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속이라고 요구한다. 무게와 길이를 속이는 일이 있다. 작업 감독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일을 느리게 하고 빈둥거리라고 충동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사업주들이 정직한 원칙에 고착하는 고용인들을 높이 인식하는 사례도 흔히 있다. 그들은 그 고용인이 자기들에게 충실할 것이며,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이러한 한 가지 예가 서부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있었다. 정부의 고관 한 사람이 자기 부하 중의 유능한 청년 한 사람에게 자기의 개인 비서로 일하도록 요청하였다. 그 직책은 보수도 많고 다른 유익점도 있었다. 그 청년은 그 직책은 좋아하지만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이 한가지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그 사람이 근무 시간 중에 출타했을 때 그 나라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왔을 경우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식으로 그가 화장실에 갔다고 하는 대답은 양심상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관리는 사무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종교인들이라도 그러한 “악의 없는 거짓말”을 꺼려하지 않더라고 주장하였다. 그 청년은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이름이 지위나 돈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저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관리는 좋은 인상을 받고 그 나라에 그와 같이 신뢰성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뉴우요오크’ 시에서, 몇 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는 회사가 고용인들이 도둑질을 한다는 심증을 갖고 고용인들을 감시하였다. 결국 회합을 가졌다. 각 고용인들을 한 사람씩 면담하였다. 각 사람이 다 도둑질하는 것이 탄로났기 때문에 차례로 파면되었다. 그러나 성서 원칙을 고수한 네 사람의 면담 차례가 되었다. 조사를 행하였던 감시원들은 그들을 칭찬하였다. 그들만이 아무 것도 도둑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두 여호와의 증인인 그들은 그후 책임있는 직책을 받았다.

      비슷한 예로, ‘라틴 아메리카’의 어느 나라에 있는 도정 공장에서 있었던 일인데, 제분(製紛)과에서 계속 적자가 났다. 그것은 발송실에서 밀가루 부대를 도둑질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루에 밀가루가 흩어져 있었으나 핑계인즉 부대가 터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사업주는 그 부서의 책임질 사람을 고용하였는데 그제서야 여러 햇만에 처음으로 그 부서에서 이윤을 보기 시각하였다. 조사를 해보니 최근에 채용한 그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성서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라 도둑질을 중단시켰기 때문이었다. 사업주는 그 사람을 전체 공장 지배인으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정직성을 높이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정직성은 보상이 있음이 분명하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부정직하게 하라는 압력 때문에 직장을 잃거나 사표를 내야 하지만, 고용인으로서 성서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유익하며, 올바른 것에 고착하는 사람들은 시편 필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격려를 받는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 37:25) 또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제자들에게 위안을 주셨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31-33.

      그러므로, 사업가이든 고용인이든 성서 원칙을 충실히 적용하는 사람은 “주[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는 말로부터 격려를 받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는 말씀을 확신할 수 있다. (베드로 전 3:12; 잠언 13:21) 그리고 그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큰 보상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365면 그래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미국에서 고용인의 도둑질은 1974년에 100억 ‘달러’로 증가하였다.

      상점 도둑은 그의 절반이었으며, 강도는 그의 70분의 1이었다.

      추정액은 다양함

      단위, 10억 달러

      10 고용인의 도둑질

      8

      6

      상점 도둑질

      4

      2

      강도

      0

  • ‘뉴우스’의 진상
    파수대—1975 | 8월 15일
    • ‘뉴우스’의 진상

      대학살의 유물

      ● 매년 그리스도교인들과 ‘유대’인들이 “대학살”—‘유럽’에서 있었던 ‘나치’ 통치 하의 ‘유대’인 집단 학살—이라고 불리우는 사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하여 회합을 갖는다. 지난 3월에 열린 최근의 회합에서 미국 ‘템플’ 대학교의 종교 교수 ‘프랑클린 에이치. 리텔’ 박사는 “[그리스도교국]의 심장부에서 세례받은 그리스도교인들이 6백만 가량의 ‘유대’인들을 살해한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1900년 하고도 몇년이 더 되는 기간에 일을 하지 않았지 않나 하는 의심을 일으킨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 의문이 교회들의 심한 “영적 싸움”을 야기하였다고 하였으며, “나는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것인가를 자신할 수 없다”고 부언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집단 학살에 대한 책임은 그리스도교에게 있지 않다. 그 책임은 그리스도교국과 그의 교회들에게 있다. 대학살의 이유는 분명하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과 교인들이 성서의 가르침과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버리고 정치 국가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여러 세기 동안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와는 대조적인 현상으로, ‘유럽’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들은 독일의 한 종교 집단도 ‘유대’인들이 당한 바와 동일한 박해를 당하였음을 증언해 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수백명이 집단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국가를 숭배하지 않고 참 그리스도교에 고착하고 그것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다.

      안락사에 대한 교회의 침묵

      ● ‘나치’ 역사의 또 하나의 장(章)이 그리스도교국 교회에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것은 ‘나치’의 소위 안락사 계획이다. 그것은, 약화시키는 요소로 간주되는 자들을 ‘솎아냄’으로써 우월한 ‘튜우턴’족을 만들어 내려는 ‘히틀러’의 계획의 일환이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그 계획으로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간질이 있거나 신체 불구인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 60,000명 내지 100,000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제 와서, 독일이나 다른 곳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서도 많은 수가 죽임을 당한 후까지 전반적으로 침묵을 지켰다는 증거가 표면화되고 있다. ‘예수’회 역사가 한 사람은 그의 저서(Civiltà Cattolica)에서, ‘나치’ 관리들은 처음에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네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는가의 여부를 알고 싶어 하였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나치’ 당국자들은 독일 ‘파델보른’ 소재 ‘가톨릭’ 신학교 교수 한 사람을 임명하여 그 문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였다. 거기에 관계하였던 ‘나치’ 관리 한 사람은 말하기를 그 ‘가톨릭’ 신학자가 ‘교회로부터의 근본적인 반대를 예상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그렇게 한 다음에 ‘히틀러’가 소위 안락사 계획을 추진하였다고 하였다.

      ‘런던’의 「선데이 타임즈」지는 “무시무시한 침묵”이라는 제하에 밝히기를, ‘나치’당이 그 계획을 진행한지 1년 후에야 ‘바티칸’ 방송은 처음으로 소위 안락사에 대해 비우호적으로 언급하였으며, 그러나 독일에 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안락사 계획은 1941년에 종결되었다. 그런지 거의 2년이 또 지난 다음 1943년 6월 29일에야 교황(비오 12세)은 안락사를 단죄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의 성명은 이미 죽은 수많은 성인들과 아이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의미심장하게도, 두 가지 경우 다(‘가톨릭’ 신학자와 ‘런던’의 「선데이 타임즈」) 학자들은 안락사 계획이 ‘유대’인 집단 학살의 전조였다고 지적하였다.

      ‘바벨론’의 재건?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 그곳에 처할 자가 없겠고 거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이사야 13:19, 20) 약 1세기 후 기원전 539년에 ‘바벨론’ 왕국이 무너졌다. 그런데 최근 ‘프랑스’의 한 신문은 “고대 ‘바벨론’과 ‘바벨’탑의 재건”에 관한 활동에 대해 소개하였다. ‘바벨론’은 참으로 사람이 다시 살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보도는 사실상 ‘이락’ 정부가 여러 세기 동안 황폐되어 있던 그 고대 도시를 발굴하여 묻혀있던 것을 더 많이 들춰내려고 하는 작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일에 임명되어 있는 ‘이탈리아’의 한 고고학자는 ‘바벨론’이 “흙으로만 덮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수로도 덮여 있어 물을 퍼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인용되었다. 그곳은 지금도 성서 예언에 명시된 대로 폐허 그대로이고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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