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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려운 ‘콜롬비아’의 동물들깨어라!—1975 |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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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였더니 그 여자는 서슴치 않고 “‘하피’ 독수리”라고 대답하였다. ‘콜롬비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아메리카’ 열대 지역에서 서식하지만 그 여자의 선택은 이해할 만하다.
이 독수리는 머리는 여자이고 몸과 발톱은 새인 ‘그리이스’ 신화의 괴물(‘하피’)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상당히 크고 회색 빛나는 늘씬한 새이다. 그 새의 독특하면서도 위엄있는 얼굴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그 얼굴은 전면에서 보면 놀랄 만큼 사람같이 보인다. 이러한 유사점은 여자의 머리 모양처럼 머리 윗부분의 겹으로 된 깃털장식 때문에 더욱 강조된다. 비교적 큰 암컷의 무게는 11.3‘킬로그램’이나 되어서, 키는 북미산 독수리가 더 크더라도 독수리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라 한다.
‘콘돌’이란 다른 새는 ‘콜롬비아’의 상징으로 고려된다. 3‘미터’의 날개폭을 가진 웅장한 새로서 ‘콘돌’은 높은 ‘안데스’ 산맥 위에 유유히 날아 오른다. 남미의 다른 나라들에는 더 많이 있지만 ‘콜롬비아’에는 약 200마리 정도 남아있다고 믿어지며 현재 멸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칼리’ 자연사 박물관에는 가장 크다고 하는 벌새를 비롯하여 얼마의 벌새가 있다. 그렇지만 현재는 ‘콜롬비아 프레이다’ 위 ‘안데스’ 산맥 기슭에서 더 큰 종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물론 크기에 대해서는 착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콜롬비아’의 야생동물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적다는 것을 고려할 때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발견되어야 할 새나 동물들이 아직도 많이 있을 것같다. 이곳에서 대형 지렁이가 재발견된 것이 1950년대 후반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콜롬비아’산 동물 중 상당수가 멸종 위기에 있다. 여기에는 뿔달린 명매기, 보통 해오라기, 목벗은 따오기, ‘콘돌’이 포함된다. 부가적으로 ‘재규어’, 안경무늬 곰, 토끼사슴, ‘퓨우마’ 등도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현재 ‘콜롬비아’에서 보존을 위한 운동이 일고 있다는 것은 불행중 다행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사실을 기뻐한다. 왜냐 하면 이상하고 믿기 어려운 수많은 동물들과 아름답고 흥미있는 갖가지 동물들은 이 지방의 매력을 더욱 높여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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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황홀경”은 오늘날 하나님의 영의 증거인가?깨어라!—1975 |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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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견해는 무엇인가?
종교적 “황홀경”은 오늘날 하나님의 영의 증거인가?
“마치 내가 어려서부터 사용하던 말처럼 말소리가 나왔읍니다” 하고 최근에 “방언”을 시작한 한 여인이 설명하였다. 그는 이렇게 부언하였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웠읍니다. 나는 커다란 평온과 내적 평화와 하나님께 가까와짐을 느꼈읍니다. 그리고 나는 울었읍니다. 울 수 밖에 없었읍니다. 그것은 너무 아름다웠읍니다.”
그 여인은 병 고침, 예언하는 일, 모르는 방언으로 말하는 일과 같은 “은사”(‘카리스마타’, 희랍어)를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는 수십만명의 “은사받은 사람들”(Charismatics) 중 한 사람이다. (고린도 전 12:4, 9, 10 비교) 흔히 그러한 현상은 종교적 “황홀경”을 수반한다. 「브리타니카 백과 사전」(1974년판)은 “황홀경”을 “하나님에 관한 내적 환상의 경험, 혹은 신과의 관련 혹은 결합의 경험”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한 “경험”을 수반하는 강력한 감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고 믿게 되었다. 종교적 황홀경은 참으로 오늘날 하나님의 영의 증거인가?
인류 역사를 통하여 각종 종교적 신앙과 관련을 가진 무수한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존재자와의 황홀한 경험을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예를 들면, 그와 같은 경험은 고대 이교의 “신비의 종교”에 흔하였으며 신비적인 의미에서 “재생”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유쾌하였을지는 모르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왜냐 하면, 성서는 그러한 종교적 행위에 대하여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게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고린도 전 10:20.
성서 「욥기」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이야기를 싣고 있는데, ‘엘리바스’는 다음과 같은 초자연적인 종교적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그 때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었느니라].” (욥 4:15, 16) 그러나 그 영에 의하여 유도된 경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엘리바스’에게 ‘네가 나를 가르켜 말한 것이 정당치 않다’고 책망하신 사실로 보아 분명하다.—욥 42:7.
오늘날은 어떠한가? 일부 사람들이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종교적 황홀경의 경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그러한 유쾌한 경험은 하나님께서 승인하지 않는 행위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언의 형태」라는 책에서 저자 ‘앨런 보간’은 자기가 어떤 “심령 상태”에 들어가는 데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흔히 이와 함께 일종의 사랑의 감정이 초래되고 내적인 행복감이 솟아나고 은사받는 느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발산된다.” 그러나 성서는 “심령”의 능력을 하나님의 영의 증거로 보지 않고 천리안과 예지와 같이 신비술 행위를 악귀들 곧 “악의 영들”의 영향과 결부시킨다.—사도 16:16; 신명 18:10-12; 에베소 6:12.
그러므로 분명히, 종교적 황홀경이나 기타 특이한 능력에 대한 경험 자체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가 아니다. 사실 그러한 경험은 악귀적 근원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하나님의 성령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증거는 주로 그 개인의 매일의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고 말한 바와 같다. (로마 8:9) 하나님의 영은 죄있는 “육신”의 타락과 반대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 행실을 초래하는 원동력이 된다. 「신약의 신학 사전」은 이러한 개념을 ‘바울’이 로마서 7:20에서 “내 속에 거하는 죄”에 대해 말한 것에 비교하였다.
“사람 속에 죄가 거한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것은] 일시적인 손님이 아니라 상주하는 집주인이 된다. ··· 그러나 ‘바울’은 영이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하여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 ‘거한다’는 이 말은 황홀경 이상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활에서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가? “신비주의”에 관한 한 책이 권장하듯이, 고의로 “감각의 전언”을 무시하고 “초험적 감정”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성서는 이렇게 조언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정신]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 12:2) 이와 동일하게 골로새 3:9-11(새번역)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시오. 이 새 사람은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와져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을 가지기 위하여는 먼저 하나님께 합당한 “지식”을 통하여 ‘정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성서를 세밀히 연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음에 그는 자기의 생활을 자기가 배운 경건한 원칙에 일치시킴으로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야고보 1:22-25.
그러나 제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은 그들이 행할 수 있게 된 기적들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지상에서 “자기 이름을 증거할 백성”이 더는 ‘유대’인 회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회중임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을 통하여 입증하셨다. (히브리 2:4; 사도 15:14, 새번역) 일단 그 사실이 확립되었을 때 그러한 기적의 능력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러한 것은 단지 초창기의 그리스도인 회중의 특징이었으며 “폐”해질 것이었다. (고린도 전 13: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의 참 추종자들을 황홀한 느낌이나 기적을 행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호간의 사랑으로 식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린도 전 12:29, 30; 13:2; 요한 13:35.
사랑을 첫째 가는 “열매”로 맺는 하나님의 영은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의 참 추종자들 간의 연합을 촉진할 것이다. (갈라디아 5:22; 에베소 4:3-6; 요한 1서 3:23, 24; 4:12, 13) 그러나 종교적 황홀경이나 기타 “경험”을 하나님의 영의 증거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미 지나치게 분열된 그리스도교국을 흔히 더욱 분열시켰다. 이에 대하여 복음주의 교직자 ‘도널드 지이. 밀러’는 자기의 저서 「성서의 확실성」에서 이렇게 논평하였다:
“오순절교회는 경험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방언 운동과 병 고침 운동은 경험으로 자체 입증을 행한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경험에 의지한다. 종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개인의 경험이 최종적인 권위라면 ··· 모든 사람은 결국은 자기 생각에 옳은 일을 행하게 되고 말 것이다 ··· 그것이 집단의 동의를 얻을지라도, 마침내는 그 집단을 여러 갈래의 집단으로 분열시킬 것이며, 특별한 개개 경험은 저마다 자율을 요할 것이다.”
종교적 황홀경 혹은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 하나님의 영의 증거가 아니다. 그러한 경험은 심지어 성서에서 단죄하는 행위와 관련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의 영향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통하여 ‘정신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성품’을 행실로 반영해야 한다.—로마 12:2; 골로새 3: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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