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하라—이겼으나 손해를 볼 수 있다
자가모순 같이 들릴지 모르나, 이겼으나 손해를 볼 수가 있다. 세속 역사와 성서는 이 점을 알려 주며, 우리는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원칙으로부터 교훈을 받아야 한다.
‘피루스’의 승리라는 말이 있다. ‘피루스’는 희랍 ‘에피루스’의 왕이었다. 그는 기원전 3세기 사람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6촌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전투를 한 가운데 ‘아스쿨럼’에서도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승리를 거두기 위해 희생자를 너무 많이 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승리를 한번 더하면 나는 망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 이후, 희생을 너무 많이 치르고 얻는 승리를 “‘피루스’의 승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원칙이 적용되는 생활상의 여러 가지 관계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가 이기기는 하였으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을 경우가 있다. 이 점을 잘 설명해 주는 한 가지 예는 19세기 미국 시인 ‘존 그린리프 위티어’가 말한 사례이다. “학창 시절에”라는 그의 시에서 그는 어느 소녀가 한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술하였다. “‘내가 철자를 맞게 써서 미안해요. 그대보다 나아지는게 싫으니까요. 그건’,—소녀는 고개를 숙였다.—‘그건,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 소녀는 맞춤법 시험에서 승리를 하였지만 후회하였던 것이다. 자기의 승리가 애인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를 많이 써서, 혹은 큰 소리로 오랫 동안 논쟁을 벌여서, 혹은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하여 승리를 거둘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승리는 거두었지만, 상한 감정, 애정과 선의의 손실이라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우리의 주장이 옳을지도 모르며, 우리의 권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위해 대결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편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우리는 감정이입의 정신이 있는가? 만일 우리의 주장에 대한 굴복 혹은 승락이 마지못해 어쩔수 없이 한 것이라면, 그것은 자존심을 상하고 우정을 냉각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심지어는 진 사람이 앙갚음을 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것은 가치가 있는 승리인가?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경매장(競賣場)에서 어떤 물건이나 대지를 꼭 사고 싶어 그 가치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걸었다가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이기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손해를 본 것이다.
또한 감독자, 상관, 사장, 전무가 자기 아래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위험을 당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어떤 일을 자기의 방식대로, 그것이 최선의 방식이 아닌데도, 단순히 그것이 자기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대로 하라고 고집한다. 자기 지위가 높기 때문에 억지로 자기 방식으로 일을 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러나 얼마만한 희생을 치르는가? 그 일이 비능률적인 방법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사업상 손해를 볼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고용인의 작업에 대한 충실성과 관심이 심히 침해를 당하여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내가 그 일에 상관할게 뭐야?” 하는 태도를 갖게 할 수 있다.
일상 생활과 인간 행동 모두에 관계되는 다른 원칙들을 알려 주듯이, 성서는 이점에 대해서도 현명한 충고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충고는 현재에도, 장래에도 우리에게 유익하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경고하셨다.—마태 16:26.
실로 참되고, 실로 합당한 경고이다! 이기적이고 타락한 인간은 자기의 영적 필요를 희생하면서까지 권력과 재물과 명성을 얻는 일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많은 사람들은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성을 추구하다가 가치있는 우정과 가족에 대한 관심을 희생하였고, 또한 자기의 건강을 잃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세상과 세상의 길을 사랑함을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샀으며, 따라서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추구하던 것을 달성하였지만, 아! 그 희생이 얼마나 큰가!
예수의 이부 동생인 제자 ‘야고보’는 이점을 이렇게 강력하게 지적하였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원수가 되면 어떤 결과를 당하는가? 그렇게 되면 영원한 생명을 포함하여 모든 희망을 상실하게 된다.—야고보 4:4.
우리가 이기기는 하였으나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이 원칙은 영감받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충고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립보 2:2-4)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데 지나치게 관심을 갖지 말고, 또 자신의 장점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웃 사람이 갖게 된 때에 우리는 즐거워할 것이다. 이웃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얻게 한다면, 그 결과 우정이 강해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가지 면으로 커다란 유익이 있을 것이다.
이 동일한 원칙이 가르치는 점에서도 적용된다. 그리스도인 전도인에게서 배우는 사람이 거짓 교리를 강력하게 변호하는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때 그리스도인 전도인은 여러 가지 성서 귀절을 인용할 뿐만 아니라 상대자를 어리석게 보이도록 하는 멸시하는 투의 말을 하여 연구생을 압도하려고 할지 모른다. 그럴 경우, 종국에 가서는 전도인의 모든 수고는 허사가 되고 말지도 모른다. 왜 그런가? 그의 방법과 태도가 연구생을 설복시킨 것이 아니라 그를 진리로부터 더욱 멀리 밀어내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논증의 일부분만을 제시하고, 그것도 친절하고 부드럽고 온건한 방법으로 하며, 또 기다렸다가 다음 기회에 토론을 완결짓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이기는 것은 좋고 기쁘지만 손해를 보는 것은 기쁘지 않다. 그러므로 이기기 위해 지나치게 힘을 들이지 않도록 조심하라. 특히 다른 사람의 관심사와 감정이 관련되어 있을 때엔 더욱 그러하다. ‘피루스’의 승리는 달성해도 가치가 없다. 그것은 승자가 또한 손해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