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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산 “황금 양모”깨어라!—1975 |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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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이 주위로 몰려오면, 사향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늑대라고 생각하고 재빨리 그들 특유의 “고슴도치” 방어 자세를 취한다. 때때로 관리자들은 자신이 가운데 있어서, 자기가 돌보는 사향소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어떤 때에는 ‘트랙터’로 끄는 썰매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사료를 운반해다 주는데, 그러면 어떤 어린 새끼들은 돌아가면서 썰매 위로 뛰어올라가 다른 사향소가 그를 떠받아 밀어내릴 때까지 타고 앉아있곤 한다. 어떤 경우에는 억센 사향소가 한 언덕의 정상을 점유하고서는 놀이친구들이 자기를 떠받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자는 자기가 마침내 차례가 되어 폐위될 때까지는 “군주”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린이들이 이 친근한 북극 ‘툰드라’의 외래 거주자를 탈 수도 있는데, 그 동물은 사람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향소들과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동물계에서는 사람을 끄는 동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향소들은 문을 열거나, 자물쇠를 따내거나 심지어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뒤지는 짓궂은 장난을 하곤 한다. 양들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면 관리자의 목소리에 호응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투기 동물”이기는 커녕, 이들 양모 생산자들은 북극의 사랑스러운 동물임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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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종교를 비평하는 것—그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일인가?깨어라!—1975 |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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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견해는 무엇인가?
타인의 종교를 비평하는 것—그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일인가?
‘메릴랜드’ 주(미국), ‘보올티모우어’의 한 교구 신문인 「가톨릭 리뷰우」는 그 당시에 지방 신문들의 지면에 자주 등장하던 미국의 한 종교 단체에 관한 한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동 신문은 여러 통의 비난의 편지를 받았다. 그 이유는? 「가톨릭 리뷰우」의 편집인은 그 다음 호에서 기술하기를 그러한 비난의 편지를 보낸 사람들은 “우리가 현 범기독교 통일 단합 시대에 타 종교 단체에 대한 비평으로 간주될 수 있는 내용을 게재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고 하였다. 당신도 이에 동의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모든 종교는 각각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는 ‘모든 종교는 하나님께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깨어라!」지는 최근의 불교의 교리를 성서의 빛에 비추어 조사한 하나의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이에 대하여 한 불교의 승정은 지금은 “타 인종, 국가 및 종교들간의 상호 이해”의 시대라고 말하면서,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은 자유주의적이자 범기독교 통일 단합주의적 견해를 가질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또한 정직성과 솔직성이 권장되고 요구되는 시대가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 종교분야에 있어서도 적용되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예수회’ 총회장 ‘페드로아루페’는, ‘마드리드’에서 발간되는 한 ‘가톨릭’ 신문이 인용한 바와 같이, 이렇게 천명하였다. “본인은 교회의 어떠한 비평도 단호히 반대한다. ··· 비록 그 동기가 아무리 진정한 것이라 할찌라도, 개인들이나 집단들에 의하여 그들의 호의 여부에 관계없이 어떠한 약점을 꼬집힘 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동 성명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더 가톨릭 월드」지는 말하기를 동 ‘예수’회의 수뇌는 “전근대적인 이상론을 되풀이하고 있다. 교회는 이미 하나의 위기를 넘어섰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유럽’의 한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교회의 모든 것에 찬동하고 ‘아멘’을 외칠 필요는 없다. 비평하는 것, 사실상 큰 소리로 비평하는 것이 하나의 의무일 수도 있다.”—「공의회, 개혁 및 재결합」.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견해가 있다. 우리는 성서, 특히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그 기록을 근거로 타인의 종교를 비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일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종교에 대한 그러한 비평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남을 ··· 판단하지 마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 판단 받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인용한다. (마태오 7:1, 공동번역) 이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계속하여 청중들에게 자기 자신의 눈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버리기 전에는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무시해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 7:3-5) 그러면 그의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제미슨’, ‘포오세트’, ‘브라운’ 공편 성서 주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문맥을 보면 여기서 정죄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성격과 행동을 나쁘게 보는 기질, 필히 경솔하고 부당하게 그리고 불쾌하게 남을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기질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개인적인 형태의 ‘판단’을 뜻하신 것임을 확증하여, 성서 주석가 ‘앨버어트 바아네스’는 예수께서는 “사적인 판단 ··· 그리고 아마 기본적으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습관를 가리킨 것”이라고 말하였다. 물론, 그리스도인들 각자는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습관과 기호를 경솔하게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의 충고를 적용시켜야 한다. (로마 14:1-4, 10 비교) 따라서, 마태 7:1-5에서 예수께서는 다른 종교의 신조와 관습에 관한 성서에 기초한 솔직한 논평을 제시하는 것을 금하신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 점을 확신할 수 있는가? 예수 자신의 본을 유의해 보라.
한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들을 따르는 것보다는 자기들의 전통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던 어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일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의 종교를 비평하는 것을 주의깊이 피하셨는가? 반대로,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당신들은 당신네 전통을 핑계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읍니다. 이 위선자들,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예언은 바로 당신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도다].’” (마태오 15:6-9, 공동번역) 이러한 비평의 말씀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어떠한가? 그 말씀은 어떤 사람들의 감정을 손상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마 더욱 노골적인 것은 마태 23장에 나오는 그의 말씀일 것이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을 “어리석고 눈먼 사람들”, “눈먼 인도자들”, ‘뱀 같은 자들,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부르셨다. (마태오 23:16, 17, 24, 33, 공동번역) 그러한 말씀에 충격을 받을 일인가? 다시 질문하거니와 예수께서 “그리스도인답지 않은”가? ‘로마 가톨릭’교 사제인 ‘브루스 보우터’ 선교사는 이 “말씀은 그 길이와 그 통렬함 양면에 있어서 어느 정도 당황케 하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이것을 하나의 역사 기록으로서 그리고 복음과 소식의 일부로서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였다.—「사복음서: 개론」.
그러나 한번 자문해보자. 예수께서 자기가 전하는 동일한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종교인들을 공공연히 비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동기가 나빴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성품이 유순하셨고 친절하셨지만, 의를 사랑하셨고 정직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어긋나게 가르치고 행하는 자들을 비평하신 것이다.—마태 11:28-30; 히브리 1:9.
또한, 예수의 솔직한 논평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예로써, 만일 당신이 어떤 위험한 기계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도중 반복하여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다면 어떠하겠는가?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하기 전에 누군가가 당신을 시정해 준다면 유익하지 않겠는가? 그와 같이, 예수의 진실된 비평을 듣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승인과 구원을 얻는 방향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러한 논평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성서는 예수의 제자들 역시 종교의 잘못에 주의를 환기시킨 일이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 준다. 예로서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스데반’의 용감한 비난의 말을 읽어보라. (사도 7:51-54)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아데네’ 사람들의 우상 숭배를 “무지”의 소치로 규정하였다. (사도 17:29, 30) 더 나아가서, 진리에 대한 사랑에 의거하여 이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참 그리스도교로부터 이탈한 행위를 폭로하였다.—디모데 전 1:19, 20; 디모데 후 2:16-19.
그러나, 당신이 그 당시에 살았었다고 가정하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당신의 친구와 친척들의 종교를 비평한다면 어떠하였겠는가? 지금처럼 기분을 상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자들의 논평은—비록 그것이 비평적인 것이라 할지라도—정당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의 경우처럼, 그러한 비평의 배후 동기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종교의 과오를 지적한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일이지—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타인의 종교에 관해 성서에 근거한 논평을 제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성경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물론, 어떤 사람의 종교의 가르침이나 관습에서 잘못된 점을 밝혀내는 비평이 처음에는 가혹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스데반’의 비평에 대해 난폭한 노를 터뜨린 자들같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바울’의 논평을 듣는 몇몇 ‘아데네’ 사람들이 나타낸 훌륭한 반응에 유의하라. 그들은 성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신자가 되어 영원한 유익을 받게 되었다.—사도 17:11, 12 비교.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비평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것이라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면밀한 고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왜냐 하면 그것은 진정한 유익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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