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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임주의적 사회—그것은 어디로 인도하는가?깨어라!—1975 |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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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임주의적 사회—그것은 어디로 인도하는가?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방임주의적이 되어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나라에서 한때는 위법으로 고려되던 많은 행위들이 이제는 합법화되었거나 단순히 기소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도박(허가의 유무를 막론하고), 매음, 동성애, 외설 서적의 판매, 과음으로 인한 만취, 환각제의 사용, 무대, ‘스크린’ 및 해변가에서 나체로 등장하는 행위, 남자가 여자의 복장을 하는 것과 그 반대의 경우 등—이러한 모든 행위를 자행하는 사람들이 체포 또는 기소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개중에는 이러한 추세가 실제로는 인간 사회에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상, 그들은 방금 언급한 모든 행위들은 법시행기관에서 ‘관여할 필요가 없는 일’로 보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어떻게 그러한가?
자유 방임을 옹호하는 이론들
그들은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요지는 이러한 행위들은 “피해자가 없는 범죄”라는 점이다. “매음에 있어서 누가 피해자인가? 남자는 자기가 구하던 성 관계를 얻게 되고 여자는 자기가 추구하던 돈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누가 피해자인가?” 하고 그들은 질문한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오락”으로 분류하는 도박도 마찬가지다. 비록 법의 허락은 없다고 하더라도, 양편이 규정에 따라 ‘게임’을 하는 이상, 누가 피해자인가? 물론, 어떤 사람은 돈을 잃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게임’에 참여하기 전에 이미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서 도박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왜 범죄가 되는가? 하고 말한다.
따라서, 이 모든 경우에서의 기본 주장은 당사자들이 자신의 자유 의사로 참가하는 이상, 법시행 기관들이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 노골적인 표현으로서, ‘법 시행기관은 사람들의 사생활 문제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도덕 문제 간섭자” 노릇을 해서는 안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어떤 행위가 당사자의 건강이나 재정 상태에 해를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다다르게 되면, 방임주의적인 사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존 스튜아트 밀’의 말을 인용하여 대답할지 모른다.
“문명 사회의 어떤 구성원에 대하여 그의 의사에 반하여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타인에게 미치는 해를 방지하는 것이다. 신체적이든 도덕적이든 그 당사자의 복지 여부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주장하기를, 성, 음주, 마약 사용 또는 도박같은 분야에서의 훌륭한 도덕을 앙양하기 위한 제 법률들은 기본적으로 강제성을 띨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그러한 법률들은 오히려 “더욱 심각한” 범죄를 조장한다는 주장마저 대두되고 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인가?
그러한 것들이 경찰의 주의력을 너무 빼앗아 버리기 때문에 폭행이나 절도같은 범죄에 그 관심을 집중하는 일이 방해받는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보고된 바에 의하면 미국 내의 체포건 수의 절반 가량은 이른바 “피해자 없는 범죄”와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경찰은 이러한 사건을 법원으로 송치한다. 형사 재판에 관한 어떤 회의석상에서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범죄들을 심중히 고려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문제 곧 ‘피해자 없는 범죄들’이 법원에 한없이 유입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약술하자면,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도박, ‘마리화나’, 성적 무절제와 음란, 및 술취함을 방지하기 위한 투쟁은 무익하며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찰과 법원의 짐을 덜어 주어 그들로 사람들의 생명, 신체 및 재산에 대한 공격의 물결을 막을 수 있게 하자’고 그들은 촉구한다.
이러한 모든 점들에 대하여 종교 지도자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다소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성적 표준에 관한 한 특히 그러하다. 그들 중 동성애, 혼전(婚前) 및 혼외(婚外) 성행위에서 아무런 심각한 위험성이나 부당성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다. 많은 종교 지도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말한 지난 날의 한 여배우의 견해와 대동소이하다. “침실에서야 무슨 짓을 하던 관계 없겠지요. 거리에서 그런 짓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 한 말예요.” 심지어는 기혼자들 간에도 성 도착(구강 및 항문 성교같은 행위)이 더욱 보편화되고 있는 이 때에 교직자들은 거의 혹은 전혀 충고의 말이나 경고를 하지 않고 있다.
그 추세는 어디로 인도하는가?
이러한 방임주의적 추세는 사람들에게 유익한가? 그것은 참으로 생명, 신체 및 재산을 더욱 안전하게 해 주는가? 자기의 행동이 신체적인 면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고 그의 재산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 무엇을 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적인가?
오늘날 정부들과 그 산하 법시행 기관들이 폭력적인 범죄와 절도의 범람으로 크게 압박을 받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어떤 특정한 행동 표준을 강요하는 데 있어서 자기들에게 허용된 일과 허용되지 않은 일을 판단하고 대중의 유익을 위하여 어떤 점에 우선권을 둘 필요가 있는지를 판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들이 매우 난처한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인류의 과거 역사 역시 정부들이 도덕을 높이는 일에 성공을 거둘 것인가에 대해 고무적인 내용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 때문에 정부들이 어쩔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하겠다고 느끼는 점은 차치하고, 자유 방임이 영속적으로 개선된 상태를 실현시켜 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임박한 패배 혹은 재난을 직면하여 부득이 행하는 일시적 미봉책에 불과할 것인가?
자유 방임이 외관상 어떠한 유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기 마련이다. 악한 상태를 도외시하는 것이 그러한 상태를 제거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 이른바 “피해자가 없는 범죄들”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리는 것’ 역시 폭력 범죄나 사람들의 재산상에 가해지는 범죄를 더욱 용이하게 억제할 수 있다는 진정한 보장이 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도박을 하여 큰 빚을 졌다면 그는 빚을 갚기 위하여 어디로 눈을 돌릴 것인가? “고리대금”업을 하는 여러 ‘갱’ 단체들의 고객 가운데 도박으로 빚진 사람들이 다수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은행 및 기업체의 많은 공금 횡령 사건도 동일한 근원에서 기인하고 있다.
마약 중독자들에게 마약을 염가로 공급해 준다면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값비싼 마약 습관을 지속하기 위하여 도둑질은 하지 않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이 마약에 취해 있는 동안 비이성적이고 유해한 행동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대부분의 폭행과 살인이 전혀 생소한 사람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서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증명된 사실이다. 많은 수의 폭행은 질투와 언쟁에서 유발된다. 성적 부도덕에 대한 제어를 풀어 준다면 그런 식의 난폭한 범죄들이 발생할 분위기가 줄어들겠는가 아니면 증가되겠는가? 사실은 이른바 “피해자없는 범죄”가 ‘피해자 있는 범죄’를 낳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 명백하게 “피해자”가 있는 범죄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그러한 범죄의 근본적인 원인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게으름이 빈곤을 그리고 교만이 알력과 분열을 낳는 것처럼, 도박, 술취함, 성적 부도덕, 외설 및 음란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그 자체로 끝나는” 또는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언 24:30-34) 그것들은 바로 다른 종류의 악행의 근본 씨앗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리라]”는 성서 원칙은 참되다. (갈라디아 6:7, 8)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인생의 진실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살인같은 어떤 악행은 즉각적으로 눈에 띄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 어떤 다른 것들은, 마치 서서히, 잠행성(潛行性)으로, 또 얼마 동안은 통증이 없이 커나가는 암과 같다. 그러나 그러한 악행의 최종 결과는 살인처럼 치명적일 수도 있다. 이것은 개인들의 경우 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 간단명료하게 천명한 바와 같다. (고린도 전 5:6) 도의심이 와해되면 도덕적인 병폐가 따르게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진정으로 성서의 인도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정부들이 어느 정도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로 역할한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로마 13:4, 5)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 정부들이 영적 건강과 도덕의 풍토를 조성할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정부들은 그렇게 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목적에 관한 지식과 이해가 없으며, 부패를 일소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 정부들의 관심은 분명히 다른 곳에 있다.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 통치에 의하여 지상의 정치 세력들을 대체하는 것만이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건전한 풍토를 조성시켜 줄 것이다.—다니엘 2:44.
“묵시(‘비전’, 신세)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하고 잠언 29:18은 알려 준다. 하나님의 의로운 새 질서에 누릴 삶의 희망만도 미래에 대한 명백하고 확실한 ‘비전’을 제공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로 현재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 즉 소망이 없는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풍미하고 있는 방자한 행위들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보호해 줄 것이다. 우리는 잠언 4:25-27의 충고를 인식하고 적용시킬 것이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우리는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어떠한 일이든 정당하다”거나, 어떤 행위에 쌍방이 자원하여 참여한 이상 “피해자는 없는 셈”이라는 등의 간교한 주장에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체상의 직접적인 상해가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피해는 아니며, 물질적인 것을 빼앗기는 것이 최대의 손실은 아니다. 마음과 정신의 손상, 또한 명성, 영예, 성실 및 하나님 앞에서의 좋은 입장을 상실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결과, 최대의 해를 가져 온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셨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 (마태 15:18, 19) 만일 우리가 부도덕한 행위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더럽힌다면, 비록 그것이 합의에 의한 것이더라도, 그 행동은 철저한 무지, 아니면 이웃 사랑과 염려를 철저히 결여하고 있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결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로마 13:8-10.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피조물이며, 인간적 범죄를 쉽게 저지른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에 영합하거나 다른 사람들로 그러한 약함에 굴복하도록 꾀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인간 정부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의의 법을 심어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유 방임에 굴복하는 것은 도덕적인 무정부 상태로 인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점증하는 방임적 추세를 정지시킬 수 없다. 그러나 자신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당신의 마음이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함으로써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 3:13, 새번역) 부패의 원인 곧 완고하게 되는 일은 하루 밤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과정은 종종 사소하게 시작되어 자신도 모르게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함정에 빠지는 일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행동의 표준에 고착하고, 성서의 지혜에 따라 의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면 행동에 대해 속박과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 웅대한 자유감, 즉 인생에 참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일들을 행하는 자유의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정직한 첩경으로 너를 인도”할 것이기 때문에,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란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잠언 4:11-13.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것이 참됨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왕국회관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힘차고 격려적인 원칙들로 인한 건전한 도덕적 분위기를 경험해보도록 하라.
[4면 네모]
한 가지 주요 원인
범죄와 부패를 다년간 조사한 바 있는 ‘존 엘. 맥크레란’ 미국 상원의원의 다음과 같은 말이 「유. 에스. 뉴우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에 인용 보도되었다. “가정 내의 합당한 존경심과 기율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오늘날 학교에서도 기율이 크게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판단으로는 일부 교회들은 이제 참으로 높은 표준의 성실성과 도덕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과거에 준수되고 실천되어 오던 바와 동일한 그리스도인 생활의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5면 네모]
자유 방임—서방에서 뿐인가?
소련의 교역 능력을 호평하는 한 기사에서, 1974년 12월호 「디 아틀란틱」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소련의 행정 관리들은 사적인 입장에서는 자국내의 젊은 세대와 관련된 문제들을 시인한다. 소련의 관리 한 사람은 말하기를, 14세된 딸이 임신하였기 때문에 결혼시키기 위하여 퇴학시킬 필요가 있었노라고 하였다. 비록 마약은 일반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지는 않지만, 젊은이들이 서방의 ‘로크’ 음악, 청바지 및 머리 모양에 열광하고 있음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도 개인적인 격분을 토로하고 있다. ··· 그러나 많은 관리들은 젊은이들의 이러한 변덕에 영합하고 있다.”
[3면 삽화]
현 세대는 묻는다: “다른 사람에게 도덕률을 강요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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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염에 대처하는 일깨어라!—1975 |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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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염에 대처하는 일
일찌기 1954년에 영국의 한 노동자는 폐염과 늑막염에 걸리자 고용주를 걸어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다. 그 병의 원인은 자기가 춥고 바람이 들어오는 실내에서 일해야 하였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동 사건을 심리한 판사는 그 작업실이 정말로 춥고 바람이 스며들고 다습하며, 특히 이른 아침 시간에 그러함을 확인하였으며, 그리하여 피고로 하여금 그 노동자에게 410‘파운드’의 피해배상을 지불하도록 판시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미화 1,100‘달러’ 이상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폐에 염증이 생긴 병인, 그 노동자의 폐염은 전적으로 그의 작업 환경만으로 유발된 것인가? 이것이 한가지 요인은 되었겠지만, 역시 해로운 병균도 작용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폐염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폐염의 대표적인 경우는 폐염 쌍구균(肺炎雙球菌)에 의하여 일어나는 일종의 감염이다. 이 가장 흔한 형태의 폐염의 경우, 폐의 작은 기포(氣胞)속에 처음에는 액체가, 그 다음에는 감염을 퇴치하려는 백혈구가 들어차게 된다. 적혈구 역시 축적됨으로, 담(痰)이 독특한 적갈색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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