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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안전은 무엇인가?—집인가?—예금인가?—직장인가?
    파수대—1977 | 7월 15일
    •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러한 소극적인 생각은 우리의 생명 자체를 위태롭게 하여 우리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 그와는 달리, 우리는 다가오고 있는 이 악한 제도의 종말을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의 입증을 의미하며, 그 이름을 지니고 일상 생활에서 그 이름을 옹호하는 백성의 구원을 의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충성으로 인하여, 그들은 새 질서로 인도될 것이며, 거기서 그들은 ‘사단’과 그의 악한 사물의 제도로부터 해방된,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된 낙원으로 땅을 가꾸는 즐거운 과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전 15:25, 26) 바로 앞에 놓인 그러한 웅대한 전망을 가지고 계속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재산에 희망을 두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어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기를 원합니다.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구제하고 즐겨 나누어 주”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미래를 위한 튼튼한 기초를 자신들을 위하여 쌓아 참된 생명을 얻”게 할 것입니다.—디모데 전 6:17-19, 새번역.

  • 영혼불멸 교리에 대한 재고
    파수대—1977 | 7월 15일
    • 영혼불멸 교리에 대한 재고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이다.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경우 살아 남으려는 욕망을 나타낸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사랑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은 흔히 죽음으로 그의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놀라운 희망을 알려 준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한 6:39, 40.

      사람이 죽은 때부터 “마지막 날” 부활 곧 다시 살림을 받을 때까지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당신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를 떠난 불멸의 “영혼”이 부활시 육체와 재결합할 때까지 의식을 가진 채로 남아서 고락을 경험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는가? 한 때 그러한 교리를 믿었던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재고(再考)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재고

      여러 세기 동안, 성서 학자들과 교직자들은 영혼불멸 교리와 부활 교리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보아왔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성서 번역자인 ‘윌리암 틴달’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천당이나 지옥 또는 연옥에 가 있는 영혼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바울’이 부활을 증명한 논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 만일 영혼이 천당에 가 있다면 부활이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내게 말해 보라.” 영혼불멸 교리는 “이교 철학”에서 연원한 것이라고 ‘틴탈’은 또한 주장하였다.

      비슷하게도, ‘로마 가톨릭’ 주교 ‘레이 T. 보슬러’는 1974년 가을, 한 신문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신약에서는 육체와 분리된 불멸의 영혼에 관해 언급한 곳이 없다. ··· 신약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이 사용된 경우에는 부활로써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게 되는 자신—육체와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다. ··· 우리 신학자들 사이에는 마지막 부활을 받을 때까지 성도들이 어떠한 상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구구하다. ··· 신학자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억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서 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유대 백과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믿음은 순수한 믿음이라기보다도 철학적 혹은 신학적 추리이며, 따라서 성경 어디에서도 그러한 믿음을 가르치는 곳이 없다.”

      그러면 영혼에 대한 성서의 참다운 견해는 무엇인가?

      영혼—그것은 무엇이며, 죽을 수 있는가?

      성서에서 인간 영혼이 처음으로 언급된 곳이 창세기 2:7인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 곧 산 영혼; a living soul]이 된지라.” 사람에게 영혼을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산 영혼이 되었다고 한 점에 유의하라. 영혼이란 그 사람 전체이지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아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좀더 많은 성귀를 고려해 보아도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두 영혼들, two souls, 흠정역]이니” (창세 46:27) “누구든지[어떤 영혼이든지, 신세]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 (레위 2:1) “누구든지[어떤 영혼이, a soul, 흠정역] ··· 그릇 범과하였으되 ···” (레위 4:2) “너희 중 아무도[아무 영혼도, no soul of you, 흠정역] 피를 먹지 말[라.]” (레위 17:12) “사람마다[모든 영혼이, every soul, 흠정역] 두려워하는데 ···” (사도 2:43)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 륙인[영혼들, souls, 흠정역] 이러라.”—사도 27:37.

      이 역시 저명한 성서 학자들에 의해서 여러 세기 동안 인정된 점이다. 예를 들면, ‘마르틴 루터’는 성서 시대의 ‘히브리’어 영혼이라는 낱말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 단어는 우리 독일인들이 영혼에 관하여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일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가지고 있으며, 고기와 물을 먹고 살아가는 전체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루터’는 영혼불멸 교리를 “‘로마’ [가톨릭] 교황령의 쓰레기 더미 속에 있는 무한히 기괴한 가설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였다.

      보다 최근에, 신학자 ‘카알 발트’는 ‘라디오’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서에서는 ··· 사람을 그 사람 총체, 그 사람 전부, 그의 영혼, 다시 말하면 개체로서의 생명이라고 묘사하고 있음을 결코 간과하여서는 안됩니다. 즉 영혼이란 그의 육체와 구별은 되어도 육체로부터 따로 떨어질 수는 없는데, 이는 마치 육체가 그의 영혼과 구별은 되어도 영혼으로부터 따로 떨어질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말은 사람이 죽을 때 영혼도 죽는다는 뜻인가? 성서는 반복적으로 영혼은 죽는 것이며, 멸망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내가 백성 중에서 [그 영혼을] 멸절시키리[라.]” (레위 23:30, 흠정역 참조) “영혼을 죽인 자마다 ···” (민수 31:19, 신세)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 [영혼]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누가 6:9, 신세 참조.

      죽임을 당한 또는 멸망을 당한 영혼의 상태는 어떠한가? 족장 ‘욥’이, 만일 자기가 날 때 죽어 버렸다면 어떠했으리라고 묘사하는지 살펴보라.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라.]” (욥 3:13) ‘욥’의 경우, 죽음은 평안히 잠자는 것이었다. 이와 동일하게 성경은 이렇게도 알려 준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전도 9:5; 요한 11:11-13; 사도 7:60; 고린도 전 15:6, 18, 20, 51; 베드로 후 3:4.

      영혼이 ‘간다’ 또는 ‘온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야곱’의 아내 ‘라헬’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성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그 혼[곧 영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더라.]” (창세 35:18) 그리고 예언자 ‘엘리야’가 어떤 과부의 아들을 부활시킨 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곧 영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열왕 상 17:22.

      이 두 경우에 영혼이 “떠나려” 하는 것과 ‘돌아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공동번역」 열왕기 상 17:22의 번역을 보면 그 점이 명백하다. “야훼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아이에게 다시 생명의 호흡을 주시어 마침내 아이는 살아났다.” 사람이 죽을 때, 인간 영혼으로서의 그들의 생명은 쇠하여 버린다. 그 아이의 몸 세포로 돌아온 것은 의식을 가진 어떤 실체가 아니라 생명이었다. 그리하여 ‘엘리야’는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보라 네 아들[육체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이 살았느니라.”고 말하였다.—열왕 상 17:23.

      ‘스올’/‘하데스’에 생명이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바벨론’ 왕”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고 의아심을 갖게 되었다. “아래의 음부[‘스올’, ‘히브리’어]가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너의 옴을 영접하되 ··· 열방의 모든 왕으로 그 보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네 영화가 음부(‘스올’, ‘히브리’어)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이사야 14:9-11) 이 내용의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장 4절에서는 이 기록을 “노래”(‘히브리’어로 ‘마아샬’, “속담”; ‘라틴’어 「‘벌게이트’역」에는 ‘파라볼라’, “비유”)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시적인 묘사는 생명이 없는 것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8절에서 더욱 더 그러한 예를 보게 된다. “향나무와 ‘레바논’ 백향목도 너를 인하여 기뻐하여 이르기를 네가 넘어뜨리웠은즉 올라와서 우리를 작벌할 자 없다 하는도다.”—사사 9:8-15 비교.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은 실제 향나무와 백향목이 서로 즐거워하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또한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이 지옥에서 의식을 가지고 있다거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없다. 이 기록은 단순히 ‘바벨론’ 왕조가 세계 강국의 권좌에서 추락하는 것에 대한 시적인 예언이다.

      「흠정역」 성서에 보면, ‘히브리’어 ‘스올’이라는 말이 9절에서는 “지옥”이라고 되어 있지만, 11절에서는 “무덤”이라고 번역되었음을 알고 있는가? ‘샤프 레인지’가 편찬한 「성서 주해서」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단어의 용법은 주로 구약의 시적 표현에 속한다. ··· ‘스올’은 모든 무덤의 총칭으로 나타난다. 적어도 에스겔 31장과 32장을 볼 때, 누가 감히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겠는가? 그것은 아무리 높을 지라도 모든 지상의 생명을 그리로 불러내리는 우주 무덤이다.”

      위에 언급한 비유와 비슷한 것이 누가복음 16:19-31(새번역)에 나온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한 부자’가 ‘하데스’(‘스올’에 해당하는 희랍어)에서 심히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반하여 “‘나사로’라 하는 거지”는 “‘아브라함’ 품”에서 복을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육체적인 죽음을 당한 후에 영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언급은 없다. 이것 역시 비유이다. 그리고 문맥을 보면, 부자는 그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나타내고, 반대로 ‘나사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인 일반 사람들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이들 두 반열은 모두 예수께서 상징적으로 언급하신 상태에 상응하는 경험을 하였다.a

      “꺼지지 않는 불”

      그러면 예수께서 “불붙는 ‘게헨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마태 5:22, 새번역; 개역판에는 “지옥 불”) ‘게헨나’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의 한 가지 예가 마가복음 9:43-48(새번역)에 나온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버리라. 두 손을 가지고 ‘게헨나’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그 발을 찍어버리라. 두 발을 가지고 ‘게헨나’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절뚝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또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버리라. 두 눈을 가지고 ‘게헨나’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한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게헨나’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사후의 불의 고초의 상태에 대한 ‘유대’인의 일반적인 견해를 시인하신 것인가? 사실상,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죽은 사람의 상태에 관한 어떤 확립된 견해가 없었다. ‘유대’ 학자 ‘클라우드 몬테피요르’와 ‘허버트 로우’가 편집한 「‘랍비’ 명문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또 한 가지 혼란이 있다. 왜냐 하면 한 가지 교리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일반 부활시 그리고 마지막 심판을 받기 위해 다시 ‘일어날’ 때까지 잠을 잔다고 한다. 또 다른 교리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의롭거나 회개한 사람이라면 (더우기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장차 올 복된 세상에서 즉시 행복한 가운데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만일 악하고, 우상 숭배자이며 ‘이스라엘’의 적이라면, 그가 죽을 때, 곧 바로 지옥으로 가거나 ··· 또는 지옥에서의 기간이 끝나면 소멸될 것이라고 한다. 또는 지상에서 사망과 동시 소멸될 것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기괴한 개념들과 혼란된 생각들을 암시 내지는 표현하는 글귀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인정된 이론이나 개념은 하나도 없다.”

      당신은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 중에는 부활될 때까지 “잠”을 자는 것 그리고 “소멸”의 가능성이 들어 있는 것에 유의하였는가? 예수께서는 소멸을 염두에 두시고 ‘게헨나’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이 분명하다. 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역설하셨기 때문이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몸을 모두 죽여 ‘게헨나’에 넣을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태 10:28, 새번역.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예수께서는 왜 ‘게헨나’에 “불”이라는 말을 관련시키셨는가? 「신 성서 주해서」에서는 얼마의 참고가 되는 지식을 알려 준다. (1965년판) “‘게헨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의 이름을 희랍식으로 부른 것인데, 거기에는 그 도시의 쓰레기를 소각하기 위해 항상 불이 타고 있었다. 이것은 최종적인 멸망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다.” 그러므로 ‘게헨나’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영원히 지옥에서 의식을 가지고 고초를 받는다는 교리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되지 않는다.

      “전적으로 ‘플라톤’의 주장”

      죽을 때 육체를 떠나는 불멸의 영혼에 대하여 성서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상은 어디서 연원하였는가? 신학자들은 희랍 철학자 ‘플라톤’의 사상으로부터 그러한 사상을 빌려 왔고, ‘플라톤’ 역시 고대 ‘바벨론’에 기원을 둔 이교의 신비적인 종교들로부터 그러한 사상을 받아 들였다. ‘플라톤’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가? ··· 그것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이것이 완성되는 것이다. 영혼이 그 속에 존재하다가 육체로부터 해방되면, 육체는 영혼으로부터 해방되는데, 이것이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페이도’ 64항) 「철학 백과사전」(1967년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정신 또는 영혼이 (실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의미심장하게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고, 육체를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실체라는 주장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플라톤’의 주장을 따르는 것이며, 이 추정적 실체인 정신 또는 영혼을 실제의 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전적으로 ‘플라톤’의 주장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희랍 철학이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교국에 영향을 미쳐 왔는가에 관하여, ‘더글러스 홀덴’ 교수는 그의 저서 「죽음은 아무 것도 지배하지 못한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희랍 철학과 너무나도 혼합되어 있어서 그것은 희랍의 사상 아홉에 그리스도교 사상 하나를 혼합시켜 사람들을 길러 냈다.”

      그러므로 성서에 의하면, 인간 영혼이란 사람 자신이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죽는 것이다. (에스겔 18:4, 20) 죽은 자는 무의식이며 즐거움이나 고통을 알지 못하며, 부활에 의하여 생명으로 회복되는 것을 기다리는 상태이다. (전도 9:5, 10; 시 146:4; 사도 24:15) 영혼불멸에 대한 일반적인 종교적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가 아니라 희랍 철학으로부터 연원한 것이다. 이로 보건데, 당신도 영혼불멸 교리를 재고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각주]

      a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책 제12장(85면) “‘하데스’에 있는 부자”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라.

  • ‘세상이 나뉘어진 때’
    파수대—1977 | 7월 15일
    • ‘세상이 나뉘어진 때’

      ◆ 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그의 시대에, 신세] 세상이 나뉘었음이[라.]” (창세 10:25) 우리가 성서에 근거하여 판단해 볼 때, 이 나뉘는 일은 여호와께서 ‘바벨’ 건축자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어 그들을 흩어지게 하신 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창세 11:1, 7) ‘벨렉’이라는 이름은 “나누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사실은 그 나뉘는 일이 그의 출생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시대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태어날 때에 ‘벨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면, 그의 이름은 그의 생애 중 일어난 대분열에 대한 예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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