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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들파수대—1979 |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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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그리스도인은 악을 생각조차 해서는 안되므로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왜 욕정을 상징하는 것에서 ··· 쾌락을 발견해야 하는가? 사람은 구경하는 것으로부터 배우게 된다. ··· 우리가 듣고 우리가 보는 것은 즉시 우리에게 익숙해지게 마련이다.”—‘사이프라이안’.
20. (ㄱ)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왜 타락한 오락을 피하였읍니까? (ㄴ) 그들의 행실이 눈에 띄게 달랐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0 이 사람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보다 여러 해 후에 살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무엇이었는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들은 그러한 타락한 오락을 멀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암흑에서 나와 높여진 사람들이 즉, 생활 가운데서 음담과 폭력, 부도덕을 멀리 한 사람들이 일부러 앉아서 그러한 것을 오락으로 구경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행위임을 이해할 수 있었읍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는 ‘바울’의 충고를 청종했읍니다.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의 그들의 순결한 일상 생활은 이방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책망’이 되었읍니다. 이들이 불경건한 세상에서 “사람의 원수”라는 낙인을 받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읍니다. 이들 제자들은 육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이웃 사람들보다 더 나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기꺼이 나타냈읍니다. 그들은 “정신에 작용하는 힘 안에서 새롭게 되”었음을 전시하였읍니다. 그 “힘”은 얼마나 다른 것이었읍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읍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빛의 열매”를 나타내든지 혹은 이방 사람들처럼 행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에베소 4:23, 신세; 5:9, 11.
21. 어떠한 이유로 오늘날 우리는 오락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실제적이 되어야 합니까?
21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오락 선택에 관하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또는 우리의 자녀가 ‘텔레비젼’을 켜거나 영화관에 가서 구경하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경하기로 선택한 것과 ‘부끄러운 ‘로마’의 연극 및 야수적인 투기장’ 사이에 실제로 다른 점이 있읍니까?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습관적으로 구경하는 것의 영향을 받아 나타내졌고 부도덕에 말려들어간 실제 경우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22. (ㄱ)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자녀들로서 걷는 일이 쉬운 일이었읍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있었읍니까? (ㄴ) 대답을 요하는 어떠한 질문들이 또 있읍니까?
22 이와는 반대로, 그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도덕적 힘을 전시하였읍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무디어져서 그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수치감과 예의라는 것을 통째로 잊고 있는 세상 가운데서 살면서도, 그들은 계속 정신을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할 만한 것, 칭찬할 만한 것, 덕이 있는것, 기림이 있는 것’에 집중시킬 수 있었읍니다. (빌립보 4:8) 부도덕한 분위기 가운데서 그들은 어떻게 그러한 힘을 유지하였읍니까? 기억하십시오.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이 혈과 육을 가진 단순한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들도 기본적으로 오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들의 “다른 쾌락”이란 어떤 것이었읍니까? 우리는 어떻게 “빛의 자녀들”의 그러한 가치있는 본을 더욱 더 밀접히 따를 수 있읍니까? 이러한 것들이 다음 기사에서 고려될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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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파수대—1979 |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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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에베소 5:8.
1, 2. (ㄱ) 비유 가운데 나오는 사람은 왜 바람을 거슬러 걸어가지 않으면 안되었읍니까? (ㄴ) 그리스도인이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않으려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나운 바람을 거슬러 애써 걸어가는 사람이 있읍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을 주어 꿋꿋하게 앞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읍니다. 이렇게 온갖 힘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단순히 뒤로 돌아 바람을 등지고 쉽게 걷지 않습니까? 바로 그의 뒤에는 캄캄한 심연(深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기를 원한다면 별 수가 없읍니다. 바람을 거슬러 고생하며 걸어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읍니다.
2 오늘날에도 ‘사단’의 지휘 아래 있는 “세상의 영”은 무서운 바람처럼 온 인류를 휩쓸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멸망의 “심연”으로 빠지게 할 길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읍니다. (고린도 전 2:12; 에베소 5:6) 그러한 진노를 피하려면 그리스도인은 ‘바람을 거슬러’ 행하는 사람처럼 걸어가야 합니다. 그가 ‘빛의 아들’처럼 걷고 ‘이방인처럼 걷지 않으’려면 즉 이방인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면 투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에베소 4:17; 5:8.
내부적인 강화가 필요하다
3. (ㄱ) 에베소서 3:16에 의하면, 이방인들처럼 행하는 일을 피하는 데 성공하기 위하여 우리의 노력이 어디로 인도되어야 합니까? (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속 사람”을 강화시킵니까?
3 우리가 이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우리의 노력은 어디로 인도되어야 합니까? ‘바울’의 대답은 “그의[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라는 권고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할 분야가 바로 “속 사람”입니다. 즉 속에 있는 우리 자신, “마음에 숨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 열쇠가 다음 귀절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 “사랑 가운데”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에베소 3:16, 17; 베드로 전 3:4.
4. (ㄱ)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시게’ 하는 데는 무엇이 관련되어 있읍니까? (ㄴ) 우리는 어떠한 예리한 질문들을 개인적으로 고려해야 합니까?
4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게 하’기 위하여는 먼저 세상의 영을 쫓아내야 합니다. 만일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인 ‘사단’이 아직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거나, 다시 우리의 생활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이 “속 사람”을 푹 젖게 할 수 있겠읍니까? (에베소 2:2) 그러므로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마음으로 나는 아직도 이 제도의 ‘사단’의 영을 즐기고 있는가? 도덕감이 온전히 결여되어 있는 것을 나는 오락으로 즐기고 있는가?” 우리는 또 쉽게 겉으로 속과 전혀 다른 사람을 나타낼 수 있읍니다. 그리스도의 본과 가르침이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주게 함으로써 그분은 우리 마음 안에 계십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욕정을 가지고 어느 이성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그러한 말씀을 순종합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그러한 감정이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을 피합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우리가 추구하는 형태의 오락의 정신에 말려드실 것입니까? 우리는 ‘의를 사랑할 뿐 아니라 불법을 미워’하는 면에 있어서 그분의 영을 가지고 있읍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 사람에 충만하게 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같은 정신’을 가진 것입니다.—마태 5:27, 28; 히브리 1:9; 베드로 전 4:1, 공동번역.
5, 6. (ㄱ) “속 사람”을 강화하는 데 개인 연구와 묵상이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지성적 지식이 온전한 대답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더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5 그렇다면 우리가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기 위하여 성서를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가르침으로써 보이신 사랑의 본을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깊이 뿌리 박힌 것은 쉽게 뽑히지 않으며, 굳은 터 위에 세워진 것은 쉽게 없앨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우리 “속 사람”에 깊이 넘치게 함으로써 우리의 영적 ‘뿌리와 터’를 계속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에베소 3:17, 18.
6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이 단순히 학구적으로 성서적인 여러 가지 사실을 머리에 축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결코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지성적인 지식 위에 기초를 둔 믿음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계속합니다. “지식에 넘치는[지식보다 월등한, 신세]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머리로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그와 사귀면 사귈수록 그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방법 혹은 그의 생활 방식을 본받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의 감정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책들을 읽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동정적인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된 사람은 그 사랑이 “지식보다 월등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에베소 3:19.
7. 맞는지 틀리는지를 말씀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완전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게 대답하는 성경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얼마나 고상한 목표입니까! 도달해야 할 만한 얼마나 높은 본입니까! 그것은 아마 굉장한 일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재능이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읍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에베소 3:20; 또한 베드로 전 2:21과 고린도 전 11:1 참조.
‘유혹의 욕심을 따른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
8. (ㄱ) ‘바울’의 말에 의하면, 어떠한 욕망이 “옛 사람”에 붙어 다닐 수 있읍니까? (ㄴ) 얼마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이 타락적인 오락을 선택하는 것을 정당화하였으며, 그러한 추리는 성경적으로 건전한 것입니까?
8 이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22에 기록한 권고입니다. 그렇습니다. 옛 사람을 수선하라는 것이 아니라 ‘벗어 버리라’, 없애 버리라는 것입니다. (골로새 3:9)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거짓된’ 마음에 붙어다니는 “유혹의 욕심”이 “부패”시킬 수 있기 때문에 또는 옛 사람을 점점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9) 타락적인 것이 분명한 오락을 옹호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나의 양심에는 거리끼지 않는데 무슨 상관이냐?’라는 추리를 하였읍니다. 그들의 양심이 잘못이고 그들의 마음의 욕망이 그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단순히 우리의 양심이 거리끼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하는 일이 선한 것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까지도 이 사실을 시인하였읍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여호와]시니라.” (고린도 전 4:4) 초기 ‘고린도’ 회중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양심이 어찌나 둔하게 되었던지 그것은 그들 가운데 있는 부도덕을 관용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랑하기 까지 하였읍니다. 얼마나 오도된 양심이었읍니까!—고린도 전 5:1, 2, 6; 디도 1:15; 디모데 전 4:2.
9. 양심이 어떻게 서서히 변경될 수 있는가를 알리는 어떠한 괴로운 보고가 있읍니까?
9 “유혹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양심이 서서히 더럽혀지기란 쉬운 일입니다. ‘유럽’에 있는 한 나라의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괴로운 보고가 들어 왔읍니다.
“10년 전이라면 우리의 형제들이 분명히 현재 상영되는 대부분의 영화를 구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품위에 대한 감각이 바뀐 것이다. 이 세상의 경향이 우리 형제들 중 얼마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10. (ㄱ) 일세기에 검투 시합을 받아들이게 한 계략은 어떠하였읍니까? (ㄴ)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10 ‘사단’은 아주 서서히 자기의 타락한 표준이 받아지도록 노력해 왔읍니다. 일세기의 역사가 ‘리비’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서 검투 시합이 소개 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러한 구경을 별로 한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부언하였읍니다.
“그러한 시합이 자주 있게 되고, 때때로 투사들에게 서로 부상할 때 까지만 싸우게 함으로써 ··· 그는 이러한 광경이 익숙해지게 하였고 심지어 즐거움을 느끼게 하였고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팔들을 잡고 즐거워하게 하였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무서움은 약해졌읍니다. 얼마 있자 그들은 충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참여자가 되었읍니다. ‘사단’의 방법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품위감”이 서서히 변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잠간 멈추어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양심은 나로 어느 정도까지 가게 하는가? 그것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오락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은 “도덕감이 없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라
11, 12. (ㄱ) 에베소서 5:10과 17의 충고가 현재 매우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읍니까? (ㄴ) 부패한 오락에 어느 정도의 유익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에게 받아들여져야 할 이유가 됩니까?
11 도덕적으로 부패한 것이 마치 완전히 건전한 것인 양 우리 앞에서 과시되어 왔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악하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여호와]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에베소 5:10, 17.
12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제공하는 오락에 관한한, 선택적이 되는 것이 열쇠입니다. 한 실례로서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읍니다. “영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성의 장면이 곁들여 있다. 그러므로 영화 전체를 구경하려면 성의 장면을 구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나쁜 것이 아닌” 영화의 대부분의 내용을 봄으로써 도덕을 손상시킬 위험성이 있는 “성적 장면”을 볼 만한 가치가 있읍니까? 그러한 장면은 비밀리에 행해지는 것을 관람객 앞에 공개하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이방인들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고 말하였다면 그러한 부분을 오락으로 관람하는 데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하여야 하겠읍니까? (에베소 5:12) ‘유대’인의 ‘탈무우드’와 같은 나열된 법칙을 따질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의 “분별력”을 사용하고 “어리석은[희랍어: 감각없는, 도덕적 지성의 결여되어 있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 5:14, 신세) 이것은 아주 오락의 특징을 가진 영화나 ‘텔레비젼’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전혀 보지 않는 것이 좋은 경우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2세기에 살던 한 그리스도인 필자라는 사람은 ‘쇼우’라는 그의 수필에서 훌륭한 점을 지적했읍니다.
“아주 유쾌하고, 볼 만하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한 것, 아주 훌륭하기 까지 한 것[‘쇼우’]을 구경한다고 하자. 아무도 독을 담즙[쓴 것]으로 희석시키는 사람은 없다. ··· 저주 받은 것을 양념이 잘 된 것, 달콤한 것에 섞는 법이다.”—‘터툴리안’.
13. 성서의 충고를 멸시하는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읍니까?
13 우리 각자가 서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을 추구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이겠읍니까! 다음과 같은 한 청소년의 말은 칭찬받을 만합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10대들 사이에 부도덕한 영화를 보지 않으려는 굉장한 노력이 있으며, 다른 10대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의 솔직한 충고를 멸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회중에게 경고하였읍니다. 그의 경고는 이러합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음행, 더러운 것, 희롱의 말 등]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느니라.]” (에베소 5:6) ‘헛된 말장이들’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읍니다. 고집세게 규모없이 행하는 자들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합니다.
“누가 ···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 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데살로니가 후 3:14, 15.
그를 “원수”처럼 대해서는 안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가 말하는 사교적 교제를 갖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그는 그의 사고 방식을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빛의 자녀들을 위한 다른 것
14, 15. (ㄱ) 일세기에, 많은 이방인들은 그들의 생활에서 얼마의 흥분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하였읍니까? (ㄴ) 에베소서 5:18, 19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어떠한 다른 것이 언급되어 있으며, 그러한 것이 이방인들에게는 어떻게 보였겠읍니까?
14 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틀에 박힌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얼마의 흥분, 새 힘을 얻는 일, 기분 전환을 갈구합니다. 일세기에 살던 세상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것은 술에 취하여 흥분 혹은 “새 힘”을 얻는 것이었읍니다. 그들의 사교적 모임은 흔히 “마시기 시합”이 되곤 하였읍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얼마나 다른 것이었읍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근원이 있었읍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읍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나님의 영의 영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사교 모임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의 “방탕” 혹은 “거치른 생활”(‘벡’역)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충만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술로 “충만”해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과 아주 다를 것입니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흔히 음란한 춤을 수반하는 음탕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건전한 교훈을 따를 것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여호와]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이렇게 하는 것은 내적 새 힘을 갖게 할 것입니다.—에베소 5:18, 19; 베드로 전 4:3.
15 이것이 이방인들에게는 얼마나 따분한 것으로 보였겠읍니까! 그러나 초기 “빛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기쁜 것이었읍니다. 그들에게는 아주 다른 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단란한 가족처럼 지냈읍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선물”을 사용하여 회중적 가족을 세워 나아갔읍니다.—에베소 2:19; 4:7.
16. (ㄱ) 단란한 “가족적”인 영은 회중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야고보서 1:27의 교훈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사교적 모임에서 어떠한 위험성을 피하도록 해야 합니까? (ㄷ) 그리스도인들의 사교적인 모임에서 즐기는 오락은 어떠한 것이어야 합니까?
16 그러므로 오늘날 회중 안에 그러한 단란한 “가족”적 영이 있다면 자연히 상호 격려를 위하여 집회에 그리고 사교적으로 모이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노소나 특히 “고아와 과부” 모두에게 관심을 갖는 자발적인 정신을 촉진시킬 것입니다. (야고보 1:27) 그러나 사교적 모임이 다음의 경우처럼 퇴폐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결혼식이었다. 주례는 훌륭한 성경적 교훈으로 주례사를 하였다. 그 다음 신혼 부부와 하객들 수백명은 가까운 곳에 마련된 피로연장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 분위기는 너무나 달랐다. 바닥에는 직업적 악단이 자리 잡고 있어서 난잡하고 음탕한 음악을 시끄럽게 연주하여 얼마의 하객들은 미리 떠나 버렸다. 독한 술이 마구 나왔다. 춤은 난잡한 것이었다. 많은 하객들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세상적인 것을 끌어들여 독차지하게 함으로써 행복한 신권적 결혼식을 망치게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리스도인들이 이따금 휴식을 즐기거나 오락을 할 때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읍니까? 격려적인 것들이 많이 있읍니다. 오락적으로 순수하게 새 힘을 얻게 하는 얼마의 것들이 다음 기사에 설명되어 있읍니다. 요점은 무엇을 하는 것이 우리가 “빛의 자녀들”임을 반영하며,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영향 아래 있음을 반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고린도 전 2:12.
모두 선한 영향력을 사용하라
17. 장로들과 “영적 자격”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오락 문제에 있어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읍니까?
17 세상의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세상의 영이 회중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장로들은 영향력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이 흐르도록 촉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때로는 균형을 잃은 얼마의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바로잡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이 회중으로 침투하는 것을 염려하는 한 장로는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장로들로서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얼마의 장로들은 필요한 때에 충고를 하고 옳은 것을 옹호하는 면에 있어서 약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로들만이 아니라 “영적 자격을 가진[영적인 사람들, 왕국 행간 번역]” 모든 사람들은 “온유한 정신으로 그런 사람[“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바로잡아주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온유한’ 충고는 계속 나쁜 길을 감으로써 재난을 당하게 될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할 것입니다.—에베소 4:11-14; 갈라디아 6:1, 신세.
18. 균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8 오락을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각자의 기호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의로움’으로 극단적으로 비평적이 되는 것보다는 바람직한 것을 격려하십시오. 성서의 표준을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십시오.—전도 7:16.
19. 부모들은 어떻게 자녀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사용할 수 있읍니까?
19 부모들은 특히 그들의 자녀들을 도울 수 있는 훌륭한 위치에 있읍니다. 사도는 아버지들에게 이렇게 명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여호와의 징계와 정신적 단속으로, 신세] 양육하라.” “양육”이라고 번역된 희랍어에는 어린이에 대한 따뜻함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읍니다. 그 어원은 자녀를 소중하게 돌보는 어머니에 적용되기 때문입니다.—에베소 6:4; 데살로니가 전 2:7.
20. (ㄱ) 징계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한 젊은이의 말을 들어 볼 때 부모들은 어떻게 해야 하며, 자녀들은 나중에 그것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까?
20 그렇게 염려하는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의 오락 선택 문제에 무관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녀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는 때로 엄하고, ‘자녀를 징계로 양육’할 것입니다. 특히 동료 압력 때문에 자녀가 아마 오락 문제에 있어서 부모의 제한을 반대하는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경건한 부모 밑에서 자란 21세 된 전 시간 전도인은 자기의 10대 시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여러 해 후에야 비로소 내가 받은 훈련이 나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내가 해를 본다고 생각하였읍니다. 부모들의 경우에 있어서 부모들은 아마 엄하게 하면 자녀를 잃게 될 것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녀를 잃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장기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엄마, 순이는 진리에서 떨어지지 않고도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나는 진리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에요?’ 하고 따질 때 참으로 부모는 난처할 것입니다. 부모가 ‘안된다’ 하고 말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해 후에 나이가 더 들게 되면 과거를 돌아다 보고 비로소 ‘부모가 담대히 원칙에 고착한 것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수 있읍니다.”
21. 부모는 자녀들이 어떠한 소중한 관계를 세워 나아가도록 도와야 합니까? 그 이유는?
21 그러나 외부적인 힘 혹은 징계가 온전한 대답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의 정신적 단속’에 관하여 말하였읍니다. 문자적으로 원어는 지배 혹은 단속적 영향이 되도록 여호와의 생각을 안으로 넣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 나아감으로 그가 퇴폐적인 오락이나 기타 모든 악행을 거절하게 되도록 도우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한 관계를 발전시킨 한 젊은이는 “그것은 나와 부모와의 관계라기 보다도 나와 여호와와의 관계이다”라고 말하였읍니다.
22. 빛의 자녀들로서 계속 걸어 감으로 우리는 어떠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읍니까?
22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그것은 우리와 여호와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백성은 아무도 그들의 신분 즉 그들이 “빛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지금 빛을 비추는 자로서 계속 걷도록 하십시오. 빛나는 도덕을 고무할, 곧 이루어질 새 제도의 영원한 행복의 전망을 가지고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즐기도록 하십시오.
[36면 삽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게 하’기 위하여는 먼저 세상의 영을 쫓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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