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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사태가 닥쳤을 때깨어라!—1980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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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나누어 주었다. 자기가 부활되면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되새겨 주었다. 그러나 ‘바이올린’만은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새 질서에서 우리 가족 ‘오케스트라’에서 다시 연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였다.
또한, 이 기간 내내 그 아이는 자기 선생님, 학교 친구들, 의사들, 간호원들에게 많은 증거를 하였다. 그 아이는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라는 책 12부에 자기 서명을 하여 남겨 두었다. 자기가 죽고 나면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들에게 그 책을 나누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엘리제’의 이야기는 ‘헬싱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1976년 1월 4일 아직 14살도 채 못된 나이로 그 아이는 사망하였다.
우리를 놀라게 한 상면
1년 반 후 남편과 나는 ‘헬싱키’의 ‘아이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처음에는 당황하였지만 곧 그가 한 때 ‘엘리제’의 치료를 담당한 적이 있는 의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흰 의사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르게 보였으며, 수염도 깎아 버렸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엘리제’는 다른 의사들에게 처럼 그에게도 증거를 했었으며 그는 매우 친절하였고 성서에 어느 정도 관심을 보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역시 그에게 증거를 하였었다. 우리는 ‘엘리제’에게 친구들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쳤는데 저녁 기도 때마다 그 아이는 이 의사를 자주 포함시켜서 그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진리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의사가 우리 딸이 죽음의 병 중에 보인 믿음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엘리제’는 내게 「참다운 평화와 안전」책을 주었지요. 그렇지만 나는 바빴기 때문에 책꽂이에 그냥 꽂아 두었읍니다. 당시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해서 나는 문제들을 호전시키려고 ‘헬싱키’의 ‘X-레이’ 병원에서의 나의 무거운 책임을 벗어 버렸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랜드’로 이사하였고, 나는 보건소에서 일반 진료를 보았읍니다.
“이사한 것만으로는 우리 가족 관계가 좋아지질 않았읍니다. 그러던 중 그 지방 ‘증인’이 내 아내를 방문하였고, 아내는 얼마의 인쇄물을 받았읍니다. 그러자 아내는 ‘엘리제’가 내게 준 책이 기억나서 책장에서 그 책을 꺼내어 전체를 다 읽었읍니다. 아내는 곧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 그 지방 증인과 연구가 시작 되었읍니다. 처음에는 내가 연구하는 것을 반대할까봐 아내는 연구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였읍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 가족 관계를 향상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아요.’ 나는 그 ‘증인’을 만나고자 하였으며 곧 기회가 마련되었읍니다. 그 결과 나까지도 연구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서 원칙들은 우리 가족 문제들을 개선시켜 주었으며 우리가 생명의 가치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갖도록 해주었읍니다. 1976년 우리는 침례를 받았고 아내는 정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읍니다. 네 명의 아이들중 셋이 ‘좋은 소식’의 선포자이고 7살 난 막내 아이는 우리가 야외 봉사에 나갈 때 정기적으로 함께 나갑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격려를 받았겠는가를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딸의 기도는 최상의 응답을 받은 것 같았다. 이 일을 ‘엘리제’가 알기만 한다면! 그 아이가 부활되면 이야기해 줄 정말 기뻐할 만한 이야기거리들이 있을 것이다.
의사가 “댁의 어린 따님은 암에 걸렸읍니다”하는 말을 들었을 때가 내 생애에서 가장 암담한 날이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제’가 살기 위해 싸우는 모습은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여호와 하나님과 성서에 있는 그분의 약속에 대한 강한 믿음이 한낱 어린 아이의 인생을 그렇게도 강력히 주관하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을 뭉클케 하였다. 나는 ‘엘리제’가 한 말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단지 하룻밤처럼 자고 있을걸거예요. 그리고 새 질서에서 깨어날거고요.”—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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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희망은 확실한가?깨어라!—1980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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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견해 1
당신의 희망은 확실한가?
“뭐가 좀 보이나요?” “예, 굉장합니다.”
고고학계에서 가장 극적인 발견들 중 하나에 앞서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질문자는 부유한 영국인으로서 ‘이집트’ 학자 ‘호워어드 카아터’의 후원자인 ‘카나르본’ 경이었다. 이 질문에 대답한 ‘카아터’는 ‘이집트’의 유명한 왕들의 골짜기에서 새로이 발견된 무덤의 봉인된 출입문에다 자기가 뚫어 놓은 통로 저편의 암흑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몇년 동안 그들은 ‘이집트’의 고대 ‘바로’들 중의 하나인 ‘투탄카멘’ 왕의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무덤을 찾으리라는 ‘카아터’의 주의깊은 연구에 근거한 기대에 매달려 이 골짜기의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노고를 바친 후 거의 포기 상태에까지 이른 지금 봉인된 고대 무덤의 입구가 발굴되었던 것이다. 열렬한 기대에 부풀어 그들은 그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 보았다. ‘카아터’ 자신이 자기가 본 것을 이렇게 묘사했다.
“내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안쪽 방의 세부가 희미한 가운데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이한 동물들, 상들, 그리고 금—어디나 금빛 섬광뿐이었다. 순간—곁에 서있던 다른 이들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나는 놀라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래서 ‘카나르본’ 경이 궁금증을 참다 못해 “뭐가 좀 보이나요?” 하고 초조하게 물었읍니다. 그 때 내가 입밖으로 꺼낼 수 있었던 말은 고작해야 ‘예, 굉장합니다.’하는 말뿐이었다. ··· 우리는 이런 것은 결코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어떤 것은 눈에 익은 그러나 어떤 것은 결코 본 적이 없는 물건들이 외관상 끝없이 방 하나 가득—박물관 하나는 족히 채울 것으로 보였다—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다.”
3,000여년 동안 이 보물들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거의 5,000개가 되는 이 보물들은 상(像)들, 가구, 배들, 무기들, 항아리들, 금 그리고 보석들이었다. 심지어, 식품, 의복 및 오락 도구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관들 및 소년 왕 ‘투탄카멘’의 ‘미이라’ 유해와 함께 바위를 깎아 만든 네 개의 무덤 방에 있었다. 여기서 고대 ‘이집트’인들의 장래 의식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왜 이 모든 귀중한 보물들과 생활 필수품들이 이러한 지하 무덤 속에 봉인되었는가? 그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생(來生)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다. 그들의 믿음으로는, 죽음이란 단지 장래의 불멸의 생명으로의 변화에 불과했다. 뒤에 남겨두고 온 세상과 아주 흡사한 나라로 여행하기 위해 사람들은 식량 및 장비가 필요했다. 그들의 믿음으로는, 여기서 그들의 ‘카’ 혹은 생명력이 육체와 재결합할 것이었다. 그래서 이 때를 대비해 시체를 주의깊이 보존하여 ‘미이라’로 만들어둔 것이었다. 심지어는 내세에서 왕의 시종 노릇을 할 상(像)들인 ‘우샵티’도 무덤에 안치돼 있었다. 이러한 희망에 대한 그들의 확신이 시체 위에서 발견된 한 용기에 상형문자로 씌어있는데, 아마도 ‘투탄카멘’ 왕 자신의 말로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었다. “나는 어제를 보았노라. 나는 내일을 아노라.”
그러나 그는 참으로 장래를 알았는가? 아니면 그의 희망은 잘못된 것이었는가? 거기서 발견된 물건들이 무덤이 최후로 봉해 졌을 때 놓아둔 그대로—이동되지도, 사용되지도 않았다는 데 대해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내생을 위해 육체를 보존할 목적으로 연고를 발랐음에도 불구하고 ‘미이라’까지도 크게 손상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후의 생명에 대한 그의 희망은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
장래에 대한 당신의 희망은 어떠한가? 당신의 희망은 확실한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가? “모든 사람이 죽”는다, 죽음이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라고 한 고대 성서 필자들의 말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고린도 전 15:22; 전도 3:19, 20) 사후에 대한 어떤 확실한 희망이 있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인간 영혼이 불멸이라고 믿는 그들은 하나의 영으로서 하늘을 편안하게 떠다니는 삶, 열반(淇槃)이라 칭하는 상태에 도달하는 일, 혹은 그들의 영혼이 다른 몸으로 환생하는 일을 경험할 것으로 기대한다. 현대의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초래한 것이 무엇이든 장래의 과학이 그것을 극복하여 그들을 생명으로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들의 시체를 극도로 낮은 온도에서 냉동시키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희망들은 근거가 확실한가, 아니면 이들 역시 잘못된 것인가? 장래를 위한 확실하고, 기초가 튼튼한 희망이 있는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그렇다, 가능하다. 그리고 그 희망은 연대에 있어서 고대 ‘이집트’를 능가하는 한 책—성서에 근거하고 있다. 사람과 만물의 창조주 자신이 죽어 가는 인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성서에 들어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계시 21:4, 5.) 그렇다. 이것은 죽은 인간 몸 속에 있다는 소위 불멸의 영혼이 계속 존재함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서는 육체를 가진 인간 자신이 영혼이며 영혼 자체가 죽는다고 즉 불멸이 아니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창세 2:7; 에스겔 18:4, 20.
죽은 자의 희망은 “죽은 자의 부활”에 있다. 성서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듣고] ··· 나오리라.”고 우리에게 확약하기 때문이다. (마태 22:31; 요한 5:28, 29; 또한 사도 17:32; 24:15을 보라.) 이 희망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이 ‘투탄카멘’의 희망처럼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이 희망에 대한 견고한 기초를 필요로 함을 미리 아시고 “저[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 (사도 17:31) 이 기적은 부활되신 예수를 실제로 목격한 500여명의 사람들이 증거하였다. (고린도 전 15:3-8) 또한 전능자의 부활 능력이 죽었던 다른 사람들의 부활로 더욱 증명되었는데 그 중 셋은 예수 자신이 수행하신 것이다.—마태 9:18, 23-25; 누가 7:12-15; 요한 11:38-44.
이 성경은 부활된 인류를 위해 어떠한 종류의 생명을 제시하는가? 그것은 이전 것과 비슷할 것인가? 계시록 21:4의 성서 약속에서 본 바와 같이 수천년 동안 인류를 괴롭혀 온 질병과 고통이 과거지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현존하는 악하고, 부패하고 압제적인 사물의 제도를 그 모든 불공평 및 편견과 함께 쓸어 버리실 것이다. 창조주께서 사람을 만드실 원래 목적이 실현될 것이다. 즉 조화 가운데 평화스럽게 살면서 전세계로 확장된 낙원 상태에서 자기의 수고의 열매를 즐길 완전한 인류로 온 땅이 충만할 것이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어떠한 것도 하나님께서 다가오는 의로운 새 질서에서 순종하는 인류를 위해 하실 기이한 일들과 비교할 수 없다.—다니엘 2:44; 창세 1:28; 이사야 55:11; 65:17, 21-25; 미가 4:3, 4.
당신은 거기서 이러한 축복을 즐길 것인가? 당신이 성서를 연구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생명을 주는 지식을 받아 들인다면 이 희망을 당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 (요한 17:3) 본 잡지의 매 ‘페이지’를 읽는 것은 장래에 대한 확실한 희망을 갖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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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셨다깨어라!—1980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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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견해 2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셨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마가 10:14) 많은 사람들은 이 성귀를 기억할 것이며, 예수께서 얼마나 어린이들이 접근하기에 쉬운 분이셨는가를 보여 주는 데 이 성귀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그 특별한 때의 긴박감을 우리가 인식할 때 예수의 그러한 특성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그 이전에 예수께서는 추종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배반당하시고, 재판을 받아 유죄 판결로 처형당하실 것이라고 두번 말씀하셨다. 이제 그분의 봉사 기간은 삼년이 지나갔고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계셨다. 그분은 고된 시련이 단 몇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기에 그분은 어린이들을 대면하신 직후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라].”—마가 10:33, 34.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께서 어린이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으시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더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 심지어 이 어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서도 시간을 내셨다.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마가 10:13, 14, 16.
어린 아이는 자기 부모에게 의지하고 필요한 것을 구하며 부모를 신뢰하고 확신을 갖는다. 부모의 말이라면 진리로 받아들이고 다른 아이들 앞에서 그 부모의 말을 옹호할 것이다. 왕국 사람들도 그들의 천적 아버지께 대하여 그러할 것이다.
한 때 제자들이 자기들 중에서 누가 가장 큰 자인가에 대해서 논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논점을 지각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나서 그분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셨다. (마가 9:35-37) 예수의 참다운 추종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해 시간을 내며, 그들로 회중에서 환영받는 부분이라고 느끼게 해준다.
예수께서는 시간을 내셔서 어린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셨다. 그 분은 아이들의 놀이를 당시 세대의 완악함을 비유하는 데 사용하기까지 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하고 예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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