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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 요법—어떻게 효력이 있는가?
    파수대—1981 | 12월 15
    • 신앙 요법—어떻게 효력이 있는가?

      “목에 버팀대를 댄 소녀여, 그것을 벗어 버리라. 그대는 고침을 받았노라. 이리로 올라와 예수를 찬양하라.” 그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단으로 걸어간다. 그 소녀는 자기가 열두번이나 수술을 받았으며 1973년 이래 ‘류머티스’성 관절염으로 불구가 되었다고 말한다. 사제 앞에 서서, 그 소녀는 목을 앞 뒤로 움직인다. 사제가 그 소녀를 축복하자, 군중은 박수 갈채를 보낸다. 사제는 “이 소녀가 고침을 받았읍니다!”라고 외친다.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치유받은 사람의 즐거움을 상상해 보라!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가?

      ‘우스터’(영국) 「선데이 텔리그램」지에 실린 이 경우와 같은 보도들은 그런 일들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오늘날 신앙 요법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환자들은 치유되기를 바라면서 신앙 요법자들에게로 모여들고 있다. 그들의 희망은 이루어지는가? 병을 치료하는 데 신앙 요법이 참으로 효과가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효력이 있는가?

      신앙 요법이란 무엇인가?

      실제로, 신앙 요법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서양에서는, 복음 전도자나 주요 종교 교역자들—아마 ‘카리스마’ 운동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개최하는 예배에서 종종 행해진다. 이 신앙 요법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본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께서 바로 그들의 능력의 근원이 되신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집단은 비그리스도교 “요법자”들인데, ‘부우두우’교 사제, 무당, 마법사 등이다. 이들은 악령들이 병을 일으킨다고 믿고 있으며, 그 영들을 쫓아 내는 의식을 행한다.

      다음은 “심령 수술”이라는 것을 시술하는 “심령 외과의”들이다.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 그들은 맨손으로 환자의 몸 안에 이를 수 있으며 병든 조직과 응혈을 꺼낸다고 주장한다. “환자”들은 온전히 의식이 있으며, 수술 후에 아무런 흉터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끝으로, 자기들의 “요법”이 종교나 신앙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연 발생적인 과정, 즉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또는 체내에 있는 신비한 치유력을 끌어 들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신앙 요법자”라는 말보다 “심령 요법자”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효력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들에 따라 다를 것이다. 믿는 사람들은 병이 고쳐지는 것을 목격하였거나 체험한 것에 대하여 말한다. 의심하는 사람들은 기적으로 치료받았다고 주장하는 경우들을 추적해서 조사해 보고 그런 일이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들의 말을 이야기한다. 왜 이러한 모순이 있는가?

      때때로 순수한 오진의 가능성이 있다. 한 여인은 진심으로 자기의 경부(頸部)암이 치유되었다고 믿었다. 그 여인은 임상 검진에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신앙 요법자에게로 갔던 것이다. 다음에 다시 검사를 하였을 때 그것은 음성이었다. 그 여인은 신앙 요법자가 자기를 고쳐 주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의사는 처음 검사의 결과는, 때때로 있을 수 있는, 단순한 오진이었다고 말하였다.

      또 다른 경우는 기적을 몹시 바라는 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빠진다는 것이다. 오래된 암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한 소녀는 신앙 요법자를 찾아갔다. 그 후에 그 소녀는 담당 의사에게 다시 진찰을 받았다. “의사가 나를 보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하고 기뻐하였다. “나는 두달 후면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읍니다. ·⁠·⁠·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을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렇게 구원해 주셨답니다.” 안타깝게도 일년이 채 못되어 이 소녀는 사망하였다.

      한번은, 한 의사가 자기의 환자의 회복을 기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한 신문 기자가 그 내용을 추궁하자 그 의사는 “기적”이라고 말한 것은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말하였다. 그 의사는 그 치유가 “자연 발생적인 것”임을 확신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신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앙 요법이 관련되지 않을 때에도 동일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 왔다”고 그는 말하였다.

      실제로 “치유”케 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요인들이 있다. 정신이 신체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는 아직도 완전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질병의 진행 과정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어떤 경우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병의 차도가 있는 수가 있다. 많은 병들은 인체 자체가 낫게 하고, 때로는 약물 치료의 도움으로 치유된다. ‘윌리암 A. 노란’ 박사는 신앙 요법 예배의 강렬한 감정이 어떤 병에는 보통 경우보다 빨리 반응을 일으키게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치유되었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을 뿐이라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일부 신앙 요법자들은 치유의 상당수는 기적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한다. ‘카리스마’ 운동과 관련이 있는 한 사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일부[치유들]는 정신 신체적 이유이고, 일부는 ‘히스테리’성이며 일부는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튼 그들의 병이 나음으로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물론 모든 치유가 자연 발생적이라는 설명을 다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기적이 발생하며 환자들이 어떠한 초인간적인 힘에 의하여 치유된다고 진실하게 믿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이러한 질문이 생길지 모른다. ‘신앙 요법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 요법을 시험해 본다고 해서 해로울 것이 있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 신앙 요법—해로운 면이 있는가?
    파수대—1981 | 12월 15
    • 신앙 요법—해로운 면이 있는가?

      신앙 요법자들은 그들의 병 고치는 능력이 모든 경우에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이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환자가 전적으로 신앙 요법자를 믿었는데, 바라던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때때로 결과는 심각하였다. 어떤 경우에,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치료를 받았더라면 성공적으로 치유될 수도 있었을 질병 때문에 사망하였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아마 많은 신앙 요법자들은 현재 그들의 “환자들”에게 신앙 요법을 받으러 오는 동안에도 의사와의 접촉을 유지하라고 권고한다. 그들은 치료하는 일에 있어서 의사를 경쟁자로 보지 않고 동반자로 본다고 말한다. 일부 의사들은 그들의 환자들에게 줄 수 있는 정신 신체 요법의 유익을 감안하여 이러한 종류의 신앙 요법을 조심스럽게 승인한다.

      ‘윌리암 A. 노란’ 박사는 신앙 요법에 대하여 장기간 조사해 본 후, 또 다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치유되었다고 주장하는 몇가지 사례들을 철저히 조사해 본 후, 그는 많은 슬픈 일들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치유되었다는 말을 들었거나, 그렇게 믿도록 유도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 병은 여전하였다. 어떤 병들은 이전보다 악화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기만당하였다고 느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의 가정 의사와 접촉을 유지하라는 충고를 따랐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바라던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비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요행을 생각해서 신앙 요법자를 찾아 갈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 대답을 얻기 위하여 종교적인 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적인 관련

      신앙 요법은 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복음 전도자들과 ‘카리스마’ 운동가들은 그들의 활동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도 돌아오게’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그들의 예배 도중에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거나 그들이 말하는 “성령을 받는 것”—즉, 그들이 움직일 수는 없지만 주위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아는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황홀경에 빠진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일들은 다른 종교 요법자들, 즉 ‘부우두우’ 사제들과 무당들이 관련되는 발작 및 황홀경과 다를 바가 없다.

      일부 “심령 요법자”들이 자신들의 치료 방법은 종교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과정 및 경험은 종종 종교 요법자들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리고 적어도 일부는 강신술 또는 아마 동양 종교 철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현 개방적인 20세기에 그러한 세부점들이 중요한가? 그렇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사도들이 행한 치료를 평가의 기초로 삼는다면, 그러한 세부점들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치료를 고려할 때 우리는 어떠한 점을 알게 되는가?

      예수의 치료 방법

      예수께서 행하신 치료와 관련하여, “심령 수술” 혹은 “성령을 받는” 일은 전혀 없었다. 또한 치료에 앞서 감정을 흥분시키는 설교도 없었다. 그분이 사용하신 방법은 흔히 격식을 갖추지 않은 것이었다. 예수께서 환자를 만지거나 또는 환자가 그분을 만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그분이 환자에게 단지 말씀만 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치유되었다.—마태 8:14, 15; 누가 8:43-48; 17:12-19.

      예수의 치료 방법은 정신 신체 요법이 아니었다. 마른 손은 그런 방법으로 치료될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한 병을 고쳐 주셨다. 그분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실 수 있었다. 그분은 심지어 죽은 자들까지 일으키셨다. (마태 4:23; 누가 6:6-11; 8:49-56) 단지 부분적으로 나아진 정도가 아니었으며, 실패하는 일도 없었다. 예수의 치료 방법과 관련해서는 “실망”이라는 말이나 “기만”이라는 표현들은 들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분의 적들까지도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였음을 시인하였다. (요한 11:47, 48) 그 당시와 오늘날에 이러한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차이가 있는 이유

      예수의 치료 방법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대부분의 신앙 요법자들도—널리 인정하고 있으므로, 오늘날의 요법자들은 다른 힘의 근원과 접촉하는 것일 수 있는가? 특히 일부 신앙 요법자들이 강신술 및 신비술과 관련이 있음을 고려할 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리고 성서는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우리에게 이러한 경고를 해준다.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명 18:10, 11.

      이것은 종교적 편협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언제나 인류의 더 나은 복지를 방해해 온 악한 영의 세력—악귀들—에 물들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준다. 신비술과 관련이 있는 현대 신앙 요법은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 방법과는 다르다. 그분은 언제나 그러한 영향력을 멀리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력의 영향력 아래 행하여진 모든 일은 결국 “실망”과 “기만”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께서 행하신 치료 방법을 오늘날에도 기대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능력의 근원이 다른 데 있다는 점이 더욱 명백해 진다. 예수와 그분의 사도들의 치료 사업은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예수께서 치료하신 이유

      사도 ‘바울’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디모데’가 병들자, ‘바울’은 안수를 하지 않고 포도주를 약으로 사용할 것을 권고하였다. (디모데 전 5:23)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치료의 은사를 일종의 치료법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 사람들의 육체적 건강을 돌보는 것이 그들의 사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처럼, 그들은 전파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자기의 생의 주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셨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요한 18:37.

      그러면, 왜 치료하셨는가? 그것은 다른 기적들과 함께 하나의 표징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소식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 점을 이러한 말로 밝혔다. “우리가 이와 같이 귀중한 구원을 소홀히 하고서 어떻게 그 갚음을 피할 수 있겠읍니까? 이 구원은 주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것이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표징과 기사와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하여 ·⁠·⁠· 사람들과 함께 증거해 주셨읍니다.” (히브리 2:3, 4, 새번역)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구원의 소식이었다. 기적들은 단지 그 소식이 진리임을 증명해 주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일단 그 점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회중을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확증이 되면, 치료 능력을 포함한 영의 기적의 선물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고린도 전 12:27-13:8.

      그러면 오늘날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다는 주장은 어떠한가?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러자 예수의 대답은 어떠하였는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예수께서는 권능을 행하는 일이 있을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그분의 권위, 즉 ‘그분의 이름으로’ 행하여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 일들은 어떤 다른 능력에 의하여 행해질 것이며, 그러므로 그 일은 불법이었다.—마태 7:21-23.

      한편, 예수께서는 자기의 참된 추종자들이 할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 백성으로 제자를 삼고 ·⁠·⁠· 그들[을] ·⁠·⁠· 가르치시오.” 그렇다. 오늘날 증거되는 일은 치료와 같은 기적이 아니라,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마태 24:14, 신세; 28:19, 20, 신세.

      더 나은 해결책

      그러므로, 신앙 요법자들을 찾아가는 것은 유익이 있을 가능성은 의심스러운 반면 그 위험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악귀들과 관련을 맺게 될 위험성이 있고 예수께서 우리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보실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신앙 요법보다 훨씬 더 나은 인간의 질병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놓칠 위험성이 있다.

      더 나은 해결책, 즉 하나님 자신의 해결책이 성서에 설명되어 있다. 이 영감받은 책은 질병으로부터의 즉각적인 구출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서는 건강 문제에 있어서 확실히 도움이 된다. 신체 및 도덕적 깨끗함에 대한 성서의 교훈을 따른다면 현대의 재앙인 성병 및 흡연으로 인한 암을 포함하여 많은 질병들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서의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면, 시기, 질투 및 극도의 노여움을 일으킬 수 있는 압박감이 관련된 많은 질병들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잠언 14:29, 30; 고린도 후 7:1; 갈라디아 5:19-23.

      그 외에도 사도 ‘바울’은 질병과 같은 극히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것은 많은 염려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모든 생각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평화”가 깃들게 해 준다. 그러한 정신적 평화는 질병을 겪을 때, 신앙 요법에 의지하지 않고도 사람에게 확실한 정신 신체의 치료의 유익을 가져다 준다.—빌립보 4:6, 7, 신세.

      더 나아가, 성서는 예수께서 전파하셨던 하늘 정부인 왕국이 현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사물의 제도를 완전히 제거한 후 온 땅에 편만하게 될 상태를 묘사함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이러한 묘사들은 그 실현의 때가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더욱 우리를 흥분케 한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의 기적들이 “표징”과 “전조”였다고 말하였다. (사도 2:22, 신세) 그것들은 예수의 소식이 진리라는 “표징”이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왕국이 자기의 뜻을 온 땅에 이루게 할 때 그분에게 인류를 위해 일하도록 권능을 부여하실 것에 대한 “전조”였다. 그 때 있게 될 치료와 회복 사업을 상상해 보라!

      「계시록」은 미래에 있을 이 치료 활동의 결과를 묘사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것은 신뢰할 만한 약속이다. 그 때에는 실망이나 기만당하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말은 진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계시 21:4, 5.

      당신은 병과 사망의 문제로 염려하고 있는가?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들을 조사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은 그 약속들이 신앙 요법보다 훨씬 더 신뢰하고 만족할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6면 네모]

      예수의 치료 방법은—

      ● 명백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 모든 경우에 온전히 효력이 있었다

      ● 흔히 격식을 갖추지 않았다

      ● 심지어 적들까지도 성공적임을 인정하였다

      ● 구원의 소식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7면 네모]

      예수의 치료 방법은—

      ● 강신술 또는 신비술과 관련이 없었다

      ● 감정에 호소하는 설교가 수반되지 않았다

      ● 정신 신체 요법 또는 일종의 치료법이 아니었다

      ● 그분의 봉사의 직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 우리 시대에 재현될 것을 예언하지 않으셨다

      [5면 삽화]

      예수께서 치료하신 방법과 오늘날의 신앙 요법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7면 삽입 성구]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베드로 후 3:1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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