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아이들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깨어라!—1984 | 6월 1일
-
-
청소년들은 묻는다 ···
어떻게 아이들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그 소년의 걸음거리는 완전히 기가 죽어 있다. 긴장하여 불안해 하는 그는 새로운 주위 환경들로 인해 당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자 보다 나이든 학생들이 그가 새로 온 친구라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된다. 곧 일단의 소녀들이 재빨리 그를 둘러싸고 그를 음란한 말로 공격하는 “신입식”을 거행한다! 귀밑까지 새빨개진, 그는 가장 가까운 안전 장소인 화장실로 달아난다. 웃음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 퍼진다.
위의 내용은 많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 주는 상당히 대표적인 장면이다. 괴롭히고 놀리고 모욕을 주는 일이 많은 청소년들의 잔인한 오락이 되고 있다. 한 청소년은 이렇게 말하였다. “친구들이 나를 보고 웃기 시작했을 때 나는 죽고 싶었어요.”
‘솔로몬’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느니라]”고 말한 일이 있다. (잠언 12:18) 자신의 동배들이 내뱉는 욕설은 날카롭게 간 칼처럼 자신감을 완전히 베어내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한 남자는 이렇게 회상한다. ‘학창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명료하게 말할 줄 모르는 나를 보고 비웃었읍니다. 나는 수줍어하게 되었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두려워하였지요.’ 그가 당한 조롱은 지금까지도 그에게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나를 성가시게 굴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는 청소년이 있을지 모른다. 아마 당신은 먼저 왜 놀리는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 이유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다고 성서는 잠언 14:13에서 말한다. 일단의 청소년들이 누군가를 괴롭힐 때 폭소가 터진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이 즐거워 환성을 지’르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 65:14, 공동번역 참조) 종종 웃음은 내적 혼란을 위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지만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마음에 안 들지만, 누군가를 끌어내리면 기분이 나아진다.’
‘에드워드 마아틴’이라는 한 교사는 “두주 동안 일단의 소녀들이 다른 한 소녀를 교실 안팎에서 괴”롭히던 상황을 기억한다. 그 희생자는 “문자 그대로 두려움에 질렸다.” ‘마아틴’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적대자들의 집단에게, 이러한 호전성은 연합과 우애의 근원이었다. 그들은 남과 맞서고 교묘하게 놀리는 기회들을 탐닉했다. 적을 놀리는 보다 흥미로운 방법을 짜내는 사람들은 우쭐해지고 집단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한 놀리는 일에 참여한 ‘셸리’라는 이름의 청소년도 다음과 같이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생각하였지요 ··· 알다시피, 그 일은 일종의 친밀감을 주지요. 마치 소속감같은 것 말이예요.”
시기심이 또한 공격을 유발한다. 성서는 ‘요셉’이라는 이름의 한 십대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그의 친 형들은 단순히 그가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그를 적대하였다. 강렬한 시기심은 욕설만이 아니라 살인을 모의하게까지 하였다! (창세 37:4, 11, 20)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뛰어나게 총명하거나 교사들의 사랑을 받는 학생은 동배들의 시기심을 받게 될 수 있다. 모욕은 ‘그에게 진짜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감, 시기심 및 저하된 자존심이 종종 조롱하는 동기가 된다. 그렇다면, 일부 불안정한 청소년들이 자존심을 상실하였다고 하여 자신의 자존심을 상실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괴롭히는 일을 중지시키는 일
“복 있는 사람은 ··· 오만한[조소하는, 공동번역]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시편 필자는 말한다. (시 1:1) 자신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기 위해 조롱에 가담하는 일은 모욕의 순환을 연장시킬 뿐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몇 가지 유익한 제안을 한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도 7:9.
그렇다. 놀리는 일을 그렇게 심각하게 여길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실제로는 아무런 악의가 없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순수한 동기로—혹은 그렇게 순수한 동기는 아니더라도—자신을 놀리고 자신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 하더라도, 상심할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말하는 내용이 음란한 것이 아니라면, 그 말 가운데 있는 ‘유우머’를 보려고 노력하라. “웃을 때”가 있으며, 장난으로 놀리는 일에 화를 내는 것은 과민 반응일 수 있다.—전도 3:4.
그러나 장난으로 놀리는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가? 아마 체육 시간에 혹은 옷을 갈아입는 방에서 어떤 학생이 빈정거리는 투로 당신의 체격을 보고 놀려댈지 모른다. 혹은 아마 당신이 여드름 때문에 고민하는 소녀인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흠잡으며 놀릴지 모른다. ‘유우머’ 감각을 나타내는 일이 말하기보다는 어려울지 모른다. 왜냐하면 비난을 받으면 누구나 방어적이 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누엘 스미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단지 같은 방법으로 반응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한) 어떤 비난도 부인하지 말고, 방어 자세를 취하지 말며 대응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 조롱자는 당신의 반응을 즐기고,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만끽하고 싶어한다. 마주 빈정대거나, 방어적이 되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일은 그가 괴롭히는 일을 계속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작가 ‘캐드리인 맥코이’는 키가 크고 과잉 체중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들볶인 ‘캐롤’이라는 이름의 십대 소녀에 관해 이야기한다. ‘캐롤’의 어머니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네가 다른 사람의 태도를 직접 변화시킬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너를 못살게 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봤니?” 딸의 대답은 이러하다. “실망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음으로 그 애들이 재미를 못느끼게 하면 될까요?” 다른 청소년들도 태연하게 그들을 무시함으로써 비슷하게 모욕을 받아넘겼다.
‘솔로몬’ 왕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 오늘날의 영어 역본]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전도 7:21, 22) 조롱자들의 빈정대는 말에 “마음을 두”는 것은 당신에 대한 그들의 판단에 지나친 염려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의 판단은 타당한 것인가? 사도 ‘바울’은 시기심 많은 동배들에게 부당한 공격을 받았지만, 이렇게 대답하였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여호와, 신세]시니라.” (고린도 전 4:3, 4)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너무나 강하였기 때문에 부당한 공격을 견딜만한 자신감과 자존심이 있었다.
“거역하는 말”을 참는 일
때때로 당신은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 때문에 조롱을 받을지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그러한 “거역하는 말”을 견디셔야 하였다. (히브리 12:3, 신세) 그러나 이러한 말 속에 비열하고 굴욕적인 모욕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결코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다. (베드로 전 2:22, 23) 그분은 자신이 산상 수훈에서 가르치신, ‘왼편 뺨도 돌려 대’라는 바로 그 조언을 실천하셨다.—마태 5:38-42.
당신도 조롱을 견디고 무시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함으로써 혹은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낀다는 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줌으로써 적대감을 불러들이지 말라. 자신의 믿음을 알릴 기회가 생기면 그렇게 하되 “온유한 기질과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그렇게 할 것이다. (베드로 전 3:15, 신세) 훌륭한 행실에 대한 명성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최대의 보호책임이 입증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용기있는 태도를 싫어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종종 그 점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바네사’라는 이름의 한 그리스도인 소녀는 일단의 여자 아이들이 때리고 이리저리로 밀치고 책들을 손에서 떨어뜨리게 하는 괴롭힘을 당하였는데—그 모든 것은 싸움을 걸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그 소녀의 머리와 깨끗한 흰옷에 ‘초컬릿 밀크 쉐이크’를 붓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그는 결코 굴복하여 성을 내지 않았다. 그러다, 여러 달 후에 ‘바네사’는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서 그 집단의 주동자를 만났다! “나는 네 끈기가 미웠던거야”라고 이전에 못살게 굴던 친구는 말하였다. “나는 단 한번만이라도 네가 침착성을 잃는 것을 보고 싶었던 거지.” 그러나, ‘바네사’가 냉정을 유지하는 방법에 관한 그의 호기심이 그로 ‘여호와의 증인’들과의 성서 연구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나는 배운 내용들에 반했고, 내일 침례를 받을꺼야”라고 그는 계속 말하였다.
그러므로 “거역하는 말” 때문에 기가 꺾여서는 안 된다. 적절한 때에, ‘유우머’ 감각을 보이라. 악에 대해 친절로 응답하라. 언쟁의 불이 붙지 않게 하라. 조만간, 괴롭히던 사람들은 당신을 조롱거리로 삼는 일에서 별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기 때문이다.—잠언 26:20.
[20면 삽화]
조롱자들은 당신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만끽하고 싶어한다. 마주 빈정대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심지어, 더욱더 괴롭히도록 격려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21면 삽화]
많은 경우에 말의 공격을 받아 넘기는 최상의 방법은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
-
방언, 황홀경 그리고 음성—경계해야 하는가?깨어라!—1984 | 6월 1일
-
-
방언, 황홀경 그리고 음성—경계해야 하는가?
「깨어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통신원 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한 오순절 교회에서 일요일 저녁 예배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 ‘아시아’ 여인이 일어나서 외국어로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임에 틀림없다!’라고 동료 숭배자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 현시(顯示)의 그 무언가가 또 다른 여인과 그의 딸에게 아주 이상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였다. 그 모녀는 교직자에게 그 여인이 실제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물었다. 놀랍게도, 그 말을 이해한 그 교직자는 그 터져나온 말이 모두 야비하고 음탕한 말이었음을 시인했다. 더욱 놀라왔던 것은 “선한 영과 악한 영이 있다”고 그가 인정한 사실이었다.
아마 독자는 방언을 말하는 일과 같은 현상들이 성령의 현시라고 배워왔을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