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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건강을!”파수대—1982 |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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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건강을!”
제1세기의 그리스도인 통치체는 이와 같은 말로 회중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끝맺었다. 그들이 사용한 이 희랍어 표현은 ‘강건하라, 평안하라, 건강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사도 15:29.
“여러분에게 건강을!”이라는 말의 역할이 그저 끝맺는 인삿말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것, 즉 우리의 건강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더 좋은 건강을 추구해 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관해 지나치게 염려하고 있음에 유의하였는가? 당신은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이 균형잡힌 것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건강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치는 것
건강에 대한 치솟는 관심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멸성임을 얼마나 깊이 느끼고 있는지를 반영해 준다. 죽음은 너무도 속히 닥쳐 오는 것이다! (시 90:10)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죽음을 재촉할 수 있는 질병을 피하려고 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또한 건강에 대한 견해는 관례적인 의료 당국을 포함한 “체제”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불신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상업적인 식료품의 품질마저 의심하게 된다. 화학 첨가물로 너무 지나치게 정제된 “영양가없는 식품”이 건강에 미치는 위해에 관해 들어 온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먹는 가공 처리된 식품의 양을 제한하기로 결정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 식품”에 대한 매우 강력한 매력 때문에 사실상 그 밖의 것들은 먹으려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탈리도마이드’ 수면제로 인한 기형아 출산과 같은 비극에 관해 듣고는 약품들에 대해 의심한다. 그들은 제약 회사들이 강권하는 약들과 얼마의 분주한 의사들이 주의 깊이 검진하지도 않고 처방하는 약들은 부작용이나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한다.
이와 같은 사태의 결과로 사람들은 건강 문제에 있어 자주성을 더욱 행사하게 되었다. 독자도, 각 성인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에 입각하여 자기 자신이 건강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위험성이 존재하는가? 건강 문제에 있어서 성서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건강에 유익하다
제1세기에 통치체가 보낸 그 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음행과 피를 삼가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사도 15:28, 29) 이것은 건강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옳은 말이다. 음행은 사람들로 성병에 걸리게 하거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한다. 수혈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간장염 및,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겪은 바와 같은, 종종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질병들을 감염시켜 왔다.
음주와 흡연에 관한 하나님의 충고를 적용하는 데서 오는 더 좋은 건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조엘 포스너’ 박사는 건강 관리를 위해 미국에서 소비되는 비용의 60‘퍼센트’는 ‘알코올’ 및 담배의 사용과 관련된 질병 때문에 소비되는 것이라고 보고하였다.—잠언 20:1; 고린도 후 7:1.a
성서는 또 다른 면으로도 우리의 건강을 보호해 준다. 청결을 유지하는 일에 관한 성서의 교훈을 고려해 볼 때 이것이 사실임을 이해할 수 있다. (출애굽 30:17-21; 신명 23:12-14)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성서를 연구함에 따라 발전시키게 되는 전반적인 영도 그 사람의 건강을 개선시켜 줄 수 있다. 온유, 친절, 사랑을 추구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과 더욱 평화롭게 지내게 되고 이것은 그 사람의 건강을 보호해 준다. (잠언 14:30) 더우기,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높은 존중심은 그로 하여금 이치적인 예방책을 쓰게 하여 위험을 피하도록 해 준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은 자동차의 안전 ‘벨트’를 사용하는 면에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성실해 질 것이다. (사도 17:24, 25, 28) ‘록펠러’ 재단의 보건학부 부감독 ‘K. L. 화이트’ 박사는 “생활 방식 및 개인의 품행”과 같은 문제들이 개인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주 요인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서의 조언이 있다.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 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 (잠언 25:16, 27) 감미료인 설탕에 비한 꿀의 상대적 장점이 무엇이든지, 그 조언은 건강을 위한 하나의 규칙을 제공해 준다. 즉, 식이 요법의 비결은 절도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다양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고 편식과 과식을 피한다면 건강에 유익이 될 것이다. 꿀에 관한 그 말씀의 가치는 건강을 위한 노력에까지 미친다.
‘비타민’, 무기물 및 약초
개선된 영양 섭취는 보다 좋은 건강에 기여해 왔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비타민’과 무기물이 필요한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양 실조 각기병, ‘펠라그라’, 괴혈병, 구루병 등은 적당량의 ‘비타민’ B, C 및 D를 함유한 균형잡힌 식단으로 치료되거나 피할 수 있다. 또한, 의사들이 영양 연구에 더욱 몰두함에 따라, 보고들을 보면, 의학적 감독하에 투여된 다량의 특정 ‘비타민’과 무기물에 감응하는 것같은 질병들이 또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마치 심각한 결핍증에라도 걸린듯이, 자기 생각대로 많은 양의 영양 보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자가 치유법을 추구하는 일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좋은 것이라면 그만큼 더 이로울 것이다.’ 혹은 ‘신체가 초과량을 제거해 주기 때문에 ‘비타민’과 무기물은 몸에 해롭지 않을 것이다.’ 하고 생각한다. 일부 ‘비타민’을 과다 섭취하게 되면 그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져’서 그 효능은 단지 비경제적인 노폐물이 되고 만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태 15:17) 그러나 우리가 다른 ‘비타민’과 무기물을 과다 섭취하면 더는 영양분이 되지 않고 약리 작용을 시작하여 심지어는 해로운 독소가 될 수도 있다.
일부 ‘비타민’을 과량 섭취함으로써 사람들은 신체 기관에 손상을 입거나 그보다 더 심한 피해를 입었다. 바로 그러한 하나의 예로, 당근즙과 ‘비타민’을 다량 섭취한 영국의 어떤 사람은 그 결과 ‘비타민’ 과잉증에 걸려 사망하였다. 수많은 자녀들 역시, 진실하지만 영양 섭취에 관해 오해하고 있는 부모들이 공급한 과잉 ‘비타민’으로 인하여 해를 받아왔다. 무기물에 관하여 한 안과 의사는 다음과 같은 개인적 소견을 피력한 바 있다. “나는 ‘칼슘’, 구리, 아연 및 ‘크롬’을 대량 섭취하는 많은 사람들이 염려된다. 나는 20대, 30대의 남녀에게서 맹인 증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꿀에 관한 성서의 현명한 조언을 상기하라. 그것이 인공 약품이든, 천연 ‘비타민’, 무기물 혹은 약초이든, 과도한 양은 우리에게 해가 될 수 있다.
그렇다, 주의를 기울여야 되기는 약초도 매일반이다. 분명히 일부 약초 치유법은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디기탈리스’와 ‘키니네’는 “약초”에서 추출해 낸 것이다. ‘케냐’에서의 한 연구 결과,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약초 치유법의 적어도 50‘퍼센트’는 의학적 진가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것은 다수는 진가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채소”를 인간의 본래 식품이 되도록 의도하셨다는 사실은 모든 약초가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담배와 ‘마리화나’는 “약초”인 것이다.—창세 1:29, 30.
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같은 약초라도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미칠 수 있다. ‘오하이오’ 주의 한 여행하는 봉사자는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염려를 나타낸 친구들이 그에게 일반적인 약초 치유법을 써보도록 권하였다. 문제가 지속되자 그는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여러 가지 시험을 하여 담석(膽石)을 찾아냈다. 의사는 또한 그 봉사자의 혈액은 응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만일 그에게 상처가 났더라면 출혈로 목숨을 잃었었을 것이다. 의사가 약초 치유법을 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요법은 응혈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일단 그 약초를 끊자 혈액 문제는 사라졌다.
제안하는 일
병에 걸린 친구나 친척을 돕기 원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효능이 있다고 들은 것을 제안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사도 ‘바울’이 젊은 ‘디모데’에게 그 지방의 물을 피하고 ‘그의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한 것처럼, 종종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친절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디모데 전 5:23.
그러나, 약물이나 ‘비타민’, 무기물, 혹은 약초 등을 상례적으로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주의해야 하며, 만일 그가 건강 및 신체 조직 체제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참으로 사실들을 알고 있는가? 어떤 약물, ‘비타민’, 무기물 또는 약초가 분명히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지만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혹시 해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나는 알고 있는가? 만일 그렇게 되면 그 일부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설사 내가 제안한 것이 효과는 없지만 해될 것도 없다 하더라도, 나는 환자의 효과적인 치료를 지연시킴으로써 그의 증세가 악화되거나 치명적이 되게 한 셈이 되지 않을까?—디모데 전 5:22 비교.
사람들 중에는 어떤 건강 요법에 대해 보통 이상의 열정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한 극단적인 예로, 한 그리스도인 장로는 ‘비타민’을 판매하는 한 형제로부터 온 편지를 문에서 발견하였다. 그 편지의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그 (상표) 보충제가 왜 효과가 있는지, 논리적이고도 놀랄만한 까닭이 있지요. 그것은 “큰 ‘바벨론’”과 비교할 때 “진리”와도 같지요. 가끔 나는 일부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어떻게 진리를 받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때가 있읍니다. 우리의 의도는 오로지 그들을 도우려는 것인데도 그들은 잠언 18:13을 무시해버립니다.’
동기야 어떻든, 일부 사람들이 건강 문제에 관해 거의 종교적인 열정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해 준다.
다른 질문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조언을 받고 있음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러 모로 그것은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에 관해 주의를 기울일 만한 기타의 부면들도 있다. 나는 어떤 치유법을 받아들일 것인지 어떻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비정통적인 형태의 진찰 또는 요법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영적으로 위험성이 있는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건강에 대한 우리의 사고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다음 기사에서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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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그리스도인의 합리성파수대—1982 |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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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그리스도인의 합리성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분의 합리성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편지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그들과 그 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제의 영과 지적(知的)인 균형을 나타낼 것을 격려하였다.—빌립보 4:5, 신세.
우리의 건강에 관해서도 합리성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먹는 일에 과도하게 몰두하거나 극단적이 되는 것을 피하고 적당히 운동하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치료법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이지력에 근거해야 하며 일부 유행하는 건강 요법에 감정적으로 이끌리지 않는 조심성을 반영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영적인 건강과 육적인 건강의 균형을 유지하는 면에서도 이치적이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확인”하여 건강에 대한 관심이 하나님의 왕국을 둘째 자리로 밀어내지 않게 할 필요가 있다.—빌립보 1:10, 신세.
치료법의 선택
의학적 혹은 건강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이러한 문제들이 인기 혹은 유행에 의해 영향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좋다. 당신은, 한 때 인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일반의 견해가 크게 달라진 치료법을 상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의사들이 여드름 때문에 X‘레이’를 사용하고 사소한 이유로 어린이들에게서 편도선을 제거하는가 하면, 거의 모든 전염병에 새로운 ‘설퍼’제 또는 ‘페니실린’을 처방했던 때를 기억하는가? 형편은 달라졌다. 이러한 요법들이 얼마의 경우에는 적절한 것일지 모르지만, 경험과 연구는 일부 바람직하지 못한 부작용을 밝혀 주거나 혹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극히 선택적이 되어야 함을 지적해 주었다.
“과학적 방식”으로 교육을 받고 새로운 약품이나 요법에 대하여 조심하도록 훈련받는 의사들이 지배적인 견해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야 유행하는 건강 요법에 대해 얼마나 더 쉽사리 균형을 상실하겠는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해 왔다. 흔히 그들은 제한된 치유 효과는 있으나 무자격자들에 의해 크게 오용되어 온 일부 치료법을 사용해 왔다. 실제로 인기가 있던 어떤 “요법”들은 기만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에 전혀 효력이 없었다.a 그런 요법들은 환자들을 위해 돈쓰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촉진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큰 관심거리로서, 일부 인기있는 요법들은 성서에서 정죄하고 있는 ‘신비한 능력’ 즉 영매술이 관련되어 있는 것같이 보인다.—이사야 1:13, 신세 참조; 신명 18:10-12.
‘하지만 어떤 치료법이 기만적인 것인지의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고 어떤 사람들은 질문할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사실상 현재는 누구나 무가치한 것으로 인정하는 과거의 치료법들 다수가 과학적으로 그럴듯한 명칭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관해 배포된 인쇄물들은 일부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릴 만한 설명을 게재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도움을 발견할 수 있는가?b
합리성의 적용
제자 ‘야고보’는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는 ··· 합리적”이라고 기술하였다. (야고보 3:17, 신세) 그리스도인은 비록 보건 전문가는 아니지만 합리적이 되고자 노력함으로써 진단 (혹은 검진) 방법 및 치료법을 평가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많은 건강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그에 관한 모든 지식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치료를 필요로 하고 권유와 함께 제안을 받을 경우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볼 수 있다. ‘제안받은 요법은 합리적이고 신체 및 질병에 대한 지식과 조화되는가? 아니면 그 주장은 이상하고 요란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가? 나는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 혹은 금전상의 유익을 노리는 사람들에 의해 이 요법을 받아들이도록 영향을 받고 있는가? 그에 관해 의문이 생긴다면 사실이 좀 더 알려질 때까지 나는 기다려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기본적이기는 하지만 과거에 일부 기괴한 요법들이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질문들을 고려할 가치가 있음을 알려 준다. 이 점은 또한 다음과 같은 최근의 한 경험으로도 예시될 수 있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어떤 사무실에서 일하는 한 여자가 극단적인 식이 요법을 강조하는 한 의사를 찾아 갔다. 그는 나중에 친구들에게, 그 의사가 “뇌 종양”을 포함한 “환자들이 배출한 종양이 든 병들”을 보여 주었다고 말하였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사람이 진짜 종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는가? 그 종양이 어떻게 “배출”되었다고 주장되든지간에 그는 진짜 종양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가? 또한 뇌는 밀폐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장(腸) 기관을 통해서, 혹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 뇌종양을 어떻게 “배출”할 수 있는가?
결국, 무가치한 것으로 증명된 과거의 검진법 혹은 요법들 중의 다수는 “기적의 물질”, 비상한 “체적력”이라는 따위의 주장, 혹은 시술자가 추를 통해서 또는 진찰받는 것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신체 부분을 통하여 ‘진단’을 내리는 이상한 방법들에 의해 권유되었었다. 그것들은 이지력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신비 혹은 심지어 영매술적 힘에 호소하는 것이다.—레위 19:26 비교.
증명서는 어떠한가?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에게 한층더 도움이 된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잠언 14:15.
그것은 훌륭한 교훈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의사들은 ‘존스’ 씨가 4개월 밖에 못산다고 말했지만, 그는——을 복용하고 나서 이제는 좋아졌다.’는 말과 같은, 증명서를 사용하여 권유되는 요법들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다. ‘존스’라는 사람이 실제로 그런 질병에 걸린 적이 있든 없든 당신은 과거의 많은 기만적인 건강 요법들이 증명서들로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친지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할 때 비평적이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분명코 아니다. 하지만 건강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함에 있어 우리는 ‘증명서의 모든 말들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비이치적일 것이다.
예를 들면, ‘존스’라는 사람이 질병에 걸린 일이 있고 실제로 호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엇 덕분인가? 통상적인 약들을 포함하여 건강 요법에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는 것은 “심리적인 효과”이다. 연구 결과는 대략 환자의 30내지 40‘퍼센트’는 화학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정제 혹은 물주사 요법으로 나아졌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사이언스 다이제스트」지(1981년 9월호)는 이렇게 보고한다. “믿음, 희망, 신뢰 및 심리적인 효과의 모든 중요한 요소는 때때로 상처를 낫게 하고 신체의 화학 작용을 변경시키며 가장 혹독한 질병의 증세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말’을 어느 정도나 ‘믿’을 것인지 결정할 때에 “심리적인 효과”를 기억하고, ‘그 요법 자체가 건전한 연구와 폭넓은 시험을 통해 효과적임이 확증되었는가?’라고 질문해 보라.
연구 보고서가 단순한 증명서보다는 낫다 할찌라도 그 요법이 도덕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받아들일 만한지를 고려해 보는 것이 좋다. 「미국 의학 협회」지는 수많은 임상 실험으로 확인될 수 있는 홍반성 ‘루푸스’, 즉 심각한 면역 질환에 걸린 28세된 여자에 관해 보도하였다. 그는 약물 치료를 거절하고 “그에게 임한 저주를 없애 주는” 마법사를 찾아 갔다. 그는 증세가 없어져서 돌아왔으며 분명히 치유되었다. 그 잡지의 보고서는 ‘아시아’의 한 마법사가 어떻게 ‘악령을 쫓아내고’ 그를 치유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요법은 분명히 효력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영매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그러한 형태의 요법 또는 기타의 요법들을 피할 것이다.—마태 7:22, 23 비교.
자격있는 사람의 도움을 구하라
많은 경우에 우리는 치료 및 건강 문제에 관해 전문가의 조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누구에게 의뢰할 수 있는가? 성서는 이러한 현명한 견해를 제안해 준다. “너는 자기 일에 솜씨있는 사람을 보았느냐? 그가 스스로 서게 될 곳은 왕들의 앞이 [될 것이다.]”—잠언 22:29, 신세.
어떤 일을 연구하여 기술을 발전시키는 사람은 자격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고 그 분야의 전문가로까지 인정을 받게 된다. 건강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의사 혹은 건강 상담가가 권유하는 것을 평가할 때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다. 즉 무엇으로 그를 신뢰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단순히 그의 칭함이나 그의 이름 뒤에 붙는 칭호에 달려 있지 않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칭호가 중요한 것처럼 여겨 왔다. (마태 23:6, 7 비교) 의사노릇을 하기 좋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단지 몇권의 책을 읽어 보았거나 몇 시간의 “강습”에 참석했을 뿐이지만 (무료로 또는 돈을 위하여c) 진찰이나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점도 고려할 수 있다. 그가 받은 훈련의 정도와 질은 어떠한가? 그는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자격있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는가? 제자 ‘누가’는 분명히 연구하여 충분한 경험을 얻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를 가리켜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불러 그의 자격을 존중하였다.—골로새 4:14.
물론, 건강 문제에 관해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도 잘못된 조언 혹은 치료를 해 온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는? 때때로 그것은 자기들의 환자에 대하여 진정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부 특정한 건강 이론을 발전시켜 왔을지 모른다. 혹은 최근의 의학 정보에 어두워 필요한 전문 지식이 결핍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도 성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언 15:22) 이것은 제 2, 혹은 제 3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한다. 많은 환자들은 자기의 주치의를 확고하게 신뢰한 나머지 그 의사가 추천해 주는 것은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또 다른 의견이 필요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문제가 심각할 경우 혹은 받은 조언에 관해 안심이 되지 않을 때는 또 다른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반드시 우리에게 편견없이 조언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의 의견을 듣도록 해야 한다. 비록 그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룰 사람의 의견이라 하더라도, 조언해 줄 사람은 전문가이어야 한다. 이처럼 “모사가 많으면” 우리의 건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적 건강과 육적 건강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
건강 및 치료법에 대한 이러한 모든 토론을 통하여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의 육적 건강이 중요하지만 우리의 영적 건강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충고하셨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렇다,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혹은 심지어 우리의 몸에 투약하는 일에 대하여 지나치게 염려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육적 건강을 너무 염려한 나머지 그의 영적 건강을 등한히 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는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올무에 빠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건강을 포함한]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예수께서는 이렇게 부언하셨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누가 12:20-22.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우리의 생명을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건강을 돌보기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지방에서 온 보고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신체적 건강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을 지적해 준다. 바로 그 점을 지적하는 한 예로서 미국 중서부의 한 ‘증인’은 이렇게 편지하였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그들의 정신 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 점은 그들의 대화에서 볼 수 있지요.]” 그 편지는 많은 사람들이,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는지의 여부를 판별해 낼 수 있어 식이 요법과 양분 보충을 처방해 줄 수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들은 뒤에 그에 관해 지나치게 염려해 온 것 같다고 설명하였다. 그 ‘증인’은 ‘캘리포오니아’에서 온 한 방문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러한 건강 습관을 가진] 우리는 무지하여 자기들의 주치의를 찾아가는 회중 내의 사람들과는 교제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여러 모로 해롭다. 그리스도인 집회 및 대회들은 건강 요법에 관해 열띤 대화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진찰하고 치료법들을 장려하기 위한 행사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모임들은 따뜻하고 영적인 교제를 위해 존재한다. 장로들은 ‘왕국회관’이 여러 가지 건강 요법이나 견해들의 선전장이 되지 않도록, 여전히 연합되고 참된 숭배의 장소가 되도록 감독해야 한다.—요한 2:16, 17 비교.
완전한 건강이란 현 사물의 제도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건강은 새로운 사물의 제도가 도래하기 전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 때에는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는 그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33:24) 그러므로 지금 신체적 완전함을 추구하려는 듯이 현재의 우리의 건강에 대해 비합리적으로 염려하지 않도록 하자. 오히려 우리의 영적 건강에 주의를 쏟음으로써 지혜와 합리성을 나타내도록 하자.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주의를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지적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태 24:14) 우리는 하나님의 이 임명으로부터 빗나가지 말아야 한다. 건강 문제가 우리로 온 마음을 다해 왕국을 지지하는 일을 뒤로 밀어 내서는 안 된다. ‘왕국을 첫째로 구하는 것’은 현명하고 합리적인 행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안”을 가져다 줄 것이며 그 결과 우리의 현재 건강까지도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이 인류에게 적용될 때에만 실현될 가슴 설레이는 전망과 더불어 귀중한 하나님의 승인을 가져다 줄 것이다.—빌립보 3:8-11; 4:6, 7 새번역; 마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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