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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께서 하신 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
    파수대—1986 | 2월 1일
    • 집회를 등한히 하는 정도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사실상 거부하는 자들에 관하여 바울이 한 다음과 같은 경고에 유의하라.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두 세 증인에 의하여 사형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계약의 피를 경하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욕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하겠는가 생각해 보시오.”—히브리 10:28, 29, 새번역.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극형인 사형을 받았다면, 더 큰 모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더 큰 하나님의 선물을 모욕적으로 무시하는 자들이 얼마나 더 큰 형벌을 받기에 합당한가를 생각나게 해준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모독하고 그분의 희생을 경멸하는 자들에게는, 부활의 희망이 전혀 없는 엄한 형벌인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계시 21:8; 신명 13:6-10; 17:2-7.

      또한 바울은 고의적인 범죄자나 배교자가 얼마나 배은 망덕한 자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사람은 세 가지 면에서 결정적으로 모욕이 되는 죄를 범하였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았다. 이제 그는 예수를 적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고대 정복자들이 정복당한 적들의 목을 밟았기 때문이다. 또는 그는 예수를 경멸시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경멸하는 것을 밟기 때문이다. (비교 마태 7:6) 둘째로, 그는 “자기를 거룩하게 한 계약의 피를 경하게 여기”었다. 그는 자신이 깨끗하다는 선언을 받게 한 수단(그리스도의 피)을 조소한다. 그는 새 언약을 유효하게 하는 그 피를 불완전한 사람들의 피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즉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세째로, 그는 “은혜의 성령을 모욕”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영향력에 고의적으로 대항하여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으므로 자기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활동력을 모독하였다.—에베소 4:30.

      만일 우리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을 항상 소중히 여긴다면, 그처럼 경멸하는 주제넘은 행동을 멀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집회는 우리가 합당한 존경심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한 가지 방법이다. 감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배교자들처럼 그러한 집회를 무시하기는커녕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위하여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임에 여호와와 예수께서 보이지 않게 참석해 계시기 때문이다.—비교 말라기 3:16; 마태 18:20.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해 놓으신 일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분의 대속 희생에 대해 진정한 믿음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일에서 그분을 본받아야 한다. 자신의 생활에서 그분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숭배를 첫째 자리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분하신 친절로 예수를 통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고린도 후 9:15, 새번역.

  •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파수대—1986 | 2월 1일
    •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주제는 기대를 갖게 하는 “평화 저술가들의 국제 문학 회의”였다. 장소는 라인강을 굽어 보는 그림같은, 독일의 유서 깊은 도시 쾰른이었다. 그 모임의 분위기는 평온했으나 결국 대표자들 사이의 언쟁으로 깨지고 말았다. 그 1982년 모임에 관한 뉴우스 보도들에 따르면, 일부 참석자들이 소리를 지르고 밀어 젖히는가 하면 연단을 차지하려고 싸우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소란은 누구의 정부가 세계적 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싸움터에서 멀리 떨어진 회의장이든, 이웃집 거실이든 간에, 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지내지 못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생활에서 평화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척하는 한 진정한 평화란 있을 수 없다.—데살로니가 전 5:23.

      성서는 갈라디아서 5:22, 23(신세)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평화를 언급한다. 참다운 항구적인 평화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 속에 그것을 자라게 해야만 우리 생활에 실재할 수 있다.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며, 그런 다음 그분들에 대한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 (요한 17:3) 그렇게 할 때 사도 바울의 이러한 열렬한 탄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평화, 신세]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바울이 그 동일한 편지에서 더 나아가 이러한 탄원으로 그의 훈계를 마쳤다는 점에 유의하라. “평강의[평화를 주시는, 신세]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찌어다.”—로마 15:13, 33.

      하나님의 성령이 산출하는 평화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평화와 다르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서로 다른 평화

      국제적인 측면에서, 평화 조성자란 말을 잘하고 의정서를 잘 작성하는 사람, 곧 적대적인 두 진영이 자신들의 태도와 동기를 바꿀 필요없이 타협하게 하여 서로 화해하게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와 자본주의자는 각자의 지론을 바꾸지 않고도 평화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갖는 것은 그것과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조건들을 세워 놓으신다. 그분은 이러한 것들을 규정해 놓으시고 그것들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 주신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평화는 타협이 아니라 우리의 동기와 태도와 생활 방식 즉 전체로서의 우리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마태 22:37.

      그러므로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에 입각한 평화인 것이다. 야고보서 3:13-18을 읽어 보면, 천적 지혜가 주는 다음과 같은 유익들에 주목하게 된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라.] ·⁠·⁠·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평화를 좋아하고, 신세]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오는 평화는 충돌을 막는 이상의 일을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선한 관계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진지하고도 적극적이 되게 한다.

      그에 더해서, 경건하게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에덴에서 반역이 있은 이래로 인류의 마음에 심겨진 해로운 경향을 막아 주어, 치사적이고 죄가 되는 행위를 하지 않게 해준다. (창세 8:21; 마태 15:19; 로마 5:12) 이처럼 보호가 되는 방패의 효능에 관해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평화, 신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동기]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기술하였다.—빌립보 4:7.

      여기서 지적하는 대로 “하나님의 평화”는 그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달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평안[평화, 신세]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한 14:27) 참다운 평화는 사회, 경제, 정치 또는 환경의 개혁으로 오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호와를 숭배함으로 오게 된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그의 편지들의 서두에서 누누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평화, 신세]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한 것은 적절한 일이다.—로마 1:7; 고린도 전 1:3; 고린도 후 1:2.

      당신은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평화를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여호와를 떠나서는 지속적으로 평화를 조성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인간의 육신은 약하다. 하나님의 영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고 상기시켰다. 그런 다음 그는 이렇게 부언하였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 5:14-17.

      사람에게 있는 “육체의 욕심”은 누군가로부터 반박을 받게 되면, 자신을 속여 실제로는 자신이 틀린 경우에도 옳다고 믿게 만들 수 있다. 이기심, 시기 및 제어되지 않은 경쟁심과 같은 추한 특성들이 미화된다. 이러한 특성들이 사람의 정신 속에서 진취적 기상과 정열이라는 그럴듯한 외관을 하고 있어, 자신이 승리자가 되는, 즉 성공을 하는 관건이 된다. 그러한 일이 갈라디아도에 살고 있던 제 1세기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의 생활에서만이 아니고 회중 내에서의 평화의 아름다움을 손상시켰다. 그들의 회중의 영적인 상태는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으로 얼룩져 있었기에, 평화를 회복하려면 그러한 얼룩을 없애야만 하였다.—갈라디아 5:20, 22.

      오늘날에도, 그와 비슷하게 비그리스도인 특성들은 우리의 영적 낙원의 평화를 약탈해 갈 수 있다. 사업 거래, 직장 생활, 학교 생활, 사회적 활동 및 회중적 활동을 하다 보면, 우리 자신이 평화의 열매를 단단히 잡고 있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환경이 생기게 된다. 당신이 평화 조성자인지 아니면 평화 약탈자인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자문들을 해보도록 하라.

      ◻ 나는 자기 존대를 원하며 인정받기를 갈망하는가, 아니면 겸손하고 겸허한가?—잠언 11:2; 마태 18:1-4.

      ◻ 나는 물질적 소유물을 갈구하는가, 아니면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만족하는가?—디모데 전 6:4-10; 히브리 13:5.

      ◻ 나는 회중 내의 명망있거나 부유한 사람만 편애하는가? 아니면 믿음 안에 있는 모두를 환영하는가?—로마 15:7; 야고보 2:1-4.

      인간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로 대치시키라

      상습적인 평화 약탈자들을 충동하는 사악한 영은 이기적인 욕망에서 연유된다. 제자 야고보가 야고보서 4:1에서 나쁜 열매의 근원을 얼마나 정확히 지적했는가에 유의하라. 그는 이렇게 기술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회중의 조화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평화롭게 되는 것을 반대하는데, 그것은 이기적인 욕망이 ‘그들 속에서 싸우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몸 속에 서로 싸우는 영을 상주시킨다. 그에 따라,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은 출정하는 침략군처럼 관록과 더 큰 영향력, 재산 및 그와 같은 것들을 옹위하면서 하나님 및 동료 신자들과 그들과의 관계로부터 평화를 빼앗아간다.

      우리는 매일 불유쾌한 상황이나 사람들을 접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큰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면서 그러한 문제를 떨쳐 버리고 변화시키려 들지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보호하려는 욕심에서 어떤 개선된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을 벌일지 모른다. 그러한 행위들은 평화를 파괴한다. 또한 가정이나 직장 혹은 회중 내의 발전과 성취를 둔화시킨다. 반면에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는 평화를 좋아한다.’ (야고보 3:17, 신세) 그리고 평화로운 행동은 사람과 사람을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을 연합시킨다. (에베소 4:3)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지혜는 더 나아가 이처럼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 5:23, 24.

      ◻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로마 12:18.

      ◻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쓸지니라.]”—로마 14:19.

      평화 조성자들은 복음 전파자들이다

      사도 베드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계적인 평화의 소식의 후원자이심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만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심으로 그의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셨읍니다.” (사도 10:36, 새번역) 예수께서는 그 자신이 “오셔서 ·⁠·⁠· 평안[평화의 좋은 소식, 신세]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추종자들 역시 그렇게 하도록 훈련시키셨다. (에베소 2:17) 그분은 이 일이 호별 방문을 통해 “합당한 자를 찾아”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명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고 교훈하셨다.—마태 10:11; 누가 10:5.

      하지만 제 1세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들이 “평화의 좋은 소식”에 인식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그 소식은 평화로운 반응이 아니라 다투는 영을 유발시킨다. 예수께서는 복음 전파 사업에 대해 그런 식의 반응이 있을 것을 예견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평화]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평화]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태 10:12, 13, 신세 참조) 하나님으로부터의 이러한 평화를 열렬히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평화 혹은 자신과 사람들과의 평화를 상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를 멸시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그분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 왕권을 갖고 임재하실 일의 표징을 특징짓는 사건들을 열거하시면서, 이러한 경고의 예를 포함시키셨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리라.]” (마태 25:31-33) 분리되게 하는 주된 관건이 되는 문제는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이다. ‘그리스도의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 의해 전달된 “왕국의 좋은 소식”에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이 그들을 심판하는 일에서 대단히 중요시된다. (마태 24:14, 신세; 25:34-46) 그리스도께서는 분리하는 일을 하시면서, 오로지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용하셔서 좋은 소식을 전달하실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어떠한 반대자도 ‘그들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에 “평화의 소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할 근거가 없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이든 국제적이든 날마다 충돌 일색인 이 세상에는,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당신은 참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분의 성령을 베풀게 하라. 그렇게 할 때 마찰, 분쟁, 의심 및 두려움이 사라지고, 차분함과 고요함 및 평온함이 당신에게 돌아오는 행복한 몫이 될 것이다. (이사야 32:17, 18) 그에 더해서 당신은 “평화의 좋은 소식”을 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돕는 웅대한 특권을 즐기게 될 것이다.—에베소 2:17, 신세; 마태 28:19, 20.

      [10면 삽입]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오는 평화는 충돌을 막는 이상의 일을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선한 관계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진지하고도 적극적이 되게 한다

      [8면 삽화]

      하나님의 성령 이 산출하는 평화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평화와 다르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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