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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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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으며 숭배를 위하여 하느님의 동료 종들과 함께 모일 필요가 있다.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가?
확실히 중요하다. 그저 형식적으로 종교 의식에 참석하는 것이 하느님과 관계를 갖는 일을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1세기에도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이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알려 주셨다. (요한 8:41-44) 사도 바울은, 자신의 믿음에 관하여 분명히 열심이었고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였지만 하느님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 얼마의 사람들에 관하여 기록하였다.—로마 10:2-4.
만일 우리가 현재 하느님의 명령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면 그분과 좋은 개인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그러한 명령들 중의 하나는 동료 신자들과 정기적으로 모이는 일이다.—히브리 10:24, 25.
개인적으로 성서를 읽는 것으로 충분한가?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개인적으로 읽음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만일 그들의 동기가 하느님과 그분의 목적에 관한 진리를 배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은 크게 칭찬받아 마땅하다. (사도 17:11)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도움 없이 성서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가? 성서는 탁월한 지위에 있었지만 성서 예언을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의 필요성을 겸손히 인정한 사람에 관하여 알려 준다. 그러한 도움은 그리스도인 회중의 한 성원에 의해 베풀어졌다.—사도 8:26-38; 사도 6:1-6; 8:5-17에 있는 빌립에 관한 다른 기록과 비교.
물론, 성서를 읽지만 생활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별로 가치가 없다. 성서를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정기적인 회중 집회에서 하느님의 종들과 틀림없이 연합할 것이다. (히브리 10:24, 25) 또한 그는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에 그들과 함께 참여할 것이다.—고린도 첫째 9:16; 마가 13:10; 마태 28:19, 20.
어느 종교가 옳은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 그 종교의 가르침은 무엇에 근거해 있는가? 하느님인가, 아니면 대부분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디모데 둘째 3:16; 마가 7:7) 예를 들어 이렇게 질문해 보자. 성서의 어느 부분에서 하느님이 삼위일체라고 가르치는가? 성서 어디에서 인간 영혼이 불멸이라고 가르치는가?
(2) 하느님의 이름을 알게 하는지 고려하라.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셨다. “저는 당신이 세상에서 택하여 저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나타냈습니다.” (요한 17:6) 그분은 이렇게 선포하셨다. “너의 하느님 여호와를 숭배해야 하고, 오직 그분에게만 신성한 봉사를 드려야 한다.” (마태 4:10) 당신의 종교는 ‘여호와를 숭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당신은 그 이름으로 식별되는 인격체—그분의 목적, 활동, 성품—를 알게 되어 확신을 가지고 그분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3)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증명하는가? 여기에는 예수께서 희생하신 인간 생명의 가치에 대한 인식과 현재 하늘의 왕이신 그분의 지위를 인식하는 것이 관련되어 있다. (요한 3:36; 시 2:6-8) 그러한 인식은 예수께 순종함으로 나타난다. 즉 그분이 제자들에게 임명하신 일에 직접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다. 참 종교에는 행함이 수반되는 믿음이 있다.—야고보 2:26.
(4) 그 종교는 대체로 의식이나 형식에 치우쳐 있는가, 아니면 생활의 길인가?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형식주의에 불과한 종교를 단호히 배척하신다. (이사야 1:15-17) 참 종교는 유행의 물결에 슬그머니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도덕 표준과 깨끗한 말을 옹호한다. (고린도 첫째 5:9-13; 에베소 5:3-5) 그 성원들은 생활 가운데서 하느님의 영의 열매를 반영한다. (갈라디아 5:22, 23) 그러므로 참 숭배에 고착하는 사람들은 집회 장소에서만 아니라 가정 생활, 세속 직장, 학교, 오락 등 자신의 생활에서 성서의 표준을 적용하기 위하여 성실히 힘쓰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식별할 수 있다.
(5) 그 성원들은 참으로 서로 사랑하는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이것으로 여러분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요한 13:35) 그러한 사랑은 인종적, 사회적, 국가적 경계를 초월하며, 진정한 형제 관계로 사람들을 한데 모은다. 이렇게 강한 사랑이야말로 그들을 참으로 다른 상태로 구별되게 한다. 나라들이 전쟁을 할 때, 무기를 들어 다른 나라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죽이기를 거부할 만큼 서로에 대한 강한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하였다.
(6) 참으로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가? 예수께서는 그의 참 제자들이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15:19) 하느님께서 승인하시는 방법으로 그분을 숭배하기 위하여는 우리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점이 없는 상태”로 지키는 것이 요구된다. (야고보 1:27) 정치와 관련되어 있는 교직자들이나 다른 성원들, 혹은 물질적이며 육적인 욕망에 따라 생활 대부분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한 첫째 2:15-17.
(7) 그 성원들은 하느님의 왕국에 관하여 활동적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인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예언하셨다.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끝이 올 것입니다.” (마태 24:14) 어느 종교가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 통치권을 의지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왕국을 인류의 희망으로 실제로 선포하고 있는가? 당신의 종교는 당신이 이 활동에 참여하도록 그리고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하라고 가르치신 호별 방문을 통하여 그렇게 하도록 당신을 준비시켜 주었는가?—마태 10:7, 11-13; 사도 5:42; 20:20.
여호와의 증인은 자신들의 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고 믿는가?
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가?
“믿음” 제하 참조.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종교에 관심이 없다’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그러시군요.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생각해 오셨는지요?’ 그런 다음에 이렇게 부언할 수 있다: ‘제가 알게 된 인상적인 점들 중 한 가지는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주요 교리의 거의 대부분이 성서에 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제하 256, 257면에 있는 자료를 사용할 수 있는데, 특히 왕국을 강조하여 그렇게 한다. 대조를 위하여 252-253면에 나와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믿는 점들을 지적한다.)
또한 16, 17면 참조.
‘종교에는 너무나 위선적인 일들이 많다’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의 내용과는 전혀 딴판으로 생활하니까요. 그런데 성서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시 19:7-10)’
‘나는 내 생활로 만족한다. 나는 이웃들을 올바로 대한다. 나의 종교 생활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자기 생활에 만족하신다니 분명히 즐거운 인생을 사시겠군요? ··· 여기 계시록 21:4에 묘사되어 있는 상태 아래에서 사시게 된다면 어떠시겠습니까? ··· 이러한 생활을 할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요한 17:3에 유의해 보시지요.’
또한 341-342면 참조.
‘나는 조직된 종교에 관심이 없다.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흥미있는 점이군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오셨는지요? ··· 과거에 어떤 종교를 가진 적이 있으십니까? ··· (그런 다음 340-342면에 나오는 내용을 사용할 수 있다.)’
‘나는 나의 교회의 모든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종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차라리 내 자신의 교회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승인을 얻는 것이라는 데에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다음에 이렇게 부언할 수 있다: (1)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을 여기 계시록 18:4, 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만일 그러한 조직들을 지지한다면 우리는 그 죄에 참여하는 것임을 성서는 알려 줍니다. (또한 “큰 바빌론” 제하 참조.)’ (2) (또한 342-344면에 있는 내용을 사용할 수 있음.) (3) ‘하느님께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며, 연합된 숭배를 위하여 그들을 함께 모으고 계십니다. (요한 4:23, 24)’
‘종교는 다 좋다. 당신은 당신의 종교를 믿고 나는 나의 종교를 믿으면 된다’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확실히 폭넓은 사고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말씀에 있는 지침을 필요로 한다는 점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 다음에 이렇게 부언할 수 있다: ‘여기 마태 7:13, 14에서 성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매우 가치 있는 지침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낭독한다.) ··· 이러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337면 참조.
‘예수를 믿는 한, 어느 교회에 나가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말씀하신 바로 볼 때, 그분이 가르치신 것을 모두 받아들이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도 관찰했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대로 생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렇게 부언할 수 있다: (1) ‘마태 7:21-23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에 유의해 봅시다.’ (2)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애쓰며 그 뜻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장래가 있습니다. (시 37:10, 11; 계시 21:4)’
‘참 종교는 하나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분명히 거의 모든 종교에는 진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서에서는 참 믿음이 몇 개나 있다고 말합니까? 여기 에베소 4:4, 5에 기록된 내용에 유의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이렇게 부언할 수 있다: (1) ‘이 점은 다른 성경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마태 7:13, 14, 21; 요한 10:16; 17:20, 21)’ (2)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는 참 종교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 종교를 어떻게 알아 낼 수 있습니까? (342-344면의 내용을 사용할 수 있다.)’ (3) (또한 “여호와의 증인” 제하 252, 253면 참조.)
‘나는 그저 집에서 성서를 읽고 있으며 이해를 얻기 위해 하느님께 기도한다’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성서를 통독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런 다음에 이렇게 부언할 수 있다: ‘계속 읽으시게 되면, 마태 28:19, 20에서 매우 흥미있는 점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 이 성구는 매우 의미 심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무엇이 관련되어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돕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점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이와 일치하게, 여호와의 증인은 사람들을 집으로 방문하여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씩 무료로 성서를 토의해 드립니다. 성서 토의를 어떻게 하는지 잠깐 보여 드려도 될까요?’
또한 342면 참조.
‘종교는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그러한 견해는 오늘날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성서의 소식에 진정한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기꺼이 다른 집으로 갑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방문한 이유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라고 지시하신 바로 그 일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 (마태 24:14; 28:19, 2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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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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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정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서 본문에 의하면, 문자적으로 과녁을 빗나가는 것을 뜻함. 하느님께서 친히 그분의 지성 있는 피조물이 도달해야 할 “과녁”을 정하신다. 과녁을 빗나가는 것은 죄이며, 죄는 불의 혹은 불법이기도 하다. (로마 3:23; 요한 첫째 5:17; 3:4) 죄는 하느님의 성품, 표준, 길, 뜻과 같은 거룩한 모든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죄에는 범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경건하지 않은 말, 더러운 생각, 이기적인 욕망이나 동기가 관련될 수 있다. 성서는 유전받은 죄와 고의적인 죄, 회개할 수 있는 한 번의 죄와 습관적인 죄를 구별하고 있다.
아담은 완전하였는데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었는가?
아담의 완전한 상태에 관하여 창세기 1:27, 31과 신명기 32:4을 읽어 보자. 여호와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포함하여 지상의 창조물들을 가리켜 “아주 좋았다”고 선언하셨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였는가? 활동이 완전하신 분이 자신이 만든 것에 대하여 “아주 좋았다”고 말씀하셨으므로, 분명히 그분의 완전한 표준에 달해 있었을 것이다.
완전함이란 아담과 하와가 나쁜 일을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가? 로봇의 제작자는 로봇이 자신이 프로그램한 일을 정확히 수행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완전한 로봇은 완전한 인간과는 다르다. 중요한 것으로 고려되는 특성들이 동일하지 않다. 아담과 하와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옳은 것과 그른 것,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즉 도덕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인간이 그렇게 설계되었으므로,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없게 하는 것 그리고 지혜롭지 못한 결정은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완전함을 시사하게 되었을 것이다.—비교 신명 30:19, 20; 여호수아 24:15.
아담과 하와가 완전하게 창조된 창조물의 자격을 갖추려면 그들이 그 이후에 내리는 모든 결정은 항상 올바른 것이어야 했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자동적으로 순종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선택의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다. 반면에 그들이 자신의 마음이 이기적이 되도록 방치한다면, 그들은 불순종하게 될 것이었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억지로 어떤 일을 하는 것과 그렇게 하기를 원해서 하는 것 중 우리에게 더욱 의미있는 것은 어느 쪽인가?—비교 신명 11:1; 요한 첫째 5:3.
그러한 완전한 인간들이 어떻게 하여 이기적이 되었으며 결국 죄를 지을 수 있었는가? 비록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적절한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그들의 신체는 완전하게 기능을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정신에 나쁜 생각을 주입한다면 도덕적 타락과 부정한 상태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야고보 1:14, 15은 이렇게 설명한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망에 끌려 유인당함으로써 시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욕망이 잉태하면 죄를 낳[습니다].” 하와의 경우에, 그는 사탄이 자신의 대변자로 사용한 뱀의 말을 흥미있게 들었을 때 잘못된 욕망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아담은 아내의 권유에 따라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그에게 가담하였다. 두 사람은 그릇된 생각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욕망을 키운 것이다. 그 결과 죄를 짓게 되었다.—창세 3:1-6.
아담의 죄는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였는가?
“아담과 하와” 제하 223, 224면 참조, 또한 “운명” 제하 309, 310면 참조.
오늘날에도 참으로 “죄”라는 것이 있는가?
예: 환자가 체온계를 깨뜨렸다고 해서 그에게 열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가? 도둑이 법률서에 쓰여진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무죄한 자가 될 것인가? 그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성서의 표준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 필요함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죄를 없애지는 못한다.—요한 첫째 1:8, 참조.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금지하는 일들을 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잘못되었음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갈라디아 6:7, 8은 이렇게 경고한다. “그릇 인도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조롱을 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뿌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뿌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부패를 거[둘] ··· 것이기 때문입니다.” 널리 퍼지는 성병, 가정 파탄 등은 성서의 말씀이 참됨을 증거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 그분은 무엇이 우리에게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아신다. 그분은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합리적이 아닌가? (하느님의 존재의 증거에 대해서는 “하느님” 제하 참조.)
소위 죄라고 하는 많은 일들은 단순히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닌가?
성 관계는 죄인가? 아담과 하와는 서로 성 관계를 가짐으로 죄를 지었는가? 성서는 그렇게 알려 주지 않는다. 창세기 1:28은 하느님께서 친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음을 밝혀 준다. 그것은 그들이 성 관계를 가질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또한 시편 127:3은 “아들들은 여호와께서 주신 상속 재산”이며 “상”임을 알려준다. 하와는 금지된 열매를 먼저 먹었으며 그가 혼자 있었을 때 그렇게 하였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나중에 가서야 얼마의 열매를 아담에게 주었다. (창세 3:6) 분명히 금지된 열매가 열려 있었던 나무는 문자적인 것이었다. 성서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부부 사이의 정상적인 성 관계가 아니라 음행, 간음, 동성애, 수간과 같은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가 초래하는 나쁜 열매들은, 그러한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를 알고 계신 분이 나타내는 관심의 증거임을 알려 준다.
창세 1:27: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아담]을 창조하기 시작하셨으니,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느님의 거룩한 특성들을 반영하며 하느님의 지도에 인식 깊게 호응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과녁을 빗나가는 것이며 죄를 짓는 것이었다. 참조 로마 3:23; 또한 베드로 첫째 1:14-16.)
에베소 2:1-3: “여러분[그리스도인들]이 범죄와 죄 가운데 죽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그 가운데서 이 세상 사물의 제도에 따라, 공기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의 권위의 통치자를 따라 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는 한때 우리 육체의 욕망에 따라 처신하여 육체와 생각이 원하는 일들을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죄인인 아담의 후손들로서 우리는 죄 가운데 출생하였다. 날 때부터 우리의 마음의 경향은 악을 향하여 있다. 우리가 그런 나쁜 경향들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차츰 그러한 생활 방식에 익숙해지게 될 것이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그와 유사한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생활 방식이 심지어는 “정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성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방법과 인류의 목적에 관한 그분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밝혀 준다. 우리의 창조주의 말씀을 잘 듣고 기꺼이 그분에게 복종한다면, 우리는 이전에 결코 알지 못하였던 인생의 풍성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며 영원한 미래를 누리게 될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그것이 얼마나 선한지를 맛보아 알라고 따뜻하게 우리에게 권유하신다.—시 34:8.)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요한 첫째 3:4, 8: “죄를 거듭 짓는 사람은 누구나 또한 불법을 거듭 행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불법입니다. 죄를 계속하여 짓는 사람은 마귀에게서 나왔습니다.” (이 얼마나 강력한 말씀인가? 하느님께서는 고의적으로 죄의 행로를 택하고,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들을 범죄자들로 간주하신다. 그들이 선택한 행로는 사탄 자신이 제일 먼저 택했던 길이다.)
로마 5:8, 10: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우리가 적이었을 때에 하느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을 하느님의 적으로 언급한 점에 유의하라. 그러므로 하느님과 화목하도록 그분이 하신 마련을 활용하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다!)
디모데 첫째 1:13: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 내가 모르고 믿음의 결핍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나는 자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올바른 길을 보여 주셨을 때, 그는 그 길을 따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고린도 둘째 6:1, 2: “그분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을 받아들이고서 그 목적에서 빗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아들일 만한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어 주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 주었다.’ 보십시오! 지금은 특히 받아들이실 만한 때입니다. 보십시오!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지금은 구원을 얻을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때이다. 하느님께서는 과분한 친절을 죄많은 인간들에게 무한정 베풀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목적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죄많은 상태로부터의 구출이 어떻게 가능한가?
“대속물” 제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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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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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정의: 생명의 모든 기능이 정지하는 것. 호흡, 심장 박동, 두뇌 활동이 멈춘 후에, 생명력은 몸 세포 안에서 그 기능을 점차적으로 멈춘다. 죽음은 생명의 반대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죽도록 창조하셨는가?
그와는 반대로, 여호와께서는 죽음을 초래할 불순종에 대해 아담에게 경고하셨다. (창세 2:17) 후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심지어 때이른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행실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에스겔 18:31) 때가 되자, 그분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인류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 이러한 마련에 믿음을 두는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즐길 수 있도록 하셨다.—요한 3:16, 36.
시편 90:10은 인간의 평균 수명이 70년 내지 80년임을 알려 준다. 모세가 그 성구를 기록할 당시에는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상황이 그렇지는 않았다. (비교 창세 5:3-32) 히브리 9:27에서는 “사람이 단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라고 알려 준다. 그 말씀 역시 기록될 때에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판결을 내리시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늙고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와께서는 첫 인간 부부를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전망을 주셨다. 그들은 자유 의지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창조주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일에 대한 사랑과 인식에서 우러나와 그분께 순종할 것인가? 그들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의 열매는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뱀을 대변자로 사용하여, 하와가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도록 유혹하였다. 아담은 자기 아내를 책망하지 않고, 그 금지된 열매를 먹는 데 가담하였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말씀대로, 아담에게 죽음을 선고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범죄한 부부에게 형을 집행하시기 전에, 자비롭게도 그들이 자녀들을 낳도록 허락하셨다.—창세 2:17; 3:1-19; 5:3-5; 비교 신명 32:4 및 계시 12:9.
로마 5:12, 17, 19: “한 사람[아담]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으며, 이와 같이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습니다. ···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 왕으로 통치하였다면, ···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첫째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운명” 제하 참조.
아기들이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 51:5, 공동: “이 몸은 죄 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읍니다.” (또한 참조 욥 14:4; 창세 8:21.)
로마 3:23; 6: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 죄가 지불하는 삯은 죽음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는 것과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을 부모에게서 “데려” 가시지 않는다. 땅에서 풍부한 식품이 산출되어도, 이기적인 정치 및 상업 요소들은 흔히 매우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식품을 분배하는 것을 방해하며, 영양 실조로 인한 죽음을 초래한다. 일부 어린이들은 성인들의 경우처럼 사고로 죽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죄를 유전받았으며 불완전하다. 우리는 선하건 악하건 모든 사람이 결국 죽는 제도에서 태어났다. (전도 9:5)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자녀들을 부모와 재결합시키기를 ‘그리움’으로 열망하신다. 또한 사랑많으시게도 그렇게 하기 위한 마련을 해 놓으셨다.—요한 5:28, 29; 욥 14:14, 15; 비교 예레미야 31:15, 16; 마가 5:40-42.
죽은 자는 어디에 있는가?
창세 3:19: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고 마침내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에서 네가 취하여졌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전도 9:10: “네가 해야 할 바로서 네 손이 찾아 낸 일은 무엇이든 네 힘을 다하여 하여라. 네가 들어갈 곳인 스올[“무덤”, 왕역, 녹스; “죽은 자의 세계”, 오영성]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상태는 어떠한가?
전도 9:5: “산 자들은 자기들이 죽을 것임을 의식하지만, 죽은 자들은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시 146:4: “그의 영이 나가면 그는 그 흙으로 돌아가고, 그 생각[“생각”, 왕역, 두에는 시 145:4; “그의 모든 생각”, 신영성; “계획”, 개표, 신미성]도 그 날로 소멸되고 만다.”
요한 11:11-14: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로 가서 그를 잠에서 깨우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 예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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