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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의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 예의를 배양하는 일
    파수대—1989 | 6월 15일
    • 예의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 예의를 배양하는 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1. 예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의는 지난 25년간 타격을 받아 왔다. 단지 남자가 여자를 위해 자동차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거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여자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것 정도가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있다”라고 칼럼니스트 앤 랜더스는 말합니다. 참으로 어디를 보든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점점 더 예의가 없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 있는 줄 사이에 끼어 들고, 사람이 많이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공공 장소에서 음악 소리를 크게 트는 등의 행동을 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경험을 통해서, 교육의 기회와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가 대체로 감사를 나타내는 표현과 경어가 낯선 말이 된 시대, 일반 예절과 정중함이 대부분 잊혀진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오늘날 예의가 부족한 것이 놀랄 만한 일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이 모든 일은 놀랄 만한 일입니까?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신하기 어려운 위험한 때가 올” “마지막 날”에 사는 사람들의 행실에 관해 사도 바울이 영감받아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할 뿐입니다. 여러 가지 가운데서 특히,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 독단적이고, 거만하고, ·⁠·⁠· 감사하지 않고, ·⁠·⁠· 혈육간의 애정이 없고, ·⁠·⁠· 자제력이 없”게 될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디모데 후 3:1-3, 신세) 대충만 보아도 그러한 행실이 오늘날 모든 연령층과 계층 및 국적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반적인 예의 부족을 초래하는 원인들은 무엇입니까?

      예의 없는 태도의 원인

      3. 이 제도의 “공기”는 어떻게 무례한 태도를 조장합니까?

      3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은 “자아 제일주의 세대”를 잘 묘사하는 말이며, 자아 제일주의 세대란 독단적인 태도와 개성 및 자기 표현을 중요시하며 자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의 “공기”에 편만해 있는 이 영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개인적 관심만이 아니라 남의 일에 대한 개인적 관심에도 눈을 두”어야 한다는 성서의 교훈에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에베소 2:2, 신세, 3; 빌립보 2:4, 신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견해를 들으며 자란 세대는 자신의 행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4. 오늘날 널리 인정받는 표준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여겨지며, 그 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견해는 어떠해야 합니까?

      4 이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정중함의 정도를 유지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한 것 한 가지는 동배의 압력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에 대한 염려는 오랜 동안 제어하는 힘이 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행동 방식이 충격적이고 난폭하면 할수록 많은 사람에게서 더 인기를 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널리 인정받는 표준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더는 예의 없거나 버릇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세련된 혹은 기교 있는 사람으로 크게 칭찬받습니다. 그러나 “기교 있는(sophisticated)”이라는 말은 “자연 그대로이거나 순수하거나 원상태가 아닌” 것을 의미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말은 베드로 후서 1:16에서 “공교히 만든”으로 번역된 용어와 동일한 희랍어 어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분명히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러한 태도를 피해야 할 것입니다.

      5. 예의의 소멸을 초래하는 또 다른 요인은 무엇입니까?

      5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라고 전도서 8:11은 알려 줍니다. 여기에 공공 예의의 결여를 초래하는 또 다른 요인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벌을 모면하기가 매우 쉽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널리 인정받는 행실 표준을 위반하는 것에 관해 무감각해져 갑니다. “범죄자 무리에 속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혀지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시민들이 온갖 종류의 공공 법률—교통법, 약물법, 오물 처리법—을 예사로이 어기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지의 한 사설은 알려 줍니다. 그 결과, “난폭한 태도, 공공 기물 파괴와 낙서 행위” 그 모든 일이 일상 경험 중 피할 수 없는 부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정중함이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재산과 사생활의 자유에 대한 존경심과 더불어 더욱더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6. 사람들의 예의가 어떻게 바쁜 생활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예수께서는 이 점에 있어서 어떻게 다르셨습니까?

      6 예의는 보통 생활상의 좀더 섬세한 접촉을 하는 가운데 존중되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서두를 때 쉽사리 예의를 잊어버리며—요즈음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거의 언제나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말 한마디도 없이 혹은 표정을 바꾸지도 않은 채 서로 스쳐 지납니다. 사람들은 서 있는 줄을 밀치고 나가거나, 단지 몇분 혹은 몇초를 벌려고 조급하게 차선에 끼어 들고 또 차선을 벗어납니다. 종종, 사람들은 개인 일에 너무 몰두하거나 혹은 할 일이 너무 많은 계획표를 세워두므로 여하한 예기치 않은 일 혹은 방문객을 귀찮게 생각하거나 방해물로 여깁니다. 그러한 태도는 예수께서, 심지어 불편한 때에도 자신에게 온 사람들에게 반응을 나타내신 방법과 얼마나 다른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마가 7:24-30; 누가 9:10, 11; 18:15, 16; 요한 4:5-26.

      7. 참 그리스도인들은 예의와 관련하여 무엇을 경계해야 합니까?

      7 비록 우리가 생활 속도가 빠른 세상에 살고 있으며, 우리의 시간과 힘을 빼앗는 일이 끊임없이 늘고 있지만, 그러한 압력으로 인해 우리가 거칠게 행동한다고 해서 사태가 호전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러한 행로는 우리가 듣고 있는 매우 많은 몰지각한 폭력—언쟁, 싸움, 반목, 심지어 살인—을 가져오며, 사람들이 거친 태도에 대해 거친 태도로 응수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 모든 것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속해서는 안 되는 세상의 영의 일부입니다.—요한 17:14; 야고보 3:14-16.

      예의의 탁월한 모범

      8. 그리스도인들은, 예의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하라는 격려를 받습니까?

      8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배려를 거의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압력에 굴복하고 예의를 상실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성서의 훈계를 기억한다면 성서에 나오는 뛰어난 여러 본을 바라볼 수 있으며, 오늘날의 예의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 예의의 높은 표준을 옹호하기 위해 힘써 노력할 수 있습니다. (로마 12:2, 21; 마태 5:16) 우리의 행위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한 시편 필자의 말에 우리가 온 마음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시 133:1.

      9. 성경은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대하신 방식에 관하여 무엇을 밝혀 줍니까?

      9 훌륭한 예의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으뜸가는 본은 창조주이자 모두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거만하게 굴’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존중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에서 신분이 가장 높으신 분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랫사람들을 대하실 때 언제나 예의를 갖추십니다. 그분은 벗인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내리실 때 “제발 혹은 부디”라는 공손한 표현(please)을 사용하여 “너는 [부디, 신세]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 바라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부디[신세]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 13:14; 15: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의 표징을 모세에게 주시면서 “부디[신세] 네 손을 품에 넣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 4:6) 여러 해 후에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미가를 통하여 고집 센 백성에게까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please) 들으라 ·⁠·⁠· 두령[들아] ·⁠·⁠· 청컨대(please) 이 말을 들을찌어다.” (미가 3:1, 9, 신세 참조)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공손한 표현을 사용하는 면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까?—에베소 5:1.

      10, 11. (ㄱ) 예수께서 사람들을 대하신 방식과 예의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ㄴ) 우리는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예의 바른 태도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예수를 본받을 수 있습니까?

      10 “아버지 품속에 있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는 본받을 만한 또 다른 뛰어난 귀감입니다. (요한 1:18)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대하실 때,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동정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힘차고 단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결코 거칠거나 불친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마음 편히 지내는 그분의 특이한 재능”에 관해 평하면서 「나사렛 출신의 남자」(The Man From Nazareth)라는 책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공개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한결같이 그분은 대등한 입장에서 남자와 여자들과 교제하셨다. 그분은 천진 난만한 어린이들을 편히 맞이하셨으며, 매우 이상할 정도로 삭개오처럼 양심의 가책을 받는 독직가들도 편히 맞이하셨다. 마리아와 마르다 같은 가정 위주의 존경받을 만한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솔직한 태도로 그분과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매춘부들 역시 마치 그분이 자신들을 이해해 주고 벗이 되어 줄 것으로 확신하는 양 그분을 찾았다. ·⁠·⁠· 일반 사람들을 속박하는 신분 경계를 이상할 정도로 의식하지 않는 그분의 태도는 그분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다.”

      11 누구에게나 합당한 존경심과 사려 깊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참으로 예의 바른 사람의 표시며, 이 점에서 우리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히 자신보다 지위가 더 높은 사람들에게는 마지못해서나마 존경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심지어 대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는 흔히 쌀쌀하고 냉담하며 거칠게 대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러한 태도는 그런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갖게 하고 힘이 있어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거친 태도는 약자의 위장된 힘”이라는 말은 적절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강력히 권합니다. (로마 12:10) 그 충고를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예의 바른 태도를 나타내지 않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입니다. 예수처럼, 우리는 예의 바른 태도를 나타낼 것입니다.

      12. 인간 관계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의 정수는 무엇입니까?

      12 이러한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특성은 예수의 가르침, 특히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말에서도 예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 7:12) 흥미있게도, 공자의 「사서」—오랜 동안 동양의 도덕 행실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책들—중 하나인 「논어」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스승인 공자는 제자 중 한 사람으로부터 단 한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인생의 행동 지침이 될 만한 말이 있는지를 질문받았습니다. 스승은 “오직 (‘헤아림’을 뜻하는) ‘서(恕)’자”라고 대답한 후에, “내가 원치 아니하는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덧붙였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의 탁월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솔선해서 선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할’ 경우에만 따뜻하고 유쾌하며 우호적인 관계가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사랑에 근거한 그리스도인 예의

      13, 14. (ㄱ) 공중 예의와 관련하여 최근에 어떤 점이 관찰되어 왔습니까? (ㄴ) 예의와 에티켓에 대한 현대의 관심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13 무례한 태도가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올바른 행실로 돌아가는 것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예의 문제에 관한, 널리 알려진 저술가이자 교사인 마저블 스튜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60년대에 예의에 대한 반란을 겪었다. 그러나 새로운 혁명은 예의를 원상태로 회복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예의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사회 표준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 이처럼 예의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는 점이, 공식 정찬에서 포크를 사용하는 법에서부터 오늘날의 복잡하고 급속히 변하는 사회 관계와 가족 관계에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법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에 관한 책, 편람, 조언 칼럼, TV 대담 등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타나 있습니다.

      14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예의를 좀더 의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날의 경쟁 사회에서 예의는 생존이 달려 있는 문제”라고 스튜어트는 설명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예의는 사람이 살아가며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성공을 위한 옷입는 법, 좋은 인상을 남기는 법, 중역 자리에 오르는 법 등을 배워 알려고 책들을 읽고 그러한 문제에 관한 에티켓 강습에 참석합니다.a 이 모든 일에서의 문제는, 공연중에 썼다가 공연이 끝난 후에 벗어버리는 가면처럼 예의가 편의 수단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가문’과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매우 충격적인 상류층 범죄를 저지른다는 말이 우리 귀에 비일 비재하게 들리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15, 16. (ㄱ) 예의에 관한 한 권위자는 “최상의 행실 규범”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ㄴ) 고린도 전서 13:4-7이 어떻게 참 그리스도인 예의와 관련이 있습니까?

      15 그것은 지켜야 할 예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예의 문제에 관한 존경받는 권위자 에이미 밴더빌트는 자신의 저서 「에티켓 최신 총서」(New Complete Book of Etiquette)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최상의 행실 규범은 고린도 전서 13장 곧 성 바울의 인간애에 관한 아름다운 논술에서 보게 된다. 이 규범은 옷차림의 높은 점수나 피상적인 예의 점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것은 느낌과 태도, 친절함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려 깊음과 관련이 있다.”

      16 물론, 에이미 밴더빌트가 가리킨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인 사랑의 여러 가지 부면을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고린도 전서 13:4-7의 내용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몇 가지 점의 결과를 고려해 보십시오. 예를 들면 ‘오래 참고 친절’한 사람은 분명히 참을성 있고 존경하는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것입니다. (새번역)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의 바름”이란 “풍미, 교양 혹은 특성의 표준에 대한 순응”으로 정의됩니다. 따라서, J. B. 필립스의 「현대 영어 신약」에서 그 문구를 번역하는 바와 같이, “사랑에는 예의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이 예의 없는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17. 우리의 예의는 무엇을 나타내는 표입니까?

      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예의는 그리스도인 사랑과 직접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 예의는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이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한 경우에나 갖추는 겉치레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예의—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 우리의 몸가짐, 품행, 습성화된 행동—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나 관심을 기울이는지 그리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내는 표입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성서의 교훈을 청종하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 10:24) 따라서, 그리스도인 예의는 그리스도인 사랑의 한 부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를 식별케 하는 표입니다.—요한 13:35.

      언제나 예의 바른 태도를 나타냄

      18. 우리는 주위에서 보게 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심을 해야 합니까?

      18 예수께서는 우리 세대에 관하여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마태 24:12) 이렇게 사랑이 식어지는 것은 오늘날 매우 많은 사람이 나타내는 무관심하고 자기 중심적인 태도에 분명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동일하게 무관심한 방식으로 반응을 나타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이러한 교훈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로마 12:17, 18)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 올바른 평가를 받든 받지 못하든, 언제나 예의 바른 태도를 나타내려고 결심해야 합니다.—마태 5:43-47.

      19. 우리의 예의가 어떻게 생활의 모든 부면에 영향을 미칩니까?

      19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 예의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염려의 자연스런 외적 표현입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우리의 예의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지를 혹은 무관심한지를 나타냅니다. (마태 12:34, 35) 그런 점에 있어서, 예의는 우리 생활의 모든 부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의는 생활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예의를 좀더 온전히 적용할 수 있습니까? 건전한 그리스도인 예의를 어떻게 좀더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습니까? 다음 기사에서 그 점을 고려할 것입니다.

  • “좋은 소식에 합당한 방식으로 행동하시오”
    파수대—1989 | 6월 15일
    • “좋은 소식에 합당한 방식으로 행동하시오”

      “오직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에 합당한 방식으로 행동하시오.”—빌립보 1:27, 신세.

      1. 최근에 뉴욕 시에서 있은 일로 인해 시장은 무슨 호의적인 평을 하였습니까? (로마 13:3)

      “천여 명의 증인”이 1988년 9월 29일에 하부 맨해턴에 있는 시청으로 왔다고 「뉴욕 타임스」지는 보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뉴욕 시 사정 위원회의 심의를 받기 위해 상정된 건축 신청을 지지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 숙소 건물 신축 허가 신청이 거부되기는 하였지만 뉴욕 시장은, “증인은 ‘대단히 품위 있고 건실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하였으며 증인은 ‘참으로 칭찬받을 만’하다고 말”하였습니다.

      2. 증인의 예의는 어떤 면에서 다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일반적으로 볼 때, 천명이 넘는 사람이 인기 없는 명분에 대한 지지를 나타내려고 모일 경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밀치고 소리지르고 심지어 완력과 폭력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증인이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행실이 그들의 신앙에 대한 평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이러한 교훈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베드로 전 2:12.

      훌륭한 예의는 여호와를 영광스럽게 한다

      3. 우리의 예의는 여호와께 영예를 돌리는 데 있어서 무슨 역할을 합니까?

      3 훌륭한 행동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 책임의 일부입니다. (마태 5:16) 물론, 훌륭한 행동에는 여러 가지 것들—예를 들어, 정직, 근면, 훌륭한 도덕관—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특성을 언제나 인식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벗이나, 가족을 포함한 친척, 고용주, 직장 동료, 교사 등과 같이 우리를 잘 알거나 우리와 늘 상대하는 사람들뿐입니다. 우리와 형식상으로만 만나는 절대 다수의 사람은 어떠합니까?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대하는 경우에 우리의 예의가 특히 대두됩니다. 그 이유는 마음을 끄는 포장이 가치있는 선물의 매력을 더해 주듯이, 예의는 우리가 제공하려는 것의 매력을 더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훌륭한 그리스도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혹은 우리의 의도가 아무리 칭찬할 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예의가 바르지 않다면 그러한 것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예의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4. 우리는 생활의 어떤 부면에서 예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까?

      4 “오직 ·⁠·⁠· 좋은 소식에 합당한 방식으로 행동하시오”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빌립보 1:27, 신세) 물론, 그 말은 우리의 공개적인 봉사의 직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숭배 장소와 이웃에서, 직장과 학교에서, 아니, 생활의 모든 부면에서 나타내는 우리의 행실과 예의 역시 우리의 봉사의 직무의 효과에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이 직책[봉사의 직무, 신세]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한다고 바울은 기술합니다. (고린도 후 6:3) 우리는 어떻게 그 교훈을 틀림없이 적용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인 예의를 분명히 나타내도록 서로 돕기 위해, 특히 우리 가운데 있는 연소자들을 돕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왕국회관에서

      5. 우리는 왕국회관에 있을 때 무엇을 인식해야 합니까?

      5 왕국회관은 우리의 숭배 장소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를 받아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집에 손님입니다. (시 15:1, 신세 참조; 마태 18:20) 당신은 왕국회관에 올 때 예의 바른 손님입니까? 그러한 손님이 되기 위해, 우리는 주인뿐 아니라 다른 손님들에게도 합당한 사려 깊음과 존경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무엇이 관련됩니까?

      6. (ㄱ) 집회에 끊임없이 늦는 것은 무엇이 부족함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6 우선, 제시간에 참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그렇게 하기가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준비하도록 도와야 할 가족과 자녀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집회에 정기적으로 오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참으로 칭찬받을 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집회에 늦게 도착하는 습관에 젖어 있음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습관을 고치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가 인정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인 집회에 습관적으로 늦는다고 해서 언제나 집회의 가치에 대한 인식 부족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주 늦는 사람들 중에도—일단 집회에 참석하면—다른 어떤 사람 못지 않게 집회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허술한 계획과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려 깊음의 부족으로 인한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훈계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 10:24, 25) 만약 우리가 번번이 늦게 도착하여 주위를 산만케 하거나 방해를 끼친다면 도저히 그렇게 격려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늦지 않으려면, 정각에 당도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일찌감치 도착하려는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제안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실천에 옮길 필요가 있습니까?

      7. 집회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예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십시오.

      7 예의에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할 때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요구됩니다. (잠언 4:1, 20)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인 집회에도 적용됩니다. 집회에서 하나님의 봉사자들은 우리를 세워 주는 어떤 영적인 선물을 나누어 주기 위해 연설합니다. 우리가 집회중에 졸거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거듭 속삭인다면, 껌을 씹거나 사탕을 먹는다면, 다른 내용을 읽거나 다른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우리가 매우 예의 없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젊은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가 길게 이야기하는 동안 내내 참을성 있게 앉아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그들의 말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욥 32:11, 12) 우리는 그리스도인 예의에 감동되어 분산되지 않는 주의력으로 연사를 지지함으로 연사와 성서에 근거한 그의 연설 내용에 대한 합당한 존경심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료 제자임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8 그리스도인 예의에는 집회 전과 후에 왕국회관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 포함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회중의 기름부음받은 성원들이 “이제 ·⁠·⁠· 외국 사람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닙니다. ·⁠·⁠· 하나님의 가족입니다”라고 진술하였습니다. (에베소 2:19, 새번역) 당신은 동료 증인을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로 대합니까, 아니면 같은 가족 성원으로 대합니까? 우정적인 인사, 따뜻한 악수, 친절한 미소—이 모든 것이 사소한 일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동료 제자라는 증거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갈라디아 6:10, 새번역.

      9. 자녀들이 같은 연령층 이외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나타내도록 어떻게 가르칠 수 있습니까?

      9 자녀들이 같은 연령층 이외의 사람들에게 그러한 관심을 나타내도록 가르칠 수 있습니까? 어떤 어른들은 자녀들이 집회에서 한두 시간 앉아 듣고 난 후에는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나가 놀아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왕국회관은 놀이터가 아닙니다. (전도 3:1, 17) 네살 반 된 한 소년은 교사로부터 형제 자매가 몇명이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너무 많아서 다 셀 수도 없어요”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후에 그 점에 관해 부모가 질문하자 소년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형제 자매가 몇명이나 되는지 모르겠어요. 왕국회관에 가면 매우 많이 있지요.” 그 소년에게는 참석하는 사람 모두가 그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공개 봉사의 직무에서

      10. 예수께서 하신 어떤 교훈이 우리가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때, “좋은 소식에 합당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10 “좋은 소식에 합당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에는 의당 우리의 공개 봉사의 직무가 관련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평화의 소식이며 우리의 예의가 그 점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에베소 6:15) 예수께서 하신 교훈은 이러합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라.]” 따뜻하고 우정적이며 존경하는 태도를 나타냄으로써 우리는 집주인으로 하여금 우리가 진심으로 그의 진정한 유익에 관심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우리는 문전에서 비우호적이거나 심지어 호전적인 사람을 만날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분이 상하여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입니까? 예수께서 이어서 하신 이러한 말씀에 유의하십시오. “만일 [그 집이]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태 10:12, 13) 문전에서 나타내는 우리의 예의는 언제나 “화목하게 하는 직책[봉사의 직무, 신세]”에 어울려야 합니다.—고린도 후 5:18.

      11. 우리의 옷 입는 방식과 개인 풍채는 하나님의 봉사자로서의 우리의 역할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11 우리의 예의는 다른 면으로도 우리를 드러내 줍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개인 풍채는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자로서의 우리의 역할에 어울립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가방, 성서, 성서 서적은 어떠합니까? 한 신문 칼럼니스트는 사업가들에게 “파티용이나 격식 없는 회합용 혹은 스포츠 행사용 옷차림을 하지 말고 업무용 옷차림을 하라”고 충고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옷차림과 개인 풍채는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계층에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사회 약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봉사자로서의 “업무”를 수행할 때 우리의 옷차림과 외모가 단정치 못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이어서는 안 되며 요란스럽거나 사치스러운 모습이어서도 안 됩니다. 그와는 달리 언제나 “좋은 소식에 합당”해야 합니다.—비교 디모데 전 2:9, 10.

      12. 집주인의 권리 및 재산과 관련하여 어떻게 예의를 나타낼 수 있습니까?

      12 우리가 좋은 소식에 관해 “변호할 준비를 항상”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 예의에는 우리가 “온유한 기질과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함이 요구됩니다. (베드로 전 3:15, 신세) 그렇게 하는 데에는 집주인의 권리와 재산을 존중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활동을 계획하여 이치적인 시간에 방문합니까? 우리는 어떤 꼭 필요한 업무나 집안일에 방해를 끼치지는 않는지 깨어 살핍니까? 우리는 겸양어와 공손한 표현 및 “고맙습니다”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일에 관대합니까? 우리는 집주인을 대화에 참여시키기 위해 힘써 노력합니까, 아니면 준비한 것을 다 말하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대화를 독점합니까?

      13. 봉사의 직무에서의 훌륭한 예의가 종종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13 진실한 개인적 관심이 수반된 예의는 종종 훌륭한 증거의 길을 열어 줍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예의 바른 어린이들이 어른들이 얻지 못할 수 있는 집주인의 주의와 관심을 얻기 때문입니다. 멕시코의 13세 된 증인은 연구하기를 원하는 소녀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자기 아버지 모르게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전도인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 것이므로 자신이 직접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인은 소녀의 아버지와 이야기하겠다고 제의하였으며 아버지에게 그들이 연구하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자매의 태도가 매우 진지한 것을 보고 또 자신에게 직접 온 것을 고맙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네가 연구하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 가족 모두가 연구해야겠구나”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결과 13세 된 이 증인은 그 가족의 결혼한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그 외의 성장한 자녀들을 포함하여 가족 전체와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예의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14. 예의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며, 어떤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까?

      14 연소한 증인의 예의는 종종 그들이 가정에서 받은 것임이 분명한 훈련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됩니다. 참으로, 우리의 예의는 우리의 생활의 길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생각할지 모르는 것과는 반대로 예의는 가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가정 생활의 다른 부면들에서처럼, 이 점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본입니다. (디모데 후 1:5) 자녀에게 “내 말대로 하고 내가 하는 대로는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히 자녀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방법이 아닙니다. 예의에 대한 수많은 세부점은 단순히 구두 지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찰과 모방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부모는 최상의 교사일 뿐 아니라 모범이기도 한데, 자녀는 부모의 방식을 모방하여 배우기 때문이다”라고 「성공하는 자녀」(Kids Who Succeed)의 저자 베버리 펠드먼은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 여러분에게서 어떤 예의를 봅니까?

      15. 부모는 자녀가 평생의 습관이 되는 예의를 발전시키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15 “아버지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성서는 교훈합니다. (에베소 6:4, 신세) 자녀에게 친절하고 사려 깊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언쟁이나 험담을 하고 거칠게 행동하거나 쉽게 기분이 상하는 부모를 볼 경우, 그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며 낙심케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그 성구는 계속해서, “그들을 여호와의 징계와 정신적 단속으로 양육하십시오”라고 알려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양육하는 것에는 “안녕하세요,” “부디 ·⁠·⁠· 해주세요,” “고마워요,” “죄송해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연장자들에게 존경을 나타내는 것 및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과 같은 예의의 기본 요소들이 포함됩니다. (레위 19:32; 로마 16:3-7)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배운 그러한 특성은 평생토록 가치있을 것입니다.—잠언 22:6.

      16. 무슨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으며, 어떤 결과가 있게 됩니까?

      16 그러므로 부모와 자녀 다같이 어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과의 일부로서 예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부모는 자녀가 범하게 마련인 실수에 대해 참을성 있고 너그러운 태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자녀로 하여금 그들의 훌륭한 품행을 부모 여러분이 참으로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알게 하고 자녀가 진보할 때 신속히 칭찬하도록 하십시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부모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자녀에게 경건한 원칙을 심어 주는 것을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해야 한다고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신명 6:7) 그렇게 하는 것은 온화하고 건전한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 내며, 그런 분위기는 자녀를, 도움을 주고 관심을 기울이는 예의 바른 성인으로 자라도록 양육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자녀는 부모 여러분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과 영예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예의 바른 백성

      17.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에서 무엇을 관찰할 수 있습니까?

      17 지난 9월의 오후에 뉴욕 시 시청 밖에 모인 “천여 명의 증인”은 여호와의 증인이 으레 행동하는 방식으로서, 의사 표명을 소규모로 하였을 뿐입니다. 다른 곳에서, 왕국회관에 처음 참석한 어떤 사람은 참석한 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라면서 다닌 교회에서 이제까지 만나 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의, 순수하게 사랑을 나타내는 생면 부지의 사람들을 하루 동안에 만났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내가 진리를 찾은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 행로를 바꾸었으며, 일곱달 후에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비교 고린도 전 14:25.

      18. 여호와의 증인이 나타내는 예의의 표준이 어떻게 외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왔습니까?

      18 증인이 국내 대회와 국제 대회에서 나타내는 예의와 단정함의 표준은 많은 호의적인 평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일본에서 있은 그러한 한 대회에 대해 관광 버스 안내원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버스에서 내릴 때,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나에게 ‘대단히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것은 나를 매우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또 다른 대회에서, 대회장 근처의 철도역 직원은 증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전에 12,000명의 사람이 오사카 성관(城館)에 모였을 때는 난장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질서있기 때문에 마음이 놓입니다. 책임자가 누구든 그에게 우리의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19. 우리 각자는 예의와 관련하여 무슨 결심을 해야 합니까?

      19 그러한 평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이 전체적으로 “좋은 소식에 합당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분명함을 나타냅니다. 우리 개개인은 어떠합니까? 자녀가 인자한 아버지를 바라보듯이, 우리 모두, 노소를 막론하고, 예의 없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예의 바른 사람이 되도록 가르침받기 위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여호와를 바라봅시다.—신명 8:5; 잠언 3:11, 12.

      기억하십니까?

      ◻ 훌륭한 행실의 일부로서 예의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우리의 숭배 장소에 적합한 훌륭한 예의는 무엇입니까?

      ◻ 야외 봉사에서 어떻게 예의를 나타낼 수 있습니까?

      ◻ 부모는 자녀가 예의를 발전시키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 우리가 옹호하려고 힘써 노력해야 할 예의의 높은 표준은 무엇입니까?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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