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숲과 초원, 그림 같은 해안 마을, 1400개가 넘는 호수, 1500개 이상의 섬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됩니다. 그래서 에스토니아는 “많은 사랑을 받는 발트 해의 보석”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에스토니아 국토의 거의 절반은 울창한 나무들과 풀들로 덮여 있는데, 한때 유럽 대부분을 차지하던 원시림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에스토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작은 나라들 중 하나로, 면적이 스위스나 덴마크보다 조금 더 큽니다.
에스토니아인은 친절하면서도 말수가 적은 편입니다. 그들을 만나 보면 이 작고 아름다운 나라 사람들이 매우 훌륭한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으며 문맹률이 매우 낮고 독서를 좋아합니다. 국민의 약 30퍼센트가 러시아어를 사용하지만 공용어는 에스토니아어입니다. 에스토니아어는 매우 복잡해서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섬”에 해당하는 단어만 해도 섬의 겉모양과 크기와 나이에 따라 여러 개가 있습니다.
격동의 역사
에스토니아는 강력한 이웃 나라들의 지배를 연이어 받았습니다. 13세기 초에 독일의 기사단과 덴마크군이 이 나라를 침공한 이후, 여러 세기 동안 노르웨이, 덴마크, 러시아, 리투아니아, 스웨덴, 폴란드가 에스토니아를 두고 패권 다툼을 벌였습니다.
100년 이상 스웨덴이 에스토니아를 통치한 후, 1721년에 러시아가 지배권을 차지했습니다. 에스토니아는 1918년에서 1940년까지 짧은 기간 독립해 있다가 소련의 침공을 받아 소련에 합병되었습니다. 1941년에는 나치 독일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했지만 1944년에 소련이 다시 지배권을 빼앗았습니다. 이후 거의 50년간 에스토니아는 소련의 지배를 받았으며, 1991년에 소련에 속한 공화국 가운데 최초로 독립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에스토니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참하느님을 섬긴 이 사람들은 독일의 압제적인 지배를 받고 소련 치하의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어떤 일을 겪었습니까? 잔인한 박해에 직면해서도 믿음과 용기와 기지를 잃지 않은 그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짓 종교가 남긴 상처
13세기에 에스토니아를 침략한 십자군은 사람들에게 칼을 들이대며 “그리스도교”를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 개종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후에 여러 마을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이전에 강제로 받은 세례를 씻어 낸다는 의미로 자신들의 몸과 집에 물을 뿌리는 일이 있었으며, 그런 다음 사람들은 원래의 이교 숭배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이 자연 숭배와 이교 의식을 계속 행하면서 그러한 의식이 점점 가톨릭 신앙과 섞이게 되었습니다.
17세기에 에스토니아인들은 루터교로 개종했으며 나중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에스토니아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1925년에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습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현재 에스토니아인 가운데 종교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4퍼센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마음이 진실한 많은 에스토니아인들이 상처를 치료해 주는 연고와도 같은 하느님의 말씀 즉 ‘행복하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좋은 소식에 따른 건전한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디모데 첫째 1:10, 11) 그 결과,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수가 1991년에 1000명 미만에서 지금은 4000명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면 이 에스토니아라는 조그만 나라에 어떻게 좋은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습니까?
“당신에게는 입이 있지 않습니까?”
20세기 초, 미국에 살고 있던 마르틴 코세와 그의 형인 후고 코세는 성경 연구생(지금의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출판물 몇 부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르틴은 출판물을 통해 알게 된 내용에 가슴이 벅찼지만, 고국에는 성경 연구생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후에 그는 팜플렛에 나와 있는 주소를 보고 뉴욕 본부로 찾아가서 당시 성경 연구생의 활동을 감독하던 J. F. 러더퍼드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마르틴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러더퍼드 형제는 “당신에게는 입이 있지 않습니까? 돌아가서 당신의 입을 사용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마르틴은 정말 그 말대로 했습니다! 그는 1923년경에 에스토니아로 돌아와 전파 활동을 시작하여 에스토니아 최초의 성경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마르틴은 가족에게 성서 진리를 가르쳤으며, 아들인 아돌프는 후에 역경의 시기가 닥쳤을 때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굳건한 기둥 역할을 했습니다. 마르틴의 형인 후고 역시 성경 연구생이 되었지만 고국으로 이주하지는 않았습니다.
“외롭지 않을 겁니다”
1926년, 런던에서 열린 성경 연구생의 대회에서 러더퍼드 형제는 발트 해 연안의 나라로 자원해서 갈 사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앨버트 웨스트와 퍼시 던험과 제임스 윌리엄스가 손을 들었습니다. 곧 그들은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활동을 조직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덴마크에 있는 북유럽 사무소의 감독자였던 윌리엄 데이가 앨버트 웨스트와 함께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으로 갔습니다. 데이 형제는 앨버트가 묵을 방을 구해 주고 나서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잘 있어요, 앨버트. 외롭지 않을 겁니다. 곧 「파수대」가 올 테니까요!”
지금은 파이오니아라고 불리는 콜포처들이 도움을 베풀기 위해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에스토니아로 왔습니다. 하지만 비자를 연장하기가 어려워서 오래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핀란드에서 온 콜포처들은 핀란드어가 에스토니아어와 같은 계통에 속한 언어이기 때문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온 많은 전 시간 봉사자들은 부지런히 일하여 왕국 씨를 풍성히 뿌렸습니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이 처음 보는 외국인들을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그들을 “소메 미나”(핀란드 사람 미나) 같은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영국 출신의 연사를 소개하면서 이름을 말하는 대신 “런던 사람”이라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에스토니아 최초의 지부
지부 사무실로 쓸 만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부유하다고 생각하여 높은 임대료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1926년에 탈린의 크로이츠왈디 가(街) 17번지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지부가 개설되었고, 지부의 종으로 앨버트 웨스트가 임명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에스토니아어로 된 최초의 소책자인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가 발행되었습니다.
젊은 에스토니아 여자인 힐다 앙그는 친구들을 통해 진리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출판물을 구하러 지부 사무실에 갔을 때 한 독일인 형제가 자신의 공개 강연을 번역하는 일을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힐다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며, 1928년에는 지부 사무실에서 번역자로 일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후에 그는 전 시간 봉사를 하러 에스토니아에 와 있던 알렉산더 브라이드슨이라는 영국 형제와 결혼했습니다. 힐다는 열심히 일하는 유능한 번역자였으며, 나중에 활동이 금지되어 남편과 함께 에스토니아를 떠나 있어야 했을 때에도 해외에서 수십 년간 비밀리에 번역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브라이드슨 부부가 전 시간 봉사에 바친 기간을 더하면 100년이 넘습니다!
1928년, 성경 연구생들이 최초로 발행한 에스토니아어 책인 「하나님의 거문고」가 출판되었습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파수대」와 일곱 권의 책과 많은 소책자가 에스토니아어로 발행되었습니다.
초기의 복음 전파자들
콜포처들은 자전거로 광대한 구역을 다니며 봉사했고 시골집이든 건초 더미든 잘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묵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왕국 소식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전 시간 봉사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전파 활동에 매달 150시간에서 200시간을 바쳤으며, 한 달에 239시간을 보고한 자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수행한 봉사에는 부지런함과 담대함과 끈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일례로, 한 자매가 처음으로 야외 봉사에 나갔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 열심 있는 핀란드 자매가 그에게 “자전거 탈 줄 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새로운 자매는 “네, 탈 줄 알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핀란드 자매는 열의에 찬 목소리로 “그럼 함께 사레마로 가요” 하고 말했습니다. 사레마는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섬으로 그곳에서 약 20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레마의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을 때 핀란드 자매는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자매가 이쪽에서부터 시작하세요. 제가 저쪽 끝에서부터 해 올게요. 저녁때 마을 중간 지점에서 만나요.” 이 새로운 자매는 한번도 전파 활동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방문한 첫 집에서 여호와의 도움을 느꼈고 곧 자신감이 생겨 그 전파 여행의 남은 기간도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헬린 알도넨(결혼 후에는 헬린 그뢴룬드)은 보름시 섬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낯선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헬린은 그들에게 “에스토니아어를 사용하지 않으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네, 우리는 스웨덴어를 써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헬린은 “그럼 스웨덴어로 된 읽을거리는 좀 있으세요?”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과장을 섞어서 “스웨덴어 책은 몇 백 년 동안 구경도 못한 걸요” 하고 말했습니다.
헬린은 보름시 섬 사람들에게 스웨덴어 출판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웨덴어를 할 줄 아는 파니 히에달라를 데리고 그 섬에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헬린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지부 사무실에 있는 스웨덴어 책을 전부 다 챙겨서 배에 올랐어요. 섬 전체를 사흘 만에 돌면서 가져간 출판물을 거의 모두 전했지요. 수십 년 뒤에 들었는데, 스웨덴에 사는 한 형제가 보름시 섬에서 구한 책을 통해 진리를 알게 되었대요!” 왕국 전파자들은 전도서 11:6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아침에 네 씨를 뿌리고 저녁때까지 네 손을 쉬게 하지 말아라. 이것이 어디에서 성공할지 ··· 네가 모르기 때문이다.”
콜포처들이 어려움을 이겨 내다
콜포처들은 봉사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겨울에는 스키를 타거나 걸어서 하루에 20에서 40킬로미터를 이동하곤 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싸워야 했으며 편안히 묵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출판물이 든 상자 여러 개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최소한의 기본 식량과 필수품만 가져가야 했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도로로 통행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야외에서 잠을 자야 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 봉사하려면 온 힘과 활력을 쏟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이 헌신적인 전파자들은 자신들이 수행하는 봉사에 대해 어떻게 느꼈습니까?
수개월간 외딴 지역에서 전 시간 봉사를 수행한 열심 있는 핀란드 형제인 빌호 엘로란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필수품이 부족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출판물을 받은 사람들이 그 대가로 그날 먹을 양식과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지요. 돈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면 사람들에게 우리를 재워 줄 수 있는지 묻곤 했습니다. 거절하는 집주인은 거의 없었지요. 특히 날이 늦었거나 다음 농장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랬습니다.”
빌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검소하게 살았지만 전파 활동에서 얻는 기쁨과 만족감이 줄어드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왕국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형제 자매들이 열심히 일하여 수많은 양의 출판물을 전한 덕분에 미래의 성장을 위한 기초가 놓였습니다. 1929년에 총 5만 3704부에 달하는 서적과 소책자가 소수의 복음 전파자들에 의해 배부되었습니다.
아돌프 코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당시 에스토니아에는 30명가량의 콜포처들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들은 에스토니아 전역에 좋은 소식을 전파했습니다.”
이 초기 전파자들이 부지런히 기울인 노력은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루트라는 한 연로한 부인은 1990년대 초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는데, 그들이 전하는 소식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60여 년 전에 자신의 이웃 사람을 여러 번 방문했던 한 독일인 성경 연구생의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루트는 이제 나이도 많고 귀도 들리지 않지만 진리의 소리를 분별했으며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증인을 만난 지 거의 70년이 지나서 말입니다!
초기의 지부 활동
초기에는 작은 지부 사무실을 대회장으로 사용했습니다. 1928년 6월에 열린 최초의 대회에 25명이 참석했으며 네 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핀란드에서 80명의 형제들이 와서 대회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고 전파 활동도 함께했습니다.
에스토니아 지부의 종으로 섬기고 있던 앨버트 웨스트는 덴마크 지부의 종인 윌리엄 데이를 보조하고 나중에는 그를 대신하여 일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에스토니아 지부의 종으로는 누가 일할 것이었습니까? 스코틀랜드 출신의 월리스 백스터가 그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유머가 넘치는 사랑 많은 형제였습니다. 그는 진리를 알기 전에 영국군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프랑스에서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그가 보고 겪은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조화되지 않았습니다.
백스터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상대로 싸우든 전쟁은 모두 잘못된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지요. 나는 인간이 다 형제이며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그분을 발견할 것이라고 늘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참호에서 무릎을 꿇고는 내가 살아서 집에 돌아가기만 한다면 일평생을 바쳐 하느님을 섬기겠노라고 엄숙히 그분께 맹세했지요.”
백스터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는 진리를 배우고 나서 열의에 불타올라 1926년에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2년 뒤에는 에스토니아에서 봉사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였으며, 에스토니아에 온 뒤에도 동일한 열심을 가지고 봉사했습니다. 그는 웨스트 형제가 떠난 해인 1930년에 지부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32년에 지부는 탈린의 수르타르투 로(路) 72번지로 이전했으며, 다음 해에는 에스토니아에서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공식적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연설을 여러 언어로 방송하다
일찍이 1927년에 웨스트 형제는 탈린의 민영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하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천년기의 축복”이라는 주제로 연설했으며 이 연설은 에스토니아어로 통역되었습니다. 연설이 방송되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논란도 일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방송 허가가 나지 않다가 1929년부터는 일요일마다 정기적으로 방송하게 되었습니다. 연설은 러시아어, 에스토니아어, 영어, 핀란드어로 방송되었으며 때때로 스웨덴어와 독일어로 방송되었고, 적어도 한 차례는 덴마크어로도 제공되었습니다. 이 연설들 역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와 러시아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연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32 봉사 연도 중에 200개의 강연이 방송되어,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교직자들이 이 연설들을 반대하고 나선 것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교직자들은 에스토니아의 정부 관리들이 공산주의와 관련된 것이라면 얼마나 겁을 내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증인들이 공산주의와 연관이 있다고 거짓 주장을 했습니다.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는 것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던 에스토니아 정부는 1934년에 이 강연들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금지 명령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학생은 영어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워치 타워와 러더퍼드 판사님께
에스토니아 정부가 판사님의 연설을 방송하지 못하게 해서 안타까워요. 저는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부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자녀들을 위해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버시지요. 하지만 부모님의 얼굴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희망으로 햇살처럼 빛나요. 저는 겨울에 몹시 아팠어요. 그때 저에게 위로가 된 건 라디오에서 판사님의 연설을 듣는 일뿐이었지요. 연설을 들으면 행복해서 눈물이 났어요. ··· 이제 그 연설들을 어디에서 들어야 하나요? ··· 저는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이 편지가 사전 없이 영어로 쓰는 최초의 편지랍니다. ··· 판사님께 인사와 안부를 전합니다.
러더퍼드 형제는 이 어린 소년에게 직접 답장을 써 주었고 자신의 연설을 녹음한 것들도 보내 주었습니다.
“하늘 왕국 전차”
영국에서 온 열심 있는 콜포처인 존 노스는 에스토니아에서 봉사하는 동안 가족과 함께 이동 주택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에스토니아 남부 전역에서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한 지방 신문은 그 이동 주택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워치 타워] 협회는 타르투 시에 집처럼 생긴 자동차를 만들고 있는데, 그 목적은 이 차를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종교 예배를 열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이 ‘하늘 왕국 전차’에서 내려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성서에 대해 설명하는 책을 배부한다. 이 ‘전차’의 승무원은 다섯 명으로, 대장 역할을 하는 선교인과 그의 아내와 자녀 한 명 그리고 혈기 왕성한 두 젊은이들이다. 이 젊은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전차’ 주변 사방으로 (마치 예후처럼) 날렵하게 다니면서 책자를 배부한다.”
1930년대 중반의 정치적 혼란기에 전직 군 조종사인 니콜라이 투이만은 에스토니아 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습니다. 교도소 도서관에서 그는 J. F. 러더퍼드가 쓴 책 몇 권을 읽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석방된 후 아내가 갖고 있던 증인들의 책에 나오는 주소를 보고 탈린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하여 백스터 형제의 도움을 받은 니콜라이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정치 활동을 그만두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열정적인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후에 활동이 금지되었을 때, 그는 비밀 인쇄 작업을 도왔고 회중에서 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약 15년 동안 시베리아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도 계속 충실을 유지했습니다.
정치에 가담했다가 실망한 사람 중에는 의사였던 아르투르 인두스도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진료차 마르틴 코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코세 형제는 아르투르에게 성서를 연구하도록 권했으며,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아르투르를 위해 구할 수 있는 독일어 출판물을 모두 신청해 주었습니다. 마르틴의 도움으로 아르투르는 진리를 받아들여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존경받는 의사로 잘 알려져 있던 아르투르는 이제 열심 있고 존경받는 형제로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활동에 먹구름이 드리우다
1930년대 중반은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1935년 1월에 나치 독일과 가톨릭교회가 압력을 행사하여 「의로운 통치자」 소책자가 압수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같은 해, 내무부는 에스토니아의 워치 타워 협회를 폐쇄하고 출판물을 압수했으며 협회의 자산을 압류했습니다. 이미 많은 출판물을 숨겨 놓은 상태였지만 7만 6000부가량은 압수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활동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압수된 두 팜플렛의 내용이 발행 부수가 도합 10만 부인 주요 신문 두 곳에 실린 것입니다. 형제들에게는 매우 놀랍고도 기쁜 일이었습니다. 비록 출판물들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형제들이 그 팜플렛들을 직접 배부할 경우보다 여호와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전파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지부 사무실도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상당수의 책을 압수당하는 일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한번은 헬린 알도넨이 지부에서 일하고 있을 때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알도넨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젊은 경찰관 세 명이 왔습니다. 그들이 온 주된 목적은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소책자를 압수하는 것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그 소책자가 한 부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책장에서 책을 모두 빼내어 바닥에 한 무더기로 던져 놓았습니다. 경찰들이 백스터 형제를 주시하고 있어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나는 경찰을 따라다니며 정리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백스터 형제의 책상으로 가서 혹시 경찰이 보면 안 되는 서류가 있는지 살폈습니다. 그런데 모든 전도인들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편지가 보이는 겁니다. 나는 그것을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었지요. 그들이 책을 상자에 담기 시작했을 때, 책임자인 경찰 한 명이 오만한 태도로 상자 하나를 홱 잡아끌었는데 어찌나 힘을 세게 주었던지 팔이 부러진 게 아니겠어요! 경찰들은 서둘러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떠났고 덕분에 우리는 그들이 다시 오기 전에 상자 안을 살펴볼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백스터 형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경찰이 다시 와서 상자들을 치우고 있었는데 내가 보니 그중 한 명이 「구출」 책 한 권을 집어 자기 외투에 달린 큰 주머니에 넣더군요. 가끔 나는 우리 책들을 압수해 가져가서 읽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될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1939년은 불확실하고 두려운 시기였습니다. 많은 소련군이 에스토니아로 들어왔습니다. 백스터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매일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내용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동요되어 있었으며 온갖 추측이 무성하고 두려움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머리 위로는 낙하산 부대를 태운 소련군 전투기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위협이 되는 상황으로 인해 증거 활동은 중단되었습니까?
이 모든 혼란 속에서도 1940년에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은 5만 9776부의 서적과 소책자를 전했습니다. 27명의 전도인과 15명의 파이오니아만으로 놀라운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가 남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기간에 열린 마지막 대회
소련의 지배가 시작되기 직전에 형제들은 탈린에서 대회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회는 자유로운 기간에 열린 마지막 대회였으며 이후 50년간은 자유롭게 대회를 열 수 없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신권 통치”, “중립”, “덫”, “종교의 운명”과 같은 「파수대」 기사들이 다루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앞에 놓인 어려움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된 시기적절한 영적 양식이었습니다.
에스토니아도 제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고 있었으며 우리의 형제들 역시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1940년 6월 16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에스토니아 정부에게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과 더 많은 소련군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150명 미만의 당원으로 이루어진 에스토니아 공산당이 합법화되었으며 에스토니아는 소련에 합병되었습니다. 몇 달 사이에 수천 명의 에스토니아인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으며, 그들의 집과 농장은 버려지거나 불태워졌고 침략한 러시아인들의 소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소형 낚싯배로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도 매우 많았는데 그들은 주로 스웨덴으로 향했습니다. 그중 다수가 탈출에 성공했지만,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외국인 형제들이 모두 떠나다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지부 사무실이 또다시 폐쇄되었습니다. 백스터 형제와 브라이드슨 부부는 맡은 임명에 고착하려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외국인들이 머물기에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러더퍼드 형제는 그들에게 에스토니아를 떠나라고 권고했습니다. 백스터 형제와 라트비아 출신의 던험 부부는 기차를 타고 에스토니아를 빠져나와 시베리아를 거쳐 결국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습니다. 약 1년 뒤에 브라이드슨 부부도 스웨덴으로 떠났습니다. 백스터 형제는 1994년 6월 21일에 지상 생애를 마칠 때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에서 지부 위원으로 충실히 봉사했습니다.a
외국인 형제들이 모두 에스토니아를 떠나고 난 후, 남아 있는 현지 형제들은 이제 어떻게 될 것입니까? 그들은 진리 안에서 비교적 경험이 적은 데다가 잔인한 전쟁의 폭풍이 그들에게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전쟁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고 그들의 활동은 둔화되었습니다. 1941년의 마지막 보고 이후에 약 20년간 형제들로부터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혹독한 믿음의 시험
제2차 세계 대전의 불길이 거세게 번지고 있을 무렵, 독일군은 소련군을 에스토니아에서 몰아내고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이 나라를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청각 장애를 가진 야안 페라트라는 형제가 1942년에 타르투에서 전파하다가 독일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반정부 활동을 한다는 혐의로 투옥되었습니다. 교도소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감금된 곳의 교도소장은 재소자 야안 페라트를 “특별 처결을 위해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사형 집행 명령이었습니다. 그가 밖으로 끌려 나가는 것을 목격한 여러 사람들은 얼마 뒤 총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형제들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련군이, 그다음에는 독일군이 젊은 남자들을 징집했습니다. 아돌프 코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군대에 징집되지 않으려면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붙잡힐 경우, 징집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에 왕국 활동은 침체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가 전세가 또다시 역전되었습니다. 1944년 말경에 소련군이 독일군을 에스토니아에서 몰아내면서, 에스토니아는 다시 소련의 가혹한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그 후 여러 해 동안 이어진 압제를 겪으면서 에스토니아 국민은 피폐해져 갔습니다. 죽임을 당하거나 소련 내의 먼 곳으로 유배되거나 가까스로 그 나라를 빠져나간 사람들이 적어도 인구의 4분의 1에 달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에스토니아로 이주해 왔으며 그리하여 인구의 구성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소련의 지배는 우리의 형제들에게도 혹독한 믿음의 시험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숲의 형제에서 영적 형제로
당시 에스토니아에는 소련에 대항하여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 국가주의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울창한 숲 속에 숨어 지냈기 때문에 “숲의 형제들”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게릴라 대원은 아니었지만 소련의 국가 보안 위원회인 KGB를 피해 숲 속으로 숨어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추산에 따르면, 숲에 숨어 지내던 남자들의 수가 1만 5000명에서 2만 명가량에 달하던 때도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여러 해 동안 당국에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가장 마지막까지 숨어 있었던 사람은 1978년이 되어서야 발각되었습니다! 이 숲의 형제들 가운데서 진리를 받아들여 영적 형제가 될 사람이 있었습니까?
에리크 헤인로라는 한 남자는 자신이 이전에 에스토니아 정부에서 일했기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했을 때 그는 아내 마그다와 함께 배를 타고 스웨덴으로 탈출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배의 엔진이 고장 나는 바람에 마지막 시도마저 실패하여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숲 속에 숨어 지내면서 7년 동안 당국의 눈을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지만, 결국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아내는 소련에 있는 서로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아내인 마그다는 수용소에서 증인 두 명을 만나 왕국 희망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즉시 깨닫고서 가슴이 벅차올라 말 그대로 기쁨의 춤을 추었습니다! 마그다는 1956년에 석방되어 1960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에리크도 석방된 지 7년 후에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숲의 형제 한 명이 영적 형제가 되었습니다.
쫓기고 체포되다
외국인 형제들이 에스토니아를 떠난 뒤, 용감하고 열심 있는 형제인 마르틴 코세가 에스토니아 북부의 활동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에스토니아 남부는 프리드리히 알트페레 형제가 감독하게 되었는데, 그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일하던 키가 크고 예의 바른 에스토니아인이었습니다. 1930년대에 그는 뵈루에 왔던 외국인 파이오니아 한 명의 연설을 통역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연설을 통역한 후, 그는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그는 잘 발전하여 이제 에스토니아 남부의 전파 활동을 인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에스토니아의 활동을 인도하는 일은 두 형제 모두에게 어려운 임명이었습니다. 조직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황인 데다 둘 다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밀리에 활동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두 형제는 1940년부터 시작해서 1948년 말에 체포되기까지 충실히 일했습니다.
마르틴 코세와 프리드리히 알트페레가 체포된 후에, 알베르트 크루우스, 카를 탈베르그, 아르투르 인두스와 보조자인 렘비트 툼으로 구성된 봉사 위원회가 그들을 대신하여 일했습니다. 다른 위원들은 비밀리에 활동해야 했지만, 툼 형제만은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집단들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풍차 방앗간에서 일했던 툼 형제는 바람이 불지 않아 풍차가 돌지 않는 날에는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토니아의 책임 맡은 형제들은 동료 숭배자들을 돕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지도자로 간주되던 형제들의 사진이 마치 지명 수배 중인 범죄자의 사진처럼 기차역에 붙어 있었습니다. KGB는 양처럼 온순한 우리 형제들을 감시하도록 형제들 한 명당 최대 네 명의 비밀 요원을 붙였습니다. 1948년에서 1951년까지는 힘든 시기였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헌신한 종들이 전파 활동을 위해 기울이는 노력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결과 전도인 수가 100명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게”
에스토니아에 있는 예수의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인의 경고가 참되다는 것을 더욱더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게 되십시오. 사람들을 경계하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을 지방 법정에 넘겨 줄 것이며, 그들의 회당에서 여러분을 채찍질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 10:16-18) 그렇지만,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호와께서 사탄의 가혹한 지배 아래 있는 자신의 종들을 언제나 기적적으로 보호해 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일부 있었습니다. (욥 1:9-12; 2:3-6) 항상 “뱀과 같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나타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증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여 잔인한 박해자들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습니다.
아돌프 코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매우 열성적이고 담대해 보이는 한 관심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회중에서 책임을 맡았고 자매들도 그를 좋아했지요. 하지만 형제들은 그 사람을 수상히 여기게 되었고 자매들에게 어떤 모임 장소에도 그를 데려오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부는 그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 남자가 얻어 낸 많은 정보가 KGB로 곧장 넘어갔습니다.
렘비트 툼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1950년에 독일에서 「파수대」 몇 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에스토니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그 내용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형제들은 에스토니아의 외딴 지역에 있는 한 건초 헛간에서 대회를 열기로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KGB는 형제 자매들을 모두 체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트럭 두 대에 군인들을 싣고 와서 형제들이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기차역에 매복시켜 놓았습니다. 한편 대회 장소로 가는 길에는 참석자들에게 길을 알려 주기 위해 세 명의 형제들이 정해진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숲 속에서 수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총을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그를 다른 두 형제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으며 세 명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렘비트 툼과 엘라 키카스(결혼 후에는 엘라 툼)는 세 형제들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고 재빠르게 행동했습니다. 다음 기차로 오는 중이던 형제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렘비트는 엘라와 함께 자신의 오토바이를 타고 가능한 한 빨리 이전 역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역으로 들어가서 기차에 급히 올라타고는 재빨리 형제들이 내리게 했습니다! 결국, 기차가 KGB 요원들이 기다리고 있던 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기차에 증인들이 한 명도 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형제들 몇몇은 대회를 열 만한 다른 농장을 신속하게 찾아냈습니다. 새로운 대회 장소는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는데, 형제들은 대회 참석자들이 그곳까지 한적한 샛길을 따라 걸어가게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큰길에서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대회 참석자들을 찾느라 군인들이 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대회는 무사히 열렸으며 111명이 참석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당장이라도 자신이 체포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무거운 분위기였습니다. 대회 중에 형제들은 다른 나라 형제 자매들에 대한 보고도 들었는데, 그러한 보고에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여호와의 증인들의 경험담들이 들어 있어서 믿음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대대적인 체포를 피할 수 있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형제들은 이 대회를 통해 앞에 놓인 시험에 대비하는 데 꼭 필요한 인도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심문받고 형을 선고받다
그 후 몇 달 동안, 책임 맡은 모든 형제들이 연이어 체포되었으며 70명 이상의 전도인들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과 관련이 있던 다른 사람들도 체포되었습니다. 이제 평화를 사랑하는 여호와의 종들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심문을 받게 되었으며, 아직 체포되지 않은 증인들도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한 심문은 보통 밤에 있었고 일단 시작되면 수개월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심문을 받는 사람은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잠을 자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심신이 점점 더 쇠약해졌습니다. 형제들은 법정 심리 없이 선고를 받았는데, 5년에서 12년 동안 감옥이나 노동 수용소에서 복역하라는 말을 듣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대다수의 형제들은 10년 형을 받았습니다. 죄목은 무엇이었습니까? 정부 문서에는 그들이 “반국가적 선전과 반정부 활동”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이 개정되었고 증인들은 25년 형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63세 된 아우구스트 프레스라우드는 선고를 받고 나서 이러한 재미있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렇게 장기 형을 선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앞으로 살 날이 기껏해야 10년 정도 남았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사반세기나 더 살게 해 주셨군요!”
증인들은 소련 전역의 악명 높은 감옥이나 노동 수용소에서 복역하도록 선고를 받았는데, 주로 러시아의 극동 지방이나 극북 지방 또는 시베리아 같은 환경이 열악한 곳으로 보내졌습니다. 돌아올 가망이 없어 보였으며,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재소자들이 많았습니다.
당국에 협력했던 가짜 형제들도 반대자들의 박해를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KGB의 스파이였던 두 명의 형제에게 일어난 일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임무를 끝내자마자 그들 역시 KGB의 박해의 대상이 되었고 두 사람 다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KGB는 그러한 비겁한 밀고자들에 대한 일말의 존중심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b
에스토니아에서 시베리아로
증인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을 잡아들인 KGB는 이제 남아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도 모두 뿌리를 뽑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1951년 4월 1일 이른 아침에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극도로 치밀한 작전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서부를 비롯하여) 에스토니아 전역에서 동시에 펼쳐졌습니다.
KGB는 거의 모든 여호와의 증인을 신속히 집에서 끌고 나와 몇몇 기차역으로 모은 뒤 유개 화차에 태웠습니다. 끌려 나온 사람들 중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가까운 친족들 상당수와 관심자들도 있었습니다. 소량의 식품과 개인 물품을 가져가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나머지 재산은 모두 압수당했습니다. 이날 거의 3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재판이나 어떠한 설명도 없이 시베리아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야 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에스토니아에서 약 5000킬로미터 떨어진 톰스크 지역으로 보내졌습니다.
용감한 청소년들
17세인 코린나 엔니카와 13세인 여동생 에네 엔니카는 그 일이 있던 당시 친척 집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 집이 폐쇄되어 있고 어머니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어머니가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고 두 소녀는 마음이 조금 놓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코린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쨌든 살아 계셨으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체포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적어도 여호와의 백성과 함께 계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지요. 우리는 정말 여호와의 강력한 지원과 그분에게서 오는 평화를 느꼈어요. 나뿐만 아니라 감수성이 예민하고 연약한 편인 에네도 울지 않았어요. 월요일이 되어 우리는 학교에 갔고 아무에게도 어머니가 체포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지요.”
코린나와 에네는 심지어 관리들이 자신들을 데리러 왔을 때에도 침착함을 유지했습니다. 코린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탄 기차 칸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침착했어요. 한 자매가 우리를 위로하면서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를 돕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두 소녀는 6년이 넘게 어머니와 떨어져 있었습니다.
한 유배 서류에는 6개월 난 아기가 “국가의 적”이라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반대자들이 가졌던 근거 없는 증오심을 잘 보여 줍니다.
강제 추방은 매우 충격적인 경험이었으며, 추방된 사람들은 온갖 면에서 굴욕과 모욕을 당했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모든 사람이 기차에서 내려 화장실에 가야 했는데 사실 화장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완전히 수준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남녀가 다른 장소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했지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 옆을 걸어 지나가는가 하면 감시병들은 모두 우리를 지켜보며 주위에 서 있었습니다.”
시베리아에서의 삶 그리고 죽음
2주간의 고된 기차 여행 끝에, 유배된 사람들은 그들이 가져온 보잘것없는 짐과 함께 유개 화차에서 내려 차가운 눈 속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근처의 집단 농장에서 작업 감독들이 와서 마치 노예 시장에서 일꾼을 사는 지주들처럼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기에 적합한 일꾼들을 뽑아 갔습니다.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들 다수가 유배자였기에 그들은 새로 온 사람들에 대해 동정심을 느꼈습니다. 유배된 형제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친절한 그곳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곧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비교적 정상적인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예기치 않게 건강이 좋아지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결핵을 앓던 에스토니아인 자매 두 명은 건조한 시베리아의 기후 덕에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상황이 그렇게 순조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한 어린이가 기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 사망했으며, 한 연로한 증인은 열악한 환경 또는 감정적 충격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과도한 작업량에 시달리다가 신체장애가 생겼습니다. 또한 가혹한 생활환경, 영양 결핍, 질병, 사고, 극한의 추위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쓴 편지 한 통조차 받지 못하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었습니다.
티나 크루우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어린이와 젊은 여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형편이 좋지 않은 집단 농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농장 사람들이 먹을 음식도 충분치 않았는데 우리야 말할 것도 없었지요. 새로 온 사람들은 소나무 껍질이나 식용 뿌리를 씹어 먹었고 쐐기풀로 국을 끓여 먹기도 했습니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길고 몹시 춥습니다. 에스토니아에서 온 유배자들은 그러한 혹독한 기후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감자 재배와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일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유배된 사람들 대부분은 끊임없는 배고픔에 시달리면서 매우 고된 첫해를 보냈습니다.
히시 렘베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기온이 섭씨 영하 50도였습니다. 우리는 추위 때문에 암탉이 얼어 죽지 않도록 닭장을 침대 밑에 두었습니다. 어쩌다 송아지가 겨울에 태어나면 송아지를 집 안에 두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구역으로—비용은 국가에서!
여러 해 앞서 윌리엄 데이는 소련이 발트 해 연안의 국가들을 점령하게 되면 형제들이 전파할 광대한 구역이 새로 생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참으로 옳았습니다! 소련 정부가 시베리아를 비롯한 머나먼 곳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을 유배시킨 것은 그곳까지 전파 활동이 확장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증인들이 시험을 받도록 허락하시기는 했지만, 그 결과 하느님의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울 기회가 생겼습니다.
예를 들면,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렘비트 트렐이라는 사람은 1948년에 독특한 방법으로 진리를 들었습니다. 타르투의 감옥에서 함께 수감되어 있던 한 러시아군 장교가 그에게 다른 감방에서 만난 증인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장교는 렘비트에게 증인들의 가르침을 간단히 요약하여 알려 주면서 하느님의 왕국이 유일한 해결책이며 하느님이 곧 땅을 통치하실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렘비트는 관심이 생겼습니다.
후에 렘비트는 시베리아 북단으로 이송되어 북극해 근처의 보르쿠타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여러 명의 증인들이 성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좀 더 가까이 간 렘비트는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장교에게서 들은 내용과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그들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형제들이 렘비트에게 “왜 감옥에 들어왔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정의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증인들 중 하나가 “그래서 성공하셨나요?”라고 질문했습니다.
대답하나 마나 한 질문이었지만 렘비트는 “아니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한 형제가 “그렇죠! 당신은 잘못된 편에서 싸웠던 거예요. 올바른 편에서 싸우는 게 낫지 않겠어요?” 하고 렘비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성서에서 영적 전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렘비트는 진리를 찾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 영적 전쟁에서 여호와의 편에 서야 할 필요를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렘비트는 석방된 뒤 에스토니아로 돌아와 영적 전쟁에 가담했습니다. 그는 현재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인 마이무도 비슷한 방식으로 진리를 발견했는데 감옥에서 증인이 아닌 사람에 의해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어를 잘하지 못하는 형제들은 전파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제한된 어휘로나마 시베리아로 유배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면 늘 쉽게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비공식 증거의 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에스토니아에서 온 유배자들에게 모국어로 증거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한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약 15명에서 20명의 에스토니아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러시아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이 수용소에서 진리를 배웠다고 합니다.
여러 방법으로 영적 양식을 공급받다
성서와 영적 양식을 감옥으로 그리고 유배된 증인이 사는 고립된 지역으로 몰래 들여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돼지기름이나 다른 동물 지방이 든 항아리를 통해 낱장으로 된 출판물을 받았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기름이 하얗게 되었기 때문에 종이가 잘 보이지 않았지요. 관리들이 항아리 속을 칼로 찔러 보았지만 항아리 벽 쪽에 단단히 붙어 있는 얇은 종이가 발각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관리들은 문자적 양식이 든 항아리 속에 숨겨진 귀중한 영적 양식을 대부분 발견해 내지 못했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출판물을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 손가방이나 옷 속에 넣어 꿰매거나 비누 상자에 숨기기도 했고 비누의 속을 파내어 그 속에 눌러 넣기도 했습니다. 엘라 툼은 “나는 비누 한 상자에 「파수대」 네 부를 넣을 수 있었지요”라고 말합니다.
편지가 검열당하는 상황이었지만 증인들은 성서 진리와 신권 용어를 일상적인 단어로 위장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예를 들면 한 자매는 이러한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잘 보살펴 주고 계시고 또 우리에게는 우물에 닿는 밧줄도 있어요.” 이 자매는 “아버지”이신 여호와께서 영적으로 그들을 잘 보살피고 계시며, 그들이 여호와의 조직인 “우물”과 연락을 하고 있고, 생명을 주는 진리의 물인 성서 출판물을 구할 수 있다고 쓴 것입니다.
많은 출판물은 그냥 손으로 베껴 썼으며, 초보적인 인쇄 기술을 사용하여 복사한 출판물도 있었습니다. 출판물을 베껴 쓰는 일을 하는 증인들은 전파했다는 이유로 격리 수감되는 것을 반가워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격리 수감되는 것은 좋은 일이었어요. 방해를 덜 받으면서 「파수대」를 번역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박해자들의 책략은 수포로 돌아갔고 오히려 왕국 권익이 증진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이사야 54:17.
집회의 중요성을 인식하다
함께 모여 집회를 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던 당시 증인들은 그러한 드문 기회를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코린나 엔니카는 다른 자매 한 명과 함께 용기를 내어 허락 없이 이틀 동안 일을 쉬고 집회에 참석했던 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저녁 무렵 일터에서 나와 25킬로미터 떨어진 기차역까지 걸었지요. 새벽 2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여섯 시간을 간 뒤 기차에서 내려 집회 장소까지 10킬로미터를 걸었습니다. 집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는 집을 발견하여 누가 암호를 말할 것인지 정하려 하는데, 한 형제가 밖으로 나오더니 우리가 자매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활기찬 목소리로 ‘여기가 맞습니다. 들어오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파수대」를 연구하고 왕국 노래를 불렀지요. 그러한 경험을 통해 큰 격려를 받았고 믿음이 강화되었어요.” 사흘 뒤 그들이 일터로 돌아가 보니 농장 관리인은 그들이 없어졌던 것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와 같이 비밀 집회는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의 믿음과 용기를 크게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또 한번은 형제들 여러 명이 감옥에서 집회를 갖고 있을 때 갑자기 교도관들이 출판물을 수색하러 왔습니다. 출판물 몇 장을 손에 쥐고 있던 한 형제는 재빨리 빗자루를 들고 그곳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교도관들은 여기저기를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출판물은 부지런히 바닥을 쓸던 형제가 꼭 쥐고 있던 빗자루 손잡이에 안전하게 말려 있었던 것입니다!
참그리스도인 사랑의 힘
아돌프 코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5년 동안 지하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우리가 있던 곳은 겨울이 되면 낮에도 해가 뜨지 않는 북극권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을 끝내고 땅 위로 올라오면 사방이 캄캄해져 있었기 때문에 몇 달씩 햇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식품 배급량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억력이 떨어졌고 시간 감각도 영향을 받았지요. 일이 고되고 음식이 부족한 데다가 몹시 지쳐서 힘이 없었기 때문에 가벼운 대화도 몇 분씩밖에 나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왕국 진리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지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몇 시간이고 계속 이야기할 수 있었지요.”
이 모든 어려움을 겪으면서 여호와의 백성들은 서로에 대해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코세 형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가진 것을 모두 똑같이 나누었으며, 우리 중 한 사람에게 무언가가 생겨도 그렇게 했습니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서로 나누어 갖는 법을 배웠지요.”—요한 첫째 4:21.
심지어 감시관들도 증인들이 항상 서로 돕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노 에이트마가 다른 수용소로 이감되었을 때 그에게는 수용소 생활의 필수품인 숟가락과 밥그릇이 없었습니다.
이를 안 수용소장이 “괜찮아, 필요한 건 너희 자매들이 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 사랑이 표현되어 여호와의 이름에 영예가 돌아가는 일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충성의 시험이 중단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에이트마 자매는 수용소에서 제법 시간을 보낸 뒤에도 감시관들로부터 “아직도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원한 협조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기밀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에이트마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수용소에 가두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당신들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들에게 협조할 수 있겠어요?”
유배된 증인들은 ‘감옥에 갇힌’ 상태였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함으로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사랑을 계속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전파했습니까?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지식인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소련의 정책 덕분에, 유배된 증인들에게 사실상 ‘말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이 학식 있는 유배자들과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이들이 왕국 소식을 듣고 반응을 보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골로새 4:2-4.
코세 형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나중에 서로 다른 수용소들로 보내졌습니다. 수용소의 각 방마다 증거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살면서 그렇게 증거를 많이 한 적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유배 기간 내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공격은 수그러들 줄 몰랐습니다. 증인들은 재산과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모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결코 박해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에스토니아로
1953년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그를 열렬히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은 비탄에 잠겼습니다. 그때 엘라 툼은 다른 여섯 명의 자매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교도관이 울면서 그들에게 오더니 일어나서 스탈린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자매들은 용감하게 거절했습니다.
스탈린의 죽음으로 인해 정치적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956년부터 1957년까지 전 세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유배된 형제들을 위해 소련 정부에 수백 장의 청원서를 보냈습니다. 유배당한 증인들은 차례로 사면을 받았습니다. 투옥되어 있던 사람들이 풀려났으며 유배되어 있던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일부 증인들은 스탈린이 사망하고 나서 곧 석방되었지만, 좀 더 기다려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951년에 추방된 투이만 가족은 1965년이 되어서야 에스토니아로 돌아가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제 형제들은 에스토니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유배될 때 모든 재산을 압수당했기 때문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살 곳을 새로 구해야 했습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증인들은 위협과 잔혹한 대우, 고된 노동, 감옥의 끔찍한 환경과 같은 시련들을 겪으면서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대다수는 생명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영적으로 강하고 충실한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적어도 27명의 에스토니아 증인들이 감옥에서 혹은 유배 중에 사망했으며 그중에는 추방되기 전에 에스토니아에서 봉사 위원으로 섬겼던 아르투르 인두스도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알트페레는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는데 고된 노동이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은 시베리아에서 겪은 강도 높은 믿음의 시험 가운데서 많은 교훈을 배웠으며 변함없는 충절을 유지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맹공격을 이겨 내면서 한층 더 강해진 믿음과 굳건한 인내를 얻었습니다.—야고보 1:2-4.
빌야드 카르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책임 맡은 형제들은 모두 수용소에 있었고 우리는 그들과 계속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 결과 시베리아에 있는 동안 우리는 항상 출판물을 받을 수 있었고 영적으로 강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정기적으로 영적 양식을 받기가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추방되지 않고 에스토니아에 계속 있었더라면 아마 그처럼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증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은 유배 생활에서 고통을 당한 결과로 적개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와는 달리 여호와의 증인들은 유배 생활을 통해 영적으로 강화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코린나 엔니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시련을 통해 순종을 배웠습니다. 여호와께 희망을 두었고 그에 대해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지요. 우리는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와 내 동생 에네가 가진 것이라고는 침대 밑에 있는 작은 옷 가방과 상자 하나뿐이었지요. 지금 무언가 더 필요하다고 느낄 때면 그때의 경험을 떠올려 봅니다. 시베리아에서 보낸 열일곱 살에서 스물세 살까지의 시기는 젊은 시절 중에서도 가장 좋은 때였습니다. 우리가 유배되지 않았더라면 영적으로 그만큼 강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 봅니다. 나는 시베리아가 그 당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장소였다고 생각합니다.”
한 자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베리아에서 보낸 5년은 금세 잊혀졌습니다. 고작 두 시간 정도 영화를 보고 나온 듯한 느낌이었지요.”
아이노 에이트마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경쾌하게 춤을 추듯 어른거리던 오로라, 얼어붙을 듯 추운 날이면 바다나 강 위로 색색의 수증기가 뭉게뭉게 올라오던 광경, 2주간 해가 지지 않는 북극의 낮과 2주간 해가 뜨지 않는 북극의 밤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짧은 여름 동안 익어 가던 새파란 딸기와 앙상한 나무의 작은 가지들을 먹던 북극의 들새들이 기억납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마치 시베리아로 여행을 와 있는 것 같았지요. 나는 그런 곳에서도 여호와와 함께라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시대, 낡은 전략
형제들이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후에도 박해는 계속되었습니다. 비밀경찰은 여호와의 증인 조직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비방하기 위해 직접적인 전략과 간접적인 전략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군 복무를 거부하여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위리 쇤베르그는 소환되어 집중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KGB를 위해 일하도록 그를 설득하려고 특수 KGB 요원이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에스토니아까지 왔습니다. 그 요원은 위리에게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은 반정부적이고 오류투성이라는 점을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그는 위리에게 「파수대」 몇 부를 주었는데, 그 잡지가 진짜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위리는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그 잡지들이 때때로 KGB가 증인들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려고 만드는 가짜 「파수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요원은 KGB에 협력하라고 일주일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위리에게 압력을 가했지만 우리의 형제는 확고함을 유지했으며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다시 연락이 되다
단단히 드리워진 철의 장막도 성서 진리의 빛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이전에 받은 출판물에 의존해야 했던 에스토니아의 증인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되면서 소련 내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 온 형제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에스토니아로 돌아온 그들은 용기를 내어 소련의 형제들과 계속 연락을 취했으며 그렇게 하여 신선한 영적 양식을 가끔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일례로, 그들은 1956년부터 이반 드지아프코를 비롯한 우크라이나의 형제들과 연락을 취했으며 그들에게서 출판물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연락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었고 구할 수 있는 출판물의 양도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무언가 다른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었으며, 형제들은 담대한 노력을 기울여 곧 여호와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핀란드 지부는 통치체의 인도 아래 에스토니아의 형제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도울 계획을 세웠습니다. 1930년대에 에스토니아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했던 빌호 엘로란다가 그들과 연락을 취하도록 임명받았습니다. 1960년대 초, 임무 수행을 위해 에스토니아로 간 첫 여행에서 빌호는 파니 히에달라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관광객으로 가장한 많은 핀란드 형제들이 연락원 역할을 해 주어서 의사소통이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에스토니아의 형제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던 여호와의 조직과 마침내 연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봉사 보고와 서신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며 마이크로필름에 담긴 출판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연락은 절대 기밀을 유지하면서 극도의 신중을 기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1년에 두세 번으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후고 코세 2세는 아돌프 코세의 사촌인데, 연락원으로 일하기 위해 열다섯 차례 에스토니아로 여행했습니다. 한번은 국경을 지키는 관리들이 그를 철저히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관리들이 그의 종교가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묻자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후고는 이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영어로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말해 달라고 하면 자신들의 무지가 탄로 날 것이라고 생각한 관리들은 전화벨이 울리자 후고에게 배가 떠나려 하니 빨리 가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후고는 즉시 그들의 말대로 했습니다!
연락원으로 일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며 매우 진지한 태도로 이 일에 임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과신의 위험성을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야외 봉사 보고는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항상 암호로 기록했습니다. 연락원들은 자신들이 부주의할 경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자신들을 미행하는 KGB 요원을 보기도 했습니다. 빌야드 카르나는 전달받을 물건이 있어서 형제 두 명을 만나려고 기다리던 도중, 요원 하나가 그 형제들의 사진을 찍고 그들을 미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증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증거를 모으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연락원들이 일하던 기간 내내, 출판물이나 서신이나 보고가 전달되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조직의 발전
소련에서의 전파 활동은 한동안 우크라이나의 전국 위원회가 감독했습니다. 또한 지역 감독자로 임명된 몇몇 형제들이 그 광활한 땅 전역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에스토니아에서 조직이 성장하면서 현지에서 감독자로 일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967년, 차분한 성품을 가진 데다가 다양한 믿음의 시험을 통해 단련된 아돌프 코세가 활동을 조직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카렐리야,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무르만스크의 서신과 보고를 처리하는 일도 맡게 되었습니다. 코세 형제는 여러 지역에서 인쇄 작업을 조직하는 일도 도왔습니다.
코세 형제는 아내인 코이둘라와 함께 타파 시 인근의 돼지 농장에서 일하는 전 시간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 모든 책임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세속 일을 좀 더 수월하게 해 주는 몇몇 장치를 고안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더 많은 시간을 신권 임명을 돌보는 데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빌야드 카르나, 렘비트 툼, 실베르 실리크사르 등의 형제들이 에스토니아를 비롯하여 인접해 있는 소련의 공화국들에 있는 회중을 방문하는 일을 했습니다. 에스토니아에서 러시아어 밭이 성장함에 따라 알렉산드르 예브도키모프도 비슷한 일을 맡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인쇄 작업을 나누어 하게 되면서 에스토니아 내에서 러시아어를 하는 형제들은 자체적으로 출판물을 인쇄했습니다. 마이크로필름에 담겨 온 출판물은 이미 러시아어로 되어 있어서 곧바로 인화지에 현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필름을 인화하는 방식을 사용하면 여러 장소에서 많은 수의 형제들이 출판물을 인쇄해야 했으며 회중들의 필요에 보조를 맞추기도 힘들었습니다. 결국 이 수고스러운 인쇄 방식은 회중들이 성장함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었는데도 20종 이상의 책들이 수백 부나 비밀리에 인쇄되었습니다. 1966년에서 1989년 사이에 수작업으로 생산된 에스토니아어와 러시아어 출판물을 합하면 500만 페이지가 넘습니다.
항상 조심하라
한번은 경찰이 분실된 오토바이를 찾는다는 핑계로 한 형제의 집을 수색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곧장 책장으로 향했습니다. 책장은 분명히 오토바이를 숨길 만한 곳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들이 온 진짜 목적은 금지된 출판물을 찾기 위한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때 그들은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형제들은 어떤 방법으로 출판물을 위장하고 숨겼습니까? 그들은 출판물을 생산할 때, 오래된 세속 책이나 잡지의 표지를 붙여 제본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 놓은 “오래된” 출판물은 예기치 않게 수색을 당하더라도 대개 들키지 않았습니다.
증인들은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행사를 이용하여 집회나 대회를 열었습니다. 예를 들어 헤이마르 투이만과 엘비 투이만의 결혼식은 이틀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행사가 사나흘간 계속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에스토니아의 장로들은 예비부부들에게 너무 큰 규모로 결혼식을 계획하지 말라고 제안했습니다. 모인 사람의 수가 적으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주의를 덜 끌었으며 어려움을 초래할 확률도 적었습니다.
러시아 형제들이 이주해 오다
1970년, 오랫동안 진리 안에 있었던 증인들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비롯하여 소련의 여러 지역에서 에스토니아로 이주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중 다수에게는 잔인한 박해를 겪었던 모국에서보다 에스토니아에서 사는 것이 훨씬 더 수월했습니다.
1972년, 우크라이나에서 오랫동안 장로로 일한 니콜라이 두보빈스키를 포함하여 여러 형제들의 도움으로, 약 50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러시아어 회중이 타르투에 세워졌습니다. 러시아어 구역은 매우 생산적인 밭으로서, 2010년까지 에스토니아에 27개의 러시아어 회중과 4개의 러시아어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회중과 집단에 속한 전도인들이 에스토니아 총 전도인 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비공식 증거를 하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은 담대하고 열심 있는 전파자들이었으며 비공식 증거를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형제들은 탈린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한 관광객들에게 말을 걸어 증거하곤 했습니다. 관광객들은 형제들이 성서에 관해 이야기하자 안내원인 줄 알고 그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어떤 자매들은 기차 안에서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타르투와 탈린을 오가는 왕복 기차를 타곤 했습니다. 기차 여행을 하는 여덟 시간은 승객들과 대화를 시작하여 좋은 소식을 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에스토니아로 이주해 온 마리아 파세츠니크는 “나는 성서 연구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요”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근처 가게에서 식료품을 사기 위해 줄을 길게 서 있는 몇 시간 동안 함께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증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계속 말합니다. “하루는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한 여자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서서히 성서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었지요. 그 여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나를 자기가 아는 다른 여자들에게 데려가 소개시켜 주더니, 그들과 대화를 계속하라고 나를 남겨 두고 갔습니다. 그 결과 나는 네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지요. 그중 한 여자는 침례 받은 증인이 되었고 지금도 충실히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다른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에스토니아에서도 많은 여호와의 종들은 직장에서 두드러진 모범이 됩니다. 예를 들어 레온하르드 닐스크는 한 발전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공산당이 그 회사로 파견한 관리자는 레온하르드가 종교를 갖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회사에서 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발전소 내의 전기 연구소 책임자가 레온하르드를 옹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 술 마시고 일은 제대로 하지 않는 공산당원이오, 아니면 믿을 만한 사람으로 평판이 나 있는 종교인이오?” 레온하르드를 좋게 생각하고 있던 동료들도 그를 변호해 주었으며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그 관리자는 당내 상급 관리들의 환심을 사려고 그렇게 했던 것 같으며, 에스토니아에서 공산당의 집권이 끝났을 때 직업을 잃게 된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사람이었습니다.
금지령하에서 증거하는 일
현재 에스토니아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는 렘비트 레일레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반 친구들 여러 명에게 분별력을 사용해서 전파했습니다. 그중에 한 남자 아이를 우리 집에 자주 데려와서 조심스럽게 증거하곤 했지요. 졸업한 후로는 약 20년 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내가 고향에 있는 회중에서 공개 강연을 하고 있는데 청중 가운데 누가 앉아 있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하고 있었고, 내가 방문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침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증거할 때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습니다. 한 장로가 당시에 어떻게 증거했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먼저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그중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안전할지 찬찬히 살펴야 했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했지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가 KGB의 정보원인지를 분별해 낼 수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말이 많고 목소리가 큰 사람은 경계했습니다. 반대로 과묵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안전한 편이었지요. 종종 우리는 공산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이른바 반체제적인 사람들에게 말을 걸곤 했는데, 그들은 좀 더 개방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원에서 있었던 격려적인 만남
통치체는 통치체 성원 중 한 명인 로이드 배리가 핀란드 지부의 비브 모리츠와 함께 가서 당시 에스토니아의 활동을 조직하던 아돌프 코세를 만나도록 마련했습니다. 그들은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한 공원에서 만났습니다.
이 비밀스런 만남에 대해 모리츠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 코세 형제는 입을 떼기를 주저했습니다. 잔뜩 경계한 채 신문을 펼쳐 들고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지요. 하지만 대화가 계속되면서 신문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고 아돌프는 편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배리 형제는 그 모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더니 그는 거절했습니다.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코세 형제가 소련에 있는 증인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박해와 제한에 대한 걱정을 표현하자, 모리츠 형제와 배리 형제는 그에게 격려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시험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 시험들이 더 쉬워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더 위험하지요! 우리에게는 이곳에 없는 유혹거리가 많습니다. 서양에서는 여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떠나고 있어요.”
이 방문은 정말 시기적절했으며 코세 형제를 영적으로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나중에서야 자신이 통치체 성원 한 명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혹한 압제 아래서도 충절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조직을 통해 받은 격려를 기쁜 마음으로 전달했습니다.
후에 배리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소련에 있는 형제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코세 형제를 만나서 나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우리는 헤어지면서 코세 형제와 악수를 나누었고 그는 우리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그러한 기쁜 만남에 잘 어울리는 작별 인사였습니다.”
학생들이 용기를 내어 확고한 입장을 취하다
여호와의 종들 중에서도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정치 조직을 지지하라는 압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에 어긋나는 다른 활동들에도 가담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에스테르 탐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우리 반 모두 일어나 앞으로 나가서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보내는 편지에 서명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에스테르는 일어서기는 했지만 앞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 편지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공손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화를 냈지만, 놀랍게도 반 친구들 몇 명이 에스테르를 옹호해 주었고 자신들도 편지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문제가 일단락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학생들은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표시로 매야 했던 빨간 스카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빨간 스카프를 매지 않으면 낮은 성적을 받는 등의 처벌이 있을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고대 바빌론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히브리인 친구들이 충성을 나타낸 것처럼 우리의 어린 형제 자매들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다니엘 1:8.
새로운 시대가 열리다
에스토니아 국민의 7퍼센트만이 공산당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소련 체제가 일반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토니아 관리들이 소련 정부에서 오는 지시에 언제나 기꺼이 따랐던 것은 아니며, 몇몇 사람들은 증인들을 도와주기까지 했습니다. 일례로, 1985년에 한 지역 관리가 렘비트 툼에게 오더니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증인들을 감독하는 위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모임을 갖더라도 국경일은 피하십시오.”
렘비트는 “그래서 나는 그 정보를 모두에게 전달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증인들이 국경일을 이용해서 집회를 보는 것이 KGB의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동안 형제들이 너무 공개적으로 모임을 가졌던 것 같으며, 형제들은 그 친절한 조언에 따라 조정을 했습니다.
1986년, 소련에 페레스트로이카 즉 개혁 정책이 도입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통치체는 형제들에게 전에 없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이 시기를 활용하여 동유럽에서 대회들을 열도록 격려했습니다. 소련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은 아마겟돈 전에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했습니다. 그들이 겪었던 모든 시련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했고, 여전히 집이 정기적으로 수색을 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도록 초대받다
자유가 더 많이 허용되면서 종교와 성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취한 입장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고, 형제들은 여러 단체로부터 우리의 종교적 신념을 설명하는 공개 연설을 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렘비트 레일레가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기로 했습니다. 당일이 되어, 그 모임을 계획한 아이나르 오야란드가 면도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이런 광고가 나왔습니다. “오늘 사칼라 센터에서 ‘성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라는 주제의 연설이 있을 것입니다.” 사칼라 센터는 탈린의 주요 회의 장소로서 공산당이 모임을 가질 때 많이 사용했던 곳이었습니다! 아이나르는 하마터면 면도기를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모임이 훨씬 더 커질 것이라는 사실을 렘비트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을 때에야 렘비트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렘비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회의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청중 앞에서 연설하는 건 처음이었어요. 마이크를 잡아 본 적도, 연단에 서 본 적도 없었지요. 나는 짧게 기도를 한 후에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했던 바울을 떠올리고 서론을 생각했습니다. 청중 대부분이 채식주의자였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께서 첫 인간 부부에게 과일과 채소만을 음식으로 주셨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대홍수 이후에야 고기를 먹게 되었다는 점도 함께 말이죠.”
그러한 서론은 이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출판물을 구할 수 있게 될 때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들은 이름과 주소를 남기기 위해 길게 줄을 섰습니다. 당시 여러 해 동안 많은 형제들이 도서관이나 학교 또는 문화 센터에 모인 대규모의 청중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의로운 성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분별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영적으로 계속 깨어 있다
1989년, 소련에 사는 여호와의 종들이 더 많은 종교적 자유를 누리게 되면서 일부 형제들은 폴란드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긴 세월 잔혹한 억압을 겪은 뒤에 드디어 자유롭게 대회를 보게 된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엘라 툼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정말 행복했어요! 눈물이 펑펑 났습니다! 우리에게 이 대회는 그야말로 영적 낙원이었습니다.”
한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폴란드에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지요. 회관으로 들어가는 형제 자매들을 보자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더군요. 왕국회관에 가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해, 통치체 성원인 시어도어 재라스와 밀턴 헨첼이 독일 지부의 빌리 폴과 함께 소련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그 여행은 형제들을 만나서 그들을 격려하고 상황이 어떠한지 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장면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으므로,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시행하는 이 기간은 지체 없이 행동해야 할 때였습니다. 이 시기에 영적으로 재정비를 해야 했으며, 먼저 번역 작업에 주의가 기울여졌습니다.
활력이 넘치는 전직 하키 선수이자 에스토니아 집안 배경을 가진 토마스(톰) 에두르라는 형제가 1983년부터 캐나다 지부에서 에스토니아어 번역 일을 조금씩 하고 있었습니다.c 당시에 그렇게 번역된 출판물들은 주로 외국에 살고 있는 에스토니아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 에스토니아에서 활동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토마스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출판물을 에스토니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돕도록 핀란드 지부로 임명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에스토니아로 옮겨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번역자들이 각각 다른 장소에서 번역 작업을 했습니다. 이제 번역자들이 한장소에서 함께 일하면 작업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여러 명의 번역자들이 타르투에 있는 렘비트 툼의 집에 모여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컴퓨터를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효율적으로 일하는 데 필요한 장비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에스토니아 형제가 미국 지부를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컴퓨터 두 대를 가져오자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번역부가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초가 놓인 것입니다. 컴퓨터나 우리의 조직에서 사용하는 다종 언어 전산 사식 시스템(MEPS)을 사용해 본 번역자들이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형제들은 배우고자 하는 열의로 가득 차 있었으며 곧 능숙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즐긴 또 다른 대회
동유럽에서 소련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약 200명의 에스토니아 형제 자매들이 비자를 받아 1990년 6월에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리는 “순결한 언어” 지역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토니아 대표단이 핀란드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자 부두에 서 있던 핀란드 형제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로 그들을 맞이했으며 그 박수 소리는 3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증인이 아닌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떤 유명 인사가 온 것인지 궁금해했습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수십 년간 소련 정권으로부터 학대를 받던 겸손한 우리 형제들이 올림픽 챔피언과 같은 환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에스토니아의 형제들이 프로그램의 일부를 에스토니아어로 즐기고 모국어로 된 새로운 출판물들을 받게 되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겠습니까! 오랫동안 하느님을 섬겨 온 한 증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에스토니아어 팜플렛을 손에 받아 드니 마치 값진 보석을 손에 쥔 것 같았습니다.”
대회의 마지막 연설에서는 에스토니아 대표단의 마음을 더욱더 설레게 하는 감동적인 광고가 있었습니다. 통치체의 승인을 받아 1991년 1월부터 총천연색 에스토니아어 「파수대」를 한 달에 두 번 영어판과 동시에 발행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청중은 기쁨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 동안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박수 소리가 멈추고 사방이 조용해졌을 때 청중석의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이전처럼 한 연구 집단에 한 부씩 잡지를 받게 되는 건가요? 아니면 각 사람이 한 부씩 받게 되나요?” 모든 사람이 개인용으로 한 부씩 받게 된다는 꿈만 같은 대답을 듣고 청중석에서 다시 한번 감사의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핀란드 지부는 에스토니아어 출판물을 인쇄하고 또한 1990년부터 발행된 지난 호 잡지들을 인쇄하느라 분주해졌습니다. 영적인 도움에 더해, 여러 나라의 형제들이 에스토니아로 인도주의적 구호물자를 보내 주었으며, 에스토니아의 형제들은 이 구호품들을 받아서 분배했습니다. 당시의 경제 상황 때문에 형제들에게는 이러한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자유로운 가운데 열린 첫 번째 대회
여호와의 조직은 증가하는 종교적 자유를 활용하여 신속히 소련 전역에서 대규모 지역 대회를 마련했습니다. “[경건한] 자유 애호자” 지역 대회의 첫 번째 대회를 1991년 7월 13-14일에 탈린에서 열게 되었을 때 에스토니아 형제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몇몇 연로한 대표자들에게는 이 대회가 특히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스토니아에서 이들이 자유로운 가운데 참석할 수 있었던 대회는 1940년에 열린 대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이제 50년 이상이 지나 다시 자유 가운데 모인 그들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
소련 북서부와 발트 해 연안의 나라들과 칼리닌그라드에서 온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은 탈린의 린나할(시립 콘서트홀)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인접한 야아할(아이스 홀)에는 에스토니아어 회기를 듣기 위해 거의 1000명이 모였습니다. 두 장소에 모인 최고 참석자 수는 4808명에 달했고 447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기쁨이 넘치는 대회였습니다!
이러한 대회들은 새로운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레온하르드 닐스크의 할머니인 아맬리에는 예수 재림 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교회의 가르침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레온하르드는 무엇이 진리인지를 성서를 통해 찾아보도록 할머니를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아맬리에가 실제로 마음을 바꾼 것은 1991년에 탈린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고 나서였습니다. 대회 첫째 날 회기가 끝난 후, 아맬리에는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레온하르드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더해 여호와의 백성을 직접 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맬리에는 성서 연구를 시작했으며 나중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꿈이 이루어지다
이제 여호와의 종들을 위협하던 박해와 압제의 먹구름이 걷혔지만 어떤 사람들은 진정으로 숭배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정말 꿈만 같다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장로로 섬긴 한 형제는 에스토니아어로 된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받게 될 날을 꿈꾸었습니다. 1991년에 바로 그 책이 출판되어 나왔습니다. 더 큰 자유를 누리게 된 이래 발행된 최초의 에스토니아어 출판물이었습니다.
그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꿈에 그리던 그 책을 내 손에 들고 있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집회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데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지요.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 청중석에서는 일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러고는 기쁨의 눈물이 터져 나왔지요! 형제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절대 잊지 못할 순간이었어요.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형제들은 “꿈을 꾸는 자들 같”은 기분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시 126:1-6) 수십 년간 시련을 겪은 많은 사람들이 이제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약속대로 결실을 거두는 행복을 직접 맛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치지 않는다면, 제철이 되어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디아 6:9.
신권 역사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기쁜 일
에스토니아의 형제 자매들은 1991년 10월 31일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바로 그날 에스토니아에서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이 공식적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이제 영적 재건 활동이 큰 규모로 이루어질 때가 된 것입니다. 좋은 소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성서와 종교에 대한 관심을 공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형제들은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것에 더해 회중 집회, 순회 대회, 지역 대회를 조직해야 했습니다. 또한 번역자들이 늘어 가는 작업량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시설이 필요했습니다.
한편 길르앗 선교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선교인 집으로 쓸 만한 장소를 구해야 했습니다. 선교인들의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거주 허가를 받는 데도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정부 관리들과 접촉하여 중립 문제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또한 왕국회관을 짓기 위해 건축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순회 감독자로 섬기고 있던 레이노 케스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신권적 기초를 놓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하느라 당시 몇 년간이 마치 몇 개월밖에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참으로 가슴 뭉클한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했고 신속히 받아들였습니다. 회중마다 침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어떤 관심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아직 잘 모르면서도 대회에 와서 연설을 듣고는 즉시 침례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소련의 지배를 받는 동안, 독일 지부 사무실에서 에스토니아의 전파 활동을 감독했습니다. 독일과 에스토니아가 연락을 주고받는 비밀 경로 중 하나는 핀란드 지부를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국경이 개방되고 자유롭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면서, 1992년부터 핀란드 지부가 에스토니아의 활동을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열심과 열의로 타오르다!
매우 많은 사람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침례 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고자 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톰 에두르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이 있는 날 아침에 한 새로운 작은 집단을 방문했는데, 야외 봉사에 나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매우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톰이 그곳에 있는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아시나요?”
“글쎄요, 전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어서요” 하고 형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톰은 야외 봉사를 위한 모임을 진행한 뒤 이렇게 광고했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나서 아직 전도인이 아닌 분들과 한 분씩 따로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약 열 명의 성서 연구생들이 톰에게 와서 자신들도 함께 나가 전파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톰이 침례 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자격 요건을 설명하자, 세 명의 젊은 여자가 자신들이 아직 교회에서 탈퇴하지 않았다고 시인했습니다. 톰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교회에서 탈퇴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그 말대로 했습니다! 세 사람은 즉시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로 가서 교회 성원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해 달라고 했으며, 그러고 나서 전파 활동에 합류했습니다.
그 야외 봉사 모임에 참석해 있던 한 남자는 아직 담배를 끊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생활을 깨끗하게 변화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그는 나중에 전도인이 될 희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정부의 제한을 받지 않고 전파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형제들은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증인들은 열정이 넘친 나머지 영적으로 균형을 잘 잡도록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일례로, 톰 에두르는 한 젊은 사람과 침례 문답을 하는 도중에 그에게 장로들로부터 조언을 받은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네, 장로들이 시간을 사용하는 면에서 조금 더 균형을 잘 잡으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하고 톰이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매달 150시간씩 야외 봉사를 했더니 다른 성경적 책임들에는 제대로 신경을 못 썼거든요. 장로들은 내가 야외 봉사에 100시간 정도만 바치면 개인 연구와 집회 준비를 위해 좀 더 시간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제안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열린 즐거운 대회
1992년 6월에 신권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세워졌습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국제 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이 대회에서 1000명의 에스토니아 대표자들 중 다수가 이전에 함께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 그리고 시베리아에 유배되어 있을 때 만났던 증인들과 감격스러운 재회를 했습니다.
한 대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회가 열린 시점은 우리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아주 저렴한 가격에 특별 열차를 빌렸고 러시아 루블로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대회가 열리기 불과 일주일 전, 에스토니아 정부는 자국 통화를 루블에서 에스토니아 크룬으로 바꾸었지요. 만약 통화가 바뀌는 그 주간에 에스토니아를 떠나 있었다면 가진 돈을 하나도 환전할 수 없었겠지만, 다행히 우리가 그때 에스토니아에 있었기 때문에 환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환전할 수 있는 돈의 액수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환전하지 못하고 남은 루블은 어떻게 했습니까? 러시아에서는 계속 루블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루블을 가져가서 대회 때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만약 대회가 일주일 늦게 열렸다면, 새롭게 바뀐 출입국 규정 때문에 비자를 받는 데 돈이 많이 들었을 겁니다. 대회가 정말 딱 알맞은 시점에 열린 것이지요!”
많은 사람이 이 역사적인 대회에 참석하여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한 관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에스토니아에서 증인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대회에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나는 출발 시간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역에 도착해 보니 기차가 벌써 출발했더군요. 차비는 이미 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난감했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서 대회에 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역장은 나에게 다른 열차를 타려면 기차표를 다시 사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그럴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모두 행복한 표정에 옷을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었지요! 그들은 사레마 섬에서 온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탈 기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 기차표로 그 기차를 타고 그들과 함께 갈 수 있었습니다.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요!
증인들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왕국 노래를 부르더군요.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나를 자신들의 영적 가족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대회 기간 내내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얼마나 진실하고 사랑 많은 사람들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증인들에 대해 갖고 있던 의구심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조직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된 겁니다.” 관심자였던 이 사람은 현재 남편과 함께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자원하는 일꾼들이 환영받다
전파 활동과 조직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신권 활동에 경험이 있는 형제들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이 증가하는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와 같은 이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이사야 6:8.
1992년, 에스토니아에 처음으로 길르앗 선교인이 도착했습니다. 베사 에드비그와 레에나마리아 에드비그, 에사 니시넨과 야엘 니시넨이었습니다. 캐나다에서 17년간 여행하는 봉사를 한 레이노 케스크와 레슬리 케스크도 에스토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1993년 봄에는 핀란드 출신의 파이오니아 20명이 에스토니아어와 러시아어 밭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으며, 네 명의 선교인이 더 왔습니다.
그 후로, 길르앗 학교에서는 한동안 매 학급마다 에스토니아로 선교인을 임명했으며, 그들은 가슴에 기쁨과 열정을 가득 품고 이곳에 왔습니다. 길르앗 출신이 아닌 몇몇 선교인들도 에스토니아에서 봉사하도록 임명을 받았습니다. 활기찬 선교인들과 열의가 가득한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충성스러운 에스토니아 형제 자매들이 수십 년간 닦아 놓은 튼튼한 기초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습니다.
그에 더하여, 200여 명의 외국 형제 자매들이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에스토니아로 왔습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이 사람들은 회중이 굳건해지고 안정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많은 회중들이 새로 생겨났으며, 그중 일부 회중에서는 현지 형제들이 발전하여 더 많은 책임을 맡을 수 있을 때까지 다른 나라에서 온 이 형제들이 유일한 장로로 섬겼습니다.
도움을 주기 위해 에스토니아에 온 형제들 가운데 렘비트 발야가 있었습니다.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살아남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증인이 되었습니다. 은퇴할 때가 되자 그는 1990년에 에스토니아로 돌아가서 많은 관심자들이 영적 갈증을 풀 수 있게 돕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당시에 에스토니아에서 봉사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에스토니아의 절반이 넘는 지역 여기저기에 있는 18개 그룹의 약 80명의 사람들과 연구를 하던 때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각 그룹과의 연구를 사회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했고, 침낭을 가지고 다니며 버스 정류장에서 밤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와 성서 연구를 한 사람들 중 50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으며, 그는 84세인 지금도 네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습니다. 발야 형제가 희생적으로 열심히 수고한 덕분에 훌륭한 결실이 맺어졌습니다. 그가 자주 방문했던 도시들 대부분에는 현재 잘 발전하는 회중과 왕국회관이 여러 개 있습니다.
형제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자원해서 이곳에 온 것은 그들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었습니다. 많은 형제들은 현지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 방식에 대해 알아 가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합니다. 레이노 케스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말 시야가 넓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각이 지구 전체를 보시는 여호와의 시각에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되지요.”
최초로 순회 감독자가 방문하다
성장이 빠르게 이루어지던 그 시기에, 회중들은 여행하는 감독자의 격려적인 방문을 받아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순회 감독자들은 맡은 임명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야외 봉사를 하고 모임에 참석하고 모임을 사회하고 형제들이 쏟아내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답하느라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일하곤 했습니다.
최초의 순회구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와 칼리닌그라드 전역을 포괄했습니다. 이 순회구에는 46개의 회중과 12개의 집단이 있었으며 사용하는 언어가 네 개나 되었습니다! 또한 순회 감독자는 시간이 많이 드는 다른 임명들도 수행해야 했는데,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서 법적 등록 절차를 밟는 일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현재는 에스토니아에만 네 개의 순회구가 있습니다.
라우리 노르들링그라는 현지 형제는 1995년에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던 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전도인들은 순회 방문 기간을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야외 봉사 모임에 가면 방에 사람들이 꽉 차 있는 경우가 많았지요. 한번은 작은 단칸방에 70명 정도 되는 형제 자매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공중에 사과를 하나 던지더라도 방바닥으로 떨어질 자리가 없을 정도였지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에 도전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는 일이며, 특히나 에스토니아어는 배우기 어려운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새로 온 선교인인 마르쿠 케툴라는 한 남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라후뷔르스트 즉 평화의 군왕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그만 라후보르스트 즉 평화의 소시지라고 몇 차례나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마르쿠가 성서를 펴서 이사야 9:6을 보여 주자, 의아해하던 집주인은 그제서야 진정한 평화의 근원이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파이오니아 자매는 에스토니아에 온 뒤로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봉사하다가 한 집의 문을 두드렸는데, 사실 그곳은 그 지역에 사는 한 장로의 집이었습니다. 이 자매는 집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손에 사전을 든 채 제공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집주인인 형제는 자신이 회중 장로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애썼습니다. 형제의 말을 듣고 자매가 재빨리 사전에서 “장로”를 찾으니 “노인”이라는 뜻이 보였습니다.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연세가 그렇게 많아 보이시지는 않는데요! 그리고 낙원이 되면 다시 젊어지실 거예요.” 형제가 집에 있는 신권 출판물을 보여 주었을 때에야 자매는 그가 노인이 아니라 장로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무신론자인 판사가 진리를 배우다
소련이 지배하던 시기에, 빅토르 센은 군 복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2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감옥에서 1년을 보낸 후에, 그는 자진해서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자유 정착민으로 살겠다는 청원을 냈습니다. 자유 정착민이 되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가석방 심리가 열렸을 때, 판사들은 그에게 분노를 표출했고 심지어 한 판사는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교수형이나 총살감이라고 말했습니다.
몇 년 후, 빅토르가 대회에 참석했는데 한 형제가 몇 명의 관심자들을 그에게 소개시켜 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아는 사람 없으세요?”
빅토르는 “없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요?” 하고 그 형제가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그중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한 남자를 가리키면서 물었습니다. “이 분도 모르시겠어요?”
하지만 빅토르는 여전히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남자가 빅토르의 가석방 심리에 참여한 배석 판사 중 한 명이었던 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빅토르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 그는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고 빅토르와 같은 대회에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위리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위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무신론을 강하게 믿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종교가 위험하다는 내용의 연설도 많이 했지요. 수년이 지난 후, 나는 친구들이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는 자리에 몇 번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종교들이 가르치는 거짓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아도 정작 성서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더 알아보려는 마음이 생겼지요.”
위리는 침례를 받고 나서 빅토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 법정에서 만났을 때는 우리가 서로 다른 쪽 좌석에 앉아 있었지요. 하지만 만일 비슷한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면, 우리가 같은 쪽 좌석에 앉게 되겠군요! 이제 내가 당신에게 선고를 내리는 사람이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현재 위리와 빅토르는 탈린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을 기념식
에스토니아에 온 지 얼마 안 된 한 형제가 파벨과 마르가리타라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는 서툰 에스토니아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원히 살고 싶으면 오늘 밤에 있을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꼭 와야 합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부부는 기념식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기념식에 참석한 파벨과 마르가리타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념식 중에 한 남자가 통로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들을 보며 무언가를 적는 것을 보고 약간 불안해졌습니다. 그가 참석자 수를 세는 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파벨과 마르가리타는 이곳에 온 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덩치 좋은 남자 두 명이 마치 문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선뜻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두 남자가 안내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채, 이 부부는 나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기념식 연설의 끝 부분에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무료 가정 성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연사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관심이 생겼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형제들이 와서 따뜻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하자 두려움이 누그러졌고, 부부는 성서 연구를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2주 후에 이사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 연구를 매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열의에 찬 그들은 새집으로 이사한 뒤에도 인근의 형제들에게 전화하여 자신들을 소개하고 성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훌륭한 행실의 목격 증인’
에스토니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 세계에 있는 그들의 형제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서로에 대해 사랑을 나타냅니다. (요한 13:35) 사람들은 그러한 사랑을 보고 참숭배에 이끌립니다.—베드로 첫째 2:12.
토이보는 이발을 하러 갔다가 이발사 자매에게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 책을 받았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나니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고 싶어졌지만, 증인들을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국회관 근처로 가서 안전하게 차 안에 있으면서 증인들을 관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집회를 보러 왕국회관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집회를 마치고 나올 때 그들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관찰하던 토이보는 자매들이 서로 따뜻하게 포옹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들이 서로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의욕이 생긴 그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빠르게 발전했고 이내 열정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침례 받은 증인입니다.
“여호와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1997년, 톳시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마리아는 「왕국 소식」 35호를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이 전도지를 읽고 나서 지부 사무실에 성서 연구를 요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얼마 후, 그는 페르누에 사는 선교인인 마르쿠 케툴라와 시르바 케툴라 부부와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연구한 지 얼마 안 되어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며느리인 잉그리드와 잉그리드의 이웃인 말레도 곧 연구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봉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자 장로들은 먼저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회중은 40킬로미터 떨어진 페르누에 있었고 그에게는 그곳까지 다닐 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선교인들의 격려에 힘입어 마리아는 여호와께 기도로 도움을 구했습니다.
선교인들이 다음번에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행복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마르쿠와 시르바는 “어떤 방법으로 기도를 들어주셨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신이 나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집에 사람들 몇 명을 모을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여기에서 집회를 열고 회중을 세울 수 있잖아요. 그럼 내가 집회에 참석하고 야외 봉사도 시작할 수 있지요.”
선교인들은 마리아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지만, 새로 회중을 형성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조심스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페르누에서 열리는 집회에 일단 일요일만이라도 참석해 볼 것을 권했습니다.
다시 한번 마리아는 집회 참석을 주제로 기도했습니다. 그에 더해 신문 구독을 취소하고 그 돈을 모으기로 결정했습니다. 곧 한 달에 네 번 집회에 참석할 수 있는 돈이 모아졌으며, 그는 전파 활동을 시작할 수 있어서 매우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축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로들은 톳시에서 관심자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서적 연구를 갖도록 마련했으며, 그래서 마리아와 잉그리드와 말레를 비롯한 관심자들이 이 집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 몇 개월 후에 마리아와 말레가 침례를 받았고 그 뒤 여름에는 잉그리드가 침례를 받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말레의 남편도 침례를 받았으며 그해 겨울에는 말레의 여동생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왕국 소식」 35호 덕분에 톳시라는 이 작은 마을에 진리가 들어오게 되었고 여호와께서는 이곳에 있는 잘 발전하는 작은 집단의 사람들이 드리는 많은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매우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지난 20년은 생산적인 왕국 활동을 수행하느라 분주하면서도 기쁨이 넘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정직한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조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의로운 성향을 가진 사람들 모두는 참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에게 가르침 받기 위해 과연 어디에서 모일 것입니까?
왕국회관이 절실히 필요하다!
최초의 모임 장소가 에스토니아 남부에 있는 라피나에 지어졌으며, 여러 해 동안 형제들은 이 장소를 잘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모임 장소를 짓기 위해 현지에서 기울이는 노력만으로는 빠르게 증가하는 전도인 수와 보조를 맞출 수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핀란드 지부의 설계 사무실이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발트 해 연안의 나라들을 위해 왕국회관과 사무실 시설들을 설계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참으로 기쁘게도 1993년에 마르두에 최초의 왕국회관이 세워졌으며 그 이래로 왕국회관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났습니다.
현재 에스토니아에는 53개의 회중과 33개의 왕국회관이 있습니다. 1998년에는 탈린과 타르투 두 곳에 대회 회관이 지어져서 형제들이 매우 기쁜 마음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여호와를 섬겨 온 알렉산드라 올레쉬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타르투에 왕국회관을 짓는 것이 우리의 꿈이었지요. 그래서 왕국회관을 지을 터를 깨끗이 정리하는 일을 도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때 일등으로 그곳에 갔습니다. 내 나이가 79세였는데도 말이죠! 나는 청소도 하고 물건을 나르기도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왕국회관이 지어지는 곳을 지날 때마다 기뻐서 눈물이 났어요. 회관이 완성되었을 때에도 또 울고 말았지요.”
새로운 번역 사무실
전도인들의 수가 계속 급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스토니아 전역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 더 큰 시설들이 있어야 했으며, 그중에서도 번역 팀을 위한 시설이 절실했습니다. 형제들은 적합해 보이는 장소를 찾아냈는데, 탈린의 헤르제니(지금의 푸항구) 가(街) 77번지에 있는 미완공된 공동 주택 건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건물은 전면적인 개조 공사가 필요했습니다.
공사를 진행하는 데 필요한 건축 설계 및 자재, 자금, 인력을 핀란드 지부에서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한 도움이 없었더라면 공사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현지의 건축 자재들은 질이 떨어지거나 아예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초기에는 에스토니아 형제들 중 소수만이 공사에 필요한 건축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현지의 형제들은 훈련을 받았고 더 많은 경험을 쌓게 되었습니다. 1994년 2월, 사무실 복합 건물의 첫 번째 부분이 완성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전국 위원회(토마스 에두르, 레이노 케스크, 렘비트 레일레)가 핀란드 지부의 감독 하에 발트 해 연안의 나라들을 섬기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공간이 더 많이 필요해지면서 1997년과 1999년에 이 복합 건물에 추가 시설이 지어졌습니다.
당시 이 건물에 인접해 있던 상수도 회사가 베델 정원의 설계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수도세를 감면받기로 하고 그 회사의 정원, 울타리, 조명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상수도 회사의 건물은 베델과 상당히 비슷해 보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회사는 그 건물을 매우 합리적인 가격으로 형제들에게 팔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여분의 공간은 수화 DVD를 비롯한 각종 DVD와 대회 드라마를 제작하는 스튜디오로 쓰입니다. 또한 이 건물의 일부는 개조하여 봉사 훈련 학교를 위한 장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탈린에서 열린 국제 대회
에스토니아의 형제 자매들은 “경건한 평화의 사자” 국제 대회가 1996년에 에스토니아에서 열리게 된다는 말을 듣고 참으로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8월에 탈린에서 사흘간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국제 대회가 두 번 열렸으며, 에스토니아어를 사용하는 대표자들과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대표자들 및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이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밖에도 15개 나라에서 대표자들이 왔습니다. 통치체 성원인 바버, 슈로더, 시들릭, 재라스, 헨첼 형제가 참석하여 격려적인 연설로 형제들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이 대회의 최고 참석자 수는 1만 1311명이었으며 새로 헌신한 501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대회는 훌륭한 증거가 되었으며 언론으로부터 대단히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 TV 토크 쇼에서는 10분짜리 인터뷰를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한 라디오 방송국의 소유주가 방송한 프로그램에서는 증인들이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각 대회가 끝나고 대표자들이 작별 인사를 할 때 따뜻한 형제 사랑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이 흘린 기쁨의 눈물 그리고 그들이 흔들던 손과 손수건의 물결이 여호와의 참숭배자들의 마음속 깊은 감정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마치는 기도를 한 뒤, 청중 모두는 그칠 줄 모르는 박수로 하늘에 계신 가장 관대하고 사랑 많은 우리 아버지 여호와께 깊은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이 대회들은 에스토니아의 여호와의 증인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다시 지부가 생기다
1926년에서 1940년까지는 탈린에 지부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그 후 1994년부터 핀란드 지부의 감독하에 에스토니아에서 전국 사무실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래로 많은 일이 수행되었고 사람들은 에스토니아에도 자체 지부 사무실이 다시 생길 것인지 궁금해했습니다. 1999년 3월 1일에 통치체가 토마스 에두르, 레이노 케스크(지금은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섬기고 있음), 렘비트 레일레, 토미 카우코를 에스토니아의 지부 위원으로 임명하면서 그러한 궁금증이 해결되었습니다. 현재 에스토니아에는 4300명의 충성스러운 종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 약 50명이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맞이함
에스토니아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의 미래는 어떠합니까?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의 충실한 종들에게 인도와 힘을 베풀어 오셨습니다. 나치와 소련의 박해 가운데 충절을 지킨 에스토니아의 형제 자매들은 독특하면서도 잊지 못할 방법으로 여호와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구소련에 속한 공화국들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여호와의 위대한 이름이 알려지고 거룩해진 것에 대해 전 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다.—말라기 1:11.
에스토니아에는 참하느님에 대해 알기 원하는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습니다. 에스토니아의 여호와의 증인은 현재 누리는 종교적 자유를 활용하여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여호와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각주]
a 그의 체험기가 「파수대」(영문) 1963년 6월 15일호 373-376면에 실려 있다.
b 「2002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157면에는 형벌의 종류와 감옥과 수용소에서의 생활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c 에두르 형제가 하키 선수 생활을 포기하게 된 경위와 이유를 설명한 체험기가 「깨어라!」(영문) 1986년 2월 22일호에 실려 있다.
[172면 삽입]
“필수품이 부족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204면 삽입]
“격리 수감되는 것은 좋은 일이었어요”
[168면 네모]
에스토니아 개요
국토
인구 밀도가 낮은 에스토니아는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나라이다. 이 나라에는 키가 크고 빽빽한 숲, 사람이 살 수 없는 습지들, 1400개 이상의 호수, 약 7000개에 이르는 시내와 강이 있다. 1500개가 넘는 섬들이 에스토니아 국토의 10퍼센트가량을 차지한다. 국토의 대부분은 지형이 평탄하여 해발 50미터를 넘지 않는다. 남동부 지방은 완만한 기복을 이루는 지형으로 경치가 아름답다.
주민
인구의 68퍼센트는 에스토니아인이고, 26퍼센트가 러시아인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핀란드인이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루터교나 정교회 또는 그 밖의 그리스도교를 믿으며 이슬람교,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상당수는 종교가 없거나 특정 종교인으로 자처하지 않는다.
언어
공식 언어인 에스토니아어는 핀란드어 및 헝가리어와 같은 언어 그룹에 속해 있다.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식품
레이브(검은 빵)와 감자, 절인 호박, 비트 샐러드, 사우어크라우트를 즐겨 먹는다. 쥘트(송아지 고기를 젤리처럼 응고시킨 요리), 로솔리에(청어와 비트로 만든 요리), 야생 버섯 수프, 돼지고기, 생선, 훈제 고기가 유명하다. 후식으로는 건포도와 견과류를 뿌린 달콤한 빵인 크링겔이나 팬케이크 등을 먹는다.
기후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비교적 온화하다. 여름에 낮이 가장 긴 날에는 해가 19시간 동안 떠 있고, 겨울에 낮이 가장 짧은 날에는 해가 6시간만 떠 있다. 여름에는 남서부 해안 지역처럼 훈훈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곳이 있는 반면, 겨울에는 섭씨 영하 20도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183, 184면 네모와 삽화]
“우리는 마치 한가족 같았습니다”
아돌프 코세
출생 1920년
침례 1944년
사망 2004년
소개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시베리아의 수용소에 있었다. 발트 해 연안의 나라들과 소련 북서부 지역의 전파 활동을 조직하는 일을 도왔다.
■ 아돌프는 지나간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1950년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의 인타에 있는 중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아내와 어린 두 딸은 시베리아의 다른 곳으로 유배되었고, 1년 반 동안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어요.
수용소에서 형제들은 특별한 유대감으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치 한가족 같았습니다. 영적 양식과 육적 양식 모두를 나누어 먹었지요.
에스토니아로 돌아온 후에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머니’ 즉 우리의 조직과 연락을 취할 것입니까? 어떻게 형제들 사이에 연합을 유지할 것입니까? 전파 활동은 어떻게 계속해 나갈 것입니까?
나는 연락원들과 의사소통을 더 잘하기 위해 핀란드어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중에 문법책이나 사전이 없어서 생각처럼 쉽지는 않더군요.
당시에는 등록되지 않은 타자기를 갖고 있기만 해도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인쇄 장비를 갖춘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금지된 출판물을 인쇄하는 사람은 7년 형을 받을 수 있었지요. 게다가 인쇄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 마침내 인쇄 기술을 개발해 냈습니다. 우선 인쇄기(아래)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직접 천에 밀랍을 입힌 다음 그 위에 타자를 쳐서 밀랍 표면에 홈이 파이게 했습니다. 처음에 출판물을 인쇄할 때는 검댕과 타르를 섞어 만든 잉크를 사용했지요. 천 아래에 종이를 깔아 두고 우리가 만든 잉크를 넣으면 밀랍에 파여 있는 홈으로 잉크가 흘러 들어가 종이에 자국을 남겼습니다. 이 일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었고, 잉크와 다른 화학 약품들에서 나오는 유해 가스 때문에 작업하는 사람의 건강을 해칠 수 있었지요. 창문을 완전히 가린 채 비밀리에 작업을 했기 때문에 제대로 환기를 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돌프는 여호와께서 알맞은 때에 해결책을 주실 것이라고 늘 확신하면서 조직의 지시를 두려움 없이 따랐습니다. 그는 2004년에 사망하기까지 그러한 태도와 믿음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면서 계속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186면 네모와 삽화]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1949년 6월, 에스토니아의 책임 맡은 형제들은 용감하게도 모스크바의 정부 관리들 앞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한 통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다른 한 통은 소련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인 니콜라이 슈베르니크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편지에는 수감되어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즉각 석방시키고 증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를 자유롭게 섬기도록 허락해 주기를 거부했던 것에서 유사점을 이끌어 내면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탈출 5:1-4) 형제들은 담대하게 이렇게 썼습니다. “여호와 하느님의 조직은 여호와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소련의 모든 주민에게 방해받지 않고 전파할 수 있도록 마땅히 허락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소련과 공산당을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아돌프 코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것이 꽤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탈린에서 편지를 보내면 추적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려고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편지를 부쳤습니다.”
스탈린이 직접 그 편지를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편지가 주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심문을 받던 중에 그 편지의 사본을 볼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 조직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오래지 않아 더 많은 형제들이 체포되었고 박해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후에, 슈베르니크에게 보낸 편지가 국가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편지에는 정부의 직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189면 네모와 삽화]
KGB의 활동과 우리의 조직
1940년대 말, 비밀경찰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 KGB에 전달할 정보를 얻어 냈습니다. 탈린에 있는 정부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된 아래의 도표를 보면 KGB가 상당히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에는 봉사 위원회를 구성하던 형제들과 에스토니아의 주요 도시에서 활동을 감독하던 형제들 그리고 인쇄 작업에 관련된 형제들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191면 네모와 삽화]
반대자들은 결코 그를 잠잠하게 만들 수 없었다
엘라 툼
출생 1926년
침례 1946년
소개 총 13년의 투옥형을 선고받았으며, 5년 6개월간 복역한 후 풀려났다.
■ 엘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국은 나를 3일간 독방에 감금하여 믿음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정부에 대해 전파하지 못하게 하고 나 스스로도 그것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관리들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에스토니아에서 기억조차 나지 않게 해 버리겠다! 너는 수용소로 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시베리아로 보낼 거야!’ 그들은 또한 ‘너의 여호와는 어디에 있는 거냐?’라며 조롱했습니다. 나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버리고 집에서 사는 것보다 하느님과 함께 수용소에 있는 편이 더 나았지요. 수용소에서도 갇혀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새로운 구역에서 전파하도록 여호와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라고 언제나 생각했습니다.
한 수용소에서는 관심자 한 명과 함께 매일 산책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산책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날은 내가 전파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몇몇 광신자들이 나를 강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날이었습니다.” 반대자들은 결코 엘라를 잠잠하게 만들 수 없었으며, 그는 지금도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면서 여호와를 충실히 섬기고 있습니다.d
[각주]
d 엘라 툼의 체험기는 「깨어라!」 2006년 4월호 20-24면에서 읽어 볼 수 있다.
[193, 194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렘비트 툼
출생 1924년
침례 1944년
소개 독일 점령기에 에스토니아에 있었으며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시베리아 노동 수용소에 있었다.
■ 당시 수많은 여호와의 증인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징집되기를 거부하여 숨어 지냈는데, 렘비트도 그러한 젊은이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날 밤, 경찰들이 렘비트가 머물고 있던 집을 급습했습니다. 그 농장에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 숨어 있다는 제보를 받았던 것입니다. 렘비트는 재빨리 자기 침구를 숨기고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그의 머리 바로 위에서 군화를 신은 경찰들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경찰들은 농장 주인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소리쳤습니다. “이 집에 숨어 있는 자가 있소. 어떻게 하면 마루 밑으로 들어갈 수 있나?” 농장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찰관이 고함을 질렀습니다. “거기 숨어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마루 밑에 수류탄을 던지겠다!”
그런 다음 그들이 렘비트를 찾으려고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이 보였습니다. 이제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렘비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받은 정신적 압박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나는 기어서 다른 곳으로 몸을 옮겨 마루 밑에서 나갈 태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조용히 누웠습니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몇 분이 흘렀고 마침내 경찰들이 떠났습니다. 렘비트는 그들이 다시 돌아올까 봐 한 시간가량 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이 트기 전에 그 집에서 나와 숨을 만한 다른 장소를 찾으러 갔습니다.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자 렘비트는 또 다른 시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10년 형을 선고받아 에스토니아에서 800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시베리아의 노릴스크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곳 니켈 광산의 노천 채굴장에서 힘든 일을 하게 되었지요. 수용소의 생활환경은 매우 형편없었고 작업은 극도로 고되었습니다. 소련의 북부에서도 북극권 위쪽에 있는 지방에서는 겨울을 나기가 몹시 힘듭니다. 기온이 섭씨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며 때로는 그보다 더 내려가기도 하지요. 게다가 두 달 동안 태양이 지평선 위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렘비트는 5년간 강제 노동을 한 후 풀려났으며 1957년에 엘라 키카스와 결혼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출판물을 번역하고 인쇄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렘비트는 언제라도 성경을 사용해 동료 종들을 격려해 줄 수 있는 동정심 많고 마음이 따뜻한 장로로 알려져 있습니다.e
[각주]
e 렘비트 툼의 체험기는 「깨어라!」 1999년 2월 22일호 10-16면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삽화]
렘비트 툼과 엘라 툼
[199면 네모와 삽화]
“네 엄마란다”
카린 레일레
출생 1950년
침례 1965년
소개 감옥에서 태어났으며, 엄마와 떨어지게 되었고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 카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어머니인 마이무 실드(트렐)는 정치 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내가 태어났지요. 허약한 아기였던 나는 감방의 추위 때문에 양쪽 폐가 모두 폐렴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다른 수감자가 도와준 덕분에 살 수 있었지요. 그 수감자는 라이네 프룀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도 나중에 진리를 배웠습니다.
당시에는 재소자의 아기들이 부모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소련 여기저기에 있는 고아원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지요. 하지만 나는 다행히도 외할머니에게 보내졌습니다. 어머니는 모르드비니아에 있는 수용소로 이감되었으며 거기서 용감한 엘라 툼 자매를 만났어요. 그리고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그곳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로 5년 동안 외할머니께서 나를 키우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낯선 여자가 우리 집에 찾아왔지요. ‘네 엄마란다’ 하고 외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그런 감정을 극복하기까지 수년이 걸렸습니다.” 기쁘게도 카린과 외할머니 역시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후에 카린은 영어를 배워서 우리의 출판물을 번역하는 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렘비트 레일레와 결혼하여 현재 에스토니아 지부에서 함께 봉사하고 있습니다.
[201면 네모와 삽화]
에스토니아어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
일찍이 1686년에 그리스어 성경이 에스토니아 남부 방언으로 번역되었고, 1715년에 북부 방언으로도 번역되었습니다. 1739년에는 완역 성서 즉 피블리 라마트가 발행되어 일반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성서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나오는 곳마다 여호와라는 그분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습은 수세기 동안 이어졌습니다. 1988년판 에스토니아어 성서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히브리어 성경에 6867회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토니아인 중에는 하느님의 이름 여호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009년 7월 3일, 에스토니아 타르투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지역 대회에서 기념비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이날, 통치체 성원인 가이 피어스가 에스토니아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을 발표했습니다.
[202면 네모와 삽화]
손으로 만든 책
헬미 레에크
출생 1908년
침례 1945년
사망 1998년
소개 투옥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 헬미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습니다. 시베리아에 있는 동안 그는 공책을 넣을 작은 주머니를 만들었는데 겉에는 위로가 되는 성구를 수놓았습니다. 그 성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는 로마 8:35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겠습니까? 환난이나 고난이나 박해나 굶주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겠습니까?”
헬미는 누런 종이 몇 장을 찾아서 그것으로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성서에 근거한 격려적인 내용들을 적었습니다. 당시 구할 수 있는 인쇄된 출판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형제들은 출판물을 구하게 되면 전체를 손으로 베껴 적었습니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후, 헬미는 관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시베리아로 보내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시베리아의 아름다운 산들을 볼 수 있었어요. 내 형편으로 그렇게 멀리 여행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지요!”
[209, 210면 네모와 삽화]
희생정신을 나타낸 사람
파니 히에달라
출생 1900년
침례 1925년
사망 1995년
소개 1930년에 에스토니아로 이주하여 파이오니아로 봉사했으며 한 증인 고아를 입양했다.
■ 파니는 1925년에 핀란드에서 침례를 받았고 2년 후에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헬싱키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했을 때, 북유럽 사무소의 감독자인 윌리엄 데이를 만났습니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데이 형제는 “에스토니아”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파니는 그 형제가 더 크게 필요한 곳으로 이주하도록 격려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1930년에 다른 몇몇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에스토니아로 이주했습니다. 뒤이은 수년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사레마 섬을 비롯하여 에스토니아의 여러 지역들에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파니는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에스테르라는 한 고아 소녀를 입양했습니다. 에스테르의 어머니와 증인인 아버지는 그가 여덟 살 때 사망했습니다. 파니는 사랑으로 그를 돌보았고 에스테르는 자라서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에스토니아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파니는 핀란드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희생 정신을 나타내어 에스토니아에 있는 소수의 전도인들과 함께 머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로 인해 파니는 많은 어려움과 열악한 생활환경을 견뎌 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핀란드 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에 시베리아로 유배되지는 않았습니다.
파니는 1950년대에 마이크로필름과 서신을 핀란드에서 에스토니아로 전달하는 연락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용감하고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아슬아슬한 상황이 몇 번 있긴 했지만 한번도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경우를 예로 들면, 파니는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어떤 공원으로 가서 핀란드에서 온 연락원 형제를 만나 마이크로필름 꾸러미 하나를 건네받았습니다. 이제 그 꾸러미를 가능한 한 신속히 두 명의 에스토니아 형제에게 전해 주어야 했습니다. 한편, 에스토니아 형제들은 비밀경찰이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파니의 눈에 띄지 않게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정면에서 파니와 그 핀란드 형제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파니가 그들에게 인사를 하거나 꾸러미를 건네준다면 그들의 관계가 비밀경찰에게 발각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파니는 그들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그냥 지나쳐 가 버렸습니다. 알고 보니 파니는 그들을 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두 형제와 매우 잘 아는 사이였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비밀경찰은 연락원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고 꾸러미는 나중에 안전하게 전달되었습니다. 파니가 연락원으로 일해 준 덕분에 영적 양식은 끊기지 않고 공급될 수 있었으며, 마이크로필름을 전달하다가 발각되는 일은 다행히 한번도 없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파니 히에달라 자매는 95세를 일기로 사망하기까지 에스토니아에 머물면서 70년간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삽화]
레닌그라드에서 연락원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1966년
[213면 네모와 삽화]
중상의 표적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여러분을 모욕하고 박해하고 여러분에 대하여 거짓으로 온갖 악한 것을 말할 때에,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마태 5:11) 주 예수의 이러한 말씀처럼, 여호와의 증인은 종종 악의적인 중상의 표적이 됩니다. 에스토니아의 증인들은 반정부 활동과 간첩 행위를 하는 정치 단체라는 거짓 비난을 받았습니다. 특히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몇몇 신문에서는 우리가 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활동하며 미국의 부유한 자본가들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베르 실리크사르는 1964년에 군 복무를 거부한 뒤 조국을 배신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투옥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의 재판에 관한 짧은 영화도 제작되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과장된 선전이 가미된 이 영화는 에스토니아 전역의 모든 극장에서 상영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거부한 형제들 대부분이 2년 내지 3년간 수감되었습니다. 위리 쇤베르그, 타아비 쿠우스크, 아르투르 미키트는 각기 두 번씩 투옥되었으며, 미키트 형제는 총 5년 반 동안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삽화]
믿음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실베르 실리크사르
[226면 네모]
금지령하에 열린 신권 전도 학교
금지령 아래에서 형제들은 자신들이 가진 출판물은 물론이고 성서마저도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출판물을 숨길 만한 다양한 장소를 마련하는 한편, 가능한 한 많은 성구를 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대부분의 사교 모임은 함께 성서를 토의하고 성구를 외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쉽게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작은 카드들을 만들어 그러한 모임에서 사용했습니다. 카드의 앞면에는 마태 24:14과 같이 성구의 장과 절을 쓰거나, 질문이나 성서에 나오는 명칭을 썼습니다. 뒷면에는 해당 성구의 내용이나 질문에 대한 답을 썼습니다.
형제들은 구할 수 있는 영적 출판물이라면 무엇이든 사용해서 집회를 사회했습니다. 신권 전도 학교를 예로 들면, 학생들은 매주 수업에 참석하고 숙제를 받았으며 구두시험과 정규 시험까지 보았습니다. 3개월마다 복습 시험이 있었고 매년 봄에 기말 시험이 있었습니다.
한 학생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매주 받는 숙제 중 하나는 성구 다섯 개를 외워서 다음 수업 시간에 암송하는 것이었습니다. 1988년 기말 시험이 생각나는군요. 시험 문제가 적힌 카드 중에는 ‘성구 100개를 암송하시오’라는 말만 쓰여 있는 카드도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모두가 그 카드를 뽑고 싶어 했지요. 성서를 드러내 놓고 사용하기가 아주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숙제들은 전파 활동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90년, 에스토니아의 회중들은 드디어 전 세계의 형제들과 같은 방식으로 신권 전도 학교를 열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뻐했습니다.
[236, 237면 네모와 삽화]
“야외 봉사가 정말 즐거웠습니다”
에스토니아에서 봉사한 선교인들 몇 명이 자신들이 느낀 점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르쿠 케툴라와 시르바 케툴라: “우리가 임명된 구역은 전에 전파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야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성서에 매우 많은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봉사가 정말 재미있었지요. 우리가 처음 페르누에 왔을 때에는 전도인이 30명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이제는 세 개의 회중이 있습니다.”
베사 에드비그와 레에나마리아 에드비그: “상점에 물건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쇼핑을 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성서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지요. 가두 봉사를 할 때면 사람들이 우리 출판물을 받으려고 줄을 서곤 했습니다!”
에사 니시넨과 야엘 니시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요. 극심한 시험에 직면해서도 충실을 유지했던 많은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은 정말 큰 축복입니다.”
안네 레이노넨과 일카 레이노넨: “오늘도 내일도, 언제 어느 구역을 가더라도, 성서의 소식을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꼭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봉사하곤 했지요. 왕국 활동이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20세기 말에 그러한 증가가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정말 꿈만 같았어요. 우리는 초창기 그 시절을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리처드 얼건스와 레이철 얼건스: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를 환대해 주었으며, 야외 봉사가 정말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페이푸스 호 주변에 있는 마을들에서 봉사했습니다. 집주인들이 우리를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곤 했기 때문에 먹을 것을 챙겨 다닐 필요가 없었지요. 마태 10:9, 10에 나오는 예수의 교훈이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에스토니아에 있는 동안, 우리는 더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덜 중요한 것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삽화]
마르쿠 케툴라와 시르바 케툴라
베사 에드비그와 레에나마리아 에드비그
안네 레이노넨과 일카 레이노넨
에사 니시넨과 야엘 니시넨
리처드 얼건스와 레이철 얼건스
[244, 245면 도표와 삽화]
연대표—에스토니아
1920
1923 마르틴 코세가 전파하기 위해 에스토니아로 돌아오다.
1926 탈린에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다.
외국인 콜포처들이 전파 활동을 돕기 위해 도착하다.
1928 첫 대회가 지부 사무실에서 열리다.
1930
1933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등록되다.
1940
1940 에스토니아의 형제들이 자유 가운데 대회를 즐기다. (그 후 50년간 자유롭게 대회를 열 수 없었다.)
1948 일부 증인들이 소련에 있는 감옥과 수용소에 수감되다.
1949 증인들이 스탈린에게 항의 편지를 쓰다.
1950
1951 약 300명의 증인들과 그들의 친척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배되다.
1953 스탈린이 사망하고, 증인들이 석방되기 시작하다.
1960
1970
1972 최초의 러시아어 회중이 형성되다.
1980
1990
1991 번역 사무실을 타르투로 옮기다.
여호와의 증인에게 종교적 자유가 주어지다.
소련 최초의 지역 대회가 탈린에서 개최되다.
1992 최초의 길르앗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93 에스토니아 최초의 왕국회관이 건축되다.
1994 탈린에 번역 사무실이 개설되다.
1998 탈린과 타르투에 대회 회관이 건축되다.
1999 에스토니아에 다시 지부가 생기다.
2000
2000 봉사 훈련 학교의 첫 학급이 열리다.
2009 에스토니아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발표되다.
2010
[246면 그래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4,000
2,000
1990 2000 2010
[169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핀란드
헬싱키
핀란드 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라트비아
리가
에스토니아
탈린
나르바
마르두
타파
보름시
페르누
뵈르트시에르브 호
타르투
라피나
뵈루
히우마
사레마
리가 만
페이푸스 호
프스코프 호
[162면 전면 삽화]
[165면 삽화]
후고 코세와 마르틴 코세
[166면 삽화]
앨버트 웨스트
[167면 삽화]
알렉산더 브라이드슨과 힐다 브라이드슨, 1930년대
[167면 삽화]
이 아파트 건물에 최초의 지부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170면 삽화]
핀란드에서 온 초기의 파이오니아들, 옌니 펠트와 이르야 메켈레
[174면 삽화]
1932년에 지부는 탈린의 수르타르투 로(路) 72번지로 이전했습니다
[175면 삽화]
라디오 강연을 하고 있는 카를로 하르테바
[177면 삽화]
존 노스와 그의 “전차”
[178면 삽화]
니콜라이 투이만
[179면 삽화]
경찰이 많은 양의 출판물을 압수했습니다
[181면 삽화]
1940년: 소련의 지배를 받기 전 자유로운 기간에 열린 마지막 대회
[188면 삽화]
봉사 위원회를 구성한 크루우스, 탈베르그, 인두스, 툼 형제
[200면 삽화]
마이무 트렐과 렘비트 트렐, 1957년
[212면 삽화]
에네와 언니인 코린나
[218면 삽화]
헤이마르 투이만과 엘비 투이만의 결혼식 때 이틀간 대회가 열렸습니다
[227면 삽화]
토마스 에두르와 엘리자베스 에두르
[228, 229면 삽화]
주목할 만한 대회들
1990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순결한 언어” 지역 대회에 온 대표자들을 환영하는 모습
1991년,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열린 “자유 애호자” 지역 대회
[238면 삽화]
199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 대회
[241면 삽화]
라우리 노르들링그와 옐레나 노르들링그
[243면 삽화]
레이노 케스크와 레슬리 케스크
[247면 삽화]
위리와 빅토르
[251면 삽화]
마르두 왕국회관과 타르투 대회 회관
[254면 삽화]
에스토니아 지부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토미 카우코, 토마스 에두르, 렘비트 레일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