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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레 제2장 」 14-31면
  • “말일”에 하느님을 섬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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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일”에 하느님을 섬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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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
예레 제2장 」 14-31면

제2장

“말일”에 하느님을 섬긴 사람

1, 2. (ㄱ) 예레미야가 본 환상에는 그가 선포하게 될 예언의 핵심이 어떻게 드러나 있습니까? (ㄴ) 우리가 예레미야의 소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네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 하느님께서 이제 막 예언자가 된 예레미야에게 물으셨습니다. 그 젊은 예언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가리 넓은 솥에 바람이 가해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 아가리가 북쪽을 등지고 있습니다.” 이 환상은 예레미야가 앞으로 어떤 선언을 하게 될 것인지를 예고해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1:13-16 낭독) 비유적인 솥에 가해진 바람은 솥을 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타고 있는 불을 더 세게 지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에 만연한 불충실 때문에 펄펄 끓는 액체 같은 고난이 이 솥에서부터 유다 땅으로 쏟아질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솥 아가리가 남쪽으로 기울여져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말은 고난이 북쪽에서 올 것이라는, 다시 말해 바빌론이 북쪽에서 쳐들어올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여러 해 동안 예언자로 활동하면서 이 펄펄 끓는 솥에서 고난이 연달아 쏟아져 나오다가 결국 절정에 이르러 예루살렘이 멸망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2 이제 바빌론은 사라지고 없지만, 우리도 예레미야의 예언적 소식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말일”에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과 그들의 교회는 하느님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3:20) 반면에 우리는 동료 증인들과 함께 예레미야처럼 심판과 희망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14면 삽화

3. (ㄱ) 예레미야서의 내용은 어떻게 배열되어 있습니까? (ㄴ) 이 장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3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한 소식과 여러 사건을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언자로 활동한 후기에 가서야 비서에게 받아 적게 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25:1-3; 36:1, 4, 32) 그가 예레미야서의 여러 부분을 주제별로 배열했기 때문에 이 책은 연대순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서와 애가서의 역사적 배경과 사건이 일어난 순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9면에 있는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각 시기별로 유다의 왕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특정한 때에 유다와 그 주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면 예레미야의 말이나 행동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자신의 백성에게 선포한 소식으로부터 더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시대적 배경

4-6.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활동하기 전 수십 년 동안 하느님의 백성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4 예레미야는 변화가 많았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당시에는 아시리아와 바빌론과 이집트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을 시작하기 약 93년 전에, 아시리아는 북쪽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 많은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과 충실한 왕 히스기야를 아시리아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주셨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기적으로 적군 18만 5000명을 죽이신 일을 당신도 기억할 것입니다. (열왕 둘째 19:32-36) 그 후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55년간 다스린 므낫세의 통치 중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 기간에 유다는 정치적으로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역대 둘째 33:10, 11.

5 예레미야는 열왕기 첫째와 둘째 책도 썼는데, 열왕기 둘째를 보면 므낫세가 자기 아버지가 없애 버린 산당들을 다시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므낫세는 바알과 하늘의 군대를 위해 제단을 세웠는데, 심지어 여호와의 성전 안에도 세웠습니다. 그는 무고한 사람의 피를 많이 흘렸고, 자기 아들을 거짓 신에게 번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여호와의 눈에 악한 일을 큰 규모로 행하였습니다.” 그 모든 악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마리아와 이스라엘에 재앙이 닥쳤던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다에도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열왕 둘째 21:1-6, 12-16) 므낫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아몬도 아버지처럼 우상 숭배를 계속했지만, 얼마 안 있어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2년 후에 아몬이 살해되자 기원전 659년에 그의 아들 요시야가 여덟 살의 나이로 왕좌에 올랐던 것입니다.

6 요시야가 31년간 통치하는 동안, 바빌론의 세력이 아시리아보다 강해졌습니다. 요시야는 그러한 상황이 유다를 다시 한 번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시야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와는 달리 여호와를 충실히 섬겼고 대규모 종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열왕 둘째 21:19–22:2) 요시야는 통치 제12년에 자신의 왕국 전역에서 산당과 신성한 목상과 거짓 종교의 형상을 없앴으며 그 후 여호와의 성전을 보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역대 둘째 34:1-8 낭독) 흥미롭게도, 예레미야는 요시야 통치 제13년(기원전 647년)에 하느님의 예언자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신이 예레미야 시대에 예언자였다면 어떤 느낌이었을 것 같습니까?

7, 8. (ㄱ) 요시야 왕의 통치는 그보다 앞서 다스린 므낫세와 아몬과 어떻게 달랐습니까? (ㄴ) 요시야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20면 참조)

7 선한 왕 요시야의 통치 제18년에 성전 보수 작업을 하는 동안 대제사장이 “율법 책”을 발견했습니다. 왕은 비서관에게 그 책을 읽게 했습니다. 요시야는 백성의 잘못을 인식하고 여예언자 훌다를 통해 여호와의 인도를 구했으며 백성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촉구했습니다. 훌다는 여호와께서 유다 사람들의 불충실로 인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요시야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가 순결한 숭배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생애 중에는 재앙이 닥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열왕 둘째 22:8, 14-20.

19면 도표

8 요시야 왕은 우상 숭배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다시 한 번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때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였던 곳까지 가서 베델에 있는 산당과 제단을 무너뜨렸습니다. 또한 그는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열왕 둘째 23:4-25) 이 모든 일로 인해 예레미야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움직여 행로를 바꾸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므낫세와 아몬은 그 나라에 타락한 우상 숭배를 들여왔으며, 따라서 백성은 영적으로 피폐해 있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사람의 신들이 유다의 도시만큼이나 많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동족은 불충실한 아내와 같았습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타국 신들과 매춘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거리만큼이나 많은 제단을 너희가 수치스러운 것을 위해 세웠으니, 곧 바알에게 희생의 연기를 올리는 제단이다.”—예레미야 11:1-3, 13 낭독.

9. 요시야 통치 말년에 국제 정세는 어떠했습니까?

9 예레미야가 그러한 소식을 전해도 유다 사람들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주변 국가들이 패권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상황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632년에 바빌론과 메디아의 연합군이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를 정복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에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는 곤경에 처한 아시리아군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했습니다. 성서에 나오지 않는 어떤 이유로인가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이집트 군대를 저지하려고 하다가 치명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역대 둘째 35:20-24) 이 안타까운 일로 인해 유다에는 어떤 정치적·종교적 변화가 있었습니까? 예레미야는 어떤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까?

종교적 분위기가 바뀌다

10. (ㄱ) 요시야가 사망한 이후의 상황은 어떤 면에서 우리 시대와 비슷합니까? (ㄴ) 예레미야의 행실을 살펴보면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10 요시야가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슬픔에 잠겨 요시야 왕을 위한 비가를 읊었습니다. (역대 둘째 35:25)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으며, 유다는 불안한 국제 정세로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이 그 지역을 장악하려고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시야가 사망하자 유다의 종교적 분위기도 변했습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예레미야의 활동에 전반적으로 호의적이던 정권이 끝나고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선 것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현대에도 많은 형제들은 어느 정도 숭배의 자유를 누리다가 금지령 아래서 박해를 받게 되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와 같은 일을 겪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까? 충절을 지키다 보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염두에 두고 예레미야가 어떻게 어려움에 성공적으로 대처했는지 살펴본다면 격려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요시야—유다의 마지막 선한 왕

20면 삽화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이 죽자 여덟 살의 나이에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15세 때 하느님을 찾고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19세 때에는 유다와 이스라엘에서 거짓 숭배에 사용되는 장소와 우상들을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5세 때에는 여호와의 성전을 보수하기 시작했습니다.—열왕 둘째 21:19–22:2; 역대 둘째 34:2-8.

성전 보수 중에 율법 책(아마도 모세가 쓴 원본이었을 것임)이 발견되었고 요시야는 그 책이 낭독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고 자기 옷을 찢고 울었습니다. 요시야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큰 자든 작은 자든 모든 백성에게 그 책을 읽어 주도록 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여호와를 따라가며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을 ··· 지키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후 요시야는 거짓 숭배를 없애기 위해 더욱 광범위한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또한 사무엘 시대 이후로 유례가 없었던 규모로 여호와를 위한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켰습니다.—역대 둘째 34:14–35:19.

11. 요시야 왕이 죽은 후 유다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11 유다 주민들은 예루살렘에서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살룸이라고도 하는 여호아하스는 3개월밖에 통치하지 못했습니다. 파라오 느고가 바빌론 사람들과 전쟁을 벌인 후 남쪽으로 돌아가면서 그 새로운 왕을 폐위하고 이집트로 잡아갔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아하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레미야 22:10-12; 역대 둘째 36:1-4) 대신에 느고는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여호야김은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개혁을 이어가기는커녕 우상 숭배에 빠져 들었습니다.—열왕 둘째 23:36, 37 낭독.

12, 13. (ㄱ) 여호야김이 통치하기 시작했을 무렵, 당시의 종교적인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ㄴ)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레미야를 어떻게 대했습니까?

12 여호야김이 통치를 시작하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성전으로 가서 악한 유다 사람들을 엄히 정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성전이 부적과도 같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 맹세하고 바알에게 희생의 연기를 올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걷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성전을 버리실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엘리 시대에 실로의 장막을 버리셨던 것처럼 성전에서 숭배하는 위선자들도 버리실 것이었습니다. 유다 땅은 “한낱 황폐한 곳이 될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7:1-15, 34; 26:1-6)a 예레미야가 그러한 소식을 전하려면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그는 탁월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소식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오늘날 일부 형제 자매들은 가두 증거를 하거나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도 반드시 지원해 주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히브리 10:39; 13:6.

22면 삽화

13 유다의 그러한 종교적·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레미야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예레미야가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모든 백성이 [나]를 붙잡고 말하였다.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이 사람에게는 사형 판결이 마땅합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예레미야 26:8-11 낭독) 하지만 예레미야의 반대자들은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와 함께하셔서 그를 구출하셨습니다. 또한 반대자들은 기세가 등등하고 수가 많았지만 예레미야는 두려움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므낫세, 아몬, 요시야가 통치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예레미야가 어려운 임명을 수행한 기록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너는 모든 말을 기록해야 한다’

14, 15. (ㄱ) 여호야김 통치 제4년에 예레미야와 그의 비서인 바룩은 무슨 일을 시작했습니까? (ㄴ) 여호야김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25면 참조)

14 여호야김 통치 제4년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요시야 시대부터 예레미야에게 한 모든 말을 기록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지난 23년간 하느님께서 그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비서인 바룩에게 불러 주어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 심판 소식은 왕과 왕국을 합해 약 20개의 대상을 망라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그 두루마리를 여호와의 집에서 낭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유다 집에 속한 자들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기로 생각하고 있는 모든 재앙을 듣고서, 결국 각자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내가 그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5:1-3; 36:1-3.

15 궁정의 한 관리가 그 두루마리를 여호야김에게 읽어 주자, 왕은 그 두루마리를 칼로 베어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런 다음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아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계속 숨기셨습니다.” (예레미야 36:21-26 낭독) 여호야김 왕의 태도가 매우 악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가 “수나귀가 묻히듯” 묻힐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멀리 끌려 나가 내던져질”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2:13-19) 이처럼 생생한 예언을 예레미야가 과장해서 꾸며 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6. 예레미야는 어떤 긍정적인 소식을 선포했습니까?

16 예레미야가 그러한 심판의 소식을 전해야 했지만, 멸망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희망의 소식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적들에게서 구출하고 고토로 돌아오게 하여 그곳에서 안전하게 살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백성과 “한정 없이 지속되는 계약” 즉 “새 계약”을 맺고 그분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다윗의 자손 중 하나가 “이 땅에서 공의와 의를 행할”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1:7-9; 32:37-41; 33:15) 이러한 예언들은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후에 성취될 것이었는데, 그 성취는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며 우리에게 영원한 미래의 희망을 밝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시대에 유다의 적들은 계속 세력 다툼을 벌였습니다.—예레미야 31:31, 33, 34; 히브리 8:7-9; 10:14-18 낭독.

바빌론의 부상

17, 18. 여호야김의 통치 말년과 시드기야의 통치 기간에 국제 정세는 어떠했습니까?

17 기원전 625년에 바빌론과 이집트는 갈그미스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습니다. 갈그미스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전투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파라오 느고의 군대에 승리를 거두면서, 이집트는 더 이상 그 지역에 세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46:2) 이제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장악하게 되었고, 여호야김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3년간 예속된 왕으로 있다가 바빌론에 반역했습니다. (열왕 둘째 24:1, 2) 그러자 기원전 618년에 느부갓네살이 군대를 이끌고 유다로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그 시기가 하느님의 예언자인 예레미야에게 얼마나 험난한 때였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여호야김은 그 포위 공격 중에 사망한 것 같습니다.b 그의 아들 여호야긴은 불과 3개월 동안 유다의 왕으로 통치하다가 바빌론에 항복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의 재물을 빼앗고 여호야긴과 함께 왕족들과 유다 귀족들과 용사들과 장인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그때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도 있었습니다.—열왕 둘째 24:10-16; 다니엘 1:1-7.

18 느부갓네살은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인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시드기야는 다윗 가계에서 나온 지상의 왕들 중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멸망되면서 그의 통치도 끝났습니다. (열왕 둘째 24:17) 하지만 시드기야가 통치한 11년 동안에도 유다에서는 심각한 사회적·정치적 긴장이 계속되었습니다. 분명 예레미야는 자신을 예언자로 임명하신 분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했습니다.

여호야김—여호와의 예언자를 죽인 왕

25면 삽화

여호야김은 25세 때 유다의 왕이 되었으며 약 11년간 통치했습니다. 그의 행적을 요약한 역대기 둘째 36:5-8에서는 그가 악한 일만이 아니라 “가증한 일”도 행했다고 알려 줍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한 여호야김의 통치는 불공정과 강탈과 살인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예언자 우리야가 예레미야와 비슷한 소식을 전하자, 여호야김은 그를 죽였습니다. 여호야김은 바빌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한 기간에 사망한 것 같습니다.—예레미야 22:17-19; 26:20-23.

19. 예레미야의 동족은 그가 전한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였으며, 그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9 자신이 예레미야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요시야 시대부터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백성이 정치적 격변을 겪고 영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상황이 더 나빠질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네가 우리 손에 죽지 않으려거든,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 11:21)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을 때에도 유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한 말에 관해서는, 우리가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소.” (예레미야 44:16) 하지만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해 있었으며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처럼 우리가 전하는 소식도 여호와로부터 온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던 그 시기에 여호와께서 자신의 예언자를 어떻게 보호하셨는지 살펴본다면 우리도 봉사의 직무에서 더욱 열심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야김의 통치 기간에 예레미야가 나타낸 태도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가 선포한 어떤 놀라운 예언이 우리 시대까지 영향을 미칩니까?

왕조의 최후

20. 시드기야의 통치 기간이 예레미야에게 특히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9면 참조)

20 아마도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시드기야의 통치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앞서 통치했던 많은 왕들처럼 “줄곧 여호와의 눈에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예레미야 52:1, 2) 그는 바빌론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느부갓네살은 그가 바빌론 왕에게 복종할 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했습니다. 그런 맹세를 하고도 시드기야는 결국 반역했습니다. 한편 예레미야의 적들은 그 반역을 지지하도록 예레미야에게 심한 압력을 가했습니다.—역대 둘째 36:13; 에스겔 17:12, 13.

21-23. (ㄱ) 시드기야의 통치 중에 유다에서는 어떤 파벌이 대립하고 있었습니까? (ㄴ) 예레미야는 자신의 입장 때문에 어떤 일을 겪었으며, 우리가 그 일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1 에돔, 모압, 암몬, 티레, 시돈의 왕이 예루살렘에 사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아마 시드기야 통치 초기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에 대적하는 연합 세력에 시드기야를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바빌론에 복종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나라들도 바빌론을 섬겨야 한다는 뜻으로 사자들에게 멍에대를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27:1-3, 14)c 예레미야가 대변자로서 전한 소식은 환영을 받지 못했으며, 하나냐는 그 인기 없는 소식을 전하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거짓 예언자인 하나냐는 하느님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분이 바빌론의 멍에를 꺾으실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거짓말쟁이인 하나냐가 1년 안에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예레미야 28:1-3, 16, 17.

22 이제 유다는 서로 대립하는 파벌로—바빌론에 복종하려는 파벌과 반역해야 한다는 파벌로—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609년에 시드기야는 이집트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로 인해 예레미야는 반역을 지지하는 자들이 나타내는 광적인 국가주의에 맞서야 했습니다. (예레미야 52:3; 에스겔 17:15) 느부갓네살은 반역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유다로 돌아왔으며, 유다의 모든 도시를 정복하고 다시 한 번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이 위급한 때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빌론 사람들에게 함락될 것이라는 소식을 시드기야와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도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습니다. 도시 밖으로 나가 칼데아인들에게 투항하는 사람은 목숨을 건질 것이었습니다.—예레미야 21:8-10; 52:4 낭독.

23 유다 방백들은 예레미야가 바빌론 사람들과 한패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그렇지 않다고 사실대로 말했는데도, 유다 방백들은 그를 때리고 구금장에 가두었습니다. (예레미야 37:13-15) 그래도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주신 소식의 강도를 약화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방백들은 시드기야를 설득하여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물이 없는 저수조에 집어넣어 깊은 진창 속에서 죽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지만 왕의 집에서 섬기는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해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38:4-13) 현대에도 여호와의 백성은 양심 때문에 정치적 분쟁에 관여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참으로 많은 위험을 겪었습니다! 분명 우리는 예레미야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직면한 시련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지상의 마지막 유다 왕

29면 삽화

시드기야는 두려움에 쉽게 휩쓸리고 방백들에게 좌우되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통치자였습니다. 바빌론 군대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서 하느님의 인도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복하라는 대답을 듣고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전한 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예레미야 21:1-9; 32:1-5) 그렇지만 왕은 계속 예레미야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유다 방백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은밀히 그렇게 했습니다.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자 나약한 시드기야는 마지못해 동의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그대들의 손안에 있소. 왕이라도 그대들을 전혀 제지할 수가 없구려.” 예레미야가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난 후, 왕은 또다시 그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하느님께 순종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 두렵다고 털어놓았습니다.—예레미야 37:15-17; 38:4, 5, 14-19, 24-26.

하지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앞에서 자기를 낮추지 않았으며 ··· 계속 목을 뻣뻣하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 여호와께 돌아오려 하지 않았습니다.”—역대 둘째 36:12, 13; 에스겔 21:25.

24. 기원전 607년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보십시오.

24 기원전 607년에 바빌론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뚫는 데 성공했으며 도시는 함락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여호와의 성전을 불태우고 성벽을 허물고 유다의 귀인들을 죽였습니다. 시드기야는 도망치다가 붙잡혀 느부갓네살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이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의 눈을 멀게 하고 그를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예레미야 39:1-7)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예레미야의 말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예언자는 동족이 당한 재앙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애통해했습니다. 애가서에는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도 그 책을 읽으면 마음 깊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이 한 일

25, 26. (ㄱ) 예루살렘이 멸망된 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ㄴ) 예루살렘이 멸망된 후 예레미야의 동족은 그의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5 이 극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예레미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의 방백들이 그를 가두었지만, 예루살렘을 정복한 바빌론 사람들은 그를 친절히 대해 주고 풀어 주었습니다. 나중에 예레미야는 일부 유다 사람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지만 풀려났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봉사에서 아직 할 일이 더 있었으며, 생존자들 가운데서 활동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정복한 땅을 다스리도록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에게 바빌론 왕을 섬기는 한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불만을 품은 일부 유다 사람들이 그달리야를 살해했습니다. (예레미야 39:13, 14; 40:1-7; 41:2) 예레미야는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에게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고 바빌론 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도자들은 예레미야의 말이 거짓이라고 하면서 이집트로 도망쳤으며, 예레미야와 바룩도 끌고 갔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이 이집트도 침공해서 정복할 것이며 도망한 유다 사람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예레미야 42:9-11; 43:1-11; 44:11-13.

26 이번에도 예레미야의 동족은 하느님의 참예언자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희생의 연기를 올리며 그에게 음료 제물을 부어 드리는 일을 그친 때부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였고, 칼과 기근으로 우리가 끝에 이르렀소.” (예레미야 44:16, 18) 예레미야의 동족이 영적으로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 아닙니까! 하지만 불완전한 사람이 믿음 없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27.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년에 대해 어떤 점이 알려져 있습니까?

27 예레미야가 기록한 마지막 사건 즉 느부갓네살의 계승자인 에윌-므로닥이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풀어 준 일은 기원전 580년에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52:31-34) 그 무렵 예레미야는 약 90세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마 그는 말년을 이집트에서 보내다가 충실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사망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때까지 약 67년간 여호와께 특별한 봉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참숭배가 드높여지던 시기에는 물론 오랜 기간 배교적인 숭배가 만연했을 때에도 그분을 계속 섬겼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일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의 소식을 배척했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실패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틀림없이 너를 대적하여 싸울 것이지만,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1:19) 오늘날 우리 역시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예레미야와 비슷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사람들이 그 시대와 비슷한 반응을 나타낼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마태 10:16-22 낭독) 그러면 우리는 예레미야에게서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봉사의 직무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합니까? 이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레미야의 소식을 배척한 시드기야와 백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신은 예레미야가 어떤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까?

a 예레미야 7:1-15과 26:1-6의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 두 기록이 같은 일을 언급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b 다니엘 1:1, 2에서는 여호야김 제3년(아마도 바빌론에 예속된 왕이 된 지 제3년)에 그가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졌다고 알려 준다. 이 말은 바빌론이 승리를 거둔 그 포위 공격 중에 여호야김 왕이 죽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요세푸스는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을 죽인 다음 그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벽 밖으로 던지게 했다고 기술하지만 성서에는 그 기록을 확증해 주는 내용이 없다.—예레미야 22:18, 19; 36:30.

c 예레미야 27:1에 여호야김이 언급된 것은 필사자의 오류인 것 같다. 3절과 12절에는 시드기야가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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