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승인하시는 숭배를 통해 “여호와를 찾아라”
1.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어떤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예언을 성취시키시는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입니다! 우리는 예언자 호세아가 기술한 이러한 상태를 즐길 수 있습니다. “내가 충실함으로 너와 약혼하리니, 네가 반드시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백성이 바빌론의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누리게 될 안전하고 낙원과 같은 상태를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현대의 하느님의 백성도 영적 번영과 안전을 누리고 있습니다. 낙원과 같은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2:18-20)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헌신한 종으로서 즉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지니기를 원합니다.—이사야 43:10, 12; 사도 15:14.
아모스
2, 3. (ㄱ) 여호와께서 고대에 자신의 백성의 숭배 방식을 싫어하시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우리가 예언자들이 전한 소식을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고대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헌신한 나라였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어떤 나라도 받지 못한 일련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신명 4:33-35) 하지만 기원전 9세기 말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가 매우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하고 배척하였다. ··· 너희가 내게 번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너희 예물을 기뻐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모스 5:21, 22) 하느님께서 오늘날 전 세계에 있는 자신의 회중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숭배를 그렇게 평가하신다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 각자가 배울 교훈이 있습니까?
3 당시에 하느님의 백성은 여호와를 그분이 승인하시는 방식으로 숭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가나안의 바알이나 송아지 형상과 같은 이교 신들을 섬기거나 산당에서 희생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께 맹세하면서도 하늘의 군대에게 몸을 굽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하느님께서는 백성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분의 순결한 숭배로 돌아오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열왕 둘째 17:7-17; 21:3; 아모스 5:26) 그러므로 하느님의 헌신한 종이라 하더라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면이 있을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자신의 행동과 태도가 여호와께서 승인하시는 숭배를 반영하는 것인지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
4. 여로보암 2세 왕이 통치하던 시대의 전반적인 상태는 어떠하였습니까?
4 열두 예언자 중에 제일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 알렸던 시대에 관해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의 날이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에게 닥칠 것이라는 예언이 발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면적으로 그 왕국은 번영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나가 예언한 대로 여로보암 2세 왕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북쪽의 다마스쿠스 근처에서부터 사해에 이르기까지 회복하였습니다. (열왕 둘째 14:24-27) 여로보암이 악을 행하기는 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늘 아래서 완전히 멸절시키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에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고 “여호와를 찾아 계속 살도록”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아모스 5:6.
5.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께 배척받은 것은 무엇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5 번영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때를 선용하여 여호와를 더 잘 알고 그분이 승인하시는 길을 추구함으로 그분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재앙이 가까이 오지도 않고 자기들에게까지 미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만하였습니다. (아모스 9:10) “그들은 만족하게 되자 마음이 높아지기 시작”하여 여호와를 잊은 것입니다. (호세아 13:6) 우리는 이것이 우리와는 무관한 고대 역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과 소송을 벌이셨다는 것에 유의하십시오. “네가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으로 섬기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헌신한 사람들이었고 헌신한 가족 성원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 참된 지식이 없었습니다.—호세아 4:1, 6.
6.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녀들과 함께 살펴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시 부모에게서 얼마간의 성서 내용을 들었거나,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혹은 공개 집회에서 성서 내용을 접하였을 것입니다. (탈출 20:4, 5; 신명 6:6-9; 31:11-13) 예를 들어, 그들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나이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탈출 31:18-32:9) 따라서 이 예언자들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고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식은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 지식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그분을 숭배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여호와를 잊기 시작할 수 있는가?
7. (ㄱ)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그처럼 쉽게 불순종하게 되었습니까? (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자기를 만든 이를 잊기 시작할’ 수 있습니까?
7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그처럼 쉽게 불순종의 올무에 걸려들었을까?’ 하고 의아해할지 모릅니다. 호세아는 그 과정을 묘사하면서 “이스라엘은 자기를 만든 이를 잊”었다고 말하였습니다. (호세아 8:14) 원어인 히브리어의 동사 형태는 ‘잊기 시작하였다’라는 개념을 전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갑자기 여호와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그분이 승인하시는 방식으로 숭배하는 일의 중요성을 점진적으로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덫에 걸려들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가족 부양의 의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디모데 첫째 5:8) 당연히 그는 세속 일을 중요하게 여길 것입니다. 어쩌다가 사정이 생기자 그는 일을 하기 위해 집회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집회에 더욱 쉽게 빠지면서 점점 더 자주 빠지게 됩니다. 차츰차츰 하느님과의 유대는 약해집니다. 그는 ‘자기를 만든 이를 잊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모나 다른 친족이 믿지 않는 사람들인 경우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친족을 위해 얼마나 시간을 내고 언제 낼 것인가? (탈출 20:12; 마태 10:37) 여행이나 취미 활동 혹은 오락을 위해 얼마나 되는 시간과 관심을 쏟기로 할 것인가?’
8. 아모스 시대에 ‘이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습니까?
8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우리가 얻은 지식을 실천해 왔습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 각자는 아모스의 예언서에 나오는 ‘이를 깨끗하게 하신다’라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자신의 백성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나 역시 너희의 모든 도시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고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빵이 부족하게 하였다.” (아모스 4:6) 이가 깨끗한 것은 이를 닦았기 때문이 아니라 기근을 겪게 되어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경고는 “빵이 없어서 겪는 기근도 아니며,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도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에 대한 경고였습니다.—아모스 8:11.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풍요 속에서 기근을 겪을 수도 있는가?
9, 10. (ㄱ)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굶주리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까? (ㄴ) 영적 기아의 위험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영적으로, 아모스의 묘사는 개탄할 만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교국에 성취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세계 전역의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하늘의 수문들”이 열려 있습니다. 그들은 풍부한 영적 양식으로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말라기 3:10; 이사야 65:13, 14)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도 ‘나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영적 양식을 어느 정도나 즐기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일부 연구가들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뇌에서 시장기를 관장하는 부위가 손상된 실험용 동물들은 먹을 것이 풍부한데도 식욕을 잃어서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경우 역시 풍성한 영적 양식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영적 시장기를 관장하는 부분에 문제가 생겨 굶주리기 시작할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까?
10 우리 자신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풍부한 영적 양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었고, 교육 마련이 있어서 자녀들에게 경건한 지식을 심어 줄 수 있었으며, 예언자들이 있어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호와를 잊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호세아 시대에 “그들은 [물질적으로] 만족하게 되자 마음이 높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호세아 13:6; 신명 8:11; 31:20) 우리도 물질적 상황 때문에 하느님과의 유대 관계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러한 위험을 매일 의식해야 합니다.—스바냐 2:3.
더 중요한 일들에 유의하라
11, 12. (ㄱ) 웃시야 왕의 통치 때 예언자들이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백성을 격려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요엘은 무엇이 필요함을 강조하였습니까?
11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에서 통치할 때 유다에서는 웃시야(혹은 아사랴)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웃시야는 영토를 넓혔고 예루살렘을 확장하였습니다. 웃시야는 ‘참 하느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에 “힘을 대단히 크게 떨쳤”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눈에 옳은 일을 계속 행”하였으며, “하느님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산당에서 희생의 연기를 올렸습니다.—역대 둘째 26:4-9.
12 이로 볼 때 유다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그분이 승인하시지 않는 일들을 숭배에 포함시키는 일이 많았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언자들은 그들이 참 숭배를 거짓 숭배와 구분하도록 도우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엘을 통해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단식하고 울고 통곡하면서 내게로 돌아오너라.” (요엘 2:12)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마음을 다하여”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셨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신명 6:5) 그들은 여호와를 숭배하는 시늉은 하였지만 마음은 전적으로 그분과 함께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은 예언자들을 통해 사랑의 친절과 공의와 온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셨는데, 그 모든 것은 마음의 특성입니다.—마태 23:23.
13. 바빌론의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무엇을 고려해야 하였습니까?
13 이제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온 후에 있었던 일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율법에 따른 참 숭배는 회복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올바르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된 사건이 있었던 날들을 기념하여 단식을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정말 나를 위하여, 바로 나를 위하여 단식하였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 도시가 황폐되었던 것은 하느님의 공의의 표현이었으므로 슬퍼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비탄에 잠겨 단식할 것이 아니라 참 숭배의 축복으로 말미암은 축제 철을 기뻐하며 환희에 넘쳐야 하였습니다. (스가랴 7:3-7; 8:16, 19) 그리고 그들에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들이 더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너희는 참된 공의로 재판을 하여라. 서로에게 사랑의 친절과 자비를 행하여라. ··· 서로에 대하여 악한 것을 마음 속으로 꾸미지 말아라.” (스가랴 7:9, 10) 이 예언자들이 하느님께 마음을 다한 숭배를 드리는 것에 관해 하느님의 백성에게 가르친 점들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14. (ㄱ)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숭배에 무엇을 포함시켜야 하였습니까? (ㄴ) 예언자들은 숭배에서 더 중요한 부면들을 어떻게 강조하였습니까?
14 마음을 다한 숭배에는 무엇이 수반됩니까? 우선, 유배 생활 전이나 후에나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무엇이 요구되었습니까? 도덕 문제에서 하느님의 표준을 옹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율법에서는 특정한 활동을 하도록 요구하였는데, 일례로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듣고 배우기 위해 함께 모여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에 더해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친절과 공의와 온유와 자비와 겸허를 배양하고 나타내야 한다는 점도 예언자들이 강조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러한 특성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신 것에 유의하십시오. “나는 사랑의 친절을 기뻐하고 희생을 기뻐하지 않았다. 번제물보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기뻐하였다.” “너희는 의로 씨를 뿌리고, 사랑의 친절에 따라 거두어라.” (호세아 6:6; 10:12; 12:6) 미가는 이렇게 단언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고 계신 것은 다만 공의를 행하고 친절을 사랑하고 겸허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가 6:6-8) 그리고 예언자 스바냐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이렇게 촉구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찾아라, ··· 땅의 모든 온유한 사람들아. 의를 찾고, 온유를 찾아라.” (스바냐 2:3) 하느님께서 승인하시는 숭배를 드리려면 그러한 태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좋은 소식을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고 하는가?
15. 예언자들의 훈계와 일치하게 그리스도인들은 숭배의 일환으로 무엇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15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숭배에서 어떤 역할을 합니까? 우리는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마태 24:14; 사도 1:8)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사는 구역에서 전파하는 일을 힘겹고 부담스러운 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가? 아니면 그 일을 생명을 구하는 성서의 소식을 들어야 할 사람들을 돕는 기회로 여기는가? 나는 그들에게 자비를 나타내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자비와 사랑의 친절이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날에 대해 경고해 주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공의와 의도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해 주려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디모데 첫째 2:4.
16, 17. 우리의 숭배에서 온유와 겸허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6 또 다른 예로,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할 의무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집회 참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 10:24, 25) 그 의무가 온유나 겸허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온유한 사람은 겸손하기 때문에 교훈을 받아들인 다음 배운 것을 적용함으로 여호와의 판결을 실천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한 사람은 집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격려와 지식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17 이러한 예들을 살펴보면 이 예언자들이 가르친 점들이 우리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들 가운데 한 가지나 그 이상의 부면에서 자신이 조정할 필요를 느낀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혹은 심각한 잘못을 범한 적이 있고 그 기억 때문에 때때로 가책을 느낀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열두 예언자에게서 위안과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
18. (ㄱ) 열두 예언자는 특히 누구에게 위안이 되는 소식을 알려 줍니까? (ㄴ) 당신은 돌아오라고 백성에게 호소하시는 여호와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게 됩니까?
18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예언자들은 질책하고 정죄하는 일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백성에게 돌아오라고 간곡히 권고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호세아가 어떤 심정으로 이렇게 촉구했을지 숙고해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분이 갈기갈기 찢으셨지만 우리를 치료해 주실 것이다. 그분이 계속 치셨지만 우리를 싸매 주실 것이다. ··· 우리는 여호와를 알려고 하겠다. 알려고 힘쓰겠다.” (호세아 6:1-3) 물론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유다에게 공의로 심판을 집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러한 고초를 영적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단계로 보아야 하였습니다. (히브리 12:7-13) 자신의 빗나간 백성이 돌아온다면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치료해 주시고 싸매 주실’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릎을 꿇은 채 동료의 상처를 싸매 주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십시오. 이제 그 모습이 여호와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자신에게로 돌아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싸매 주시는, 참으로 자비로운 하느님이십니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그분에게 죄를 짓는 일이 있더라도 그분에게 돌아가려 하지 않겠습니까?—요엘 2:13.
19. 여호와를 안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9 하느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호세아는 우리가 하느님을 단지 ‘아는’ 정도를 넘어 ‘여호와를 알려고 힘써야’ 한다고 상기시킵니다. 현대의 한 참고 문헌에서는 호세아 6:3에 관해 이렇게 알려 줍니다.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사랑에 관한 글을 읽는 것과 사랑에 빠지는 것의 차이에 비할 수 있다.” 우리가 여호와에 관해 피상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실제적인 분, 우리가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믿음직한 벗으로 느껴야 합니다. (예레미야 3:4) 그러한 사이가 되면 우리는 자신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할 때 그분이 어떻게 느끼실지를 알게 되어, 그분이 승인하시는 숭배를 추구하기가 훨씬 쉬워지게 될 것입니다.
20, 21. 요시야 왕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까?
20 요시야 왕은 참 숭배를 추구하는 면에서 훌륭한 본을 보였습니다. 그가 한 경험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무렵, 나라는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때 만연했던 우상 숭배와 폭력과 속임수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열왕 둘째 21:1-6, 19-21) “여호와를 찾아라”라는 스바냐의 훈계는 요시야에게 유익했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다윗의 하느님을 찾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다에서 우상 숭배를 없애는 운동에 착수하여 이전에 북쪽 왕국의 영토였던 지역까지 그 활동을 확대하였습니다.—스바냐 1:1, 14-18; 2:1-3; 3:1-4; 역대 둘째 34:3-7.
깨끗하게 하는 조처가 필요했을 때 요시야는 변명하지 않았다
21 이러한 정화 작업을 한 후에도 요시야는 계속 여호와를 찾았습니다. 그는 성전을 보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공사 중에 “모세의 손에 의한 여호와의 율법 책”이 발견되었는데, 이 책은 아마도 율법의 원본이었을 것입니다. 요시야는 그 책의 내용을 들으면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왕은 그 율법의 말씀을 듣고, 즉시 자기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는 또한 ‘마음을 찢었으며’ 자신이 들은 말씀을 즉각 적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은 이미 많은 일을 했다고 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개혁 조처로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기억납니까? “그의 모든 날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조상들의 하느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역대 둘째 34:8, 14, 19, 21, 30-33; 요엘 2:13.
성서의 표준에 순응하기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변화할 것인가?
22. 요시야의 예에서 어떻게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22 우리는 ‘나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하고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요시야처럼 예언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행동이나 생각에서 필요한 변화를 하였을 것입니까? 우리가 스바냐와 요시야의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소식과 교훈에 호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활 방식이나 숭배에서 조정할 필요를 진심으로 느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열두 예언자의 책을 고려할 때 행동해야 하겠다는 자극을 받게 될 수 있습니다.—히브리 2:1.
23.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부면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23 때때로 우리는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이와 같이 말한 요나와 같은 심정일지 모릅니다. “제가 당신의 눈앞에서 쫓겨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습니까?” (요나 2:4)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말씀은 참으로 위안이 됩니다! “내게로 돌아오너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겠다.” (말라기 3:7) 우리가 여호와와 자신의 관계를 강화시킬 필요를 느낄 경우 회중의 장로들은 기꺼이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 것입니다. 차를 운전할 때처럼, 말하자면 저속 기어에서부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해야 합니다. 일단 움직이게 되면 전진하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아 주고 도와주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은혜롭고 자비로우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고 사랑의 친절이 풍부”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엘 2:12-14) 확실히 열두 예언자의 소식은 하느님께서 승인하시는 숭배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여호와를 찾음’으로 그분에게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