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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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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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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6
파96 3/15 21-23면

여호와—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

사라예보의 한 어린 소녀는 그 도시에 사는 어린이들이 왜 그토록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지 의아해합니다. “우리는 해가 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잘못이 없어요” 하고 그 소녀는 말합니다. 비통에 잠긴 아르헨티나의 어머니들은, 약 15년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광장에 나와 실종된 아들들에 대해 항의 시위를 벌여 왔습니다. 아프리카의 임마누엘이라는 남자는, 인종 폭력이 일어나 어머니와 세 누이들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누구나 공정한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 우리는 공의를 원합니다.”

공의는 여호와 하느님의 주요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분의 모든 길은 공의”롭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실로 여호와께서는 “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신명 32:4, 「신세」 참조; 시 33:5, 「신세」 참조) 하느님을 잘 알려면, 우리는 그분의 공의감을 이해하고 그것을 본받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호세아 2:19, 20, 「신세」 참조; 에베소 5:1.

공의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아마도 이 특성에 대한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받아 왔을 것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공의를, 칼과 저울을 들고서 눈을 가리고 있는 여자로 흔히 묘사합니다. 인간의 공의란 편파적이 아닌 것, 다시 말해 부나 권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인간의 공의는 고발당한 사람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조심스럽게 저울질합니다. 공의는 그 칼로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범죄자를 처벌합니다.

「정의와 이성—윤리의 이론과 실제」(Right and Reason—Ethics in Theory and Practice)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공의는 법, 의무, 권리 및 임무와 관련이 있으며, 평등이나 공적에 따라 판정을 내린다.” 하지만 여호와의 공의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상당히 많이 닮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실과 특성을 고려해 봄으로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히브리 1:3.

복음서 필자인 마태는 이사야 42:3에 나오는 말씀을 예수께 적용시켜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그는 공의를 성공리에 내보낼 때까지, 상한 갈대를 부서뜨리지 않을 것이며 연기나는 아마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구부러지고 심지어 짓밟힌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마치 생명의 마지막 불꽃이 거의 꺼져 버린, 등잔 속의 연기나는 심지와 같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비유적으로 말해서 상한 갈대를 부서뜨리거나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을 가르치시고 고쳐 주셨으며 그들에게 여호와 하느님의 공의를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마태 12:10-21) 이사야의 예언에서 미리 알려 준 바와 같이, 그러한 공의는 희망을 고취시켜 주었습니다.

자비와 여호와의 공의

자비는 하느님의 공의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이 점은, 예수께서 땅에 계셨을 때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그분은 공의와 의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을 완벽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법 조항—대부분 그들 자신이 만든 법—을 따름으로 의를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율법주의적 공의는 대개 자비를 배제하였습니다. 예수와 바리새인 사이에서는 ‘참된 공의와 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충돌이 자주 있었습니다.—마태 9:10-13; 마가 3:1-5; 누가 7:36-47.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을 공정하고 의롭게 대하는 방법을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한번은 율법에 정통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 사람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셨고,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한 법 두 가지는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누가 참으로 내 이웃입니까?” 예수께서는 그 대답으로 이웃다운 사마리아인의 예를 드셨습니다.—누가 10:25-37.

여호와의 의와 자비로운 공의가 예수께서 드신 사마리아인의 예에 잘 예시되어 있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부상당한 사람을 비이기적으로 도와 줌으로, 올바르고 공정하고 자비로운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땅에 계셨을 때 친히 그와 같은 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의롭고 공정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절실한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즉 고통과 병과 죽음에 굴복하는 죄 많고 불완전한 인류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를 대속 마련과 관련지어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한 범죄를 통하여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미친 결과가 유죄 판결인 것과 같이, 한 의인(義認) 행동[혹은 “한 의로운 행동”, 「신세—참조주」 각주 참조]을 통하여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미친 결과는 그들을 생명을 위하여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로마 5:18) 이 “한 의로운 행동”은 아담의 죄로 인한 파멸적인 결과로부터 순종하는 인류를 구해 내는 하느님의 방법이었는데, 그러한 결과에 대하여 인류에게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공의는 죄 많은 인류를 구속하고 동시에 의로운 원칙을 옹호하려 하였습니다. 죄를 무시하는 것은 불법을 장려하는 것이 되므로, 그것은 공정한 일도 사랑을 보이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한편, 하느님의 공의가 상이나 벌을 주는 것에 국한되었다면, 인류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성서에 따르면, “죄가 지불하는 삯은 죽음”이며, “의로운 사람은 없으니,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 3:10; 6:23) 여호와께서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개인적으로 큰 손실이 되는데도 죄를 위한 화목 희생을 제공하셨습니다.—요한 첫째 2:1, 2.

대속 마련은, 하느님의 공의가 원칙에 근거한 사랑(그리스어, 아가페)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실로 하느님의 공의는 그분의 의로운 원칙의 산물, 다시 말해 그분이 옹호하시는 도덕 표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나타내시는 아가페는 하느님의 공의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마태 5:43-48)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공의를 진정 이해한다면, 그분의 판결을 전적으로 신뢰할 것입니다. “온 땅의 심판관”으로서 그분은 언제나 옳은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창세 18:25, 「신세」 참조; 시 119:75, 「신세」 참조.

여호와의 공의를 본받으라

성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에베소 5:1) 이 말은 그분의 사랑만이 아니라 그분의 공의도 본받으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길은 여호와 하느님의 길만큼 높지 않습니다. (이사야 55:8, 9; 에스겔 18:25)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의와 공의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참된 의와 충성 가운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성”을 입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4:24)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의”는 폭력과 부도덕과 더러움과 배교를 멀리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거룩한 것을 범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시 11:5; 에베소 5:3-5; 디모데 둘째 2:16, 17) 하느님의 공의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도록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시 37:21; 로마 15:1-3.

더 나아가, 하느님의 공의에 본질적으로 내포된 자비로운 면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영적 형제 자매들을 판단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께서 이해하시는 것만큼 그들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우리 자신의 편견으로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까? 일례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판단을 받지 않으려면 더는 판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여러분도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헤아려 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지푸라기는 보면서, 당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서까래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한 보십시오! 당신 자신의 눈 속에 서까래가 있는데, 어떻게 당신의 형제에게 ‘내가 당신의 눈에서 지푸라기를 빼내 주겠소’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위선자여! 먼저 당신 자신의 눈에서 서까래를 빼내십시오. 그러면 형제의 눈에서 지푸라기를 어떻게 빼낼지 명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마태 7:1-5) 우리 자신의 불완전성을 정직하게 평가한다면, 우리는 여호와께서 불의하다고 생각하시는 판단을 내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회중의 임명된 장로들은, 심각한 범죄가 저질러진 경우 판결할 책임이 있습니다. (고린도 첫째 5:12, 13) 이런 일을 수행할 때 장로들은, 하느님의 공의가 가능한 한 자비를 베풀려고 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자비를 나타낼 근거가 없을 경우에는—이를테면, 회개하지 않는 죄인의 경우에는—자비를 베풀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장로들은 그런 범죄자라고 해서 앙심을 품고 회중에서 추방하지는 않습니다. 장로들은 제명 처분 그 자체를 통해 범죄자가 정신을 차리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비교 에스겔 18:23) 그리스도인 머리 직분 아래 장로들은 공의를 위해 일하며, 그렇게 하는 데는 “광풍을 피하는 곳”처럼 되는 것이 포함됩니다. (이사야 32:1, 2) 그러므로 장로들은 편파적인 태도가 아니라 합리적인 태도를 나타내야 합니다.—신명 1:16, 17.

의로 씨를 심으라

우리는 하느님의 의로운 신세계를 기다리면서, 그분의 은혜를 얻기 위해 ‘의를 구’해야 합니다. (스바냐 2:3, 「신세」 참조; 베드로 둘째 3:13) 이러한 사상이 호세아 10:12(「신세」 참조)에 나오는 이와 같은 말씀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로 씨”]를 심고 긍휼을[“사랑의 친절에 따라”]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의로 교훈을 베푸”]시리라.”

예수께서 이웃다운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시하셨듯이,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의로 씨를 심”을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사랑의 친절에 따라 거둘’ 것임을 보증하십니다. 우리가 계속 “공의의 길”로 걷는다면, 우리는 왕국 통치 아래서 계속 의로 교훈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40:14, 「신세」 참조)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의문의 여지 없이 여호와께서 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더욱더 온전히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시 33:4, 5, 「신세」 참조.

[23면 삽화]

여호와의 공의가 이웃다운 사마리아인의 예에 잘 예시되어 있다

[23면 삽화]

예수께서는 상한 갈대와 같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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