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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 참음으로 합당하게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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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 참음으로 합당하게 행하라’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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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5
파85 9/15 22-24면

‘오래 참음으로 합당하게 행하라’

그 여자는 여러 번 체포되어 심한 심문을 받았다. 한번은, 살인을 비롯하여 강간, 절도 등에 이르는 갖가지 범죄를 저지른 남자 죄수 아홉 명과 더불어, 야유하는 군중 앞에서 이 거리 저 거리로 줄지어 끌려 다니기도 하였다. 그 여자가 투옥되어 가족과 떨어져 있던 기간은 총 20년도 넘는다.

이와 비슷하게 장기 투옥형을 겪은 사람들은 많으므로, 그리스도인인 이 여인의 경험은 독특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범죄”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색다른 것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기 믿음을 부인하기만 하면 즉각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그러한 처사를 감수했을 뿐 아니라 상당한 행복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보기 위해서 역시 자기가 취한 종교적 입장 때문에 체포당한 또 다른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사도 바울이었다. 에베소에 있는 회중에 편지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 [끈기 있는 영]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 4:1-3.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부르심”을 받고 있었다. (베드로 전 1:3, 4) 그러나 그것을 받기 위해서 그들은 그에 합당함을 증명해 주는 방식으로 “행”해야, 곧 처신해야 하였다. 바울은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오래 참음”이 매우 중요하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오래 참음”이란 그저 장기간 고통이나 불편을 참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 쪽 다리가 부러진 사람은 ‘오래 참는다.’ 그러나 그에게 과연 선택의 여지가 있는가? 그러나 오래 참는 사람은 어떤 목적을 위해, 보복하거나 성내지 않고 학대를 인내한다. 그처럼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의도적인 억제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바울은 연금된 상태를 인내하면서 그러한 억제력을 나타냈다. 그는 그것이 “복음의 진보”에 기여한다는 것을 알았다. (빌립보 1:12) 또한 그 일은 바울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정성을 나타냄으로 하늘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합당하게 행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따라서 바울은 감금 생활을 기꺼이 인내하였다. 그리고 그때 이래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비슷하게 오래 참음을 나타내 왔다. 누구나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하늘에서 얻게 되든 왕국의 지상 영역에서 얻게 되든, 진심에서 그 상에 “합당하게 행하”여 왔다.

그렇지만, 혹독한 투옥 생활을 참아야 했던 사람들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하다. 오래 참음은 그외 다른 상황하에서도 가치가 있는가? 물론 그러하다. 바울은 ‘오래 참음으로 합당하게 행’하라고 에베소 회중 전체에게 격려하였기 때문이다. 에베소는 로마의 아시아 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그곳의 부유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무가 될 수 있었다. 또한, 그 도시는 방종과 악귀 숭배, 요술 및 마술로 유명하였으며, 아데미 여신 곧 다이아나 여신의 숭배자들이 가득하였다. 고대 역사가 루시우스 세네카는 그러한 자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온갖 것에서 쾌락을 추구하였다. 악행에 한계라고는 없었다. ·⁠·⁠· 우리는 고귀한 일들이 잊혀진 것을 보고 아연케 된다.” 그러므로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더 나아가 에베소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한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에베소 4:17, 18) 그처럼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서 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래 참음으로 적어도 관용할 만한 생활은 영위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도 그와 비슷하게 악과 물질주의와 악귀적인 영향력에 둘러싸여 있다. 사실상,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압력은 더 큰 것이다. 왜냐하면 사단은 땅 근처로 쫓겨나서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 12:12, 17) 그러므로 합당함을 증명하려면 우리가 취하는 행로에 보통 이상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한다. 물론 그러한 억제력을 나타낸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영이 그 그리스도인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영의 열매는 ·⁠·⁠· 오래 참음”이라고 갈라디아 5:22(신세)에서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유익을 주는가?

오래 참음은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 문제 및 20세기 생활에서 생기는 그외 여러 가지 압력들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있으며, 구원이 임박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다! (디모데 후 3:1-5; 누가 21:28)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대한 강한 반대를 직면하는 때일지라도 오래 참음은 억제하는 벽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 계속 살아 있게도 해준다.

‘기쁨으로 오래 참으라’는 바울의 조언을 따르는 것은 다루기 힘든 집안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골로새 1:11) 때때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결혼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한 남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가정 생활로 인해 몹시 심란했을 뿐 아니라 나는 온갖 어려움을 견디어야 했다. ·⁠·⁠· 식사 준비도 해주지 않았다. ·⁠·⁠· 옷을 빨거나 준비해 놓지도 않았다. 때때로 아내는 내게 저속한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이 남자는 오래 참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여호와께 기도를 하였고 그분이 내가 오래 참음이라는 좋은 특성을 발전시켜 그리스도인 균형을 상실하지 않게 도와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 이것은 내가 인내하는 데 유익하였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20년 동안이나 반대를 하고 나서 그의 아내 역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내가 영의 열매인 오래 참음을 배양할 수 있게 도와 주신 것에 대해 그분께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서로 오래 참음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령의 산물이므로, 원수를 맺는 것,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투기 등과 같은 “육체의 일”과 양립할 수 없다. (갈라디아 5:19-21) 이러한 “일”들이 드러나서 서로 대하는 일을 지배하게 하면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모세가 관련되었던 한 경우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예증해 준다. 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일컬어졌다. (민수 12:3) 그러나 한번은 그가 오래 참지 못하고 말았다. 그 민족의 물 공급이 끊어졌을 때, 믿음 없는 백성은 이렇게 외쳤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민수 20:4) 이 상황에서 모세는 억제력과 더불어, 그들의 반역적인 말이 실은 여호와께 대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냉정한 반응을 나타내야 하였다! 그러나 모세는 그만 육적인 충동에 굴복하고 말았다. 시편 필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시 106:32, 33.

마치 자기가 기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것인 양 모세는 통렬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민수 20:10) 그렇다. 모세는 다른 사람들의 논쟁적이고 불평하는 영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억제력을 잃고 여호와를 영예롭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때때로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마치 이스라엘인들이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분노를 유발시킬 수 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느니라.]” (디모데 후 2:24)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전서 5:14에서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권면하는 것은 적절하다.

따를 만한 본들

그리스도께서는 오래 참음의 완전한 본을 세워 놓으셨다. 그분은 “죄인들의 ·⁠·⁠· 자기에게 거역한 일”뿐만 아니라 자기 제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문제들도 견디셔야 하였다. (히브리 12:3) 때때로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서 더디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그들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으셨다. 배신당하시던 날 밤에 그분의 제자들이 잠들어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친절한 말로 이렇게 권면하셨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누가 22:46.

부활되신 이래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참을성과 오래 참음을 나타내 오셨다. 예를 들어,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신성 모독자로서 오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울에게 자비를 나타내심으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의 탁월한 추종자가 되게 되었다. 바울(이전의 사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디모데 전 1:15, 16.

성경은 ‘그분[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밀접히 따르’라고 말한다. (베드로 전 2:21) 당신도 동료 신자들이 어떤 성서 원칙을 적용하는 데 있어 더딜 때 그와 동일한 참을성을 나타내는가? 진리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그와 비슷하게 오래 참는 영을 나타내는가? 당신은 그러한 사람들이 진리를 발견하도록 진심에서 돕고 있는가?

그러나 오래 참음에 있어서 비할 데 없는 본이 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8; 출애굽 34:5-7) 모세같은 사람들이 강퍅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해 낙망하였을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로마 10:21) 그러나 그러한 오래 참음 이면에는 목적이 있었다. 고집센 아들의 아버지와도 같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과 자신과의 긴장된 관계가 개선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참으심에는 성과가 있었다. 그 민족의 남은 자들이 구원받은 것이다!

오래 참음의 한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한정 참으시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고집세게 여호와의 경고를 계속 배격함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라.]” (이사야 63:10) 그렇다. 이윽고 ‘여호와의 진노가 그 백성에게 미치게’ 되었다. (역대 하 36:15, 16) 그분의 오래 참으심은 끝나고 만 것이다.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를 위한 심각한 교훈이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를 영원히 관용하실 것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비이치적일 것이다. 물론,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여 오셨다. 그러나 그처럼 관용하신 데에는 목적이 있었다. 즉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 9:22, 23) 그렇다. 하나님께서 억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이름이 전세계에 선포되어 왔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통하여 그분의 “신원의 날”도 선포해 오셨다. (이사야 61:2) 바울 시대에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이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라고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경고의 소식을 비웃고 조롱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도 17:18)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것이다.—데살로니가 후 1:8.

그러나, 그 동안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단할 때가 되었다고 밝혀 주실 때까지 계속 하나님의 심판을 전파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아’야 한다. (야고보 5:7) 그러나 우리가 현 제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악을 참을성있게 인내하는 것은 실질적인 결과들을 산출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여호와께 더욱더 의존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대인 관계가 원만하게 해줄 것이며 불필요한 문제들이 생기지 않게 막아 줄 것이다. 오래 참음은 고난을 의미할 수 있지만,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또 어디에 살고 있든지, 자유롭든지 투옥되어 있든지, 반대를 집안에서 겪든지 그리스도인 봉사 중에 겪든지, 오래 참음을 통해 생기게 되는 평화와 연합은 우리의 생활에 즐거움과 만족을 더해 줄 것이다. (에베소 4:2) 그러므로 반드시 오래 참음으로 합당하게 행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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