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잠비크
“분명히 알아 두시오, 실라울레. 여기는 모잠비크요. 따라서 당신네는 결코 이 나라에서 합법화되지 못할 것이오. ··· 순순히 단념하시오!” 지금은 없어진, 조사 및 국방 담당 경찰(PIDE) 요원들이 한 여호와의 증인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였을 때는, 모잠비크에서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가 절정에 달하였을 때였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호와께 대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나타내기를 중단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의 사랑에 찬 목적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모잠비크의 증인들의 역사는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헌신의 질이 어떠한지 뚜렷이 증거해 줍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에 대한 사랑, 즉 사도 바울이 묘사한 바와 같은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강화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겠습니까? 환난이나 고난이나 박해나 굶주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겠습니까? ‘당신을 위하여 우리가 온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할 양으로 여김을 받습니다’라고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이나 ··· 정부들이나 지금 여기 있는 것이나 올 것이나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로마 8:35-39.
모잠비크의 여호와의 종들의 역사는, 물질적 소유는 다 빼앗겼어도 뿌리 깊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부요하였던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를 보았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도 열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나라의 실제 모습을 구경해 보도록 합시다.
이 나라의 아름다움과 특징
인구가 어림 잡아 1740만 명쯤 되는 모잠비크는 아프리카 동남부의 해안을 따라 약 2500킬로미터 정도 뻗어 있습니다. 기후는 기본적으로 열대성 기후라서 이 곳에서 생산되는 것들도 코코넛, 파인애플, 캐슈 열매, 카사바, 사탕수수 등과 같은 열대성 산물입니다. 해산물도 일상 음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모잠비크 사람들은 대체로 쾌활하고 성품이 좋으며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가운데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운동 선수들도 나왔습니다. 물론, 소수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색다른 가치와 관련된 경주에서 승리자가 되고 있는 사람들이 1만 9000명 이상 됩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증인들로서, 모잠비크에서 1925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씨가 뿌리를 내리다
바로 그 해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광산에서 일하는 모잠비크 사람 알비누 멜렘베가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왕국 진리의 씨가 그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으며 그는 곧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모잠비크의 최남단 지방인 빌라루이자(지금은 마라쿠에네)에서 이전에 자기가 다니던 스위스 선교회의 교회 성원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이 새로운 관심자들은 매우 열심이었으며, 집회를 보기 위해 30킬로미터를 여행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새로운 집단들이 구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마푸토라 불리는 로렌수마르케스에도 집단이 하나 형성되었습니다.
그 무렵, 성서의 소식을 전파하는 활동이 훨씬 북쪽에서도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니아살랜드(지금은 말라위) 출신의 아프리카 사람인 그레샴 콰지지라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존 허드슨과 에스더 허드슨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거문고」라는 책을 연구하였습니다. 1927년, 그레샴은 빌리야티 카파시카와 함께 일자리를 찾아 모잠비크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들은 밀란제 지역을 통해 이 나라에 들어가서는, 남쪽의 소팔라 주에 있는 이냐민가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둘 다 트란스-잠베지아 철도 회사에서 일자리를 구하였습니다.
이냐민가에서 그들은 또한 워치 타워 운동이라고 하는 회중과 그 회중의 목회자 로빈손 칼리테라를 만났습니다. 칼리테라는 「하나님의 거문고」에 기술되어 있는 성서의 가르침을 듣고서 눈이 열렸습니다. 그는 자기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그와 회중 전체가 여호와의 조직과 연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의 밭이 주의를 끌다
1929년에 유럽인 증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헨리 미르달과 에디스 미르달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로렌수마르케스에 도착하여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4년 후, 데 야거스 부부가 그들과 합세하였습니다. 그들이 활동한 결과, 성서 진리의 씨가 많이 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35년에는 프레드 루딕과 데이비드 노먼이라는 두 명의 파이오니아가 또한 로렌수마르케스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은 미르달 가족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봉사한 지 5일째 되던 날, 그들은 미르달 가족의 집에서 갑자기 비밀 경찰에 체포되어 블랙 마리아(범죄자들을 호송하는 데 쓰이는 유개차)에 실려 테이셰이라라는 고위 관리에게 붙들려 갔습니다. 데이비드가 이 모든 음모 배후에 주교가 있음을 알고 있다고 담대하게 말하자, 테이셰이라 씨는 펄쩍 뛰며 이렇게 고함 쳤습니다. “당신들이 우리 시민이었더라면 이리로 붙잡아 오게 하여 당장 마데이라 섬으로 유형을 보냈을거요. 하지만 당신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시민이므로 즉각적인 추방령을 내리겠소!” 바로 그 날 이 형제들은 중무장한 경찰들이 탄 두 대의 차에 호송되어 국경으로 실려 갔습니다. 국경에 도착하자마자, 형제들은 자기들을 호송한 경찰들에게 증거를 하고 서적을 남겨 주고는 그들 모두와 악수를 나눈 다음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가혹한 시험에 직면하다
1939년에 이냐민가에서 한 겸손한 아프리카 농부, 자네이루 조네 데데가 진리를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타라라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친척들에게 진리를 전하였는데, 그들은 일부다처 관습을 받아들이는 종교 집단의 성원들이었습니다. 자네이루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그의 친형제 중 두 명, 즉 안토니우와 주앙은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1946년에 자네이루는 체포되어 테테로 보내졌으며, 그 곳에서 4년 동안 유럽인들을 위하여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베이라에 있는 중앙 교도소로 이감되었고, 거기서 괴상하고도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로렌수마르케스로 이송되었습니다. 소금물을 가득 채운 상자 안에 들어가 머리만 내놓게 한 채 배에 태워 보낸 것입니다. 로렌수마르케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벌거숭이로 나왔습니다. 옷이 전부 해진 것입니다. 자네이루는 자루를 받아 몸을 가렸습니다. 이러한 시련을 당하는 동안, 종교와 하느님을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비슷한 방법으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사도 5:29.
이러한 시련을 겪은 후, 자네이루는 독방에 있는 조그만 나무 상자에 감금되었습니다. 그 상자에는 단지 조그만 구멍이 하나 있어서 그 구멍을 통해 매일 과일 몇 조각이 들어올 뿐이었습니다. 일 주일 후 그 상자에서 나왔을 때 그는 사실상 일어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친형제들인 안토니우와 주앙과 함께 7년 형을 선고받고 상투메프린시페로 추방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데데 형제들은 그 유형지 섬들에서 회중을 구성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던 포르투갈 데데는 자기 형제들의 추방 소식을 듣게 되자 무타라라로 돌아와 그들이 유형지에서 석방될 때까지 회중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면 남부의 증인들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들 역시 혹독한 박해 아래서 충성스러운 증인임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그 때쯤에는 꽤 연로하게 된 알비누 멜렘베가 있었습니다. 1957년에 로렌수마르케스에서 그를 비롯한 다른 몇 명의 형제들 역시 상투메로 추방되었지만, 그들은 증거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우날 토무는 2년 후 상투메에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남풀라 지방에 있는 메콘타로 다시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사망하였지만, 그가 수행한 봉사의 직무의 증거로 회중을 하나 남겼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양 무리의 목자가 되겠습니다”
칼비누 마시아나는 담임 교사가 자기 반 학생들에게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바로 위와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후에 요하네스버그에서 그의 한 동창이 그에게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950년에 로렌수마르케스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스위스 선교회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식민지 경찰 PIDE가 그 곳에 있는 집단에서 경험이 더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여 추방해 버리자, 뒤에 남게 된 사람들은 감독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인 넬리 물로고가 마시아나가 살고 있는 이웃의 친척들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시아나는 넬리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에게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관심자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넬리는 관심자들을 한데 불러 모아 집단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연구 집단에 참석하는 사람은 여섯 명이나 되었습니다. 물로고 자매는 마시아나에게 사회를 부탁하였지만, 그는 “나는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하였습니다. 물로고 자매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여기에 단지 방문하러 와 있는 것뿐입니다. 내가 떠나면 당신이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시아나는 자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하느님의 양 무리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준구자 형제, 형제의 나라로 돌아가십시오’
1953년에 젊은 프란시스쿠 준구자는 베이라를 떠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으로 향하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런던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짐 보따리에는 친구가 선물로 준 「어린이들」이라는 책이 들어 있었습니다. 준구자는 프리토리아에서 영국 국교회에 다니는 한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하루는 그 가족이 준구자가 그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에게 여호와의 증인이냐고 물었습니다. 준구자는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지만 그냥 그 책을 읽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은 친절하게도 준구자가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게 해주었고, 그래서 준구자는 그 증인과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한 지 2년 후에 준구자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준구자 형제는 회중의 장성한 형제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조언을 들었다고 회상합니다. “준구자 형제, 형제의 나라 모잠비크로 돌아가서 거기서 일하는 것이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형제는 이제 침례를 받았습니다. 다른 것을 추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입니다.” (비교 로마 11:13; 빌립보 3:7, 8; 요한 첫째 2:15-17) 준구자 형제는 이 조언을 받아들여 주저하지 않고 로렌수마르케스로 돌아가 그 곳에 있는 작은 집단에 합류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준구자 형제는 결혼하였으며, 아내 파울리나와 함께 모잠비크 전역을 여행하는 일을 함으로 여호와의 조직을 위해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의 사랑은 가혹한 인내의 시험을 당하였습니다. 교도소와 강제 수용소 그리고 정부의 제한 조처 아래서 약 14년을 보냈지만 그는 충실을 유지하였습니다. 모잠비크 형제들이 준구자 형제를 사랑하고 그에게 대단히 고마워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준구자 형제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내 나라로 돌아온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습니다.”
법적 인가를 얻기 위한 시도
식민지 정부의 박해와 추방 조처를 염려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1954년에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졸업생인 밀턴 바틀릿을 모잠비크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는 단지 며칠 머무는 동안 미국 영사와 그리고 포르투갈의 고위 관리와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총독에게 법적 인가를 요청해 보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포르투갈 관리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허용해 준다 하더라도 정부가 바티칸과 정교 조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증인들은 결코 로마 가톨릭 교회만큼 자유를 누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방문에 뒤이어, 다음해에는 또 다른 길르앗 졸업생인 존 쿠크가 모잠비크에 있는 영국 영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영사는 우호적이기는 하였지만, 가톨릭 추기경이 최근에 언론에서 모든 개신교를 공격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그 영사는 비밀 경찰이 여호와의 증인을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고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영사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분파” 가운데서도 증인이 법적 인가를 얻을 가능성이 가장 희박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쿠크 형제의 방문은 좋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파스쿠알 올리베이라라고 하는 관심 가진 젊은 포르투갈 남자를 재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파스쿠알은 몇 년 전 리스본에서 진리에 접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부모에게 연구가 마련되었습니다. 파스쿠알은 후에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1956년에, 당시 모잠비크의 활동을 돌보고 있던 니아살랜드 지부는, 모잠비크 북부 지역에 있는 마을들에서 전파하도록 국경 너머로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다른 형제들도 모잠비크의 필요한 구역에서 봉사하기 위해 왔으며, 그들의 영향은 특히 국경 지역에서 느껴졌습니다.
유형 간 형제들이 돌아오다
시간이 지나자, 자네이루 데데와 그의 형제들이 상투메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상투메에서는 자유롭게 전파할 수 있었지만,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채찍질을 당하였으며 전파 활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다시 추방되어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유대의 산헤드린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대한 방식과 너무나 흡사하였습니다!—사도 5:40-42.
자네이루와 그의 형제들은 이러한 위협에 굴복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1957년 3월, 자네이루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고, 그 후 10여 년간 순회 감독자로 일하며 이 나라 대부분의 지역을 순회하였습니다.
밤새워 증거하다
로렌수마르케스에서 새로운 관심자들이 계속해서 집단에 가세하였습니다. 연구를 위해 모였던 한 장소는 모잠비크 사람인 에르네스투 실라울레의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는 안토니우 란가라는 사람도 살고 있었습니다. 가톨릭 배경을 가진 란가는 교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질문하였고, 특히 삼위일체와 관련해서는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집단 성원들은 그가 PIDE(조사 및 국방 담당 경찰)에 밀고할까 봐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란가는 진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있었으므로, 집 밖에서 계단에 숨어 연구에 계속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들은 것에 근거하여 이것이 진리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루는 한 형제가 란가에게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다음날 란가는 퇴근하자마자, 오후 두 시부터 그 책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새벽 두 시가 되어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란가는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며, 자기 친구 실라울레에게도 같이 전파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 책을 읽으라고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란가와 실라울레는 정령을 숭배하는 시온주의자(마지오네) 집단들이 있는 로렌수마르케스의 외곽 지역을 자기들의 구역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밤에 이 집단들이 자기들의 의식을 위해 함께 모여 드럼 소리에 맞추어 춤추고 마시고 노래할 때, 두 형제는 그들에게로 가서 집단 지도자에게 허락을 받은 다음 짧은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흔히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습니다. 새로 발견한 믿음을 전파하려는 열심이 참으로 대단하였습니다!
로렌수마르케스에서 베풀어진 침례
야외 봉사를 보고하는 사람들의 수가 25명에 달하자,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 편지를 써서 새로운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 대표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답신을 받아 보니, 프란시스쿠 준구자 형제가 직접 이 일을 돌보라는 지시가 들어 있었습니다. 1958년 8월 24일, 신중하게 선택한 장소에서 모임을 가졌고 13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로렌수마르케스에서는 처음 베풀어진 침례였습니다. 침례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칼비누 마시아나, 에르네스투 실라울레, 안토니우 란가와 그들의 아내들 그리고 파울리나 준구자도 있었습니다.
1959년, 준구자 형제가 베이라로 이사 간 후, 실라울레 형제가 PIDE에 의해 소환되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우편물을 가로채서 읽어 왔던 것입니다. 실라울레는 오전 내내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 날 오후 PIDE 요원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모든 출판물을 압수하였습니다. 실라울레의 집에서, 경찰이 타고 온 랜드로버 자동차를 본 형제들과 관심자들은 자기들도 모두 체포되지나 않을까 하여 염려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일 주일 후에 모든 서적이 되돌아왔습니다. 이 일은 그 집단에게 필요한 격려가 되었습니다.
시기 적절한 방문으로 격려를 주다
한편, 파스쿠알 올리베이라를 비롯하여 로렌수마르케스에 있는 유럽인들로 구성된 작은 집단은 니아살랜드 지부에서 파견한 선교인 부부인 할리데이 벤틀리와 조이스 벤틀리로부터 세워 주는 방문을 받았습니다. 일 년에 두 차례 행해진 이들의 방문에는 다른 도시들은 물론, 수도에서 북쪽으로 약 72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베이라를 방문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후에 세계 본부에서 온 밀턴 헨첼도 이들을 방문하여, 여호와의 조직과 함께 세워 나가는 일을 계속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모잠비크 증인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회중이 수도에서 활동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을 때인 1963년에, 이 곳 수도에 유럽인 전도인들을 위한 회중이 하나 형성되었습니다.
용감하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
식민지 경찰 PIDE가 에르네스투 실라울레의 출판물을 돌려 보낸 후 로렌수마르케스에 있는 아프리카인 집단에게는 두려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요일마다 분주한 시파마니네 시장 근처의 나무 그늘 밑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은 확성 장치를 사용해서 일용할 성구를 고려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둘씩 짝지어 시장 근처의 집들과 사업장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오전 11시 반이 되면 원래 모였던 장소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정오에는 널리 광고하였던 공개 강연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따금 일부 전도인들이 봉사의 직무에서 늦게 돌아오면 확성 장치로 이렇게 불렀습니다. “시간이 됐습니다. ··· 시간이 됐어요. ··· 시간이 됐으니까 돌아오세요. ···”
큰 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초대받은 사람들과 형제들 자신 외에도 확성 장치에서 나온 소리에 이끌린 호기심에 찬 구경꾼들이 많이 왔습니다. 사람들이 그 분주한 지역에 큰 원을 이루면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근처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베란다로 나와서 들었고, 성서를 가지고 나와서 성구를 읽을 때 따라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시파마니네 시장과 샤만쿨루 시장, 그리고 크라베이루로페스 거리(지금은 아베니다아코르두스데루사카)를 번갈아 가며 이 마련을 몇 년 동안 계속하였습니다. 이 일은 1960년대의 성장에—회중이 하나에서 넷으로 증가하는 데—기여하였습니다.
그의 카드는 PIDE에 먼저 만들어졌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만나게 된 사람이 미카스 음불루아네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받고 성서 연구를 요청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연구를 하려면 돈을 얼마나 내야 합니까?” 그러한 연구에는 돈이 전혀 들지 않으며, 대신에 형제들은 다음 일요일 강연을 위해 그의 집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쾌히 승낙하였습니다. 연사는 에르네스투 실라울레였고, 약 4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PIDE가 파견한 밀고자가 이 모임을 경찰에 신고하였습니다. 경찰서장은 미카스를 자기 사무실로 소환하였습니다. 미카스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집회라곤 딱 한 번밖에 가 본 적이 없는 이방인 중의 이방인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지방에서 “이방인”은 믿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방인 중의 이방인”이란 말은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느낌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는 소환에 응하기 전에 몇 분간이라도 훈련을 받기 위해 연구를 사회하는 형제를 즉시 불렀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미카스는 종교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경찰서장인 마리우 피게이라는 다음과 같이 심문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집에서 문을 닫아 놓고 경찰은 들어오지 못하게 한 채 외국의 영향을 받은 큰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 집회는 확실히 프렐리무와 관련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피게이라는 당시 모잠비크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던 운동 단체인 모잠비크 해방 전선(프렌테 다 리베르타상 데 모삼비케)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미카스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습니다. “훈련”받을 때 이러한 문제는 다룬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목격했고 또 처음으로 참석했던 전체 집회 마련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하려고 애썼습니다.
“됐어요, 미카스 씨, 그것으로 충분합니다”하고 피게이라가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는 미카스를 팔로 감싸며 이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역사 초기부터 하느님의 종들은 진리를 말한다는 이유로 여러분처럼 박해를 받아 왔지요. 한 가지만 요청하겠습니다. 다음 번에 그러한 큰 집회를 가질 때에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우리에게 알려 주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그러나 당신의 여호와의 증인 카드를 만들 수 있도록 내일 사진 두 장을 가지고 다시 오십시오.” (당시에는 회중의 모든 책임 있는 사람들의 카드가 PIDE에 철이 되어 있었음) 미카스는 껄껄 웃으며 곧잘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인 중의 이방인인 내가 회중에 카드가 생기기도 전에 PIDE에 카드가 만들어졌지요!”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경찰관들이 이렇게 동정적으로 대해 준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말라위에서 있었던 일이 북부 지역의 활동에 이롭게 작용하다
1967년에 말라위에서 세 차례 열린 “제자를 삼는” 지역 대회가 모잠비크 국경 근처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일부 모잠비크 형제들은 참석하기가 훨씬 쉬웠습니다. 그러나 10월에 H. 카무주 반다 대통령은 말라위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금지된 단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증인들에 대한 야만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말라위 전역에서 증인들은 재산이 파괴되고, 구타당하고 일부는 살해당하였으며, 일 천 명이 넘는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성폭행을 당하였습니다. 많은 생존자들은 필사적으로 모잠비크로 피신하였습니다. 예상했던 바와는 달리, 포르투갈 당국은 그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잠베지아 지방의 모쿠바 근처에 있는 두 개의 큰 수용소에서 그들에게 식량이 공급되었습니다. 이 수용소들 중 하나에만도 우리 형제들이 2234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북부 지역에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베이라의 모잠비크인 증인들은 수도에 있는 증인들보다 이 기간 중에 더 많은 자유를 누렸습니다. 이들은 집회를 가질 수는 있었지만, 호별 방문 전파와 관련해서는, 특히 유럽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제한을 받았습니다.
논란의 대상이 된 통지서로 인해 분열이 일다
1968년에 로렌수마르케스의 장로들은 PIDE로부터 소환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통지서”를 하나 받았는데, 거기에는 여호와의 증인은 개종시키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으며, 자기 가족과만 모임을 가져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이 “통지서”에는 장로들이 그것을 받았다는 확인 서명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장로들은 그것이 결코 자기들의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통지서를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 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모이고 전파하라는 성서의 명령에 계속 순종하되, 단지 분별력 있게 더 작은 집단으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마태 10:16; 24:14; 28:18-20; 히브리 10:24, 25)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형제들 사이에 분열이 초래되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장로들이 그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타협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장로들은 떨어져 나간 집단에게, 자기들이 두려워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며 아무런 타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에르네스투 실라울레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그 위원회는 PIDE 당국과 접촉하여 금지령을 내린 이유에 관하여 문의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그들은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종교는 모잠비크에서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더라도 정부가 이 종교를 인가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관리들은 누구든 이 종교를 실천하고 싶다면 다른 나라로 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실라울레 형제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이렇게 확고히 대답하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에게 도둑질, 살인 또는 나쁜 일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잘못이라고 정부에서 판정을 내린다면, 우리는 차라리 체포되겠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계속 가르칠 것이며, 이 곳을 나가도 우리는 바로 그 일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산헤드린 앞에 선 예수의 한 사도를 다시금 생각나게 합니다.—사도 4:19, 20.
이러한 용감한 행동으로 인해, 떨어져 나간 사람들과 화해가 이루어졌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서 파견한 특별 대표자의 반복적인 방문을 포함하여 그들에게 온갖 도움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계속 독립적인 행로를 추구하며 자신들을 “자유로운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 그들은 배교로 인하여 제명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협회는 후에 서신 가운데서, 박해에 직면하여 조심스러운 행로를 취하는 것은 두려움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마태 10:16에 나오는 예수의 교훈과 일치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PIDE가 강한 일격을 가하다
이러한 반역이 있은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PIDE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형제들 16명을 체포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에르네스투 실라울레, 프란시스쿠 준구자, 칼비누 마시아나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PIDE 요원들이 실라울레 형제에게 이 모잠비크 이야기의 서두에 나오는 말을 하였던 것도 바로 이 때였습니다.
뒤이어 더 많은 형제들이 체포되었습니다. PIDE는 어떻게 임명받은 종들의 명단과 주소를 입수하였습니까? 실라울레 형제의 집을 수색하던 중에 그들은 책상에서 「일치 연합하여 전도함」이라는 소책자뿐 아니라 임명받은 종들의 이름이 적힌 협회의 서신이 들어 있는 서류철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자 그들은 특별히 회중의 종, 부회중의 종, 「파수대」 연구 사회자, 회중 서적 연구 사회자들과 그 밖의 형제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이들은 심리도 받지 못한 채, 2년 형을 선고받고 마샤바 교도소에 투옥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투옥되어 있는 형제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부양해야 할 가족들에게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국제 사면 위원회는 이 형제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부양 가족들에게도 얼마의 원조를 해주었습니다. 투옥되지 않은 모잠비크의 형제들은 궁핍한 형제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실라울레 형제의 딸인 알리타는 이 마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늘 먹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전파 사업이 계속되다
“곤란한 시기”였지만, 여호와의 백성은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생명을 나누어 주는 활동을 중단할 수 없었습니다. (디모데 둘째 4:1, 2) 이 나라의 활동에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 사람 중 하나인 페르난두 무템바는 자기 회중에서 회중의 종과 부회중의 종이 모두 체포되던 일을 회상합니다. 무템바는 성서 연구의 종이었기 때문에 그가 인도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협회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에 근거한 일련의 강연을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적절히 조심성을 발휘하여, 그는 이 강연들이 밤에 서적 연구 집단별로 제공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각 연사가 매일 밤 두 집단에서 강연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초대되어 이 영적 양식을 섭취하였고, 진리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증가하였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봉사의 직무에서 효과적이 되고 박해에 직면하여 용감하게 되도록, 그들에게 집중적인 훈련이 베풀어졌습니다. 필리페 마툴라는 자신이 이 초기의 훈련으로부터 얼마나 유익을 얻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가르침받은 모든 것을 성서를 사용하여 능숙하게 증명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두 주간 연구한 후, 우리는 비공식 전파를 시작하였습니다. 종종 셋째 주에는 다른 관심자들을 데려와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넷째 주에는 호별 방문 전파를 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은 시험과 투옥 아래서 인내하도록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격려받았습니다. 회중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형제 중 한 형제만 투옥되지 않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나는 언제 투옥될지 모르는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가 회중을 돌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툴라 형제 역시 마샤바 교도소로 보내졌지만, 그의 열심은 식지 않았습니다.
교도소에서 전파하고 집회를 보다
마샤바 교도소에 있는 집단은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신속히 모든 집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감시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다음과 같이 하였다고 필리페 마툴라는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교도소 운동장에 나가는 기회를 이용하였습니다. 신권 전도 학교에서 연설하도록 임명받은 형제가 다른 네 형제와 함께 마치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걸어다녔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이 형제들을 떠나서 두 번째 형제들과도 똑같은 일을 하였으며, 모든 형제들에게 연설을 할 때까지 그렇게 하였습니다.”
처음에 형제들은 출판물을 도구로 사용하여 감방에서 서적 연구 집회를 가지려고 하였지만, 발각되는 바람에 금지당하여 연구가 계속되지 못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투옥되었던 사람 중 하나인 루이스 빌라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준비한 다음, 미리 약속한 날과 시간에 출판물 없이, 신권 전도 학교를 볼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걸어다니면서 각자 연구 재료의 주요점을 끌어냈습니다. 이 방법은 우리가 연구 재료를 절대 잊지 않도록 암기해야 하였기 때문에 대단히 유익하였습니다.”
투옥되지 않은 가족들은 면회하러 올 때마다 출판물을 음식물 속에 숨겨서 교도소 내로 몰래 가지고 들어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이런 식으로 영육간의 양식을 섭취하였습니다.
다른 재소자들도 집회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형제 세 명이 교도소 한부분을 70명의 다른 재소자와 함께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공개 강연을 하였습니다. 한 형제가 사회를 보고 다른 한 형제가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세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나서 강연이 행해졌습니다. 참석자 수는 모두 합해서 73명이었습니다.
에르네스투 실라울레는, 독립 투쟁을 하다가 PIDE에 의해 체포된 프렐리무 단원과 한 감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하느님의 왕국에 대한 희망에 관해 증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변화된 상황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냠바네에서 열심히 진리를 전하다
남부의 이냠바네 지방을 무대로, 한 겸손한 벽돌공이 열정적인 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아랑 프란시스쿠였는데, 그는 1967년에 로렌수마르케스에서 강연을 들은 후, 자기가 진리를 발견하였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아랑은 자기가 들은 것을 고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는 로렌수마르케스로 돌아온 후, 많은 장로들이 PIDE에 의해 체포될 무렵 침례를 받았습니다. 아랑은 자기가 고향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느꼈으므로, 그들을 더 도울 수 있기도 전에 자기가 투옥될까 봐 걱정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그가 혼자서 증거하기에는 진리 안에 들어온 지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를 만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몇 달을 더 기다렸지만, 고향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아랑은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다시 이냠바네를 향해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가족과만 집회를 가졌지만, 그는 모든 집회를 열었습니다.
아랑은 이냠바네 시와 마시셰 시 및 그 지역의 기타 다른 마을들에서 진리의 씨를 뿌려, 오늘날 그 곳에서 보게 되는 회중들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한 가톨릭 사제가 “이 곳에서는 어떤 집단도 구성할 수 없다”고 하며 방해하려고 하자, 아랑은 용감하게 이렇게 대응하였습니다. “내가 전하는 좋은 소식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소식은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사도 1:8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장차 있을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지방 사제는 아랑을 그 지역에서 추방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아랑은 자기는 이사 가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그 사제가 자기가 좋아하는 동맹자 PIDE를 불러들인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PIDE가 전파하는 한 건축가를 찾다
어느 일요일, 아랑이 멀리 떨어진 다른 집단들을 방문하고 있을 때 네 명의 PIDE 요원이 이냠바네의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은 방문 중인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집회가 끝나자 그들은 자기들의 신분을 밝히며 아랑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아랑을 찾지 못하자 그들은 집회에 참석해 있던 형제 8명을 체포하였습니다.
아랑이 응궤니에 있는 행정관의 집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요원들은 그를 찾으러 그 곳으로 갔습니다. 아랑은 행정관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그를 가게 할 수는 없소. 그는 먼저 내 집을 짓는 일을 끝마쳐야 합니다.” 그러자 요원들이 물었습니다. “그가 이 집을 짓고 있단 말입니까?” “그렇소” 하고 행정관은 대답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시셰에 있는 집과 그 밖에 많은 집을 지었습니다. 그가 내 집을 짓기 위해 하는 이 작업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소. 그는 마시셰의 등기소를 지었고, 또 여인숙도 지어야 합니다.” 그러한 경력을 듣고서 요원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건설부 행정관의 집을 짓도록 아랑을 데리러 다시 오겠습니다.”
아랑은 체포되어 정부의 다양한 건축 공사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소자가 되었어도 그에게는 증거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PIDE의 한 관리가 밤이면 아랑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 「진리」 책 연구를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관리인 네베스 씨는 다른 사람들이 오면 재빨리 일부 서류들을 끄집어 내놓고 심문하는 척하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랑,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 때문에 나는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리스본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여호와의 증인과 이야기해 왔습니다. 이제 곧 퇴직하게 되면 나도 여호와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두기 전에 당신을 석방시켜 주어야겠습니다. 당신이 현재 하고 있는 작업을 마무리 지으십시오. 그러면 다른 벽돌공을 쓰도록 총경에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는 리스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미국으로 가겠습니다. 내 말 알아듣겠지요, 아랑?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네베스 씨는 성심껏 자기가 한 약속을 지켰으며 이냠바네에 투옥되어 있는 형제들까지도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랑을 석방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PIDE가 그를 자기들의 건축가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 무렵 네베스 씨는 이미 퇴직하였지만, 매일 자기 친구인 총경을 찾아가 아랑을 석방시켜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네베스 씨는 자기가 약속한 대로, 아랑이 석방된 후에야 자기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우리는 네베스 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기가 한 나머지 약속도 지켰습니까? 그렇게 하였기를 우리는 진정으로 바랍니다.
정치적 변화가 일시적인 안도감을 갖게 해주다
1974년 5월 1일, 마샤바 교도소 전체에 기쁨의 외침이 들렸습니다. 4월 25일의 “카네이션 혁명”(레볼루샹 두스 크라부스)이 포르투갈 내의 독재 정치에 종지부를 찍는 바람에 해외 식민지들에도 극적인 변화가 일었습니다. 5월 1일, 모든 정치범들이 사면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정치적 중립 때문에 투옥되었으므로 이 사면에 포함되었습니다. 모잠비크는 이제 독립국이 될 준비를 하였습니다.
석방된 형제들은 여호와의 종들의 수적인 증가를 보고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투옥되지 않은 형제들이 영적으로 매우 강한 것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비교 빌립보 1:13, 14) 새로운 자유를 선용하여 그들은 순회 대회를 아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습니다. 그들의 기쁨을 더해 준 것은, 그들에게 소중한 두 명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형제—모잠비크 형제들의 복지에 예리한 관심을 보여 온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 프랜스 멀러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모잠비크 남부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해 온 일라이어스 마헤녜—가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투옥되었던 형제들에게 신속히 전진하는 여호와의 조직과 연합하여 일하도록 격려가 베풀어졌습니다. 마헤녜 형제는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PIDE는 사라졌지만, 그의 할아버지 사탄 마귀는 아직도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강화시키고 용기를 키우십시오.” 그는 투옥되었던 형제들에게 일어서 보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일어섰습니다. 그 다음 그는 이 형제들이 투옥되어 있던 기간에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일어서 보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청중의 반수나 되는 2000명가량이 일어섰습니다. 마헤녜 형제는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여러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시기 적절한 격려의 말이었습니다. 지평선 상에 먹구름이 형성되고 있었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관련된 최대의 시험이 모잠비크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1974년은 신속히 지나갔습니다. 그 해에 1209명이 침례를 받았고, 1975년에는 2303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장로로 일하는 많은 형제가 바로 그 시기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열기가 온 나라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비바 프렐리무”(프렐리무 만세)라는 표어가 자유와 독립을 위한 10년간의 투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전국민이 도취되어 있었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누군가가 불참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조되는 감정으로 인해, 형제들이 누린 단기간의 자유에 막이, 그것도 철의 장막이 내리려 하고 있었습니다.
체포 명령
1975년 6월 25일의 독립 기념일 준비 행사가 구체화되기 시작하면서 여호와의 증인의 중립적인 입장이 한층 더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형제들이 새로운 정부와 면담을 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외침으로 사실상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반드시 없애버리겠습니다. ··· 우리는 그들이 포르투갈의 식민 정부가 남겨 놓은 앞잡이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전의 PIDE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국민들이 그들을 즉각 체포하도록 제안하는 바입니다.”
폭풍이 밀어닥쳤습니다. 모든 여호와의 증인을 체포하려는 하나의 공동 목표를 가지고 인근에서—전국적으로, 주야를 불문하고 아무 때나 직장에서, 집에서, 거리에서—소위 행동대가 동원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일터나 공공 장소에서 열리는 반상회에 나오도록 강요되었으며, 군중과 함께 “비바 프렐리무” 하고 외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적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국가주의적 열정이 광적으로 달아오를 때는 그러한 영이 팽배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이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을 유지하지만, 법과 질서를 지키고, 관리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고,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세금을 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모잠비크 정부는 여러 해에 걸쳐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모잠비크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처한 상황은, 황제에게 분향하기를 거부하여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나 “하일 히틀러”라고 외치기를 거부하여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독일의 형제들이 처한 상황과 유사하였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은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추종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세상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그들도 세상의 일부가 아닙니다.”—요한 17:16.
집단 추방—어디로?
얼마 안 있어, 모잠비크의 교도소들은 수천 명의 여호와의 증인으로 넘치게 되었습니다. 많은 가족이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격렬한 선전으로 증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일자, 장로들이 권장하지 않았는데도, 많은 증인들은 차라리 자진 신고하는 쪽을 택하였고, 그렇게 하여 그들은 이미 교도소에 들어와 있는 형제들이나 친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더 안전을 느꼈습니다.
1975년 10월 이후, 짐바브웨(당시는 로디지아)지부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순회 감독자들과 책임 맡은 여러 위원회 및 형제들 개개인으로부터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보고를 받았는데, 한결같이 우울한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이 보고들은 또한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에 전달되었습니다. 전세계의 형제들이 모잠비크 형제들이 처한 끔찍한 상황에 관한 소식을 받자마자, 히브리 13:3에 있는 교훈과 일치하게, 이 박해받는 형제들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가 지상 전역에서 하늘로 상달되었습니다. 오직 여호와께서만 그들을 붙들어 주실 수 있었고, 그분은 자기의 방법대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실제로 경험한 것과 같은 잔인한 박해를 가하는 것이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하위 당국자들은 증인들의 뿌리 깊은 양심적 확신을 바꾸기 위한 단호한 노력으로,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강제로 “비바”를 외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빌란쿨루스의 줄리앙 코사가 그 수많은 예 중의 하나인데, 그의 믿음을 타협시키기 위해 세 시간 동안 그를 구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고문자들은 이따금 강제로 “비바”를 외치게 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증인들에게 또한 “여호와 타도” “예수 그리스도 타도” 하고 외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겪은 잔학 행위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자세히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였습니다. (「깨어라!」 1976년 4월 22일 호 10-17면 참조) 그러나 형제들은 1세기에 사도 바울이 빌립보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바와 같이, 환난과 박해에 직면하여 자기들이 나타낸 용감한 태도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깊이를 알려 주는 증거가 되며,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구원의 상을 주실 것이라는 보증이 됨을 알았습니다.—빌립보 1:15-29.
교도소들이 초만원을 이루게 되었고 그로 인한 질식할 듯한 상황이 불결함과 식량 부족으로 악화되어, 마푸토(이전의 로렌수마르케스)의 교도소들에서 4개월 동안 60명 이상의 어린이가 사망하였습니다. 아직 투옥되지 않은 형제들은 교도소에 있는 형제들을 부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1975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일부 증인들은 투옥되어 있는 형제들에게 먹을 것을 계속 공급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소유물을 팔았습니다. 자신을 투옥되어 있는 사람과 결부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었는데도, 많은 증인이 형제들의 필요를 돌보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의 참 추종자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러한 사랑이었습니다.—요한 13:34, 35; 15:12, 13.
역설적이게도 이 동일한 기간에, 소팔라 지방의 일부 증인들은 전혀 다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체포되자마자 베이라 시에 있는 호화로운 그랜드 호텔로 가서, 최종 목적지로 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음식을 대접받았습니다.
목적지는 어디였습니까? 그것은 비밀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수송할 많은 버스와 트럭 운전사들에게까지도 말입니다.
목적지—밀란제 지방의 카리쿠
1975년 9월부터 1976년 2월 사이에, 교도소에든 야외에든, 억류되어 있는 모든 여호와의 증인이 이송되었습니다. 경찰을 비롯하여 여타 지방 당국자들은 목적지를 밝히지 않는 것을 형제들을 협박하기 위한 또 다른 무기로 사용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당신들은 야수의 먹이가 될 것이오. 그 곳은 북쪽의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서, 당신들은 그 곳에서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믿지 않는 가족들은 대성 통곡을 하며 믿는 사람들에게 항복하라고 졸라댔습니다. 그러나 타협한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심지어 새로운 관심자들도 용감하게 여호와의 증인과 운명을 같이하였습니다. 정치적 이상을 열렬히 지지하던 에우제니우 마시텔라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교도소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꽉 차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기 위하여 성서 연구를 요청한 그는 일 주일 후에 체포되어 추방당하였습니다. 마시텔라는 강제 수용소에서 침례받은 최초의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지금은 순회 감독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증인들은 교도소에서 나와 버스와 트럭, 심지어 비행기에 탈 때에도 두렵거나 불안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1975년 11월 13일, 가장 인상적인 이송 대열이 마푸토를 출발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마시봄보스라고 부르는 버스 14대가 대열을 이룬 것입니다. 책임 맡은 군인들은 형제들의 기뻐하는 표정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기뻐할 수가 있소? 당신들이 가게 될 곳은 결코 좋은 곳이 아닐 텐데 말이오.” 그러나 형제들의 기쁨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친족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울고 있었지만, 증인들은 “용감하게 전진하라”와 같은 제목의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는 도중 매 도시에서 운전사들은 목적지를 알기 위하여 상부에 전화를 걸었는데, 그들에게는 다음 기착지로 가라는 명령만 내려졌을 뿐이었습니다. 어떤 운전사들은 길을 잃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마푸토에서 1800킬로미터 떨어진 잠베지아 지방의 중심 도시인 밀란제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형제들은 행정관으로부터 “환영사” 즉 협박 가득한 욕설로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동쪽으로 30킬로미터를 더 가서 문두지 강둑에 있는 한 장소에 이르렀는데, 그 지역은 카리쿠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 곳도 밀란제 지방에 속해 있었습니다. 말라위에서 일어난 박해의 물결을 피해 고국을 떠나 온 수천 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1972년 이래 그 곳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모잠비크 형제들의 도착을 예상치 못하였던 말라위 형제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낯선 언어를 하는 형제들로부터 영접을 받는 것은 모잠비크 형제들에게 있어서도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지도 않은 아주 기쁜 일이었고, 말라위 형제들이 모잠비크 증인들을 아주 따뜻하고 후하게 영접하는 것을 보고 운전사들은 감동을 받았습니다.—비교 히브리 13:1, 2.
이 지역 행정관은 몇 년 전에 마샤바 교도소에서 형제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각 집단을 맞아들일 때마다 이렇게 묻곤 하였습니다. “실라울레와 준구자는 어디 있소? 그들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실라울레 형제가 도착하자 그 행정관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실라울레, 당신을 어떻게 맞아들여야 할지 정말 모르겠군요. 우리는 이제 서로 다른 진영에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자기의 이념을 고수한 채 이전의 감방 동료들을 위해 상황을 조금도 쉽게 조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에 대해 지칭한 대로, “양들 가운데서 다스리는 염소”였습니다.
국제적인 형제 관계를 누리고 있는 동료들로부터 온 사랑에 찬 지원
국제적인 형제 관계를 누리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모잠비크 형제들에 대해 사랑에 찬 염려를 나타냈습니다. 그들이 모잠비크 당국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보낸 통신문이 이 나라에 쇄도하여 우편 업무가 폭주하였습니다. 전기 통신 회사에서 근무하는 증인인 아우구스투 노벨라는, 여호와의 증인이 지방의 한 분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텔렉스 기계에 전세계로부터 온 통신문이 접수되기 시작하자 그들은 잠잠해졌습니다. 이 압도적인 반응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참으로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약 10개월 후, 정부의 한 각료가 수용소를 시찰하러 왔다가 형제들이 거짓 비난으로 감금된 것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자유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일렀습니다.
새로운 생활에 따르는 도전
모잠비크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그 곳에 있는 말라위 형제들은 여덟 개의 마을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숲 속에서의 새로운 생활 방식에 적응하는 데 많은 경험을 얻어, 집과 왕국회관, 심지어 대회 회관을 건축하는 일에 그들 나름대로의 기술을 개발하였습니다. 이전에 농사 짓는 일에 경험이 없던 형제들도 그와 같은 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마샴바(경작지)를 전혀 일구어 본 경험이 없는 많은 모잠비크 형제들은 처음으로 밭에서 고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 새로 도착한 형제들은 말라위 형제들의 사랑 넘친 후대에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모잠비크 형제들을 집으로 받아들이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잠비크 형제들이 그들 자신의 마을을 건설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기가 시작되었고, 그 지역은 전례 없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로 관대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용소 한가운데로 흐르는 문두지 강이 여느 때 같았으면 가뭄으로 시달렸을 이 지역으로 넘쳐흐르자, 형제들은 이 일을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어떻게 돌보실 것인지를 예시하는 징조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 후 12년간 이 강은 이전처럼 마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편, 무템바 형제가 회상하는 바에 의하면, “우천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생긴 질척질척하고 미끄러운 지형은 이전의 도시 거주자들에게 가외의 도전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여자들이, 단지 임시 변통으로 만든 통나무 다리에서 균형을 잡으며 강을 건너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사무실에 익숙한 남자들인 우리에게 도전이 된 것은 빽빽한 숲 속으로 들어가 집을 지을 나무를 베어 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샤비에르 덴고는 회상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일부 사람들에게 예기치 않은 시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세 시대에, 이집트에서 광야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따라 나온 “섞여 사는 무리” 가운데서 불평이 시작되어, 그 불평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로 퍼졌음을 기억합니다. (민수 11:4) 그와 마찬가지로, 아주 시초부터 침례받지 않은 증인들 가운데서 불평하는 무리가 나타났고, 침례받은 일부 증인들도 그들에게 가담하였습니다. 그들은 행정관에게 접근해서, 가능한 한 속히 다시 집으로 보내 준다면 어떠한 대가도 기꺼이 치르겠다고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들이 바랐던 것처럼 신속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밀란제에 있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충실한 사람들에게 신발 속의 돌멩이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반역자들”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충실한 형제들 틈에서 살면서도 언제나 그들을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험 아래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였습니다.
회관들이 무너진 이유
수용소 내의 말라위 형제들은 상당히 많은 숭배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모잠비크 형제들도 이 곳에 와서 처음에는 그러한 유익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매일, 한 큰 대회 회관에 모여 일용할 성구를 고려하였습니다. 종종 말라위의 순회 감독자가 사회하였습니다. “투옥과 여행으로 여러 달을 보낸 후 그렇게 많은 형제들과 함께 영적인 권고를 듣는 것은 강화시켜 주는 일이었습니다”라고 필리페 마툴라는 회상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비교적 자유로웠던 기간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1976년 1월 28일, 정부 당국자들은 군인들을 동반하여 마을들을 지나가면서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회관에서나 마을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숭배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금지되었소. 회관은 국유화되어 정부에서 임의대로 사용할 것이오.” 그들은 형제들에게 모든 서적을 가지고 나오라고 명령한 다음, 그것들을 압수하였습니다. 물론, 형제들은 가능한 대로 숨겼습니다. 그 후 각 회관 앞에는 기가 게양되고, 군인들로 보초를 세워 반드시 포고령대로 따르게 하였습니다.
회관은 나무 기둥으로 만들어져 있어 투박해 보이기는 하였지만 제법 튼튼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모두가 붕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샤비에르 덴고는, 한번은 자기와 행정관이 한 마을에 막 도착하였을 때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회관이 실제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던 일을 기억합니다. 행정관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게 웬 일입니까? 여러분은 나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회관을 국유화하니까 회관이 모두 무너져 가니 말입니다!” 그 행정관은 나중에 한 장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회관이 무너지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게 틀림없고, ··· 그래서 여러분의 하느님이 그것들을 무너지게 한 겁니다.”
마을들의 조직
아홉 개의 모잠비크 마을이 신속히 세워져 기존의 여덟 개의 말라위 마을과 나란히 서로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이 두 집단은 “순결한 언어”로 연합되어 그 후 12년간 함께 살았습니다. (스바냐 3:9, 「신세」) 각 마을은 잘 정리된 길을 따라 구획들로 나뉘었고, 각 구획은 대략 25미터 곱하기 35미터 되는 넓이의 여덟 개 반(班)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회중은 구획에 따라 나뉘었습니다. 수용소 내에 금지령이 선포된 후, 형제들은 왕국회관을 눈에 띄게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는 대신, 특수한 ㄴ자형의 집들을 지어 같은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과부나 그 밖의 독신인 사람이 이 집에 살게 하여 이 집들이 주택처럼 보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집회를 볼 때는 연사가 “ㄴ”자의 가운데 귀퉁이에 서 있었으며, 따라서 양쪽 청중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각 마을 주변에는 마샴바가 있었습니다. 각 회중은 또한 “회중의 마샴바”도 돌보았는데, 모두가 그것을 경작하는 데 참여함으로 회중의 필요를 돌보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각 마을의 크기는 인구에 따라 달랐습니다. 1979년의 인구 조사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모잠비크의 제7마을이 가장 작아서 단지 전도인 122명에 회중이 2개인 반면, 가장 크고 가장 먼 곳에 있는 제9마을은, 전도인이 1228명에 회중이 34개였습니다. 수용소 전체에 11개의 순회구가 있었습니다. 말라위와 모잠비크 마을들 및 그 부속 지역으로 이루어진 이 수용소 전체는 형제들에게 카리쿠 지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기록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인구 조사는 1981년에 행해진 것인데, 당시 카리쿠 지구의 전체 인구는 2만 2529명이었고, 그 중에 활동적인 전도인은 9000명이었습니다. 나중에 인구가 더 증가하였습니다. (「쿤솔리데모스 아킬루 키 노스 우네」[우리의 연합을 공고히 함]라는 팜플렛 38-9면에 의하면, 당시의 대통령인 사모라 마셸은 그 곳의 인구가 4만 명이라고 공표하였다.)
신구 소장의 시대—어려운 시기
물론, 여호와의 증인들을 밀란제로 데려간 것은 단순히 농경 식민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라위 제4 수용소 한가운데에 행정 본부를 설치해 놓고 사무실 및 주거지와 함께 정부 요원들을 배치해 놓은 사실로도 입증되듯이, 정부에서 이 수용소를 카리쿠 재교육 센터라고 부른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또한 수용소장과 그의 휘하의 군인들, 그리고 소장의 결정에 따라 수많은 우리 형제들을 다양한 기간 감금하였던 교도소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소장은 신구였습니다. 그가 소장으로 재직하던 2년간은 신구의 시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꺾어서 “재교육”시키고 말겠다고 결심한 그는, 목적 달성을 위해 폭력을 가하는 것은 물론 자기가 알고 있는 온갖 심리전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실제로 무슨 공식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신구는 예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유창하고 설득력 있는 연사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재능을 사용하여 형제들에게 자기의 정치 철학을 주입해서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약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책략 중 하나는 “5일간의 세미나”였습니다.
“5일간의 세미나”
소장은 “5일간의 세미나”가 계획되었으며, 증인들은 마을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 즉 흥미 있는 정보를 전달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뽑아야 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개최될 세미나에 보내질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소장의 의도가 의심스러워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있는 “반역자들”이 순회 감독자를 포함하여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형제들을 지적해 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프란시스쿠 준구자, 샤비에르 덴고 및 루이스 빌라가 있었습니다. 트럭 한 대가 21명의 남자와 5명의 여자를 싣고 출발하였습니다. 그들은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하여, 니아사 지방에 있는 리신가 북쪽 지역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남자들은 범죄자들과 함께 “재교육 수용소”에 넣어졌고, 여자들은 창녀들의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고문자들이 “그리스도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하여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의 팔을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양 옆으로 쭉 뻗게 한 다음 말뚝 하나를 팔과 나란히 갖다 댔습니다. 이쪽 손가락 끝에서 저쪽 손가락 끝까지 양팔 길이만큼 갖다 댄 말뚝에다 양팔을 나일론 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손과 팔과 어깨를 조금도 구부리지 못하게 한 채 그러한 자세로 상당 시간 세워 두어 강제로 “비바 프렐리무”를 외치게 하려고 하였지만, 헛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학대로 인해 충실한 장로 루이스 빌라는 심장 마비를 일으켜 사망하였습니다.
자매들은 “운동”이라는 학대를 받았는데, 이따금 물 속에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거의 쉬지 않고 달리고, 같은 산을 쉴 새 없이 반복해서 오르락내리락해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세미나였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재교육”이었습니다!
이러한 잔인한 학대에도 불구하고 이 형제들 대다수는 충절을 고수하였고, 단지 두 명만 타협하였습니다. 한 형제가 용케도 마푸토에 있는 내무부 장관에게 서신을 띄워 이러한 학대를 폭로하였습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니아사의 주지사가 직접 헬리콥터를 타고 왔습니다. 그는 즉시 소장과 그의 보좌관들에게서 모든 권한을 빼앗은 다음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프렐리무가 전혀 의도한 적이 없는 행위를 한 죄로 체포되었소.” 비슷한 학대로 고통을 당해 온 다른 재소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서 기뻐 외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우리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은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십시오.”
얼마 후 형제들은 다른 수용소들로 이송되었는데, 그 곳에서 받은 학대는 단지 강제 노역뿐이었습니다. 모두 합해서 거의 2년이 지난 후에 그들은 카리쿠로 돌아왔으며, 신구가 거기서 그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신구는 계속해서 비슷한 “세미나”를 행하여 여호와께 대한 형제들의 충성을 약화시키려고 시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카리쿠를 떠날 때에도, 그는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예를 사용해서 연설하였습니다. 그는 패배를 자인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나무를 여러 번 쳐서 이제 조금만 치면 그 나무를 넘어뜨릴 수 있는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됩니다. 그 다른 사람은 딱 한 번만 더 치면 일을 끝낼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 번 쳤지만 끝내지 못하였습니다. 내 후임으로 다른 사람들이 올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겠지요. 굴복하지 마십시오. ··· 계속 확고한 태도를 유지하십시오. ···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모든 영광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여호와께 대한 사랑을 강하게 유지하여, 반드시 여호와께서만 영광을 받으시도록 힘을 기울였습니다.—계시 4:11.
도시에 남아 있던 사람들
이 기간에 모잠비크 증인은 모두 교도소나 수용소에 가 있었습니까? 적들이 그들을 일터와 이웃에 있는 거의 모든 집으로 샅샅이 찾아 다녔지만 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증인들이 교도소로 보내지거나 다른 어떤 방법으로인가 처벌받기를 모든 사람이 원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증인들은 항상 체포될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식료품을 사거나 공공 수도에서 물을 길어 오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활동조차도 위험하였습니다.
베이라에 남아 있던 리세테 마이엔다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참석하도록 요구된 정치 집회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는 데 필요한 신분증을 발급받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한 우호적인 가게 주인이 나를 은밀히 불러서 밀가루를 몇 킬로그램씩 팔곤 하였습니다.” (비교 계시 13:16, 17) 마이엔다 형제는 베이라 항구에서 여섯 번이나 해고당하였지만, 매번 고용주들이 다시 와서 그를 찾곤 하였습니다. 그의 전문 자격이 회사에 아주 유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증거하는 일과 함께 모이는 일은 상당히 위험하였지만, 이 나라의 주요 도시 어디에서도 빛이 꺼진 적이 없었습니다. 인근의 에스투루에 있는 일단의 젊은이들이 베이라의 마이엔다 가족과 함께하였는데, 그들은 용감하였으며 진리를 갈구하였습니다. 이들은 힘을 합쳐 소팔라 주의 주도에 계속 빛이 비치게 하였습니다. 베이라에 있는 집단은 대단히 열심이어서, 위험에도 불구하고 영적 양식을 얻기 위해 국경을 넘어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로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샐리스베리(지금의 하라레)에 있는 지부는 북부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형제들을 돌보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담대히 일하였습니다. 따라서 아직도 집회를 보고 있는 집단이 테테에 있다는 소식이 지부 사무실에 전해지자 지부는 두 명의 형제를 파견하여 그 집단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동료 일꾼인 에바브로디도처럼 그들도 형제들을 보기를 열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2:25-30) 이 형제들 중 한 사람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던 레드손 줄루였는데, 그는 치체와어로 감동적인 연설을 하는 사람으로 북부 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는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숲 속을 자전거로 여행하여 고립되어 있는 모잠비크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남풀라 지방에서도 진리의 불꽃이 계속 타올랐습니다. 침례받지 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이 그 곳에 남아서 그들 나름대로 계속 집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참석자가 8명이었는데, 그 수가 곧 5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카리쿠에 있는 한 형제가 남풀라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그 집단의 한 성원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입원한 형제가 협회에 서신을 띄우자, 지부에서는 그에게 그 집단과 연구를 하여 침례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침례 줄 마련을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다섯 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세속일로 남풀라에 와 있던 네덜란드 출신의 한 증인이 집회를 보도록 자기 집을 내놓자, 그들은 더 큰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 집단 성원 중 일부는 장로의 책임을 질 만큼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중앙 교도소에서의 해방
1975년, 마푸토의 교도소들에 있는 재소자들이 차례로 한 무리씩 북쪽으로 보내지고, 다른 재소자들이 속속 도착하여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1976년 2월 말경, 정부는 증인 재소자들을 끊임없이 이송시키는 일을 중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몇 달 후, 사모라 마셸 대통령이 마푸토의 중앙 교도소를 방문하였습니다. 재소자 중 한 사람인 셀레스테 무템바 자매는 기회를 포착하여 대통령에게 증거하였습니다. 대통령은 우호적인 태도로 경청하였는데, 그가 떠난 후 이 자매는 교도소 당국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 주일 후, 이 자매를 석방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며, 이 자매가 더는 정치적인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보호받을 것임을 보증함은 물론, 이전에 근무하던 중앙 병원에 복직할 권리를 보장하는 문서도 함께 보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교도소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모두 석방하라는 공식 인가가 났습니다.
마푸토의 증인들은 회중을 조직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마푸토에서 북동쪽으로 이냠바네에 걸쳐 있는 24개 회중이 한 순회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피델리노 덴고가 그 회중들을 방문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장로들의 위원회를 임명하여 이 회중들의 영적 필요를 돌보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비공식적으로 전파하는 방법을 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이웃 나라인 스와질란드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게다가 형제들은 일부 형제들이 카리쿠에서 돌아왔을 때, “귀향 환영” 파티를 가장한 대회들을 바로 모잠비크에서 개최하였습니다.
그러면 카리쿠는 어떠하였습니까? 그 곳에는 영적 활동을 위한 어떠한 마련이 있었습니까?
“O.N.” 위원회가 수용소들을 감독하다
짐바브웨 지부의 감독 아래 말라위 형제들은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용소 내의 영적 필요를 돌봐 왔습니다. 카리쿠로 끌려 온 모잠비크 남부 출신의 형제들 역시 그 곳에서 이미 운영되고 있던 마련들로부터 유익을 얻었습니다. 남부에서 온 두 명의 형제, 즉 페르난두 무템바와 필리페 마툴라가 그 위원회에 더 포함되었습니다.
이 O.N. 위원회(오피시 야 은치토: 치체와어로 봉사부)는 협회와 서신을 교환하며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수용소 전체를 위한 보고들을 수집하여 마을에 있는 장로들과 정기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들은 또한 11개 순회구의 활동도 감독하였습니다. 그들의 책임은 막중한 것이었는데, 형제들과 정부 당국자들 사이의 불안한 관계 때문에 특히 그러하였습니다.
수용소 내에서 전파하고 제자를 삼음
1975년에 형제들을 따라 밀란제로 온 상당수의 관심자들과 성서 연구생들이 1976년 11월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정규 파이오니아였던 많은 형제들은 투옥되어 수용소로 이송되는 기간에도 전파하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전파하였습니까? 처음에는 형제들의 자녀들을 포함하여 아직 침례받지 않은 사람들과 연구하였습니다. 자녀가 많은 가족은 “좋은 구역”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녀들 중 일부는 부모가 연구하고, 다른 자녀는 독신 전도인들이 나누어 연구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전도인들은 제자를 삼는 일을 계속 활동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복음 전파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한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가 수용소 바깥 구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수용소 당국이 가하는 제한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위험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수용소를 떠날 얼마의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구실을 댈 수 있었습니까? 그는 기도로 여호와의 인도를 구한 다음, 수용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금을 비롯한 기타 식료품을 팔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실질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값을 비싸게 불러 증거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방법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윽고, 수용소 바깥에서 물품을 판매하는 이러한 “행상인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습니다. 흩어져 있는 구역을 돌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해야 하였으므로, 그들은 새벽에 떠나 밤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이토록 많은 “메뚜기”가 먹기에는 “초목”이 빈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통해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잠베지아의 생산 본부”
이 근면한 “재교육생들”의 부지런한 노동과 그 지역에 물을 대 준 풍부한 비 때문에 농산물의 소출이 풍부하였습니다. 수용소의 증인들은 옥수수, 쌀, 카사바, 수수, 고구마, 사탕수수, 콩, 그리고 마푸라와 같이 그 지역에서만 나는 과일 등을 풍부히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카리쿠 지구의 곡물 창고는 넘칠 정도였습니다. 가금류를 비롯한 작은 가축들, 이를테면 닭, 오리, 비둘기, 토끼, 돼지 등을 기른 덕분에 식탁에 단백질이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겪었던 굶주림은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나라의 다른 지역들은 사상 최대의 기근을 겪고 있었습니다.—비교 아모스 4:7.
정부는 이러한 농경 성공 사례를 인정하여 이 수용소 지역을 “잠베지아의 생산 본부”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잉여 생산물을 팔아서 얻은 수입으로 의복은 물론 라디오와 자전거까지도 어느 정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재소자 신분이었지만, 부지런하였기 때문에 형제들은 차림새가 말쑥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정부의 세법에 양심적으로 순응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 지역의 주요 납세자 가운데 속하였습니다. 성서의 표준과 일치하게, 어떤 사람이 회중에서 특정한 특권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고려할 때,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심적으로 세금을 내는 것이 한 가지 요구 조건이었습니다.—로마 13:7; 디모데 첫째 3:1, 8, 9.
문화 교류
카리쿠에서는 기술과 문화를 상호 교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형제가 벽돌 쌓기, 목공, 나무에 조각하는 일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배웠습니다. 형제들은 공구 제작, 무쇠 가공, 양질의 가구 제작 등등의 능력을 개발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기술을 배우고 연마함으로 개인적인 유익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활동으로 형제들에게는 또 다른 수입의 원천이 마련되기도 하였습니다.
문화 교류에 있어서 최대의 도전은 언어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모잠비크 형제들은 말라위 형제들이 사용하는 치체와어를 배웠습니다. 이것이 수용소에서 사용하는 주요 언어가 되었고, 구할 수 있는 출판물은 대부분 치체와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말라위 형제들도 서서히 그리고 품위 있게, 모잠비크 남부에서 사용하는 츠온가어와 그 변형어들을 배웠습니다.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배운 형제들도 많이 있었는데, 이렇게 한 것은 후에 그들이 특별한 봉사의 특권을 받는 데 가치 있는 일이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한 장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우리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형제나 자매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런 때는 그가 모잠비크 사람인지 말라위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지요.”
영적 양식이 어떻게 수용소로 들어왔는가?
잠비아로부터 말라위를 거쳐 영적 양식이 들어왔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한 순회 감독자는 “오직 여호와께서만 아시지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수용소 내의 O.N. 위원회는 다수가 파이오니아인 젊은 말라위 형제들을 임명하여 자전거를 타고 국경을 넘어가 이미 지정된 장소에서, 서신과 출판물을 배달하기 위해 파견된 형제들을 만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회중들은 새로 나온 영적 양식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O.N. 위원회 위원들도 국경을 넘어 잠비아나 짐바브웨까지 여행하여, 통치체가 파견한 지구 감독자의 연례 방문으로부터 유익을 얻었습니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카리쿠에 있는 형제들은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과 강한 유대를 유지하였으며, 그렇게 하여 그분을 숭배하는 일에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회중 집회를 열기 위해서는 특별한 마련이 필요하였습니다. 형제들이 끊임없이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집회는 새벽 혹은 그보다 더 일찍 열렸습니다. 참석자들은 마당에서 죽을 먹는 것처럼 바깥에 모여 있고, 연사는 집 안에 서 있었습니다. 일부 집회는 강바닥이나 천연 분화구 안에서 열렸습니다. 그러나 지역 대회를 준비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일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지역 대회들을 조직한 방법
협회로부터 프로그램을 위한 모든 자료를 받으면, O.N. 위원회는 여러 주 동안 제9마을로 깊숙이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이 비교적 외딴 곳에서, 그들은 밤새 초롱불 아래서 연설의 개요를 번역하고, 드라마를 녹음하고, 연사들을 임명하였습니다. 짐바브웨에서 받은 등사기가 특히 유용하였습니다. 그들의 일은 일련의 여섯 개 대회를 위한 프로그램이 전부 완성되어야만 끝이 났습니다.
이에 더하여 일단의 형제들을 임명하여 지역 대회 장소가 될 만한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고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장소는 산중턱이나 숲 속이 될 수 있었는데, 수용소에서 적어도 10킬로미터 이상은 떨어져 있어야 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당국자들이나 “반역자들”이 모르게 이루어져야 하였습니다. 조그만 휴대용 라디오들을 빌려서 3000명이 넘는 청중을 위한 확성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그러한 곳에는 언제나 근처에 물이 흐르고 있어서, 물을 막아 침례장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연단, 청중석, 청소부, 영선부 등이 모두 미리 마련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대회장이 매년 다른 장소에 준비되었습니다.
마을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참석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형제들이 훌륭한 협력의 영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일이 순조로웠습니다. 형제들 모두가 동시에 참석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마을을 비우면 당국자들의 주의를 끌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끼리 교대로 참석하였습니다. 하루는 한 가족이 참석하고 다음날에는 다른 가족이 참석하였습니다. 뒤에 남은 가족은 이웃집에 들어가 돌아다니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가족이 없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대회의 일부를 즐기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의 프로그램이 두 번씩 제공되었습니다. 따라서 3일간의 지역 대회는 6일간 계속되었고, 2일간의 순회 대회는 4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참석자들 가운데 동정을 살피는 형제들의 연락망이 연쇄 통신망을 이루었습니다. 이 통신망은, 500미터마다 한 사람씩 배치하여, 수용소의 행정 본부에서부터 대회장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대회에 위협이 될 만한 의심스러운 움직임이 보이면, 이 통신망이 가동되어 30 내지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단 30분 만에 소식이 전달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대회 운영 위원회는 결정을 내릴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정은 대회를 중지하고 숲 속으로 숨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베이라 출신의 장로 주세 바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번은 대회 바로 전날 밤에 한 경찰관이, 자기들이 우리의 대회에 대해 이미 알고 있으며 그것을 무산시켜 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책임 맡은 형제들에게 이 일을 알렸습니다. 그들은 대회를 취소해야 하였습니까? 그들은 여호와께 기도한 다음,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대답이 주어졌습니다. 밤새 억수같이 내린 비 때문에 문두지 강이 범람하여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경찰은 강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아무도 뒤에 남을 필요 없이 그리고 인간 연쇄 통신망을 만들 필요도 없이 모두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음껏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배교와 제10마을
상당한 말썽을 불러일으킨 운동이, 자신들을 “기름부음받은 자들”이라고 지칭한 한 배교 집단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주로 말라위 마을들에서 생겨난 이 집단은, 1975년에 “장로들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기름부음받은 자들”인 자기들이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협회에서 발행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 가운데서의 영원한 생명」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은, 일부 의심하던 사람들을 도와 진정한 의미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것에는 무엇이 관련되어 있는지를 이해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배교자들의 영향이 퍼져,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많은 사람이 그릇 인도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의 일부로서, 협회에 보고서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한 다음, 그 보고서들을 그냥 공중에 날려 버렸습니다.
이 배교적인 영향의 결과로 약 500명이 제명된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들은 자진하여, 당국의 허가를 얻어 그들 자신의 마을을 세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마을이 제10마을이 되었습니다. 후에 이 운동의 지도자는 젊은 여자들로 이루어진 수행원들의 시중을 받았는데, 그 여자들 중 다수가 그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제10마을과 그 집단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던 기간 내내 계속 존재하였습니다. 그들은 충실한 형제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초래하였습니다. 처음에 영향을 받아 그 집단에 가담하였던 일부 형제들은 나중에 회개하고 여호와의 조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배교자 집단은 수용소 생활이 끝났을 때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수용소는 우리의 교도소요, 집은 우리의 감방입니다”
1983년 초까지 수용소 생활은 어느 정도 정상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은 자기들이 재소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일부 형제들이 임의로 자기들이 살던 도시로 돌아간 것은 사실입니다. 왔다갔다한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공동체는 계속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떠나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우편 제도를 통해서, 혹은 친척과 옛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용감하게 수용소를 찾아온 몇몇 형제들 편으로 서신을 교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형제들 중 일부는 붙잡혀서 투옥되었습니다.
샤비에르 덴고는 생각에 잠기듯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여러분 말라위 형제들은 난민이지만, 우리는 죄수들입니다. 수용소는 우리의 교도소요, 집은 우리의 감방입니다.” 그러나 사실, 말라위 형제들이 처한 상황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마을들을 정상적인 곳으로 보이게 했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이제 갑작스레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습니다.
무장 침입으로 공포와 죽음이 초래되다
1983년 초, 무장한 반정부 운동 단원들이 카리쿠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하자, 행정 본부 사령관은 30킬로미터 떨어진 밀란제의 중심 도시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은 어느 정도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긴 하였지만, 형제들은 얼마 안 되는 기간이나마 좀더 숨을 편히 쉴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1984년 10월 7일, 지역 대회 준비가 끝나갈 무렵 비극이 닥쳤습니다. 동쪽으로부터 무장한 집단이 접근해 온 것입니다. 그들은 제9마을을 지나가면서 공포와 피와 죽음의 자취를 남겼습니다. 말라위 제7마을에서 무툴라 형제를 죽인 다음, 모잠비크 제4마을에서는 아우구스투 노벨라를 죽였습니다. 모잠비크 제5마을에서 무템바 형제는 발포 소리를 듣고 경계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땅바닥에 있는 한 형제의 시체를 보고서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무장한 사람들은 집을 불태우고 약탈하였습니다. 남자, 여자, 아이들 할 것 없이 필사적으로 은신처를 찾아 이리저리 마구 뛰었습니다. 이 난폭한 공격은 앞으로 더 벌어질 일의 전주곡에 불과하였습니다. 수용소를 한 바퀴 돈 다음, 그들은 바로 제1마을 북쪽의 한 지역을 선택하여 자기들의 기지를 세웠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들은 매일 수용소를 습격하여 강탈하고, 집을 불태우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번은, 순회 감독자 피델리 은달라마의 아내를 포함하여 말라위 증인들을 여섯 명이나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기지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특히 젊은 남자들은 그들의 무력 운동에 신병으로 참여하도록 강요당하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마을에서 도망하여 마샴바(그들이 경작하던 밭)에 숨었고, 가족들이 그 곳으로 음식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젊은 여자들은 요리사로 차출당하였지만, 그 후 침략자들은 강제로 “정부”(情婦) 노릇을 하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힐다 반제는 그러한 압력을 저항한 사람으로서, 결국 몹시 심하게 구타당한 뒤 죽은 것으로 여겨져서 내버려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살아났습니다.
이 무장 집단은 자기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고 자기들의 장비를 운반해 줄 것을 거주자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이 요구가 그리스도인의 중립적인 입장과 상반되는 것임을 알고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의 거절은 분노를 샀습니다. 구타와 무기만이 유일하게 인정받는 법(法)인 이 고립된 세계에서는 중립이나 인권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 혼란한 시기에 약 30명의 형제가 사망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알베르투 시사누였는데, 그는 어떠한 지원을 하는 것도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내가 마푸토에서 여기까지 끌려 온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나는 과거에도 거절하였습니다.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비교 요한 18:36) 이 말이 압제자들에게 몹시 불쾌하게 들렸던지 그들은 시사누를 난폭하게 끌고 갔습니다. 분명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고 있던 시사누 형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나타내는 태도로 형제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가 심하게 구타당하여 치명상을 입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은 “신세계가 올 때까지”였습니다. 의료진으로 일하던 형제들이 그를 구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그를 구하는 일은 “신세계가 올 때까지”, 다시 말해서 신세계가 오면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조차도 그의 믿음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사도 24:15.
타는 풀무에서 구출되다
견딜 수 없는 긴장 상태를 완화하기 위해 뭔가 조처를 취해야 하였습니다. O.N. 위원회는 장로와 봉사의 종들과 만나 반정부 운동 단원들과 어떻게 대화를 시도해야 할지 토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반정부 운동 단원들이 이미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초청장을 보내어 자기들의 기지로 오도록 하였습니다. 장로들은 자원하는 상당수의 증인들과 함께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두 형제를 임명하여 마을 전체를 대표하여 이야기하도록 하였습니다. 임명된 대변인 중 한 사람인 이사케 마룰리는 젊은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집에 들렀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염려하는 그의 아내는 그를 만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남은 것이 우리가 조금이나마 영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우리가 다른 모든 형제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그의 아내도 묵묵히 동의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한 다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모임에는 증인들만 아니라 무장 운동을 기꺼이 지지하는 증인이 아닌 사람들도 참석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 300명쯤 되는 형제들이 나머지 사람들보다 수가 더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정치적 구호를 외치며 군가를 부르는 열띤 모임이었습니다. 이러한 광고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바 레나무’[레시스텐시아 나시오날 데 모삼비케(모잠비크 전국 반정부 운동), 프렐리무 정부에 대항하는 운동]라고 외칠 것이며, 목청이 터지도록 외칠 것입니다.” 사령관과 군인들, 그리고 증인이 아닌 주민들은 형제들이 침묵을 지키는 것을 참지 못하였습니다. 그 모임의 사회자인 한 정치 위원이 이 운동의 이념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마을들을 철거하고 모두를 분산시켜 마샴바에서 살게 하려는 상부의 결정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참석자들에게 각자의 의사를 표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자기들의 중립 입장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형제들이 바란 것은, 식량을 지원하고 장비를 운반하는 것과 같은 일들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마을에서 분산되어 나와 사는 것은, 이미 강제로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사령관은 형제들의 용기 있는 대답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그 정치 위원이 더 이해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사령관을 달랜 다음, 형제들을 평화롭게 보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형제들은 자기들이 “타는 풀무”라고 묘사한 곳으로부터 살아서 나왔습니다. (비교 다니엘 3:26, 27) 그러나 평화가 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며칠 후 몹시 전율을 느끼게 하는 한 가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제7마을의 학살
태양은 빛나고 있었지만, 1984년 10월 14일 일요일은 카리쿠에서는 암흑의 날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아침 일찍 회중 집회를 보았고, 그 후 일부 형제들은 남아 있는 비품들을 가지고 재빨리 밭에 있는 자기들의 새 집으로 돌아오려고 마을로 갔습니다. 한 무장 집단이 사전 경고도 없이, 자기들의 기지를 떠나 모잠비크 제7마을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들은 제5마을 외곽에서 한 형제를 붙잡아 이렇게 요구하였습니다. “제7마을로 가는 길을 대시오. 전쟁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겠소.” 그 마을에 도착하자 그들은 마침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속한 마을 번호순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앉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무드지바[비무장 감시원 혹은 첩보원]를 구타하고 강도질한 자가 누구요?” 하고 그들은 다그쳤습니다. 형제들은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좋소, 아무도 말하지 않겠다면 여기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소.” 그리고 그들은 형제의 이마를 정면으로 겨냥하여 쏘았습니다. 모두가 전율하였습니다. 질문은 계속 반복되었고, 그 때마다 대기하고 있던 새로운 희생자가 총에 맞았습니다. 여자들은 아기들을 부둥켜안은 채, 남편이 야만적으로 처형되는 장면을 지켜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살루미나 자매가 자기 남편 베르나르디누가 죽는 장면을 지켜 보았던 것과 같습니다. 여자들도 살해당하였습니다. 리신가 근처의 수용소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한 루이스 빌라의 아내 레이아 빌라도 그 가운데 포함되었는데, 그의 어린 자녀들은 그렇게 해서 고아가 되었습니다. 페르난두 팀바네와 같은 어린이들도 처형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팀바네는 총에 맞은 다음에도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열 명의 희생자가 잔인하게 처형되자, 처형자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나 악몽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열한 번째 희생자가 될 뻔했던 은궤냐 형제는 그들의 명령에 따라 “사형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나는 여호와께 살아 남은 가족을 돌보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내 날이 끝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다음 일어나니 비상한 용기가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감정적인 충격을 느꼈습니다.”
생존자들은 그 후 마을에 남아 있는 집들을 불태우도록 강요당하였습니다. 무장한 사람들은 떠나기 전에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신들 50명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왔소. 그러나 이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충분하오. 이들은 매장하지 마시오. 우리가 지켜 볼 것이오. 만일 시체가 하나라도 없어지면, 없어진 시체 한 구당 열 명이 죽게 될 것이오.” 참으로 괴이하고 끔찍한 명령이었습니다!
그 지역에 울려 퍼진 총성과, 용케 빠져 나간 사람들에 의해 퍼진 소문으로, 마을들은 새로운 공포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필사적으로 숲과 산으로 도망하였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학살을 하도록 죄를 뒤집어 씌우는 질문을 유도한 사람은 반정부 운동에 가담하고 싶어한 어떤 제명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또한 도둑질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마을에 있는 형제들을 거짓 고발하여 그 반정부 집단의 환심을 사고 신임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후에 자기들이 우롱당하였음을 알게 된 그 집단은 그렇게 거짓말을 지어낸 자를 체포하여 아주 야만적인 방법으로 살해하였습니다.
흩어지는 일이 시작되다
카리쿠 지구 전체가 비탄에 잠겨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장로들 역시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학살로 잃고 애통해하는 가족들을 위로하려고 애썼습니다. 더 이상 그 지역에 남아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회중이 좀더 안전을 느낄 수 있도록, 30킬로미터가량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마샴바 주변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O.N. 위원회 장로들의 일이 배로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십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널리 흩어져 있는 모든 회중들에 속한 양 무리의 연합과 육적 및 영적 안전을 공고히 해야 하였습니다.
이러한 슬픈 곤경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 짐바브웨 지부에 전해지자, 짐바브웨 지부는 지부 요원들로 하여금 형제들을 방문하여 세워 주도록 마련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밀란제 수용소에 필요한 식량과 의복과 의약품을 위하여 브루클린에 있는 통치체의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통치체는 형제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염려에서, 이용 가능한 재정적 자원을 사용하여 그들의 필요를 돌보아 주고, 바람직하다면, 그들이 밀란제 지역을 떠나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마련해 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정말 바람직해 보였습니다.
1985년이 시작될 무렵, O.N. 위원회 위원들은 매년 그래 왔던 것처럼, 밀란제를 떠나 통치체가 파견한 지구 감독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돈 애덤스가 브루클린에서 와 있었습니다. 잠비아와 짐바브웨 지부 위원회가 함께 한 모임에서, O.N. 위원회 위원들은 카리쿠 지구와 관련된 염려 사항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카리쿠에 남아 있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고려해 보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잠언 22:3에 기술되어 있는 성서 원칙에 주의가 기울여졌습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느니라].” (사체로는 본서에서) 그들은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수용소로 돌아왔습니다.
떠나다니? 어떻게? 그리고 어디로?
이 조언은 즉시 회중들로 전달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앙 조세처럼 그에 따라 신속히 행동하였는데, 그는 독신 형제로서 후에 잠비아와 모잠비크 지부 시설을 건축하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일단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 말라위로 그리고는 잠비아로 별 문제 없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황이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많은 가족에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어린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반정부 운동 단원들이 항상 길을 감시하고 있어서, 그 길로 가는 사람은 누구나 공격받기 십상이었습니다. 말라위에 접한 국경은 특히 말라위 형제들에게 또 다른 도전이 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직도 경멸과 추적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난처한 질문들이 제기되었습니다.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그 여러 해 동안 내내 숲 속에서만 살아서 증명서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국경을 넘을 것인가? “우리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모든 장로들과 만난 매우 긴장이 감도는 모임에서 O.N. 위원회 위원들이 제시한 대답이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흩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그들은 힘주어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각자 기도하고, 계획을 세운 다음, 행동하십시오.”—비교 역대 하 20:12.
그 후 몇 달 동안, 이것이 집회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장로들은 떠난다는 생각을 지지하여 형제들에게 따라가도록 권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머물러 있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마침내 흩어지기 위한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고향으로 가려고 시도한 말라위 형제들은, 과거와 동일한 이유로 국경에서 저지당하는 바람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열정이 한풀 꺾이고, 머물기로 한 사람들의 주장에 한층 더 힘이 가해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은, 군 기지에서 있을 또 하나의 “중요한 모임”에 오라는 “초청장”이었습니다.
집단 대이동
1985년 9월 13일, 광고된 모임이 있기 바로 이틀 전, O.N. 위원회에 남아 있는 세 명의 위원인 무템바 형제, 마툴라 형제, 시코무 형제는 다시 한 번 함께 모였습니다. “초청장”과 관련하여 그들은 형제들에게 어떻게 하도록 권해야 할 것입니까? 모임은 밤새 지속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기도하고 숙고한 끝에 그들은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내일 밤에 도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즉시, 결정 사항뿐 아니라 집합 시간과 장소를 가능한 한 널리 알렸습니다. 떠나기로 동의한 회중들이 도착하였습니다. 그것은 O.N. 위원회가 수용소에서 취한 마지막 조처였습니다.
형제들은 기도를 드린 다음, 저녁 8시 반부터 시간에 맞추어 대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동은 군인들과 “반역자들”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하였습니다. 붙잡히는 날에는 재난을 당할 것이었습니다. 야음을 틈타, 각 회중은 15분 만에 빠져 나와야 하였고 각 가족에게는 2분이 할당되었습니다. 일렬 종대를 이룬 기다란 행렬이 뱀처럼 구불구불 조용히 숲을 통과하였는데, 새벽에 그들이 말라위 국경에 도달할 때 정작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O.N. 위원회의 영적 목자들이 새벽 1시에 맨 마지막으로 떠났습니다.—사도 20:28.
약 40킬로미터를 걷고 난 후, 필리페 마툴라는 이틀 동안 잠도 못 자고 행군한 까닭에 몹시 피곤하였습니다. 그는 노인들의 마지막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길 옆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조카”인 에르네스투 무샨가가 행렬의 선두에 있다가 달려와서는, “‘아저씨’, 형제들이 말라위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하고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그가 정녕 얼마나 기뻐했겠는지 능히 상상이 갈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홍해에서처럼 빠져 나갈 길이 없어 보일 때 여호와께서 어떻게 길을 열어 주시는지를 보여 주는 실례입니다” 하고 마툴라는 탄성을 질렀습니다.—출애굽 14:21, 22; 참조 시 31:21-24.
그 후 여러 달 동안, 그들은 말라위와 잠비아에 있는 난민 수용소에서 난민 생활을 체험한 뒤 다시 모잠비크로 돌아와 그들이 살던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카리쿠 지역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남아 있던 사람들
대이동이 시작되기 전에 O.N. 위원회의 결정이 널리 퍼져 있는 회중들에 다 전달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광고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는 남아서 군 기지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마샤케네 회중은 다른 회중들과 마찬가지로 그 광고를 듣지 못하였지만, 이미 도망하기로 결정한 상태였습니다. 이 회중 형제들은 그 모임에 가기 전에 가족들에게 도망할 준비를 하게 하였습니다. 약 500명의 형제들이 그 모임에 모습을 보였습니다. 모임은 단도직입적이었습니다. 사령관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기 참석한 모든 사람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우리의 주(主)기지로 가도록 결정되었습니다. 긴 여행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서 3개월가량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즉시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도망하기로 결심한 형제들은 군인들의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서 몰래 빠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가족과 합류해서 이용 가능한 모든 길을 따라 말라위 국경을 향해 피신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장 운동 단원들의 명령에 따라서, 또는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모룸발라에 있는 기지를 향해 남서쪽으로 여행을 시작하였고, 며칠이 지나 그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단 그 곳에 도착하자, 그들에게 반정부 운동을 지지하라는 더 큰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형제들이 거부하자 심한 고문과 엄청난 구타가 뒤따랐고, 이 기간 중에 최소한 한 명의 형제가 사망하였습니다. 3개월 후 그들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반정부 운동 단체의 철저한 통제를 받으며 카리쿠 지구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 후 7년 동안 여호와의 조직과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 40개의 회중으로 된 꽤 큰 집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들은 영적으로 살아 남았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절망에 굴복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였습니까?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겠습니다.
말라위와 잠비아의 난민 수용소
카리쿠에서 도망한 모든 형제들이 즉시 말라위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샤케네 회중은 국경을 넘은 후 쉬고 있다가, 말라위 경찰에 발견되어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경찰에게 애원하며, 자기들이 살던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피하여 도망 온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경찰은 동정심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자 절망적인 상황에서 누군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형제들, 우리 모두 소리를 지릅시다!”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으며, 소리가 하도 커서 이웃 주민들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당황한 경찰은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사정하였습니다. 한 자매가 이렇게 간청하였습니다. “최소한 아이들에게 줄 음식이라도 좀 준비하게 해주세요.” 경찰은 그 자매의 요청을 받아 주면서,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권력 있는 어떤 사람이 증인들을 도와 주러 와서는, 음식을 주고 그들을 다른 형제들이 있는 난민 수용소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이제 말라위에 있는 난민 수용소에는 모잠비크의 여호와의 증인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말라위 정부는 그들을 전쟁 난민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국제 적십자사에서 도움을 베풀어 주었는데, 험악한 날씨 때문에 노천 수용소에서 겪는 불편과 어려움을 경감시킬 수 있도록 구호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잠비아까지 계속 가서, 거기서 다른 난민 수용소로 안내되었습니다. 필리페 마툴라와 페르난두 무템바는 이제 말라위 전국 위원회 위원들과 연합하여 일하면서, 이 곳 수용소들에 있는 모잠비크 형제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에게 영적인 위로를 베풀고, 또 통치체의 승인을 받아 경제적 도움도 베풀었습니다.
1986년 1월 12일, 통치체 성원인 A. D. 슈로더가 이 형제들에게 통치체의 따뜻한 사랑의 안부를 전하고 또한 영적인 격려도 베풀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잠비아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그 강연은 치체와어로 번역 및 녹음되어 모잠비크 형제들이 있는 수용소들로 전해졌습니다.
점차 이들 난민 형제들은 다음 기착지—모잠비크—로 가도록 도움을 받았습니다. 많은 경우, 그들은 테테 지방에 있는 모아티제로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잠비크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변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지방 관리들이 모두 그러한 증거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모잠비크로 돌아오다
형제들의 무리가 차츰차츰 테테 시 동부에 있는 읍들로 몰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버려져서 이전에 공중 변소로 사용되던 기차칸들이 그들의 주거지로 이용되었습니다. 많은 기차칸을 깨끗이 청소하여, 1986년 3월 24일에 열린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위한 모임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모잠비크 전역에서 붙들려 온 이 형제들은, 자기들이 원래 살던 곳으로 어떻게 다시 수송될 것인지도 모른 채 그 곳에서 여러 달을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생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또는 비행기표를 살 돈을 조금이나마 저축하기 위해 일자리를 좀 구해 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도로로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지방 당국자들이 형제들을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 준 것은 아니었는데, 당국자들은 아직도 형제들에게 강제로 정치 구호를 외치게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 형제들은 담대하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우리가 카리쿠로 끌려간 것은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형을 살았고, 무장 공격자들의 손에 넘겨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우리에게서 아직도 뭘 더 원하십니까?” 이렇게 대응하면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계속 괴롭힘과 투옥을 당하였는데, 정부군에 신병으로 입대시켜 그 지역에서 계속되는 무장 폭동에 맞서 싸우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젊은 형제들은 온갖 지혜로운 방법을 다 동원하여 도망하거나 숨었습니다.
말라위에 있는 위원회는 페르난두 무템바로 하여금 테테로 가서 그 곳에 있는 형제들을 도와 주도록 결정하였습니다. 무템바 형제가 모아티제에 도착하자 당국에서는 그의 짐을 조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형제들이 그의 소유물 가운데서 출판물을 빼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경찰이 그의 가방을 뒤져 보았을 때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누더기 옷 몇 가지뿐이었지요”라고 무템바는 말합니다. 실망한 경찰은 “이게 전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수용소에서 그렇게 막중한 책임을 수행하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짐이 그게 전부였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돌아왔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 형제들의 외모는 결코 호감이 갈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더럽고, 누더기를 걸쳤고, 굶주리고, 학대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과거의 수많은 하느님의 종들에 대한 영감받은 묘사와 잘 부합되었습니다. “그들은 ··· 양 가죽과 염소 가죽을 입고 돌아다녔으며, 궁핍과 ··· 학대를 받았습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황야와 ···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히브리 11:37, 38.
마침내 마푸토로 수송되다
마푸토에서는 협회가 임명한 위원회가 계속해서 여러 정부 및 비정부 기관들과 접촉하여, 테테와 잠비아에 있는 형제들을 수송할 방법을 모색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이사케 말라테와 프란시스쿠 준구자가 국제 연합 난민 문제 고등 판무관 사무소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여호와의 증인들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50회 이상의 비행을 하도록 이미 공식 인가가 났습니다.” 그들은 정부에서 그러한 공식 인가를 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모두 공항 근처의 수용소에 있던 테테의 형제들은, 이러한 마련이 있게 된 줄도 모르고 어떤 화물 수송기가 최소한 그들 중 몇 명이라도 실어 가 주었으면 하는 희망에서 매일 공항에 나가 보곤 하였습니다. 페르난두 무템바는 1987년 5월 16일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흥분된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 7시 반이었습니다. 공항을 쳐다보니, 여호와의 증인을 모두 마푸토로 후송하기 위해 ‘연결’ 비행을 시작할 두 대의 커다란 보잉기가 보였습니다.” 참으로 감격적인 전망이었습니다! 12년 만에—자기가 살던 도시로 돌아간다니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외모는 전혀 남에게 보여 줄 만한 것이 못 되었습니다. 마샤케네 회중의 장로 에미디우 마테는 바지를 몇 벌 가지고 있는 어떤 형제에게서 한 벌을 빌려, 적당하게 차려 입고 마푸토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마푸토에서 그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던 형제들도 비행기로 옷을 가지고 가서, 난민 형제들이 다소나마 품위를 갖추고 내려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워하였습니까? “아닙니다” 하고 에미디우는 대답합니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다 빼앗겼어도, 우리는 여호와께서 언젠가 우리를 사용하시어 자기의 이름을 드높이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소유물에 대해 염려하지 않았으며,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누더기를 입고 다녔지만, 여호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짐바브웨에 있는 형제들은 돌아온 모잠비크 형제들에게 수톤의 식량과 의복을 기꺼이 기증하였습니다.
증인들이 그 밖의 지방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정부에서는 가외의 수송 마련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소팔라 지방의 베이라 회랑 지대(짐바브웨 군인들이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로 알려진 지역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는 아직 어려움이 더 있었습니다. 한 장로를 포함하여 그들 중 18명이 체포되어 반정부 운동 단체의 한 기지로 끌려간 것입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신 분입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신 분이에요!’
그 기지의 사령관은 형제들을 심문한 뒤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고, 반정부 운동 단체의 통제 아래 그 지역에서 교회를 운영하는 한 교역자를 호출하였습니다. 사령관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요. 이제 이들은 당신과 함께 기도하게 될거요. 이들을 잘 대해 주시오.” 그런데 형제들에게는 놀랍게도, 이 교역자(얼마 전에 짐바브웨에 있을 때 워치 타워 출판물을 몇 부 받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음)가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신 분입니다. ··· 여호와는 위대하신 분이에요!”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우리를 가르쳐 줄 사람을 보내 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이튿날 그 교역자는 자기 교회 성원 62명을 모아 놓고 그 장로에게 자기들을 위해 연설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장로 형제는 그들의 형상을 모두 없애 버릴 필요가 있다는 말로 연설을 시작하였습니다. (신명 7:25; 요한 첫째 5:21) 그들은 신속히 응했습니다. 그는 또한 여호와께서 오늘날 자기 종들이 악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승인하시지도 또 자기 종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부여하시지도 않는다는 점과, 성서에 약술되어 있듯이 의식을 위해 북을 치는 일은 참 숭배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태 7:22, 23; 고린도 첫째 13:8-13) 연설을 마치자, 이 집단의 지도자는 일어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부터 나와 내 가족은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한 부부만 빼고 이 집단 전체가 동일한 욕망을 표현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그 곳에 머물던 넉 달 동안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떠날 때가 되었을 때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상당수 데리고 갔는데, 이들 중 많은 사람은 이전에 투쟁 단체에서 활동적으로 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여호와의 백성에 합류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형제들이 어려운 생활 여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태 24:14; 28:19, 20.
도시 생활로 돌아오다
형제들은 도시로 돌아온 것에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증명서는 물론, 주거지나 세속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생활이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새로운 면으로 생활상의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국가 자체가 동란을 겪고 있어서, 내란과 굶주림과 가뭄과 실업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백성은 꿋꿋이 대처할 수 있었습니까?
정부에서 사회 재건부를 창설하여 그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이전 직장으로 복직되어 공공 기업체나 민간 기업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사업가가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형제들은 그들의 이전 거주지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친척들이 여전히 그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에게는 상황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집을 낯선 사람들이 혹은 비우호적인 친척들이 인수하였거나, 국가에서 국유화해 버린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염려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염려와는 달리 돌아온 증인들은 온유함을 나타내어 소동을 일으키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수용소로 보내지지 않았던 증인들은 자기들의 집을 개방해서 집이 없는 형제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서서히, 정착할 만한 곳을 찾거나 지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지런함을 축복하시어 오늘날 많은 형제가 좋은 집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돌아왔을 때의 가엾은 처지를 목격했던 사람들은 이에 대해 놀라고 있습니다. 가난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에도 여호와의 증인은 단 한 사람도 구걸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몇 년 후, 국가로부터 자기 집을 매입해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을 때, 전국에서 최초로 그렇게 한 사람은 카리쿠에서 살다 온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현재 그 곳은 마푸토의 출판물 보관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주요 관심사는 집을 구하거나 기타 물질적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숭배를 위한 집회 장소를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결국 그것이 여호와께서 그들을 고향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주신 주된 이유가 아니었겠습니까? 형제들은 바로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비교 학개 1:8) 그들은 즉시 온갖 형태의 왕국회관을—뒷마당에, 거실과 부엌에, 함석과 짚으로 만든 오두막에—임시로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구하기 힘들었지만—교실이나 병원 강당에서 모였습니다. 모잠비크에 있는 438개의 회중은 심지어 지금도 대부분 이 임시로 만든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보고 있습니다. 드물지만 예외적인 일도 있습니다. 그러한 예외 중의 하나가 베이라에 있는데, 그 곳에서 형제들은 짐바브웨 지부와 그들이 보낸 용감한 건축 팀의 도움으로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마침내 1994년 2월 19일에 모잠비크에서는 처음으로 벽돌로 지은 두 채의 왕국회관을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특별 위원회—법적 승인
형제들이 생활을 재조직해 나감에 따라, 그들의 물질적, 영적 필요를 돌보기 위해 통치체는 테테와 베이라와 마푸토에 특별 위원회를 임명하고,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의 감독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마련으로 인해 회중들에 더 긴밀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서 출판물에 대한 많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이 도시들에 보관소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보관소들은 또한 식량과 의복 등의 구호 물품 배급 센터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들도 조직하였습니다. 비록 공개적으로 열 수 있으려면 아직도 극복해야 할 몇 가지 장애물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1991년 2월 11일에는 전세계의 여호와의 백성이 기뻐할 만한 감격적인 소식이 이 나라 전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모잠비크 정부가 아소시아상 다스 테스테무냐스 데 제오바 데 모삼비케(모잠비크 여호와의 증인 협회)를 법적으로 승인한 것입니다. 카리쿠에서 형제들을 돌보는 일을 충성스럽게 도운 페르난두 무템바가 초대 회장으로 일할 것이었습니다. 모잠비크의 여호와의 백성은 또한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이 그들 가운데 처음으로 있게 되어 기뻐했습니다. 이들은 마푸토와 베이라에 있는 선교인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도착할 더 많은 선교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테테에 또 다른 집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선교인들이 형제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다
모잠비크에 진정한 선교인 밭이 열렸습니다. 길르앗 졸업생들과 이미 다른 밭에서 일해 온 경험 많은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자기 희생적일 뿐 아니라, 모잠비크의 영적 재건 및 수확 활동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곳에서 일하라는 초대에 열렬히 응하였습니다. 이들은 오대주에서 왔으며, 많은 사람이 브라질과 포르투갈처럼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나라 출신입니다. 그들의 새로운 임명에 도전이 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 나라가 1990년과 1991년에야 비로소 전쟁과 가뭄으로 인한 경제적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브라질에서 활동하였고 지금은 지역 감독자로 일하고 있는, 덴마크에서 온 선교인 한스 예스페르센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상점에는 실제로 아무 것도 없었고,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한 흔적이 아주 뚜렷했습니다.” 그러나 꾸준한 경제적 회복이 이미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쪽과 시골 지역에 사는 많은 형제들은 여전히 극히 어려운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선교인들에게는 생전 처음 직면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일례로, 프렐리무 정부와 레나무 사이에 평화 협정이 조인되기 전에, 선교인들은 임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따금 콜루나스(무장한 정부군이 호위해 주는 긴 대열의 호송 차량)를 타고 여행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차량들은 때때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교인들은 형제들을 알게 되는 큰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형제들 중 많은 사람은 다른 인종과 국적에 속한 증인들을 만남으로써 꿈이 실현되었습니다.
북쪽의 외딴 지역에 사는 한 어린아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선교인을 만나 보려고 아버지와 함께 온종일 걸어왔습니다. 어린아이의 얼굴에 나타난 놀란 표정을 보고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백인 형제들이 있다고 내가 말하지 않던?” 선교인들을 맞이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쁨을 표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에 대해 우리는 「연감」에 들어 있는 경험담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습니다.” 1993년에 여전히 잠비아의 난민 수용소에 있던 모잠비크 증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테테에 선교인 집이 있다는 소식을 잠비아에서 들었을 때, 우리는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집을 우리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카리쿠로 끌려간 지 18년이 흐른 지금 이 곳에서 우리의 봉사를 계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잠비크에 있는 이 선교인들의 주된 목표는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만족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마푸토와 베이라에 최초로 파견된 선교인들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몹시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매일 엄청난 양의 출판물을 전하였습니다.” 이 나라에서 4색 인쇄물은 협회에서 발행하는 것이 유일한 것이라서 대중의 주의를 많이 끕니다. 선교인 집들은 종종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본부로 사용되는데, 많은 연구생들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전국에 여섯 개의 선교인 집이 있고, 50명의 선교인이 다양한 임명을 받아 일합니다. 어떤 선교인들은 매달 지부에서 지정한 노선을 따라 여행하면서, 보고서들을 수집하고 서신과 잡지와 서적을 배달합니다. 이 노선들 중 하나에는 과거 밀란제의 카리쿠 지구가 있던 곳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에 남아 다른 모든 형제들로부터 고립된 증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카리쿠 지구가 개방되다
1992년 10월 4일, 로마에서 프렐리무와 레나무 사이에 일반 평화 협정이 조인되어, 16년간에 걸친 모잠비크 내란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널리 공표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카리쿠 지구에 드리워져 있던 장막이 걷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실이 드러났습니까? 7년 내내 고립되어 있던 지역에서 50개 이상의 여호와의 증인 회중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고립되어 있던 기간에 그들은 어떻게 영적으로 살아 있을 수 있었습니까?
1994년 2월에 밀란제에서, 책임 맡고 있던 형제 40명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단지 선교인들을 보기 위해 3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온 다른 사람들도 천 명이나 참석해 있었습니다. 대이동 이후 남아 있던 장로들은 다음과 같이 자세히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군 기지에서 구타당하였으며 그 후, 우리는 돌아가서 다 타버린 마을의 마샴바에서 살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이윽고 레나무는 우리에게 왕국회관을 짓고 집회를 보도록 공식적으로 허가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회관에 가 있거나 숭배하러 가는 도중에는 우리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또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집회를 보는 날인데도 누군가 집에 있거나 심지어 왕국회관 밖에 있는 것이 발견될 경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지지 않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전파하는 것은 어떠하였습니까? 장로들의 대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옷도 없었고, 모든 걸 다 빼앗겼기 때문에 우리는 짐승처럼 살았지만,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과 따라서 우리에게 왕국을 전파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은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사랑이 있다는 이 얼마나 뚜렷한 증거입니까!
1993년에 지역 감독자와 그의 아내는 밀란제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 전례 없는 일을 목격하였는데, 그것은 이 형제들이 정말로 제자를 삼는 일을 계속하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일이었습니다. 침례 연설을 하는 연사가 지원자들에게 일어서 보라고 요청하자, 2023명의 청중 가운데 505명이 침례 지원자로 일어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카리쿠의 “사울”
기원 제1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격렬히 박해했던 타르수스의 사울은 열심 있는 여호와의 종이 되었습니다. 카리쿠에도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는 빼어난 용모에 온유하게 생긴 사람으로서, 현재 봉사의 종과 정규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가 생계를 위해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할 때에는 그의 동료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을 멈추고 이야기하는 것을 잘 들어 보십시오.
“1981년 6월에, 내가 살던 곳이 반정부 운동 단체에 넘어갔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병영으로 끌려갔지요. 그들은 우리에게 자기들의 고상한 투쟁 목표와 우리 민족의 해방을 지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였습니다. 나는 군사 훈련을 받고 전투에 참여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후 7년 동안 전쟁은 나의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 운동을 충성스럽게 지지하였기 때문에 지휘관으로 승진하였습니다. 7개 소대를 지휘하였지요. 많은 지역이 우리의 지배 아래 들어왔는데, 그 중 하나가 카리쿠였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1개 분대를 파견하여 그들이 사는 마을들에 침입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집을 불사르고 사람도 몇 명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지요. 우리 대원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가 그들을 모두 죽인다 하여도 그들의 마음만큼은 결코 돌리지 못할 겁니다.’ 얼마 있다 나는 다른 기지로 파견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을 박해한 데 대해 이 지휘관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게도 그에게 변화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내를 7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아내를 만나러 가기 위해 개인적으로 휴가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말라위에 있는 난민 수용소에서 처음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진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거부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신세계와 하느님의 왕국과 전쟁이 없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이렇게 자문해 보았습니다. ‘나쁜 짓을 아주 많이 한 사람도 이러한 것들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성서에서 얻은 답은 이러하였습니다. ‘그렇다. 믿음을 갖고 하느님께 순종하면 된다.’ 나는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고, 1990년 6월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나는 파이오니아를 하면서 이전의 동료 전투원들을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한 부대에서만도 14명을 도와 여호와의 종이 되게 하였습니다. 나는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일해 왔으며,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내 나름대로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자비를 나타내시어 나의 무지했던 시절을 너그럽게 보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초로 나를 용서해 주신 점에 대해 정말 감사 드립니다.” (사도 17:30) 이것은 모잠비크 형제들이 깊은 인식을 나타내어 왜 그토록 자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 주는 수많은 예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시 145:3.
마푸토의 지부 사무실
누가 짐작이나 하였겠습니까? 이 일은 예상보다 더 빨리 일어났습니다. 통치체가 모잠비크에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는 일을 승인한 것입니다. 1925년에 광부인 알비누 멜렘베가 요하네스버그에서 진리를 가지고 들어온 이래, 모잠비크의 활동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말라위 그리고 짐바브웨의 지부에서 돌보아 왔습니다. 마침내 1992년 9월 1일 현재, 마푸토의 여러 대사관들이 있는 지역에다 협회가 구입하여 개조한 큰 집에서, 모잠비크 지부가 그 광대한 밭을 감독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일곱 명의 작은 가족 성원으로 출발하였지만, 최근에 임명된 지부 위원회 앞에는 해 볼 만한 일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야외 활동을 조직하고, 형제들의 영적인—그리고 심지어 물질적인—필요를 돌보고,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돕고, 새로운 지부 시설을 건축하는 일을 해야 하였습니다. 참으로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도움이 답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세계 각지에서 온 국제 자진 봉사자들이 현재 모잠비크 형제들과 함께 일하면서, 전면에 해변이 있는 쾌적한 장소에 새로운 지부 시설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벧엘 가족도 정규 성원이 26명으로 늘었습니다. 마푸토의 형제 자매들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의 연합된 집단으로서, 지상의 이 곳에서 참 하느님 여호와께 대한 숭배를 드높이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이사야 2:2.
“그와 같은 사람들을 계속 소중히 여기십시오”
여행하는 감독자들도 이 곳에서 도전이 되는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북쪽 지방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곤 하였고 나중에는 수용소에서 O.N. 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한 아드손 음벤데라가 있습니다. 소팔라 지방의 형제들의 기억에 고마운 사람으로 남아 있는 라메크 냐비콘두도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일하러 온 일라이어스 마헤녜도 있는데, 그는 잔학 행위를 당한 적이 있으며 다음과 같은 경고도 미리 발한 적이 있습니다. “PIDE[식민지 경찰]는 사라졌지만, 그의 할아버지 사탄 마귀는 아직도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강화시키고 용기를 키우십시오.” (베드로 첫째 5:8) 편안하기를 조금도 바라지 않은 이 형제들은 자기들이 누렸을지 모르는 어떠한 안락한 생활도 다른 형제들을 섬기기 위해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아주 최근에는 이전에 “교도소” 마을들이 있던 밀란제 지역에 순회구가 새로 생겼습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형제들은 자기들이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을 통해 베풀어지는 돌봄으로부터 좀더 온전한 유익을 얻고 있는 것에 대해 여호와께 특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를란두 펜가와 그의 아내는 마푸토를 떠나 이 곳에서 봉사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를 비롯한 수천 명의 다른 형제들은 이 곳 “카리쿠 무대”에서 한몫을 담당해 왔습니다. 테테 시 서부 지역에서, 여러 해 동안 전쟁으로 고립되었던 사람들의 회복을 돕고 있는 벤자민 제레마이아와 그의 아내는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라곤 구경도 해 본 적이 없는 곳들로 여러 날을 걸어서 여행합니다. 자기 희생적인 사람인 독신 형제 라이먼드 피리는 공격받을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기가 섬기고 있던 회중 성원들과 함께 산꼭대기에서 잠을 자야 했고, 그 곳에서 지부 사무실에 보낼 보고서를 준비하였습니다. 또한 한스 예스페르센과 아니타 예스페르센은 이 나라 전역에서 봉사하면서 형제들의 영적인 부에 대해서도 그리고 물질적 가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모두 사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도록 감동을 받았던 것과 동일한 영을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을 계속 소중히 여기십시오.”—빌립보 2:29.
경건한 열심을 가지고 전진하다
모잠비크의 충실한 형제들은 가혹한 시련 가운데서도 충절을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또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 찾은 자유와 여호와께서 잡지와 출판물을 통해 공급해 주시는 풍부한 양식을 공개적인 봉사의 직무에서 관대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거리와 광장에서 그리고 시파마니네와 같은 시장에서 자유롭게 전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를 찬양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히 증가하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새로운 전도인들뿐 아니라, 이웃 나라들에 있는 난민 수용소에서 돌아오는 형제들로 인하여 증가가 가속화되어 왔습니다. 모든 순회구에 속한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신속하게 왕국회관을 짓는데, 쓸모 있는 자재라면 어느 것이든 이용합니다. 심지어 말라위 국경에 있는 조브에와 빌라 울론게 외곽에 있는 카보아 제2수용소와 같은 임시 난민 부락에서도 그렇게 합니다. 많은 사람이 더 좋은 시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현재 1900명 이상이 그러한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에서 받은 훈련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이 곳에서는 파이오니아 강습이 1992년에 실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최근에 마푸토에서 행해진 강습에서는 강습생의 대부분이 카리쿠 지구에서 살다 온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강사로 일한 사람들이 누구였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인한 투옥 횟수에서 모잠비크의 기록 보유자인 프란시스쿠 준구자, 그리고 딱 일 주일 연구한 후 체포되어 밀란제로 보내진 에우제니우 마시텔라였습니다. 두 사람 다 현재 순회 감독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습생 중에는 에르네스투 실라울레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함께 나누기를 좋아하는 추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PIDE 건물이 있는 저 거리를 지나갈 때면, 나는 저 창문을 바라보며 기억을 떠올립니다. 바로 저기서 경찰관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지요. ‘분명히 알아 두시오, 실라울레. 여기는 모잠비크요. 따라서 당신네는 결코 이 나라에서 합법화되지 못할 것이오.’ 그런데 보세요! 바로 저 거리 아래쪽에 합법화된 우리의 지부 사무실이 있잖아요!”
실라울레 형제는 틀림없이 상을 많이 받았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가 마샤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회중에서 지급해 주는 식품을 가져오곤 했던 그의 어린 딸 알리타가 지금은 지부 위원 중 한 사람인 프란시스쿠 쿠아나의 아내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쿠아나 형제는 수용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도록 기발한 생각을 해내어 그들에게 물건을 “팔”던 카리쿠의 그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저 북쪽 밀란제 지방의 카리쿠 지구에서 사랑과 믿음과 충절의 아름다운 헌물로 자기에게 영예와 영광을 돌린 수천 명의 충실한 사람들을 축복해 오셨음이 분명합니다.—잠언 27:11; 계시 4:11.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위험, 도전이 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구 전역에 퍼져 있는 세상의 방임적인 영이 이 곳에서도 희생자들을 요구할 수 있으며,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부도덕, 물질주의, 아마 더 살기 좋아진 시절로 말미암은 무관심 등이 희생자 수를 증가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모잠비크의 충실한 여호와의 종들은 계속해서 항상 성실하게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믿음의 시험을 살아 남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고 동료 인간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증거를 계속 보이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왕국이 조만간 이 땅을 낙원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더는 전쟁과 굶주림이 없을 것이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큰 기쁨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카리쿠 지구에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충실함을 증명한 모든 사람도 포함될 것입니다.—잠언 3:5, 6; 요한 5:28, 29; 로마 8:35-39.
[12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잠비아
짐바브웨
남아프리카 공화국
말라위
모잠비크
테테
밀란제
카라쿠
모쿠바
이냐민가
베이라
마시셰
이냠바네
마푸토
삽입 지도: 많은 형제들이 대서양으로 약 39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상투메로 유배되었다
[116면 전면 삽화]
[131면 삽화]
에르네스투 실라울레는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네는 결코 이 나라에서 합법화되지 못할 것이오. ··· 순순히 단념하시오!”
[140, 141면 삽화]
카리쿠 난민 수용소에서 우리 형제들은 (1) 나무를 베고 (2) 벽돌을 만들기 위해 진흙을 밟았으며, (3) 자매들은 물을 날랐다. (4) 그들은 대회를 볼 방법을 모색하였다. (5) 샤비에르 덴고, (6) 필리페 마툴라 그리고 (7) 프란시스쿠 준구자는 이 곳에서 순회 감독자로서 영적인 감독을 베푸는 일을 도왔다. (8) 말라위 증인들이 이 곳에 지은 왕국회관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175면 삽화]
수용소에서 돌아온 직후 “경건한 정성” 지역 대회를 위해 마푸토 근처에 모인 증인들, 1989년
[177면 삽화]
위: 선교인들이 매달 출판물과 우편물을 배달하는 곳에 있는 장로들과 순회 감독자들
아래: 테테에서 치체와어 수업을 받고 있는 선교인들
[184면 삽화]
지부 위원회(왼쪽부터: 에밀레 크리칭거, 프란시스쿠 쿠아나, 스테펜 게브하르트)와 현재 마푸토에 건축 중인 지부 시설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