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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부: 막강한 세력으로 뻗어 나가다
  • 깨어라!—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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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92 2/1 11-13면

세계 상업의 흥망 성쇠

제2부: 막강한 세력으로 뻗어 나가다

처음에, 상업계의 발달은 수송 및 통신의 부재, 느린 속도, 높은 비용에 의해 심한 제약을 받았다. 해상 무역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육로에는 위험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곧 달라지게 되었다.

무역의 국제화

기원전 338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헬레니즘 시대에, 지중해 연안 도시들이 주요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그중에는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건립된 이집트(애굽), 알렉산드리아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무렵, 헬레니즘 문화권의 동양은 경기 침체의 징후들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1세기에는 눈에 띄게 쇠퇴하였다”고 역사학 교수인 셰퍼드 B. 클러프는 말한다. 그리스(헬라)를 대신하여 로마가 세계 강국이 되었다. 나중에, 로마의 지배 아래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에 버금가는 속주 수도가 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동쪽 맞수이자 그 대체 세력이었던 비잔틴 제국은 9세기와 11세기 사이에 그 절정에 달하였다.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은 인구가 100만 명으로서, 단연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동양의 비단, 조미료, 염료, 향료와 서양의 모피, 호박(琥珀), 목재, 철의 시장인 그 도시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강력한 경제적 교량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인 1204년에 비잔틴 제국은 타격을 입었다. 수도는 경제적 탐욕의 제물이 되어 침공과 약탈을 당하였다. 어째서 그런 일이 있었는가? 「콜린스 세계사 도해」(The Collins Atlas of World History)에 의하면, “오리엔트의 부를 찾아가려는 서양인의 욕심이 십자군 원정의 근본 원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가 겉으로는 종교적 열정이 동기인 것처럼 보였지만 다른 동기도 있었음을 분명히 알려 준다.

한편, 중세 유럽에서, 상인들은 그들의 통상로를 따라 여러 나라 상품들을 전시할 수 있는 상업 혹은 무역 박람회를 열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북동부의 샹파뉴 지방에서 열린 특히 성공적이었던 박람회에 관해,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박람회에서 상인들의 상거래는 종종 다음에 있을 박람회 때 지불할 것을 약속하는 문서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문서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있었다. 그러한 상거래는 채권 사용의 효시였던 셈이다. 13세기 무렵, 박람회는 유럽에서 정례적인 은행업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5세기중에, 오스만 투르크의 정복으로 인해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통상로가 끊길 위험에 처했다. 그래서 유럽의 탐험가들은 새로운 통상로를 찾아 나섰다.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코 다 가마는 1497년부터 1499년까지 원정대를 이끌고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서 항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인도에 이르는 새로운 해상로를 확립하였다. 이 발견은 포르투갈이 세계 강국이 되는 데 이바지하였다. 또한 이 새로운 통상로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와 그 밖의 지중해 항구들이 주요 무역 중심지로서의 상업적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한편, 포르투갈의 이웃 나라인 스페인은 서쪽으로 항해하여 세계를 돌아 인도에 이르려던 이탈리아의 항해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크리스토포로 콜롬보)의 노력을 재정 지원하고 있었다. 1492년—금년 10월로 정확히 500년 전—에, 콜럼버스는 뜻하지 않게 서반구를 발견하였다. 반면에, 영국인들은 바스코 다 가마처럼 남쪽으로 항해하거나 콜럼버스처럼 서쪽으로 항해하여 동양에 이르는 길을 찾지 않고 계속해서 북동쪽이나 북서쪽의 길을 찾았다. 이 모든 탐험은 무역의 국제화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상업계는 아메리카의 발견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세상사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뚜렷이 보여 주었다.

경제력—제국의 건설자

상업계는 강력한 조직을 건설하였다. 「네 이마에 땀이 흘러야」(By the Sweat of Thy Brow)라는 책에 의하면, 그중 한 예가 “고대 세계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회 경제적 개혁 중 하나인 수공업 조합 혹은 길드”이다. 그와 비슷하게 오늘날의 강력한 조직들을 생각나게 하는 이 길드는, 좋은 일을 이룩하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힘을 뻔뻔스럽게 남용했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성서 번역자 존 위클리프는 14세기에 그들 중 일부를 “하나님과 사람에게 저주받은 ·⁠·⁠· 거짓 음모자들”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13면 네모 참조.

상업계는 제국을 건설하기까지 했는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의심할 바 없이 대영 제국일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에 대영 제국이 부상하기 전에, 유럽의 다른 상업적 모험가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경제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한자 동맹이었다.

“부대”(部隊)를 뜻하던 고기(古期) 고지(高地) 독일어 단어 한자[본래는 한제]는 많은 수로 늘어난 상인 길드 혹은 연합체 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 점차 변하였다.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 독일 북부의 뤼베크 시를 중심으로 활동한 한 한자는 발트 해 무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발트 해에 인접한 독일과 러시아 및 그 밖의 나라들을 성공적으로 연결하였다. 한편, 서쪽에서는 독일 쾰른(콜로뉴) 시의 한자가 영국 및 북해 연안의 저지대 국가들과의 통상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인 연합체는 그들 자신과 그들의 상품을 보호하는 법안을 가결시켰으며, 일반적으로 공통의 이익을 위해 무역을 규제하였다. 그들은 또한 육상과 해상에서의 해적 및 강도 행위를 억제하기 위해 연합된 노력을 기울였다. 무역이 확대되면서, 여러 그룹들 사이에 더 큰 협조가 필요함이 절실해졌다. 그래서 13세기 말엽에는 독일 북부의 모든 주요 도시들이 한데 연합하여 한자 동맹으로 알려지게 된 단일 동맹을 결성하였다.

한자 동맹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북부 지방 무역의 주된 통로를 지배하였다. 한자 동맹은 서쪽으로 영국 및 북해 연안의 저지대 국가들과 같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들과 무역을 하였으며, 이 나라들은 또한 지중해 및 오리엔트와 통상 접촉을 하였다. 한자 동맹은 동쪽으로 스칸디나비아 국가 및 동유럽에 쉽게 접근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 동맹은 플랑드르와의 양모 무역 외에도, 노르웨이 및 스웨덴과의 수산물 무역 그리고 러시아와의 모피 무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자 동맹은 정치 동맹도 아니었고 항구적 통치 기구나 상임직 관리들도 없었지만, 전성기 때는 큰 권력을 행사하였다. 가장 큰 업적 중에 하나는 해상법(海商法) 체계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한자 동맹은 새로운 시장으로 확대되면서 재빠르게 기존의 시장을 보호하였으며, 필요할 때는 무력도 행사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 동맹의 대규모 상인 함대는 경제적 목적의 선적 제한 명령이나 항만 봉쇄로 반대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한자 동맹은 14세기 중엽에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 동맹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세력이 확대되고 세계 무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15세기 무렵이었다. 삼십년 전쟁은 한자 동맹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 회원들이 마지막으로 모임을 가진 것은 1669년이었다. 뤼베크, 함부르크, 브레멘과 같은 몇몇 도시들만이 여전히 한자 도시임을 자부하면서, 한때는 강력한 상업계 거물이었던 동맹의 비교적 무력한 회원으로 남아 있었다.

더 크고 더 힘센 다른 상업계 거물들이 한자 동맹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본 연재물의 제3부 “상업이 본색을 드러내다”에서 그들에 관해 알아보기 바란다.

[13면 네모]

길드와 노동 조합의 힘

기원전 4세기 무렵, 지중해 연안의 일부 도시들은 특정 상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였으며, 같은 업에 종사하는 전문 업자들이 도시의 같은 지역에 모여들었다. 처음에, 이러한 수공업 길드는 분명히 종교적·사교적 성격을 띠었다. 「네 이마에 땀이 흘러야」에서는 “각 연합체마다 수호신이나 여신이 있었으며, 그 성원들은 그들 나름의 공동 예배를 보았다”고 알려 준다.

중세 길드는 그 성원들에게 복지 후원을 제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생산 및 설비 표준을 규정하고 가능하면 가격과 임금까지 통제함으로써 조합원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구상되었다. 일부 길드는 독점적이 되어, 길드 시장을 보호하고 부당 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은밀한 담합으로 가격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고대 수공업 길드의 뒤를 이은 상인 길드는 11세기에 등장하였는데, 당시는 여행하는 상인들이 노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길드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길드는 점차적으로 본래의 성격을 잃어 갔다. 지역·국가·국제 시장이 우세해지면서 그리고 상인들이 수공업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지방 무역에 국한된 길드의 권력과 위세는 점점 쇠퇴하였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산업 혁명이 시작되면서, 영국과 미국에서 같은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의 연합체로 노동 조합이 생겨났다. 부분적으로는 사교 클럽으로 시작한 노동 조합은 지배적인 사회·정치 제도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일부 노동 조합은 단지 조합원들의 임금, 근로 시간, 근로 조건, 직업 안정성 등을 위해 투쟁하는데, 단체 교섭을 벌이거나 파업을 함으로써 그러한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어떤 노동 조합은 분명히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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