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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부: 탐욕적인 상업이 본색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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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부: 탐욕적인 상업이 본색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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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92 2/15 20-23면

세계 상업의 흥망 성쇠

제3부: 탐욕적인 상업이 본색을 드러내다

십육 세기가 동틀 무렵, 유럽의 상업은 북쪽으로는 독일 북부 도시들의 상인 조합인 한자 동맹에 의해, 서쪽으로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의해, 남쪽으로는 베네치아(베니스)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다.

여러 세기 동안, 베네치아는 향료 무역을 독점하였다. 베네치아는 아랍과 그리고 나중에는 오스만 투르크와 협정을 맺어, 경쟁자가 될 만한 세력들이 동양으로 가는 무역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른 세력들이 그 독점권에 도전하려면 극동으로 가는 새 길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한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 노력의 한 가지 결과가 아메리카의 발견과 정복이었다.

1490년대에 교황은 당시에 알려져 있지 않던 세계를 정복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라는 칙령을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내렸다. 그러나 이 두 가톨릭 강국의 동기는 종교적 신념 이상의 것이었다. 셰퍼드 클러프 교수는 이렇게 논평한다. “새로 발견한 세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말뚝을 꽂자마자, 권리 주장자들은 자기들이 발견한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데 정신없이 몰두하였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개척자들은 매우 조급하게 부자가 되려고 하는 거의 비정상적인 욕심을 나타냈다. 이러한 사실은 탐험 배후의 동기와 서구 세계를 지배하는 이념을 둘 다 설명하는 흥미있는 해설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금과 개종자를 얻으려는 욕심으로 신세계를 마구 약탈하였다.

한편, 네덜란드는 다른 어떤 상업 세력도 제지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지배적인 상업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사실, 17세기중에 네덜란드에 도전할 만큼 강한 세력은 영국밖에 없어 보였다. 경제 경쟁이 격화되었다. 영국은 1618년까지 30년 동안에 선단의 규모를 두 배로 확장하였으며, 17세기 중엽에 네덜란드 상인 선단의 규모는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의 선단을 합한 것의 약 네 배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유럽의 상업 중심지는 지중해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옮겨졌다. 클러프는 그것을 “상업 혁명” 그리고 “역사상 최대의 지정학적 변동”으로 부르면서, 그로 인해 “서유럽이 서구 문화의 정치·문화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경제력”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제국 건설의 기초는 설탕과 향료만이 아니었다

1602년에 네덜란드는 상인들이 운영하던 다수의 무역 회사들을 통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후 수십년 동안, 그 회사는 일본과 자바에서 상당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외에도, 지금의 서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몰루카 제도(향료 제도)에서 포르투갈인들을 쫓아냈다. 클러프는 이렇게 말한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처럼, [네덜란드]도 동양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기를 원하였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무역은 이윤이 매우 많아서, 17세기 무렵에는 네덜란드인의 일인당 부의 수준이 서유럽에서 가장 높게 되었다. 암스테르담은 서구 세계의 재정 및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23면 네모 참조.

덴마크와 프랑스도 비슷한 회사들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것이자 그후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1600년에 설립된 영국 동인도 회사였다. 그 회사는 인도에서 프랑스와 포르투갈을 제압하였다. 나중에 영국은 중국에서도 상업적 우위를 획득하였다.

한편, 서반구에서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설탕, 담배, 모피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1670년에 캐나다에 허드슨 만 회사를 조직한 후, 허드슨 만 인접 지역과 거래하면서, 태평양으로 통하는 북서 통로를 찾으려고 부지런히 노력하였다.

언론인 피터 뉴먼은 허드슨 만 회사와 그 경쟁자 중 하나인 북서 회사 사이의 싸움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시장과 모피를 차지하기 위한 기업 경쟁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권력과 영토를 차지하려는 노력으로 바뀌었다. ·⁠·⁠· 양쪽 모두 피로써 결말을 보았다.” 진짜 피해자는 양쪽 회사가 다 거래했던 인디언들이었다. 뉴먼은 “술이 모피 무역의 지불 화폐 구실을 하였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술 거래로 인해 가정이 타락하고 인디언 문화가 황폐되었다”고 덧붙인다.a

그리하여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두 제국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그 두 제국 건설의 기초는 설탕과 향료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피도 있었다! 탐욕적인 상업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컬럼비아 세계사」(The Columbia History of the World)에서 이렇게 말하는 바와 같다.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은 상업적 관심사를 앞장서서 추구하는 자들로서 전세계의 바다를 항해하였다. ·⁠·⁠· 그러한 회사들에게는 이윤 추구 동기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사체로는 본지에서.

남을 희생시키고 이윤을 얻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중상주의(重商主義)로 알려진 경제 제도가 유럽의 사상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중상주의는] 부의 획득, 특히 금의 형태로 된 부의 획득이 국가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 따라서 중상주의 철학에서 주장하는 무역 정책은 간단하였다. 즉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며, 그로 인한 수출 잉여분을 금으로 비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 결과 흔히 극심한 불공정이 초래되었다. 모국의 이익을 위해 엄청난 금을 거두어 들인 탓에 식민지는 수탈을 당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중상주의는 자기 중심적이고 탐욕적인 태도, 즉 상업계가 처음부터 조장하였고 지금도 존재하는 영을 반영하였다.

중상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중에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애덤 스미스라는 스코틀랜드인이었다. 저명한 사회 철학자이자 정치 경제학자인 스미스는 1776년에 「국가의 부의 성격과 원인에 관한 고찰」(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란 제목으로 경제학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 스미스는 중상주의에는 반대했지만,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이윤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사람들이 개인의 이기적 이익 추구를 위해 경제 경쟁에 참여하려는 동기를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동일한 이기적 동기가 사회 전체에는 유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스미스는 자유 방임론 즉 정부가 개인의 경제 활동에 가능한 한 적게 간섭해야 한다는 사상을 옹호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고전 자본주의의 이념을 분명히 표현하였다.

오늘날 주류를 이루고 일부의 주장으로는 가장 성공적인 경제 제도라는 자본주의는 사유 재산권 그리고 이윤 추구를 위해 서로 경쟁하는 개인 및 회사간의 자유 거래를 특징으로 한다. 자본주의의 현대 역사는 16세기에 중부 및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시작했지만, 그 뿌리는 훨씬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학 명예 교수, 일라이어스 J. 비커만은 이렇게 설명한다. “‘머리’를 뜻하는 라틴어 카푸트에서 유래한 [‘자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캐피틀’이 경제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바빌로니아어 단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단어 역시 ‘머리’를 의미했고 동일한 경제적 의미를 가졌다.”

상업은 개인이나 국가의 이기적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그 본색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상업은 진실을 억압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콜린스 세계사 도해」(The Collins Atlas of World History)는 이렇게 말한다. “지도 제작자도 상업 전략에서 한몫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포로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발견은 어마어마한 부의 근원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도 제작자가 이런 정보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허락되겠는가? 세상에 알리기 보다는 경쟁자가 될 만한 세력에게 그 정보를 숨겨야 하지 않겠는가? ·⁠·⁠· 17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경쟁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문서를 발간하지 않았다.”

상업은 그보다 더 나쁜 일도 하였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상업은 대략 10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파는 사업을 하였는데, 그중 다수는 아메리카로 수송하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앨릭스 헤일리의 「뿌리」(Roots)라는 책과 1977년 방영된 그에 관한 텔레비전 드라마는 그 추악한 비극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건축 자재—어떻게 사용되었나?

인간 역사 시초부터, 불완전한 사람들은 시행 착오를 통해 배워 왔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끊임없는 연구 혹은 우연에 의해 과학적 기본 진리를 발견하였으며, 그러한 발견은 새로운 발명품에 활용되었다. 1750년에, 대영 제국은 농업 경제에서 공업 및 기계의 사용이 주축을 이루는 경제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발명품 중 일부는 신세계를 건축하는 데—마치 건축 자재처럼—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일찍이 기원 6세기 혹은 7세기경에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알려져 있던 풍차는 다른 에너지원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탐욕적인 상업은 그러한 에너지원을 안전하고 오염이 없고 믿을 만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이윤을 기꺼이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이득을 위해 에너지 위기를—고의로 일으키기까지 하면서—이용할 것인가?

10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은 광산과 건축 일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탐욕적인 상업은 그것을 악용하여 무기를 만들고 인명을 희생시키면서 무기 상인을 부자로 만드는 일을 억제할 만한 도덕적 용기를 지닐 것인가?

일찍이 기원 6세기에 중국에서 필시 사용되었을 주철(鑄鐵)은 현대 세계를 건축한 강철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탐욕적인 상업은 산업 시대가 초래하는 오염, 사고, 혼잡을 막기 위해 기꺼이 이윤을 줄일 것인가?

시간이 알려 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것들과 그 밖의 건축 자재들은 세계 혁명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였고, 이어서 그러한 혁명은 전에는 볼 수 없던 세상으로 인도하는 데 기여하였다. 본지의 다음 호에서 “산업 혁명—무엇으로 인도하였는가?”를 읽어 보기 바란다.

[각주]

a 신세계에서 탐욕스런 상업주의의 또 다른 무고한 피해자는 6000만 마리에 달하는 북아메리카 들소 떼였는데, 사실상 단지 가죽과 혀를 얻기 위해 들소들을 무참히 살육하였다.

[23면 네모]

은행업

기원전: 고대 바빌로니아와 그리스(희랍)의 신전들에서는 예탁자들이 안전을 위해 맡긴 주화를 보관해 주었음. 모든 사람이 동시에 주화를 되찾지는 않았으므로, 그중 일부는 다른 사람이 빌릴 수 있었음.

중세: 현대식 은행업이 시작됨.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신용장을 전달하는 대리인으로 여행하는 교직자들을 사용한 이탈리아 상인들이 개발함. 영국에서 금세공인들은 안전한 보관을 위해 예탁받은 것들을 이자를 받고 빌려 주기 시작하였음.

1408년: 일부 사람들이 현대식 은행의 선구자라고 하는 기관이 이탈리아, 제노바에 설립되었고, 그 뒤를 이어 베네치아(1587년)와 암스테르담(1609년)에도 비슷한 기관이 생겼음. 한 역사가는 “암스테르담 은행에서 제공한 효율적인 서비스는 암스테르담을 세계의 재정 중심지로 만드는 데 한몫을 하였다”고 말함.

1661년: 암스테르담 은행에서 갈라져 나온 스톡홀름 은행이 은행권(소지자에게 은행이 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발행하기 시작함. 이러한 관행은 후에 영국에서 완성되었음.

1670년: 런던에서 문을 연 최초의 어음 교환소는 상호간의 지불 요구와 신용 거래 문제를 해결하는 은행식 단체였음. 현대식 수표의 탄생도 이 해에 이루어졌는데, 그로 인해 은행 고객들이 예금 증서를 다른 은행으로 넘기거나 예금 잔고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게 되었음.

1694년: 주도적인 화폐 발행 은행(지폐를 발행하는 곳)이 된 영국 은행이 설립됨.

1944년: 세계 은행으로도 불리는 국제 부흥 개발 은행이 창설됨. 국제 연합과 밀접히 관련되어, 부흥 개발 계획을 위해 회원국에 재정 지원을 제공할 목적으로 설립된 전문 기관임.

1946년: “재정 협조, 통화 안정, 무역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서, 국제 수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국제 통화 기금이 설립됨.—「콘사이스 컬럼비아 백과 사전」(The Concise Columbia Encyclopedia).

1989년: 들로르 플랜을 통해 유럽 공동체가 1990년대중에 공통 화폐를 채택하고 유럽 중앙 은행을 설립할 것이 제안됨.

1991년: 유럽 부흥 개발 은행이 문을 엶. 이 기구는 동유럽의 약화된 경제를 회복하는 데 재정적 원조를 제공하기 위해 40여 개 국에 의해 1990년에 설립되었음.

[21면 삽화]

흔히 술로 대가를 지불받은 인디언들은 백인과의 상업의 피해자들이었다

[자료 제공]

Harper’s Encyclopædia of United States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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