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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치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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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치 말라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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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1
파61 12/15 465-467면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치 말라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이 자동차 운전수는 점점 기운이 빠져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는 서서 지나가는 자동차에게 손짓으로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허사였기 때문이다. 겨우 그때 한 추럭 운전수가 이 사람의 난관을 보고 정지하여 선한 「사마리아」인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이 친절한 행동은 이 곤란한 운전수의 가슴을 심히 아프게 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여! 이 많은 통행인 중에서 정지하여 도와준 사람이 「왙취타워」 사람이어야 하다니!』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추럭에는 「왙취타워」 이름이 써 있었고 「부룩크린」의 협회 직원이 운전하였던 것이다.

증인들은 선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으로써 부러워 할만한 소문을 세워왔다. 「부루노 틀하임」 교수는 최근 발간된 『인정 있는 마음』(1960년)이라는 책에서 그가 독일의 수용소에서 경험한 것을 말하는 중에서 증인들을 『모범적 동지들 . . . 다른 수감자들을 학대하거나 비난하지 않은 유일한 수감자의 집단』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증인들을 칭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가? 왜 이렇게 의견이 틀리는가? 그 이유는 증인들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확히 기록하였고 동시에 이웃을 사랑치 않으면 안된다고 표시하여 있다.

이처럼 한편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경고를 받고 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그의 천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신 일도 없었다.—요한 1서 2:15; 야고보 4:4; 요한 17:9, 16; 18:36.

그러나 이와는 반면으로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며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도록 교훈을 받고 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이웃만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치 않을 수 있는가? 이웃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그들은 『세상』 『조직 제도』 조직 혹은 마련된 것과 그 조직을 구성하는 각자 개인과를 구별하는 것이다.—누가 10:27; 갈라디아 6:10.

예를 들면 미국에는 2대 정당, 즉 공화당과 민주당이 있다. 충성스런 공화당원은 결코 민주당을 위한 운동이나 민주당을 선거하거나 또는 공화당을 대적하는 운동에 조력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이 세력을 잡는다 하드라도 정치적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들과 친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자기 정당에 충성하기 위하여 이런 짓은 아니할 것이다. 그렇다고 세관의 관리가 민주당원이라 하여 세금을 안물지는 않을 것이다. 또 이웃 사람이 민주당원이라 하여 그의 집에 불이 났는데 돕지 않는다든가 매매와 같은 거래를 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그는 민주당의 정치적 제도와 그 제도를 구성하는 개인 즉 이 경우에서는 그의 이웃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본을 세우심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봉사하실 때 둘을 확실히 구별하셨다. 「사단」이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자기의 세상 즉 모든 왕국을 주겠노라고 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다.』 후에 「바울」이 말한바와 같이 「사단」이 『이 조직 제도의 신』이라는 것을 그는 인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사단」이 그에게 「관계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조심하신 것이였다.—마태 4:10; 고린도 후 4:4, 신세; 요한 14:30.

그 세상을 「사단」의 조직 제도가 되게 한 것은 주관하는 자가 「사단」인 것 뿐만 아니라 지배하는 요소가 「사단」의 영향을 받고 그의 명령을 좇은 까닭이었다. 그러면 이 지배하는 요소란 무엇인가? 정치 상업, 거짓 종교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셋 전부로부터 구별하여 떨어져 계신 것이다. 그는 그 당시의 정치와 결합치 않으셨다. 그는 「로마」정부와 운명을 같이 하기를 거절하셨고 심지어 그 정부의 대표자였던 「헤롯 안디파스」를 『저 여우』라고 부르신 일이 있다. 「가이사」와 합작하시지 않고 오로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신 것이다. 자기 백성들이 와서 자기를 왕으로 삼고자 하였을 때에도 그는 그것을 허락치 않으셨다.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누가 13:32; 20:25; 요한 6:15.

또한 돈을 쌓음으로써 상업에 휩쓸려 들지도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지상에 재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 하시고 또 자기가 진리를 값없이 베풀은고로 제자들도 무료로 봉사하도록 타이르셨다. 사실상 그는 물질적 소유품에 관심이 거의 없었는고로 자기 『머리 둘 곳』도 없었던 것이다.—누가 9:58.

「사단」 조직 제도의 종교적 요소와 타협하시기 커녕 그는 종교 대표자들을 대담하게 꾸짖으셨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느니라. 예수께서는 연합신앙을 주장치 않으셨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 .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라고 설명하신 것이다. 정치, 상업, 거짓 종교로 구성된 「사단」의 조직 제도인 당시의 세상을 예수께서 사랑치 않으신 것은 매우 뚜렷하다.—마태 23:29; 요한 8:44; 마태 9:16, 17.

그러나 그는 그의 이웃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사단」의 세상으로 인하여]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호소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 9:36; 11:28-30.

자기 아버지에 관한 진리와 아버지의 천국 복음을 무엇보다도 첫째로 전도하심으로써 이웃 사랑을 보이셨다. 삼년 이상을 그는 「팔레스티나」, 즉—「갈릴리」, 「유대」, 「베뢰아」등지를 걸어다니시며 「유대」인 교회에서 또는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혹은 가정과 산상, 또는 바닷가에서 전도하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전하는 소식에 무게를 가하기 위하여 그는 각종의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수 많은 사람을 먹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자를 일으키기까지 하시였다. 참으로 그의 생존시에 나타내신 이러한 이웃 사랑을 보인 사람은 그 전이나 그 후로 지상에 산 일이 없다. 이중에서도 가장 큰 표현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 생명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시의 세상이나 악한 제도를 사랑하셨는가? 아니다! 그의 이웃을 사랑하셨는가? 그는 참으로 사랑하셨다!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아니다!

독자의 대부분은 예수 당시의 「유대」교가 기독교국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예수 이후로 세상은 바꾸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사단」은 이 세상의 신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지배 요소도 정치, 상업, 거짓 종교로 되어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이 기독교국이라는 명칭을 갖었다 하여 세상이 그리스도인다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법과 원칙과 그의 뜻, 그리고 천국을 인식지 못하는 세상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다울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태 12:30.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부패한 정치로 악취가 나는 국가나 주나 도시의 정부의 일부분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런 부패가 폭로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거의 없다. 특히 1961년 3월 「아트렌틱」 잡지에 기재된 『「보스톤」의 더러운 금전』이라는 기사가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종교심 깊기로 유명한 이 도시에서 부패에 무관심한 것이 최고 기록에 달하고 있다. 정말로 심각한 그리스도인은 이런 삐뚤어진 정치와 아무런 관련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법이다.—고린도 전 15:33.

근본적으로 정직하지 않고 무정한 오늘날의 상업에 그리스도인 다운 점이 어디 있는가? 최근에 미국의 한 큰 회사의 중역이 수백만불에 돈을 타인과 정부로부터 속여왔는고로 투옥당한 일이 있다. 큰 사업가는 이익을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한다. 즉 춘화도(春畵圖)로 된 향락이나 폭행으로 청년들을 부패케 한다. 상업은 직접, 간접의 뇌물을 가지고 정치가를 부패시킨다. 또 매춘부를 채용하는 것으로 가정 가진 남자를 부패하게 한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알맞는 경고를 하였다. 『돈을 사랑함이 일단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 전 6:10.

기독교국의 일반 종교는 어떠한가? 그들이 부패한 정치가들과 무자비하고 거짓에 찬 상업과 협력한다는 것만으로도 저주받을 이유가 풍부하다. 종교단체가 수로는 늘어가지만 사회의 도덕은 나날이 타락하여가고 그들의 모순된 신조도 더욱 혼돈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갈리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기독교국은 여러 교파로만 나누어졌을뿐 아니라 각 교파가 20여가지 파로 분열되어 서로 조화하여 나가지 못하는 것을 딱하게도 증명하고 있다.—고린도 전 1:13.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헌신한 신중한 그리스도인은 이같은 「사단」의 세상에 일부가 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설비 등을 사용하고 그것으로부터 얻은 유익에 대하여 값을 지불한다. 그렇다고 그것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동료의 한 사람처럼 세상의 욕심, 야심, 미혹, 유혹 등으로 빨아 들이켜지지 않을 것이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갔다고 「바울」은 말하였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이 사랑스러운 제자의 충고를 들을 것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디모데 후 4:10; 요한 1서 2:15-17.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그렇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단」이 조정하는 조직 제도와 거기에 사로잡힌 개인, 즉 동료 인간과를 구별한다. 그는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한다. 사실 이웃이 자기에게 행하여 주기 원하는 바를 이웃에게 행하는 것이다. 이 문장 처음에 말한 「추럭」 운전수와 같이 그는 경우에 따라 자기 이웃을 곧 돕고자 한다.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과 같이 그는 곤란에 빠진 자를 돕고자 노력한다. 기회 있는대로 모든 자에게 선을 행하라는 명령을 듣되 특히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누가 10:30-37; 갈라디아 6:10.

이 세상과 벗이 되지 않도록 애쓰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이점에 부족하게 될 때가 있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헌신한 고로 그리스도인 전도인으로써 남에게 영적으로만 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물론 영적인 도움이 가장 중요한 도움이기는 하나 이웃이 물질적이나 육적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도울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다만 감상적이 되어서 극단으로 흘러서도 안될 것이다.

그렇다. 자기 역량과 타인의 궁핍에 따라 물질적 도움을 베풀도록 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오늘날 세상에서 정의를 사랑하는 자들이 영적으로 매우 궁핍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성호, 말씀, 목적, 그리고 그의 뜻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이 영적 궁핍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근면한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을 보이는 최상의 길이다. 왜냐하면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 . .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전도 7:12.

그리스도인이 비난과 무관심한 태도 등을 무시하고 어떤 기후라도 정규적으로 호별방문을 하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영생을 배우도록 남에게 권하는데는 많은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세상을 사랑한다면 이런 일 전부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 아니다!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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