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사는 것—꿈에 불과한가?
남‘아프리카’의 아름다운 농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언덕 위에서 한 무리의 뿔닭이 노닐고 있다. 갑자기 그 무리에 큰 혼란이 일어난다. 두 마리의 검은 독수리가 미친듯이 꼬꼬댁거리며 피할 곳을 찾아 허겁지겁대는 뿔닭들의 위를 날아다니다 내리덮친다. 독수리 한 마리가 뿔닭 한 마리를 죽여 식사를 즐기기 시작한다. 뿔닭 몇 마리가 평온을 되찾고 다시 돌아와 부근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동료의 죽음에는 무관심하다.
모든 동물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려고 하지만, 보통 동료의 죽음에는 별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다. 사자나 다른 육식 동물이 영양을 잡아먹어도 나머지 영양의 떼는 가벼운 반응을 일으킬 뿐이다. 그러한 일은 현존하는 생사의 순환 과정의 평범한 한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의 경우와 얼마나 현격한 차이가 있는가! 동료 인간의 죽음을 보는 것은, 죽음에 무감각해진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외상적 충격을 주는 경험이다.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압박감을 주는 일들 중 하나이다. 그것은 유족의 자살을 유발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자살이 증가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광포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류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서가 대 “원수”라고 부른 사망을 면하려 한다.—고린도 전 15:26.
불로 장수약
여러 세기 동안, 연금술사로 불리는 사람들은 불로 장수약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것은 사람들의 영원한 삶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여겨진 신비의 물질이었다. 오랫동안 많은 연금술사들은 이러한 불로 장수약을 꿈꾸며 찾아다녔다. 그러나, 연금술사들이 실패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근년에 개선된 위생학, 의학 및 기타 요인들로 인해 평균 예상 수명이 상당히 늘어났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인류의 평균 예상 수명은 1900년에 30세이던 것이 오늘날에는 60세가 족히 넘음으로 배 이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현대 과학자들이 생명을 연장하는—심지어 끝없이—비결이나 비결들을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독자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사람들이 그 점에 있어 무엇을 바라든지 간에, 수천년 전에 진술된 다음과 같은 진리는 여전히 적용된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의심의 여지없이 독자가 관찰해온 바와 같이, 80이 넘도록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로한 많은 사람들은 단념하고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생에 깊은 애착을 갖는다. 사실, 연로해지면서 그들의 관심사들은 증가할지 모른다. 그들은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들은 죽게 된다. 정상적이고 꽤 건강한 사람들에게, 죽음은 원치 않는 것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100세가 넘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나는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고 싶지 않다.”
성서는 동물들을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인간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한다. (베드로 후 2:12; 전도 3:10, 11) 바꾸어 말하면, 동물들은 영원히 살게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인간은 영원히 살게 되어 있었다. 첫 인간 부부는 죽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비교 창세 2:15-17.
사실상, 독자의 두뇌가 이 점을 증명한다. 인간의 두뇌는 지식을 수용할 거대한 용량을 가지고 있지만, 현 생애에서는 적은 부분만이 사용된다.
이 모든 사실은 현존하는 생사의 순환 과정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셨던 것이 아니며 영원히 사는 것이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 주지 않는가? 참으로 가슴 설레이는 생각이다! 그러면, 진짜 불로 장수약이 있는가? 독자도 영원히 살 수 있는가?